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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동상이몽

  • 작성일 2008-11-09
  • 조회수 1,409

그들의 동상이몽

나이 마흔........

내가 정말 늙었구나. 입가의 주름보다, 처진 가슴보다 더 나이든 게 실감나는 것은 뭐랄까.....응....그래.....바로 로맨스의 실종? 영혼에서 사랑에 대한 감정만 사악 하고 지워져버렸다는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텔레비전에서는 사랑에 대한 영화만 한다. 잘생긴 중국배우가 피아노를 치는 영화를 보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나이의 풋풋함에서 절절한 첫사랑의 눈물이 난다. 그 눈물이 난 그리운 건가. 그래...그리운 거다. 그 감정이!

PART1. 박수진

전화를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명혜였다. 어머 얼마만이니. 서초동 우체국으로 발령났다며? 적당히 해라....나이도 생각해야지. 스트레스 받으면 일찍 죽는데. 얄미운 계집애. 모임? 알았어. 이번엔 나간다. 진짜야. 그래 꼭꼭. 됐지? 전화를 끊으며 몇 달 전에 만났던 명혜의 모습을 떠올렸다. 짧은 커트머리가 샤프해 보였지. 직장에 다니는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 자신감 있어 보이고 쾌활하고 여유롭게 보인다. 아니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지.

매번 만날 때마다 명품 백이나 시계, 꼭 친구 만나는 자리에 치장하고 나와야 되는 건지. 딱히 부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명품에 사족을 못 쓰는 젊은 애들 마냥 속물적인 모습의 친구들이 불편했다. 그뿐이다. 거울을 본다. 생활의 주름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얼굴을 쓸어본다.

마사지라도 받아둘걸....나쁜 계집애. 미리미리 연락을 주지. 꼭 모임날짜가 되면 전화하는 심술보는 뭐람. 어릴 적부터 서구적으로 생겼던 명혜가 동창 모임 총무이다 보니 매번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지만. 나가지 않겠다고 거절하지 않는 내 마음은 뭔지 모르겠다.

옷장 문을 연다. 한숨이 나온다. 죄다 칙칙한 옷가지 밖에 없다. 그나마 계절에 맞지 않는 꽃무늬 시폰 원피스가 개중에 가장 좋은 옷이다. 나는 원피스를 들고 거울 앞에 선다. 거울속의 나는 색이 없는 흑백사진처럼 보인다. 생경한 내가 분홍색 꽃무늬 원피스 뒤에서 유령처럼 서있다.

논현동 숯불갈비집이랬지. 어차피 구운 고기냄새가 몸에 베일 텐데 좋은 옷 입어서 뭐해. 아니야. 오늘만큼은 립스틱도 화려한 색을 바르고 싶어진다. 명품 구두 핸드백 하나 없지만 오늘 만큼은 예쁘게 보이고 싶다. 주부라는 직업의 생활에 지쳐 어느덧 생기를 잃어버린 얼굴이지만 그래도 학창시절엔 명혜만큼 예쁜 얼굴이었잖아......

나는 휑한 눈과 팥죽색 입술을 바라본다. 거울속의 나는 여전히 유령 같지만 오랜만의 외출에 적잖은 즐거움으로 들떠 보인다.

PART2. 민성욱

어? 왜? 뭐어? 만난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만나? 어휴 알았어. 알았다고. 일상제약의 과장민성욱은 아내 수진의 전화가 마뜩찮다. 여자와 바가지는 밖으로 내돌리면 깨어진다고 했는데 가족 돌보기와 살림밖에 재주가 없던 아내가 올해 초부터 동창회에 나간다고 성화를 부르더니 기어코 상조횐지 뭔지에 가입했다고 했다.

집에만 있으니 갑갑하다는 말도 우울증도 스트레스도 다 핑계다. 직장여성도 마찬가지지만 주부가 무슨 할 일이 많다고 힘들다는 건지. 시골에서 아직도 농사를 짓고 있는 자신을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만삭의 몸으로 밭을 매다가 애를 낳았다는 어머니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이미 고향마을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고초당초보다 맵다는 시집살이 이겨내고 사남매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켜 사회의 훌륭한 일꾼으로 만든 그의 어머니에 비교한다면 아내 수진은 너무 나약했다.

선배의 소개로 만나 3개월 사귀고 결혼한 성욱과 수진은 슬하에 아들하나를 두었을 뿐, 특별히 몸이 약한 것도 아닌데 더 이상의 자녀를 두지 못했다. 힘들다고? 남들은 남매다, 형제다 뒷바라지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구먼....호강에 겨운 것이지. 장기적인 경기침제도 힘들고 젊은 신입사원들과 경쟁하느라 늘 쫓기듯이 살고 있는 민과장은 괜히 심술이 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진이 여느 여자들처럼 친구모임에 다녀오면 누구는 어떻고 누구 네는 어떻고 입만 열면 하나부터 열까지 잘난 친구와의 비교분석에 열등감까지 몰고 들어오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냉소적인 성격이란 것이다. 감정의 기복이 없는 차가운 여자. 그것이 수진이의 단점이었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장점이기도 했지만 성욱은 그런 그녀가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 섹스도 그렇고 늘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그녀가 어쩔 때는 숨 막히도록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바람이라도 쐬고 들어오면 좀 달라지기도 하겠지. 성욱은 바쁜척하면서 서류더미에 코를 묻는다.

PART3. 박수진

지하도 3번 출구라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유명하다는 숯불고기 집이 보이지 않는다. 명혜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고서야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일찍 나섰는데도 걸음이 빠르지 못해 약속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차라리 일찍 도착해서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 늦게 도착하는 친구들을 맞이하는 게 속편할 텐데....뭐야. 도리어 수십 개의 눈이 빤히 쳐다보는 어색함을 어찌 견딘단 말이지?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려버릴까.

수진의 발길이 느렸던 것은 오랜만에 신은 구두가 발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의 갈등을 무시한 채 식당으로 들어선다. 예약 석으로 들어서자 10여명의 남녀 친구들의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야이 기집애야 오랜만이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숙희다. 너도 늙어간다. 이쁜 얼굴이 영락없는 아줌마야. IT사업을 하고 있다는 현철이다. 나는 웃으며 빈자리를 찾아간다. 진땀이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데.....바로 이런 어색함이 끔찍이도 싫기 때문이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동창들의 가식적인 인사를 들으며, 돈 깨나 있는 친구들의 돈 자랑이 구역질나도 참으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명혜나 진숙이 성찬이 처럼 초등학교 시절부터 돈독하고 좋아했던 친구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뿐......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잔에 술이 채워진다. 나는 입술을 적시며 눈으로 인사를 한다. 일류기업에 다니는 재환이, 토지공사에 다니는 상수,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다는 미경이 그리고 응? 그리고 누구였지? 건장한 체격에 운동모자를 눌러쓴......누구지?

야 수진아 건호하고 처음만나지? 생각 안나? 왜....5학년때 전학갔던.....건호말야. 우리학교 짱이었잖아. 건호?

그래. 생각났어. 생각났다. 내 치마를 들치며 아이스께끼를 외치던 녀석, 동년배보다 한뼘 이상이나 커서 학교 짱을 먹었던 녀석. 축구부 골키퍼였던 녀석. 갑자기 건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내 기억속의 금고가 쾅 하고 열리더니 그에 관한 기억이 봉인이 풀린 것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주 컵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웠다.

건호가 그늘진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의 코앞에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따라봐. 친구들이 웃는다. 왁자한 소리가 멍멍한 귀에 들린다.

수진이....날 기억하니? 그럼. 와 대단하다. 난 네 이름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낮고 굵은 목소리가 소름 돋는다. 동창회모임엔 웬일이니. 너 전학 갔잖아. 모자를 눌러쓴 건호는 소주를 따라주며 피식 웃는다. 우리 상조회 회원수칙이 꼭 졸업생에 국한된 게 아니잖니. 우연히 만났는데 건호도 가입하고 싶어 하더라고. 명혜가 큰소리로 말했다. 날더러 들으라는 게 아니라 모든 친구들이 들으라는 뜻 같았다. 아무렴 어때. 회장이나 총무가 할 일이지.

나는 말없이 고기를 먹는다. 어릴 적 얼굴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건호. 체격이 더 커지고 몸무게가 더 나가도 그 시절 그 카리스마는 그대로였다. 다만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는 잘생긴 얼굴에 짓궂은 건호가 지워지지 않은 채 편린으로 내 머릿속에 박혀있었다는 것이다.

너희들 그 이야기 아니? 종합병원 간호사인 숙희가 소주 몇 잔에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말한다. 우리 동창 말이야. 병관이랑 미숙이 사건 알지? 아니....몰라. 둘이 바람을 피웠대. 병관이 와이프에게 걸려서 미숙이년 얼마나 쥐어 터졌는지 꼴도 아니었어. 뭐? 설마? 거짓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무엇이라고? 내가 미숙이랑 같은 빌라 살잖아. 못 믿어? 한밤에 난리가 났는데 정말...경찰까지 왔다니까. 둘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한 건 너희들도 다 알지? 친한가보다 했더니 서로 첫사랑이었다나....... 글쎄 20년 만에 우연히 만났다더라. 옛 감정에 불이 붙었는지 재회한날 모텔부터 찾아들었대. 병관이 와이프 그 난리를 쳤으니 미숙이년 온전하겠어? 남편이랑 이혼소송중이래. 병관이는? 별거한다고 들었어. 아무래도 병관이랑 미숙이 살림 차릴 듯싶다.

나는 조용히 소주잔을 들었다. 얌전했던 미숙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동창끼리 불륜? 뭐야.....마치 텔레비전에서 본 부부 클리닉 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니. 그것도 나와 가까운 동창생들이. 그 들이 상조회 모임에 참석하거나 가입한 일은 없지만 왠지 갑자기 오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사실을 남편이 안다면 뭐라고 할까.

무뚝뚝한 남편이 비웃음을 날리며 손가락질을 한다. 그럴 줄 알았다. 어디 여자들이 할 일이 없어서 밖으로 싸돌아다니고 그러니 탈날 수밖에. 당신도 조심해. 당장 모임이고 뭣이고 때려치워.

내가 술에 취한 모양이다. 남편의 신랄한 목소리가 귀에 들린다. 소름이 돋는다. 나는 진저리를 친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건호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눈치 챈 순간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내 머릿속을 들켜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야 술맛 떨어져. 이제 그만 이야기해. 또 모르잖니. 병관이랑 미숙이 정말 애틋한 사이였다고 이해해주자. 사업가다운 풍채를 지닌 현철이가 어른스럽게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때마침 현철의 핸드폰이 울린다.

어 여보? 응 여기? 상갓집이야. 왜에... 거래처 전무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걱정 마. 포커치고 있다니까. 알았어. 끊어. 얼굴이 붉어진 현철이 핸드폰을 내려놓자 방안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아...내가 이러고 산다. 염라대왕보다 우리 마누라가 더 무서워. 왠 상갓집이냐. 이래야 아침에 들어가도 마누라 눈치 안보지. 너도 공처가구나. 친구들은 다시 한 번 커다랗게 웃었다.

말마. 우리 마누라는 돈만 좋아하지 난 안중에도 없어. 방금도 상갓집에서 포커 친다고 하니 목소리가 상냥해졌어. 따가지고 들어오라는 것이지. 흐흐흐 내가 외박할 때마다 포커에서 돈 땄다고 몇 십만 원씩 상납하잖아. 그런데 우리 마누라 정말 독해. 돈도 그렇게 많이 벌어다주는데 상대를 안 해줘. 얼마나 마누라 살 냄새를 못 맡았는지 이제는 마누라가 홀라당 벗어도 내 물건이 안서요. 10년 넘게 살다보니 마누라가 아니라 여동생 같아. 아니 누나인가.

우리는 다시 커다랗게 웃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아마도 마음속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 같았다. 배우자와 남매 같다는 말은 섹스리스 부부라는 말이겠지. 많게는 20년 적어도 10년 이상을 살아온 배우자인데 아직까지도 서로 애틋한 성적 매력이 남아있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도 남편과 알콩달콩한 재미는 없었다.

때가 되어서 등 떠밀리 듯 선을 보고 결혼, 벌써 15년을 함께 살았지만 방을 따로 쓴지는 5년이나 되었다. 나는 소주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면서 다른 친구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나야 전업주부라서 정열이 식었다 치고 사회생활 하는 친구들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아니.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는 얼굴은 없었다. 근심에 찬....웃고 있는 입이지만 그네들의 눈엔 알 수 없는 흔들림이 들어있었다.

야 그럼 마누라랑 그것도 안한다면 쌓인 건 어떻게 하냐? 얌마 밖에 나가면 나도 인기 좋아. 몇 일전에도 나이트클럽으로 회식을 갔다가 부킹을 했는데 잘빠진 아줌마가 나한테 홀딱 반한 거 있지. 2차까지 갔는데 얼마나 좋았는지 이 여자가 또 만나재.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난 한 여자 세 번 이상 만나지 않는 주의거든. 두 번까지는 괜찮아.

하하하하. 남자들은 웃고 여자들은 나쁜 놈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술에 취한 것인지 친구들의 낯 뜨거운 이야기에 취한 것인지. 머리는 빙빙 돌고 귀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오랜만의 해방감에 들뜬 것일까. 나는 화장실을 찾아 나왔다.

거리낌 없는 대화,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는 웃음소리......그 먼 옛날 순수했던 친구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능글맞고 주책없어 보이는 40세의 기성세대가 바로 우리들이 서있는 자리였다. 뜨거워진 얼굴에 수돗물을 적신다. 화끈거리던 것이 조금 가라앉는다. 고개를 들자 어느 틈에 왔는지 건호가 수건을 건넨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태연한 척 내 핸드백 속에서 티슈를 꺼내들고 얼굴을 닦았다.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내 심장에 공명했다. 넌 그랬어. 초등학교 때도 그렇게 새초롬했었지. 나는 건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좀 전에는 내 이름밖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잖니. 아니......거짓말이야. 널 어떻게 잊겠냐. 생각나? 뭐가? 그가 내 얼굴로 바싹 다가왔다.

야 수진아 얼굴에 화장지 묻었어. 나는 당황해서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더 바짝 다가왔다. 바로 앞에서 그의 호흡이 느껴졌다. 생각 나냐고...... 나랑 뽀뽀한 거.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찔한 현기증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날 버려두고 유유히 사라진다.

실컷 희롱한 다음 내팽개치듯 그렇게 건호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장이 뛰었다. 평생 잊고 싶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을 있을 텐데.....내겐 그랬다. 바로 건호와 했던 철부지 행동을. 뽀뽀라고.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던 날카롭던 혀의 감촉. 그것을 잊는데 10년이나 걸렸는데.

모임에 괜히 나왔다고 후회해도 늦었다. 남편의 핀잔을 들으며 저녁준비나 할 것을....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친구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벌써 일어나 계산 준비를 하던 친구들....명혜가 회비 내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엉겁결에 돈을 내고 그녀만 카운터에 남긴 채 친구들과 식당 밖으로 나왔다. 가을밤이 다가왔다. 좀처럼 헤어지지 못하는 친구들은 명혜가 식당에서 나오자 2차로 노래방 가자고 성화다.

난 먼저 갈게. 너희들끼리 2차가. 안 돼. 지금 빠지면 벌금 물린다. 우리 상조회는 끝까지 함께 하는 거야. 나는 따라가지 않으려고 버텨보았지만 결국 가까운 곳에 위치한 노래방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원래는 가요주점이란다. 술과 안주가 기본인 곳이었다. 현철이 한턱내겠다고 호기 있게 외치는 바람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PART4. 민성욱

아파트 단지 안을 빙빙 돌아다녀도 주차할 공간이 없다. 성욱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9시 30분이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민 중에 자가용으로 출퇴근 하는 사람은 성욱 혼자인거 같았다. 매번 퇴근해 들어오면 주차장은 늘 꽉차있었다. 성욱은 혼잣말로 욕을 하면서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하 주차장을 싫어한다. 지하 주차장에서 그의 집까지는 꽤 멀었다.

지하에는 빈자리가 제법 많다. 빈자리에 차를 세우고 집으로 향하는 성욱은 요즘 감사기간이라 어지간히 힘들다. 나이 마흔 다섯 이제 겨우 총무과 과장이다. 글로벌시대다. 새로운 경영시스템이다 디지털 세대들과 일하는 것도 벅차건만 실력보다도 줄 한번 잘 서면 인생 대박이라던데.....변변치 못한 아내의 내조의 부재가 더 아쉽다.

영업부 김과장은 와이프가 전무이사 사모님과 여고동창이라더니 대번에 기획실 차장으로 승진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여고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알았다지....... 혹시.......아서라,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마누라가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할 리가 없지.......

성욱의 어깨는 축 처지고 왜소한 뒷모습은 더욱 초라해졌다. 몇 분 걸었을 뿐인데 숨이 턱에 찬다.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이마에 송글하게 돋은 땀을 닦았다. 아파트 1층 입구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고 했다.

자....잠깐만 같이 갑시다. 성욱은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자 재빨리 올라탄다. 풍만한 여인이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인다. 그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는 여자로 자주 마주치며 인사정도 건네는 여자다. 여자의 몸에서는 향수냄새가 진동했다. 성욱은 향수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싫어서라기보다는 그 냄새가 너무도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말없이 서있다. 성욱은 그녀의 뒤편에 서서 여자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볼륨 있는 몸매가 잘 드러나는 옷을 입어서 그런지 여자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섹시하다. 말 한번 건네 본 적이 없었지만 종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성욱은 그 여자를 몰래몰래 훔쳐보았었다. 향수냄새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도 여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여자의 머리칼이 어깨위에서 찰랑거렸다. 등은 부드러워 보이고 허리는 잘록하다. 그리고 엉덩이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매력적이다. 그의 눈은 노골적으로 그녀의 엉덩이에서 머물렀다. 관음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동안 그는 여자가 살짝 뒤돌아본 것도 미처 깨닳지 못했다.

여자는 헛기침을 크게 했다. 성욱은 몽환에서 깨어나 화들짝 놀란다. 그의 은밀한 즐거움이 어디까지 내달았는지 얼굴이 빨개진다. 여자가 내리고 다시 한 층을 더 올라간 후 엘리베이터는 멈췄다. 그는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집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아 그는 자위를 시작했다. 물론 머릿속에는 매혹적인 향기로 둘러싸인 아랫집 여자의 커다란 엉덩이로 가득 채워진 채.

PART5. 박수진

자기야~ 사랑인걸 정말 몰랐지~~ 자기야 사랑인걸 이젠 알겠니~~~ 공무원인 미경이 노래도 잘한다. 탬버린 소리, 박수소리 멋대로 넣는 코러스 화장지를 머리에 띠처럼 두른 현철이의 우스꽝스러운 춤까지 눈물 날 정도로 웃었더니 그동안 마음속에 켜켜이 앙금으로 자리한 온갖 궁상스런 생각들이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다. 나는 손뼉을 치며 웃다가 친구들이 던져준 노래책에서 뭔가 부를 만 한 노래가 없는지 찾아보았다.

자 한잔 해. 건호가 양주병을 들고 온다. 응....아냐...좀 전에 많이 마셨더니 이젠 취한다. 별로 마시지도 않던데. 술 좋아하지 않아. 누군들 좋아서 마시냐. 분위기로 마시지. 그냥 받아둬. 건호는 막무가내로 내게 술을 따라준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애들에게 다 술을 권하고 있었다. 누군가 조용한 노래를 부르자 숙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건호의 손을 잡아끈다. 둘은 블루스를 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숙희는 취했는지 건호의 넓은 가슴에 착 달라붙는다. 그들을 눈으로 쫒는 내 얼굴이 달아오른다. 호흡도 빨라진다. 아니....가슴속에서 뭔가가 콕콕 찌르는 듯 하다. 숙희와 춤을 추던 건호의 눈이 나를 향했다. 빤히....아니 희롱하듯 쳐다본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다른 곳을 보았다.

뭐해 임마. 한잔해. 유쾌한 목소리의 현철이 잔을 부딪쳐온다. 나는 양주잔을 단숨에 비워낸다. 짜릿하고 뜨거운 술이 식도를 타고 흐르고 목구멍에서 더운 열기가 토해져 나온다. 술잔이 다시 채워지고 나는 또다시 마신다. 술을 따라주고 받고..... 왠지 취하고 싶어졌다. 양주 몇 잔에 어지럽다. 그래도 기분 좋은 어지러움이다. 마치 공중에 부양한 듯이 그렇게...기분 좋다.

기분 좋은 어지러움에 몸을 맡기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아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단단한 남자의 가슴이 얼굴에 부딪쳤다. 건호였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의 품에 안겨 그가 리드하는 리듬에 끌려 다닌다. 그가 내 허리를 안았다. 그의 입술은 내 목덜미에 닿았다. 음악소리에 부유하며 난 그대로 멜트다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였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우두커니 서있는 내 자신을 자각한 순간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묘한 흥분, 묘한 짜릿함이 온몸을 감쌌다. 너무도 황홀했다. 건호를 다시 만난 것도, 그와 함께 춘 블루스도. 나는 소파에 앉아 어둠을 즐겼다. 그렇게 미동조차 없이 앉아있으려니.....소란한 밤과 마주친다.

작은 소음들,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소리, 안방에서 들려오는 남편의 코고는 소리 그러나 무엇보다도 커다랗게 들리는 것은 바로 내 심장소리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나는 건호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기억나는 것도 없지만. 5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고 가을 하늘이 멋지던 날이었다. 소풍갈 때 입으라고 새 옷을 사주셨는데 하얀 블라우스에 빨간 치마바지였다. 불안전한 12살 그래도 멋을 낼 줄 아는 꼬마숙녀였던 나는 소풍가기 전에 미리 그 옷을 입고 학교에 왔다.

친구들은 예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는 삽시간에 공주가 되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기분이 들떠있었는데 어디선가 지저분한 축구공이 날아와 내게 부딪쳤다. 순간 눈처럼 하얀 블라우스에 흙이 묻고 말았고 화가 치밀어 씩씩 거리고 있는 내 앞에 건호가 나타났다.

야 공줘. 그의 목소리는 12살의 소년 시절에도 위압적이었다. 네가 그랬어? 어떻게 할 거야. 내 옷. 나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그에게 소리쳤다. 빨면 되겠구먼. 뭘~~ 뭐라고 이게 진짜. 나는 축구공을 그에게 던져버렸다. 머리에 축구공을 맞은 건호는 화를 내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야. 이게 진짜. 한 대 맞을래. 그래 때려라. 때려봐~ 얘, 수진아 하지 마....건호잖아. 친구들이 그에게 대들고 있는 나를 말렸다.

건호는 가무잡잡한 얼굴에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매끄러운 윤기가 흐르는 피부, 검은 눈동자를 지닌 호남형 얼굴이었다. 분명 잘생긴 얼굴이지만 성격도 난폭했다. 커다란 미곡상을 하는 부모님 덕에 제법 잘살았던 그는 학교에서는 동네에서든 거침이 없었다.

그는 주먹을 쥐고 날 때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어쭈 너 진짜 어휴 여.자.라.서. 내가 참는다. 그는 이를 꽉 물고 여자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을 했다. 흥 난 네가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따 결투해. 결투? 좋아. 어디서. 학교 파하고 양어장 뒤 화장실 앞으로 와. 알았어. 도망치지마라. 겁에 질린 친구들과 나를 남겨두고 건호는 바닥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친구들은 그 당시의 건호를 무서워했다. 우리 학교 뒤에 있는 중학교의 학생들과 싸워서 이겼다는 소문도 들렸다. 우리 학교에서는 건호에게 맞설 애가 아무도 없을 만큼 유명한 아이였다. 그런 건호에게 결투하자고 말을 했으니 나는 삽시간에 학교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맹랑한 애로 소문이 났다. 때문에 건호가 그 해 겨울에 전학을 갈 때까지 나는 이런저런 유언비어에 자주 등장했었고 건방진 애라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몇 시에 들어온 거야? 화장실에서 나오던 남편이 아침 밥상을 차리는 내게 퉁명스럽게 묻는다. 모르겠는데.....시계를 안 봐서. 잘 한다. 여자들이 밤늦게 들어오고 잘하는 짓이야. 자주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어쩌다...아니 몇 달에 한번인데 좀 봐줘. 아무튼 아녀석 성적만 떨어져봐. 남편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밥숟가락을 잡는다. 울컥울컥 화가 치민다. 생계비를 벌어온다고 남편은 내게 함부로 한다.

나는 화가 치미는 것을 억누르며 싱크대로 향한다. 남편과 마주치기 싫어서 없는 주방 일을 하는 척 한다. 밤늦도록 시험공부를 했다는 아들은 우유 한 잔 마시고 벌써 등교를 했다. 중학생이 되더니 코밑에 수염이 돋기 시작한 아들은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었다. 방문도 잠가두기 일쑤고 속옷을 갈아입었는지 안 갈아입었는지 모를 정도로 제 몸 관리도 스스로 했다. 나는 왜 그런 아들의 자립이 서운한 걸까. 남편의 퉁명스런 말보다도 그녀석의 침묵이 더 견디기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밥을 먹는다. 쩝쩝쩝.....왜 저렇게 소리를 내면서 음식을 먹는 것인지.... 그가 음식을 입에 우겨넣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 가슴이 답답하다. 그런 이유로 언제부터인지 따로 밥을 먹어왔다. 남편이 출근하고 난 후 느긋하게 아침을 먹는 것이 속편했다. 세상 여자들이 모두 나와 같을까? 이제 겨우 결혼 15년인데...... 한숨이 나온다.

그거? 갱년기 증상이야. 쓰레기를 버리러갔다가 만난 통장이 내 어깨를 두들긴다. 갱년기요? 설마....권태기라면 몰라도. 자기야. 요즘엔 젊은 사람에게도 갱년기가 온데. 생리양은 많아? 아뇨. 그냥...... 것봐. 자기 올해 몇 살이지? 마흔이요. 에구구.......정말 요즘 여자 같지 않다. 피부 봐라. 땀구멍도 크고 블랙해드도 있고.......관리도 하고 아 맞다. 호르몬제도 먹어봐.

통장은 50대 초반으로 작달막한 키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파트에서 가장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땅콩 세알씩만 먹어라. 청국장에는 피부미용에도 좋고 여성 호르몬도 만들어주는 성분이 들어있다는 둥.....30분이 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겨우 통장의 수다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한숨이 나온다. 아니 짜증스럽다. 정말 나는 갱년기일까.

PART6. 민성욱.

아내 박수진의 무심함이 오전부터 기운을 빼놓더니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느라 성욱은 녹초가 되었다. 제약회사도 나빠진 경제로 많은 타격을 받고 있지만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늘어나고 늘어난 욕구만큼 일인당 소비하는 약도 증가했다. 하지만 외국계 회사를 포함해서 많은 경쟁사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서 연간 매출액은 급감하고 있었다.

감사도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이 된 성욱은 부하직원들과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동안의 스트레스로 뒷목이 뻐근했던 그는 직원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며 샐러리맨의 희로애락을 토해내는 회식이 무척이나 좋았다. 같은 일터,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정열과 지식이 쌓이는 곳.

그러나 직장이라는 곳은 계급사회인 만큼 짜증을 부리면 받아줄 만만한 상대도 있고 적당한 눈요기와 적당한 음담패설도 함께하며 묘한 동질감도 느낄 수 있는 상대도 있었다. 때때로의 회식은 사람들과의 사교의 장도 되어주고 술자리에서 적당히 큰소리치며 대접받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민과장은 속물이었던 것이다.

짧은 스커트를 입은 신입여사원의 풋풋한 젊음으로 다가와 한껏 애교를 부리며 술을 따른다. 성욱은 여자의 허연 허벅지 사이를 슬쩍 쳐다보며 술을 마셨다. 기분 좋다. 이대리는 회식자리에 앉자마자 민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고기나 반찬을 집어준다. 입사 3년차 후배는 오늘밤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큰소리다.

아주 그냥 이 밤을 찢어버립시다. 여러분~~ 과장님 2차 가야지요? 나이트클럽가요 섹시하기로 소문난 여직원이 손을 위로 올리더니 가슴을 흔들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민과장은 그녀를 흘겨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PART7. 박수진

우리 학교에는 대중목욕탕의 욕조만한 양어장이 있다. 원래는 비단 잉어를 키우는 곳이었는데 학교 예산이 부족한 탓에 비단잉어 대신 수련이나 부초가 가득하다. 개구리나 소금쟁이도 불 수 있고 장구벌레나 올챙이 알도 가득했다. 아이들은 양어장에 침을 뱉거나 오물을 던져 넣기도 해서 비위생적인 곳이었다. 양어장에서는 젖은 걸레냄새가 났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어린 나의 마음은 점차로 무거워지고 있었다. 괜한 자존심 때문에 건호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결투라니.......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았다. 게다가 건호가 누군가. 전교생 중에 가장 싸움을 잘하기로 유명한 애잖아. 친구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누구하나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애들이 없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양어장으로 향했다.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불쾌한 냄새가 나는 양어장 근처에 다다르니 공중 화장실 커다란 나무 옆에 건호의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다. 내 발은 앞으로 나가고 있었지만 그 아이의 위압감에 마음은 벌써 도망치고 있었다.

왔냐? 너 진짜 용감하다.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건호의 빈정거림을 들으며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가방을 내려놨다. 시작해~ 야........ 그만둬. 너 나랑 진짜 싸울 거냐? 난 여자는 안 때려. 우리아빠가 여자는 때리는 게 아니래. 그래서 나도 여자애들 안 때려. 그냥 네가 나왔으니까 결투는 없던 것으로 하자.

건호의 말투는 낮의 그것과는 달랐다. 바람이 불더니 나무에서 잎이 떨어졌다. 커다란 포플러 잎이 툭하며 내 머리위로 떨어지자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나중에는 배가 아팠다.

사실 나 너 좋아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웃음을 멈추고 건호를 보았다. 검은 머리칼은 이마를 덮었고 검은 피부는 윤기가 흐른다. 여자애들은 공부 잘하고 하얀 얼굴의 반장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데........나도 마찬가지인데........ 건호의 말 한마디는 어린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금지된 결계 선에 들어가 버린 것처럼, 해서는, 들어서는 안 돼는 말을 들어버린 것처럼. 나는 건호가 무서워졌다. 슬글슬금 뒷걸음을 치려던 내게 건호는 재빠르게 다가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5학년 3반 박수진 널 좋아한다니까 건호는 다시 한 번 쐬기를 박듯 말을 하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사방이 조용했다. 포플러 잎들을 흔드는 바람과 나무냄새, 양어장의 불쾌한 냄새, 화장실의 지린내까지 함께 풍겼다. 그 순간 건호가 바싹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놀랄 겨를도 없이 그 아이의 입술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내 입술에 포개졌다.

깜짝 놀란 나는 꼼짝도 못했다. 심장은 방망이질을 한다. 따뜻한 입술의 접촉에 당황한 순간 이번엔 건호의 혀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뭉클하고 뾰족한 기분. 나는 징그러워서 그의 가슴을 밀쳐버렸다. 중심을 잃고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건호를 뒤로한 체 나는 힘껏 달렸다. 무서웠다. 가방도 버려두고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모른 체 달리고 달려 한달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숨은 턱에 차오르지만 수돗가에 달려가 입안을 헹구었다. 마치 개구리와 뽀뽀한 것만큼 징그러웠다. 나는 혼자서 울면서 가글도 하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씻어냈다. 그것이 내 첫 키스였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꺼냈다. 첫 키스이후 28년이 지났다. 나는 봉지커피의 포장지를 찢어내고 물을 많이 부었다. 명혜는 블루마운틴을 좋아해서 원두커피를 즐겨 마신다고 하지만 나는 봉지커피가 좋다. 마시고 싶을 땐 언제든지 마실 수 있게 빠르고 멀건 원두커피 보다 복잡한 맛이 느껴져서 좋다.

새벽 3시다. 안방 문을 열어보았다. 남편은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외박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만성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남편이 일찍 들어오지 않는 게 더 좋다. 유난히 회식을 좋아하는 남편은 1차 2차 3차 술집을 전전하다가 그대로 차안에서 잠들 때가 많다. 낸들 아나. 차에서 잤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지.

그는 안방에서 나는 거실에서 따로따로 잠을 잔다. 어쩌다 남편이 욕구가 발동되면 잠들어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저항하는 나는 남편의 힘에 의해 침대위에 아랫도리만 벗겨진다. 전희도 없고 키스도 없다. 이기적인 남편. 무의미한 배출. 내가 남자를, 남편을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언제가 될까. 나는 이제 사랑도 욕구도 없는 화석녀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석녀?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싫은 게 아니다. 남편이 남자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지. 건호의 팔이 뜨겁게 허리에 감기고 커다란 손이 내 등을 감쌌다. 거칠고 느꺼운 호흡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너무도 에로틱한 느낌이 그대로 각인되어버렸잖아. 그와의 첫 키스가 앗아간 나의 순수는 10년 동안 어쩌면 전학으로 인해 훌쩍, 아무런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건호에 대한 애정의 기다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만난 건호 그는 날 아직도 좋아하는 걸까?

PART8. 민성욱.

갈증으로 일어난 성욱은 붉은 침등 아래 물병을 집어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지개를 켜고 창밖을 살펴본 성욱은 덮고 있던 이불을 살며시 젖히고 옆에 누워있는 여자의 알몸을 보았다. 그의 남성이 불쑥 일어선다.

성욱은 속물답게 여자를 좋아한다. 아니 여자와의 섹스를 좋아한다. 어젯밤 회식이 끝나고 2차로 찾아간 룸살롱에서 파트너였던 여자와 외박을 나왔다. 이대리도 아마 어딘가의 모텔에서 코를 골고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성욱은 여자의 등에 입을 맞춘다. 여자는 마늘냄새가 나는 아내와 달리 향기롭다. 여자는 잠에 취해있지만 성욱은 개의치 않았다. 성난 그의 남성은 섹스가 필요할 뿐이다.

회사 근처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성욱은 가뿐한 걸음으로 출근을 했다. 신입 여사원이 가져다주는 커피한잔을 마시며 인터넷 메일을 살피고 밤사이 뉴스 기사 검색을 마친 후 그는 아침 미팅을 가졌다. 불경기지만 실버계층을 겨냥한 신약이 발매되었고 매출도 좋다는 기분 좋은 소식과 함께 감사기간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는 완전히 성욱의 몸을 떠났다.

미팅이 끝나자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다. 핸드폰의 전원은 이미 꺼놓은 상태이고 이런 땐 역시 회사 전화가 최고다.

응. 나야. 얘는? 감사가 끝나서 직원들이랑 회식했어. 음주운전 안하려고 이대리랑 미스터 김이랑 사우나에서 자고 출근했어. 끊어.

성욱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전화를 끊으며 이대리의 자리를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며 핸드폰을 들고 있는 폼이 그의 아내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음이 뻔해보였다. 병신...... 왜 저러고 사나? 마누라 무서우면 오입을 말아야지. 비웃음이 입가에 번지는 성욱은 무덤덤한 아내의 성격이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날 밤 검은 봉지를 손에 들고 집에 들어온 성욱은 표정 없이 서있는 수진의 눈앞에 봉지를 흔들어보였다. 수진은 남편의 손에서 봉지를 받아들고 식탁으로 가 내용물을 살핀다. 순대다.

소문난 집 순대야. 먹어봐. 또 야? 나 순대 안먹는 거 잊었어? 생각해서 사왔는데 한 입이라도 먹어봐. 됐어. 안 먹어. 비위에 안 맞는걸 어찌 먹어. 성격하고는. 관둬 내가 먹을 테니 여자가 그러니 매력이 없지. 남편이 사오면 좀 먹는 시늉이라도 해봐. 그러면 기특해서라도 잘하지. 왜? 왜 매번 순대야. 난 순대 못 먹는다고 했잖아. 귀찮으면 사오지마. 붕어빵이든 귤이든 번데기든 다 좋은데 왜 순대냐구. 무스케이크나 쇼콜라 같은 거 나도 좋아해.

성욱은 화를 내는 수진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버린 성욱. 수진은 순대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식탁에 앉았다.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는 수진..... 입술도 떨리고 손도 떨린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의 전원을 켠 성욱은 부아가 치밀지만 참았다. 순대가 어때서? 다른 여자들은 잘만 먹더구만. 아무튼 유난을 떨지..... 성욱은 혼잣말을 하면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회사에서는 금연이라 담배를 피우지 못하지만 집에서 만큼은 자유롭다. 더군다나 혼자서 안방을 독차지 하고 있으니 피우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피운다.

사실 아내가 순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욱 자신이 순대를 좋아해서 어젯밤의 외박도 미안하고 해서 좋아하는 순대를 함께 먹기 위해 사가지고 온 것뿐이다. 예전에는 아무 말도 없더니 아내는 변한 것일까. 역시 동창회다 뭐다 쫒아 다니더니 여자가 간이 커진 거지........ 성욱은 성급하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인다.

PART9. 박수진.

나는 왜 남편에게 화를 냈을까. 그가 외박을 해서? 아니 무심해서다. 아내인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는 알고 있는 걸까. 나는 그가 콩나물을 싫어해서 밥상에 올리지도 않고 섬유린스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의 옷은 따로 세탁을 한다. 남편과 아내는 그렇게 다른 것일까. 우린 정말 사랑했을까. 아니 사랑이란 감정이 있었던 걸까.

신혼을 즐길 사이도 없이 임신을 했고 남편이 출장을 가고 없는 날 출산을 했다. 출산의 공포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렸던 나는 임신을 기피하게 되었고 피임을 하지 않는 남편과 자연히 관계가 멀어졌다.

남편은 내게 나무처럼 딱딱해서 재미없다고 한다. 자꾸만 시어머니와 비교를 하면서 아내이기 보다는 엄마처럼 되기를 원했다. 여리고 연애한번 못해봤던 나는 남편에 의해 애교부릴 줄도 모르는 뻣뻣한 여자로 사육되었다. 사소한 배려, 세심한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사랑의 원천이 되었을 텐데.......

외롭다. 내 등을 쓸어주고 두 팔로 꼬옥 안아줄 위안이 필요한데......나는 어느새 남편의 언어폭력이나 외박 등의 불성실함을 참아주고 있는 못난이가 되어버렸다. 외롭다. 목덜미에 짜릿한 키스를 받고 싶다. 꼬챙이로 후벼 파는 듯한 이 고통을 누군가 알아준다면......누군가........

응 순진아 네가 웬일이니 이 밤에. 아직 안 잤어? 벌써? 아직 9시도 안됐는데.....웬일이니. 저기 명혜야......호......혹시 건호 전화번호 알고 있니? 건호? 그래. 상조회 명단 네게 안줬구나. 미안하다. 지갑에 넣을 수 있게 명함크기로 만든 명단이 있는데 다음 모임에서 줄게. 건호는 왜? 응........뭐 좀 물어볼게 있어서........ 나는 누가 들을 새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명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저기 수진아......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건호말이지.......좀 문제가 있어. 지금은 PC방을 운영하지만 청년기엔 조직에 몸담았대. 전에 바다이야기란 게임 룸을 했다가 거액의 돈을 날렸다더라........돈거래 같은 건 하지 마......그 그런 거 아냐. 내가 뭘 좀 부탁한 게 있거든......그래? 알았어. 기다려봐......

명혜의 근심 섞인 말투에서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화끈거렸다. 내가 미쳤구나. 미쳤어......속으로 외치면서도 명혜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는다. 남편과 술 한 잔 하러 나간다는 명혜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넨다. 부럽다. 명혜의 자신감, 사회적 지위 모든 것이 부럽다. 저렇게 완벽한 여자는 결혼생활도 즐거울 것 같다. 남편과 함께 술 마시러 나간다........우리는 순대를 앞에 두고 말다툼하는 게 고작인데.

건호의 전화번호를 손에 넣은 나는 작은 설렘으로 체온이 올라가서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들과 남편이 현관문을 나서자 나의 흥분은 최고조가 되었다. 몸이 떨리고 마음은 불안해졌다. 차가워진 손끝을 마주치며 거실을 배회하던 나는 드디어 건호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음만 울리고 받지 않는다. 몇 번을 시도해도 건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건호야 나 수진이야. 바쁜가봐.....혹시 문자보면 연락 줄래? 나는 용기 있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벌떡 일어서 또다시 거실을 배회한다. 미쳤어. 미쳤어......어휴......흥분한 몸은 열이 난다. 그러나.

하루 종일 건호의 메시지를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무 일도 없이 헤어졌는데 춤 한번 췄다고 전화를 거는 나를 건호는 어떻게 생각할까. 더군다나 건호가 내게 전화번호조차 주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제야 나는 창피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칼을 쥐어뜯고 가슴을 치고 싶었다.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조바심이 났다. 전화를 받는 게 겁이 나기도 했다. 아니 액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긴장되었다. 건호이길 바라며, 혹은 건호가 아니길 바라며 그렇게 내마음속은 온통 건호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나의 열병은 오래 지속되었다.

수일이 지나도록 건호에게서는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남편은 어느새 내 눈치를 보지만 평소보다 더 말이 없어지고 더 차가워진 나에게 아무 말도 없었다. 아침을 먹고 나가고 늦은 밤이 되면 귀가하고 서로 말없이 안방과 거실로 나뉘어 각자의 결계 속에서 삶이 영위되고 있었다. 난 깨어있는지 잠들어있는지 자각하기도 힘들었다. 처녀시절에 시달렸던 가위에 눌리기도 한다.

소파에 누워 잠을 자려고 하면 다리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섬뜩한 공포가 하복부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머리로 침투한다. 순식간에 굳어버린 나는 공포의 환영이 찾아오기 전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팔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몇 초의 공포가 온 몸을 장악하고 사악 빠져나간다. 놀라서 깨어난 나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지 깨어있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건호와 나는 둘 다 알몸이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무수히 속삭이며 건호의 팔이 나를 휘감는다.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 놀리듯이 키스를 한다. 건호는 어느새 성인에서 초등학교 5학년의 모습이 된다. 그는 빨간 혀를 날름거린다. 잠에서 깨어난다.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또다시 아침. 남편이 기어코 한마디 한다. 당신 거울 좀 봐. 여자 꼬락서니가 그러니 일하러 나가는 남자가 힘이 나겠어? 아프면 병원가라고. 돈 없어? 응? 거울? 돈? 있어........병원갈테니 신경쓰지 마. 세상의 남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 여자가 자신을 예쁘게 가꿔야 남편들이 사랑해준다고. 그들은 아내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엇을 노력하나.

아내 앞에서 함부로 뀌는 방귀, 술살이 찐 복부. 당신들도 더 이상 남자로 안보여......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갈거야. 간다고. 당신들은 감기라도 걸리면 찜질해 달라 약사오라 엄살은 부릴 대로 다 부리면서 아프면 병원가라고.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또 흐른다. 왜 이런다니..... 어딘가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났나보다.

남편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도망치듯 나간다. 아픈 건 몸이 아니다. 마음이, 심장이, 영혼이 갈기갈기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친다. 아프지 않아. 외로운 거야.

PART10. 민성욱

수진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성욱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지난 번 외박했던 날로부터 아내의 상태가 불안했다. 혹시 순대 때문에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건가. 성욱은 수진이 지금의 우울모드로 돌입한 것이 자신 탓인가 생각했다.

설마 오입질 하고 다니는 게 들킨 걸까. 아내와는 섹스리스다. 그렇다고 신체 건강한 남성이 금욕을 하라는 것은 성직자가 아닌 이상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 술집 여자랑 자는 것도 못한다면 바람이라도 피우라는 것인가. 성욱의 아버지도 중풍으로 쓰러질 때까지 여색을 밝혔다. 그래도 어머니는 집안 살림 돌보고 시부모 공양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아내란 그래야 한다고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누누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잖은가. 아내의 우울증이 짜증스럽고 한편으론 걱정된다지만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심리를 모르겠다. 여자의 눈물은 질색이다. 말로 하면 될 것 아닌가. 뭐가 불만인지. 무엇을 바라는지 왜 말로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가 말이다. 아내의 눈물에 정말 죄책감이 드는 성욱이었다.

풀이 죽은 성욱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걷다가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자동차 앞에 서있는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하늘거리는 원피스가 바람에 살랑대자 보일 듯 말 듯한 여자의 실루엣이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아래층 여자였다.

어머 선생님 차였나요? 예.....무슨 문제라도 열쇠를 떨어트렸는데 그만 선생님 차 아래로 굴러갔잖아요. 마치 소프라노 같이 경쾌한 목소리가 성욱의 귀를 자극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라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저런~ 제가 차를 뺄 테니 기다리세요. 성욱은 자동차 앞좌석에 앉아 재빨리 시동을 걸고 차를 빼냈다. 여자가 열쇠를 찾았나보다. 여자는 엎드려 열쇠를 줍는다. 성욱은 눈을 떼지못하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가 엎드리자 하얗고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눈앞에 드러난다.

선생님 덕분에 열쇠를 찾았네요. 미안해서 어쩌죠? 저 때문에 출근이 늦어져서. 아뇨. 아직 여유 있어요. 성욱은 친절하게 웃으며 여자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색기가 흐르는 얼굴은 호감이 갔고 무엇보다 터질듯이 풍만한 바디라인이 성욱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섹시한 목소리는 또 어떤가. 저런 목소리의 여자가 지르는 교성은 어떨까.

이웃 살면서 성함도 모르네요. 명함 한 장 주세요. 오늘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커피한잔 살께요. 아 그래요. 그거 좋죠. 성욱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아침부터 왠 떡이냐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성욱은 꼭 연락주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아쉽지만 출근길을 서둘렀다. 백미러로 여자를 살피면서 말이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우중충한 아내에 대한 근심걱정과 짜증을 상쾌하고 발랄한 아래층 여자가 몽땅 몰아내 버렸다. 속물인 성욱은 극단적일만큼 단순하기도 했다.

PART11.박수진.

삶의 만족도에 있어서 결혼한 남자와 미혼의 여자 보다 낮은 것은 미혼의 남자이고 그보다 더 낮은 것은 결혼한 여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언제 유행했더라......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굉장한 진리가 숨어있는 명언이었다. 결혼한 여자는 사랑이나 행복지수도 낮을 게 뻔하다. 일하는 여자들은 즐거운가. 가사노동이며 육아에 시달리면서 직장은 직장대로 너그럽지 않다.

슈퍼우먼이나 워킹맘이 되도록 사회는 양팔을 벌리고 환영하며 부족한 노동력을 채운다. 그리고 남자들과 경쟁을 부축이면서 여자들의 능력을 쥐어짜내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쟁이란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남자들이 더 부드러워졌다고 해도 남자와 남편은 다른 생물이다. 남편이란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줌마라는 제 3의 성을 지배하는 먹이사슬의 최상층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불합리와 모순적인 경쟁에서 여자들이 살아가는 것은 그 지배계층을 사랑한다는 몹쓸 원초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사랑하는가. 그 이기적이고 게으른 생물을 사랑하는 만큼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편의 아내로 살아갈 수 있는가

모르겠다. 아침부터 침대에 누워 생각을 해보아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 하나. 사랑이 없으니 이혼하자. 그런 다음 무엇을 해야 하나.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자립을 해야겠지. 그런데 나이 마흔에 다닐 직장은 있어? 마트에서 일하자. 이제까지 호의호식 하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온 내가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두렵다. 사랑보다 강한 것은 삶이 아닐까.

머리가 무겁다. 더 이상 흐를 눈물도 없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머리를 매만진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린다. 명혜였다.

수진아 혹시 너 건호하고 통화했니? 나는 불에 데인 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니......아직 안 해봤어. 나는 거짓말을 한다. 어휴 진짜 기도 안차서.......명혜는 화가 났는지 흥분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말도 마 우리 모임 했던 날 건호하고 숙희 년하고 들러붙어 춤추는 거 봤지? 그래.....그랬지....... 내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있었다. 다시 머릿속의 비디오테이프를 돌리듯이 그날 건호와 춤추던 내 모습이 재현된다. 숙희 말고 나도 그와 춤을 췄다. 건호의 건강한 품에 안겨 작은 새처럼 떨던......나.

그날 밤 숙희랑 건호랑 잠수탄거 아니? 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둘이 배가 맞아버렸대. 일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숙희년은 아예 가출까지 했나봐. 내가 미친다. 미쳐. 뭐.....뭐라고....뭐.......주변의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았다. 뭐라고?

동창모임에서 그게 뭐라니. 우리 신랑 당장에 상조회고 뭐고 때려치우라고 난리야. 해도 해도 너무들 한다. 친구들 얼굴에 먹칠이 아니라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어디 가서 말도 못하겠다. 내가 말했잖아. 건호녀석 결코 좋은 애가 아니라고 일 년 전에도 유부녀랑 바람피우고 말썽을 일으켰다고 하던데 이번엔 숙희란다. 숙희 남편 나한테 전화해서 책임지라고 악다구니를 치더라. 우체국까지 전화해서 상사눈치 보여 죽을 맛이야.

숙희년 건호가 첫사랑이네 첫 키스를 했네 하더니만 구라는 아니었나봐. 그렇다고 미친년 어이구.........병원에서도 잘렸대. 첫 사랑이래? 응. 미친년. 첫사랑이 뭐 대수야. 첫 사랑이라잖니...... 뭐? 수진아 너 우는 거야? 네가 왜 우냐. 그냥.......나도 기가 막혀서.......어휴. 울지 마. 미친것들 때문에 우리 상조회 깨질지도 모르는데 왜 울어. 울고 싶은 건 나야. 건호 가입시켜 주지 않는 건데. 그래....네가 나빠. 명혜 너 나쁜 년이야. 미친년. 넌 또 왜 그래. 전화 끊는다. 다음에 연락할게.

나는 전화를 끊고 소리 높여 울었다. 아예 엉엉 울었더니 속이 다 시원해졌다. 그동안 질질 짜느라 눈물이 다 마른 줄 알았는데. 멈추지 않는 눈물, 내 몸속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온다. 이러다 말라비틀어져 살아있는 미라가 되는 게 아닐까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그동안 심장에 박혀있던 가시가 녹아 흐른다. 달뜬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옛 추억이 주었던 설렘이, 육체의 갈망이 모두모두 녹아 흘렀다. 건호의 선택이 내가 아닌 숙희라서 서글프고 자존심 상했지만 내가 아니라 숙희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나의 그리움은 다시 외로움만을 남기고 끝이 났다.

PART12. 민성욱

성욱은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늘만큼 업무시간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 때가 없었다. 아래층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명함을 주고 이틀이 지나서였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화였다. 여자의 전화목소리는 실제의 음성보다 더 섹시했다. 살짝 높지만 쾌활함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는 성욱의 귀를 자극하고 마음까지 자극해서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무척이나 에로틱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의 엉덩이가, 하얗고 커다란 젖가슴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해면처럼 말랑말랑한 여자의 젖가슴을 입에 물고 희롱하고픈 욕망이 묵직하게 그를 눌렀다.

퇴근 시간이 되자 쏜살같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성욱. 과장님 출출한데 파전에 막걸리 어떠세요. 이대리가 소리친다. 나 바빠. 이대리의 야유를 들으며 성욱은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다. 아내 수진의 우울증도 끝이 났다. 어제 저녁 퇴근해서 보니 평소의 아내모습으로 저녁을 차리고 있는 수진을 보자마자 성욱의 짜증도 끝이 났다.

그러니 오늘밤의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성욱은 수진에게 거래처와 회식이 있다고 전해두었다. 늦을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말라고. 그 말은 성욱의 외박을 암시하기도 했지만 불경기에 거래처를 잡기위해 남편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자의 과시였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여자를 만나기로 한 커피숍에 들어서자 성욱은 그녀의 모습을 한눈에 찾았다. 커피숍 입구에서 잘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는 손을 들어 성욱을 반겼다. 그는 주위를 재빨리 살펴본 후에 여자에게 다가갔다. 크림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진한 향수냄새를 풍기는 여자의 드러난 허벅지를 내려다보면서 성욱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