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몽중인

  • 작성일 2005-05-24
  • 조회수 415

몽중인

 
 :주  제
 꿈은 행복하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날 때 우린 진실로 사랑을 시작하지 않을까.

 

 

1. 통보

 

'요스케가 죽었다'
 도쿄에서 온 메일의 내용은 그렇게 간단명료했다.
 끼익. 길게 늘어지는 의자의 비명을 뒤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라이
 터를 찾아들었다. 은빛의 나신이 처연한 녀석이 삐뚜룸히 문 입술 끝에
 서 확 불꽃을 뿜었다. 순식간이었다. 들이쉬는 숨에 반짝이던 '요스케=
 상용, 당신의 친구가' 란 깨알같은 문구는 내쉬는 숨에 후두둑 떨어져 내
 렸다. 자신은 담배를 끊었노라고, 우유가 해독작용이 있으니 마셔 보라
 권하던 서글한 눈매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며칠을 마주한 얼굴일 뿐
 인 어느 재일 교포 청년. 말을 않고 있으면 화난 얼굴이라 으레 오해를
 사곤 하는 내게 다가와 '정이 깃든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살갑
 게 말을 건네던 바랜 선홍빛의 입술.
 생각하면, 암갈색의 따듯한 눈동자와 표정이 풍부한 야윈 얼굴이 섬세하
 다는 이미지를 주는, 그래 단순히 보여지는 이미지 외에는 아무 것도 서
 로에 대해 알 수 없는 관계였었지만.
 손잡이의 나사가 헐렁이는 무릎 가의 서랍을 열었다. 왜소한 어깨가 펼
 쳐진 한 장의 흑백사진이 이면지 뭉텅이 속에서 딸려 나왔다. 언제 찍은
 것인지, 언제부터 서랍 속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유일한 그의 사진
 이었다. 지난번 대청소 때 발견해서 차마 버리기는 껄끄러운 마음에 박
 아둔 그 한 장. 잠시 매끄러운 사진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려
 보던 나는 재떨이 대용의 유리컵 속으로 사진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반
 쯤 타들어 입술에 걸려있던 담배도 휙 던져 넣었다. 요스케의 둥근 뒷모
 습이 파르르 떨리며 화르르 사그라들었다. 망자의 물건은 태우는 법이니
 까. 나는 마치 누군가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며 다시 컴퓨터 화
 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일은 극적인 첫줄과 달리 평이한 사연이 뒤를
 이었다. 요스케가 생전에 당신의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고, 한번 만나보
 고 싶었는데 이런 글로 첫 인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리고 미안하
 지만 도쿄로 와주지 않겠느냐는 맺음말 밑에 적힌 낯선 전화번호 하나.
"대체 왜?"
 생경한 물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불쑥 튀
 어나온 내 목소리는 차갑고 탁했다.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요스케가 삼
 일 동안 나와 나누었던 말과 행동들이 그 21살 청년에게 무슨 의미가 되
 었단 말인가. 나는 도쿄로 와달라는 부탁의 말을 되풀이해 읽었다. 벌써
 항공권을 예매하고 돈도 지불했다라고. 만성적인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툭툭 두드리면서 습관적으로 책상 위에 널브러진 담뱃갑을 집었
 다. 알싸한 박하향이 풍기는 빈 갑. 제기랄, 쓴 입맛을 다시면서 나는 풀
 기 없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추욱 늘어뜨렸다. 구겨진 종이로 가득한 방
 바닥 위에 '발리 3박4일 환상의 패키지' 광고지가 나와 눈을 맞췄다. 하
 아, 가벼운 한숨이 터졌다. 왠지 모르게.

 

2. 만남


 거대한 철골 뼈대를 가진 짐승을 연상시키는 새벽의 나리타 공항은
 서늘한 한기가 돌았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나와 같은 항공편에 도착한 사람들 사이로
 바삐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내 눈에 시뻘건 글씨로 서툰 한글로 쓰여진 커다란 현수막
 하나가 들어왔다.
[ 수현 씨, 일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나는 커다란 현수막을 엉거주춤 들고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문득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현수막을 버겁게 들고 있던 그의 다소 냉랭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천천히 그가 내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토하듯 그의 이름을 입술에 올렸다.
" 리다 상?"
 내 물음에 대한 답으로 그의 하얀 손이 불쑥 내 앞에 내밀어졌다.
" 일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수현...씨."


"제 이야기, 요스케가 하지 않던가요?"
 리다라고 이름을 밝힌 청년이 퍽 유쾌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
 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는 아무 말
 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피곤했다.
"그렇군요. 하긴, 우리 떠벌릴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리다의 모습에,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요스케의 가족이 아닙니까?"
"가족이요? 쿡,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뭐, 요스케가 원했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지요."
 요스케가 원했다면,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면서 뭐가 그리 우스운지 리다
 가 킥킥댔다. 나는 반쯤 불쾌한 기분으로, 또 반쯤은 호기심에 차 산만하
 고 정신없어 보이는 눈앞의 청년을 훑어보았다. 갓 염색한 듯 너무나 진
 한 검은 머리칼, 수수한 옷차림, 그리고 엷게 분을 바른 날카로운 생김새
 의 얼굴. 거기까지 보았을 때, 나는 문득 그가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
 을 했다. 언뜻 떠오르지는 않지만 내 기억 속에 자리한 어떤 흐릿한 얼
 굴 하나가 눈앞의 리다와 겹쳐졌다. 그러나 곧 내 상념은 리다의 손짓에
 깨어졌다.
"가죠"
'어디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물음을 삼키며 리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리다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교토, 교토로 갑니다."
"내가 요스케와 만났던 곳이군요. 하지만 거긴 왜?"
 나는 정말 알 수 없다는 의문을 가득 담은 얼굴로 리다를 보았다. 리다
 는 뭔가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내 표정을 지긋이 응시하다가 풀썩 웃었
 다. 그리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군요. 저도 , 당신도 모르는 거군요. 말하자면 음, 그게 뭐죠, 유
 언? 그게 아니라..."
"유지. 요스케의 생전의 생각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아아, 그래요. 유지... 요스케는 교토에서의 며칠이 가장 행복했었다
 고, 언젠가는 그곳에 수현씨 당신과 다시 가고 싶다고 했었어요, 종종 질
 투가 날 만큼 행복한 얼굴로 이야기하곤 했죠. 그러더니 그 바보 자식,
 교토에 다녀오겠다고 전화하더니 다신 돌아오지 못했죠."
 나는 욕설이라도 퍼부을 듯한 표정으로 얌전히 '못했죠'라고 말하는 리
 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내내 느끼고 있던 묘한 위화감이 질
 척거리며 등줄기에 달라붙는 느낌. 나는 휙 몸을 돌려 앞서 걷는 리다의
 뒷모습이 문득 요스케 같다는 생각을 하고 흡, 숨을 들이켰다. 섬광같이
 밀려든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의문들을 하나의 형
 체로 배열해 갔다. 삼일 동안 나와 요스케는 교토에서 연인이 되었다. 조
 건은 두 가지였다. 섹스는 하지 않을 것, 그리고 서로에 대해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않을 것.
 그리고 내 앞에 지금 그 요스케와 닮은 한 남자가 등을 보이며 걷고 있
 는 것이다. 그는 요스케의 연인이었을까? '가족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
 을 떠올리며 나는 설래설래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것이 맞는 추리라고
 해도 여전히 리다가 나와 교토행 열차를 타려하는 이유는 알 수 없는 것
 이다. 나는 또다시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골치 아픈 생각은 잠
 시 접어두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교토로 가면 알게 되리라. 그렇게 마음
 먹은 나는 슈트케이스를 질질 끌며 리다의 뒤로 걸음을 떼었다.

 

3. 동행

 

 교토의 겨울은 나른하다. 총총 좁은 걸음을 옮기는 게이샤들의 흰 얼굴
 만큼 못 견디게 흐드러진 공기. 교토고쇼, 니조성 등의 관광지를 하릴없
 이 거닐다가 들어온 여관에 들어앉아 앙상한 정원의 나무를 멍하니 보
 고 있으니, 내가 무엇 때문에 일본까지 온 것인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저
 녁 식사로 나온 순무 요리를 우물거리고 있는 리다를 홀깃 보았다. 마지
 막 한 입을 아쉬운 듯 깨작거리고 있던 리다는 내 시선을 받자 젓가락을
 내려놓고 씨익 웃었다. 교토로 향하는 신칸센에서 약 3시간 동안 시체처
 럼 창백한 얼굴로 잠들었던 일이 무색할 만큼 환한 표정이었다.
"순무 요리는 겨울이 제철이죠, 특히 교토에서는."
"요스케는 순무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되는군요."
 리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처음으로 무표정한, 아니 그보다는
 담담하다고 해야 할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번졌다.
"상용은 야끼니꾸를 좋아했지요. 저도 그와 함께 교포가 운영하는 음식
 점에서 본토의 야끼니꾸를 먹어본 적이 있죠."
 상용. 나는 리다의 입술이 또렷하게 발음한 요스케의 한국 이름을 가만
 히 입 속으로 굴려보았다. 요스케는 나와 지내는 동안 늘 자신이 한국 이
 름 '진상용'으로 불리길 원했다. 그 덕분에 리다에게서 온 메일을 처음
 열어보았을 때, 나는 죽었다고 하는 요스케가 과연 누구인가 잠시 기억
 을 더듬어야 했었지. 나는 서툰 한국말에도 자신의 이름만은 또박또박
 말하려 애쓰던 요스케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조
 그만 웃음은 곧 미친 듯이 격렬하게 변해 조용한 실내를 울렸다.
 리다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
 다. 웃는 뺨 위로 마침내는 창피스럽게 몇 방울의 눈물도 흘러내렸다. 배
 가 너무 아파서 인상이 절로 찡그러질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리다는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
 다가 이내 히죽 웃어 보였다.
"상용... 진상용, 실제로는 한 번도 이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어요. 그냥
 혼자 중얼거리곤 했죠. 제 발음이 웃긴 편인가 보죠?"
"좋은 발음인데요, 그나저나."
 졸지에 리다의 한국어 발음을 비웃은 꼴이 되어버린 나는 쓰게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피곤한 여행 준비, 신칸센을 타고 오는 3시간 동안은
 줄창 리다가 조는 모습을 보고, 지금은 교토의 관광지를 둘러보다 여느
 팔자 좋은 관광객처럼 온천이 딸린 여관에서 느긋한 식사를. 얼떨결에
 끌려온 교토이건만 일본에 도착한 지 거의 하루가 다 되어 가는 이 시점
 에서, 아직 아무 것도 알아낸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리다의 분 바른 얼
 굴이 꼭 언젠가 극장에서 보았던 가부키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꾸만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망상을 잘라내려 애쓰면서 리다를 똑바로
 응시했다.
"웃긴 일이지만 이제야 묻게 되는군요.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 왔습니
 까?"
 리다도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맷부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슨?"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완전히 당황해서 리다의 담담한 얼굴을 정신없
 이 바라보았다. 리다가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며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
 만, 그리고 짐작하셨을 지도 모르지만 저는 생전의 요스케를 사랑했습니
 다. 아니, 지금도 사랑한다고 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고백해야 할 대상이 눈앞에 없는데도 가만가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
 는 리다의 음성은 형편없이 떨렸다. 나는 그런 리다를 보면서도 웃지 않
 았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묘하게도 일종의 숙연함 같은 것을 느끼는 자
 신을 깨달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느 사인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얼굴을 들어 리다가 나를 보았다. 그가 미소를 짓는 것
 이 무의식적인 행동일까. 리다의 일그러진 입매가 나를 향해 웃는 듯, 우
 는 듯 떨렸다. 나는 리다의 미소에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끼며 고개를
 떨궜다. 후우, 호흡을 진정시키려는 듯 리다가 가벼운 심호흡을 했다. 그
 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것은 정중한 부탁이었다.
"함께 요스케를 보내주시겠습니까?"
 나는 문득 조금 전 웃으며 흘린 눈물이 차다고 생각했다.

 

4. 이별

 

"함께 요스케를 보내주시겠습니까?"
"네."
 골치 아픈 일은 질색. 나는 신경 쓰이지 않게 적당히 즐겁게, 적당히 행
 복하게 인생을 살아왔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나는
 버스 차창에 뺨을 대고 졸고있는 옆자리의 리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
 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받은 항공권과 교토행 티켓을 배상하
 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발리로, 홍콩으로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는 것을 선택한 것도 분명히 내 쪽이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
 서? 나는 가물거리는 기억 속의 요스케를 떠올리며, 눈물 자국이 선명
 한 얼굴로 잠든 리다를 보았다.
 그는 요스케를 잊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결심을 했을 때 떠오른 것이 요
 스케가 종종 말하던 나였다고 말이다. 교토에서의 3일간의 연인. 이 우
 스운 여행의 동행자가 된 것은 단순한 연민 때문일까. 모르겠다. 나는 리
 다를 만난 후, 부쩍 잦아진 한숨을 흘리며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삐익-
 요란한 소리에 부스스 잠에서 깬 리다가 멍한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나는 그런 리다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먼저 몸을 일으켰다.
"금각사에 도착했습니다. 내리지요."
"네에"
 맥없이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리다에게 나는 요스케처럼 환히 웃
 어주었다. 물론 그에게도 그렇게 보였을까는 의문이지만.

 평일의 금각사는 한산했다. 꽃 같다 감탄하며 보았던 지난해의 설경은
 없었지만, 한산한 경내는 두 번째로 이곳을 찾는 내게 친근함을 던져 주
 었다. 경내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기운을 되찾은 리다는 웃는 낯으
 로 조그만 탑 앞으로 걸어가 섰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왔었어요. 그 때 요스케가 말했죠.
 여기 금각사 금박을 조금만 떼다가 팔자고, 들키지 않을 거라고. 쿡쿡"
 나는 마주 웃으면서 리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성공했습니까, 그 범죄는?"
"아니, 제가 결사적으로 뜯어 말렸어요. 정말 그 시절의 요스케는 말로
 내뱉은 건 아무리 허무맹랑한 거라도 일단 다 저지르고 보는 녀석이었으
 니까."
 리다가 돌아보며 웃었다. 나는 그제야 웃고 있는 리다의 눈가에 첫 대면
 에서 보았던 것 같은 약한 경련이 이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던 그 질척이는 느낌의, 묘한 위화감의 정체가 이것이었
 나.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그는 필요 이상으로 무리를 하고 있었다. 나
 는 왠지 모르게 서글픈 감상에 젖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다가 빤히
 내민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나는 이런 친절을 베푸는 데 익숙
 치 못한 인간은 못 되었다.
 스스로 느끼는 어색함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요스케와 연인이 되면... 이런 상상 속에서 당신은 항상 그와 손을 잡
 고 이리저리 거리를 걷는다고 했죠? 대용품이라도 좋다면 어때요?"
"틀려요."
 무표정해진 얼굴로 리다가 대답했다.
"전 요스케와 팔짱을 끼고 싶다고 말했었는데요."
 리다가 조용히 웃으며 내 말을 정정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멀거니 보았다. 조금 다가오는가 싶더니 리다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왼팔
 을 내 오른팔에 끼워넣었다. 그 손길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
 다. 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조용히 미소지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그 어정쩡한 자세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였다. 말의 홍수가 난 것처럼 리다는 요스케에 관한 이야기
 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 요스케와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였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내 옆에
 그 녀석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그런 존재였지요..."

 나는 담담한 그의 옆모습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경내에
 핀 꽃에 시선을 돌렸다. 그를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될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 탓이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 수 없지만.
 내 그런 기척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다의 이야기는 조곤조곤
 이어졌다.

"요스케와 내가 막 고교에 진학했을 때, 제 동생 교코가 갑자기 그러더
 라구요. 요스케 오빠가 좋아졌어. 도와줄거지? 라고. 그 때 알았어요.
 아, 좋아하는구나. 알고 나니까 너무 무서운 게 그 녀석이 날 경멸하면
 어쩌지? 평생 날 안보겠다고 하면 어쩌지? 낯선 여자와 섹스를 나누고
 연인이 되고, 나와 만나는 시간이 줄어가고, 상상만 해도 모든 게 다 끔
 찍했어요. 맘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죠. 차라리 교코와 요스케가
 결혼을 한다면, 평생 이 마음을 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 수 있다면. 나는 지금처럼 요스케와 지낼 수 있다.... 라고. 친
 구로 남을 수 있다고. 그리고 정말 가족이 될 수도 있었죠."
 리다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십년이 넘었었어요. 그 녀석과 친구로 지낸 건... 당연히 저희 부모님
 도 요스케를 잘 알고 있었고... 잘 대해 주셨죠. 그런데 막상 교코가 요스
 케와 약혼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내니까 딱 잘라 반대하시는데... 이
 유가... 피가 더럽다... 였어요. 더럽대요. 하하... 하하하"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던 리다가 발작적으로 웃어댔다. 그리고는 갑자기
 뚝 웃음을 그치고 낮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인간은 자길 낳아준 부모에게도 살의를 품을 수 있더라고요."
 나는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심정으로(내가 타인의 고통에 이 정도로 반
 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리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천천
 히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리다, 요스케가 내게 한 말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나에 관한 건가요?"
 리다의 물음에 나는 애매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요스케와 내가 처음 만난 날이었던 걸로 기억나
 는데 그가 그러더군요. 자긴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면서 꿈도, 현실도 분
 간하지 못하며 살았다...라고. 그래서 난 그가 뭔가 인생의 첫 좌절 같은
 걸 겪었구나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불쑥 묘
 한 제의를 해왔지요. 3일 동안 연애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남자에는 흥
 미가 없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무척 진지하게 말하더군요. 자신이 지
 금까지 꾼 꿈을 떨쳐버리는데 필요한 연습이라고요. 어떻게 생각해요?"
"......"
 리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낯선 땅이었고, 그와 나는 섹스와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을 금지하
 는 조건도 달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 교토 이곳저곳을 3일 동안 돌
 아다녔어요. 우린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또 금새 그걸 잊어버렸고, 헤어
 지는 날에는 서로 배웅도 하지 않았지요."
"요스케가 꿈을 꾸었다고 했다고요...?"
 마침내 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눈을 줄곧 응시하면서 씨
 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깨어났습니다. 또 이제야 돌아보는 일을 할 수 있다고도 했지
 요."
"요스케가... 그 녀석이..."
 목이 메인 듯 리다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후 나와 그
 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경내를 거닐었다. 교토에서의 두 번째 밤이 다가
 오는 때였다. 캄캄해진 경내를 소리 없이 걸어 입구로 걸어 나오던 중 리
 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 목소리가 밝아졌다고 느낀 것은 나의 착각이
 었을까.
"요스케는 우리가 타고 온 신칸센에 치여 죽었어요. 누군가는 발을 떠밀
 렸다고 하고, 또 다른 목격자는 요스케가 스스로 열차에 뛰어들었다고
 했지요. 아주 오래 요스케를 알아왔지만 사고가 일어났을 땐 정말 멍해
 져서...결론을 내릴 수 없었어요."
"자살이라고 생각해요?"
 리다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단호함이 깃든 얼굴이었다.
"아니, 자살을 할 녀석이 아닌걸요. 지금 생각해보니 전 그동안 요스케
 를 그 만들어진 꿈속에 안주시키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뭔가 이제 마
 음이 좀 편해지네요. 수현씨, 요스케는 당신과 있을 때 웃는 얼굴이었나
 요?"
"네, 항상. 떠올려보면 웃는 얼굴 외에 기억나는 게 없을 정도로요."
"그렇군요. 그럼 됐어요."
 그리고 리다는 줄곧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공기는 맑고, 별은 밝은 밤이었다. 나는 리다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요스케. 입 속으로 그 이름을 굴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야 생각하게 되었다.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하던 때의 요스케의 얼굴을, 그리고 리다에게 말
 은 안 했지만 어렴풋이 그때의 요스케가 한 많은 말들이 정작은 리다에
 게 하고픈 말이 아니었을까 말이다.
 열 발자국 즈음에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는 반대편으로 걷고 있는 리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역으로 가는 것이리라. 나는 가슴 한켠이 싸해지는 느낌에 가만히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와 은빛 지포라이터를 꺼내들었다. 화악. 어둠 속에서
 조그만 불꽃이 일었다. 나는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잊은 채
 로 한참을, 요스케가 직접 새긴 듯 삐뚤삐뚤한 글씨가 우스운 그 한 줄
 을 되풀이해 읽었다.
'당신의 친구가'
 나도 모르게 피식 김빠진 웃음이 터졌다. 문득 손안의 작은 온기가 지금
 의 내게 너무나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스케의 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