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작성일 200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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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퍼와 사귀는 헤로인 중독자 삼촌과 하늘에서 온 몽구스를 왜 함께 쓸 수 없단 말인가?’
단순히 발음했을 때의 어감이 같아서가 아니라, 주노 디아스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됐고, 동시에 그가 지은 책들을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한 건 알베르토 푸겟이 중남미 작가들이 서구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적 지형이 변화했다는 말에 대해서 그가 한 말을 보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의 줄거리보다도 저 글을 먼저 봤다는 소리다. 공감했다. 그러게. 저걸 함께 못 쓸 이유가 뭐가 있어? 예술 세계의 문제는 ‘자신의 작품이라고 인장을 찍어줄 개성을 가지고 있느냐’ 인것이지.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사실 보다가 살짝 놀랐는데 줄거리를 보지 않고 바로 봐서 그런지 작품이 이 정도로 잔혹한 느낌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영화로 치면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나 나카시마 테츠야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다 무너져가는 음울한 황학동과 밑바닥 인생들, 그리고 소설 속 오스카 와오와 비슷하게 인생에서 온갖 고난을 겪은 여인, 하지만 그 영화들에선 잔혹한 현실과 발생하는 사건들과 달리 적절한 유머와 흥겨움, 놀라운 판타지, 그리고 예상치 못한 감동이 어울리지 않을 듯 하면서도 서로 어울리게 잘 들어가 있다. (물론 그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닐지 몰라도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웃음을 짓게 작품들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다.) 황학동과 무자비한 인간말종들 속으로 떨어진 요술공주 밍키, 언제나 유쾌하고 해맑은 디즈니랜드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같은 경우엔 독재정권에 의해 박살난 집안을 통하여 정치적인 면을 얹어 놓았고 사랑을 꿈꾸지만 냉정한 사람들에 의해 처절하게 망가져 가는 인물들이 있으며, 인물들의 삶을 얘기해주는 화자 (겸 작품의 등장인물) 의 냉소적인 말투가 독자들에게 블랙 코미디의 진수를 선사한다. 재미도 있고, 동시에 뼈저리게 아프다.
이 작품은 오스카 와오와 그의 가족들의 인생도 같이 다루고 있다. 주가 되는 것은 오스카와 그의 누나 롤라, 어머니 벨리시아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한 데 모아놨다기 보다는 작품 전체에 흩뿌려 놓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뒤의 내용이 어떤 것이 나올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당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참 여러차례 머리와 가슴이 강타당하곤 한다. 푸쿠.. 과연 이것은 뭐라고 해석해야만 하는가? 오히려 난 푸쿠의 의미를 책 표지 뒷면을 보고서 알 수 있었다. 세대에 걸친 '저주'란다. 아니면 유럽인들이 신세계에 끌어다 놓은 저주와 파멸의 의미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고. 트루히요의 손아귀, 폭행, 암, 고문, 고발, 비난.. 이 모든 것이 '푸쿠'가 된다. 그리고 오스카 가족들은 그들이 인생에서 겪을 모든 고난이란 고난은 다 당하고야 만다. 생지옥이 여기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감탄을 느꼈는데 여기서 하나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이 비극적인 푸쿠 속에서도 그것을 당하는 인물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동력과 꿈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묘사하는 것과 그 행위들이 헛되지 않다는 걸 말해주는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이 등장하게 되면 언제나 냉소적인 표현을 쓰던 화자 / 혹은 작가 주노 디아스도 그 표현을 자제한다.) 그들에겐 자신의 인생을 걸고 겪어냈던 일이 있으며 그 일들은 모두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자격을 가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 아니던가. 무력으로 잔인하게 욕구를 채우는 트루히요와 동등한 위치이며,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떳떳할 수 있다는 건데 말이다. 트루히요의 인생은 우리나라의 어떤 기획재정부 장관이 떠벌렸던 것처럼 ‘돈을 아주 원없이 써봤다’의 인생과 다를 바 없는 저질 중의 저질이다. 그 인생이 행복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말 자신있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그는 과연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눈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지의 여부를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하게 나올 답이니까. 지은 죄가 많으니 주지육림 퍼레이드를 벌여도 평생을 마음 놓고 즐기지 못했겠지. 그 덕에 최후도 아주 끔찍하지 않았던가. 그에 반해 오스카와 그의 가족들의 삶은 찬란하게 빛났다. 사람들과 화자는 처음엔 오스카를 무능력하고 결점투성이의 오타쿠로 본다. 실제로 그는 결점투성이에다 ‘정상적으로’ 살아가기엔 무리다. 오스카도 처음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망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는 절망에서 벗어나 떳떳하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 처음엔 조롱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던 화자와 독자들이 한없는 신뢰를 보내게끔 만든다. 그 때문일까. 처음엔 산토도밍고와 여러 정치 상황을 얘기해 주는 것과 동시에 냉소를 머금게 할 정도로 비꼬는 투가 강했던 주석 (책을 보다 보면 주석이 본문 밑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뒤로 넘기게 된다.) 도 정보만을 전해주려는 듯 점점 객관적인 태도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주석으로 끝맺음한다. ‘아무리 먼 곳으로 여행하더라도, 이 무한한 우주의 어느 곳에 가더라도,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화자는 마침내 이렇게 얘기한다. ‘알았다 와오, 이 자식아. 네가 이겼다.’
‘책이 백지에요.’
그래픽 노블의 걸작이자 개인적으로 팬인지라 이 책에서 언급해 줘서 은근히 반가웠던 <와치맨>에선 마지막에 에이드리언 바이트와 닥터 맨해튼의 대화 부분이 등장한다. 바이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게 뭔지 궁금하다면 작품을 한 번 보시라.)을 맨해튼에게 얘기하지만 확신을 느끼지 못한 듯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물어보는데, 닥터 맨해튼은 결말은 없다고 말하며 사라진다. 몽구스의 말을 끝내 가르쳐 주지 않고 공백을 남겨둔 것처럼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이 소설이 얼마나 치밀하게 구성이 되어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벌써 주석과 화자의 태도만 봐도….) 책이 백지였다는 것도 ‘Nothing is written'과 같은 말인 것일까. 벌써 남은 부분도 푸쿠로 끄적여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모든 것은 비어있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하는 거지. 정해진 건 없다. 뒤돌아보면 푸쿠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결국은 인생의 일부분일 뿐, 어쨌든 지금까진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제 책의 남은 백지 부분을 빛나는 부분으로 만들어야겠지? 오스카는 독자들의 입에서 ’멋있다‘란 소리가 나올 정도의 멋진 일을 하고 화자는 그 때 쯤 가면 참 찌질해진다. 그리고 그제서야 인생에 대해서 깨닫는데, 이 부분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직접 읽어봐야 안다. 끝내준다.
이제 마무리. 알베르토 푸겟의 말 속에는 주노 디아스도 포함되어 있을런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 속에는 주노 디아스의 자전적인 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도 산토도밍고에서 태어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산 인물이니까. 하지만 그는 미국의 문화에 동화되기 보다는 그 문화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적인 정서를 알맞게 변형시키고 정체성을 꿋꿋하게 지켜왔기에 이기에 서구와 동화되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보기엔 어렵다. 특히나 독재권력을 휘둘렀던 트루히요가 미국을 뒷배경 삼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동화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스카 가족은 사랑을 위해 온 몸을 다 바친 진정한 로맨티스트이자 독재정권에 대항한 투사였고, 그 정권을 무너뜨릴 정도의 강력한 마법을 쓴 마법사이자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그 자체다. 그리고 주노 디아스의 이 작품은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작품이며 동시에 어느 국가에서도 따라할 수 없는‘도미니카 산토도밍고의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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