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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 동안 관 속에서 할 수 있는 일

  • 작성일 2011-04-16
  • 조회수 309

[단편] 백만 년 동안 관 속에서 할 수 있는 일

#1 행복과 불면증

"20+(130*52*150)=1014020 (년)"
─서기 00년, 인간의 평균 수명을 구하는 식

가람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별로 졸린 것도 아니라서 굳이 자려 하지도 않고 멀거니 뜬 눈을 어둠에 잠긴 천장에 향할 뿐이다. 컴컴한 그곳에 상상으로 무언가 그리려 했지만, 뭘 그려야 할지 고민됐다. 고민하다가 지친 그는 말을 꺼냈다.

"나모야. 나, 잠이 안 와."

나모는 가람의 메이트였다. 메이트라는 건 학교에서 지정해주는 이성 짝꿍을 지칭하는 말로, 메이트인 두 사람은 한 방을 사용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연인이라기보단 남매에 가까운 느낌이다.
나모가 졸린 듯한 목소리로, 옆 침대에서 대답했다.

"우웅. 성인식이 바짝 다가와서 긴장한 것 아니야?"

글쎄, 가람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긴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

"성인이 되면, 우리는 관을 사용하게 되는 거지?"

가람이 그렇게 물어보자, 무슨 당연한 것을 말하느냐는 듯, 나모가 낮은 웃음을 지었다.

"너 수업시간에 딴생각 했구나?"

"안 했어. 그냥 해본 말이야. 알아, 안다구. 성인식이라는 게 관 속에 눕는 걸 말하잖아. 그런데 그게 정말 행복할까?"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연히 행복하겠지. 나는 벌써 기대되는걸? 관 속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하고 말이야."

가람은 메스꺼움을 느꼈다.

"나모는 관 속에서 무얼 할 건데?"

"후후. 그건 아무리 메이트라해도 비밀이야. 굳이 알고 싶다면, 성인식 전날에 알려줄 게."

성인식은 앞으로 이틀 남았다. 그렇다는 건 내일 알려주겠다는 뜻일까.

"나모야."

가람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나모는 잠들었나 보다. 그래도 가람은 말했다.

"소설 같은 데서 봤는데 말야. 옛날에는 잠이 안 올 때 별이나 양을 셌었데. 나도 그렇게 해 볼까 했는데 별과 양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 영상으로 본 것이 전부라서 그것들이 여러 개 있는 모습은 상상이 잘 안 가. 만약 이곳에 창문이 있었다면 별을 볼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 불가능 할 것이다. 두꺼운 먼지층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는 건 가람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별은커녕 달도 잘 보이지 않을 게다.
가람은 다시 어둠에 잠긴 천장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는 흑단 같은 밤하늘에 수놓아진 무한한 별을 상상해보았다. 물론 실패했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멋진 상상일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가람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천장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불면증이 날개를 달고, 나중에 다시 보자며 공허함 속으로 날아가는 모습만이 보이는듯 했다.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한 적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혹은 멀어져가는 불면증을 느끼며, 가람의 눈이 살포시 닫혔다.

#2 엿새 동안 150년의 꿈을 꾸게 해주는 장치

"꿈 옹호론자들이 곳곳에서 난동을 부리자, 결국 미연방은 꿈을 개인적 현실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그러나 이 법안은 실효되지 못했는데, 며칠 후 대대적인 국경해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으로 구식 건물을 폭파하고 관을 세우는 작업이 시작된 것도 이쯤이다."
─작자 미상, 『새로 쓰여야 하는 역사학』

널찍한 공간에 관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관 사이사이에 아이들이 서 있다. 이번 성인식을 앞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들뜬 표정으로 (주로 메이트와) 떠들며 관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물론 진짜 관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모형관일 뿐이다. 그래서 저 OC(오버컴퓨터)도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리라.
OC는 인간과 흡사한 목소리로 일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진짜 관을 보러 갑니다."

어떤 아이가 환호했다. 드디어 성인이 된다는 사실에 실감을 느끼나 보다.
OC는 몇 가지 일정을 말한 뒤 영상을 꺼버렸다. 아마 지금부터는 자유 시간이리라.
가람은 모형관 앞에 서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관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가람의 옆자리에 있던 플닙은 그런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플닙은 성큼성큼 가람의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뭐 하고 있냐? 관이라고, 관. 우리를 백만 년씩이나 살게 해줄 관 말야."

가람은 대꾸도 없었다. 무시당한 게 기분 나빴는지 플닙은 가람의 멱살을 쥐었다.

"겁쟁아. 관이 무서워? 으응? 옛날에 너 같은 애를 사회 부적응자라고 했다던데."

"그만둬."

누군가가 플닙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깜짝 놀란 플닙은 멱살 쥔 손을 놓아버렸다.
플닙의 손을 친 사람은 나모였다.

"OC가 없다고 해서 우리를 보고 있지 않을 것 같아?"

플닙의 올라가던 손이 멈칫했다. 체, 하고 플닙은 혀를 찼다. 플닙의 메이트인 놀애가 상황이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건지 가람의 눈동자는 관을 향해 있었다. 놀애가 플닙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갔을 때도, 나모가 괜찮냐며 물어올 때도, 오직 관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가람의 손은 관의 끄트머리를 쥐었다. 차가웠다. 칼날을 쥐는 것 같은 감각이 가람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피부에 도드라지는 소름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관'이라는 용어는 본래 시신을 담는 궤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가람은 재빨리 손을 뗐다.
저 상자가 엿새 동안 150년을 살게 해 주는 장치가 아닌, 죽은 자를 구속하는 감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3 종이학

"꿈의 세상이 판치는 세상이라고 해서 법이 필요 없을까? 아니다. 법은 필요하다. 꿈의 세상을 더 완벽히 하기 위해서이다. 아래는 내가 제안하는 관에 대한 '2대 법'이다.
·제한법: 관 과다 사용으로 말미암은 뇌사를 예방하기 위한 법. 최장수면기간을 6일로 제한한다. 그리고 관 사용 6일 후 하룻동안 재활운동을 권장한다. 즉, 관은 7일 단위로 운영한다.
·교육법: 뇌가 덜 성장한 성인 이전의 아이들에게 20세까지의 교육을 의무화 함. 이에 따라 '학교' 출범. 이면에서는 과거와 같은 체험이 불가해진 (지구의 황폐화) 아이들에게 가치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상 없이 추구하는 꿈은 행복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간의 평균 수명은 교육기 20년+관기 130년, 관기 130년은 1년을 52주로 계산하고 1주에 150년의 꿈을 꾸므로 130*52*150=1014000년, 즉 1014020년이 된다."
─OC, 『관에 대한 이해(교육자료)』

어젯밤에 늦게 잤기 때문에 가람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가람을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놀애였다.
놀애는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무언가를 꺼냈다. 놀애가 꺼내는 그것이 무엇인지 가람은 알 것 같았다.

"종이 맞지? 옛날 사람들이 글씨를 쓰는 데 이용했다는 식물성 섬유물질 말이야.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뽐내듯이 말하는 가람을 보며 놀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신기한 것은 지금부터야."

놀애는 종이를 구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구기는 게 아니었다. 저렇게 정성스럽게 구기는 것을 구긴다고 표현하는 건 어색했다.
접는 거였다.

"짜잔."

놀애가 접은 종이를 가람이 받았다. 놀애가 말했다.

"아까 플닙이가 널 괴롭혔잖아. 옛날 사람들은 이럴 때 대신 사과하면서 선물을 줬대."

가람은 왜 대신 사과하는지 이해 가지 않았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뭔데?"

"종이학. 아까 내가 한 건 종이접기라는 거야."

에헴 하며 놀애는 가슴을 내밀었다.

"학?"

"새의 종류잖아."

"학이 정말 이렇게 생겼니?"

아까와는 달리 놀애는 당황했다.

"글쌔. 실은 나도 학을 본 적이 없어. 그래도 날개가 있는 걸로 보아 새는 맞을 거야. 확실해."

날개……. 가람은 날개를 단 불면증이 천장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가람은 놀애에게 말했다.

"혹시 별도 접을 수 있니?"

놀애는 고민하다가 기다란 종이를 꺼내 뭔가 만들어 가람에게 주고 떠났다. 다섯 방향으로 뾰족한 입체였다.
그때 나모가 왔다. 그리고 가람이 손에 든 게 무어냐고 물었다.

"이건 학이고 이건 별이래."

"이상하게 생겼다."

나모는 웃음을 지었다. 가람도 따라 웃었다.
그래. 정말로 그렇다. 정말로 이상하게 생겼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소중해진 그것들을, 가람은 고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4 인공나무

"처음부터 그럴 작정은 아니었죠. 신체에 장애를 가진 이나 식물인간 상태인 사람들에게 꿈에서라도 자유를 주자는 취지였어요. 그랬던 것이 일반인을 포괄하면서 현재의 상태에 이른 것이지요.
사실 OC가 아니었다면, 이 연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아무리 시행착오를 거듭해도 성과가 나오지 않아 떠나는 연구원들이 많았거든요. OC가 연구를 도와주겠다며 자발적으로 나선 건,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았답니다. 그 후로는 완성까지 일사천리였죠."
─관 개발 사업 총 책임자 및 연구원과의 인터뷰中에서

저것이 바로 실패다.
어떤 과학자가 인공나무를 보고 중얼거렸다던 말이다.
아이들은 그 실패를 구경하고 있었다. 괜히 건드려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발길질을 하기도 한다. 쇠로 된 나뭇가지를 꺾으려 하는 아이도 있다. 하나, 그럴듯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아이들은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모두 떠나갔다. 그런데도 한 사람, 한 사람만은 그곳에 남아 빤히 나무를 쳐다보았다.
에너지 효율상으로 오히려 지구를 탁하게 만든다고 멸시당하는, 본래 이 오염된 대기를 깨끗이 하기 위해 나왔을 실패를 보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의 이름은, 나모였다.
나모는 나무를 보았고, 가람은 그런 나모를 보고 있었다.
아직 가람과 나모가 어렸을 적의 일이다.

가람은 성인식을 하루 앞둔 지금 인공나무 앞에 섰다. 지금도 나모가 했던 말이 기억나는 걸 보면 여간 충격을 받은 게 아니었나 보다.
나모의 말. 나무가 불쌍해.
어렸던 그때, 가람은 나모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을 테고, 나모는 저 나무가 지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게다. 가람은, 무정물이 고통을 느낄 리도 없고 생각할 리도 없는데, 그것을 불쌍하다고 표현한 나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 지금이라면 알 것 같기도 하다. 저 쇠로 된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욱신거린다. 이것이 바로 실패다.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뱉었던 그 말도 하기 꺼려진다.
인공나무는 지구를 원시적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발명품 중 하나였다고 한다. 자정작용을 할 수 있어 차세대 정화장치로 주목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나무 심기 운동이 행해졌지만, 대기의 상태는 더 황폐해졌다. 나무를 가동하기 위한 전기를 생산하는 데에 오염물질이 새나오기 때문이었다. 결국 가동중지된 나무들은 폐기 처분도 되지 못한 채 지금도 방향 잃은 이정표처럼 메마른 땅에 뿌리박고 있다.
그 중 한 그루가 바로 이 실패다. 전시 및 교육을 위해 학교 내부로 옮겨 심었다고 한다.
가람은 주머니에서 종이학을 꺼냈다. 그리고 평평한 쇠나뭇가지 위해 올려놓았다. 약간 고깃해진게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가람은 그 둘, 나무와 학을 지칭할 만한 단어를 찾았다. 한참을 생각하고 난 뒤 가람은 말했다.

"너희는 친구야."

"뭐가 친구야?"

나모였다. 깊게 생각하느라 나모가 가까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가람은 나모에게도 알려주기로 했다.

"지금부터 이 둘은 친구야. 이제 불쌍하지 않지?"

나모의 표정은 가람이 기대하던 것과는 약간 달랐다. 그 표정은 과거의 그가 지었던 표정과 똑 닮은 것 같았다.

"친구라는 건 살아 있는 것 중 친함이 있는 건데, 왜 무정물끼리 친구인 거야?"

가람이 입을 뻐끔거리기도 전에 나모는 이어서 말했다.

"건 그렇고 가자. 독서 시간이야."

나모의 손에 이끌려간다. 가람은 어? 하고 생각했다. 별로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그런 게다.
그럴 텐데도 이 단음이 계속 머릿속을 흩어놓았다.
어?
……어?

#5 내겐 가위가 없어요

"어리석은 쥐야. 춥다고 해서 뜨거운 물에 몸을 던질 테냐? 기억해 둬라. 지금 당장은 따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넌 결국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을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네 몸을 데워주던 물은 이제 너의 열을 빼앗으려 들 것이다.
어리석은 쥐야. 한 번만 더 말하겠다. 너는 정녕 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것이냐?"
─헤일리 네버엔디드, 『선택(37년 판)』

가람은 앞에 떠오른 화면을 이용해 읽을 책을 검색했다. 전번에 읽었던 책이 꽤 재미있던 고로 그 작가의 글을 검색하고 있었다.
사실, 여기에 쌓인 책들의 저자들은 살아 있지 않거나 관 속에 있다. 꿈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저자활동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집필하는 작가가 없다. 작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다. 교육기의 학생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고도의 인공지능체인 OC의 도움을 받으며.
그렇다면 이 작가도 죽었을까.
가람은 수많은 책 속에서 한 권을 선택했다. 『또 다른 선택』이라는 제목이었다. 저번에 읽었던 것과 이어지는 내용일까 하고 앞의 몇 장을 훑어보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었다.
가람은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를 조절해놓고, 화면에 떠오른 텍스트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러했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인형극장이 있었다. 그 인형극의 인형들은 사람하고 너무나도 똑같아서 구별을 못 할 지경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런 인형은 당시에 흔하지 않았지만, 극장주가 부유했기 때문에 극장엔 그런 인형이 꽤 많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인형 중에 한 인형이 있었다. 그 인형은 평범했다. 정말로 평범해서 왼쪽 다리에 긁힌 자국을 빼면 다른 인형과 구분을 못 할 지경이었다.
그 인형은 연기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다음은 어떤 배역을 맡을 수 있을까. 공연 외의 대부분 시간을 그런 상상을 하며 보냈다. 그러나 인형의 그 상상은 얼마 안 가 현실에 의해 부정당했다. 연극에서 다루는 인물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왕자에서 거지까지 갖은 역할을 하고 또다시 왕자를 연기해야 했다. 인형은 만족하지 못했다. 좀 더 많은 흉내를 내고 싶은데.
마침내 인형은 극장을 탈출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구속하는 실을 끊어야 했다. 실을 끊으려는 인형을 지나가던 고양이가 목격한다. 고양이는 그 사람 닮은 인형을 보고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실을 끊고 싶은 거냐? 잘 생각해라. 만일 네가 사람이라면 실을 끊어도 움직일 수 있겠지만, 만일 네가 인형이라면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될 테니. 자, 너는 실을 끊고 말테냐?"

그 말을 들은 인형은,

그 다음이 마지막 장이었다. 원래 가람은 결말까지 읽지 않는다. 결말을 상상하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 그러는 편이 등장인물에게 좋을 것 같을 때는 더욱 그렇다. 결국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계속 개작하여 쓰는 부류였나 보다. 저번에 읽은 이야기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 됐었으니.

'실을 끊고 말 테냐?'

나라면 어떻게 할까, 가람은 생각했고 곧 답을 찾아냈다. 아마, 가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겐 실을 끊을 수 있는 가위가 없어요."

……그렇다면, 가위가 주어진다면?

#6 메이트

"당신들은 전부 몽상가라도 될 작정인가 보오. 나는 그렇다 해도 현실에서 살겠소. 그게 사람 아니오? 사람이 진정 사람 다울 수 있는 건 곁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삶이 삶 다울 수 있는 건 다시 시작할 수 없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 때문이오. 꿈속에서는 오직 자신만이 진짜이며, 후회 없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소. 그렇다면 그건 삶이 아니오. 죽음이오.
→꿈속에서라면 당신의 그 이상은 실현되었을 텐데요."
─분신자살한 보수인권론자의 유서와 공개된 유서를 본 대다수 사람의 반응

두 개의 병이 한 짝. 정서 발달을 위해서라고 한다.
관이 세상을 잠식하고 난 후 출산율은 순식간에 0에 육박했다. 현실에서 육정을 푸는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누구도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꿈을 꾸며 영원 같은 백만 년을 살 것이므로.
그런 때, 아무도 원한 적이 없는데 OC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건 자신을 창조해낸 창조주의 존속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리하여 인구조절기구가 세워졌다. 꿈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채취한 세포로 인공수정을 하는 시설이다. 그렇게 태아가 수정된 병은 남녀를 한 쌍으로 묶고, 그들을 메이트라고 부른다.
두 개의 병이 한 짝.
가람에게 있어 나모가 그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갗을 스친 것도, 처음으로 들은 타인의 목소리도, 처음으로 인식한 물체도.
부모라는 단어가 고어가 되어버린 그 시절에, 나모는 하나뿐인 그의 가족이었다.
가장 많은 웃음을, 가장 많은 슬픔을, 가장 많은 대화를, 가장 많은 경험을 그녀와 함께했다.
때문에 가람은 알 수 있었다.
그녀, 나모가 지금 굉장히 들떠 있다는 사실과, 그 이유가 내일이면 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예비집합이다.
여기가 진짜 관이 놓여 있는 방이다. 아이들은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모형 관을 보았을 때랑은 딴판이었다. 하긴, 여기저기 건드리다 고장 나면 당장 사용할 관도 사용치 못할 테니까.
가람도 자신의 관 앞에 서 있었다.
관의 이름은 '가람'. 자신이 태어남과 동시에 같은 이름을 받은 관이다. 아니다. 오히려 관의 이름을 자신이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OC는 열심히 무슨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가람의 귀엔 동풍만이 부는 것 같았다.
관을 사용한다는 것은, 꿈에 갇힌다는 것. 자신이 주조해낸 세계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 그리고 그렇다는 건……

"긴장하지 마."

옆에 서 있던 나모가 가람의 손을 잡아주었다. 굉장히 따스한 손이다.
그래, 두 개의 병이 한 짝. 너와 나는 하나야.
가람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따가 나모에게 질문 하나를 하기로 했다. 물론 관에 대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 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걸까?

딸깍, 하고 가람의 머릿속에서 괴이한 소리가 터졌다. 그가 품은 의문에 반응한 것이다. 딸깍. 딸깍.
가람은 그 소리를 눈치챈 듯 만 듯, 나모의 따뜻한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딸깍. 딸깍.
딸깍.

#7 백만 년 동안 유토피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

"옛날 사람들은 불로장생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의학이었지만, 인간의 수명은 150년에서 더는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한계였고, 그것이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한계선을 끊고, 운명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그걸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관입니다, 관! 6760번의 인생입니다. 사후가 보장되는 아주 많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정도로 긴 시간을 살게 되면 혹 염증을 느끼지 않을까요? 그런 회의적인 사람도 많았지만, 지금껏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겁의 시간을 즐겼지요. 이는 아무리 실패한 인생을 살더라도 꿈에서 깨어난 순간 제자리로 돌아오며, 다시 꿈을 꾸면 새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생'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돕니다. 실로 진시황은 시대를 한참 잘못 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생이라 할 수 있는 진정한 유토피아이므로!"
─관 정식 출범 기념 연설문中

딸깍.

학교와 인구조절기구와 관. 세 시설이 연계하여 꿈을 꿀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현실은 이미 더러워질 데로 더러워져, 꿈에서밖에 행복을 찾을 수 없게 된 인간은 각자 자신의 이상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백만 년보다 긴, 영겁 같은 시간 속에서 홀로.
그것은 행복인가?
가람은 어둠에 잠긴 천장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이것은 우문(愚問)인가?
성대가 없는 천장은 침묵할 뿐이다.
내일이 되면 가람과 나모는 성인이 되고, 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앞으로 둘이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메이트이니 뭐니 하며 멋대로 가족으로 맺어주고서는, 이제 와서 갈라놓으려고 한다.

그것이 정말로 행복인가?

언제나처럼 편안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또 다른 목소리를 누르며, 가람은 말을 뱉었다.

"나모야."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결국, 관 속에서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거야?"

가람이 이 세상에서 처음 들었던 그녀의 울음소리처럼, 그녀의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나는… 부모님을 만날 거야. 좋은 딸이 되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가람의 뇌리에 그녀의 말이 한 글자씩 또박또박 새겨진다. 가람은 그 밑에 작게 자신의 생각을 적어보았다.
그래, 너는 좋은 딸이 될 것이다. 네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내가 알고 있다.
가람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좋은 부모가 되는 거야."

그래, 너는 분명히 훌륭한 부모가 될 것이다. 너라면 아이가 잘 따르는 어머니가 될 게다.
가람의 손이 살짝 떨렸다.

결국은 그런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20년의 정 따위는 백만 년의 유토피아에 눌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모의 꿈속에, 가람 자신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슬펐다. 지금 이 방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아 두려웠다.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몸이 와들와들 떨려서 무너질 것 같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비명이 그녀의 꿈을 부서뜨릴까봐 삼키고, 또 삼켰다. 가람은 혼자였다. 처음부터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문득, 나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

그 한 단어가 마법의 말이라도 됐던 것일까. 가람은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곧 잠에 빠졌다. 방안은 정적에 싸였다. 나모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도 오늘따라 유난히 작았다.
정말로 고요했다. 딸깍, 거리는 가람의 머릿속을 제외하고.

그 날 가람은 꿈을 꾸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꿔본 적이 없던 꿈인데.
가람은 관에 갇혀 있었다. 딸깍. 딸깍. 딸깍.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요동쳤다.
관은 살아 있었다. 살아 있어서 가람을 딸깍 딸깍 씹어대고 있었다. 가람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토해내려 했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뱃속에 갇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딸깍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딸깍.

이럴 수가.
가람은 잠에서 깨어나 식은땀을 닦았다. 그런 후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알 것도 같았다. 그 빌어먹을 발명품에 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을. 그리고 자신의 정체와 이 세계의 정체를.
가람은 몸을 조심히 일으켰다. 아직 기상 시간이 아니었다. 나모가 깨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그는 연장을 주머니에 챙겼다.
그런 연유였다. 가람은 예전부터 연장에 대해 집착했다. 무의식적으로 끌렸다고 할까. 어떤 의무감이 그를 옭아매듯이 그는 연장을 모아댔다. OC도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를 조사했으나, 특별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아 연장수집을 허가해주었다. 그는 연장을 모았다. 뭔가 조립하고 뭔가 해체할 만한 물건이 없었는데도.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연장을 쑤셔 넣는 작업이 끝나자 기상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모가 일어났다. 나모는 그에게 왜 이리 일찍 일어났느냐고 물어보았다.

"응.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딸깍. 모든 조각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관이라.
짓궂다. 삶을 주는 관이라니, 너무나도 모순된 표현에 웃겨서 미쳐버릴 지경이다.
가람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예비집합 때처럼 자신의 이름이 붙은 관 앞에 서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맹신하고 있는 것이 웃겼다. 너희가 좇고 있는 건 행복이 아니다. 그릇된 행복이란 말이다.
가람은 주변을 둘러보며 OC하고 컴퓨팅 된 칩들의 위치와 그것들을 연결하는 머더보드의 위치를 파악했다. 모두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무거운 공구 하나를 들어 올렸다. 멍키 스패너다.
가람은 자신의 이름을 가진 관에 그것을 내려쳤다. 스파크가 튀고 모두의 이목이 이쪽으로 몰렸다. 관의 표면은 워낙 튼튼해서 부서지지 않았다. 다만, 접합부가 어긋난 것인지 뚜껑이 비뚤어져 열렸다. 예상한 대로다. 놀애의 경악한 얼굴이 보이고, 플닙의 시큰둥하면서도 약간 벌게진 얼굴이 보이고, 나모의 놀란 얼굴이 보이고, OC의 무표정한 얼굴 영상도 보였다.
너무나도 예상했던 대로라 반사적으로 다음 행동이 튀어나왔다.
가람은 해체된 뚜껑을 차올려 등 뒤를 막았다. 약 45도 각도로 기울인 채다. 가람이 자세를 취하자마자 총성이 터진다.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예상대로다. 기울인 뚜껑을 맞아 탄환이 튕겨 나갔으며, 튕겨 나간 그대로 벽에 붙어 있던 머더보드 칩을 부수었다는 것조차 예상대로의 일이었다.
방 내부를 비추던 조명이 하나둘 꺼진다. 계획한 대로 가람은 나모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가람의 손은 뿌리쳐졌고, 가람이 뒤돌아보자,
짝-.
예상대로 나모의 손에 뺨을 맞았다.
나모는 다음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네가 미워.

"나는 네가 미워."

다음에 나올 말은 이것일 것이다. 왜.

"왜."

가람은 몸을 돌리고 달렸다. 뒤에서 나모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가람이 상상한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나모는 울 것이다.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곁에서 위로하다간 OC에게 죽임을 당할 걸 알고 있었다. OC는 회로를 복구한 뒤 가람을 죽이려 들 것이다. 질서를 어지럽힌 자는 처벌 받아 마땅하니까.
가람은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이 거대한 건물의 숨겨진, 교육기 20년 동안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장소들이다.
이번엔 실패하지 않겠다.
그는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러 오른쪽 주먹으로 벽을 세게 쳤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이 무너졌다. 돌무더기 속에서 구멍이 드러났다. 철조망이 감겨 있는 방이었다. 예상했던 바다. 그는 철제가위를 꺼내 철조망을 부수었다.
내게는 가위가 있었어.
그런 생각을 하며 가람은 다시 달렸다.

어둠이 들어찬 내부에는 먼지와 함께 보관용 상자가 쌓여 있었다. 가람이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상자의 내용물은 모른다. 그는 공구를 사용하여 상자를 부수기 시작했다. 부술 때마다 인간들이 옛날에 사용했다던 물건들이 쏟아졌다.
가람이 찾고 있는 것은 간이공기정화장치였다. 이 건물을 탈출하려면 반드시 그것이 필요했다. 무작정 나가서 숨을 마시면 몇 분 안 가 죽을 것임을 가람은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

드디어 찾았다. 그는 장비 2개를 챙겼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할 것을 대비하여 방금 부순 상자의 위치를 기억했다. 그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났다. OC일까? 가람은 몸을 굳혔다. 주위를 경계한다. 눈에 들어오는 건 사람의 그림자였다.
익숙한 그 그림자는 소녀, 나모였다.
반가운 마음에 가람은 달려갔다.

"나모야! 이곳을 나가자. 방금 정화 장치를 찾았어."

나모는 뭔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모의 바로 옆에 설 때까지 가람은 나모가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네가 너무 미워."

찰칵하는 소리가 났다.
가람은 심장에 겨누어진 그 차가운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까 상자를 부수었을 때 쏟아진 물건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이건 전혀 예상 못 했다. 권총.

탕.

탄환이 심장을 꿰뚫고, 가람은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리기까지 왜 이리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실로 악몽 같은 시간이다.
그의 무릎이 온전히 꺾이고, 어깨가 차가운 바닥에 부딪힐 때까지 그는 머릿속에서 두 문장을 번갈아가며 재생시켰다.

아이의 이름은 가람.
미워.
아이의 이름은 가람.
미워.
아이의 이름은 가람.
미워.
아이의 이름은 가람.
미워………

실로 악몽이었다.
가람은 눈을 뜨며 그렇게 생각했다.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또 하루 만에 깨어나셨군요. 역시 몸에 이상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목소리는 OC의 것이 아니었다. OC체계를 분산하여 제작된 '요람'의 목소리였다.
가람은 요람에 누워 있었다. 엿새 동안 150년의 삶을 꿈꾸게 해준다는 장치다.

"괜찮아, 가람아."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요람에게 그는 말했다.

"이번 삶도 지루해서 빨리 끝내버렸거든."

"그렇습니까."

"난 다시 잘 게."

"안녕히 주무십시오."

요람과의 대화가 끝났다. 인간 가람은 가증스럽다는 듯이, 꺼져버린 전방의 모니터를 바라본 후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수확은 있었다. 아마 다음 꿈에서는 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리라.
인간 가람은 머릿속의 지도에 상자 위치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끈적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황한 그는 눈가를 비볐다. 눈물이었다. 그는 물기에 젖은 손등을 지그시 쳐다본 뒤, 다시 눈을 감았다.

'반드시 널 데리고 이곳을 나갈 거야.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하고, 네가 날 증오하더라도.'

설령 날 죽이려 해도.

인간 가람은 요람 속에 누워 있을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부모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아이와 놀아주고 있을까? 아이의 이름은…….
인간 가람은 요람 속에서 잠들어 있는 젖먹이를 상상했다. 그 옆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차분히 그 상상을 지워나갔다. 이곳은 요람이 아닌 관이다.
산 자를 가두는 관이다. 죽은 자가 꿈을 꾸는 관일 뿐이다. 아무리 현실이 그 사실을 부정한다 해도 인간 가람이 꾸던 꿈에서는 항상 그래왔다.

자, 또다시 그 죽은 꿈을 꾸자.
언젠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완벽한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관을 부수고 인간이 되기 위해서.
시간은 백만 년이나 있다. 백만 년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일이다.

인간 가람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의식을 잃으며.

이 악마 같은 관이 있는 세상이, 차라리 누군가의 꿈이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정말 최고의 악몽일 것이라고.

컴컴한 눈꺼풀에 종이별 하나를 상상하며.

썩 괜찮은 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