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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소설] 빗물로 그린 몇개의 삽화

  • 작성일 2005-06-19
  • 조회수 433

빗소리는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이런 비속을 걷는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리라. 예은은 아침의 일기예보를 가볍게 들어 넘긴 자신의 준비성 없는 성격이 못내 아쉬어 졌다. 퇴근 시간을 넘어서도 조금의 꺽임도 없는 비의 기승이 예은의 발길을 아직도 사무실안에서 머 물게 했다. 윤선배가 같이 가자고 했을때 같이 나갈것을 그랬나.... 하지만 예은은 금방이 라도 비가 그쳐주리라는 막연한 기대에 선배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아 사무실의 창을 통해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그쳐 주리라는 기대보다는 오히려 말많은 선배의 관 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다는 뒤늦은 생각에 피식하고 웃어 보았다. 모두가 퇴근해 버린 사무실의 분위기는 흡사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사무실 가득 흐르는 습기 먹은 공기가 무언가를 금방이라도 터트려 버릴듯 긴장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하 고 있는 커피 포트에서는 한참 전부터 수증기를 내 뱉으며 물이 끓고 있었지만 예은은 커피를 타기위한 다음 행동은 하지 않았다. 사무실의 긴장감이 주는 묘한 떨림이 커피의 따스함으로 인해 산산히 부서져 버리리라는 생각에... 다시 시선을 거두어 어두운 창밖을 향해 보았다. 미세한 생물의 움직임처럼 아주 천천히 고개와 눈의 방향을 동시에 돌리니 창밖의 풍경은 오랜기다림을 겪은 수줍은 처녀처럼 그렇게 다소곳이 예은의 시야에 들어 왔다. 어두운 빌딩 숲 사이에 소리없이 조용히 내리는 비의 풍경을 그리던 눈에는 현란 한 도시의 네온사인 불빛과 급히 오가는 젊은 남녀들의 부산한 움직임만이 들어올 뿐이 었다. 우산을 들고 요란한 속도로 내리 꼿는 굵은 빗방울 사이로 물이 튀는 것을 조심스러 워하면서도 갈길을 서두는 사람들의 발밑에서 얼룩지는 빗방울의 흔적들을 보았다. 비가 오면 버릇처럼 김치전과 막걸리를 떠들어대던 동창의 전화를 받고 쉽게 거절을 하지 못해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퇴근 시간이 다되어도 그치지 않는 비를 바라보다 예은은 갑자기 다이얼을 돌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야근을 핑게로 댄 예은은 투덜대는 친구의 전화를 서둘러 끊어버리고 일을 마무리 했다. 하지만 퇴근을 위한 일련의 행동들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일찍 퇴근할 마음도 없었거니와 내리는 빗속을 용감히 걸어갈 만큼 집안에서의 할일도 생각이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바람과 함께 무섭게 내리는 빗속을 비닐 우산하나에 의지해 퇴근길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혼자 사무실에 앉아 그저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다시 한 구석에서 이제는 다 증발해 버려 무언인가 타는 듯한 냄새를 풍기는 커피 포트의 좁은 주둥이를 바라보았다. 다시 물을 붓고 온도의 강약을 조절하고 커피잔을 챙겼다. 비오는 날이면 늘 블랙의 커피를 한잔 앞에 놓고 분위기 있는 음악에 귀를 마음껏 열어놓고 힘껏 들이 마쉰 숨속에 녹아 있는 커피향을 가슴가득 느껴보던 학창시절의 여유를 떠올리며 투박해 보이는 잔에 커을 넣었다. 고운 커피향을 느끼며 다시 창가의 자리로 돌아와 앉은 예은은 문득 지금의 이 시간들이 예전의 어떤 기 억들을 같이동반해 자신에게 찾아옴을 느꼈다. 그 오래된 기억은 지금 내리는 비처럼 습한 냄새를 가진 삽화를 함께 보여 주었다. 창 유리 위에 그려진 그림은 도시의 요란한 네온사 인의 색을 군대군대 담고 있었고 그 한쪽으론 예은의 조금은 야윈 얼굴이, 그리고 희미한 영상으로 넓은 학교 운동장의 고운 모래가 비에 젖고 있었다. 비에 젖어 진흙탕이 되어버려 국민학생들의 짧은 다리를 힘껏 벌려야 건널수 있는 작은 웅덩이들이 생긴 운동장의 크고 작은 웅덩이들을 따라 가다 조회단상이 나오고 단상의 뒤로 채곡이 쌓인 낮은 높이의 계 단이 펼쳐지고 먼지 쌓인 계단의 끝을 밟아 올라가 4학년의 교실앞에서 예은의 기억은 다시 활개를 찾는다.
꽃천사 루루의 그림이 그려진 운동화가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그리고 4학년2반 이라고 씌여진 문앞에서 멈춘다. 가쁜 숨을 내쉬고 예은은 뒷문의 한쪽 곁으로 서서 조용히 문끝을 손으로 밀어본다. 열린 문 틈으로 조심히 교실안을 살펴보다 문을 닫아버린다. 교 실안의 몇몇의 눈이 뒷문사이로 내밀어진 예은의 두눈을 발견하고 이내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늘 반복되는 일들이기에 예은도 교실안의 4학년 2반 학생들도 모두 예사일로 넘어간다. 기다림에 지친 예은은 복도의 끝과 끝을 오가다가 교실문이 열리자 바로 열린 뒷문의 한쪽 면에 붙어 선다.
"꼬마왔어?"
라며 지저분한 손등 하나가 예은의 볼을 스친다. 예은은 눈과 코를 찡그리며 혀를 내밀 어 보인다.
"피--- 에----"
예은바로 위의 언니인 예숙의 짝궁인 지저분한 손등은 매일같이 예숙이를 울린다. 그래서 예은은 지저분한 손등을 싫어한다. 언젠가 한번 크게 골탕을 주고 싶어 한다. 반이상의 학생 들이 나와도 예숙은 나오지를 않는다. 좁은 문을 통해 급히 나오는 학생들 틈을 비집고 들 어가니 칠판을 닦고 있는 예숙의 모습이 보인다. 예은은 예숙의 뒤에 가서 예숙을 불렀다.
"숙이야!"
뒤를 돌아다본 예숙은 분필가루를 한쪽볼에 희게 뭍힌채 예은을 향해 웃는다. 청소를 하 는 예숙을 기다리며 창문 곁에 서 있는 예은은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을 본다.
"숙이야! 비가 더 많이와.. 어떡하지?"
예은은 늘 집에서 부모님이나 고모들이 자신의 이름과 다른 셋의 언니들을 부를때 끝자만 부르는것을 따라했다. 예숙이 자신을 은이야하고 부르듯이.... 예숙도 창가에 기대어 더 세지는 빗줄기를 원망스레 바라본다. 다른 친구들은 아침에 우산을 준비하거나 방과시간이 다 되어 어머니들이 마중을 나와 가버린 후이다. 청소를 마치고도 예은과 예숙은 계속 창 밖을 바라보기만 한다. 예은의 어머닌 그들보다 먼저 공장으로 이른 출근을 하시고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는 새벽시장엘 나가신다. 밥상을 차려놓고 출근하시는 어머님은 언니들과 예은을 깨우시고 가신다. 그러면 큰 언니인 예주가 도시락을 챙겨주고 급히 아침을 먹으면 서둘러 등교길에 나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나가는 예주가 제일 먼저 나가고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둘째 예선과 하나뿐인 아들 동준이 다음으로 나간다. 예숙과 예은은 빈그릇은 설겆이 그릇에 넣고 반찬은 뚜껑을 덮어 상보로 덮어두고 나와야한다. 늦장을 피운 예은과 예숙은 어머니가 챙겨두신 우산을 잊고 그냥 나와 버렸다. 예은은 한참후에야 우산을 잊은걸 아나
"비 안 올것같아.."
라는 예숙의 말에 그냥 등교길을 서둔것이다.
"숙이 너 때문이야."
예은은 발끝으로 셋째의 발을 툭툭 건들며 말을 한다. 예숙의 운동화에는 요술공주 밍키 그림이 그려져있다.
' 아마 후년엔 저 신발을 신게 되겠지..'
하며 예은은 발길질을 거둔다.
"예숙아! 나 먼저 갈께?"
같이 청소를 하고 남아 있던 반 친구가 어머님이 가져온 우산을 쓰고 먼저 가버린다.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예은과 예숙은 부러운듯 바라본다. 텅빈교실이 무서워 둘은 현관까지 내 려온다. 그래도 텅빈 운동장에 내리는 번개와 천둥까지 동반한 빗소리에 예은은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숙이야! 우리 그냥 비 맞고 뛰어가자..응?"
울먹이며 예은은 말한다. 예숙은 예은의 신발 주머니를 모자 마냥 예은의 머리위에 씌여 준다. 그리고는 예숙도 같이 신발 주머니를 머리에 눌러 쓴다. 둘은 뛰기 시작한다. 평소에 는 좁게만 보이던 운동장이 오늘은 왜이렇게 넓지? 뛰면서 예은은 생각을 한다.
'엄마는 이런 날 공장에 나가지 말지?'.........
"숙이야! 같이가."
예은은 예숙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든다. 그때 닫힌 교문의 샛문으로 낡은 회색의 우산이 들어온다. 아버지다. 낡은 우산 밑에서 햇볕에 그을린 피곤한 얼굴이 그들을 향해 웃는다.
"이런 아빠가 좀더 일찍 올것을 그랬구나?"
예은 급히 뛰어가 아버지의 허리에 얼굴을 묻는다.
"우와 .. 아빠 조금만 일찍오지..." .
"저런 많이 젖었구나. 감기 걸릴라."
아버지는 더 굵어지는 빗속에서 장사를 걷고 일찍 들어오시는 길이다.
"그게 아니야. ."
예은은 큰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집에까지 다와 젖은 옷을 갈아 입는데도 울음은 멈추 지를 않는다. 바보같이 우산도 안가져가고 울기는 왜우냐는 동준의 놀림 속에서도 예은은 훌쩍거린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아버지가 다른 친구들이 있는데서 마중을 나 와주지 않은것에 그저 속상해한다. 철야근무를 마치고 늦게 귀가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 을 잘때까지도 빗소리는 예은의 귀에 천둥소리와 함께 들린다. 불꺼진 방안이 번개빛에 의해 어머니의 흰 메리야스에 희미한 주홍빛의 색을 입혀주는 것을 본다.

하나의 삽화는 여기서 멈추었다. 이것이 예은이 기억할수 있는 최초의 장마였다. 예은의 심발주머니에는 2학년 6반이라는 숫자가 아주 큰 글씨로 씌여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 해지는 몇개의 삽화는 우울한 색을 가진 것이다. 장마 속에 잃어 버린 것들...... 기억의 흐 름은 원하는 곳에서 멈출수는 없는 것일까? 예은은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에 마셔 버렸다. 여전히 창밖의 빗줄기는 약해질줄 모른채 퍼부었다. 다 마셔 버린 커피잔을 바라보며 갑 자기 다가온 서글품이라니.... 잔 밑바닥은 커피의 잔여물이 흉하게 얼룩져 있었다. 비어 버린 커피잔에는 조금의 온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잔을 내려놓고 예은 두번째 삽화를 비로 얼룩진 창에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 삽화에도 예숙은 함께한다.
"너무 커! 은이야. 조금 작게 해."
식들이 모두 나가고 없이 둘이서 점심을 준비한다. 예은은 수제비를 유난히 좋아한다. 좁 은 부엌에서 예은은 예숙을 도와 반죽된 밀가루를 조금씩 잘라 고루펴 끓고 있는 냄비안 으로 밀어 넣는다. 어머니와 큰언니인 예주는 공장으로 출근을 했고 예선과 동준은 학교 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둘은 때 늦은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배가 고파 찬밥을 그냥 비벼 먹자는 예숙에게 때를 써 먼저 밀가루를 반죽할 그릇을 들고 준비를 하며 수제비를 먹자 한다. 제법 맛이 나는 냄새가 나고 끓어오르는 내용물이 작은 냄비를 좁아라하고 넘 친다.
"은이야. 가서 아버지 모셔와. 어서."
장마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장사를 나가는 날이 적어졌고 매일같이 부동산에 장기나 바 둑을 두러 나가시곤 한다. 예선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나가고 있지만 아버지의 오랜 휴식은 집안의 사정을 더 힘들게 만 한다. 술을 드시고 귀가를 하시는 일이 많아지고 안하시던 술 주정까지 한다. 우산을 들고 좁은 골목을 나서자 비가 더울 힘차게 내린다. 반바지를 입어 마른 예은의 종아리가 튀는 빗방울에 금방 젖는다. 골목을 벗어나 복덕방이 보이는 조금은 큰 골목으로 나서자 예은은 수선스런 몸짓으로 복덕방으로 달린다.달려오는 예은을 보며 복덕방 앞에 계시던 아버지의 한 친구분이 예은을 부른다.
"은이야. 얼른 와라. 너희 아빠 취하셨다. 원 저런..."
뛰던 발을 멈추어서 예은은 복덕방 안을 살핀다. 아니 살필 필요도 없이 온통 흐트러진 매 무새의 아버지의 모습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멍하니 서서 보니 몸을 가누지 못해 어떤 남자분의 부축으로 서계신다.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셔. 이자식아!"
그제야 예은은 상황이 판단된다. 만취하신 아버지가 젊은 남자와 싸움을 하시고 있는 것 이다.
"뭐? 이놈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멍하게 보고만 있던 예은의 귀를 강하게 때린다. 아버지의 무릎밑으로는 온통 젖어있다. 아마도 몸싸움도 있었으리라...
"아빠! 집에가요."
예은은 아버지의 곁으로 가 말을 한다.
"응. 우리 막내. 그래 우리 막내..."
아버지는 술냄새를 짙게 풍기며 예은의 팔을 잡아 끈다.
"집에 가."
예은은 애써 건너의 젊은 사내를 무시한채 아버지의 잡은 팔에 힘을주어 복덕방을 나선다. 그리고는 그다음 삽화는 제대로 스케치가 되질 않는다. 아마도 복덕방을 나서러는 아버지 의 뒤에서 젊은 사내가 욕을 했으리라. 화가 나신 아버지가 예은의 손을 뿌리치고 사내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으시고 둘은 이내 바닥에 뒹글며 심한 몸싸움을 한다. 우산을 팽개치고 달려가 아벼지의 팔을 잡다가 사내의 우직한 팔꿈치에 맞아 나뒹굴어진 예은은 소리를 지른다.
"누가 좀 말려주세요.."
하지만 먼저 있었던 몸싸움을 말리다 지쳤는지 사람들은 움직이질 않는다. 예은은 아버지 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어쩔줄 몰라 하다 매달리어 귀를 문다. 어른 한분이 "은이야. 다쳐. 이리와."
하며 예은을 말린다. 그때 다른 분들이 아버지와 사내를 떼어 놓았고 아버지를 복덕방 밖 으로 데리고 나간다. 뒤를 보인 아버지를 향해 사내가 다시 달려오고 아버지는 다시 길바 닥에 쓰러진다. 이제는 아무도 더이상은 아버지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젊은 사내에게 매달 려 말리고 예은을 말린다. 온통 빗물에 젖어버린 아버지와 사내, 싸움을 말리던 몇분의 어른, 그리고 예은. 모두가 센 빗줄기로 인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채 잠시 서 있다. 뒤 늦게 알고 달려온 예숙은 한쪽에 서서 울고만 있는다. 그래도 사내는 분을 이기지 못해 발 버둥을 치고 사내를 잡고 있는 어른들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간다. 아버지는 힘없이 주 저앉아 계신다. 예은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버려 빗물속에 금방이라도 녹아버릴것 같다. 그렇게 내리는 빗속에서 예은은 젊은 사내의 앞에가서 말을 한다.
"아무도 우리 아빠를 다치게 하지 못해. 나쁜 놈..."
정말이다. 예은의 심정은 정말 칼이라도찾아 사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 아빠를... 우리 아빠를..."
예은은 사내에게 매달려 울기 시작한다. 예숙이 달려와 예은을 달래고 아버지를 일으켜 세운다. 사내는 복덕방안으로 끌려가고 예은은 아버지와 예숙과 함께 집으로 향한다. 골 목으로 들어서는 예은의 귀에 한 아주머니의 말소리가 들린다.
"은이 생각보다 독하네.. 지 애비 때렸다고 저렇게 나오니... 세상에 독하네.독해."
뒤를 돌아보려는 예은을 아버지가 말리셨다.
"그만하자. 미안하구나."
하며 앞서 힘없이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비에 젖는다.

두번째의 삽화는 온통 울음뿐인 어두운 그림이다. 그때가 예은이 국민학교 6학년때의 일 이였다. 다시 커피포트의 전원을 올리고 예은은 그날 집에 가서 바보같이 울먹이던 예숙 에게 화를 내며 불어버린 수제비를 힘겹게 먹었던 모습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도 없으시고 구석에 누워버리셨다. 식구들이 모두다 들어오고 어머니가 들어와 늦은 저 녁을 드시는 밥상 앞에서도 예은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결코 그날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에 밤새 잠을 들지 못하였다. 자신과 똑같이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는 아버지의 숨소리가 방안 가득했다. 방안 가득 떠다 니는 아버지의 숨방울들을 하나씩 예은은 조심스럽게 들여마셨다. 물끓는 소리에 다시 커피를 탔다. 전의 것보다 연하게 타서 코가까이 대어 보니 금방 끓인 보리물의 냄새와 같았다. 이번엔 다 마시지 않으리라 하며 두손으로 커피잔을 보듬아 감싸 들었다. 손바닥이 뜨거웠으나 잠시 그대로 있어 보기로 했다. 잔의 체온이 손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지듯 따 스함이 좋았다. 창밖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가늘어 지자 예은은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벌써 10이라는 숫자를 지나 있었다.
"이 정도의 비야..."
예은 입에 대지도 않은 커피잔을 가만히 창가에 내려 놓았다. 창에 그려진 피곤한 얼굴의 아버지 앞에... 낡은 우산을 들고 예은을 기다리시던 그 모습 그대로 창에 그려놓고 사무실 의 문을 향해 뒤를 돌아섰다. 빌딩을 걸어나오니 온 도시가 습기가 묻어 있었다. 하늘은 금 방이라도 다시 폭우를 뿌릴 준비를 하는 듯 무겁게만 느껴졌다. 서두를 필요도 없이 천천 히 전철역으로 가는 예은의 발밑으로 빗물이 깔려있었다. 발밑의 작은 웅덩이 속으로 예은 의 모습이 빨려 들어 갔다가 걸음을 옮기니 일그러진 모양으러 힘겹게 빠져 나왔다. 전철 에서 내려 집앞 골목을 들어서는데 빗줄기가 다시 강해졌다. 창문을 통해 자신의 방을 바 라보니 창을 통해 불빛이 새어 나왔다. 늦은 귀가를 하는 예은을 위해 어머니는 항상 방에 불을 밝혀두셨다. 주무시는 어머니가 깨실까봐 항상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지만 늘 어머 니는 현관을 들어서는 예은보다 먼저 방문을 열고 나오시곤 했다.
"저런, 우산 안가져갔니? 많이 젖었구나.."
수건을 챙겨 나오시는 어머니를 들여보내고 예은은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위층의 동준 부부는 벌써 잠자리에 들었는지 기척이 없다. 이제는 시집을 가지 않은 예은만이 동준부 부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어머니는 아직도 공장엘 나가신다. 이제는 집도 마 련이 되고 오빠도 안정된 자리에 올라 쉬셔도 되지만 어머니는 고집을 버리시지고 계속 가 죽공장에 나가셔서 일을 하셨다. 아버님을 장마속에 여의시고 어머니는 더더욱 일을 열 심히 하셨고 언니들과 오빠, 그리고 예은을 키우셨다. 오빠가 결혼을 한후 공장을 그만 두 셨지만 한달도 못 쉬시고 바로 나가셨다. 평생을 하루도 쉬지 않던 분이 집에서 편히 쉬며 며느리가 해주는 밥으로 시간 보내기가 답답하시다며... 처음에는 온 식구들이 말렸지만 이제는 아무도 강요를 하지 못했다. 그것이 어머니가 즐길수 있는 유일한 하루 보내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평생을 공장의 희미한 작업등 아래서 미싱을 밟으신 분에게 하루 24 시간의 시간은 너무나 길기만 하다. 더욱이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들은 더욱더. 노인대학을 가실 연세는 아니기에 검정고시 학원과 동네 약수터의 배드민턴 동우회를 권해드렸으나 두곳 다 세번을 채우시지 못하셨다. 아직까지도 공장의 야근과 철야를 빠지시지 않으신다. 힘이 드신 날에는 항상 먼저 안마를 청하셨다. 누워계신 어머니의 어깨나 다리를 주물러 드리다 보면 어느새 예은은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며 책을 읽어주던 때를 떠올리곤 했다. 예은이 중학교 3학년때의 일이였다. 수건으로 머리를 싸올린 예은은 욕실의 거울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또 하나의 삽화를 그리기 위해....다른해보다 일찍 찾아온 그해의 장마는 예은에게서 많은것을 잃게 했다. 세번째의 삽화는 교회의 십자가를 먼저 그리기 시작했다.

학생부 임원인 예은은 10월 말에 있을 문학의 밤 준비로 저녁시간을 지나도 교회에서 연습을 한다. 모두가 본당의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각자의 연습에 열심이다. 예은은 ' 학'자의 위치가 마음에 안들어 계속 자리를 고치고 있다. 십자가와 평행을 이루게 놓기 가 쉽지가 않아 위에서 글씨를 잡고 있는 남자 선배의 불평이 대단하다.
"예은아.대강하자. 팔 아파 죽겠다."
"오빠는 어떻게 대강할수가 있어? 앞에서보면 삐뚤어진게 그냥 다 보이는데."
예은의 다시 붙히자는 말에 선배는 힘없이 움직인다. 그때 예은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선배언니의 다급한 말을 전해 듣고 예은은 급히 달리기 시작한다.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무슨일이 생긴것 같다고 급히 가보라는 선배는 예은의 떨리는 손을 힘있게 잡아준다. 정 신없이 달려 집앞에 선 예은은 차마 대문을 열지를 못하고 주저 않아버린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에 예은은 도저히 문을 열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질 모습들을 담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얼마를 주저 앉아 있는데 둘째 고모님이 울음을 삼키며 나온다. 주저 앉아 있는 예은을 본 고모는 예은을 붙잡고 큰 울음을 터트린다.
"아이고 이것아.. 아이고 불쌍한 이것아.."
예은은 자신의 몸을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고모의 손이 싫다고 생각한다. 고모에게 이끌리어 안방의 문앞에 서게 된 예은은 등을 떠미는 손길에 의해 방안으로 들어서게된다. 좁은 방 안에는 한쪽 벽 앞으로 하얀 천으로 덮여진 아버지라고 생각되지 않는 아버지가 누워계시고 그 옆에서 어머니가 예주의 품에 안기신채 앉아있는것이 보인다.
"처제. 가서 마지막 모습이라도 뵈야지."
예은의 등을 미는 둘째 형부의 손에 밀려 예은은 햐얀 형상 앞으로 다가 서자 갑자기 뒷걸 음을 친다.
"아빠...."
이것이 예은이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다.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예은의 시야는 흐려진다. 몸의 중심을 잃었다고 생각이 됨과 동시에 예은은 기절을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예은은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본다. 그러나 예은의 눈에 비친 천장은 익숙한 빛 의 그것이 아닌 낯설은 색의 그것이다.
"괜챦아? 은이야?"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예숙의 얼굴이 자리한다.
"은이야...."
예숙은 예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한다. 예은은 끝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고 기절을 해 이웃의 집에 와 있는것이다. 아버지를 가까운 시일안에 잃 게 될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가버리실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예은이다. 두 달전 장마로 온 동네가 난리가 났을때 쓰러지시고 돌아가셔서 하얀 천을 덮으실때까지 한 번도 일어서지 않으신 아버지를 예은은 그렇게 보내는것이다. 아무 준비도 없이.... 두달 전 새벽에 물난리가 나고 동네의 모든 이웃들과 예은의 식구들은 필사의, 정말 그렇다 필 사의 탈출을 한것이다. 전날 저녁부터 내린 비가 좀 많겠다하는 생각은 했으나 누구나 그 날 아침에 그 작은 골목으로 빗물이 골목 밖의 작은 하천의 물과 함께 넘쳐 흘렸으때는 그 저 망연히 당하고만 있을 뿐이였다. 옆집의 아져씨가 예은이네의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때까지 예은의 식구들은 아무도 그들 가까이까지 다가온 물을 모른채 잠속에 있었다. 허둥대면서 예은과 다른 식구들을 깨워 집을 벗어날 채비를 서두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허리까지 차오른 물속을 헤쳐 나가셨다. 예숙은 벌써부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갈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예상도 못했던 힘으로 더러운 물이 집안가득 몰아 쳐들 어왔다. 하천을 옆에 끼고 있는 골목은 하천의 낮은 둑보다 더 낮은 지대여서 물이 쉽사리 들어온것이다. 갑자기 예숙은 예은의 잡은 손을 놓고 자신의 앉은 뱅이 책상으로 달려갔다. 잠시후 예숙은 다시 예은의 옆으로 다가 왔다. 예의 손에는 예은과 같이 만든 은행통장이 쥐어져 있었다. 예은은 예숙에게 웃어보이고 손을 다시 꼭 쥐었다. 동준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섰다. 에은과 예숙은 아버지와 함께 나섰다. 예은을 업고 예숙의 손을 잡은 아버 지의 걸음은 자연 힘겹고 느렸다. 골목 건너에 벌써 다다른 동준과 어머니가 예은과 예숙을 데리고 있는 아버지 걱정에 안절부절하였다. 건너 오겠다는 동준의 팔을 잡고 남자 하나가 나섰다. 바로 몇해전 술에 취한 아버지와 싸움을 하던 그 사내였다. 사내는 예은 일행의 곁으로 와서 예은을 아버지에게서 넘겨 받아 안았다. 한걸음 앞서 걷는 사내의 어깨에 목 마를 탄 예은은 계속 뒤로 오는 아버지와 예숙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고 아져씨 팔을 꼭 잡으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그래도 예은은 계속 울고 있는 예숙 의 울음이 들려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예숙과 아버지가 물속으로 가라앉는것도.... 잠 깐 사이에 예숙의 머리가 물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이내 아버지도 예숙을 향해 물속으로 막 들어가 버리셨다. 놀라서 우는 예은을 동준에게 건내주고 사내는 다시 물속으로 걸어 들 어갔다. 예은은 다시 어머니에게 넘겨지고 동준은 사내를 따라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더 거세지는 빗속에서 예은과 어머니의 비명이 섞이고 이웃의 아우성속에서 예숙와 아버지는 구해졌다. 후에 물이 빠지고 그 자리를 보니 보도블럭으로 된 골목바닥이 빗물에 무너져 버려 예숙과 아버지가 빠져 버린것이다. 발이 끼어 허우적거리는 예숙을 빼내시려 아버지 는 물속으로 들어가셔 예숙을 건지시고 자신의 무게로 더 커진 웅덩이에서 나오질 못해 사내와 동준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기절을 한 예숙을 등에 업고 동준이 걸어가고 아버지는 사내와 이웃의 부축으로 동네 어귀에 새로 지은 아파트 모델하우스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이웃의 어른들이 병원으로 가고 예숙은 깨어났다. 걱정을 하시던 어머님은 예숙이 일어나자 바로 병원으로 가셨다. 조금의 준비도 없이 온 동네가 물난리 속에 놀란것은 어설픈 기상예보와 지하철 역 공사로 막아놓은 하천의 흐름 때문이였다. 평소에는 장마가 와도 수량이 많지 않은 하천으로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하 지만 갑자기 지하철 공사로 하천을 막아버려 흐르지 못한 물이 바로 낮은 뚝을 넘어 동 네로 흘려들어온 것이다. 예은은 동에서 직원들이 와 집안에 물을 빼고 소독을 하는 동안 동네의 국민학교 교실에서 식구들이 머물때도 계속 아버지의 병실을 지켰다. 집과 병원을 함께 다니시는 어머니의 피곤한 몸을 조금이라도 덜겠다는 언니들은 집안의 소독과 정리를 맡아하고 동준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수해자에 대한 모든 소속을 찾아 다녔다. 나 라의 늦장 복구에 동네의 어른들이 구청과 동회로 찾아가 항의를 할때도 동준은 어른들 틈에서 정신없이 다녔다. 이웃의 충고로 아버지에 대한 보상을 청구한 것도 동준이였고 글을 읽지 못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과 수해자 돕기 창구를 오간것도 동준이였다. 한 달이 지나 홍수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할때 동준은 군입대를 했다. 집안일을 보 겠다고 군입대를 미루는 동준에게 아버지는 소리가 모아지지 않고 흐터지는 말소리로 군 입대를 말씀하셨고 동준은 울면서 군입대를 했다. 다시 집안이 조금은 정상적으로 돌아가 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다시 공장에 나가시고 예주와 예선도 직장엘 나가고 예숙과 예은은 학교를 나갔다. 다만 항상 아침저녁으로 볼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누워있는 모습일뿐, 동준이 없을 뿐....... 예은에겐 불과 두달전의 일들이 영겁의 시간들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보낸 시간들속에서 예은은 아버지가 멀리 하시던 성경책을 읽어드리려 방과후 바삐 집으로 향하던 자신의 모습과 학교를 다니면서 야간 고등학교 교무실에서 급사로 일해 받은 첫 월급으로 아버지의 속옷을 사드린 예숙의 모습을 그려본다. 나가보자는 예숙의 손을 잡고 예은은 힘겹게 일어나 골목으로 나간다. 골목안은 벌써 천막이 쳐져있다. 얼굴이 낯선이 들과 낯익은 이들이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며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본다. 슬픔보다는 그들을 향한 불쾌한 감정이 솟는다. 주먹을 힘주어 쥐고 집안으로 들어 서자 모두의 시선이 예은에게로 향한다. 소복을 입은 어머니와 예주, 예선이 바쁘게 움직 인다. 눈가가 푹들어가 검게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예은은 한참을 바라본다. 어머니는 어색한 웃음을 예은을 향해 지어준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울음으로 폭 팔되어 터진다. 예은은 어머니의 곁으로 가서 힘껏 안아본다. 예은의 작은 두팔이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자 힘없이 무너지듯 주저앉으시는 어머니를 예은은 한참을 안고 있고 싶어한다. 그러나 큰고모님이 그들의 사이를 가르며 끼어든다.
"은이 밥도 안 먹었지?"
도대채 밥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예은은 고모를 향해 말한다.
"고모 은이 밥 안 먹을래요."
하지만 어머니를 바라보며
"올케 이리와 어서 은이랑 숙이랑 식사해요. 어떻게 산사람은 살아야지.. 올케가 그러면 이 불쌍한 은이는 누가 키우오."
라고 고모가 말을 하자 예은은 예숙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작은 상앞으로 앉는다. 그때 방안에서 예은을 부르는 소리에 가보니 형부 두분이 작은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곁에 앉아 있다. 오빠가 없는 자리를 두분의 형부와 작은 아버지께서 지키고 계시는 모습이 예은은 말할수 없이 서글프다.
"은이도 얼른 옷 갈아 입어라. 그리고 아버지께 절해야지.."
상복은 예은에게 맞는것이 없었다. 예숙과 예은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옷을 갈아입는다. 예은의 큰 소복의 소매끝을 접어주다 말고 예숙이 참았던 울음을 쏟아붓는다. 예은도 같이 울어버린다. 안방에서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님. 저것들 말려요. 어서..."
그러나 작은 아버지도 말씀의 끝을 맺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아버지는 삼일장이라는 제목으로 예은의 곁에 삼일을 머무시고 가셨다. 삽화의 마 지막은 이렇게 슬픔을 이기지 못한 예은과 예숙의 울음소리로 멈춘다. 그 곁으로 예은과 예숙에게로 다가서지 못하시고 문 밖에서 꽉 문 입술을 통해 끊어지는 어머니의 절규 섞인 울음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라 하였다. 그때 군대에 입대하고 훈련소에 있는 동준에겐 아무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깊은 생각으로 그리 하셨겠지만 예은은 동준에게 숨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준에게 편지를 써 알렸고 동준 바로 집으로 찾아왔다. 그날도 어머니는 공장으로 출근을 하시고 방과후 급사로 일하는 예숙은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시간이였다. 저녁밥을 지어 아버지께 먼저 올리고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예은은 나가보았다. 여린 대문 사이로 군복을 입은 동준은 울음을 참으려 충혈된 눈으로 예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은이 준비한 초라한 상앞에 동준은 아무말도 없이 앉아있었다. 밥상위에 놓인 흑백사진 은 아버지의 젊은 모습을 담고 있었다. 예은은 그 앞에 앉은 동준의 모습이 사진속의 아 버지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런 그 생각이 예은을 위로 했다. 동준에게 서 찾는 아버지의 모습은 건강한 청년의 모습이였다. 동준과 함께 어머니의 공장으로 갔다. 동준을 안고 울음을 참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한 방 에서 어머니와 예숙,예은 그리고 동준은 같이 잤다. 밤새와 동준과 어머니는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아버지의 낡은 우산도 술에 취한 모습도 들어 있었다.

마지막의 삽화는 욕실의 거울 속에 그려졌다. 샤워기의 벨브를 돌리니 시원한 물줄기가 내려 왔다. 눈을 감고 물줄기 속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서 있으니 예은은 지난 여름날 마 당에서 등목을 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검게 타버린 아버지의 등에 물을 쏟아 주시던 어머니의 즐거워하시던 모습도 함께... 다시 굵어진 빗소리에 샤워기의 물소리가 흡수 되어버렸다. 샤워기의 내리는 물줄기가 빗소리에 섞여 장마비가 되어 욕실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199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