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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에는 시인이 산다

  • 작성일 2007-06-18
  • 조회수 281

새재에는 시인이 산다



이 센티미터 간격으로 일정하게 층을 이룬 블라인드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며칠 전 내렸던 비로 인해 얼룩이 진 듯 한 유리창이 먼저 앞을 가로막는다. 처음 이곳에 이사 오던 날 물로 깨끗이 씻은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닦은 적이 없는 창이었다. 물론 그리 깨끗하지 못한 걸레로 방바닥을 문지르듯 그렇게 유리창에 낀 먼지를 닦은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 꼬락서니야 굳이 부연 설명을 달지 않아도 알 쪼일 것이다.


창을 통과하자 이번에는 먼지가 보풀처럼 달라붙은 방충망이 또 눈앞을 가로막는다. 밖을 한 번 내다보는데도 이거야말로 완전히 첩첩산중이다. 하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연립 주택 역시 옛날로 따지면 문경 새재 산기슭의 첩첩산중에 있는 격이니 그런 표현이 영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곳 주소가 바로 경북 문경시 모전동 592번지하고도 세진빌라 310호인 것이다. 예전에는 산적이 득시글거렸다는 바로 그 문경 새재의 한 자락인 것이다.


서울의 마포구에서 태어나 그나마 강북에서 마포구와 서대문구를 벗어난 적이 없는 내가 문경 새재라는 곳에서 살게 될 줄은 바로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내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결혼이라는 제도에 몸을 담그게 될 줄 몰랐듯이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귀신에게 홀린 것도 같고,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 속에 내가 들어가 새로 '십운몽(十雲夢)'이라도 생겨난 것도 같다.


"아…… 정말 지겨운 저 놈의 닭소리……."


아침마다 변함없는 레퍼토리로 시작되는 아내의 푸념은 내가 분명히 결혼을 했으며, 그 증거로 전에 내가 아버지에게 얹혀살던 도로변의 그 이층집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목청을 돋우어 우는 저 늙은 수탉의 울음과 그 수탉의 흐리멍덩하기 짝이 없는 닭대가리를 못 견뎌 하는 아내라는 이름의 여자가 내 옆에서 내 팔을 베개 삼아 누워서 중얼거리는 소리로 이 허름한 연립에서 졸린 눈을 억지로 뜨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 소리가 닭 울음소리인줄 알지 못했다. 낮이고 밤이고 제가 내키는 대로 울어제끼는 닭이 있다는 이야기를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언젠가 들었던 닭 울음소리와도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동네에는 칠면조도 기르나 보지?"


그렇게 물은 나도, 내 말을 들은 아내도,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대방의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던 것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 소리를 생전 들은 적이라고는 없는 칠면조 울음소리로 믿어 버린 내 자신이 너무 우스웠던 것이다. 아내는 영문도 모르고 나를 따라 웃었다.


그것이 닭 울음소리라는 것은 우리 연립 주택 바로 앞에 있는 슈퍼에 음료수를 사러 내려갔던 아내의 입을 통해 금방 드러났다. 그 슈퍼는 도무지 양계장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가 어색한 소규모의 작은 터에 닭장이라고 부르기에 안성맞춤인 계사(鷄舍)가 있는 집과 바로 옆구리를 맞대고 있어서 슈퍼의 주인 여자는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하기는 그 놈의 슈퍼의 간판도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상호의 두 글자 중 맨 앞의 한 자가 떨어져 나가 '공슈퍼'라는 애칭 아닌 애칭을 달고 있었다. 아내는 그것을 공슈포라고 발음했다. 아내의 발음이 어쨌든 나는 그것을 공수표라고 들었고, 아내가 공수퍼를 입에 올릴 때마다 대학 시절의 한 친구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곤 한다.


공수명이라는 어엿한 본명을 가지고도 공수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그 친구는 수시로 약속을 어겨 친구들 사이에서 ‘공수명이 또 공수표 남발한다! 고 회자(膾炙)되다가 끝내 공수표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을 얻게 된 친구였다.


어쨌든 이 공수퍼 역시 내 대학 동창 공수명이처럼 공수표를 마구 찍어 대고 있었다. 마침 담배가 떨어져 담배라도 사러 내려갈라치면 슈퍼의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고, 두부나 콩나물도 하루나 이틀이 지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햄이나 소시지 등은 유효기간을 훨씬 넘긴 것이 태반이었다. 생긴 대로 논다는 말도 있지만, 이름 따라 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런 유사한 상황에 공수명이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스스로 제 머리가 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구경하는 것으로 일하는 틈틈이 머리를 식히곤 했다. 아내가 직접 운영하는 속셈학원으로 아내를 내보내고 나면 오전 7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는 온통 나만의 시간이었다. 물론 아내가 점심 식사를 하러 낮에 잠시 들르지만, 그 시간은 점심을 먹고 도로 학원으로 나가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 많은 시간을 모두 소설을 쓰는 데만 몰두하기는 힘든 것이다. 아마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유해 전자파 때문에 두통에 시달릴 것은 뻔 한 일이고, 그나마 신통치 않은 시력마저 더욱 해칠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나는 자판을 두들기는 틈틈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가 살포시 낀 블라인드 사이로 바깥을 살피는 게 하루 일과라면 일과였다.


시인은 오늘도 여지없이 시를 중얼거리며 앞산 어귀로부터 비실비실 걸어오고 있었다. 연탄집게처럼 양다리를 엉거주춤하게 벌리고 영락없는 팔자걸음으로 걸어오는 시인의 모습은 산보를 나온 여느 남정네와 다름없었다. 손에 시집을 든 대신에 잔뜩 말아 쥔 전화번호부가 없다면 말이다.


오늘따라 그는 이상하게 단정해 보인다. 시인이 '공슈퍼' 근처에 가까이 왔을 때에야 시인이 단정하게 이발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바짝 쳐 올린 머리로 인해 시인은 중학생 정도로 보인다. 그가 다소 동안(童顔)인 까닭이다. 나는 아내로부터 처음 시인의 나이를 전해 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언가를 중얼대며 전화번호부를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그가 좀 모자란 소년인줄로만 안 나는 그의 나이가 서른이나 가까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저렇게 중얼거리고 돌아다녀야 시가 써지는 모양이지? 도대체 뭐라고 웅얼거리는 거야? 그리고 들고 다니는 전화번호부는 다 뭐고……."

"가서 직접 한 번 들어 봐."


잔뜩 호기심에 부풀어 그렇게 묻는 나의 물음을 한 마디로 일축하며 아내는 묘한 미소를 지었었다. 원래 성질이 급하기로 소문난 나로서는 그런 호기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는 인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뛰어나가 시인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시인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시인은 좀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발바닥에 발동기라도 달은 것처럼 블라인드 사이로 시인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층계를 내려와 시인이 있던 곳으로 달려가 보면 시인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 놈의 시 한 수 듣기 어렵다는 푸념만 내뱉고 내 방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하긴 나도 한때는 시에 미친 적이 있었다. 소설이라는 것을 쓰기 전에는 말이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 문예반 담당 선생님으로 새로 오신 김정근 선생님은 등단하신 시인이셨다. 그 분이 우연히 내가 쓴 시를 보시더니 무조건 내게 시작(詩作) 공부를 권유하셨다. 하지만 장래 검찰총장을 꿈꾸던 내게 시 따위가 무슨 흥미가 있었겠는가!


물론 학교 대표로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하다못해 장려상이라도 타 오면 기분이야 좋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상을 타는 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수업하는 시간에 떳떳하게 외출증을 끊어 우쭐거리며 교문을 나서거나 통째로 하루 수업을 빼먹을 수 있는 그 덜떨어진 우월감 때문에 시인이라는 감투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알량한 글재주로 신문이나 학생 잡지, 방송국에 잡문과 시 따위를 적어 보내 상금이나 상품을 타 먹는 그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그렇게 거짓 사연을 써서 독자나 청취자를 우롱했던 벌로 이렇게 둔한 머리를 두드려 가며 소설을 쓰게 된 것인지도.


어쨌든 나는 법대(法大)로 진학을 했고, 차츰 시(詩)와는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는 멀고도 먼 사이로 변해 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연초에 떡국 먹듯 일 년에 한 번씩 어김없이 꼬박꼬박 사법고시에서 미역국을 먹어 가다 보니, 서른이라는 달갑지 않은 마지노선과 조우(遭遇)를 하게 된 것이었다.


서른까지만 고시 공부를 하기로 한다는 진리와도 같은 대명제(大命題)를 거역하는 대역죄를 모면하고자, 공부하는 도중 심심풀이 삼아 끼적거린 소설 하나를 그야말로 일말의 기대도 없이 어느 문예지에 보냈다가 정말 뜻하지 않게 등단이라는 것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이쪽으로 팔자를 타고났다고 해야 할지, 남들은 피를 말려가며 쓴 작품을 수월찮은 우표 값과 다리품을 팔아 가며 응모를 해도 낙방을 거듭하던 것을 소가 뒷걸음치다 개구리 잡는 식으로 덜컥 당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시에 그렇게 떨어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렇게나 써 갈긴 글을 심사 위원들이 또뽑기 하듯 뽑아 준 것처럼 오해할 사람이 있어 부연하는 바지만, 내 나름대로는 오래 전부터 그 한 작품을 가지고 틈만 나면 요리 뜯고 조리 고치기를 수 년 가량 하였다는 것을 밝혀 두고자 한다. 그 상의 권위나 심사 위원들의 역량에 추호도 의심이 없기를 바라며.


사실은 예년에 비해 적은 응모작과 지원자의 자질을 고려하여 당선작을 내지 않고 가작으로 처리하려다가 더 정진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당선시켰다는 심사 위원장의 준엄한 작품심사평을 보건대, 내 작품이 그리 뛰어난 수작(秀作)이 아니라는 점은 나로서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시인이 아닌, 소설가가 된 것이었다. 그게 내가 법관에의 꿈을 버리고 소설가가 된 내력의 전부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 내가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 되어 있는 꿈을 꾼다. 그것도 소설이 잘 안 써져 소주를 세 병이나 마시고 술기운을 빌려 잠이 든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내게 문경 새재에 시인이 산다는 것은 경외하여 마지않을 사건 중의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을 만나는 일은 내가 취중에서나 시인이 되는 것처럼 쉽게 현실화되지 않았다. 내가 시인을 한 번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부터 이상하게 시인은 내 눈 밖을 벗어나 있었다. 가끔씩 언뜻 보이기라도 해서 헛걸음을 치게 하던 시인은 어느 날부터인지 아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렇게 시인은 내게 깔깔한 갈증만 남겨 주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져 버린 시인이 비록 블라인드가 쳐진 창을 통해 서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오늘만은 시인을 꼭 만나야겠다는 일념에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으로 웃옷만 하나 얼른 걸치고 부리나케 육십여 개나 되는 계단을 밟아 아래로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하지만 시인은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마치 나와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조차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공슈퍼에 들러 담배나 한 갑 사 들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인을 만나기 위해 창문만 바라보던 날들이 계속되는 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랜만에 글을 쓰는 동료들이 찾아왔다. 신춘문예 추리 부문에 등단해 추리소설을 쓰는 황 작가와 일본 추리소설을 번역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는 김 형이었다. 황 작가는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렸고, 김 형은 거꾸로 다섯 살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황 작가와 김 형의 나이는 열 살 터울이었다. 하여튼 별난 인간 셋이 만났으니 술추렴이 빠질 수가 없었다.


전화번호부를 가져와 그 앞면에 있는 '시행 정지도'라는 주변 관광지를 표시해 놓은 안내 지도를 펼쳐 놓고 어디로 갈 것인지 여기저기 집어 가다 김 형이 그 두툼한 엄지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으며 소리쳤던 것이다.


"여기다. 바로 여기. 금룡사."


작년에 한 번 김 형과 단 둘이서 놀러 가 본 적이 있는 그 절을 지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작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결혼 전에 대작을 한 편 쓰겠다는 옹골찬 포부를 안고 이곳에 먼저 집을 얻어 작년 8월말쯤에 미리 내려왔던 것이다. 그 틈을 비집고 김 형은 내가 여기 내려온 그 다음날 집들이를 해야 한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내려왔던 것이다.


"김룡사에 가 봐. 거기 계곡이 좋더라고. 터미널에 가면 거기 가는 시외버스가 있어."


전화를 걸어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계곡을 묻는 나에게 아내는 그렇게 알려주었다.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느라 바쁜 아내에게 염치도 없이 어디로 가면 좋은지 물어 보기까지 하여 김룡사(金龍寺) 계곡을 추천 받았던 것이다. 난생 처음 이곳에 이사 온 이방인이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김 형과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김 형은 수시로 그 김룡사 계곡을 입에 올렸다. 일이 있어 서울에라도 올라가 보면, 김 형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를 입에 올렸던지 누구든지 나만 보면 선뜻 김용사의 절경이 그리도 뛰어난 가에 대해 묻곤 했던 것이다.


김룡사가 그리 절경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정도의 계곡이야 이곳 문경새재에서는 흔하고 흔한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작년은 무던히도 더웠고, 그 더위는 8월말까지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더운 날씨에 계곡 한 가운데에 평상을 펼쳐 놓고 닭백숙에 도토리묵을 안주로 놓고 조선조 황희 정승의 종부들에 의해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이곳 전통주인 호산춘(湖山春)이라는 황갈색인 명주를 마시니 신선이 따로 없는 지경인 것이다. 게다가 내려오는 길에 청려장이라는 건강 지팡이까지 하나 사주었더니, 그야말로 김 형의 기분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예로부터 짚고 다니면 중풍에 안 걸리고 신경통에 좋다고 하는 관광 명품 청려장까지 얻었으니 감개무량했던 것이다. 김 형은 아직도 그때의 감흥을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때의 감흥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김 형의 의견을 좇아 김룡사 행을 나섰던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황 작가와 아내가 함께 동행을 했다. 주말이라 학원을 쉬는 아내는 따라나섰던 것이다. 왕복 이 차선의 좁다란 길을 따라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대고 있는 논들이 마치 성긴 그물을 확대해 놓은 것처럼 죽 이어진 산북면을 지나 북쪽으로 사십여 분을 달려 간 곳이 김룡사였다.


보이는 것은 농가와 논뿐이어서 다소 지루하달 수밖에 없는 그 길이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김룡사라는 명칭에 대한 시시비비로 운전기사를 포함하여 몇 명되지 않은 승객들과 왁자지껄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용사가 맞는 말이여."


벌써 막걸리를 한 잔 얻어 걸친 듯한 검게 탄 얼굴을 한 할아버지 한 분이 운전기사와 우리들의 실랑이를 무쪽 자르듯 단번에 자르며 일갈을 놓았다. 운전기사는 김용사가 맞는다고 우기고 있었고, 나를 비롯한 우리 일당들은 김룡사가 맞는다고 서로 주장을 맞서고 있는 와중에 복병처럼 금용사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영감님요. 김용사가 맞아요. 아까 차 탈 때 매표구에 김용사라고 쓰인 것 못 보셨는교? 여기 푯말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아입니까?"


기사는 버스가 거쳐 가는 행선지를 플라스틱판에 써서 차 앞 유리에 붙여 놓은 것을 가리키며 노인에게 한 마디 했다.


"뭐라 지끼샀노? 마, 틀린 기라. 내가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랐는디 그걸 우째 모르겠나? 내 말이 맞다 카이."


‘지낀다’는 이곳 말로 ‘말하다’, 라는 뜻이었다. 나도 처음 처갓집에 인사드리러 왔을 때, 장모님이 지끼보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상당히 언짢은 기분이 든 적이 있었다. 아무리 이름 없는 글쟁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살 건지 지끼보라고 하시는 말씀에 그야 말로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지끼다’를 ‘지껄이다’로 잘못 풀이한 때문이었다.


어쨌든 우리 일행과 기사와의 논쟁에서 노인과 기사의 싸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노인이 목적지에 도착하여, 허, 그 기사 양반 참, 뻔 한 것을 우겨, 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며 버스를 내리고 나서야 언쟁은 일단락되었다. 나는 괜히 쓸데없는 것을 물어 기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에 눈을 감고 잠든 것처럼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종점인 김룡사까지 갔다.


김룡사에 도착해서야 나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 입구의 안내판에 '김룡사'라고 한글로 반듯하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하기는 조금 전에 본 전화번호부의 '시행 정지도'에도 금룡사로 오기(誤記)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라 진평왕(新羅 眞平王) 10년(588戊申)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운달산(雲達山)의 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금선대(金仙臺)란 산내 암자가 있는 곳에 운봉사(雲峯寺)를 창건을 했다고 한다. 운봉사는 김룡사의 옛 사명(寺名)이었다.


창건의 유래를 전하는 전설은 이러하다.


김장자(金長者)라고 일컫는 사람이 국법을 어기고 득죄하여 운달산 아래의 용추 부근에 은신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지극한 정성과 신심으로 불전에 참회와 속죄의 기원을 드려 사죄의 그날을 기다리며 지내던 중, 용추의 용녀(龍女)와 가연(佳緣)을 맺어 득남을 하게 되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용(龍)이라 했으며, 용모와 지혜가 출중했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김장자의 가운은 날로 번창해 갔고, 이에 연유하여 운봉사를 김룡사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설 따위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런 전설들은 어느 절에나 한두 개쯤은 전해져 내려오게 마련이었다. 오히려 나에게 감흥을 준 것은 시인과의 조우(遭遇)였다. 오매불망 이도령 그리는 성춘향처럼 내 속을 태우던 시인을 거기서 마주쳤던 것이다. 나는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찾던 중, 해우소(解憂所)라고 쓰인 곳을 보고 혼자 비실비실 웃으며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해우소의 뜻풀이는 근심을 푸는 곳. 화장실을 해우소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우리 조상들의 해학이 엿보였다. 이 얼마나 운치가 있고 애교가 있는 이름인가. 우리 일행은 그것을 보며 한바탕 웃었다. 그런 해우소 앞에서 시인은 잔뜩 근심이 낀 얼굴에 인상을 구긴 채,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과 무언 가로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아내와 황 작가, 김 형이 복사꽃이 활짝 피어 있는 절 내부를 구경한다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살피며 비밀을 엿들으러 가는 소년의 마음이 되어 나는 시인과 여인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들에게 거의 다가갔을 때, 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인한다니까. 시인한다고……."


뭔가 어긋나고 있다고 깨달은 것은 시인의 그 말을 들은 바로 그때였다. 조금 전, 절에 오르는 길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얹어 놓고 소원을 빌고 온 그 돌탑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아찔한 어지럼증이 목덜미를 뻐근하게 눌러 왔다.


"그만 가자. 고집 그만 부리고."

"시인한다니까. 시인해."

"알았어. 시인하는 줄 아니까. 어서 가자."


중년의 여인은 시인을 못 끌고 가서 안달을 하고, 시인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엉덩이를 잔뜩 뒤로 빼고 시인한다는 말만 되뇌고 있었다. 나는 둔기로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 하니 서서 그 모양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원래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렸을 때는 똑똑한 아이였나 봐. 공중전화 부스에서 다른 아이들이 돈을 빼내다가 마침 그곳에 도착한 전화국 직원한테 들켰나 봐. 그 아이들은 다 도망가고 괜히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애꿎은 시인이 그들 패거리로 오인되었나 봐. 전화국 직원이 전화국으로 데리고 가서 무릎을 꿇려 앉혀놓고 전화번호부를 둘둘 말아서 그것을 몽둥이인양 시인의 머리를 때리며 도망간 패거리의 이름을 대라고 그랬겠지. 하지만 시인은 그들이 누군지 알 리가 없었어."


아내가 들려 준 시인의 내력은 대략 이러했다.


문경시는 인구가 겨우 십만 명 남짓 되는 소도시라 전화번호부의 두께가 일 센티미터밖에 안 될 정도로 얄팍했다. 말하자면 주간지 두 권을 말아 쥔 정도의 두께였다. 그것을 몽둥이 삼아 시인을 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도망간 아이들의 이름은커녕 동전을 훔치지도 않았다고 완강하게 저항하자, 전화국 직원은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먼저 시인에게 공중전화기를 드라이버로 뜯어 동전을 꺼낸 것부터 시인(是認)하라고 다그쳤던 것이었다. 마침 시인의 주머니에는 오락을 하려고 저금통에서 꺼낸 동전이 제법 많이 있었다는 거였다.


버틸 때까지 버티던 시인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결국 그 사실을 시인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하얗게 질린 채, 전화국 직원의 연락을 받고 온 어머니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 시인은 며칠 동안 열병을 앓았고, 그 뒤로 그렇게 정신 이상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부르는 거야?"


김룡사를 한 바퀴 돌고 김룡사 아래에 있는 계곡의 한 주점에 자리를 잡고 나서 아내는 그가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내력을 들려주었다. 열병의 후유증으로 시인한다고 중얼거리고 다니는 광인(狂人)을 시인이라 부르는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가 기가 막혀 아내에게 그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잖아."


아내의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시인이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았다. 자그마한 키로 전화번호부를 둘둘 말아 들고 다니며 시인한다고 읊고 다니는 그가 그날의 충격으로 인해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성장까지도 멈춰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화국을 상대로 손해 배상이라도 청구해야지?"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고 십 년이나 사법 고시를 준비했던 경험이 그런 말을 하게 했나 보다.


"물론 소송을 했지. 하지만 일부 승소를 하는 바람에 겨우 치료비 정도 받은 모양이야. 그 돈으로 서울에 있는 정신병원에 정기적으로 치료받으러 다닌다지 아마. 오늘이 아마 치료를 받으러 서울에 가는 날인가 봐. 치료받으러 가기 전에 꼭 김룡사에 들러서 예불을 올리고 간다더군."


아내는 시인에 대해 자세히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도 잘 알아?"

"여기 사는 사람 치고 시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나의 물음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대답했다.


"어쨌든 전 오늘 시인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결백을 끝까지 주장하지 못한 벌로 스스로 영혼을 저당 잡힌 키 작은 시인. 그건 이 땅의 모든 시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요. 시인뿐만이 아니라, 글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천형(天刑)을 짊어진 작가라는 사람들도 포함해서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찬사를 보냅니다."


황 작가는 늘 낙천적인 성격대로 편의적인 해석을 했다. 나는 그의 그런 영혼이 키 작은 시인처럼 아름답게 생각되어 빙긋이 웃었다.


"어쨌든 시인을 위하여!"


김 형이 잔을 들며 그렇게 외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술잔을 들고 말았지만 왠지 찜찜한 기분은 내내 가셔지지 않았다. 그런 기분을 어쩌지 못해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와 술자리의 구호로서 존재하는 키 작은 시인을 생각하며 본의 아니게 과음을 했다.


 

 

김 형과 황 작가가 떠나가고 나서도 나는 헤어나기 힘든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시인의 내력을 알고 난 후유증인 듯 했다. 뭔가 마음에 상처 비슷한 것을 받고 나면 늘 제자리로 돌아오느라 본의 아닌 홍역을 치르곤 하는 게 나의 여린 마음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기가 싫었고, 겨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도 통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식욕도 잃어버리고 대낮부터 술에 젖어 있었다.


"자네 무슨 과에 들어갔나?"

"법학괍니다."

 

졸업식날 교문에서 만난 김정근 선생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시고 내게 물었다가, 내가 어문 계열을 지원하지 않은 것을 알고 섭섭한 표정을 지으셨다.

 

"너는 문학에 소질이 있는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시던 그때의 김정근 선생님의 얼굴이 아련하게 되살아났다. 전에는 가끔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시더니 요즘은 작품 발표도 안 하시고 어떻게 지내시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빈 술잔에 술을 채우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생각했던 대로 아내의 전화였다. 학원에 내려와서 컴퓨터를 좀 봐 달라고 아내는 며칠 전부터 성화였다. 새로 깐 프로그램이 작동을 잘 안 한다는 것이었다. 나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혼자서 어떻게 학원을 운영했는지 수시로 오라 가라 명령조였다.

 

"언제 내려올 거야."

 

아내는 대뜸 그 말부터 했다. 나이가 나보다 두 살이나 더 많다 보니, 매사에 나를 동생 다루듯 대해 왔던 아내였다. 평상시에는 그냥 들어줄 만 했는데 오늘따라 그녀의 반말이 왠지 귀에 거슬렸다.

 

"오늘은 귀찮아. 왠지 피곤도 하고. 매뉴얼 읽어보고 네가 한 번 해 봐. 네가 해야지 만날 나한테 의지할 거야?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아내의 게으름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게으름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나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말하자면 집안 살림은 아예 내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가끔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울화통이 치밀곤 했다. 편안하게 글만 쓸 수 있게 해준다기에 덜컥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보니, 이건 차라리 아버지 밑에 밥 얻어먹는 것 보다 더 고달픈 것이었다. 집안일 에 학원일 에 온통 내 손이 가야 하니, 글을 쓰러 온 건지 아내의 비서나 가정부로 온 건지 도통 구분이 서지 않았다.

 

"오늘은 안 돼. 오늘 중으로 꼭 써야 할 게 있어. 내일 해 줄게. 아냐. 그러지 말고, 네가 해. 내가 여기 뭐 하러 왔니? 너, 벌써 잊은 거야? 난 글 쓰려고 여기 내려온 거야. 알아? 몰라?"

"지금 아무 것도 안 하잖아? 또 술 마시지? 술 마실 시간은 있고 컴퓨터 좀 봐줄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

"네 학원일 은 네 선에서 해결할 수 없냐?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지금이라도 때려치우고. 학원생들도 몇 명 안 되던데……."

"말 다 했어? 대책은 있어?"

"설마 너 굶기겠니? 당장 때려치워!"

"난 불안하단 말야."

"뭐가 불안해? 남편을 못 믿는단 말야! 그러고도 네가 작가의 아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빗나가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내 자신을 만류했지만, 이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상실감과 아련한 술기운에 젖어 나의 말투는 힐난조가 되어갔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아내의 울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나지막하게 들렸다. 마음이 찡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왜 질질 짜고 난리야? 이게 질질 짤 일이야? 넌, 내가 어떤 형편인지 잘 알고 결혼했잖아. 내가 어떻게 해 주리? 다 때려치우고 직장이라도 나가면 좋겠니? 에이……."

 

곧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에 전화 코드를 뽑아버렸다. 가만히 놔두면 제 풀에 화가 풀릴 텐데, 계속 전화를 걸어 더욱 성질을 긁어 놓는 것이 결혼 전부터 있어 온 아내의 고약한 버릇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서울에라도 올라가 버릴 양으로 바지를 갈아입고 지갑을 열어 보았다. 지갑에는 겨우 오천 원짜리 한 장이 다였다. 동전까지 다 털어 보아도 서울 갈 차비도 부족하였다. 시간이라도 있으면 은행에 가서 통장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찾을 수 있으련만 시계는 이미 다섯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막차가 여섯 시 반이니 '공슈퍼' 아줌마에게 얼마간 융통을 해서 그냥 서울로 올라가 버리려다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일이 커질까 봐 그냥 바지를 입은 김에 있는 돈 다 털어 소주나 몇 병 더 사 왔다. 나 역시 내 친구 공수명이처럼 공수표를 날린 셈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신경질을 부릴 일도 아니었다. 제대로 생활비를 못 벌어 주니 하등 큰소리칠 형편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부지런히 소설을 쓰는 축도 아니니 일이 바쁘달 수도 없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내가 잘 한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서른 살까지는 고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아버지한테 돈을 타서 썼고, 그 이후는 소설 쓴다는 핑계로 돈벌이를 등한히 했었다. 그런 와중에 스트레스 해소라는 구실을 붙여 저녁이면 김 형이나 황 작가를 만나 술을 마셨다. 그 돈은 모두 아버지 주머니에서 나왔고, 그나마 가끔 기업체 사보(私報)에 콩트를 실어 생긴 원고료도 술값으로 탕진했다.

 

그런 내 자신이 무얼 잘한 게 있다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 대신 돈 벌어 보겠다고 천방지축인 아이들을 붙잡고 속셈학원 운영하느라 피곤해 있는 아내에게 그런 막말을 한단 말인가!

 

밖에서 열쇠로 현관문 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내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가 작업실로 쓰는 작은방에 고개를 삐죽이 들이밀었다.

 

"난 또 전화를 안 받기에 또 서울 간 줄 알고 놀래서 수업하다 뛰어왔네. 안주 좀 사올까?"

 

전에 한 번 홧김에 서울행 버스를 탄 전력이 있기 때문에 아내가 놀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내가 안주를 사러 가는지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아마 차비가 있었더라면 서울행을 버스를 타고 말았을 나의 비성숙한 정신을 질타하며 공수표를 날린 게 정말 잘한 일이라고 자위했다.

내가 잘못 한 거야. 나는 마음속에서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 시인한다니까. 시인한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이 말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안주를 사들고 들어오던 아내가 나의 넋두리를 듣고 멀뚱한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문경 새재에 또 시인 하나 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