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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Ending Story

  • 작성일 2011-08-16
  • 조회수 249

[단편] Happy Ending Story

많은 이들이 그의 글에 열광해 마지않았음을 안다. 때문에 그의 갑작스러운 사거(死去)가 불러일으킨 여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중략) 그의 필치는 결국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중후하고 딱딱한, 인간의 내면을 폭로하는 듯한 독특한 문체의 글만 써오던 그. 그런 그의 유작은 전의 글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희망, 그리고 행복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짙은 동화 같은 글이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글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그에게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를 비난할 권리가 있을까? 그가 찾은 해답을 비웃을 수 있을까? (중략) 여기서 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한 가지 호기심을 가질 것이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에 다다랐는지. 한결같이 인간을 불신하고 파멸에 빠지던 그의 등장인물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인간을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의 순수한 팬이었던 한 사람으로서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는 시류의 편승자(便乘者)가 아닌, 시류의 인자(因子)였다.
─앤 파들러, 왕립도서관 2 5 0 주년 기념 편찬 서적 3 호 「펜을 내려놓은 사람들」 174p부터 인용

깜빡 졸았나 보다. 언제부터? 아마 클레로가 말리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때 즈음일까? 종이를 들여다보니 그즈음이다. 말리의 다음 행동을 생각하다가 졸은 게 틀림없다. 나는 펜 뚜껑을 덮고 한숨을 쉬었다. 흔히 말하는 슬럼프 때문인지 도저히 글이 안 써진다.
전등이 깜빡거렸다. 나는 그제서야 평소와는 다른 시선(視線)을 느낄 수 있었다. 뒤돌아보자 먼저 보인 것은 흰색 붕대였다.
혜나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있다. 잠잘 때의 차림인 건지 엷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있다. 가벼운 차림인 만큼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붕대들이 눈에 띄었다. 이마에 감아놓은, 목의, 오른쪽 어깨의, 양팔과 왼손, 왼쪽 무릎과 양쪽 종아리, 그리고 양발의, 붕대.
그녀의 오른편에는 나무 목발이 겹쳐 뉘어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째서 그녀가 내 방에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그녀는 나를 싫어한다.

"글을 쓰는 중이었나요?"

혜나는 바람이 매서운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는 창을 닫으며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다.

"한 3-40분 정도?"

졸은 게 아니라 잔 것 같다.
이번에는 무슨 용건인지 물어보았다.

"집주인이 집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냥 집 안이라면 상관없지만 지금 이 방은 내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유가 필요할 것 같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자기합리화예요."

하는 건 너라고 대꾸하자 체, 하고 낮게 혀를 찬다. 나는 거듭해서 무슨 용건인지 묻는다.

"부탁할 게 있어요."

혜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이으려는 듯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재촉하지 않고 나는 기다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뜸을 들이더니 결국은 목발을 짚고 일어섰다.

"내일 다시 올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는 절뚝거리며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는 괴로운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닫힌 문밖에서 기침 소리가 들린다.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몸의 노곤함이 그런 의문들을 흐릿하게 했다. 나는 글을 쓰던 원고지를 정리하고 기지개를 켰다. 전등이 다시 깜빡였다. 내일 약을 갈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온다.
침대에 누우면, 언제나처럼 천장의 빈틈이 보인다. 그 빈틈에는 평소와 같은 시선이 있었다. 새하얗게 뒤집힌 눈자위가 내게 재촉한다.
-글을 써.
-불행한 글을.
나는 애써 무시한 채 잠을 청했다.

별다른 꿈을 꾸지는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부스스한 머리칼을 정리한다. 바로 앞에는 시선이 있었다. 나보다도 부스스한 새까만 머리칼을 무릎 근처까지 흩뜨려 놓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긴 앞머리가 눈동자를 가리고 있지만, 그 흰자위는 똑똑히 보인다. 발은 땅에 닿아있지 않다.
나는 의연하게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 방은 2층이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또 시선과 마주쳤다. 새까만 원피스가 바람도 없는데 나풀거리고 있었다. 역시 무시하고 주방 겸 식당에 들어서는데 또다시 시선이 있었다. 목에는 밧줄을 휘감고 있다. 무시한다.
식당에는 혜나와 잼 씨, 필로가 아침을 들고 있었다. 나까지 포함하면 이 저택에 머무르는 이들이 전부 모인 것이다. 저택이라 해봤자 큰 방이 많은 이층집이다.
혜나는 이 저택의 주인이다. 나이도 어린데 이런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걸 봐선 재력가의 따님이라도 되는지 모른다. 잼 씨만 봐도 그렇다. 혜나는 꽤 오래전부터 어떤 병을 앓고 있는데 그 병을 전담하는 사람이 바로 잼 씨다. 주치의가 적당한 명칭일까. 아니, 고용인 쪽이 어울리겠다. 잼 씨는 혜나 대신 집안의 모든 것을 관리하니까.
혜나는 몸이 불편해서, 어렸을 적부터 책을 가까이 해왔다고 한다. 전용 서고까지 있으니 더 할 말은 없다. 그녀는 책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따금 이 근처 지방에 온 작가들을 초대한다고 한다. 공통분모가 작가라는 직업뿐인 나와 필로가 이 저택에 머물고 있는 것도 혜나에게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대하는 작가의 글이 좋든 싫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덧붙여 그녀는 내 글을 싫어하는 듯하다.

'읽어봤는데 무슨 이야기가 그래요? 좀 너무하다 싶을 때도 있다고요. 그래서 작가님의 글은 읽다가 포기했어요. 아, 이건 제 탓이 아니지요?'

뭐, 이런 식으로 초면부터 대놓고 말했으니.
당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도 생각한다. 독자가 글을 포기하는 건 대부분 작가의 탓이다. 공감이 부재한 글은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내 글은 그녀에게 아무런 공감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것일 테지. 하기야 그녀의 상황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불행한 사람이 불행한 척하는 글을 읽는다면 코웃음 칠 게 분명하다.
혜나가 좋아하는 건 오히려 필로 쪽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필로라는 이름을 이곳에서 처음 들었다. 소위 말하는 무명작가라는 부류다. 그는 항상 행복함으로 충만한 글을 쓰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고 말했다. 혜나에게 추천받은 필로의 책을 몇 권 읽어본 나는 그의 소설이 흥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가오는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그의 스토리라인은 다소 억지처럼 보였다. 아마 비평가들이 그것을 읽었다면 동화 같다고 평할 것이다.

'상관없어요. 제가 쓰고 싶어서 쓰는 거니까.'

그의 말이 맞다.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좋은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내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자 필로가 내게 인사했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잼 씨는 식사를 중단하고 내 몫의 식사를 챙겨줬다.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무시당했다. 뭔가 내게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혜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했고. 날이 갈수록 가시방석이다.
아침은 언제나 이런 느낌이다. 혜나와 필로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잼 씨는 시중을 든다. 나는 구석에 앉아 시선을 받으며 밥을 먹는다.
그런데 그 패턴이 깨져버렸다. 식사를 끝마친 혜나가 휠체어에 올라타며 말을 건 것이다.

"당신은 오늘 나와 갈 곳이 있어요. 꼭 같이 가야 해요."

나는 글을 써야 한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잼 씨가 그녀의 휠체어를 밀며 식당을 나가버렸다. 기정사실이냐. 어차피 슬럼프였던 차에 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식사하던 차에 필로가 내 앞자리로 옮겨왔다.

"요즘 글은 잘 써지나요?"

아픈 곳을 찌르지 마.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마지못해 그럭저럭 이란 대답을 들려주었다.

"사실 저도 최근 들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요. 어제 너무 집중한 나머지 글을 쓰다 밤을 새워버려서……"

입맛을 잃은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긴 뒤 식당을 나왔다. 상대하기 귀찮다. 어느 누군가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가 마주치는 모두들. 특히 내 뒤를 따라다니는, 시선, 너 말이다.

"빨리 가죠."

씻고 나오자 휠체어에 탄 혜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혜나의 뒤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잼 씨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선이다. 흰 눈자위를 가진 귀신이 혜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불행한 글을.
-이야기를.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에요? 뒤에 누가 있나요?"

혜나는 뒤를 살펴보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이상하다는 듯이 이쪽을 본다. 당연하다. 그 시선은 나만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은 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어디 그랬던 게 하루이틀인가?

"하여튼 이상하다니까. 그건 그렇고 빨리 가자구요."

설마 설마 했지만, 진짜로 가는 거였구나.

"그럼 가짜로 가겠어요? 자, 빨리 제 휠체어를 밀어주세요. 어? 꼭 뭔가를 씹은 표정이네요. 잼 씨는 오늘 외부에 일이 있다니까 특별히 당신에게 부탁하는 거에요. 감사하라고요. 이런 일은 별로 없는데."

필로가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필로 씨는 글을 써야 해서 바쁘단 말이에요. 탱자탱자 놀고 있는 당신 밖에 절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잠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이 녀석은 어제 뭘 보고 있었던 거지. 나도 바쁘고, 게다가 글도 안 써져서 화나는 참인데. 식객인 만큼 도와줄 수는 있지만, 역시 차별받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거절하자, 하고 생각했을 때, 혜나가 기침을 했다.
체, 병자가 귀족이로군.
나는 말 없이 혜나의 뒤로 돌아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녀는 의외라는 듯이 두 눈을 깜빡였다.

"화 안 내네요?"

어딜 갈 거냐고 물어본다.

"어, 그러니까…… 진짜로 동행하려고요?"

어딜 갈 거냐고 물어본다.

"아……. 저, 그, 그럼 가기 전에 주방에서 제 가방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가방을 가져와 그녀에게 건네준다. 그녀는 가방을 소중한 듯 끌어안고 방향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저택을 나와, 걷는다.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라 그런지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진다. 엉망으로 포장된 콘크리트길을 지나가는데, 휠체어의 들썩거림이 상당했다. 혜나의 표정은 척 봐도 불편해 보인다. 것 참 깨소금이다. 하늘을 바라보니 이름 모를 새 한 쌍이 지저귀며 날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다. 바람과 나뭇잎이 서로를 연주하는 가운데 우리는 걷고 있었다.
저택에서부터 인가까지는 외길이다. 혜나가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시가지에 접어들면서 포장길로 변하자 혜나의 낯빛은 나아졌다. 멀리서 기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발을 옮긴다. 우리는 그때까지 많은 것을 얘기했다.

예를 들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가 보시면 알아요."
예를 들면, 혜나가 어떤 병에 걸린 건지. "실례네요."
예를 들면, 그 가방엔 무엇이 담겨 있는지.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요?"

이런. 대화가 이어지질 않잖아.
반쯤 포기하고 있는데, 뜻밖에 혜나가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아픔은 익숙해졌어요. 당신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지속하는 아픔 같은 건 있지 않아요."

가만히 있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죠. 제가 아는 세상은 대부분 책 속의 세상이니까요. 제가 말하는 게 당신에겐 꿈처럼 느껴지겠죠.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에요. 저는 병에 걸렸어요. 하루에 16시간 이상 자지 않으면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요. 모두 16시간을 살고 8시간을 자는데, 저는 반대에요. 그 때문일지도 몰라요. 저는 행복으로 가득 찬 꿈을 꿔요. 제가 상상하는 세계는 모두 꿈을 기반으로 한 것일지도 몰라요."

세상엔 불행한 사람도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불행한 사람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저는 불행하지 않아요. 당신의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절망하지 않아요. 물론 낙심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건 행복에 비해선 꽤 사소하지 않나요?"

앞엔 낡고 허름한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변엔 따로 건물이 없다. 외진 곳이기도 하니, 목적지는 저곳이 분명하다.

"제가 듣는 건 주로 그런 이야기지요. 언제 죽을지 불확실하다. 확언할 수 없다. 글쎄요. 그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가 달고 다녀야 하는 말이 아니었나요? 모두 그렇게 사는 거잖아요.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해하면서.
당신은 세상을 불행 쪽으로 치우쳐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제가 당신의 글을 싫어하는 이유에요, 불행한 작가님."

불행한 작가.
고소를 머금었다. 사실, 그 명칭은 작가인 내가 불행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책은 잘 팔리는 편이라서 여러 문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편이다. 불행한 작가란, '불행한 이야기만을 쓰는 작가'의 준말이다. 내가 쓰는 글은 항상 불행한 쪽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 점에 관해서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이 불행한 이야기에 끌린다. 어떤 이는 감동했다며 내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감동을 한 건지 이해를 못 하는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뭘 그리 생각하고 계세요. 인사하세요."

상황이해를 못 하는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러나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혜나가 허벅지를 꼬집었기 때문이다.
나와 혜나의 앞에는 건물만큼 허름한 옷가지를 입고 있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있었다. 나이는 제각각이었다. 가장 어린 소년이 5살 정도 되어 보이고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녀가 15살 정도로, 총 9명이었다. 아이들은 혜나를 반겼다.

"와~ 괴물 누나다!"

혜나는, 웃음을 머금고 달려드는 소년을 껴안았다. 분명히 붕대를 감고 있는 부위에 통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혜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거짓웃음일까? 아니면.

"자, 얘들아. 언니가 빵을 구워왔어요."

그녀는 가방 속에서 정성스레 포장된 빵을 꺼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빵 종류를 두고 다투기도 하고, 고맙다며 혜나를 껴안기도 하고, 결국에는 모두 웃기도 하였다. 왠지 그런 것이 행복해 보였다. 그 행복 속에 나는, 끼어들 수 없었다. 아이들 저 먼발치에 서 있는 시선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건물 내부는 넓었다. 교회로 쓰이던 폐건물을 고친 것이라고 한다.
나와 혜나는 지금 장막 앞, 의자에 앉아 있다. 아이들은 우리를 이곳에 남겨둔 채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혜나에게 물어보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수마가 밀려올 때쯤, 건물 내의 조명이 갑작스레 꺼졌다.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장막이 걷어지고 스포트라이트가 그곳을 비추는 것이 보인다.
꼬마 남자애 한 명이 빛을 받고 있었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앞으로 걸어나온다.
이윽고 다섯 명의 아이들이 그 아이를 둘러싼다. 모두 넝마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새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울부짖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새를 살려낼 것입니다."

남자아이가 새장을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새 대신인지 붉은색 종이학 한 마리가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여럿이서 말하는, 즉 연극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내용은 이미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리의 새를 살리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여섯 난쟁이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필로 씨의 소설을 각색한 거랍니다."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혜나가 말을 꺼냈다. 그래, 저건 필로의 소설이다.
어떤 한 마을에 추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물도, 식물도 살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이라고는 다리가 짧아 움직이기 불편한 난쟁이들뿐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모시던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곧 여신은 아기 새 한 마리를 그들에게 보내주었다. 그 아기 새는 붉은 깃털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 새가 자라나면서 점점 더 날개의 붉은빛이 더해갔다. 그 새를 중심으로 풀이 자라나고, 동물이 뛰놀았다. 난쟁이들은 열심히 새를 돌보았다. 그런데 그 신비한 새의 소문을 들은 사냥꾼들이 새를 죽이고 말았다. 재빨리 새의 시체를 숨겼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난쟁이들은 슬퍼하며 기도를 올렸고, 여신에게서 새를 살리는 방법을 들을 수 있었다. 여섯 난쟁이는 새를 살리기 위해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씩 낙오자가 생기고, 결국엔 한 난쟁이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난쟁이마저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그곳에서 여신의 도움을 한 번 더 받게 된다. 여섯이 다시 모이게 된 난쟁이는 시련을 이겨내고 붉은 새를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황당한 것은, 그 여정을 하는 동안, 난쟁이들의 키가 조금씩 자라서 더이상 난쟁이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지만, 마을에 정착하여 다시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다.

"저 아이들은, 모두 난쟁이에요."

아이들의 연극을 보면서 혜나가 말을 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고, 의지할 데가 없어요. 처음에는 교회에서 맡아주었어요. 연로하신 신부님이 돌아가시고, 교회는 문을 닫았어요. 워낙에 소규모였던 곳이라 이 건물에서 미사를 보던 사람들은 조금 더 먼 지역의 교회로 갔고요. 아이들은 당황했어요. 갈 곳도 없는데 저들끼리 남겨졌으니까."

불행하다.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교회에서 지원금은 나오나 봐요. 다만, 거주지는 이곳으로 고정하는 조건으로요. 미관상 좋지 않다고 받아주질 않았다나. 생계는 어떻게든 잇게 되었지만, 아이들은 무기력해지기 시작했어요. 우울증이라고 해두죠. 그때는 말을 걸어도 반응조차 안 했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요. 전부 필로 씨 덕분이에요."

필로, 이 극본의 원작자.

"이 아이들에게는 종교 이외의 의지할 것이 필요했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 행복 같은 추상적인 것이라도요. 저는 이 아이들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돈이라도 기부할까 생각했었지만 그건 돈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그런 건 동정이에요. 동정은 선을 긋는 거에요. 너와 나는 다르다. 뭐 그런 식으로 자기만족 하는 거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연극이라는 것을 생각해냈어요. 아이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어디선가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에 연극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아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살짝 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왕이면 행복한 이야기가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찾아낸 것이 필로 씨의 소설이었고요. 필로 씨에게 소설을 극본으로 바꿔서 아이들에게 행복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편지를 썼어요. 필로 씨는 바로 허락해주셨고요. 오히려 자기가 글을 써도 좋겠냐고 물어보기까지 하더군요. 그때부터 필로 씨가 제 저택에 머물기 시작했어요."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았다. 혜나와 필로가 정답게 얘기하고 있는 걸 볼 때마다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 같다고 느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었어요.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을 잘 하지 않았어요. 연극은커녕 제대로 된 대화조차 성립이 안 되니. 뭐, 이것도 필로 씨가 어떻게 해결했지만요. 그는 곁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거든요. 행복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있어요, 분명. 무엇보다 저 아이들이 살아 있는 증거니까요. 언젠가 저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부탁해보세요. 저 애들은 기뻐하며 도와줄 거에요. 그들은 누군가를 돕는 게 행복에 가까운 길이라는 걸 필로 씨에게 배운 것 같으니까."

그 말을 하고선 그녀는 기침했다. 말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은 곧 끝이 났고, 혜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아이들의 연극은 도시에서 실연될 거에요. 얘들의 꿈은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래요. 이 연극을 통해서요."

그렇다면, 그들의 연극은 아직 미완성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 연극을 보면서 행복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혜나와 대화하지 않았다. 이미 많은 걸 얘기했고, 또 그녀가 피곤했기 때문이다.
혜나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니 잼 씨가 있었다. 나는 잼 씨에게 혜나의 휠체어를 넘겨주었다. 계단 아래의 시선을 지나쳐 내 방으로 올려가려고 하는데, 얕은 비명이 들렸다. 혜나가 낸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잼 씨에게서 건네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곧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잼 씨는 말없이 그녀의 휠체어를 밀어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얼핏 보기에, 눈물 같은 것이 보였던 것 같다.

말리는 악마가 되기로 했다. 철저한 악마가. 그를 괴롭혔던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고독한 악마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미움이라는 감정을 품었고, 처음으로 몸이 희열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모든 불행은 그의 먹이였고, 그의 삶이었다.

이 부분을 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한 건지.

나는 머리를 식힐 겸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원인이 뭘까.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써야 했지.
곧 답이 나왔다. 혜나 때문이었다.
나는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마침 필로가 있기에 잼 씨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잼 씨는 주방에서 혜나 씨를 위해 뭔가 만든다고 하던데요. 혜나 씨가 어디 많이 편찮은가요?"

혜나가 아픈 게 하루 이틀이 아닌 건 알 텐데.

"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혜나 씨는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셔서, 환자인지 아닌지 잊게 된다니까요."

나는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아, 저기. 혹시 나중에 시간 되시면 제 글을 읽어주지 않을래요? 같은 작가, 아니, 저명하신 작가님 도움을 받고 싶은데."

귀찮은 나는 대충 '알았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잼 씨는 주방에 있었다. 주방과 식당 사이에는 창문이 있어서 서로를 볼 수 있었다. 눈까지 마주쳤지만, 잼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의자를 골라 앉았다.
혜나는 뭘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내 말을 무시해 왔던 잼 씨는, 선선하게 대답을 해줬다.

"자고 있다."

대답은 기대하고 있지 않았기에 놀랐지만, 덤덤한 척했다.
혜나가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그걸 왜 내게 묻지?"

그건 혜나와 가장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잼 씨는 움직이던 손을 잠깐 멈추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왠지 그럴 것 같다, 고 말했다.

"작가의 감이라는 녀석이군. 그래서? 난 녀석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이보쇼, 불행한 작가님. 당신은 책 속에서 항상 말해왔잖아. 타인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고. 누구도 어느 누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잼이고 그녀는 혜나야. 둘은 타인이고, 타인끼리 서로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 난 몰라. 혜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르는 것을 묻지 마."

그럼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겠군요, 하고 운을 떼며 어제 혜나가 내 방에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말했다. 사실 어제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 있다.
그녀는 어떻게 2층으로 올라올 수 있었을까?
그녀의 방은 1층에 있다. 주 이동수단은 휠체어이며, 간혹 목발을 짚기도 한다. 그러나 힘이 약해서 몇 걸음 이상 발을 옮길 수 없다. 그렇다면 필로나 잼 씨가 함께 왔을 것이다. 필로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잼 씨밖에 없다.

잼 씨, 당신은 어제 왜 그녀를 제 방에 데려왔죠?

잼 씨는 어느새 주방에서 나와 있었다. 손에 든 접시에는 묽어 보이는 수프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혜나가 부탁했으니까."

그는 걷는다. 아마 그 수프는 혜나의 저녁일 것이다. 그렇다면 혜나의 방으로 향하는 걸까?

"역시 너는 마음에 안 들어."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역시 미움받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잼 씨가 나간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 다시 글을 쓰려고 했었다. 바닥에 펜던트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잼 씨가 흘린 것이다. 주워들다가 손이 미끄러졌다. 다시 주우려고 했는데, 펜던트가 반으로 갈라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디자인된 건지, 안쪽 면에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한 소녀의 사진이었다.
상처 하나 없는, 예닐곱의 어린아이. 그 시절의 혜나가 찍힌 사진이었다. 밝게 웃으며 개랑 뛰놀고 있다. 어쩌다 보니 그 사진을 들고 방까지 돌아온 나는 그녀의 어렸을 적 삶을 상상하고 있었다. 어느 부잣집 아가씨는 귀여움을 받으며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병이 그녀를 습격한다. 부모님은 그런 딸이 걱정되어 주치의와 함께 요양차 어떤 외딴곳으로 보낸다. 그녀는 불행하지만, 그래도 그런 사랑에 힘입어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다.
분명 지금의 그녀를 보면, 그 정도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했다. 이건 마치…… 이건 마치 필로의 소설 같았다. 억지로 행복이란 단어에 끼워 맞힌 그런 동화 말이다. 위화감이 있다. 그 위화감은 뭐지? 저 이야기 속에서 빠진 요소는 무엇이지?
됐다. 관두자. 내가 언제부터 타인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펜던트를 닫으려고 하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똑, 똑, 똑.

그러고 보니, 필로가 자신의 글을 봐달라고 했던 것 같다. 혜나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이미 적당히 어두워진 것 같아서 전등을 켰다. 그리고 일어나서 문을 열러 갔다. 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혜나였다. 목발을 짚고 있었다.

"어제 예고했던 데로 찾아왔답니다."

그녀의 눈가는 약간 부어 있었지만 모르는 체 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려다가 기운이 없어 보이기에 부축해주었다. 어제처럼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았다. 나도 어제처럼 의자에 앉았다.
한동안 서로 말을 꺼내지 않다가, 내가 먼저 꺼내기로 했다. 어제 왔었던 건, 오늘 아침에 있었던 그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느냐고, 말했다.

"아, 그건…… 그건 저도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 잼 씨가 오늘 아침 본가에 갔다 온다고 하셔서. 사실 그곳을 방문하는 건 반쯤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어요."

얼떨결에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시선도 혜나의 얼굴에서 약간 빗겨나갔다. 그곳엔 흰 눈자위를 부릅뜬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을 쓰는 거야.
-참혹한 글을 쓰는 거야.
-그래서 불행해지는 거야.

"제 진짜 부탁은요."

-불행한 글을 쓰면 돼.

"저를 위해 글을 써 주셨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불행한 글을.

순간 내 표정은 굳어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 표정을 보더니 혜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넌 내 글을 싫어하잖아. 내 글은 불행하기만 한 글이라고. 네가 좋아하는 글은 행복한 글이지? 난 행복한 이야기는 절대로 쓸 수 없어. 뭐야, 그런 부탁이라면 필로가 있잖아. 필로에게 부탁해. 그렇지, 그러면 되겠네. 사실 내가 행복한 이야기를 쓰지 않는 이유는 잘 못 쓰기 때문이야. 유명한 작가인 주제에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말이야. 내가 쓴 행복한 결말의 이야기는 필로가 쓴 것보다 못한 것일 테지. 생각해 봐. 언제나 불행한 이야기만 써오던 녀석이랑 언제나 행복한 이야기만 써오던 녀석이랑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이야기를 잘 쓸까? 사실 이런 건 말할 필요도 없지. 너도 참 그렇지 않으면서 멍청한 것 같네. 야, 듣고 있냐? 나는 만능이 아니야. 불구야. 불행밖에 쓸 수 없는 불구라고.

대충 그런 말을 뱉은 것 같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서 저 말이 정확한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혜나의 말은 장담할 수 있다.

"괜찮아요. 제가 당신에게 부탁할 것은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불행한 이야기니까."

"막연히 꿈꿔왔어요, 당신과 만날 날을."

"저 사실은 당신의 책을 전부 읽었어요."

"믿지 못하시겠죠?"

"삶은 불행해. 이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해. 땅은 나를 넘어뜨리고, 바람은 나를 뒷걸음질치게 해. 내 몸마저 날 위해 움직여주지 않아. 저주받은 몸! 나는 언제나 고여 있어. 고인 물은 썩어가. 나는 썩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날 봐달라고 해. 그런데 그들은 날 무시해. 날 떠나. 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건 항상 가느다란 먼지조각뿐이야. 그런데도 삶이 행복하다고?"

"당신의 「먹는 새」에 나오는 엘론의 대사에요. 그녀의 처지는 나와 똑 닮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신의 그 글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는 감동까지 받았었고요. 얼마나 읽었는지 그녀의 대사는 빠짐없이 기억해요."

너는, 너는 뭐야?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을 바로잡아가며 그녀에게 소리를 건넨다. 넌, 행복한 게 아니었나?

"전 매사 긍정적으로 삶을 보려고 하고 있지만,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자기합리화를 자기합리화 한 말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모든 것을 자기합리화하며 살아왔어요."

시선이 한 발자국을 움직였다.
혜나에 대한 상상을 재개한다. 위화감이라면 처음부터 있었다. 내가 상상한 대로 그녀가 살아왔다면, 지금처럼 그녀의 눈이 부어오를 일이 있었을까? 내가 상상한 대로 그녀가 살아왔다면, 잼 씨가 내 소설의 세부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내가 상상한 대로 그녀가 살아왔다면,

어째서 이 넓은 저택에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이 없는 거지?

전등이 깜빡거렸다.

"아픔이 익숙해졌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어요. 아픔이 익숙해질 수 있다면 온 세상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죠? '익숙'이 결핍된 사람들인가요? 아픔을 지울 수 있는 건 시간이 아니에요. 약이고, 수술이고, 완치밖에 없어요."

시선이 한 발자국을 움직였다. 흰 눈자위에 붉은 핏줄이 갈라져 흐르기 시작한다.
혜나는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전등이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원피스의 고정끈을 풀러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깜빡. 당황한 나는 아무런 말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나체일 그녀의 몸은, 나체가 아니었다. 깜빡. 이곳저곳이 붕대로 휘감겨 있었다. 깜빡. 혜나는 곧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이마의, 목의, 오른쪽 어깨의, 양팔과 왼손, 가슴, 허벅지, 왼쪽 무릎과 양쪽 종아리, 양발의 붕대를 하나씩. 하나를 풀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방 안에 퍼진다. 깜빡깜빡깜빡. 전등이 깜빡거리는 가운데, 나는 진정한 그녀의 나신을 보게 되었다. 깜빡. 썩고 문드러진 피부에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기가 부패한 냄새가 너무 역해서 무심코 코를 들이 막았다.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전등이 수명을 다했다. 순식간에 방 안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저에겐 그런, 아픔을 지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16시간을 자고 8시간을 깨어 있으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꿈을 꾸어야 하는 시간만큼 깨어 있고 깨어 있어야 하는 시간만큼 꿈을 꾸면 말이에요. 저는 행복한 꿈만을 꿔요. 가끔씩 그 꿈이 사실 현실이고 이 현실이 꿈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웃기는 망상이죠.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바라게 돼요. 고통에 가득 찬 현실이 꿈이고 행복으로 가득 찬 꿈이 현실이기를. 이루어질 리 없는 바람이죠.
오늘 말이죠, 편지를 받았어요. 잼 씨가 본가에서 가져왔더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저는 올 필요가 없데요. 절대로 오지 말래요. 다들 제가 싫은 거에요. 저 같은 아이가 같은 귀족의 핏줄이라는 게 수치래요. 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버렸어요. 저는 누구의 딸도 아니게 됐어요."

달빛이 들어와 그녀를 비추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눈물이 나왔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공허해 보였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런 내 상황과는 상관없이 흰 눈자위를 붉게 물들인 시선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전 당신이 작가가 되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의 이야기는 귀족들 사이에선 유명하니까요. 불행한 작가님, 저주받은 가문의 불행한 작가님. 아버지는 불명예스럽게 죽고, 어머니는 자살한 귀족 집의 자제님."

시선은 내 바로 앞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뒤집힌 새빨간 눈으로. 그리고 찢어진 상처 같은 입을 벌리고 내게 외친다.
-불행한 글을 써!
-써!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피부가 조이고 조여서 아프기까지 하다.

"나는 불행해요."

'저는 이 아이들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어요."

'저는 불행하지 않아요. 당신의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절망하지 않아요.'

나는 의자를 뒤로 젖히다가 넘어졌다. 고름투성이의 나체인 채로, 혜나가 내게 기어온다. 고름이 묻어나오는 무릎을, 손을 바닥에 대고. 흰 눈자위의 시선도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한 말은 이 한마디였다. 넌 누구야. 혜나는 무시하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넌 누구냐고!

"제발 글을 써 줘요! 행복한 이야기 같은 건 싫어. 나만 비참해지는걸. 저보다 불행한 인간들을, 구제할 길 없는 이야기를 써 줘요!"
-불행한 이야기를 써!
-더욱더 불행하게!
"그래서 나에게 알려주세요. 넌 그렇게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행복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이 세상엔 온갖 불행이 가득 차 있다고."

원래 그런 세계라고 말이에요!

내게 안긴 혜나는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시선도 어느샌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세히 찾아보니 천장의 빈틈에서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하도 많은 말을 들어서 머릿속이 하얗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신을 놓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잼 씨였다.
잼 씨는 말없이 들어와서는 전등을 갈아 끼워 주고, 새 붕대로 혜나의 몸을 감아주었다. 옷까지 입혀준 후, 내게 공책 한 권을 넘겨주었다. 그는 등을 돌리고 이 방을 나섰다.

"이 애가 이렇게 된 건 너 때문이야."

그 말만을 남긴 채로.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의자를 바로 세운 뒤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엔 닫으려다가 만 펜던트가 있었다. 사진에 있는 어린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앗아간 게 나라고? 아닙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잼 씨. 그녀는 내 글을 보고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그녀는 병에 걸리고 나서 그렇게 서서히 변해간 거야.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사람은 어느 순간 갑자기 변하지는 않아. 무엇보다 글 하나가 어떻게 사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냐, 내 탓이다. 내가 그녀를 부추긴 거야. 인상적인 글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관을 바꿀 수 있다고도 하고. 내가 쓴 글 때문에 그녀는 벼랑 끝으로 몰린 거야. 겉으로는 행복한 척 연기해서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불행에 절망하고 있었던 거야.
근데, 그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아직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게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걸 알아내야 한다. 알아낼 수 없다면 그녀가 행복해지는 길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없이 불행해질 뿐.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벌인 짓에 책임을 지려면.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공책을 무의식적으로 폈다. 그곳에 답이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공책 맨 윗줄에 적힌 글씨를 보고 본능적으로 이 글이 필로의 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필로가 자신의 글을 검토받기 위해 내 방까지 왔다가, 절규하는 혜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채 공책을 두고 돌아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글을 빠르게 묵독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유난히도 커다란 눈송이가 내리던 날, 나는 더는 작가라는 직업을 이어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내 글은 인쇄 비용도 충당 못 할 만큼 팔리지 않았던 것이다. 관대하던 출판사에서도 더는 눈감아줄 수 없었는지, 당분간 쉬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왔다. 사실상, 계약종료나 다름없는 통보였다. 그렇다고 다른 출판사로 찾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미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온 이상, 그것은 내 이력이 되었고, 그들은 판매 부수를 조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사형선고였다.
어렸을 적부터, 동화 읽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런 동화의 대부분은 구전(口傳)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어른들은 이런 동화를 무척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어른들도 읽을 수 있도록 일반적인 소설 속에 동화적 요소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행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쓰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완성된 원고를 가지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막상 받아준다고 하는 데는 없었다. 중소출판사 한 곳만이 내 글을 출판해주겠다고 했으나, 그마저도 이젠 없다.
그것으로 끝이 될 터였다. 그 편지를 보기 전까진.
나날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나는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그 편지의 글씨체는 무척 깔끔하고 귀여운 게 여성의 글씨체임이 분명했다. 편지를 쓴 사람은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내 글을 극본으로 각색해도 괜찮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날 나는 빛을 얻었다. 아무리 적게 팔린 글이라고 해도,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내 글을 읽고, 행복해진 사람이 있겠구나. 나는 재빨리 허가의 답장을 썼다. 이왕이면 내가 직접 각색하고 싶다는 내용과 함께. 너무 흥분한 채로 써서 글씨가 삐뚤어졌다. 다시 썼다. 또다. 또 다시 썼다. 그렇게 여러 번 쓰고 난 뒤에야 만족스러운 글씨체가 나왔다.
그날로 나는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났다. 더욱 힘이 나게 된 건, 다음 편지가 왔었을 때였다. 자신의 저택에서 글을 쓰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물론 원고료도 준다고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나는 그대로 짐을 쌌다.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최할 길이 없었다. 기차가 뿜어내는 연기만큼 내 심장도 뛰고 있었다.
그렇게 저택에 도착한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예상했던 대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휠체어를 탄 채로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가가기가 꺼려졌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랐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녀는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자주 웃었다. 큰 병을 앓고 있는데도 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고통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걸 참으며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껏 걱정한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강인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희곡을 쓰기 위해 그녀가 준 방에 머무르며 펜을 굴렸다. 그 사이에 작가 몇 명이 이 저택을 머물다 갔다. 그녀는 책을 좋아해서, 근처에 있는 작가들을 불러들이곤 한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글을 잘 쓰고 나름 명성이 있는 작가들이었다. 나는 자연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내게 힘을 주었다. 내 글은 누구보다도 읽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내 글이 진행되어 갈 때마다 행복한 듯이 웃어주었다. 나는 어느샌가 그 미소를 보기 위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 그건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행복한 글을 쓰고 싶다는 나의 목적에, 그녀의 미소를 보고 싶다는 새로운 목적이 추가된 것뿐이었다. 그뿐인 이야기로, 나는 여전히 행복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희곡이 완성된 건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갈 때 즈음이었다. 그녀를 따라 옛날에 교회로 쓰였다던 건물로 찾아갔다. 그곳엔 아이들 9명이 있었는데, 모두가 침울해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이유로 그러고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톱니바퀴 중엔, 내가 없다는 무기력함. 나의 존재가치가 없다는 절망감.
내가 출판사에게서 휴식 권고를 받았을 때처럼, 이 아이들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쉬운 일은 아니다. 매일 같이 그 교회를 찾아갔다. 계속해서 말을 걸었는데도 반응이 없을 때는 정말 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 그녀가 바라는 행복을 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그것뿐이다.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는 내가 질린 것인지 조금씩 말을 터주기 시작했다. 오랜 노고의 결과였다. 그녀는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그녀의 함박웃음이 정말 아름다웠다는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바로 연극을 연습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연극을 시작하기에는 준비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넓은 교회건물을 극장처럼 꾸밀 수 있겠다는 막연한 계획밖에 잡혀 있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차근차근 해나가기로 했다.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다. 장막을 사서 설치하고, 스포트라이트 등 여러 연극에 쓰이는 도구를 준비하고……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속엔, 행복함을 가득 품은 내가 있었다.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하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한다는 말도 전하고 싶었다.
이에 나는 또 다른 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혜나라고 한다.
혜나,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제 고개를 들어주세요."

그리고 그 문장을 읽은 혜나는 고개를 들 것이고, 필로와 눈을 마주칠 것이다. 그런 다음 필로는 말할 것이다. 혜나, 당신을 사랑하노라고.
쓴다는 글이, 연애편지였던 게냐.
나는 한숨을 쉬고, 피식 웃음 지었다.

"행복."

"행복이라."

정말 우습다. 서로가 알아채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혜나는 필로가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다고 말했었다. 필로는 혜나가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써 놓았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아마 둘 다 정답이다. 나는 제삼자니까 알 수 있다.

"왠지 모르게, 허탈한데."

지금까지 써오던 모든 불행한 글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비로소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느낌이었다. 어깨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이 떨어져 나갈 때처럼 몸에 피로가 몰려온다.
전등을 끄고 침대를 누우면, 천장의 빈틈 속 시선이 보인다. 시선은 내게 말한다.
-불행한 글을 써.
그리고 나는 중얼거렸다.

"싫어."

별다른 꿈을 꾸지는 않았다. 아니, 어떤 꿈을 꾸었는데 기억하지 못할 뿐이겠지. 나는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내려고 애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에는 잼 씨밖에 없었다.

"혜나랑 필로는요?"

"혜나는 자고 있어. 필로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지."

"네? 필로가?"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필로가 이곳을 떠난다고 한 건가?

"벼르던 것을 승낙하신 모양이더군. 저 먼 곳의 세력가가 자서전을 대필해 달라고 며칠 전부터 그랬거든."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필로의 필력은 나쁜 편이 아니다. 그의 글의 결함은 그 억지스러운 전개에 있었다. 어느 세력가가 그의 필력을 알아보고 대필을 부탁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젠장.

"언제 떠나죠?"

"세 시간 뒤에 기차를 타고."

"잼 씨, 혜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뜬금없군."

"빨리요!"

"혜나는 행복해야 해. 누군가가 행복하게 해줘야 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없었지."

"됐어. 그럼 나를 도와줘요. 그 녀석을 지금 보내버리면 혜나는 버팀목을 잃어버릴 거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지금부터 혜나의 소원을 이루어 줄 거에요."

잼 씨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지나가는 말투로 뱉었다.

"변했군."

행복이란 건 무엇일까. 무엇을 행복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삶에 아주 작은 부분을 이루는 사소한 것일까. 아니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대한 것일까.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돈, 권력, 명예처럼 눈에 드러나는 것이 행복일까? 사랑, 우정, 꿈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행복일까? 행복의 가장 객관적인 기준은 무엇이지?
글쎄. 처음부터 행복이라는 단어는 별도로 정해진 무언가를 지칭하는 게 아닐 것이다. 한없이 객관적일 수 있지만, 한없이 주관적일 수도 있는.
나는 행복이란 없다고 생각했었고 그것이 행복에 대한 나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정의였다. 그렇게 정의 내린 순간 세계는 불행으로 가득 차 버렸다. 스스로 나를 불행한 세계로 밀어낸 것이다.
혜나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있을까? 나는 그녀와 필로의 도움을 받아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 차례다.
사실, 이제부터 하려는 짓은 승률이 반밖에 되지 않는 도박이다.

나는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들어오세요."

문을 연다.

"자고 있지 않았구나."

혜나는 내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잼 씨인 줄 알았나 보다.

"자, 작가님."

"어제 부탁받은 것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러 왔어, 혜나."

혜나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수척해 보였고 팔도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다. 마치 말라 비틀어진 식물 같다.

"어제 일은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제가 잠시 어떻게 됐었나 봐요."

"아니, 난 없었던 일로 하기 싫은데."

"네?"

"대답부터 말해주지. 쓸 수 없어."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약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쓸 수 없게 되어버렸어, 너 때문에."

혜나는 곧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솔직하게 말해줬으니까 나도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네 말대로 난 몰락한 귀족이야. 우리 가문이 몰락했을 때의 나는 너무 어렸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했던, 다섯 살밖에 안 된 꼬맹이였으니까.
혜나, 나에게는 귀신이 보여. 그 귀신은 나를 노려봐. 어디를 가든, 그 시선이 있어.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걸어. 불쌍한 것. 너는 불행해. 너무나도 불행해. 불행하니까 행복해질 수 없어. 넌 불행한 글을 써야 해. 행복한 이야기 같은 것은 싫어. 나를 비참하게 만드니까. 나보다 불행한 이야기를 써. 너는 불행한 이야기밖에 쓰지 못해."

혜나는 몸을 움츠렸다. 내가 나열한 그 모든 것들이 어제 혜나가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귀신은 내 어머니셔."

그녀는 자신의 입을 가로막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는 계속 조울증에 시달리셨어. 끝내 목을 매달고 돌아가셨지. 그것을 목격한 것이 나야. 어렸던 그때에 상당히 충격이 컸었지. 주변 사람들은 나보고 불행하다고 쑥덕거리고. 어렸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 충격적인 영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재구현되고 재구현되어서, 내 앞에 나타났어. 스트레스가 쌓이고 폭발하고. 집이 망한 뒤 숙부님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숙부님이 더는 나 같은 건 맡기 싫다고 했어. 저주받은 아이라고.
불행이 찾아오기 전까지 알던 모든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사라져갔지. 그제야 나는 처음으로 어떤 일을 했어. 뭘 했을까? 글을 썼어. 불행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내가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그럼…… 왜 지금은 안된다는 거죠?"

"사라졌어. 나를 재촉하던 시선이."

사라졌다. 그 어떤 곳에서도 나를 쳐다보았던 시선이 사라졌다. 땅에서 발을 떼고, 목에는 밧줄을 휘감고, 흰 눈자위를 드러낸 채로 내게 불행한 글을 재촉하던 시선이 오늘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건,

"네가 내게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줬기 때문이야."

혜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몰라요. 더더욱 당신에게 무엇을 했는지도 몰라요."

"구체적으로 네가 내게 어떤 일을 한 건지는 나도 몰라. 행복이 무엇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질 않아.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알아야 할 것은 한가지야. 가장 불행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넌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거야. 난 알 수 있어. 긴 시간 동안 불행한 이야기만을 써 왔던 나는 알 수 있어.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행복이 뭔지도 모르는 나는 알 수 있어."

횡설수설하고 있다.

"솔직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이 생각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 너는 필로를 사랑하고 있지?"

갑작스레 나타난 필로의 이야기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척하고 있어요."

"그럼 그 녀석이 어떤 세력가의 자서전 대필 의뢰를 승낙해서 기차를 타고 이 저택을 떠나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네?"

"……사실이에요?"

"어제 내 방에서 절규하던 네 모습을 목격해버린 모양이더군."

그녀의 얼굴이 알기 쉽게 일그러진다. 도박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다.

"걱정되지? 그가 너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봐. 말하지 마. 지금 넌 거짓말하려 하고 있어. 네가 무슨 말을 꺼내도 나는 믿지 않을 거야.
네게 보여줄 게 있어. 불행한 내 이야기 대신."

나는 그녀에게 어떤 멍청한 작자가 글을 써 놓은 공책을 넘겨주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가며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대목에서 그녀는 그것이 필로가 쓴 글임을 알아챘다. 그리고 또 어떤 대목에서 그 이야기가 자신과 필로의 이야기임을 알아챘다. 어떤 대목에서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어떤 대목에서 그녀의 입술은 바르르 떨렸고, 어떤 대목에서 그녀는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고개가 들렸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필로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을 거야."

그녀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내가 가만히 있자 또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역시 못 들은 나는 가만히 있었다.

"잠시만 나가주세요."

나는 뒷걸음질쳐서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문 안쪽에서 사랑받는 어떤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문밖에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추하죠?"

나는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물론 보지 못한다.

"저는 추한 존재에요.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진 저는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증오해요. 그래놓고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주 이기적인 악마예요. 겉에 드러난 저는 행복한 척하고, 사랑하는 척해요.
그래서 필로 씨는 저를…… 떠난 거겠죠. 제 추한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위로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필로 씨가 사랑했던 건, 행복을 사랑하는 내 겉모습이었어요. 거짓웃음을 짓는 내 얼굴이었어요. 썩은 내 나는 상처를 내보이며 울부짖는 추한 제가 아니라고요!"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번 더 강하게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위로하지……"

"진심이야."

나는 천천히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생각해. 네가 사랑하는 필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창문의 커튼을 걷어 젖힌다. 약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난 답을 알고 있어. 그것도 네가 알려준 답을."

창문을 힘차게 연다.
내가 발음하는 그 말과, 그녀가 발음하는 그 말이 겹쳐졌다.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웅성거림은 곧 외침이 되어 방 안으로 실려왔다.

"괴-물-누-나! 기-운-내!" "기-운-내-서-아-저-씨-를-데-려-와-줘!" "아-저-씨-는-언-니-말-만-듣-는-데-요!" "혜-나-언-니! 도-와-주-세-요!"

혜나는 목발을 짚고 재빨리 내 옆에 선다. 그 시선은 풀이 자라있는 정원을 지나, 새하얀 담벼락을 넘어, 그 담벼락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이어진다.

"있어, 분명. 그런 사람이. 저 아이들이 살아 있는 증거야."

"아이들이……."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직-우-리-연-극-완-성-못-했-단-말-야!" "그-리-고-보-여-주-지-도-못-했-는-데!" "누-나! 누-나-밖-에-없-어!" "필-로-아-저-씨-를-데-리-고-와-줘!" "아-저-씨-와-언-니-는-"
"사-랑-하-는-사-이-니-까-!"

"네 말대로야. 부탁하니까 들어주던걸?"

"……."

"너만이 아니라, 저 아이들도 필로가 떠나는 걸 원하지 않아. 나도 필로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어. 하지만 나와 저 아이들은 그렇게 만들 수 없어. 할 수 있는 건 혜나, 너뿐이야. 내기해도 돼. 그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그렇다면 왜 떠나려 하는 거죠?"

"멍청한 녀석이지. 자기보다 내가 곁에 있어주는 게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혜나는 재빨리 휠체어에 올라탔다. 잼 씨를 부르지만 잼 씨는 없었다. 혜나는 분한 듯이 이를 갈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됐어요,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필로 씨가 어디 있는지나 알려주세요. 기차를 탄다고 했으니까 역으로 갔겠지. 역이요? 알았어요. 그녀는 앞을 바라본 채로 말했다. 저기, 지금까지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새삼스레 뭘. 그리고는 힘겹게 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렇게 나가자, 창문 밖에서 잼 씨가 나타났다.

"용케도 아이들이 도와줄 것이란 걸 알았군."

"그들은 더이상 난쟁이가 아니니까요."

지금 나는, 아마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잼 씨, 이제 당신 차례에요. 이쪽이 제 진짜 부탁이고요."

나는 잼 씨가 흘렸던 펜던트를 돌려주었다. 그는 그것을 말없이 받았다. 어디서 주웠느냐, 그런 말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혜나를 도와주세요."

잼 씨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창문을 넘어 혜나의 방에 들어온 뒤, 그녀가 나간 방문을 향해 달려가며 말했다. 늘 하던 일이군, 하고.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반응해서 커튼이 술렁거린다. 창문에 턱을 괸다. 눈을 감고 잠시 그 바람을 맞아본다. 기분 좋은 바람이다. 아이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자 혜나와 잼 씨의 뒷모습이 저기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남은 것은 그녀를 응원하는 것.
행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그녀를.
뺨이 아파서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내 함박웃음은 그녀의 함박웃음만큼 행복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웃는 걸 그만두지는 않는다. 잘 모른다고 해서 놓아버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이제 이 저택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짐은 혜나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싸 놓았다.

"행복은 전염된다라……."

그들에게서 얻은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소설을 쓰자.
이번엔 해피엔딩이다.

그래요, 말리. 우리는 아직 어리잖아요? 그뿐이에요. 미리 겁먹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행복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고, 우린 지금도 그것을 향해 걸어가고 있죠. 나는 당신을 사랑할게요. 불행은 잊으면 돼요.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전 당신의 사랑만으로도 이렇게 가득 채워져 있는데. 세상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어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일 거예요. 불행은 행복의 일부이고 재난은 축복의 전 단계죠. 제가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답 자체는 있지만, 정답이나 오답은 스스로 만드는 거에요. 초조해 말아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꿈을' 먹는 새」中)

2011.8.15
Ep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