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령)
- 작성일 200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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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
"네가 그 때……, 내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런 상황에 있지도 않았겠지?“
은수가 나지막히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지하실의 문을 온몸으로 밀어 젖혀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려다본 지하실 바닥으로는 천정에서 새어 들어오는 장맛비가 발목까지 올라올 만큼 차오르고 있었다. 은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 있으면 저 물이 무릎까지 찰 것이고, 또 허리까지 찰 것이고, 도무지 물이 빠져 나갈 구석이 없는 이 지하실의 구조로는 곧 어깨까지 찰 것이고 결국은 익사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돌고 있었다.
"너라도 나가야 하는데…….”
은수는 다시 중얼거렸다. 혹시나 둘 중 하나가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자신보다 염이 나가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웃기고 있네.”
염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섞여 잦아 들어갔다.
“그런 말하면 고맙다고라도 할 줄 알았냐?”
염은 첨벙거리며 지하실 구석에서 의자를 가져와 올라섰다. 점퍼를 벗어 물이 새어들어오는 천장의 구멍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손을 대면 댈수록 약한 지하실 천정이 습기를 먹어 더욱 뭉친 채 떨어지기만 했다. 거기다 꺼지지 않은 채 깜빡거리는 형광등도 문제였다. 감전당하기 딱 좋은 것이다. 염은 입밖으로 욕설을 몇 마디 내뱉었지만 그저 입에 붙은 의례적인 말투였다. 염은 다시 의자에서 내려와 아직까지 물이 차지 않은 계단으로 올라와 앉았다.
“나 오은수랑 같이 죽는거야?”
염은 은수를 올려다 보았지만 은수는 연신 진정되지 않는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보고 있었다. 염은 입을 삐죽거리다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디지털카메라의 밧데리를 확인했다. 다행히 방수 덮개 때문에 젖지는 않은 상태였다.
“반쯤 남았네. 네 껀 어때?”
은수는 여전히 물이 차오르는 바닥을 경계하며 주머니에서 디카를 꺼냈다.
“내것도 얼마 없어.”
둘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 그 동안에도 바깥의 장맛비는 더욱 거세어졌는지 지하실 천정으로 더 거칠게 들이치고 있었다.
“미안해.”
은수는 마음 속에 깊이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 말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내가 잘못한 거야. 널 끌어들인 거 말야. 심령사진이고 뭐고 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은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서 죽게 될까. 은수는 생각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염은 은수 쪽을 바라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미안해하려면 회원이 딱 너랑 너뿐이란 거 그거 미안해해라. 순수한 목적이든 뭐든 회원이 한 명만 더 있었더라면 밖에서 문 열여줬을 거 아냐. 굳이 다 쫓아내 놓고선.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하고 있다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하지도 말고.”
은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이 차오르는 바닥을 보니 은수의 목은 되려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염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니가 날 여기 끌어들였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줘. 그거 진짜 엄청 착각하는 거다. 난 그냥, 령들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목적을 가지고 말이야. 눈앞에 나타나는 걸 생각없이 보는 건 이제 지겨워. 그 때 니가 동호회 제의를 했던 거…….”
염의 눈이 갑자기 또렷하게 빛났다. 무언가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게 분명했다.
“들어왔다.”
염이 속삭였다. 은수는 튕기듯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디카를 켜고 LCD창을 통해 지하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런 중에도 염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지박령이야?”
은수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 좀더 강한 거야.”
습기어린 지하실 안에 갑작스레 차가운 바람이 새어든 듯 강한 한기와 함께 짠 바닷물의 냄새가 느껴졌다. 불안한 바다 냄새다. 염의 말이 맞는 것이다. 지박령은 이렇게 강한 냉기를 뿜지는 않았다. 시선을 돌리던 염은 마침내 지하실 구석 한 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은수도 디카를 같은 방향으로 돌려보았다. 형광등이 더 잦은 속도로 깜빡거렸기 때문에 LCD 화면도 알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무언가 희끗희끗한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은수는 고개를 들어 디카가 가리키고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실제 자신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계단 밑으로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 위해 집게손가락을 갖다댔다.
“찍지 마!”
염이 갑작스레 손을 들어 셔터 위에 올린 은수의 손을 잡았다. 은수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령의 한기만큼이나 염의 손도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는 거야?”
“기다려.”
염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말했다.
“뭔가 말하려고 해.”
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한 구석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제야 은수는 출렁이는 흙탕물에 발목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내지를 뻔했지만 입을 막고 참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은수는 LCD 창을 통해 계속 령을 바라보았지만 배터리가 언제 떨어질지 몰라 조바심이 나기만 했다.
“언제까지 기다려? 염아?”
숨죽여 말하는 은수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또다시 묻혀 버렸다. 그 때였다. 일순간 한기와 바다 내음이 더욱 거세어졌고 은수는 한기의 매개체가 자신의 곁을 지나가고 있다고 느꼈다. 순간 염이 은수의 손을 잡고 자신의 등뒤로 미는 바람에 은수는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다.
“뭐, 뭐야?”
은수는 령에 잔뜩 몰두해 있는 염의 매서운 두 눈을 바라보았다. 염은 그 어느 순간보다 거세게 은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염은 계속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강하게 무언가를 쏘아보고 있었다.
“안……좋아?”
은수는 그것이 별로 안 좋은 징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염은 은수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살기……, 이상해. 살기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해. 푸른색, 녹색, 진한 바다색이 보여. 감정도……, 여러 개 같지는 않은데 아니, 감정이 여러 개야. 분노, 살기, 그리움, 그런데 살기가 강해. 뭔가 말하려고 했다가 계속 입을 닫아.”
은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다지 많은 경력은 아니지만 심령사진을 찍기 위해 국내 여기저기를 쫓아다닌 지도 5년째였다. 물론 처음 카메라를 든 것은 단지 혜원의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지만 점차 령의 본질에 대해 궁금해진 은수는 점점 그 많은 곳들에서 자신이 직접 령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은수는 령을 볼 수 있고,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염의 능력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 5년 동안 함께 있었던 염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령에 관해 전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염은, 이토록 자세하고 세밀하게 령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순 없지만.
“어떻게 해야 해? 뭐라고 하는데?”
은수는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염이 느끼는 살기도 불안감도 자신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익숙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염의 표정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항상 심드렁하게만 보였던 염이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은수는 문득 염이 령을 지켜보는 모습을 자세히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볼 줄 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떻게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또다시 차가운 바다 내음이 은수의 귓볼을 지나쳐갔다.
“널 찾고 있어.”
“뭐?”
은수는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은수, 은수, 계속 부르고 있어.”
“날 왜 불러? 뭐라고 해? 무슨 말을 한다는 거야?”
은수는 염이 들을 수 있는 것을 왜 자기는 들을 수 없을까 다시금 아쉬움을 느꼈다. 은수는 온몸의 떨림이 이 상황의 긴장 때문인지 천장으로 새어들어오는 비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하지만 역시 빗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염은 공허한 눈으로 은수를 한번 쳐다보았다. 깜빡거리는 형광등의 조명에 비쳐 염의 갈색 눈이 순간 푸른색으로 빛났다. 은수는 어느 순간 염의 눈 안에서 령을 본 것 같았다.
“혜……, 원이……. 은수야. 혜원이야. 니가 찾던 혜원이야.”
염의 목소리가 파르르하게 떨렀다. 순간 은수는 바다 냄새를 가진 한기가 자신을 향해 들이닥치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야 말았다. 물이 떨어지는 지하실의 천장과 염의 얼굴이 일순간 은수의 시야를 스쳐지나갔고 은수는 무릎 근처께까지 차오른 지하실의 바닥으로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은수야!“
은수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물에 잠긴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혼란스런 시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코와 입으로는 썩은 물이 밀려들어왔지만 그 와중에서도 은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익숙한 촉감이었다. 혜원이다. 염의 말이 맞아.
은수는 숨통을 조이는 그 손길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계속 흐려지기만 하는 눈앞으로는 세차게 휘젓는 손-아마도 염이 것일- 같은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러지 마. 혜원야. 이러지 말고 니 모습을 드러내. 은수를 놔 줘.”
염은 애타게 중얼거리며 은수의 목을 쥔 그 무언가를 떼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염은 계속 헛손짓만 해댈 뿐이었다. 나는 곧 죽고 말 거야. 내 목은 곧 터지고 내 폐는 곧 이 더러운 물이 가득 채울 거야. 은수는 애써 앞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은수는 어느덧 목을 죄던 강한 힘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콧속으로는 계속 물이 흘러들고 있었다. 은수는 두 팔과 두 다리를 휘저으며 몸을 지탱할 바닥을 찾았다. 그리고 물 위로 튕겨오르듯 일어났다. 제대로 숨을 고르기도 전에 앞에 선 염이 보였다. 그러나 그 앞에 서 있는 형체를 본 순간 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잘못 본 거야. 내가 잘못 본 거야. 다소 주춤해진 빗물소리를 제외하고는 지하실은 잠시간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은수는 입으로 계속 “아닐 거야.”를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눈을 떴다.
"혜, 혜원야.“
은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혜원의 모습을. 죽을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를. 그러나 증오와 분노에 찬 그 눈빛과 표정을……. 그리고 그 혜원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듯 뒤에서 감싸안은 염의 간절한 모습을…….
“잘했어. 혜원아. 잘했어. 고마워. 니 모습을 보여 줘서 고마워.”
염이 그대로 혜원을 안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염은 탈진이라도 할 듯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염의 무릎은 물이 찬 바닥에 닿아 있었고 혜원의 작고 고운 발이 물 위에 떠 있었다. 은수는 그제서야 혜원이 그 때, 바로 그 때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혜원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그대로였다. 은수는 한참 동안 혜원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두려웠다. 그건 혜원이 자신과 염과는 분명 다른 세상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도아니었고 방금까지 자신의 목을 졸랐던 존재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18년 동안 마음 속에서 꺼내지 못하고 숨겨 두었던 가책 때문이었고 그토록 헤매며 그 가책을 덜어내기 위해 찾던 기회가 드디어 왔지만 결국은 가책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은수는 죽음에 가까웠었다는 조금 전의 그 순간보다도 그 존재가 혜원이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자신의 가책처럼, 혜원도 은수에게 죄과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나 혜원이 자신을 용서했기를 바란 것에 대한, 엄연한 응징의 의미처럼 말이었다.
“자기를 쳐다보래.”
다시 차가워진 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은수는 혜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네가 바랐던 거잖아. 무슨 얘기든 해 봐.”
염은 어느 새 혜원을 감싸안은 두 팔을 푼 채였다. 하지만 은수는 여전히 혜원의 맨발만 쳐다보았다. 창백하도록 푸른 빛의 그 작은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내가……, 그 때……, 정말……, 잘못했어.”
은수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물 위에 떠 있는 혜원의 발등 위로 뻗었다. 그러나 혜원의 발은 은수의 뻗은 손을 짓이겨 밟아 버렸다.
“미안해. 혜원아……. 정말 미안해.”
은수의 손을 그대로 밟은 채 혜원의 얼굴이 서서히 은수의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은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말하고 있어. 혜원이가 나한테 말하고 있어. 은수는 귓가가 얼어가는 느낌이었지만 혜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은수는 자멸하는 듯한 심정으로 뒤에 선 염을 쳐다보았다.
“여름…….”
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전히 은수의 손을 밟고 선 혜원의 쉭쉭거리는 듯한 숨소리가 이어졌고 염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여름, 그 때 여름에……, 넌 나를 버렸어. 나를…….”
은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은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은수는 자신이 혜원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알아듣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지금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내가 죽도록……, 넌 내버려뒀어. 너를…… 증오해.”
염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으며 생각했어. 너를……, 네가 가져간……, 내 생명을…….”
혜원의 쉭쉭거림이 더욱 거세어졌다.
“네가 똑같이……, 당해봐야 한다고……. 이 곳을 떠돌며……, 생각했어. 너를 찾아다니며…….”
은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혜원의 말은 모두 옳았다. 은수는 혜원의 어린 목숨을 빼앗았다. 그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네가…… 미워. 오은수. 이제 널 내가…….”
은수는 순간 18년 전의 앳되고 어린 목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었다.
“차지해야겠어.”
하늘과 맞닿은 바다의 끝자락은 결코 도달할 수 없을만큼 멀어 보였다. 열한 살의 은수와 혜원은 커다란 고무튜브를 하나씩 낀 채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깊이를 느끼며 동동 떠 있었다. 둘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까지 헤엄쳐 갈 수 있을까?”
“어디?”
“저기 저끝.”
은수는 손끝으로 수평선을 가리켰다.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혜원이 빙그레 웃음지으며 말했다.
“서울로 전학가면 참 좋겠다. 니가 너무 부러워. 윤혜원.”
은수가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난 서울가기 싫어. 너랑 헤어지기도 싫단 말이야.”
“나도 그래. 그래도 너 새 친구들 사귀면 금방 나 잊어버리겠지.”
은수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아냐. 편지도 하고, 방학 땐 할머니 집에 놀러오면서 너도 만날 거야.”
혜원의 큰 눈망울이 원망스럽다는 듯 은수를 바라보다가 다시 미소로 바뀌었다.
“죽을 때까지 너랑 안 헤어질 거야.”
혜원의 미소는 언제 봐도 알 수 없는 미묘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미소는 열한 살짜리 어린 아이의 천진한 그것 가기도 했고 주름진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 같기도 했고 죽은 엄마의 기억나지 않는 미소 같기도 했다. 그런 미소를 가진 혜원이 이제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서울이라는 것에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정말 나랑 안 헤어질 거야?”
“그래.”
혜원이 진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수는 배시시 웃었다. 혜원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은수는 알고 있었다.
“그럼 저 수평선까지 최대한 가까이 수영해 봐. 튜브 없이. 너 수영 잘 하잖아.”
은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손해볼 것도, 득이 날 것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혜원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엄마가……, 이 너머 이상은 수영하지 말랬어. 거기다 튜브 없이는 더 안 된댔어.”
그러나 은수는 말한 것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혜원에게 등을 보였을 뿐이었다. 잠시 후 혜원은 고무 튜브를 벗어 은수의 내민 팔에 끼워 주었다. 은수는 그제야 혜원을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 진 몰라. 잘 보고 있어야 돼. 은수야.”
은수는 튜브를 잡지 않은 손으로 혜원의 어깨를 쳐주었다.
“멀리 멀리 가야 돼. 최고 기록 세우는 거야.”
혜원은 수영선수라도 된 양 두 팔을 물 밖으로 들어올려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혜원의 뒷모습을 보며 은수는 새삼 보람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혜원은 무슨 일이든 해 주는 것이다. 혜원은 그런 존재다. 그러는 와중에도 혜원은 부지런히 수평선을 향해 헤엄을 치고 있었다. 혜원의 수영은 또래 아이들의 개헤엄이나 발로 물장구나 치는 수영과는 차원이 틀렸다. 언제쯤 혜원이처럼 수영을 잘하게 될까? 혜원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은수는 그런 생각에 골똘히 잠겼다.
“은수야! 나 조금 더 가 볼게. 오늘따라 수영 잘 된다!”
혜원의 외침소리와 함께 다시 그 모습이 사라졌다. 아마도 바다에 머리를 담그었으리라. 혜원은 오미터 정도 전진할 때마다 그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서너 번째 정도가 되자 은수는 점점 그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혜원의 모습은 이제 엄지손가락으로 가릴 만큼 작아져 있었고 아스라히 손을 흔드는 것은 같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은수는 이제 그만 혜원이 돌아와 주었으면 했다. 꽤나 오래 바닷물에 몸을 담근 탓에 약간은 한기가 들고 있었고 하늘도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혜원아! 됐어! 그만하고 와!”
은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혜원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만 오라니까!”
은수는 다시 소리쳤지만 혜원은 수평선을 향해 헤엄치는 것 같았다.
“아……, 춥다.”
은수는 생각했다. 이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혜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지겨웠다. 자기가 나가는 걸 보면 혜원도 따라서 수영을 그만 두고 밖으로 나올지도 몰랐다. 당연한 일 아닌가. 은수는 혜원의 튜브를 한 팔에 낀 채 모래사장 쪽으로 발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혜원 쪽을 바라보았다. 점이 되었던 혜원은 점점 더 작은 점이 되었다가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은수는 또 혜원이 얼굴까지 바다에 담그었겠거니 생각했다. 사흘 후 혜원이 물에 퉁퉁 불어 해변가에서 발견될 때까지도.
“오은수! 정신차려! 니 몸으로 돌아와, 빨리!”
염이다. 어둠 속에서 녀석의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은수! 정신차리고 눈뜨란 말야! 눈뜨고 날 봐!”
왜 이렇게 눈을 뜨기가 힘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수는 온힘을 다해 자신의 눈꺼풀을 위로 들어올렸다. 하지만 은수는 당황스러웠다. 눈을 뜬 은수의 시야에는 다시 거세어진 빗물이 들이치고 있는 지하실과 낯익고도 낯선 2개의 피사체가 서 있었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다급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염과 그 뒤에 선 채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
“어떻게 된 거야.”
은수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한 울림으로 지하실에 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건 뜻이 있는 소리라기보다 그저 뜻없는 일종의 떨림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오은수. 니 몸 보이지. 거기 지금 혜원이가 있어. 알겠어? 널 니 몸에서 쫓아 낸 거야. 정신차려. 오은수. 니 몸 되찾아야 돼. 알겠어?”
염의 다급한 목소리가 은수의 형체 없는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바다 냄새. 은수는 어느덧 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하실을 허리께까지 채운 빗물 속에 자신의 영혼도 녹아가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멀리 죽어 가는 자신의 영혼을 쳐다보고 있는 오은수, 아니 정혜원이 보였다. 그리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고함소리도 들렸다.
바다 냄새가 섞인 이 빗물은 혜원이가 끝없이 헤엄쳤던 그 바다일까? 그애의 살과 뼈가 섞인 그애의 몸일까? 이쩌면 이제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몰라. 이게 너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이렇게 갚을게. 내 몸을 가져. 잃어버린 네 인생을 내몸으로 살아. 너에게라면 비켜 줄게. 은수는 지하실의 빗물과 완전히 섞여 들고 있었다. 은수는 마지막 남은 시선으로 18년 전 혜원의 모습을 아주 잠깐 볼 수 있었다. 너한테 줄게. 내 몸을…….
순간 번개가 치듯 어두운 지하실이 단번에 밝아졌다.
“미안해. 혜원아……. 너 이러면 안 돼. 은수 몸에서 나가. 이건 옳지 못해.”
은수는 다음 순간 다시 물리적 육체를 가진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디카를 든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염을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비도 멈추었고 지하실에 들어찬 빗물은 어디에선가 빠져 나가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깜빡거리기만 하던 형광등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상적인 밝기로 지하실을 비추고 있었다. 은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줄어가고 있는 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염을 쳐다보았다. 어느덧 이성을 찾은 염은 평소의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은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염의 앞으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너 무슨 짓한거야!”
염의 얼굴은 은수의 손바닥 자국으로 금방 벌개졌지만 애써 은수의 손을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이 미친 새끼야! 니가 지금 무슨 짓한지 알아!”
은수는 미친 듯이 염의 얼굴을 때리다가 곧 그의 가슴팍을 때리다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이 나쁜 새끼야……, 니가……, 혜원이 또 죽인 거…… 알아.”
은수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제 물이 거의 다 빠진 지하실 바닥은 이제 은수의 발바닥께만 달랑거리며 적실 정도였다.
“니가 혜원이한테, 무슨 짓한지 알아…….”
“정신차려, 오은수. 혜원이는 이미 죽었어. 니가 그 앨 위해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마. 그앤 이미 죽었다고! 죽은 이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니 몸을 주겠다고? 헛소리하지마. 넌 가책 때문에 돌아버렸어.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염의 말은 지극히 감정적이었지만 또한 차가웠다.
“혜원이는 한을 품고 죽었어. 그 한이 혜원일 지금까지 령으로 떠돌게 한 거고. 그런 혜원이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건 니 몸뚱아리를 바치는 게 아냐. 오은수.”
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애의 맺힌 한을 풀어 주고 갈 곳으로 가게 해야 해. 그게 니가 할 일이야.”
“하지만 혜원이가, 혜원이가…….”
은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은 바닥이 흙탕물과 섞여 금방 흩어져 버렸다.
“혜원이 혼은 카메라 플래시에 분해되서 잠시 흩어졌을 뿐이야. 오은수. 오늘 왔던 것처럼 혜원이는 너한테 또 나타날 거야. 알겠어? 다시 나타나면 니가 혜원이한테 해 줄 일은 오늘 했던 그런 일이 아냐. 걜 정말 걱정한다면 말이야. 니 죄책감보다 그애를 먼저 생각해.”
염은 재차 물었지만 은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알겠어?”
염은 넋이 나간 듯 앉아 있는 은수의 양어깨를 꽉 그러쥐었다.
“대답해! 오은수.”
은수는 염을 쳐다보았지만 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은수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염아……, 토할 것……, 같아.”
“은수야.”
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은수의 어깨를 들어올렸다.
“왜 이래?”
염은 그 순간 머리카락이 얼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수는 은수이기도 했고, 은수가 아니기도 했다. 은수는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속이……, 이상해. 염……, 은수야……. 들어왔어……. 니 몸에……, 염아……, 혜원이가……, 여기, 아니…… 토할 거…… 같아.”
“이러면 안 되는데, 오은수.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아닌데…….”
염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혜원은 은수의 몸을 차지하려 한 게 아니었다. 공존이다. 한 몸을 차지하는 두 영혼이다.
“이제 어쩌려는 거야……, 어쩌려는 거야, 혜원아.”
은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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