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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 작성일 2010-07-15
  • 조회수 307

◆ 1 ◆

교무실에서 나온 김훼인(金蟲人)은 지갑을 뒤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읽던 책을 빼앗겨, 눈앞에서 찢어지는 것을 본 것이 올해 들어 다섯 번째였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고 말해보았지만, 그의 담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스시의 마법사'를 찢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도서관의 블랙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교실에 들어섰다.

교실 안은 훼인의 공책을 낭독하며 킬킬거리는 녀석들로 소란스러웠다. 그들은 훼인이 들어오자마자 공책을 책상 위에 내던지고 나가버렸다. 훼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정리했다. 작년부터 시비를 걸어온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멋대로 훼인의 책상을 뒤져 그가 쓴 글을 꺼내들어 큰 소리로 읽곤 했다. 학생부장의 지도 후에는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낭독하기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부장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글은 다른 사람이 읽게 하기 위해 쓰는 것 아니냐.'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입학 후 1년이 지나고 2년째에 접어들어, 훼인은 매일같이 자괴감을 느꼈다. 아무리 글을 써도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어는 건조하고, 문장은 어색하고, 등장인물의 대사는 유치하고,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았다. 온갖 소재를 머리에 담아두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본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각했다. 하지만 문제점을 안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학과 동시에 세웠던, 졸업하기 전에 출판을 해보자는 목표가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그래도 노력해보자.'라며 펜을 들었지만, 마음만 앞서 시작부분만 끼적이다 덮어버리게 되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글을 쓰는 것이 성격에 맞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올라왔다.

해가 점점 길어져 늦게까지 열기가 식지 않고, 촘촘한 방충망 사이로 눈곱보다 작은 벌레들이 기어들어오는 때가 되었다. 날벌레들이 달라붙어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거리거나, 살충제를 찾아 교무실로 달려가는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는 와중에도 그는 펜을 들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딱딱한 껍데기를 두른 벌레가 날아와 그의 앞에 앉았다. 그 벌레에게는 커다란 두개의 턱이 있었다. 훼인은 사슴벌레인가 하고 벌레를 잡아 텅 빈 물통에 집어넣었다. 훼인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벌레가 물통의 벽에 부딪혀 죽지 않도록, 공책에 무의식적으로 뭔가 끼적였던 부분을 찢어서 구겨 넣어주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훼인은 벌레가 종이를 씹어 먹는 것을 목격했다. 사슴벌레는 나무의 수액을 먹고 사는 종류였다는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슴벌레 사육장에 톱밥을 넣어주는 이유가 톱밥을 먹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톱밥을 먹으면 종이도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그래도 과일 같은 걸 집어넣어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아직 뺏기지 않은 책에 몰두했다.

◆ 2 ◆

훼인은 주변이 소란한 것을 듣고 책에서 눈을 뗐다. 하교시간이 5분정도 남아있었다. 학생들은 벌써 짐을 싸고 문 밖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방을 챙기던 훼인은 물통 속의 종이가 말끔하게 사라진 것을 눈치 챘다. 눈이 의심스러웠다. 공책의 크기가 작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페이지가 저 작은 벌레의 뱃속에 전부 들어갈 만큼 작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물통 안에는 커다란 턱을 벌리고 위로 치켜든 채, 꼼짝도 않고 있는 벌레밖에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훼인은 공책을 한 장 더 찢어 적당히 구긴 뒤에 안에 집어넣었다. 이번에 집어넣은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는 벌레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훼인은 자기 전에 벌레를 한 번 더 살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벌레가 학교에서 나올 때의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레를 유심히 살피던 훼인은 벌레의 꽁무니에서 하얀 실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벌레가 뱉어낸 실의 양은 아까 벌레가 삼킨 종이를 단단하게 뭉친 정도와 비슷했다. 그리고 꼼짝도 않고 있던 벌레가 움직여, 뿜어져 나온 실을 앞다리로 다듬어 덩어리로 만들었다.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덩어리는 상자모양이었는데, 세로로 촘촘히 나눠져 있었다. 인터넷에서 가끔 보곤 했던, 취미로 만든 미니북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작업을 끝낸 벌레는 느릿느릿 움직여 구겨 넣은 빈종이 사이로 들어갔다. 하지만 먹지는 않았다. 집어넣어준 사과조각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훼인은 나무젓가락으로 벌레가 만들어놓은 것을 끄집어냈다. 훼인은 책을 펼쳐보았다. 책에는 맨눈으로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글씨가 촘촘히 적혀있었다.

벌레가 뱉은 것은, 달빛에 눈부시게 빛나는 백사장에 착륙한 외계소년과의 만남에 대한 글이었다. 내용상으로는 딱히 특이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글이었다. 줄거리만 읽었다면 아동용 SF동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 이 글을 아동용이 아니라 전 연령용으로 만들고 있었다. 우주를 날아다니는 비행선 안에서 바라본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유유히 회전하는 우리은하의 모습이라든지, 웅장하면서도 압도적인 경이감을 강요하는 말머리성운의 모습 등이 생생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져, 마치 글을 읽는 자신이 직접 우주선에 타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밀듯이 올라오는 감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훼인은 알 수 있었다. 이 글이 자신이 별다른 생각 없이 간단하게 끼적여놓았던, 찢어서 벌레에게 줘버린 종이에 적힌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벌레가 뱉은 글에는 그가 적었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다만, 수준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훼인은 물통 속의 종이뭉치를 끄집어내, 구겨진 종이를 펴서 짤막한 글을 적었다. 그리고 벌레 앞에 종이를 들이밀었다. 벌레는 종이의 맛을 보듯 더듬이를 움직여 종이를 두드리더니, 이내 턱을 움직여 종이를 잘게 찢어 삼켜버렸다. 그 뒤로 대략 한 시간 동안 벌레는 턱을 치켜든 채 꼼짝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에는 실을 뿜어냈고, 이내 조금 전에 만든 것과 비슷한 책을 만들어냈다. 이 책에는 수치스러운 조상을 둔 사람이, 아예 자신이 태어나지 않도록 하여 자신이 받은 모욕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과거로 돌아간 사람은 조상을 살해하려 하지만, 조상을 만나기 직전에 사고로 죽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내용 자체는 평범하고 단조로웠지만, 조상을 살해하기로 마음적은 주인공의 심정과 행동 하나하나를 절묘하게 표현하여, 실존하는 사람의 뒤를 몰래 따르며 그의 행동과 생각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훼인은 만족스러워하며 벌레를 다시 물통에 집어넣었다.

◆ 3 ◆

벌레가 완성된 글을 뱉는 것은 확실했다. 다만 여태까지 벌레가 뱉어낸 두 권의 책은 모두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였다. 이래서야 분량도 짧고 읽기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개선해야만 벌레를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지낸다면 벌레를 이용하기 어렵다. 그는 벌레를 제대로 다루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그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하는 자율학습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훼인은 벌레가 뱉은 두 편의 소설을, 인터넷을 뒤져 공모전을 하고 있는 사이트에 투고했다. 매월 공모를 하여 다음달 15일에 발표를 하는 곳이었다. 훼인은 발표가 날 때까지 글쓰기는 접어두고 소설의 설정작업에 매달렸다.

원래 글 쓰는 사람이 배척해야 되는 것이 과도한 설정놀이다. 설정으로 유명한 작가들도 처음부터 설정에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어줍잖은 사람이라면 그럴듯한 소재로 설정놀이를 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가 열의가 식어 글쓰기를 접게 되어버린다. 습작생에 불과한 훼인도 설정놀이를 지양해야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벌레만 믿고 설정놀이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훼인은, 벌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보니 항상 벌레가 든 물통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벌레는 훼인의 책상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기회가 많았다. 훼인이 조는 사이에 벌레가 그의 설정노트를 집어삼키는 일도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었다. 훼인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벌레가 노트의 강철 스프링까지 집어삼킨 상황이었다.

거의 일주일동안 짜놓은 설정이 날아갔지만, 훼인은 멍하니 벌레가 공책의 남은 부분을 먹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귀중한 벌레다. 일주일간의 노력이 날아가 조금 짜증이 난다고 눌러죽이거나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글이니 다시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벌레가 무슨 글을 뱉을지 기대하며 그는 벌레를 잡아 물통 안에 집어넣었다. 벌레가 글을 뱉는 것은 앞으로 한 시간 뒤. 자율학습 시간은 30분이 남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분 정도다. 그는 다시 한 숨 자고 난 뒤에 벌레를 집으로 가져가면 시간이 딱 맞을 거라고 계산하고 잠을 청했다.

종소리에 잠이 깬 훼인은, 설정을 짜는 데 유용할까 싶어서 공부하고 있던 세계사와 지리 과목을 필기해둔 노트들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걸 확인한 뒤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필기야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까지 집어삼킨 벌레가 어떤 글을 내놓을지에 대한 기대감만 늘어났다. 도서관에서 빌렸던 비싼 세계사책이 먹혔다는 것을 깨닫고는 암담해했지만.

그날 이후로 훼인은 벌레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 시간이 얼마 지났을 무렵부터 벌레는 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전에 뱉은 책이 삼켰던 종이만큼의 분량이었던 것을 보면, 이번에는 공책 세 권과 두꺼운 역사책 한 권 만큼의 분량을 뱉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벌레가 책을 뱉어내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나,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이전의 책과는 달리 '지도로 보는 데세디아 대륙 역사'라는 제목도 적혀있었다. 밤을 새우며 읽은 감상은, 한마디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인류가 처음으로 발자취를 남긴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사람의 생각만으로 구상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수없이 이어지는 우연과 우연으로 인한 필연으로 짜여있다. 미친 작자가 아니라면 그것을 전부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벌레는 그것을 단 일주일 만에 해낸 것이다.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 훼인은, 당장 이것만 세상에 내놓는다고 해도 역사에 남을 거장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장르소설은 이 세계관을 기준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면 영화든 게임이든 반드시 성공하지 않을까?

훼인은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생각해보면 가상의 역사책을 하나 출판한다고 해서 그것에 대단한 이슈가 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 책은 굉장히 정교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한정된 지면에서 훼인이 적어두었던 소재와 설정들을 모두 담느라 문체가 건조해져,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를 목적으로 한다면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는 당초의 목적대로, 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글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일단 흥미 위주의 가벼운 소설을 몇 편 출판한 뒤, 보다 심오한 내용을 담은 글도 출판하다가, 다섯 개의 작품을 출판한 뒤에 역사서를 출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알아볼 것이 많았다. 벌레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글을 만드는가? 벌레는 자신이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벌레가 기존의 작품과 연계하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한 것들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하기위해서는, 우선 거의 보름 전에 투고했던 글이 당선되어야했다.

발표일자는 가까웠다. 며칠만 기다리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훼인은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 번 자신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새 공책을 꺼내, 설정놀이를 재개했다. 이번에 짜는 것은 방금 읽은 '데세디아 대륙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글의 바탕이 될 설정이었다.

◆ 4 ◆

벌레가 '지도로 보는 데세디아 대륙 역사'를 만들어낸 지 며칠 뒤, 훼인은 당당히 대상을 받게 되었고, 그날로 부모님과 상담을 하였다. 다음날이 되자마자 담임교사와의 상담을 치렀다. 훼인의 글을 읽은 문과쪽 교사들의 입에 침이 마를 듯한 칭찬에, 훼인의 글을 비웃었던 학생부장도 당황해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자율학습에 불참한다는 것일 뿐이었기에 자유 시간 확보는 손쉽게 이루어졌다. 동급생들에 비해 하루에 약 네 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을 확보한 훼인은, 글을 쓴다는 핑계로 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벌레에게 이런저런 글을 적은 종이를 먹이는 실험에 착수했다.

일단 이미 대충 알고 있는 사실로는, 벌레는 종이를 먹고 꽁무니로 실 같은 것을 뿜어내며, 그것을 앞다리로 다듬어 책을 완성한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만들어낸 책의 내용은 벌레가 먹은 종이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벌레는 실을 뽑아내기 전에 턱을 치켜들고 한 시간정도 소화를 시킨다. 뽑아내는 책의 분량은 먹은 종이의 양과 일치한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로는, 사용되는 소재나 글의 장르뿐만이 아니라, 간략하게나마 스토리라인을 정해놓으면 거기에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데세디아 역사서는 당시에 집어삼킨 것이 설정집 뿐만이 아니라 함께 있던 역사 관련 글까지 집어삼켰기 때문에 역사서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알게 된 것은, 벌레가 책을 만드는 속도는 대략 분당 200타라는 것, 실을 뽑고 책을 다듬는 행위를 방해하면 벌레가 그 책을 만드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 한 번 먹은 소재는 잘 먹으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방해'라는 것에 벌레를 집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정도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벌레가 자신이 먹고 뱉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자신이 뱉은 글과 연계되는 새로운 글을 쓰는 것도 가능했다. 자신이 뱉지 않은 글과 연계되는 글은 만들지 못했다. 그런 경우에는 연계되는 부분이 없는 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훼인이 직접 쓰지 않은 글은 먹어도 크게 반영하지 않았다. 두꺼운 세계사책을 먹고도 그 내용이 실제 세계사의 패러디가 아니라 독창적인 세계사였던 것이, 세계사책의 내용을 참고만 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점은, 먹고 뱉다가 방해를 받아 만드는 걸 포기한 글도 일단은 만든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벌레를 방해하여 수포로 돌아간 글을 다시 만들게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확인 작업은 끝났다. 그는 벌레에게 '데세디아 배경, 300페이지 소설책 10권 분량, 한 권씩 끊어서 생산' 등의 내용이 적힌 종이와, 10권 분량에 해당되는 만큼의 종이를 벌레에게 내밀었다. 벌레의 속도를 보면 한 권에 하루가 소요된다. 하지만 저번의 역사서와는 달리 이번 책은 한 권마다 만들도록 해놓았으니, 당장 다음날부터 연재가 가능하다. 불필요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글을 내는 시간을 적당히 두어야 한다. 그러니 일생동안 낼 수 있는 책에는 한계가 있다. 출판은 빠를수록 좋았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온 훼인은 장르소설로 유명한 사이트에 계정을 생성했다. 그리고 벌레가 하루 동안 뱉어낸 글을 적당히 나눠 올렸다. 제목은 벌레가 정한대로 '계승의 자격'으로 하였다. 아무래도 왕위의 계승권이 남자에게만 있는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숙부에게 쫓겨난 공주가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는 내용의 소설 같았다. 첫날에는 한 권 분량을 한꺼번에 올린 뒤, 다음날부터는 출판제의가 들어올 때까지 매일 일정 분량을 연재하기로 했다. 벌레가 뱉어낸 소설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기에, 훼인은 글을 다 올린 뒤에 조회 수가 몇이든, 무슨 댓글이 달렸든 신경 쓰지 않고 사이트에서 나와 버렸다.

◆ 5 ◆

훼인의 글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루 만에 출판제의가 들어와, 나머지 분량은 연재하지 않고 곧바로 출판하기로 했다. 훼인은 마지막으로 다듬는다는 핑계를 대고 한 달을 버텼다. 한 달 동안 벌레가 뱉은 글을 모두 컴퓨터로 옮긴 뒤,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컴퓨터로 옮기면서 생긴 오탈자를 수정하는 작업과 디자인 작업 등을 거치느라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되었다.

그러는 동안 점점 소문이 퍼졌다. 한 권 분량을 올린 바로 다음날에 '이후의 내용은 출판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온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훼인과 계약을 맺은 출판사에서 홍보를 위해 한 권 분량을 공개하도록 한 것이라고들 이야기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좋은 평가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계승의 자격'을 전부 컴퓨터로 옮긴 뒤, 훼인은 계획을 바꿔 예전부터 써왔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다음 작품을 내기로 했다. 인세로 스캐너를 구입하고 이미지에서 텍스트를 추출하는 프로그램을 구하는 등의 준비를 갖춘 그는, 보름 뒤에 이름 있는 장르소설 공모전 중 세 곳에 각각 다섯 권 분량의 글을 투고했다. 결과는 볼 것이 없었다. 훼인의 수상경력을 화려하게 장식할 뿐이었다. 거기에 힘입어 투고했던 세 작품은 물론, 처음에 내보낸 '계승의 자격' 역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훼인은 탄탄한 플롯과 유려한 문장, 빠른 연재속도를 자랑하면서도, 항상 기존의 글과는 다른 글을 내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훼인을 칭송하기 바빴다. 기존의 장르문학이 형편없음을 논하던 사람들도 훼인만은 예외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를 비웃었던 학생들은 그에게 사인을 받지 못해 안달이 났다. 순문학을 지향하던 작가들도 장르문학에 발을 들였다. '그림으로 보는 데세디아 대륙 역사'도 출판되어, 장르문학을 쓰는 이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데세디아 대륙을 세계관으로 하는 MMORPG 게임은 계약 때부터 주목받았고, 거의 처음으로 국내 장르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다. 해외도 훼인의 글로 인해 시끌시끌해졌다. 세계는 훼인 이전과 훼인 이후로 나뉜다는 발언도 나왔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 써낸 글이 5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 말도 과장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훼인이 잠도 안자고 글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마약중독자라느니, 정신병원에 갇혀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하지만 온 세계를 시끌벅적하게 만든 훼인은, 방 안에 틀어박혀 벌레의 식성을 통제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기껏 장편으로 만들 수 있도록 소재와 스토리라인 같은 것을 적어놓은 것을 벌레가 먹고 콩트를 만들어 버릴까봐, 그는 모든 것을 USB 메모리에 저장해두었다. 그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기에 담겨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단편적인 단어와 문장의 나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훼인이 마지막으로 종이에 제대로된 글을 쓴지는 한참 지났다. 자신의 머리로 장문의 글을 써본 것도 이미 오래 전이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쓸 때도, 교수에게 제출할 리포트를 작성할 때도 벌레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그는 세계적인 작가로 불렸다.

◆ 6 ◆

첫 출판 이후로 5년이 지났다. 매년 두 편 씩의 책을 내며 전설적인 존재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그는 세계관의 확장을 결심했다. 데세디아 대륙의 역사는 만족스럽기는 했지만, 자신이 담고자 했던 것을 모두 담지는 못했다. 분량도 너무 적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대륙의 역사를 담기에는 지면이 한정되어 내용이 조금 풍부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몇 년간은 우려먹을 수 있을 테지만, 그 이후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두 배 분량으로 새로운 대륙의 역사를 만들고자 했다. 다룰 것은 새로운 하나의 대륙만이 아니었다. 데세디아 대륙의 역사를 포함한 세계 전반의 역사와 함께, 고립되어 외부와의 교류가 없었던 데세디아 대륙과는 달리 오랜 옛날부터 상호작용을 주고받았던 여러 개의 대륙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었다. 그리고 현재 집필되어있는 데세디아 대륙의 역사 마지막 부분에 이어, 데세디아 대륙이 세계의 다른 대륙들과 교류를 시작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연계시킬 생각이었다. 상세하게 기록된 약 다섯 개의 대륙의 역사라면, 적어도 훼인이 살아있는 동안은 소재가 고갈될 일이 없을 것이었다. 부족하면 보다 미래의 일을 다루어 SF 시장을 개척하면 그만이다.

훼인은 그동안 USB 메모리에 기록해놓은 것들을 선별하여 인쇄한 뒤, 대량의 종이와 함께 벌레에게 내밀었다. 훼인은 그렇게 벌레를 방치해두고 몇 개의 잡지에 연재할 글을 구상했다. 연재할 잡지의 성향과 요즘의 유행을 알아본 그는, 적당히 소재를 타이핑하여 습관적으로 USB 메모리에 저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벌레가 USB 메모리의 연결단자를 씹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 무심코 벌레가 종이만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기억을 돌이켜보니 벌레가 공책의 철제 스프링도 씹어 먹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걸 떠올렸다고 해서 벌레가 USB 메모리를 씹어 먹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훼인은 처음으로 설정공책을 먹혔을 때처럼 낙담을 느꼈지만, 이내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담고자 하는 모든 것을 벌레에게 먹여둔 상황이었다. 소재야 얼마든지 다시 떠올리면 되니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벌레가 어떤 글을 만들어낼지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잠에서 깬 그는 벌레가 컴퓨터에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벌레가 자신의 꽁무니를 컴퓨터의 USB 패널에 연결시키고 있었다. 컴퓨터에는 이동식 디스크가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표시되었고, 그 안에서는 텍스트 파일 하나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내용을 확인해보려고 해도 여는 것이 불가능했다. 훼인은 벌레가 자신이 먹인 백과사전 두 배 분량의 종이가 아니라 컴퓨터에 글을 써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벌레가 먹은 USB 메모리의 용량만큼의 글이 생성될 것이었다. 훼인은 이동식 디스크의 등록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자신이 구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용량이 16GB인 것으로 나타났다. 훼인은 벌레가 분당 200타의 속도로 16GB를 채우는 데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보았다. 그리고 약 160년이 소요된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160년 뒤에 완결이 난다고 해봐야 이미 훼인이 죽은 뒤다. 당장 벌레를 컴퓨터에서 분리시키고, 새로운 글을 쓰도록 하는 것이 나았다. 방대한 역사가 날아가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데세디아 대륙의 역사만으로도 이미 그는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벌레를 컴퓨터와 분리시키지 못했다. 5년 동안 짜놓은 설정들이 한 번에 날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벌레는 한 번 먹은 것은 다시 먹으려 들지 않으니, 그것을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서가 완성되었다면 가져왔을 막대한 효과에도 미련이 남았다.

훼인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거르면서 벌레 앞에 앉아 손을 뻗었다가 거두기를 반복했다. 눈 밑은 검게 변했고, 수염은 지저분하게 자라났다. 허기 때문에 팔이 떨리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벌레만 계속 노려보며 팔을 뻗었다 거뒀다 했다.

그러는 와중에, 그와 계약했던 출판사들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계속 연락이 닿지 않자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과일바구니를 한 아름씩 안고, 문안인사를 핑계로 훼인을 찾았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곳에서 참지 못하고 들이닥치자 이에 질세라 다른 곳에서도 부리나케 따라나선 것이다 보니, 그리 넓지 않은 훼인의 집이 북적북적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훼인에게 굽실굽실 거리며 연재를 독촉하면서, 다음 작품에 대한 의뢰를 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이야기를 하던 그들은

"훼인님, 당장 이번 주말에 인쇄기를 돌려야합니다. 아무쪼록 빨리 글을 주셨으면……."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저번 주까지 글을 보내주시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아니, 이 사람들이. 겨우 한 편 펑크 낸다고 문제가 되겠습니까? 너무 닦달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훼인님, 올해 상반기에 출판하실 작품은 저희 출판사로……."
"당신들이야말로 늦어도 상관없는 일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저희는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맞습니다. 정기연재 중인 글이 더 급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상반기 출판은 우리가 맡기로 이미 결정 났습니다."
"아니, 누구 맘대로 당신들이 맡겠다는 거야?"
"어, 말을 놔? 말을 놔?"
"그래, 놨다. 어쩔래?"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다가 결국엔 서로 멱살을 잡고 투덕거리게 되었다.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출판사의 직원들끼리 편을 먹고 경쟁 중인 출판사 직원에게 올라타 주먹을 날렸고, 그걸 구하기 위해 자기편의 직원위에 올라탄 상대편 직원에게 발길질을 하려다, 오히려 상대편의 머리에 부딪혀 얼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기도 했다. 가져온 과일들은 전부 깨지고 으깨져 밟고 미끄러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몸싸움은 점점 과격해졌다. 사소한 비명 정도는 눈길을 끌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훼인은 벌레를 노려보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밥그릇인 훼인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비되다보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한 사람이 훼인에게 달려들어 그를 밖으로 끌어내려 들었다. 그걸 본 다른 사람들은 훼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훼인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머리카락도 한 움큼씩 뽑혔다. 싸움의 한복판에서 훼인은 기절한 사람들의 밑에 깔렸고, 그 역시 정신을 놓게 되었다.

한참이 지나 훼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방 안에 서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엉망진창이 된 방을 본 훼인이 놀라 일어나려 했지만, 자신을 덮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한참을 버둥거리고서야 인간더미에서 빠져나온 훼인은 벌레의 상태를 살폈다. 컴퓨터도 이미 박살나 있었기에, 그는 어둑해져가는 방의 구석구석을 뒤져야했다.

훼인은 간신히 벌레를 찾을 수 있었다. 벌레는 유난히 뚱뚱한 출판사 직원 중 하나의 발에 붙어있었다. 이미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