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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특집(퇴고)

  • 작성일 2007-12-12
  • 조회수 341

 

납량특집






  이 집에는 네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러나 네 명의 사람 ‘만’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뭔 소리냐고? 비

  밀.



  부父

 

  “꺄울!”


  이것은 이 집의 가장 김철수씨가 방금 전 변기통에 앉으려다가 내지른 비명소리다. 이 소란에, 김씨의 아내 이숙자씨와 두 자녀 김이상군, 김이지양이 화장실 앞으로 달려왔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버지, 혹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신지요? 소자 심히 염려되옵니다. 라기보다는, 그들은 왜 또 난린데? 라는 표정으로 김씨를 보고 서있었다. 김씨는 뒤를 돌아 변기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김씨는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의,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새끼는 아니지만, 가족들을 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짜증 섞인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인데? 라는 듯이. 김씨는 “에…” 하고 입을 떼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싶었고, 설령 말을 한다 해도 누가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가서 일들 봐.”

  가족들은 다시 각각 제자리로 돌아갔다. 김씨는 이번에는 좀 더 몸을 깊숙이 숙여 변기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금 전 김씨에게 똥침을 놓았던 그 무언가가 숨어 있을.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던 김씨는 화들짝 놀랐다. 딸 김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화장실 문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김씨는 자신이 아직까지 아랫도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김씨는 황급히 트렁크팬티를 치켜 올렸다. “아빠, 빨리 하고 나와. 나 학교 가야 돼.” “으, 응. 그, 근데…… 너 혹시 똥 쌀 거냐?” “아니. 왜?” “아, 아니야……. 그래, 너 들어와서 씻어.”


  승용차를 몰고 회사로 향하는 내내 김씨는 영 찜찜하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것이 아침에 쾌변을 하지 못한 탓인지, 혹은 자신의 집 변기통에 정체 모를(게다가 손버릇까지 나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잘 몰랐다.


  숨 가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복도 자판기에서 홀로 커피를 뽑아 마시던 김씨는 아랫배가 슬슬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김씨는 반쯤 남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다. 칸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앉은 김씨는 자신이 어떻게 배설에 대한 욕구를 반나절 동안이나 잊고 있을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다. 아랫배가 가벼워지자 머리 또한 맑아졌다. 오전 근무 내내 굳어있던 김씨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고, 자신이 없는 동안 줄곧 집에 있었을, 그 변기통을 사용했을지 모를 자신의 아내에 대한 걱정이 생겨났다. 김씨는 핸드폰을 열어 숫자 ‘1’을 꾹 눌렀다. 화면이 전환되며 ‘우리집’ 이라는 글자가 떴다. 곧 숙자씨가 전화를 받았다. 김씨는 다짜고짜 물었다.

  “똥 쌌어?”

  “갑자기 뭔 소리야?”

  “대답해봐. 똥 쌌어?”

  “아니, 안 쌌어. 나 변비 걸린 거 뻔히 알면서 하는 소리야?”

  “아, 알았어. 끊어.”

  뚜, 뚜, 뚜, 뚜. 김씨는 툭, 하고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군.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 마누라가 변비였군!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똥침만 맞고 온 사람 마냥 기운이 빠진 채로 김씨는 퇴근했다.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안에 누가 있었다. 아랫배를 툭 내밀고 서서 김씨는 안의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 쯤 지나자 아들 김군이 나왔다. 그제야 들어간 화장실 안에는 구린내가 가득했다. 김씨는, 에이그 머니나,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 김군에게로 갔다. 자신의 아버지가 왔음에도 김군은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 아니 못했다.

  “이상아, 똥 쌌냐?”

  “어? 아, 아, 어, 응.”

  “아무 일도 없던?”

  김군은 대답 대신 얼굴에 물음표를 그렸다.

  “이상아, 똥 쌀 때 아무 일도 없었냐니까?”

  “똥 싸면 그냥 싸는 거지 무슨 일이 있어?”

  “왜 임마, 가령 누군가가……” 까지 말했다가 김씨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을 말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화장실로 갔다. 똥침 맞은 사람 마냥 찌푸리고 있던 김군의 표정은 쾌변을 한 사람 마냥 밝아졌다.

  샤워를 하다 말고 김씨는 변기통 앞에 쭈그려 앉아 그 안을 들여다봤지만, 역시나. 그 안에는 그의 아들이 남기고 간 구린내만이 있을 뿐이었다. 김씨는, 이제 괜찮아졌나보군. 아침에는 내가 뭔가 착각을 했나봐. 라고 생각한 뒤 다시 몸에 물을 끼얹었다.


  다음날 아침, 김씨는 여느 때처럼 현관문을 빼꼼히 열고 신문지를 집어 들었다. 전단지들을 소파에 내려놓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부엌에서는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고, 작은방에서는 숙자씨가 이상군을 깨우며 닦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작은방에서는 김양이 숙자씨에게, 엄마 내 스타킹 어디에 뒀어? 라며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에 김씨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워낙 일상적인 일이기도 했거니와, 어제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신문지를 옆구리에 끼고, 트렁크팬티를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는 변기통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꺄울!”


  김씨는 얼얼해진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거실로 가서 컴퓨터 책상에 있는 A4용지를 한 장 꺼내들었다. 왼손으로는 여전히 엉덩이를 부여잡고 오른손으로는 A4용지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김씨는 김군의 방에서(김군은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스카치테이프를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그 A4용지를 화장실 문 앞에 붙였다.


 ‘똥침 주의’




  자子


  우당탕탕! 소리가 김군을 깨웠다. 방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거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책상 위에 있던 자잘한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흩날렸다. 펄럭이는 저 커튼은 처녀귀신 치맛자락인가. 라고 김군은 누운 채로 생각했다. 집 안으로 이토록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따위의 논리적인 질문은 너무 졸렸기에 떠올리지 못했다. 김군은 창문을 닫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신체 여기저기에 힘을 줘가며, 낑낑대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가위라는 건가. 김군은 눈알을 굴려 방을 둘러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김군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김군의 한쪽 귀로 불어 들어와 한쪽 귀로 흘러 나갔다. 그 냉기는 김군의 심장을 굳게 했다. 김군은 어떻게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탈피하려 몸부림을 쳐보려했지만, 될 리가 있나. 김군의 몸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뒤집혀졌다. 침대를 마주 보고 떠 있는 형국이었다.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김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한 듯 새하얀 피부 위로 이마에서부터 붉은 피가 흘렀고, 한 쌍의 눈동자에선 살기가 번뜩했다. 귀신은 솟아올랐다.

  김군은 자신의 몸 위로 귀신이 올라타는 것을 느꼈다. 귀신은 무게 대신 냉기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김군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라도 싶었으나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저 한 쌍의 눈동자만이 조금씩 흔들릴 뿐이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김군은 그저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지금껏 살면서 들어보았던 신들의 이름이 그의 마음속에 스쳐지나갔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공자님……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자 놀랍게도 김군의 몸이 털썩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도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냉기는 가라앉았다. 김군은 베개에 얼굴이 파묻힌 채로 생각했다. 기도가 효과가 있었던 걸까. 이제 난 종교를 믿어야 하나. 그렇다면 무슨 종교를 믿어야 하나? 교회와 절과 사원 등을 일주일에 한 번씩 번갈아 다녀야 하나? 어쨌든, 김군은 흡족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군은 방심했다. 그는 자신의 엉덩이 골에 강력한 충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꺄울!”

  김군은 정신을 잃었다.


  숙자씨가 김군을 깨웠다. “빨리 일어나! 학교 가야지, 학교!” 이상군은 “우음……” 하고 뒤척이며 눈을 떴다. 어떻게든 더 자고 싶었지만 결국 침대와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켜 앉아 안경을 쓰던 김군은 방 밖에서 난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졸음도 잊고 달려 나가보았다. 아빠 김씨가 변기통 앞에 놀란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딱 봐도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왜 소란을 피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처럼 귀신이라도 봤으면 몰라. 라고 생각한 뒤 김군은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김군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굣길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혼자서 터벅 터벅 걸었다. 버스에서 꾸벅 꾸벅 졸며 김군은 다짐했다. 집에 가자마자 누워서 자겠다고. 오늘은 반드시 깊이 잠들어서 가위 따윈 눌리지 않겠다고.

  집에 도착한 김군은 가방을 내팽개치자마자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내가 언제 침대에 누웠지?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세찬 바람이 들이닥쳤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어젯밤과는 달리, 김군은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를 예측하고 있었다. 김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두 글자, 똥. 침. 김군은 재빨리 두 손으로 자신의 둔부를 가리려 했지만, 이미 몸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김군은 오늘밤에도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아니 엉덩이 저리게 느껴야 할 판이었다. 이번에도, 김군의 몸은 두둥실 떠올랐다. 김군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몸이 뒤집히자 침대 위로 떨어졌고, 이불과 침대 사이에는 귀신이 누워 있었다. 이불 위로 드러난, 거무튀튀하며 길쭉하고 날카로운 귀신의 손톱을 보며 김군은 생각했다. 어쩐지, 고통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귀신이 김군의 몸 위에 올라탔다. 냉기가 몸의 중심으로부터 끄트머리까지 퍼졌다. 김군은 혹시나, 하면서 자신의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역시나. 김군의 몸이 침대 위로 털썩 떨어졌다. 냉기가 사라졌다. 김군은 안도의 한숨, 아니, 올 것이 오는구나 하는 의미의 한숨을 쉬었다. 김군은 눈을 질끈 감고 두 주먹을 불끈, 어라? 김군은 눈을 감을 수 있었고 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 김군은 자신이 가위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똥침은? 김군은 엎드린 상태에서 목을 돌려 위를 보았고, 그 순간 냉기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꺄울!”

  김군의 스러져가는 의식 사이로 귀신의 음흉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또다시 숙자씨가 김군을 깨웠다. 김군은 자신의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군은 갈아입을 속옷을 챙겨들고 화장실로 갔다. 지난 밤 보았던 귀신의 눈빛과 그가 뚝뚝 흘리던 피가 아직도 생생했다, 기 보다는 그저 엉덩이가 얼얼해 자꾸만 다리가 휘청거렸다. 화장실에도 귀신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공포마저 느꼈다. 화장실 문 앞에는 웬 종이가 붙어 있었다. 김군은 그 종이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똥침 주의’

  진작 좀 말해주지.



  여女


  투덜투덜, 김양은 스타킹을 신었다. 오늘도 지각이야,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문 밖에서 숙자씨가 말했다.

  “빨리 안 나가니?”

  나도 빨리 나가고 싶거든, 이라고 김양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말해봐야 숙자씨는 귀담아 듣지 않을 터였고, 등교시간만 늦어질 것이었다.

  김양은 한 손에는 가방을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생각했다. 등교 준비 완료. 방문을 나선 뒤 왼쪽으로 몸을 틀자 현관이었다.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김씨의 구두와 운동화, 숙자씨의 샌들과 힐, 김군의 컨버스화, 가족 공용으로 쓰는 슬리퍼까지…….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김양은 생각했다.

  ‘내 신발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 의문은, 뒤에서 날아온 숙자씨의 호통에 곧 끝날 수 있었다.

  “빨리 안 나가?”

  김양은 허겁지겁 자신의 스니커즈를 신고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꺄울!”

 

  쾅, 김양은 얼얼한 엉덩이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녀가 튕겨 나온 현관문은 능청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김양은 문을 열었다. 부엌에서 방금 달려 나온 듯 숙자씨가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서있었다. 현관문에 있던 김양에게 똥침을 쏘기엔 먼 거리였고, 김양도 그것을 알았다. 김양이 숙자씨에게 물었다.

  “엄마가 그랬어?”

  숙자씨는 대답을 하는 대신 얼굴에 물음표를 그렸다. 김양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숙자씨의 얼굴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었다.

  “빨리 학교나 가, 이것아!”

  쾅, 김양은 문을 닫았다.

  김양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기다리는 동안 김양은 왠지 모를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손톱을 깨물었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띵동.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김양은, 자신이 왜 그렇게 불안해했던가를 알 수 있었다. 김양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현관문 쪽으로 뚜벅뚜벅 갔다. 요 놈 잡았다, 하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김양은 아까 전 떨어뜨린 자신의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엄마가 그랬지?”

  설거지를 하던 숙자씨는 “그래, 다 엄마 탓이다. 엄마 탓이야.” 라고만 할 뿐이었다.

  “아빠가 그랬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던 김씨는 “알았어. 이제 끊을게.” 라고만 할 뿐이었다.

  “오빠야?”

  컴퓨터를 하던 김군은 “응? 뭐? 아아, 어. 어. 어, 그래.” 라고만 할 뿐이었다.

  김양은 입을 삐죽 내밀고 팔짱을 끼었다. 미간을 찡그렸고, 부러 발자국 소리를 크게 냈다.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김양은 생각했다. 이놈의 집구석,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숙자씨가 쓰는 고무장갑의 상표와 김씨가 피우는 담배의 이름과 김군이 하고 있는 게임의 이름은 하나도 모른 채, 김양은 자신의 방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엌에선 씽크대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김군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김씨는 담뱃불을 끄고 이제 막 거실로 들어오려던 참이었다. 김양은 괜찮겠지, 하는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김양은 소리를 질렀다. 그 내용인즉슨, 숙자씨에게 자신의 스타킹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거였다. 문 밖에서 숙자씨는 뭐라고 대답을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이러다 또 지각하겠네, 김양은 안방으로 갔다. 옷장을 열자 그 안에는 스타킹이 가득했다. 한 움큼을 집어 들어 하나하나 살펴보니 낯이 익은 것들이었다. 김양은 하나를 빼놓고 전부 장에 다시 쑤셔놓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속옷을 갈아입고 핸드폰을 열어보니 7시 32분이었다.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며 김양은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32가 33으로 바뀌었다. 김양은 문자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야 나 오늘도 지각할 것 같아’ 전송이 완료된 뒤 김양은 스타킹을 신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에이 씨, 오늘도 엄마 때문에 지각이야.”


  김양은 한 손에는 핸드폰을 한 손에는 엠피쓰리를 들고 방을 나섰다. 책가방은 등에 매고 있었다. 숙자씨의 재촉에 김양의 움직임은 빨라졌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에이 씨, 내 신발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빨리 학교 안 가냐니까!”

  김양은 스니커즈를 신고, 엠피쓰리를 목에 걸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가, 멈칫했다. 김양은 뒤를 돌아보았다. 부엌에선 씽크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고, 김씨는 화장실 앞에서 엉덩이를 반쯤 드러낸 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김군은 아직도 자고 있을 터였다. 자신을 위협할 요소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도 김양은 쉽사리 문을 열지 못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숙자씨의 재촉이 재차 들려왔고 김양은 자신의 엄마가 얄미웠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저 학교나 보내려고 떠미는 것만 같았다. 띵동. 문자가 왔다.

  ‘빨리 와 오늘 또 담임한테 혼날라’ 문자를 확인한 김양은 한 손으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꺄울!”

  김양의 손을 떠난 핸드폰은 날아가더니 옆집 문을 한번 퉁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찔끔, 김양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똥침을 맞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문자를 쓰는 것을 방해받았기 때문인지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



  모母


  숙자씨는 김군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군은 침대에서 이불과 뒤척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숙자씨는 김군에게 다가가는 것이 두려웠다. 언제부턴가 자신보다 머리가 하나 더 커지고, 목소리가 굵어지고 남편에 필적하는 근력을 갖게 된 김군의 심기를 거스르며 그를 깨우는 것이 숙자씨는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임무이고 또 일과라는 것을 잘 아는 숙자씨이기에 그녀는 어김없이 김군을 흔들어 깨웠다. “씨… 잠 좀 자게 내버려 둬…….” 라며 잠꼬대를 하는 김군을 숙자씨는 잠시 서서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자기의 스타킹을 찾는 딸 김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타킹이 없어진 것이 오직 숙자씨의 탓이라는 듯 짜증과 불만이 잔뜩 섞인 목소리였다. 숙자씨는 잠시 생각하고는 “잘 찾아봐!” 라고 대답했다. “에이 씨, 엄만 또 맨날…….” 김양이 투덜거리며 부러 쿵쿵 걷는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탕, 까지는 아니었지만 김양이 옷장을 뒤지며 나는 신경질적인 소리가 숙자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알았어… 일어나면 되잖아…….” 김군이 드디어 일어날 기미가 보였다. 숙자씨는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국은 이미 끓어 넘친 상태였다. “엄만 맨날 내 스타킹 구별도 못하고……. 짜증나.” 김양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안방에서 나왔다. 숙자씨는 수치심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숙자씨가 그려왔던 모녀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아침마다 집안일을 함께 하고, 주말마다 팔짱 끼고 쇼핑을 하러 다니며, 때로는 남자 얘기로 밤을 새기도 하는……. “밥 안 줘?” 남편 김씨의 목소리가 들리자 숙자씨는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숙자씨가 몸을 돌리자 김씨가 서있었다. 반쯤 벗겨진 머리와 툭 튀어나온 똥배, 아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는 무덤덤한 표정. 이제는 자신을 누르고 올라선 자식들 틈바구니에서 숙자씨가 유일하게 편히 대할 수 있는 상대는 김씨 뿐이었다. 그건 김씨도 마찬가지였고, 부부는 서로에게 만만한 존재였다. 이 역시 숙자씨가 꿈꿨던 중년 부부의 모습은 아니었다. 숙자씨는 대답했다. “응, 어어……. 다 됐어. 앉아.”


  마지막으로 김군을 내보내고 나서도 숙자씨는 쉴 틈이 없었다. 설거지와 빨래와 청소를 해야 했다.

  이 중에서 내가 사용한 건 밥그릇 하나 뿐이야. 쌓인 설거지거리들을 처리하며 숙자씨는 생각했다. 내가 어째서 이 짓을 하고 있지? 왜 그래야만 하지? 숙자씨는 자문했다. 나도 내 멋대로 한 번 살아보고 싶다. 다 때려치워 버릴까? 남편이고 자식이고, 그냥 확. 생각을 뻗어나가던 숙자씨는 언제나 그랬듯 단 한 문장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닥치고 집안일이나 하자. 숙자씨는 생각을 닫았다. 그 대신,


  “꺄울!”


  입이 열리며 비명이 튀어나왔다. 숙자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온 소리였다. 숙자씨는 얼얼해진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숙자씨의 눈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집안의 풍경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즉 아무것도 없었다. 숙자씨는 전후좌우, 동서남북으로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아랫배에서 신호가 왔다. 장장 몇 달 만에 똥이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온갖 민간요법과 변비약, 마사지까지 모두 무시했던 노폐물들이었다. 똥침 한 방에 변비가 치료되다니! 숙자씨는 행여 이 기회를 놓칠까 싶어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부랴부랴 화장실로 갔다. 설거지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화장실 문 앞에는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숙자씨는 읽어볼 틈도 없이 그것을 낚아챈 뒤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앉자마자 숙변이 쏟아져 내렸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인가. 구린내 속에서도 상쾌한 기분이 들 수 있구나. 숙자씨는 무료한 자신의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어준 불청객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창 쏟아지던 노폐물이 멈추고 나서야 숙자씨의 눈에는 문에서 떼어낸 종이가 들어왔다.

  ‘똥침주의’

  처음에 숙자씨는 그것이 남편의 글씨체라고 생각했다. 20년 가까이 한 이불을 덮고 잔 사람인데 글씨체 하나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러나 곧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이 아들의 글씨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숙자씨는 김군의 글씨체가 어떤지 몰랐다. 아들의 손글씨를 읽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자신의 집 화장실 문 앞에 붙어 있는 이 종이가 누구의 짓인지 숙자씨는 알 수 없었다. 숙자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사람은 내가 똥침을 맞을 지 어떻게 안 거지?

  숙자씨는 종이를 휴지통에 쑤셔놓은 뒤 변기의 물을 내렸다. 쏴아. 화장지를 뜯으며, 숙자씨는 자신이 이 집에 와서 그동안 몇 번이나 똥을 쌌는지 자문해보았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숙자씨는 청소기를 가동시켰다. 위이잉, 그것은 먼지 뿐 아니라 숙자씨의 의식 또한 빨아들이는 듯했다. 숙자씨는 멍한 눈으로 청소기를 구석구석 밀 뿐이었다. 만약 인간형 청소 로봇이 나온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숙자씨는 생각했다.

  아랫배가 참 개운해.

  거실 청소를 마치고 안방으로 향하던 숙자씨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피었다. 미소는 아스팔트 바닥에 핀 민들레꽃처럼 어색해 보였다. 언뜻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숙자씨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저게 대체 누구지?

  

  숙자씨는 김군의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문 정면 벽에 걸려 있었다. 숙자씨는 저도 모르게 사진 속의 미소를 따라 웃었다. 시선을 아래로 하자 김군의 마구 어질러진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숙자씨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것이 숙자씨의 현재와 과거였다.

  숙자씨는 문턱에 서서 방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아침마다 김군을 깨울 때와 이틀에 한 번씩 청소할 때 외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집이 텅 비어 있을 때에야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 있을 테지만 숙자씨는 그러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김군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방에는 왜 들어왔냐며 신경질을 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간만에 쾌변의 기쁨을 느낀 숙자씨는 기분이 붕 떠 있는 상태였다. 남편과 자식에게 짜증을 유발할 만큼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였지만, 오늘만은 낙관적이었다. 한 번 살짝 보는 건데, 무슨 일 있겠어? 숙자씨는 청소기를 켜둔 채 문에 세워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넓지 않았으므로 서 너 걸음을 걷자 책상이었다. 책상 한 가운데에 세계사 교과서가 엎드려 있었다. 숙자씨는 그것을 집어 들어 펴보았다. 사춘기 시절 첫사랑에게서 온 연애  편지를 개봉할 때만큼이나 떨리는 심정이었다.

  교과서에는 필기가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다. 글씨도 남자의 것 치고는 깨끗했고, 형광펜을 이용한 요점 체크도 잘 되어 있었다. 숙자씨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헛되이 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괜시리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늘은 참으로 기분 좋은 날이야. 숙자씨가 교과서를 다시 덮어 놓으려 할 때였다. 입이 귀에 걸릴 듯 헤벌레하던 숙자씨의 표정은, 애벌레를 만난 사춘기 소녀의 그것처럼 경직되었다. 그리고,

  

  “꺄울!”

  숙자씨는 화장실로 부랴부랴 갔다. 청소기는 쓰러진 채 허공을 빨아들였고, 바닥에 떨어진 교과서의 표지에는 학번과 이름이 쓰여 있었다.

  ‘20132 이민재’



  귀가鬼家


  숙자씨는 현관문을 닫았다. 그녀의 한손에는 쇼핑봉투가 있었다. 부엌으로 가 스위치를 누르자 깜박거리며 형광등이 켜졌다. 숙자씨는 쇼핑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안에 든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놓기 시작했다. 쇼핑봉투의 맨 밑바닥에는 스타킹 한 묶음이 각종 찬거리들에 깔려 있었다. 숙자씨는 그것을 집어 들고, 이젠 이지도 학교에 늦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흡족해했다. 숙자씨는 그것을 김양의 방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엘리베이터에 탄 김씨는 버튼을 누르고 벽에 기대어 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노곤한 표정이었다. 김씨는 가방을 열서 무언가를 꺼냈다. 변비약이었다. 사와야지, 사와야지 하면서도 계속 깜빡하다가 오늘에야 산 것이었다. 변비약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김씨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띵동.

  버스에 탄 김군의 옆 좌석에 한 중년여성이 앉았다. 그녀는 숙자씨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고, 물건이 가득 담겨 터질 듯한 쇼핑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쇼핑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도 여전히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의 표시처럼 보였다. 버스와 함께 덜컹거리는 쇼핑봉투 안의 물건들을 김군은 힐끔힐끔 보았다.

  김양은 걷다가 멈춰서 아랫배를 움켜잡았다. 허리를 웅크리고 미간을 찡그렸다. 김양은 똑바로 서서 멀쩡하게 걸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세상이 돌았고 눈알이 돌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미웠다. 김양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아파트 건물 벽에 써진 동수를 확인했다. 두 건물만 지나면 집이었다. 그래, 집에 가면 쉴 수 있어. 김양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 왔어.”

  변비약을 뒤로 감춘 김씨는 현관에 서서 숙자씨가 나오길 기다렸다. 대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다 지친 김씨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왔다. 숙자씨는 김군의 방에 있었다. 저, 저기……. 숙자씨는 김씨가 온 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 그저 무언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시무룩해진 김씨는 안방으로 털레털레 들어갔다. 가방과 변비약통 내팽개친 뒤 침대에 털썩 앉았다. 양말을 벗어 던지며 김씨는 중얼거렸다. 에라이.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도 나가보지 않았지만 문은 열렸다. 김군이었다. 김군은 신발을 벗자마자 제 방으로 가서 가방을 던져놓았다.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향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다시 돌아갔다. 김군의 방에는 숙자씨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둘은 눈이 마주쳤다. 김군의 눈빛은 증오로 가득했고 숙자씨의 눈빛은 당혹으로 가득했다. 김군은 성큼성큼 걸어가 숙자씨를 방 밖으로 내몰았다. 쾅, 문을 닫고 기대어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괜히 화가 났다. 김군은 투덜댔다. 에라이, 이놈의 집구석.

  김군이 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켜자 초인종이 울렸다. 역시 아무도 나가보진 않았지만 문이 열렸다. 김양이었다. 김양은 신발을 벗자마자 안방으로 쿵쿵 걸어갔다. 옷장을 뒤져 그 안의 스타킹들을 마구 헤집어놓았다. 김군의 방에서 쫓겨난 뒤 식탁 의자에 앉아 있던 숙자씨가 놀라 달려왔다. 왜 그러니, 묻자 김양은 대답했다.

  “맨날 내 스타킹이 없잖아! 이거 하나 구별 못해? 많이 사다놓기라도 하든지!”

대답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는 숙자씨를 뒤로 하고 김양은 제 방으로 갔다. 가자마자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짜증을 부렸다. 에이, 다들 미워 진짜.

  숙자씨는 멀거니 서있었다. 김씨가 샤워를 하는지 화장실에선 물소리가 났다. 숙자씨는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숙자씨는 축축해진 눈가를 닦지 않고 안방 침대로 가서 앉았다. 털썩. 숙자씨의 엉덩이에 무언가가 깔렸다. 숙자씨는 소매로 눈물을 쓱 닦고 그것을 집어 들어보았다. 변비약이었다. 우리 그이가 변비에 걸린 걸까? 숙자씨는 생각했다. 인터넷으로 변비에 좋은 음식을 검색해볼까? 생각하다 말았다. 컴퓨터를 차지하고 있는 김군에게 말을 걸기가 두려웠고, 컴퓨터 조작에 미숙한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시선이 두려웠으며, 무언가를 해줘도 고마움을 못 느끼는 남편의 무심함이 지겨웠다. 체념한 숙자씨의 머릿속에서 말들이 웅얼거렸다.

  에라이, 이놈의 집구석. 미워 다들, 똥침이나 맞아버리라지.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웬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울!”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숙자씨는 침대에서 일어나 성큼 성큼 걸어갔다. 부엌으로 가서 가스레인지 밸브를 열고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김군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김양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문자메시지를 전송하며 킥킥대고 있었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