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주
- 작성일 200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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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주>
추적자들이 더 이상 따라붙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지씨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십색히들 되게 끈질기네. 꼴랑 똥개 한 마리 가지고, 자기들 개도 아니면서."
"그 똥개 한 마리 살 돈도 없어 보호소에서 훔쳤으면서, 아저씨는 그런 소리 할 자격 없어요."
지씨가 노려보았으나 누렁이는 태연했다. 누렁이는 지씨 옆에 나란히 퍼질러 앉아 축대에 등을 기댔다.
"여긴 그래도 그늘이라 시원해서 살 만 하네요. 뙤약볕에 뜀박질하려니 죽을 맛이었는데."
"……."
지씨는 말없이 담배 한 대를 붙여 물었다. 그러자 누렁이는 붙임성 있게 웃으면서 앞발을 내밀었다.
"아저씨, 나도 한 대 줘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른 앞에서 맞담배질을 하려고?"
"개가 크는 건 사람 크는 거하고 다르잖아요. 아저씨 눈에는 내가 똥강아지로 보여도 개 눈에는 내일 당장 떡두꺼비 같은 강아지 한 마리 만들어 놓게 보인다구요."
"귀도 처진 놈이."
"내 귀는 원래 처진 귀예요."
"……."
"어차피 난 곧 죽을 거잖아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주는데, 곧 죽을 개 소원 하나 못 들어줘요?"
"… 그래도 안 돼."
지씨는 눈앞으로 내민 누렁이의 앞발을 탁 쳐냈다.
"넌 약으로 쓸 놈이야. 그러니까 금연해야 해."
"쳇, 간접흡연은 안 해로운 줄 알아요? 필터도 안 거른 생연기를 들이키는데."
"……."
"예, 마음대로 하세요. 담배도 아저씨 담배고 나를 먹을 사람도 아저씬데요 뭐."
"… 내가 아냐."
지씨는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땅바닥에 던지고 짓밟아 껐다.
"넌 우리 딸 약으로 쓸 놈이야."
"아저씨 딸이 몇 살인데요?"
"네 살."
"그런데 벌써 개소주를 먹어요? 허, 참……."
"수술해야 하거든."
지씨는 담배가 완전히 으스러지도록 밟아 비비고 또 비비면서 말했다.
"심장수술인데, 돈도 돈이지만 몸이 약해서 그냥 할 수가 없어. 버텨내지를 못한대. 의사 말로는 우유든 고기든 영양가 높은 걸 많이 먹이라는데, 수술비도 아직 다 못 마련했는데 그런 돈이 어디 있냐."
"그래서 날 훔친 거예요? 개소주 만들어 먹이려고?"
"그래."
"허 참, 네 살짜리 인생 기구하네."
누렁이는 옆으로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파란 여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둥둥 날아가고 있었다. 지씨는 옷 속을 뒤져 비닐봉지에 싼 꾸러미를 꺼내서는 누렁이 앞으로 던져 주었다.
"배고플 텐데 먹어 둬."
"뭐야, 통조림이잖아요? 참치네."
누렁이는 비닐봉지 꾸러미를 킁킁거리고는 지씨를 쳐다보았다.
"이건 또 어디서 구했어요? 이런 게 있으면 잘 먹어야 한다는 아저씨 딸이나 먹이……."
"어차피 그것도 훔친 거다. 빨리 먹어."
지씨는 누렁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넌 우리 딸 약으로 쓸 놈이야. 기왕이면 뭘 좀 먹은 놈이라야 약효도 있겠지."
"아저씨."
"왜?"
"따 줘야 먹죠."
"……."
지씨는 눈길을 외면한 채 참치 통조림을 따서는 비닐봉지 위에 쏟아 놓았다. 누렁이는 게걸스럽게 쩝쩝 소리를 내면서 그 참치 통조림을 먹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안 먹어요? 좀 남겨 둘까요?"
"배고프지 않아."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들리는데요 뭘. 개의 청각이라고요."
"이건 저절로 나는 것뿐이야!"
"예, 예, 니 마음대로 하세요."
지씨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도로 놓고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누렁이는 입가로 낄낄 웃으면서 참치 통조림을 먹어치우다 못해 비닐봉지와 빈 깡통에 남은 기름기까지 싹싹 핥고는 여전히 아쉬운 기색으로 혀를 낼름거려 입가에 묻은 찌꺼기를 빨았다.
"최후의 만찬, 잘 먹었어요."
누렁이는 지씨 옆에 엎드렸다.
"나 솔직히 이런 거 처음 먹어봤어요."
"……."
"진짜 진짜 진짜 맛있었어요."
"… 좀 더 훔쳐올 걸 그랬군."
"기왕이면 생선 말고 고기로 훔쳐오지 그랬어요."
"……."
"난 지금까지 쓰레기통에 있는 반쯤 썩은 것들밖에 못 먹어 봤거든요. 진짜 고기맛은 어떨까, 하고 늘 상상했어요."
"……."
"좋은 것만 먹고 큰 개였으면 좋았을 텐데, 난 사실 진짜 똥개예요. 길거리 도둑개요. 태어날 때부터 먹은 게 엄마 젖 빼고는 음식쓰레기뿐이었고, 아까 그 사람들이 먹여 준 것도 사료뿐이었는데 그래도 약효가 충분할까요?"
"충분해. 네가 뭐라고 해도 풀어주지 않아. 넌 우리 딸 약으로 쓸 놈이라고."
"아저씨 딸 네 살이라고 그랬죠?"
"… 그래."
"예뻐요?"
"세상에서 제일 예뻐."
"착해요?"
"세상에서 제일 착해."
"그런데 몸이 약해요?"
"… 많이."
"원래 그래요?"
"심장은 원래 그런데, 그것 말고는 내가 못나서,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좋은 걸 못 먹여줘서 그래."
"날 먹으면 낫는 거예요?"
"심장 말고는."
"그럼 다행이네요."
누렁이는 씨익 웃으면서 꼬리를 흔들흔들했다.
"어차피 보호소 사람들하고 같이 있었어도 난 결국 개소주 아니면 멍멍탕이 되었거나 아예 뼈까지 갈려서 돼지 사료가 되었겠죠. 기왕에 개소주가 될 거라면 아저씨 딸한테 먹히는 게 낫겠네요. 너무 잘 먹어서 심장에 기름이 덕지덕지 낀 아저씨들이나 늘그막에 젊은 여자한테 껄떡거리며 회춘하고 싶어 안달하는 노인네들보다는 훨씬 훨씬 훨씬 낫죠. 아저씨 딸이 날 먹고 힘이 생긴다면 적어도 개소주가 된 보람은 있을 거 아니에요."
누렁이는 땅바닥을 쓸듯이 꼬리를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친하게 지내던 고양이가 있었어요. 굉장히 착한 녀석이어서 도둑질 한 번 한 적이 없었는데, 너무 착해서 사람들을 믿다가 관절염 걸린 노인네들한테 잡아먹혔어요. 순 바보 멍청이들, 고양이 백 마리 잡아먹는 것보다 노란 거 한 장 붙이는 게 관절염에는 더 좋은데."
"노란 거?"
"그거 있잖아요, 캐낸다던가 뭔가 하는 거."
"……."
"그 녀석이 죽었을 때 난 맹세했어요. 내가 그렇게 죽게 된다면 차라리 그 전에 지나가는 자동차 밑에 뛰어들겠다고요. 난 절대 절대 그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주인을 만나서 사랑받는 개가 되지 못한 건 억울하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죽는다면 그건 진짜 억울할 것 같았거든요."
"……."
누렁이는 고개를 돌려 지씨를 쳐다보았다. 지씨는 눈길을 외면한 채 손만 들어 누렁이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다. 누렁이는 엎드린 채 꼬리를 더 크게 흔들었다.
"거기 다른 녀석들, 나보다 살찐 녀석들도 많았는데, 날 훔쳐 줘서 고마워요."
"……."
"아저씨 딸, 꼭 건강해졌으면 좋겠어요."
"……."
지씨는 딸을 일으켜 앉혔다.
"아빠, 이게 뭐야?"
"약이야. 먹으면 건강해질 거야. 자, 아."
지씨는 개소주를 숟가락으로 떠서 내밀었다. 딸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받아 먹기 시작했다.
* 2006년 6월 26일 글이니까 벌써 1년쯤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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