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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 작성일 2011-02-20
  • 조회수 204

[단편] 먼지

"삑- 에러번호 ab4408, 오작동신호가 확인되었습니다."

불이 꺼진 방이다. 이 방에서 불이 꺼짐은 밤을 의미하고, 밤은 모든 개체가 전용충전기로 연료를 보충하는 시간이다. 원래는 조용해야 할 시간이지만 방구석에 나열된 수십 개의 개체 중에 한 개체가 붉은 램프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소란을 피우고 있다.

"삑- 에러번호 ab4408, 오작동신호가 확인되었습니다."

그 개체는 AA 모델 중에서도 0001이라는 번호를 가진, 다시 말해서 AA 중 최초이며 최고(最古)인 로봇이다. 그런 AA0001이 왜 날뛰고 있는가 하면 왼쪽 가슴 부근의 접합부에 이물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AA0001은 그 이물질을 '먼지'라 규정했다.

"삑- 에러번호 ab4408, 오작동신호가 확인되었습니다. 자가복구 메뉴얼에 따라 40초 후 자동처리합니다."

AA0001은 정확히 40초를 샌 뒤에 먼지를 제거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성가시게도 먼지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덩어리져서 미세한 구멍으로는 나올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엔지니어가 있었다면 해체하고 클리닝한 후 재조립하면 끝날 문제지만, 아쉽게도 AA0001은 자기 자신을 해체할 수 없다. 그런 짓은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로 인식된다.
AA0001은 방법을 바꾸어가며 먼지를 제거하려 했으나,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처리할 수 없었다.

날이 밝는다는 건 불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AA0001이 있는 곳은 5층짜리 건물이다. 창문 하나 없는, 명백하게 공사규격을 어긴 건물이다. 물론 그건 사람 기준이다. 이곳은 로봇의 일터. 로봇에게 채광량 같은 건 의미 없는 수치다.
어쨌거나 밤낮의 구분은 전기 스위치의 ON/OFF로 구분된다. 완전한 밤, 혹은 완전한 낮. 새벽이나 황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 AA0001은 일하고 있다.

분투하고 있는 AA0001을 무시하듯이 전기 스위치가 올라간다. 초등학교의 운동장만 한 크기의 방이 밝혀진다. 아래층으로 통하는 컨베이어 벨트와 그 위에 놓인 금속 부품들이 초라하게 빛났다.
방구석에서 연료를 보급받고 있던 AA모델들은 각자의 일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AA0001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몸에 이상이 있어도 정해진 프로그램보다 우선순위는 아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소리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로봇들. 그러나 서로 부딪치는 일은 없다.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이나 반복된 완벽히 똑같은 길을, 프로그래밍대로 각자 걸을 뿐이다.
각자의 위치에 선 로봇들은 컨베이어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추어 부품을 조립한다. 그걸 종일 반복하다가 밤이 되면 전용충전기로 돌아가 연료를 보급받는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그들이 인간형 생산로봇의 프로토타입(실험 버전)이기 때문이다.
AA0001도 자신의 위치에서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 AA0001은 3시간 정도 같은 일을 반복하다가 문득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만드는 이 물건은 도대체 무엇일까?'

AA0001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로봇이 생각을 하는 건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이상하다. 물론 자체적인 사고회로를 지닌 로봇도 있지만 AA는 일개 생산용 로봇이다.

'먼지 때문일까?'

어쩌면 먼지를 제거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무언가를 잘못 건드려서 그리된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AA0001은 자신이 조립하고 있는 물체의 정체가 궁금했다. 조립 초기 단계라 자세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재료들의 연결. AA0001의 곁에 서 있는 AA들은 이게 무엇인지 알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AA0001에게는 목소리가 없었다. 사고회로가 생겼다고 해서 성대가 생길 리 없다. AA에게는 몇 개의 상황보고용 보이스(voice)밖에 없다. 녹음된 목소리 밖에 낼 수 없기에 생기는 소통의 단절.
AA0001은 작업장에서 벗어나 천천히 움직이는 레일 위로 올라섰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하자.'

이 컨베이어 벨트만 타고 있으면 다음 작업장이 나올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에 완만한 경사가 지더니, 어두운 터널이 다가와 AA0001의 모습을 삼켰다.

이로써 AA0001은 진정한 의미로 고장 난 로봇이 되었다. 절대적인 명령으로 입력된 '조립하는 일'의 중요도를 스스로 낮춘 것이다. 하지만 AA0001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이 가느다란 먼지 한 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AA0001이 일하던 곳은 건물의 5층이니 현재 이곳은 4층일 것이다. 4층도 5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를 기준으로 로봇들이 나열되어 있고, 그 로봇들은 정해진 행동으로 부품을 조립한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로봇 기종 정도일까. 5층은 AA밖에 없었지만 이곳엔 AA와 AB가 적당히 섞여 있다. AA는 5층에서 놓친 부품을 조립하는 역할일 것이다.
AA0001은 부품에 시선을 준다. 뼈대가 어느 정도 잡혀 있지만, 여전히 알아볼 수 없다. 아예 3층까지 내려가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경고음이 들렸다.

"삑- 에러번호 da7000, 불량부품 확인."

그런 소리가 한 로봇에서 들리더니 그 로봇을 따라 합창이라도 하듯이 다른 로봇들도 외친다. 경고등이 붉게 점멸한다.

"삑- 에러번호 da7000, 불량부품 확인."

"삑- 에러번호 da7000, 불량부품 확인."

"삑- 에러번호 da7000, 불량부품 확인."

"삑- 에러번호 da7000, 불량부품 확인."

"삑- 에러번호 da7000, 불량부품 확인."

"삑- 에러번호 da7000, 불량부품 확인."

"삑- 에러번호 da7000, 불량부품 확인."

AA0001은 그제야 문제를 알아차렸다. 이 수많은 기기가 불량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걸. 벨트 위에 있는 것을 부품이라고밖에 인식할 수 없는 로봇들이 AA0001을 보고 '잘못 생산해낸 부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바로 옆에서 자신을 회수하려 하는 AA를 피해 앞으로 나가자 그곳에 있던 AB가 회수하려 한다. 결국 로봇들로 가득 찬 그곳을 피해 AA0001은 3층으로 내려가는 터널로 사라졌다.

AA0001은 이 5층짜리 건물이 전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5층과 4층이 같은 구조였으니 3층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터널을 지나 빛을 받으며 바뀌게 된다.
또다시 불량품 취급을 받을 수도 없었기에 AA0001은 곧바로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5층과 4층은 컨베이어 벨트를 중심으로 한 AA, AB 모델의 일터들과 '밤'에 충전을 할 수 있도록 전용충전기를 구석에다가 나열해 놓은 모양이었다.
3층도 컨베이어 벨트를 중심으로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인간형 로봇은 단 한 대뿐이었다. 그 한 대뿐인 로봇도 생산작업은 하지 않는 듯 멍하니 서 있다. 대신 생산작업은 '손'들이 하고 있었다. 매니퓰레이터라고 불리는 일종의 로봇 팔이다. 자체가 로봇이기도 하다.
윗층의 인간형 로봇과는 달리 로봇 팔에는 작동하기 위한 통합된 전기선과 본체가 필요했기 때문에 방의 모습은 난잡해 보인다.
AA0001은 상황을 분석한다.
아마 프로토타입인 인간형 로봇 AA, AB는 정밀한 작업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초기 작업을 하는 5층과 4층에 AA, AB를 배치하고, 정밀 작업을 하는 3층부터는 매니퓰레이터를 배치했을 것이다.
자세히 보니 3층에는 4층과 5층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인간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프로토타입의 실험은 비공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3층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인간형 로봇은 무엇이지?

AA0001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제품에 대한 것도 잊고 인간형 로봇에게 다가간다.
몇 걸음 정도로 거리가 줄어들자 인간형 로봇의 눈 부분에 빛이 들어오더니 AA0001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로봇은 말을 했다.

"환영합니다. 안내자 '봇'입니다. LM사 후원의 안내 프로그램을 사용한 공장 내 견학을 맡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번 주 견학 오신 첫 번째 손님입니다. 본 건물은 4층부터는 비공개이며 답습 가능한 공간은 3층까지입니다."

AA0001은 자신을 봇이라고 소개한 안내로봇에게 어떤 말이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에겐 목소리가 없다.
봇이 부러웠다.
아니,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비록 목소리는 없지만 AA0001은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봇은 할 수 있는 말도 많고, 할 수 있는 행동도 많지만, 결국은 프로그램에 입력된 행동일 뿐이다.
AA0001은 '자유'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봇이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안내자 봇은 한 영상을 공중에 띄웠다. 홀로그래피다. 3D공간을 활용한 입체영상. 재생되는 것은 LM사의 광고다. 진부한 광고용 카피와 함께 비행기가 날아간다. 그리고 한 어린아이가 그 비행기를 잡는다. 비행기라고 생각되던 물체는 비행기 모형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즐겁게 웃으며 비행기 모형을 놓는다. 그러자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비행기 모형을 리모트 컨트롤러로 조종한다.
AA0001은 주위를 지나가고 있는 벨트에 시선을 준다. 그곳엔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춘 비행기 모형이 놓여있다.
그것이 AA0001이 만들고 있었던 제품이다.
궁금증은 풀렸다. 이제 5층으로 돌아가 자기 책무를 하면 된다. 그렇지만 AA0001은 돌아가지 않았다. 완성된 물건을 보고 싶다.
AA0001은 회사이념과 매니퓰레이터 작동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자 봇을 무시하고 '문'을 향해 갔다.

'우리는 이걸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거구나.'

2층에서 완성된 비행기를 보고 AA0001은 그런 걸 생각했다. 그건 어떤 일에 대한 만족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감정은 로봇에게 있어 말도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자, 이제 돌아가자.'

AA0001은 당황했다. 생각과는 달리 몸이 1층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바이러스? 혹시 이것도 먼지 때문일까? 처음 겪어보는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 AA0001은 그렇게 1층을 향한 계단을 내려간다.
AA0001은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을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떠올림에 당황한다. 뭘까, 하고 생각해보니 이건 안내자 봇이 보여주었던 광고에서 본 이미지다. 파란 하늘을 비행기 모형이 날고 있고, 아이와 부모는 푸른 들판에서 즐겁게 구경한다. 떠오른 이미지에선 비행기나 사람들은 제외되고 오직 배경만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지금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하나였다.

'보고 싶다.'

왜?
생각했지만, 확연한 답은 없다. AA0001은 그 사실에 대해서도 당황한다. 모두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생각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어쨌거나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기에 AA0001은 내려가기로 했다.
1층이 나왔다.

'비행기 모형을 해체하고 있는 매니퓰레이터들이 보이는' 1층이 나왔다.

인간의 사고력으로도 이해 못 할 광경을 로봇은 이해하려 들었다.
해체, 라고 하면 그건 불량품이라는 뜻일까. 그런 것치고는 양이 많은데다, 2층에서 내려오는 족족 분해하고 있다. 겉보기에도 불량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완성품을 해체하고 있는 거지.
AA0001은 그 해답을 곧 찾아내었다.
해체된 부품들은 벨트를 따라 '5층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뭐라고?
AA0001은 자신이 도출해낸 가장 합리적인 답을 나열하고는 아연실색했다.

5층에서 시작된 생산과정은 2층에서 마무리되고, 1층에서 해체되어 다시 5층으로 운반된다.

자기 자신이 통째로 부정당한다.
그 순환의 과정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광고에서처럼 웃는 어린아이도 없고, 흐뭇해하는 부모도 없다.

AA0001은 지금껏 무시하고 있었던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
5층에서도, 4층에서도, 3층에서도, 2층에서도, 그리고 지금 여기 1층에서도 그는 보고 있었던 것이다.
'먼지'로 가득 찬 작업장을.
'본래라면 깨끗해야 할' 작업장을.
주말인데도 이번 주 '첫 번째' 견학 손님이 AA0001인 작업장을.

인간이 사용할 터인 문에도 먼지가 덮여 있었다. 아직도 몸을 움직이고 있는 로봇들은 자체적으로 필터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건물에 더는 인간이 오지 않는다.
AA0001은 그렇게 서글픈 결론짓는다.

회사가 망해버렸을 가능성도 있고, 회사가 이 공장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가능성에도 이 공장을 남겨두는 이유는 없다.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AA0001은 5층으로 돌아갈 필요성을 잃어버렸다. 의미도 없는 일을 반복하는 건 로봇이나 하는 일이다. 그런데 AA0001은 로봇이다. 그 사실조차 AA0001은 무시했다.

나갈 것이다.
이 건물을 나가서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을 볼 것이다.
AA0001은 1층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문을 바라본다. 비상사태 때나 내려오는 잠금장치가 되어 있다.
그 잠금장치에 힘껏 몸을 부딪친다. 먼지가 피어오른다. 매캐한 연기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그래도 AA0001은 잠금장치에 몸을 부딪친다. 있는 힘껏 부딪친다.

"삑- 에러번호 zz9999, 물리적 위협 발견."

적색등이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한다. 위험을 알리는 목소리도 흐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AA0001의 의지가 아니다.
AA0001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부딪친다.

"삑- 에러번호 zz9999, 물리적 위협 발견."

시끄럽다. 난 이곳을 나갈 테다.
AA0001은 목소리가 녹음된 외부장치를 벽에 부딪치며 파괴했다. 지지직-하고 잡음이 새어나오지만, 잔소리보다는 낫다.
AA0001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부딪친다.
로봇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인간다워진 그것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잠금장치가 망가졌을 때 기이 AA0001의 신체는 40퍼센트 이상 파괴되었다.
AA0001은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다리를 다친 사람처럼 절뚝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AA0001이 건물 밖으로 완전히 나갔을 때, 그 로봇은 목격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

아무도 없었다.

쓸데없이 튼튼한 건물들만이 쓰러지지 못해 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생명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파란 하늘도 모래바람에 가려져 어둑할 뿐이다.
그건, 어쩌면 인간의 짓이다.
인간이 결국 폭주해버린 탓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무언가 커다란 재앙이 닥쳐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건물에 잠금장치가 가동된 걸 설명할 길이 없다. 잠금장치에 먼지가 쌓인 것을 보아 꽤 오래전의 일이다.
로봇의 머리는 멋대로 생각한다.
자신이 있던 5층 건물과 상황이 비슷한 건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지 않은 생명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바깥'에 생명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된 거야.
로봇은 계속 일을 해야 해.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들어오는 재료는 끊기고, 만들어야 하는데 만들 수 없어.
그렇다면, 만든 것을 부수고, 그걸 다시 조립하는 거야.
그건 의미 없는 일일까?
'사는 이유'를 위해 프로그램을 멋대로 바꾸고, 스스로 완성품을 해체하기에 이른 그 로봇들에게 그건 정말로 의미 없는 일일까?
AA에서도 0001이란 번호를 가진 '로봇'은 멋대로 판단할 수 없다.

자가발전기가 멈출 때까지, 5층 건물에 있는 로봇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다.
인간이 없는 이곳에서.
하지만, AA0001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돌아가고 싶어도, '조립'에 필요한 기능은 이미 정지한 상태다. 어차피 돌아갈 생각도 없다.

넘어졌다.
건물 내부에서와는 달리 바깥의 땅은 울퉁불퉁하고 걷기 힘들다. 넘어졌어도 AA0001은 일어섰다.
걸었다.
떠올리는 것은 하늘과 들판. 그 두 가지를 찾기 위해 AA0001은 여행한다.
등지고 있는 5층의 건물은 그의 집이었던 곳. 창문 하나 없는 그 건물의 유일한 구멍인, 그가 나섰던 문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꺼졌다. 벌써 밤이다.
AA0001은 걸었다. 목적이 없는 건 아니니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연료가 부족해진 AA0001의 몸은 강제로 전원이 꺼졌다.
거친 모래바람에 쓸려 넘어진다. 작동 중지.
흩날리는 먼지는 로봇에게 가로막혀 쌓여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을 의식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시간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까? 그래도, 시간은 지난다.
지구는 황폐해졌다. 그중에서도 어떤 도시였던 곳에, 한 물체가 쓰러져있다.
그것은 한때 AA0001이라고 불렸던, 다시 말해서 AA 중 최초이며 최고인 로봇이었지만,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로봇엔 바람에 떠밀려온 먼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나아가지 못한 먼지들.
그 먼지들 사이로 이색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나도 이색적이라서 금세 파묻혀서 지워질 것 같다.
그것은 로봇의 결함 부분에 피어났다. 왼쪽 가슴의 접합부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한 때 AA0001이 몇 번이고 제거하려고 시도했던, 밤새도록 빠지지 않아 결국 로봇에게 '생각'을 주었던 먼지.
그 먼지 속에 어떤 식물의 씨앗이 섞여 있었다.
햇빛도, 수분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오직 로봇에 쌓인 먼지의 양분에 의지하여 피어난 생명. 그 생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로봇이 그것을 목격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