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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통의 러브레터

  • 작성일 2019-05-01

[문학리뷰(소설)]



세 통의 러브레터



한설




작년부터 운 좋게 모 문예지에 계간평을 쓰게 되었는데, 언젠가부터 깊은 회의감이 느껴졌다. 계간평, 혹은 월평이나 격월평은 도대체 누가 읽는 걸까. 가뜩이나 위기라는 독서시장에서 문예지를 찾아 읽는 사람은 몇이겠으며, 거기서도 애써 계간평을 펼쳐 보는 사람은 몇일까. 기껏해야 평론가나 편집자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계간평을 쓰는 이유는 뭘까. 읽는 이가 거의 없는 글일 텐데…….
회의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최근에 작고하신 김윤식 선생님에 대해 여러 글을 찾아보다 발견한 어떤 문장 덕분이었다. "월평이란 것은 작가에게 한 마디 말을 걸어보는 거지요. 말을 한번 슬쩍 걸어보면 그만입니다. 작가는 그걸 봅니다. 자기에게 비평가가 말을 걸어오니까."1) 어쩌면 계간평은 작가라는 단 하나의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구축한 세계가 사랑스럽다고 말하기 위하여, 나아가 당신의 세계를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말하기 위하여, 이를테면 라디오 사연란에 보내는 러브레터 같은 글. 당신의 라디오가 어디에 주파수를 맞췄는지도 모르면서.
세 통의 러브레터를 전파에 띄워 본다. 부디 이것이 무사히 송신되어 작은 응원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1) 권영민, 「어떤 만남 그리고 헤어짐」, 《문학사상》 2018년 12월호, 문학사상사, 8쪽


1. 이한슬, 「어떤 사이」(《세계일보》 2019년 신춘문예)


- 나는 오래전에 터키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한 뒤에 아내와 함께 9박 10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고 이어 말했다. 아내, 라는 말에 전기 포트를 들어 찻잔에 물을 붓던 그녀의 신경이 곤두섰다. 아버지는 9박 10일간의 터키 여행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말하려 들었다. 여행 내내 무슨 음식이든 잘 먹었던 아내와 달리 자신은 음식이 맞지 않아 버스에서 내내 메스꺼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는 것과,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있는 여행객 때문에 툭하면 버스가 세워졌던 상황들, 그런 순간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기 위해 말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말들은 점점 문법이 맞지 않거나 가끔은 루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말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루와 달랐다. 그 엉망진창인 말들은 그녀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가 갔던 해외 여행지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 아버지가 점점 더 제대로 된 영어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횡설수설하다 못해 엉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루가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루의 저녁 아르바이트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어떤 사이」의 미덕은 루의 존재이다. 소설은 루를 묘사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그녀는 "큰 키에 마른 체구, 짧은 녹갈색 머리칼,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외국인"이며 "대화를 나눌 때면 […] 언제나 영어를 사용"하는 은수의 "완벽한 룸메이트"이다. 그런데 은수의 아버지가 그들을 찾아오면서 루는 순식간에 소설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 채 묵묵히 아버지의 기나긴 이야기를 듣기만 한다. 공(空)에 한없이 가까워진 루.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는 투명하기 그지없는 루를 그대로 통과해 은수에게 향한다.
과거에 은수의 엄마는 그들 사이에서 불화를 완충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녀는 남편의 폭언을 부드럽게 은수에게 전했고, 은수의 토로를 요령 있게 남편에게 전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지금 세상에 없다. 은수와 아버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울컥 솟아올랐을 때, 비로소 그녀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은수는 예전부터 루에게서 엄마의 역할을 기대했었다. 루가 청소할 때 엄마가 청소하던 모습을 떠올렸으며, 루가 텔레비전을 볼 때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루는 엄마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 "그녀의 집에 남아 있던 엄마의 흔적들을 치워 준 건 루였다. 방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엄마의 물건들을 박스에 담아 준 건 루였다." 루는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리해 주는 사람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방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은수와 아버지 사이에는 어떠한 완충도 없다. 날카로운 감정만이 가득할 뿐. "제발 거짓말 좀 그만 하세요. […] 그렇게 잘 아셨으면 엄마 심장이 멈추기 전에 병원에나 데려가지 그랬어요."
그런데 소설을 다시 읽다 보면 루와 엄마가 어슷하게나마 겹쳐지는 것도 같다. 루는 공(空)에 가까워졌고, 엄마는 공(空)이 되어버렸다. 부재를 매개로 포개지는 둘. 거기서 소설은 새로운 맥락으로 비상한다. 아버지가 찾아오기 전까지 은수는 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하는 질문들은 그동안 루와 그녀가 지켜 왔던 선을 제멋대로 넘나들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유지되었던 두 사람 사이의 편안함, 그 적당한 거리를 아버지가 다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엄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완충을 필요로 하면서도 정작 그에 관해선 소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아버지는 은수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니? […] 네가 네 엄마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버지가 떠난 다음 은수는 그들 사이에 완충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그동안 완충을 맡은 이에게 무지했다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나지막이 다짐한다. "다음에 아버지가 다시 터키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잠자코 들어 봐야겠다고". 그들의 힘으로 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엄마의 삶을 이해해 보겠다는 각오. 비로소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2. 장희원, 「우리(畜舍)의 환대」(《악스트》 2019년 3/4월호)


"그럼 학교에 다니니?"
아내는 영재의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요."
민영은 고개를 저었다.
"변기 닦는 일을 하는데요."
민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민영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서 있는 재현에게 물은 여깄어요, 하면서 냉장고 아래 칸을 가리켰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물병을 꺼내, 새 컵에 따라 주었다. 그는 물컵을 받으면서 짜릿한 냉기가 손에서 전해지는 걸 느꼈다. 손등을 쓸어 봐도 그 느낌이 채 가시지 않았다.
[…]
민영이 다시 부엌 쪽으로 사라졌고, 아들과 노인은 소파를 좋은 위치로 조금씩 옮겼다. 일이 끝나자 아들과 노인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은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다. 노인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아들의 등 언저리를 짧게 토닥였다. 티셔츠 위로 솟은 아들의 날개뼈 언저리를 온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듯 잠시 그곳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아들의 목 뒤로 짧게 입을 맞췄다. 재현은 그 자리에서 꼼작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환대」의 미덕은 부부의 엇갈린 시선이다. 그들은 아들 영재의 집에서 각각의 이유로 불편함을 느낀다. 재현의 아내에게 그것은 민영이다. "훤히 드러난 허벅지에는 검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영재보다 어려 보였다. 여자애는 풍선껌을 질겅질겅 씹었다." 재현의 아내는 아들이 '그런' 여자와 함께 산다는 사실이, 또 아들이 '그런' 여자와 친하다는 사실이 신경 쓰인다. 한편 재현에게 그것은 노인이다. 예전에 그는 아들이 포르노를 몰래 보던 것을 목격했었다. "화면에는 어깨가 벌어진 근육질의 두 남자가 뒤엉켜 있었다. 조금 더 체격이 큰 쪽이 상대방의 목을 그러쥐고 조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성적 지향이 동성애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잠깐이지만 아들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때문에 그는 아들이 '그런' 노인과 함께 산다는 사실이, 또 아들이 '그런' 노인과 남달라 보인다는 사실이 신경 쓰인다.
민영은 조신함으로 대표되는 여성-질서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이고, 노인은 이성애로 대표되는 사랑-질서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이다. 그들은 부부가 영위하던 그간의 체계에 이면이 있다는 사실을 저 스스로 폭로함으로써 끊임없이 부부의 체계를 교란시킨다. 기호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라면 이를 두고 비체(卑體, abject)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위협적인 것. 그리하여 본능적인 거부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러니 부부는 언제나 구역을 느낄 수밖에.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씹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삼키기 어려워 보였다. […] 그는 그래…… 하고 맛을 음미하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즐겁지 않은 파티'라고 명명될 수 있는 이런 류의 서사는 기실 낯선 것이 아닌데, 누군가의 속물성이나 허위성을 폭로할 때마다 요긴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달뜬 마음으로 초대에 응한 객(客)이 모순적인 언행을 일삼는 주(主)에 실망한다는 식으로.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그런 것에 일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주(主)는 어떠한 위선적인 면모도 보이지 않은 채 진심으로 객(客)을 환영하고 있다. "어쨌든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손님인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객(客)의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언행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 소설은 무언가를 폭로하려 하는 대신 중대한 윤리적 질문을 하나 제시하려 한다. 체계의 바깥이 말을 걸어올 때 체계의 안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같은. 그리고 그것은 환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한 언제나 유효한 질문일 것이다.



3. 박서련, 「곤륜을 지나」 (『릿터』 2019년 4/5월호)


내가 복이 없다.
그때껏 말이 없던 늙은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복이 참 없다.
늙은이는 그 말을 크기와 높낮이만 달리하여 여러 번 되풀이했다. 자영은 귀를 막고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이제껏 참은 것이 아니었다. 몇 걸음 앞서 걷는 늙은이를 확 자빠뜨리고 벼랑 아래로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뭐가 영산이고 뭐가 신선경인가. 드는 생각이라곤 온통 흉측한 것들인데.
[…]
듣기 싫어요.
자영이 빨개진 눈으로 늙은이를 쏘아보았다. 듣기 싫다고. 제발 그만둬. 그런 말 몇 마디 하면 나를 다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드나요. 늙은이는 자영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럴 것이었다. 자영은 애초에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곤륜을 지나」의 미덕은 늙은이의 일방적인 속죄이다. 그녀는 며느리인 자영이 근속 10주년을 맞아 해외여행 상품권을 받자 대뜸 중국행을 종용한다. "아범한테 들었다. […] 내가 생각해 둔 데가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여행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자영의 카드로 결제한 데다 눈치 없이 사돈한테 자랑까지 한다. "자영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 애초에 돈을 주며 가라 해도 마다할 여행이었다. 독박을 이중 삼중으로 쓰면서 벌 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말에 이르러 자영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한다. "나는 아범 낳을 때 내 복을 다 썼다. […] 내가 복이 없으니까 네가 고생한다. […] 내가 니 업이고 니가 내 업이다. […] 업이 씻어진다더라. 곤륜에 오면……."
겉보기에 두 사람의 여행은 화해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자영은 중국으로 가는 배에서 극심한 멀미에 시달리는데, 이는 당연히 그녀가 늙은이를 그만큼 역겨워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랄맞은 건 어머님이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노산의 정상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늙은이와 함께 사진을 찍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애도 아닌데 이쯤에서 져 드려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 게다가 엉겁결에 찍은 사진이 의외로 괜찮게 나온다. "적어도 자영과 늙은이는 모두 선상에서 찍은 사진보다는 한결 밝은 표정이었다." 어스름한 화해의 징조 속에서 늙은이는 자영에게 맥주를 부탁한다. 기묘한 대화와 함께. "힘드냐? […] 힘드냐고 했다. […] 네가 덕 없고 팔자 사나운 노인네를 만나서 힘에 많이 부칠 것이다."
헌데 속죄란 것이 원래 이렇게 말 몇 마디로 해결되는 것이었나. 그동안 늙은이는 자영을 괄시해 왔었다. 결혼을 앞두고 자영이 인사를 드리러 찾아오면 단번에 돌려보냈고, 아이를 가지려는 자영의 노력이 번번이 실패하면 그게 다 팔자라면서도 계속 어멈이라 불렀다. 그런 오랜 설움을 말 몇 마디로 퉁치려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까. 중국에 있는 사이 엄마는 암으로 입원까지 했다는데. "혼자 편해지려고? 자기 마음만 편해지면 그만이고, 그간 잘못한 것 있으면 다 잊어버리라고?"
소설의 마지막 순간, 자영은 의식을 잃어버린 늙은이를 등에 업고 산을 마저 올라가야 할지 도로 내려가야 할지 갈등한다. "그럼에도……"를 되뇌이며. "차마 끝까지 할 수 없는 말". 자영의 다음 말은 무엇일지, 그리하여-소설이 판단을 유보한-일방적인 속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작가소개 / 한설

1996년 출생.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분 수상. 현재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재학 중.


《문장웹진 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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