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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사정

  • 작성일 2005-07-27
  • 조회수 366

 

 우연한 만남이란 인간의 감정을 위해 꽤 소중하다.            

                                                                                      <in 해변의 카프카>




1. 그 남자의 사정


 그러니까 어쩌다가 일이 그렇게까지 됐느냐……, 그게 궁금한 거지? 좀 지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일은 그 사건만 놓고 보면 그 애도 그렇고 나 역시도 너무 가벼운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깐…… 잘 떠올리면서 들어 봐봐.


<휘성의 “다시 만난 날”이 공간속에 울려 퍼진다.>


 그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설렁설렁 버스정류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어. 해와 달이 교차하고 있는 시간. 밝게 웃으며 거리를 걸어 다니는 많은 사람들과, 스쳐도 몇 십번쯤 스쳤을 거리. 적당한 강도로 옷깃을 여미게 해주는 바람. 그리고 4년 전 헤어졌던 첫사랑의 목소리가 문득 그리워지는, 정말 노래 제목마냥 소주 한 잔 생각나는 그런 늦은 오후였지. 정말 그런 적 있지 않나? 왠지 마음 한 부분이 심연의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그때 그 애를 만나게 된 거야. 정말 절묘하게도 우연히. 그 애는 6개월 전에 헤어졌던 내 여자친구의 친구였어. 그 당시 친하게 지냈었는데 그때 사귀던 애랑 헤어지고 연락이 뜸하게 이어지다가 결국엔 끊기게 된 거지. 어째든 서로 무지 반가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냥 헤어지기 아쉽다고 내가 술 한 잔 하자고 하니깐 자기도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술이 먹고 싶었다면서…… 그렇게 술을 마시게 된 거야.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손사래를 친다. 데이드림의 “You and Me”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아니 그렇다고 우리 둘 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은 아니었다구. 깜빡하고 말을 안했는데 나도 몇 번쯤 만나서 얘기를 해본 적이 있는, 그렇다고 친하지는 않은, 그 애 친구도 같이 있었거든. 그렇게 셋이서 술을 마시게 되었지. 못 본 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둥,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할 수 있는 얘기들 있잖아. 그런 얘기들을 했거든. 분위기도 되게 좋았고 말이지.


 그러다가 서로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깨지고 지금껏 없다고 했고, 그 애는 나랑 알기 전부터 좀 오래 동안 만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랑 6개월쯤 전부터 사귄다고 그러더라. 근데 사귄지 100일 조금 지나서 그 남자가 어디 외국으로 유학인지 어학연수인지를 가버려서 석 달은 더 기다려야 귀국한다고 했어. 그리고는 지금이 바람 필 절호의 기회라면서 농담으로 웃으며 말하길래, 나도 장난같이 그럼 나랑 바람 피자고 했지. 그냥 좋았어. 세 명 다 웃으면서 그렇게, 좋은 분위기였어.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공기를 크게 한숨 들이마신다. 내쉰다. 음악은 김광민의 “a song for you”>


 사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반갑다는 느낌 속에 보고 싶었다, 라는 느낌이 조금 존재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술에 취해, 즐거운 분위기에 취해 그 느낌은, 어느새 그.애.가.좋.다. 라는 느낌으로 많이 바뀌어져 있었어. 그리고 장난스럽기만 했던 말투도 시나브로 진지하게 되어버린 거야.


 “나랑 사귀자”


 알겠어? 만난 지 두 시간도 채 못 되어서 그렇게 되어 버린 거야. 감정이란 게 그렇잖아. 10년을 만나도 안 움직일 때도 있는 반면에 불과 10분만에도 두근거릴 수 있는 거. 누구를 탓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어.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그 애는 물론, 그 애 친구도 조금 놀란 듯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더라. 그렇다고 황당하다는 식의 표정은 아니었어.


 그 애는 내 마음이 거짓처럼 보이는 건지 장난인 것처럼 보이는 건지 자꾸 확인을 하더라구.「진짜로…? 정말…? 진심이야?」조금 언짢더라. 자꾸 확인하려는 모습이. 사람 마음은 변할 수도 있겠지만, 설혹 그 순간뿐일지언정 그 순간만은 진정이었거든. 그리고 조금 있다가 술집에서 나와서 헤어졌어. 아니, 아니, 그 애 친구와만 우리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



2. 그 여자의 사정


 그런데 그 녀석 꽤 순수한 면이 있어 보이더라. 아무리 맘에 들었다고 해도, 술기운이 작용했었다 치더라도, 사귀자는 말은 그렇게 쉽게 던지면서, 여자를, 여성으로 아껴줄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구.


<같은 시간, 같은 공간,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그의 옆에 앉아있는 그녀>


 내 친구와 헤어지고 그 녀석과 찾아간 술집 말이지. 키스정도는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라는 식의 암묵적인 벽이 테이블 사이사이마다 높게 솟아 있었어. 적당히 빈자리 - 사실 어딜 앉아도 적당한 장소이긴 하지만 - 에 앉아 술과 안주를 주문했어. 근데 안주를 뭐 주문했는지 알아? 대구탕을 시켰어. 대구탕. 입안에 비린내 나는 건 물론이고 이빨 사이에 커다란 붉은색 고추 가루가 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사람 앞일은 정말 모르는 거더라구. 그때 까지만 해도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어째든…….


<1미터 앞의 허공을 쳐다보며 회상한다. 생각을 정리한다. 침묵. 고요한 상태. 곧 정적은 깨진다.>


 의외더라구. 나도 카프카랑 쿤데라가 쓴 책들 좋아하고 다 보긴 했지만 그 녀석 꽤 책을 많이 보는 것 같았어. 그렇게 책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자연스레 음악 얘기를 했는데 내가 힙합이랑 랩을 좋아 한다니깐 의외라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짓더라.


 “아니야, 사실 국악을 좋아해”


 농담이란 걸 뻔히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희미하게 웃고는 내 옆에 앉고 싶다고 하더라. 좋을 대로 하라고 했지. 나야 뭐, 나쁠 건 없었으니까. 술잔과 수저를 살짝 들고는 조심스레 움직여 주먹하나정도 공간을 사이에 두고 내 옆자리에 앉았어. 근데 자리 옮기는 건 그렇게 양해를 구했으면서 손은 아무 말도 없이 덥석 잡아버리는 거 있지.


 “손잡아도 되지?”

 잡고 나서 뻔뻔스럽게도 그렇게 묻더라. 어쩌겠어, 정색을 하면서 싫다고 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어차피 나쁠 건 없으니까, 살짝 고개를 끄덕였어.


 그 녀석이 손잡았을 때? 아니, 내 옆자리로 왔을 때? 아니야, 나보고 사귀자고 했을 때? 아니, 아니야. 어쩌면 정말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내 감정의 미세한 부분이 동요 했는지도 모르겠다.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날수록 몸속의 피가 조금씩 빠르게 움직이더니 심장소리가 밖에서도 다 들릴 것처럼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어.


<그녀의 가슴 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녀는 이미 과거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 녀석, 어느새 술에 취한 듯 힘없이 내 어깨에 살짝 기대 있더라. 나 역시도 적당히 취해 있었고……. 그의 체온. 그의 얼굴. 그의 입술. 결국 내 심장소리는 목을 통과하고 혀를 거쳐 입 밖으로 나와 버렸어.


 “나랑 키스할래?”


 귀신이 하는 얘기라도 들은 듯이 잠시간 날 빤히 쳐다보더니, 살짝 미소 짓고는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맞춤을 해주었어. 나도 그 녀석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맞춤을 했고…… 그리고…… 키스를 한 거야. 입안에 남아있는 수분은 모조리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이 격정적으로.


 잘 모르겠어.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난 사귀는 남자가 있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거든. 그런데 그 당시 떨렸던 감정, 느꼈던 흥분.


 사람이 이성적으로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감정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라면, 나중에 내가 후회하지 않을 정도라면 어쩌다 가끔 감정을 마음대로 풀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알겠어? 사건의 전말은 이것으로 끝이야.

 

 일은, 그렇게 벌어졌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