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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음악을 써내려가는 소설가

  • 작성일 2018-04-01

기획의 말

2018년 커버스토리는 <문학과 일>입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음악을 써내려가는 소설가
소설가의 일, 음악가의 일

서희원

※ 위 이미지는 "The Animals - House of the Rising Sun(1964)" 라이브 영상을 인용하였음.

우리 시대에 사라져 가는 직업 중 하나는 DJ(Disk Jockey)이다. 아직도 라디오는 24시간 방송되고 있고, 클럽은 “현대 음율 속에서/순간 속에 보이는/너의 새로운 춤에/마음을 뺏긴”1) 청년들로 불야성인데 이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음악적 지식을 통해 다양한 음반에서 좋은 노래를 선별하고 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청취자들의 취향을 이끌던 그런 음악 전문가로서의 DJ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방송에 등장하는 라디오 DJ는 선곡보다는 대화와 진행을 위주로 하는 MC에 가깝고, 클럽의 DJ는 여러 가지 노래를 조합해 새로운 브리콜라주적 창작 활동을 하는 뮤지션으로 대우를 받고 있다. 한때 방송, 나이트클럽, 음악 전문 카페, 심지어 동네 떡볶이집에 설치된 DJ 부스 안에서 대한민국 청춘들의 음악적 취향을 선도하던 수많은 전문가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넣고 있는 이유에는 AI의 등장도 한몫하고 있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사이트에 몇 곡을 검색하면 AI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사용자의 취향과 비슷한 결과물을 제공해 주고 있다. 편리하지만 기계가 떠주는 밥을 먹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한 권유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1) 김완선, <리듬 속의 그 춤을(신중현 작사/작곡)>, 『김완선 2집』, 지구레코드, 1987. 너무 예전의 노래인가? 어쩔 수 없지. 그게 내가 보낸 시간이 내게 남겨 놓은 것들이니.

DJ라는 직업은 사라지고 있지만, 음악을 듣고, 좋은 음악을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이를 공유하며 영혼의 깊은 유대를 느끼는 일은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겐 음악을 감상하는 일이야말로 완벽한 시간 낭비로 여겨질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든 음악은 두 개의 제목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다른 제목이 알려주는 바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The Sir Douglas Quintet이 1968년에 발매한 음반 『Sir Douglas Quintet + 2 = Honkey Blues』에 수록된 A면 세 번째 곡 <Song of Everything>2)에 함께 병기된 ‘4:04’는 이 노래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 4분 4초를 이 음악가들이 여러 번의 중복 녹음을 통해 미적으로 압축해 낸 그들의 시간과 교환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각주에 있는 링크를 클릭해 The Sir Douglas Quintet의 노래를 재생시킨다면 당신의 방 안은 1968년 이 음악가들이 보낸 ‘한때’의 시간으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병 속에 담겨 시간의 바다를 떠도는 편지의 봉인이 풀릴 때처럼, 오래된 포도주의 코르크 마개가 열리고 그 속에서 숙성된 시간의 향기가 방 안에 퍼지는 것처럼, 음악은 흐른다. 그리고 내 인생의 4분 4초가 사라진다. 아니 오래된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만나 자아의 내면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격동을 만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휘발된다.

2) https://www.youtube.com/watch?v=rJvZ6_kBg64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내 시간을 다른 시간으로 치환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효율과 업무로 계산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무용한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시간은 ‘금’이지만 음악은 결코 금이 될 수 없다. 음악이 끝나고 남는 것은 재화가 아니라 환금할 수 없는 감정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서 C. 클라크의 SF 소설 『유년기의 끝』에 등장하는 지적인 외계인 오버로드(Overlord)들이 인간들의 특징 가운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중 하나로 음악을 지목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버로드는 인간의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감출 수 없어 지구로 내려와 연주회에 참석한다. 그들은 인간의 격식에 맞춰 음악을 듣고는, 작곡가의 “위대한 독창성”에 대한 찬사를 바치고 그 자리를 떠나지만 결코 이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오버로드의 합리적 문화에는 음악이라는 낭비가 자리 잡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외계인은 이해하지 못했던 이러한 불합리, 시간의 완벽한 치환과 상실이야말로 지구인이 음악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이 음악애호가들의 명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직업군 중 하나는 소설가이다. 흥미롭게도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하고 들려주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소설(문학)과 음악은 분리할 수 없는 삶의 지표이다. 그들은 종종 음악의 리듬으로 소설을 쓴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는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들 수 있다. 하루키는 재즈, 클래식, 스탠더드 팝송 등을 자신의 문장에 자주 삽입하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소설적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

한국 소설가 중 이러한 기묘한 열정에 사로잡힌 작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단연 박성원이다. 박성원은 주로 언더그라운드 포크 음악을 자신의 작품에 소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음악의 느낌을 소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박성원 소설 중 수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은 그가 선곡한 음악이 선명하게 제시되고, 독자에게 읽혔을 때이다. 박성원은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한 다양한 국가의 작가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짧은 수필을 이렇게 시작한다. “한때 포크음악의 시대가 있었다. Neil Young과 Nick Garrie, Byrds와 Toni Vescoli가 있었다. 물론 내 시대는 아니다. 나는 그 세대로부터 한참 뒤에 태어났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듣고 그들을 떠올릴 뿐이다.”3) 지나가버린 ‘한때’에서 자신의 황금시대를 찾고 있는 사람에게 음악은 유일한 시간의 가교이며, 분명 자신의 시간을 ‘한때’의 시간으로 치환해 주는 마법사의 주문 같을 것이다.

3) 박성원, 「한때 있었다」, http://siwf.klti.or.kr/bbs/board.php?bo_table=B_02&wr_id=9&page=2
박성원이 여기에서 소개하는 음악가들의 대표적인 노래를 한 곡씩 소개하면 이렇다.
Neil Young, <Down By The River>( https://www.youtube.com/watch?v=j6PsBm4VeJQ)
Nick Garrie, <Can I Stay With You>( https://www.youtube.com/watch?v=BQETdqOt7As)
Byrds, <Eight Miles High>( https://www.youtube.com/watch?v=J74ttSR8lEg)
Toni Vescoli, <There’s a Bird>( https://www.youtube.com/watch?v=eMTEKnCpP-M)

박성원의 첫 소설집 『이상, 이상, 이상』(1996)에 수록된 중편 「해 뜨는 집」은 영국 밴드 애니멀스(The Animals)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4)을 메인 테마로 하고 있으며, 가사의 한 구절인 “뉴올리언스에는 해 뜨는 집이라고 불리는 집이 한 채 있어요. 많은 불쌍한 소년들이 그곳에서 신세를 망쳤죠. 하나님, 나도 그중 하나란 걸 알고 있어요.(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they call it Rising Sun.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and God, I know I'm one.)”를 가지고 서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에 수록된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 2」는 Zager&Evans의 <In the Year 2525>5)를 서사의 주된 모티브로 하고 있다. 『하루』에 수록된 「하루」에서 해고를 통지받는 사내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Ray Materick의 <Savage Season>6)을 듣게 되고 자연스럽게 노래에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사내는 그곳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는 자신의 아파트가 보이는 야산의 벤치에 앉아 내리는 눈을 맞으며 동사한다. 소설에 대한 일종의 메타소설인 『고백』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은 Wallace Collection의 <Daydream>7)이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환상과 망상, 몽상과 기억이 뒤엉킨 채로 진행된다. 시간은 오직 음악의 흐름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을 뿐 하나의 인물에서 출발한 시간과 사건은 때론 분열되어 여러 명의 시간과 서사로, 때론 하나로 통합되어 흘러간다. 제목 그대로 ‘백일몽’ 같은 서사가 진행된다.

4) https://www.youtube.com/watch?v=0sB3Fjw3Uvc
5) https://www.youtube.com/watch?v=yesyhQkYrQM
6) https://www.youtube.com/watch?v=GnCi9djas-4
7) https://www.youtube.com/watch?v=60ejKrj38j8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나 박성원이 공들여 작업하고 있는 이러한 일은 대단히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자는, 서사는, 결코 음악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사를 적는 것과 선율을 묘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독자는 소설 속에서 음악을 듣는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을 읽을 수 있고, 음악에 대한 정보도 얻어갈 순 있지만 이러한 일은 음악을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소설가의 일이 문자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그 세계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행동하는 인간들로 가득한 침묵의 공간이다. 소설가가 가진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히 덧없고 무용한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활의 감각에 비춰볼 때, 현실의 논리를 감안할 때, 덧없고 무용한 것처럼 보이는 일, 가능하지 않은 일에 시간과 열정을 바치는 사람, 우리는 그것과 그들을 예술과 예술가라고 부르고 있다. 게다가 니체는 노래 부르는 인간을 예술품 그 자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노래하고 춤추며 인간은 스스로가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명하고, 걷는 것도 말하는 법도 잊어버린 채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감염된 것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는 젖과 꿀을 흘리는 것처럼 인간으로부터도 초자연적인 것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느끼며, 그가 꿈속에서 신들이 산책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도 스스로 감격하여 황홀하게 헤매 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며, 그는 예술품이 되어버린 것이다.”8) 한 단어만 덧붙인다면 음악과 소설은,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고양하는 인간은 ‘시간의 예술품’이다.

8)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바그너의 경우/니체 대 바그너』, 김대경 옮김, 청하, 1982, 41쪽.

문장웹진 4월호 살펴보기

므두셀라

므두셀라 조동범 공포가 들려오면 당신은 어느 곳으로 사라지려 합니까. 당신의 음성이 나의 심장을 파고들 때. 세계의 모든 종말과 신파는 그러나 아름답습니까. 신성은 무너지고, 당신의 주치의는 믿을 수 없는 모든 맹세를 책망하려 합니다. 쥐덫에 묶여 있는 것은 절망입니까. 아니면 참을 수 없는 어느 날의 치명입니까. 모든 것은 잊힐 거라는 나의 음성은 당신을 위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춘천의 안개입니까. 안개는 어느새 사라집니까. 안개의 너머에서 박하의 향은 어느덧 당신을 흐느끼려 합니다. 당신은 신성의 은혜로운 사람입니까. 그리하여 강물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두려움입니까. 아니면 사랑의 파국입니까. 당신은 이제 세상의 모든 추모와 이별을 흐느끼려 합니다. 당신의 심장을 어루만지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원죄의 밤을 추모하려 합니다. 그것은 죄책의 밤입니까.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완성입니까. 세계의 모든 신성이 무너지고, 당신은 이제 씻을 수 없는 상처입니다. 그리하여 토요일과 일요일의 연인들은 이별을 예감하고, 그것은 이제 그 어떤 아름다움을 흐느끼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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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마리아주

마리아주 조동범 당신의 반지는 모든 약속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불현듯 사랑이 시작되는 것처럼, 잊을 수 없을 미래는 어느덧 펼쳐집니까. 예언서에 당신의 음성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신성의 모든 날들은 오늘을 예비하고자 당신을 기원합니다. 나는 당신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전의 기억처럼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문을 열면 나와 당신의 배후는 보다 선명해지려 합니다. 당신의 배후로부터 상류는 비롯되고, 나의 배후는 어느새 바다를 예비하려고 합니다. 기착지마다 폭풍은 몰려오고 사라지고, 종착지를 향하는 길목마다 짝을 이룬 기쁨과 슬픔, 평화와 갈등은 그러나 하나의 영토 안에서 세계의 모든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기차역의 지붕으로부터 당신의 어깨는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려 합니다. 그리하여 한 잔의 포도주와 식사는 이제 예정된 길을 따라 둥지로 날아가는 한 쌍의 새가 되기 시작합니다. 결혼식의 당신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때마다 어울리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침 해는 이윽고 밝아 오기 시작합니까. 아니면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과거는 완성됩니까. 어느덧 비가 오면 우산은 펼쳐지고, 눈이 내리는 곳에서 지평선은 이제 공중과 하나의 몸이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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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춘분(春分)

춘분(春分) 유형진 복강경 수술로 담낭의 돌을 꺼낸 친구가 준 커피에서 담뱃재 냄새가 난다. 친구는 요즘 캡슐커피머신을 쓰기 때문에 커피콩이나 갈아 놓은 커피를 주면 손 흘림으로 내려야 해서 자주 안 먹게 된다며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 가져왔다. 지인이 동남아 여행 다녀오면서 선물로 커피를 주었다는데. 에스프레소 머신용으로 갈아 놓은, 아주 진하게 볶은 콩이었다. 봉지에는 ‘아라비카 100%’라고만 되어 있고. 베트남 커피 만드는 식으로 우려서 연유를 넣어 먹어야 할까, 차가운 물로 한 방울씩 내려 우유를 타서 마셔야 할까 고민한다. 남쪽엔 눈이 온다는데. 담뱃재 냄새가 나는 커피를 들고 창밖을 내다본다. 나무에겐 아무것도 없다. 눈도, 새 잎도, 꽃도, 단풍도. 지나가는 계절의 진공상태. 계절 밖의 계절 같은. 어쩌면 가을 같기도 하고, 겨울 같기도 한. 보이지 않게 모든 것이 충분한 춘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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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목련탕약

목련탕약(木蓮湯藥) 유형진 목련 꽃망울이 가지 맨 끝 솜털 속에 자고 있다 이 아파트 단지엔 목련이 유난히 많다 목련꽃이 툭, 툭, 떨어지는 계절이 되면 온 천지에 탕약 달이는 냄새 집 안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폐병 환자가 있는 듯 잎도 없이 알몸으로 봄을 앓는 목련이 흰 촛대 같은 꽃망울을 들면 마침내 뿌리 끝 탕기에 불이 오른다 검게 젖었던 탕기는 차츰 달구어지다 가장 서럽게 어두운 날, 마당 가장자리에 놓인 곤로 탕기 위 훈김에 서성이는 봄눈들이 어디로도 내려앉지 못하고 증발해 버리는, 가보지도 않은 북유럽 어느 하늘처럼 하루 종일 저녁같이 깜깜한, 그런 날을 골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툭, 촛대에 올린 흰 빛을 터트리고 마는데 흰 종이에 쌓인 약 한 재 모두 달일 쯤 꽃잎 터질 때처럼 흙색 꽃잎들 무거워 멀리 날지도 못하고 곧장 바닥으로 툭, 아무나의 발에 차이고 짓이겨지면 천지에 목련탕약 냄새는 더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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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인터뷰-패션모델 박민지 “모델은 비어 있는 육체, 요즈음의 아름다운 것들을 거기 채워 넣는 일”

[기획 - 인터뷰] 패션모델 박민지 “모델은 비어 있는 육체,요즈음의 아름다운 것들을 거기 채워 넣는 일” 인터뷰 일시: 2018년 3월 5일 소설가 박민정 * 코너 소개: 소설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취재하고, '팩트'와 '디테일'을 확보해서 그것을 변주할까? 본 코너에서는 소설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취재했던 직업인을 만나 작품 속 특정 직업에 대한 묘사와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이야기한다. 작년에 출간한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의 표제작인 「아내들의 학교」를 구상하던 2013년 여름, 나는 친동생에게 몇 차례 자문을 구했다. 「아내들의 학교」에는 동성혼 합법화가 이루어진 사회를 배경으로, 중학생 시절부터 파트너로 지내온 두 여자가 등장한다. 설혜와 선, 극 중 설혜는 가사를 전담하는 ‘아내’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대학 시절 돌연 잠적해서 설혜를 애타게 만들었던 선은 런웨이에 서고, 화보를 촬영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모델 지망생’을 연기한다. 나는 이 소설을 여러 번 퇴고했는데, 애초에는 설혜의 역할이 제한적이었고 그 행동 역시 무력했다. 완성작이 되어 출판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나는 어떤 부분들을 확신하지 못했다. 초고에는 두 사람의 중학생 시절이 더욱 길게 나왔고, ‘목사였던 아버지에게 버려지는 선’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고, 선이 오디션에 나간 후 설혜는 TV를 통해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만 있었다. 작중 중요한 플롯인 ‘여학생회’와 ‘협동조합’의 이야기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마디의 말을 듣고 이러한 설정을 추가했다. “왜 설혜는 집에 앉아서 텔레비전만 봐요?” 두 사람 간의 격렬한 정념과 갈등 못지않게 내게는 설혜가 바라보는 선, 다름 아닌 ‘모델’ 선이 너무 중요했던 것이다. 요즈음에는 지난 인터뷰에서 내가 했던 말을 자주 떠올린다. “사실 어떤 소설은 솔직히 설정이 이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나는 이걸 믿고 만들어야 되잖아요.”1) 그런 생각을 하면 잠시 서글퍼진다. 「아내들의 학교」는 내게 등단 이후 처음으로 ‘설정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끔 해준 작품이다. 그러나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항상 뒤늦게 슬퍼진다. 두 사람이 욕을 하며 서로 치고받는 장면, 설혜가 여학생회 언니들에게 폭언을 듣는 장면을 떠올리면, 길을 걷다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한다. 친동생인 패션모델 박민지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바라보이는 선, 이름을 떨치는 모델이 되기 위해 가족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선, 아내를 짓밟는 남편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 그 모든 선의 면면이 박민지의 일부이며 그녀의 캐릭터를 차용했다는 점, ‘패션모델’이라는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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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원피스인문학-삼두인간 바스카빌과 '변증법'

[기획-원피스인문학] “셋이 붙어 있었던 것뿐인가? 무슨 이유로?” “단짝이지롱” ― 삼두인간 바스카빌과 ‘변증법’ 권혁웅 1. 『원피스』가 상정한 지구 표면은 대부분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바다를 가로질러 지구를 감싸는 육지를 레드 라인(Red Line)이라 부르고, 레드 라인과 직각으로 놓인 항로를 그랜드 라인(위대한 항로, Grand Line)이라 부른다. 두 라인에 의해 바다는 넷으로 분단되어 있으며(각각 이스트 블루, 사우스 블루, 노스 블루, 웨스트 블루라 불린다), 이스트 블루와 사우스 블루로 이루어진 쪽 표면을 그랜드 라인의 전반부, 노스 블루와 웨스트 블루로 이루어진 쪽 표면을 그랜드 라인의 후반부 또는 신세계라 부른다. 전자는 세계 정부의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이고, 후자(신세계)는 ‘사황’이라 부르는 네 명의 대해적이 지배하는 곳이며, 두 세력 사이에 해적이면서 세계 정부에 협력하는 일곱 세력(칠무해)이 있다. 곧 『원피스』 세계는 세 개의 거대 세력(세계 정부, 사황, 칠무해)이 분점하고 있다. 한편 세계 정부를 대표하는 3대 기관은 해군 본부 마린 포드(Marineford), 대감옥 임펠 다운(Impel Down), 사법 섬 에니에스 로비(Enies Lobby)다. 해군 본부는 세계 정부의 행정력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해적들이 지배하는 곳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계 정부가 지배하는 나라들 역시 무력이 통치의 근거라는 점에서 일종의 경찰국가들이다. 에니에스 로비는 재판정이 있는 곳이며 임펠 다운은 감옥이므로, 이 셋은 법에 의한 판정, 집행, 처벌을 대표하는 삼항조(trio)다. 물론 이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에니에스 로비에서 재판을 받는 모든 이들은 유죄판결을 받아서 임펠 다운으로 호송되며, 임펠 다운에 갇힌 모든 죄수들은 석방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임펠 다운이 『신곡』의 지옥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곳, 탈출할 가능성이 봉쇄된 곳이 지옥이다. 우리의 주인공 루피는 이 세 곳을 ― 에니에스 로비, 임펠 다운, 마린 포드 순으로 ― 휘저어 놓는다. 이로써 루피는 무력에 의해 정립된 세계 질서를 교란하고 자유의 이념을 전파하게 된다. 에니에스 로비의 재판장이 ‘삼두 바스카빌’이다. 한 손에 칼을 든 거한인데, 특이하게도 머리가 셋이다. 세 머리는 등장할 때부터 서로 싸운다. “해적 한 명? 해적은 유죄다!”(왼쪽 머리) “끄응. 그러지 말고 무죄로 해주자고용.”(오른쪽 머리) “그럼 절충해서 사형!”(가운데 머리) “어째서!” “쿵.”(좌우에서 박치기) (삼두 바스카빌, 40권 379화) 이 좌충우돌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심지어 자신을 소개할 때도 그렇다. “3두

  • 관리자
  • 2018-04-01
비워진 우주의 대기자들

[소설] 비워진 우주의 대기자들 임승훈 누나. * 창백한 여자는 말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7년의 어둠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즈제엔 어둠이 없어요. 어둠으로 들어가려면 굴을 파고 들어가야 해요. 즈제에서 어둠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었어요.” 꼽추가 말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살아 있어도 언젠가 죽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궤도 진입 예정입니다. 궤도 진입 예정입니다.” 오르트 구름대 특유의 진동이 잦아들자마자 크루잎(초고성능연산장치)은 경고 메시지를 반복했다. 그와 동시에 므스느그흠의 우측에 있는 대형 입체 영상 패널에서 행성이 떠올랐다. 직경 842km 정도의 아주 작은 행성이었다. 얇은 고리가 있는 행성이었다. 우주의 먼지와 얼음 덩어리, 암석, 그리고 폐기된 우주선들이 고리의 정체였다. 하지만 입체 영상 속 우주는 스물다섯 개 센서의 측정치를 합산해 재구성한 세계였다. 패널이 아닌, 전방의 커다란 창으로 보이는 우주는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공간을 에워싸고 우주 쓰레기 고리가 돌고 있었다. 101-툼-57, 일명 보이지 않는 손가락. 그 행성은 뵐 물질로 구성된 행성이었다. 이 물질은 가시광선의 세계에선 관측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지만 밀도가 높았다. 동일한 중량이라면 목성보다 밀도가 높았다. 그리고 빨랐다. 자전 속도도 빨랐고 공전 속도도 빨랐다. 빠른 속도로 태양계 외곽을 돌았다. 그것은 시속 56만km1)에 이르렀다. 구체적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뵐 물질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미지의 물질들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건 확실했다. 그래서 빠를 거라고 즈제인들은 판단했다. 어쨌든 즈제인의 행성을 이용한 항법은 행성의 공전 속도만큼 자전 속도도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101-툼-57은 적합했다. 지구로 향하는 자들이라면 모두 이 행성을 이용했다. 그들은 101-툼-57의 궤도를 수십 바퀴 돌면서 가속도를 얻었다. 그러다 공전하는 힘을 이용해 탄환처럼 튕겨져 나갔다. 그 기세로 지구까지 날아갔다. 이걸 행성 추진이라고 불렀다. 므스느그흠은 아움이었다. 아움은 즈제 언어로 지적 생명체를 의미했다. 그건 바로 즈제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렇다. 므스느그흠은 즈제 행성계에서 왔다. 즈제 행성계에는 모두 다섯 개의 행성이 있었다. 그중 생명이 거주하는 곳은 두 곳으로, 뉘·즈제와 쥴·즈제라고 불렸다. 그곳은 압 항성계에 속해 있었다. 지구에서 6.7파섹(약 206조 6280억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뛰어넘기(즈제인들은 초공간 항법을 ‘뛰어넘기’라고 불렀다)’를 세 번 해야 했다. 즈제인의 기술로 3.2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만만치 않은 시간과 거리였다. 즈제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우주는 거대한 곳이었다. 우주 횡단에 익숙한 므스느그흠에게도 지난 3년여의 여정은 험난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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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개명

[단편소설] 개명 지혜 회색 가림막 위로 큼지막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류장 맞은편에 자리 잡은 백화점의 증축 공사 때문인지 도로는 어수선했다. 대기 행렬이 터미널 정문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서둘러 줄을 섰다.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정류장은 북적였다. 백화점은 주변의 야트막한 건물과 달리 높고 화려했다. 가로등마다 지난 시즌의 세일을 알리는 광고 현수막이 펄럭였다. 현수막 너머 ‘좋은’과 ‘모습’이 번갈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치 백화점이 시민들에게 크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뒷좌석에 타 식장 주소를 말하고 아진이 일러준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새 건물인데, 결혼식장이에요. 간판이 없어서 찾기 어려울 수 있어요. 결혼식장은 터미널에서 차로 이십 분쯤 걸린다고 했다. 택시가 출발하자 나는 좌석에 등을 기댔다. 그 도시는 나와 아진의 고향이 아니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은 온통 회색이었다. 눈에 익지 않은 거리 위로 연기가 솟고 있는 굴뚝이 보였다. 창백한 하늘 위로 번져 나가던 연기가 잠시 후 허공에서 사라졌다. 아진이 어떻게 연고 하나 없는 도시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상대가 명훈이 아니라는 것과 나를 결혼식에 부른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혹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닐까. 결혼 전에 한 번이라도 만나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짐작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핀잔을 주는 선배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 그렇게 말할 때 선배는 열에 아홉은 반드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도착했어. 끝나고 연락할게. 답장은 없었다. 선배와는 여전히 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한 달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선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게 엊그제였다. 그새 번호를 바꿔 연락할 만큼 변덕이 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선배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낯선 번호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는 충동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미연이니? 이거 미연이 전화 아니에요? 수화기 너머 낯선 억양의 여자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림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다. 실망은 빠르고 쉬웠다.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해서, 돌연 오래전 알던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아진……? 아진은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종종 안부전화를 할 만큼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아진에게 번호를 알려준 적이 있던가.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일을 기꺼이 할 만큼 우리가 가까웠던가. 나는 다소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웬일이야? ‘웬’이 아니라 ‘무슨’이라고 물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아진은 한껏 들뜬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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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독자모임-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3

[기획 - 문장웹진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3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230"]「노크」 (《현대문학》 3월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아무도 없는 집」 (《창작과비평》 2018 봄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230"]『작은 미래의 책』 (현대문학, 2018)[/caption] 김주선 : 세 번째 《문장 웹진》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우다영의 「노크」(《현대문학》 3월호), 이주혜의 「아무도 없는 집」(《창작과비평》 2018 봄호),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나온 양안다의 첫 시집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18)입니다. 먼저 우다영 작가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읽기에 이 소설은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장르적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집중해서 따라 읽다 보면 기이하고 낯선 두려움 속에서 어떤 긴장감을 계속 느끼게 됩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파파와의 관계는 정말 묘한데, 이건 운하임리히가 적절히 섞인 에로틱 스릴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랄까요. 김영삼 : 혹시 요즘 원하는 게 그거예요? 로맨스 서스펜스? (일동 웃음) 김주선 : 로맨스…를 원하고 있습니다. (웃음) 이다희 : 이거 꼭 실어 주세요. (웃음) 이서영 : 아이고. (웃음) 김주선 : 감사합니다. 에로틱이라고 안 해주셔서. (웃음) 김영삼 : 본인의 욕망이 보이는 것 같아서. (웃음) 아무튼 소설을 재밌게 읽었는데요. 제게 이 소설은 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다 또 다른 위험에 빠지게 되는 스토리로 읽힙니다. 주인공에게 옛 연인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 위험을 알리는 사람은 옛 연인의 현재 애인이죠. 뭔가 전해 줄 게 있다면서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우연한 접선에 주인공은 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왠지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후 선배의 소개로 파파를 만나게 되면서 그녀는 위험을 피하려고 하지만 결국 ‘파파’라는 사람이 야기하는 또 다른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선배의 역할이 이중적으로 읽혀요. 한편에서는 주인공을 초대하고 파파를 소개해 주는 선배가 파파의 공급책처럼 보여요. 음식도 많이 시키고 사라지잖아요.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말이죠. 근데 이 선배도 ‘파파’의 먹잇감이었는데, 누군가의 사고를 알리는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고 대신 그 자리에 주인공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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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나무와 나 나무 나

나무와 나 나무 나 김지녀 잎이 돋을 때였다 잎들이 다 떨어질 걸 알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나무, 를 불렀다 새들이 날아갔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다 나무와 나 나무 나무 사이에 나뿐이어서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무, 가 된다는 상상이 문학적으로 실패란 걸 알지만 나무, 가 된다면 적어도 오늘은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나무와 나무 나 나무 사이에 나무는 나와 아는 사이 안경알을 닦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새 잎들이 더 넓어졌다 하늘이 조금 보인다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이 장면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무와 나무 나무 사이에 나 나무가 흔들렸다 언제 와 앉았는지 새들이 또 날아갔다 나무, 라고 불렀지만 나무를 말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바닥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나무를 천천히 만졌다 손끝에서 얇은 가지 하나가 쑥 돋아났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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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나의 기린에게

나의 기린에게 김지녀 “등 좀 긁어 줘” 나에겐 닿지 않는 곳이었다 좋아하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나는 고분고분했다 “거기 말고 그래 거기 아니 더 옆에” 잘 찾지 못하는 목소리는 한 마리 개처럼 누워 혀만 날름거린다 ‘너에게도 닿지 않는 곳이었구나’ 갈증이 났다 한 달도 넘게 물 한 모금 안 마실 수 있는 인내가 내게는 없는데 좋아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낸 저녁들은 목이 길어져 휘어지려 한다 긴 혀로 자신의 귓속을 청소하는 기린에게 저녁은 풀냄새가 귓속에 가득한 시간 긁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혀를 늘어뜨리고 나는 내가 닿지 못하는 곳을 생각한다 어딘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간지럽다 영원히 닿지 않는 곳이 많아서 나는 엉뚱한 곳만 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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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CHTO DELAT에서 옥인 콜렉티브까지

[비평in문학]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광장, 거리, 미술관과 인터넷.그 어디에서든 존재하는 예술가들의 실천 이수정 최근 우리 사회의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된 ‘미투(me too)’ 운동과 관련해서 대표적 가해자로 지목된 예술가들이 여러 분야의 사람이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 연극이나 영화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영화나 연극 모두 한 사람의 힘으로 작품을 완성할 수 없고, 여러 사람이 함께 오랜 시간 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미술이나 문학의 창작자에 대해서는 ‘고독한 창작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홀로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창작의 고통에 대면한 고독한 미술가의 이미지는 사실 미학사에서 낭만주의 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가난과 싸우고, 가족과 친구와도 떨어져 내면에 침잠하여 창작 혼을 불태우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반 고흐와 이중섭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에서는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산해 온 예술운동이 종종 등장한다. 다다(dada), 바우하우스(bauhaus), 발레 뤼스(Ballet Russe), 플럭서스(Fluxus), E. A. T(Experiment in Art and Technology) 등 미술가, 시인, 음악가, 건축가, 무용가, 심지어 엔지니어가 새로운 예술실험에 도전해 왔다. 이 예술운동들은 특정한 시기에 취리히, 바이마르, 뉴욕 등 특정 지역에 모여든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음악과 무용, 영상과 퍼포먼스, 미디어 테크놀로지 등 다양한 분야 간의 교류와 실험은 동시대 미술에서도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특히 국제 비엔날레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터넷과 네트워크의 확산으로 정보교류와 소통이 용이해지면서 특정한 국가나 도시 내에서 이루어지던 예술운동은 이제 지역의 경계를 넘어 유연하게 연대하고 교류하는 콜렉티브의 실천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 막을 내린 강원비엔날레 에서 관객의 눈길을 끈 대표작 중에는 슈토 델라티(Chto Delat), 돈 팔로 더 윈드(Don't Follow the Wind)와 같은 예술가 집단, 소위 ‘콜렉티브’의 활약이 돋보인다. 먼저 슈토 델라티(https://chtodelat.org/)는 2003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스부르크, 모스크바, 니츠닌 노브고로트 등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비평가, 철학자, 작가가 모여서 결성한 아티스트 콜렉티브이다. 콜렉티브의 이름인 ‘슈토 델라티&r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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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서울, 9호선

서울, 9호선 김재근 그에게서 여자 얼굴이 보였다 해지는 들녘 노을이 몸을 누일 때 계절은 물속 낙서처럼 흔들렸다 흰 뼈만 남은 가지 사이 바람은 멀고 숲에는 적요가 흘러 그의 젖은 몸을 감쌌다 오늘의 이름과 내일의 얼굴과 그 틈을 비집고 기우는 숨결 이대로 밤이 검어진다면 어디쯤에서 몸은 식어 갑니까 그림자가 물을 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감추고 말할 데를 몰라 혀를 숨기고 기도를 했다 누운 자의 목소리 들리십니까? 계곡을 떠도는 바람소리 빛들은 하나 둘 떨어지는데 죽은 새는 어디에 어디에 둘까 꽃병에 꽂아 둘까 잠들기 전 읽은 문장에는 내일의 우물은 맑아 허공에서 신발이 우박과 함께 떨어지고 주운 신발을 신고 젖은 채로 예배당을 가야 하는데 기도할수록 버림받은 얼굴이 된다 미리 버려진 거라면 버려진 장소쯤은 기억해야 하는데 어떤 연주법으로 이 행성을 연주해야 할까 기도할수록 짧아지는 손가락을 가난이라 말해도 될까 어떤 운지법이 이 계절의 숨소리를 두드리는지 기차는 지하에서 지하로 이어 달리고 칸칸마다 악몽을 꾸는 검은 창문들 문이 열려도 출구는 어렵다 미안해, 이제 그만 하자 왔던 길을 몇 번씩 되돌며 입술이 빨간 남자를 다시 보고 다시 지나치고 다시 마주치는 지하역, 출구를 찾으시나요? 물어볼 수 없었다, 그의 애인이 될까 봐 차가워진 뱀의 발개진 살갗에 내리는 지하의 짓무른 불빛 허공에 뜬 잎사귀처럼 얼어버린 태양의 긴 혀처럼 문 닫은 카페처럼 이대로 밤이 검어진다면 이대로 몸이 식어 간다면 젖은 영혼은 어디서 말릴까 기도할수록 흐려지는 목소리 기도할수록 혀는 엉키는데 죽은 나는 아무 말도 들려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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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불온하고 장난스런 노이즈

[비평in문학]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불온하고 장난스런 노이즈 송효정 1. 근래 사실주의적 사회영화들에서 사실성, 역사,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이란 굳건한 미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장과 법정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민주적 가치와 정의가 탐문되는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광우병 촛불집회(2008)와 광화문 촛불집회(2016-2017)를 경유한 광장의 정치는 공론장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갈망을 담은 사회파 영화 내지 실화 소재 영화를 통해 반영되어 왔다. 사법정의와 헌법적 가치에 대한 갈망은 법정영화에서 빈번히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세속적 인간의 자각과 변화를 통한 계몽의 기획을 보여준다. 에서 그리고 최근 까지가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이다. 정치를 소재로 했지만 이들은 주류 상업영화적 기획 속에서 세심하게 조율된 내러티브 기반의 캐릭터 중심 영화들이며 사실상 탈정치적 영화들이다. 권력의 외설성이 드러나는 장면의 위험성을 뭉개기 위해 이들은 신파성, 코미디, 가족주의를 끌어들이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정의의 좌절과 변혁의 패배를 회고적으로 돌아보는 애도의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감성적으로 파고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에 대한 정동적 열망을 동력으로 삼는 경향을 통해 비폭력과 질서를 강조하는 합의 가능한 시민적 상식의 가치를 상업적 동력으로 삼아 이를 공감의 가치로 포장한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급진주의에 대한 부정, 혁명, 전복, 교란의 기피, 이들을 질서로 다스리려는 소프트한 계몽의 태도가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근래에 나는 IMF 이후 한국 영화의 사회적 상상력에 대한 학술발표를 통해 혁명에 대한 열망이 억압되고 코뮌에 대한 상상력이 부재한 채 이타주의적 공감을 요청하는 사회파 영화가 대두되고 있음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 사회에서 천만 관객을 기록한 사회영화의 대척점에서 검열 및 표현의 자유 논쟁과 연관된 영화들을 겹쳐 보았다. (2010)까지의 2000년대 이후 곡사형제의 괴란한 영화와 미술과 영화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정윤석의 근작 (2017)와 같은 작품이다. 사실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에 긴박된 전자의 것들은 유기적인 것과 비장한 것이라는 한 쌍의 변증법적 조합을 세련된 상업성으로 위장할 줄 안다는 점에서, 예이젠시테인과 소비에트 내러티브 영화미학의 ‘세속적’ 후계자들일지도 모른다. 단일한 주인공을 거부하며 집단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드라마 을 떠올리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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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장마의 방

장마의 방 김재근 여긴 고요해 널 볼 수 없다 메아리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기에 당신의 방은 침묵을 기다린다 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 목소리 하나의 빗소리가 무거워지기 위해 빗소리는 얼마나 오랜 침묵을 배웅하는지 몸 안에서 몸 바깥을 들여다보는 고요를 거슬러 오르는 눈동자 아직 마주친 적 없어 침묵은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는 일 말없이 서로의 목을 매는 일 빙하에 스미는 물소리처럼 여린 식물의 초록 잠 속처럼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기에 당신의 몸은 빗소리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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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로봇 단테 1

[글틴스페셜 - 동화] 로봇 단테 1 임어진 “어서 와라. 단테 1호. 수명호 승선을 환영한다.” 장 회장은 은발을 한 손으로 쓸어올리며 경쾌한 걸음으로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노인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탄탄한 몸이었다. 단테는 집무실 입구에서 단정하게 목례를 하고 장 회장이 권하는 소파로 가 앉았다. 장 회장의 우주선에 탑승하게 된 건 가히 가문의 영광이었다. 로봇이 자기를 만든 제조회사를 가문이라고 여겨도 좋다면 말이다. “집무실이 고딕식 분위기가 나는군요. 회장님 취향을 조금 알겠어요.” “그래? 하하하. 듣던 대로 감성이 뛰어나군. 생긴 것도 멋지고. 내 선택에 만족하네.” 장 회장은 소파 대신 커다란 책상 앞으로 가 앉으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책상 위 천장 조명들이 장 회장이 앉은 위치에 은은하게 조도를 맞추며 은발을 더욱 부드러워 보이게 했다. 적당히 주름지고 그을린 구릿빛 얼굴도 보기 좋았다. 매스컴에서 늘 보던 모습이었다. 단테는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칭찬 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았다.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 단테는 현존 최고 수준의 로봇들을 생산하는 걸로 세계 시장에 급부상하고 있는 드림 차일즈사의 명실상부한 으뜸 상품이었다. 수명그룹 총수 장수명 회장은 단테를 구입하는 대가로 드림 차일즈에 제2공장 건설 부지를 내놓았다. 수도권 서쪽에 자리한 삼십만 평 공장 부지는 장 회장이 지닌 수십조 원 재산의 원천인 곳이었다. 장 회장은 작은 뻘밭에서 소금을 긁어 파는 일로 장사를 시작해 지금과 같은 거대 무역회사 수명그룹을 키워낸 전설의 인물이었다. 정확한 나이나 출신 배경은 아무도 몰랐다. 일찌감치 고아가 되었다는 전설의 시초만 창업주 홍보물 도입부로 지겹도록 등장했다. 어차피 세상은 과거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장 회장이 지닌 현재 부의 크기, 앞날의 전망에 더 치중했다. 다행히 장 회장은 맨주먹으로 큰 부를 이룬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전노 노랑이과는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부를 호쾌하게 쓸 줄 알았다. 자선단체치고 수명그룹의 후원을 받지 않은 데는 거의 없었다. 장수명 회장이 우주선 수명호를 띄우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놀란 건 당연했다. 수명그룹이 우주 사업에 뛰어들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장 회장은 우주여행 사업에 뜻이 있다며 본인이 첫 여행자로 답사 선발대가 되어 떠나겠다고 선포했다. 노령의 장 회장이 그런 계획을 갖고 단테를 지목해 구입 의사를 밝혔을 때, 드림 차일즈 내부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단테는 많은 사람들과 교감하며 지성과 감성을 스스로 키워 가도록 설계한 최신형 로봇이에요. 인류가 새로운 지혜를 필요로 할 때 현명하게 기여하길 바라고 단테 같은 지성 로봇들을 만든 거잖아요. 이제 세상에 갓 한 걸음을 내디딘 셈인데, 미처 제 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기업가 한 사람 사업 거들라고 보낼 수는 없어요.” “장 회장이 제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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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1
동그란 말

[단편소설] 동그란 말 강석희 라디오를 들었다. 오늘 밤. 하늘에는 특별한 달이 뜬다고 합니다. 아주 크고 둥근 달이 보일 거라고 하네요. 크고 둥근 것은 아름다우니까 그걸 보는 일은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로해 줄 거라고, 밤이 되면 우리는 조금씩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바라면서 이 오후를 보냅니다. 디제이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나는 그의 말처럼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했다. 오후의 햇살이 맺혀 있던 천장에 여러 가지 질문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 질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물음표가 나를 낚아채서 어디론가 던질 것 같았다. 모든 물음들을 흘려보내고 난 뒤에 한 가지 물음이 남았다. 내가 과연 행복해져도 될까? 미영이네가 이사를 간 날이었다. * ‘과학을 얼마나 좋아하니?’에는 나름의 대답을 했지만 ‘과학상자를 사올 수 있니?’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탓에 과학탐구반에 들어가지 못했던 날, 미영이를 처음 보았다. 미영이는 잔디밭에 앉아서 뭔가를 자꾸 입에 넣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건 흙이었다. 더 가까이 가보니 손에 지렁이도 한 마리 쥐여 있었다. 미영이에게도 지렁이에게도 아주 위험해 보였다. 미영이는 흙과 함께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순한 눈으로 보다가 입을 아, 벌렸다. 큰일이야, 생각한 나는 잔디로 뛰어들어 미영이의 손을 쳤다. 지렁이가 몸을 뒤틀며 흙속으로 사라졌고 미영이는 에엥, 울음을 터뜨렸다. 빨간 목장갑을 낀 미영이의 어머니가 뛰어왔다. 나는 미영이를 울렸다는 이유로 혼이 날까 무서워졌다. “얘가 지렁이를 먹으려고 했어요.” 미영이 어머니는 애초에 혼낼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폭신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정수리에 남은 온기에 손을 갖다 대보는 동안 미영이 어머니는 미영이를 품에 안고 남은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간 곳은 109동 203호, 우리 옆집이었다. 집 안에는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이 가득했다. 미영이 아버지와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땀을 흘리며 큰 짐들을 내려놓는 게 보였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 사이에서 주스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미영이 어머니는 문 앞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미영아, 오빠한테 안녕, 해야지.” 어머니의 품에 안긴 미영이의 동그란 머리통이 나를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때 우리들이 살았던 아파트는 집만 빼고 모든 것이 넓었다. 가로로 길게 지어진 5층짜리 건물 하나당 50개의 현관문들이 서로 어깨를 댄 복도식이었다. 단지 내에 그런 건물이 총 10개가 있었고 건물 사이의 간격이 넓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사이는 가까워서 건물과 건물 사이에 사람들이 만드는 소리가 채워졌다. 아침이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어린아이들이 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참새를 쫓아다녔다. 오후가 되면 집안일을 마친 아주머

  • 관리자
  •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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