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낯선
- 작성일 2019-08-01
- 댓글수 0
[문학리뷰(소설)]
누구보다 낯선
박다솜
1.
우리는 '낯섦'을 경험하기 위해 떠난다. 여행이란, 익숙하지 않은 상황과 사람 속에 나를 던져 넣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필히 설레는 감정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낯설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만들고 불쾌하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 '낯섦'이 아니다. "회사 일로 영혼이 어둑해지거나 인간에게 자주 실망할 때면 혼자 이국의 낯선 도시를 검색해 보곤(김애란, 「숲속 작은 집」, 《문학동네》 2019 여름호)"하던 은주 역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설렘을 기대한 곳에서 불쾌함을 만난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일곱 시간가량 걸리는 나라의 산악도시"의 '숲속 작은 집'에서 은주는 그 사람과 만난다. 그는 은주와 남편 지호가 묵는 숙소를 청소해 주는 메이드다. 어느 순간 메이드는 집 안의 물건을 고의로 어지럽히는데, 은주 부부가 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은주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 뒤로 매일 아침 팁과 함께 '감사합니다'란 글귀를 그 나라 말로 적어서 침대에 두고 나온다.
결정적인 사건은 은주가 기념품 가게에서 구매한 돌로 만든 집 모형, 그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다운 물건" 때문에 생긴다. 어느 날 은주는 집 모형 세 개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청색 비늘 지붕 집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날 아침 은주 부부는 지폐가 없어 동전을 팁으로 두고 갔었다. 지호는 "확실한 게 아니니 의심하지 말라"며 은주를 진정시키지만, 은주는 동전으로 팁을 받은 데 앙심을 품은 메이드의 짓이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다. 그러고는 크게 분노한다.
나는 불쾌함에 몸이 떨렸다. 백 번 양보해 그래, 사람이 돈에 욕심 부릴 수도, 불성실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부도덕해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사람들 때문에 괜히 열심히 사는 다른 사람들이 욕먹는 거 아니야. 만날 다른 사람 탓하며 불평해대지만 정작 편견을 누가 양산하는데? (157)
돌아오는 날, 팁을 두고 가려는 은주 부부에게 공교롭게도 또 지폐가 없다. 은주는 동전으로 팁을 두고 종이에 감사 인사를 적는다. 그런데 "막상 이곳을 떠나려 하니 이상하게 이 집에 돈은 남겨 둘 수 있어도 감사 인사만은 남기고 싶지 않단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사흘 전 거실에서 사라진 집 모형을 생각하니 더 그랬다." 결국 은주는 감사 인사가 적힌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온다. 택시를 기다리던 은주 부부에게 메이드의 딸이 뭔가를 전해 주고 간다. 집 모형이 사라진 것은 메이드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소설은 끝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은주는 또 한 명의 낯선 사람을 만난다. 바로, 은주 자신이다. '은주는 은주가 낯설다'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은주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자. 그녀는 메이드에게 팁을 주는 문제에 관해 지호와 이야기하면서 팁을 주는 것이 혹 결례는 아닐까 걱정한다. "친절을 돈으로 갚을 경우 모욕으로 느끼는 나라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또 은주는 '메이드'라는 단어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지호에게 '메이드'라는 말 대신 '청소해 주시는 분'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한다. 그러니까 은주는 자본이 휘저어 둔 관계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말대로 "이국에서 마주한 노골적인 계급 차에 좀 쩔쩔"매는 사람.
한편으로 은주는 자본주의가 규정해 준 관계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말로만 정중한 업체보다 정산 잘 해주는 데를 더 신뢰"하며, 집 모형이 사라진 것이 팁을 동전으로 준 데 항의하는 메이드의 짓이라고, 너무 쉽게 확신한다. 따라서 메이드가 고의로 집 모형을 치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은주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낯선' 자기 자신에 대한 불쾌함 때문이어야 한다. "나는 불쾌함에 몸이 떨렸다. 백 번 양보해 그래, 사람이 물건에 욕심 부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부도덕해선 안 되는 거 아닌가?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괜히 열심히 사는 다른 사람들이 욕먹는 거 아니야. 만날 다른 사람 탓하며 불평해대지만 정작 편견을 누가 양산하는데?"
메이드는 낯선 타인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처음에 메이드는 일부러 집을 어지른다)을 하는 사람. 그러나 은주에게 메이드보다 더 낯선 타인은 은주 자신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돈으로 얽힌 관계들에 대해 세심하게 반성하는 사람)와, 낯선 '나'(단숨에 메이드를 오해하는 사람) 사이에는 무시 못 할 낙차가 있다. 나는 때로 내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은주가 이렇게 내밀하게 나쁜 사람인 것은 은주만의 잘못인가? 자본주의는 무고한가? 자본의 논리는 사람들 사이사이를 활보하며 관계를 규정한다. 이는 단순히 노동자(메이드)와 사용자(은주 부부)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돈은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 사이로도 지나간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은주와 달리 남편인 지호는 부유한 부모님 아래서 자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부부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어느 정도 사실이어서, 당분간 장모님 용돈을 자기가 챙기겠다는 지호의 제안을 거절하는 은주에게 지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정말 알아서 하든지 아님 그냥 고맙다고 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하자."
그러니 은주가 내밀하게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은주의 반성과 함께 자본이 사람들 사이사이를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많이들 하는 말로, 사회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간편한 주장에는 응당 어려운 질문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어떻게?"
2.
여기 이 어려운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복화술사'다. 이장욱의 단편 「복화술사」(《문학동네》 2019 여름호)는 소설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복화술사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은 소설이다. (복화술로 말하는 내용까지도 담았다!) 이 복화술사의 이야기가 의미 있는 것은 '낯선 목소리'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 복화술이란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기술'이다. 복화술로 내는 소리는 입을 움직이지 않을 뿐, 입을 움직여서 내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발화자가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나온 소리다. 그러나 소설 「복화술사」는 발화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튀어나온 어떤 목소리에 대해 말한다.
그 시작은 '나'의 할아버지다. 그는 1930년대부터 복화술을 시작한, 비공식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복화술사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고위 관리들 앞에서 아사달 아사녀 이야기를 각색한 공연을 하다가 '대한 독립 만세'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할아버지의 인형이 외친 소리였고, 할아버지는 인형의 입을 막는다. 사건 이후 그는 실종자가 된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의 아들이다. 1981년 5월 그 서슬 퍼렇던 시절, 텔레비전 생방송에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인형극을 하던 아버지는 "독.재.타.도."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버지의 인형이 낸 소리였고, 사건 이후 그는 말을 잃는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손자이고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다. 고등학생 시절,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를 본 나는 "이봐, 그런 짓은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어른이 된 후 어느 날 회사 사장에게 손찌검을 당하는데 '그만둬.'라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결국에는 사장 조카에게 "나이도 어린 새끼가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면, 회사가 돌아가, 안 돌아가?"라고 말하게 되고,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온다. 「복화술사」에서 '낯섦'은 불쾌함을 야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낯선 목소리'는 할아버지, 아버지, 나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소리다.
이 중 아버지의 "독재타도"는 조금 더 특별하다. 이 낯선 목소리는 아버지에게 정말로 '낯선'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세상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독재타도'라고 외쳤던 아버지는 "사실 그 방면으로는 별 생각이 없는 사람", "정치니 경제니 좌니 우니 하는 걸 모르고 살아온 떠돌이"에 불과하다. 아버지가 외친 '독재타도'는 그동안 억압되어 왔던 정치적 견해의 표출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 자신에게도 갑작스러운, 천만뜻밖의 것이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아버지를 향해서 "너도 마찬가지야, 이 새끼야."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럴 때, 내가 알고 있는 '나'(정치나 경제에 무관심한 사람)와, 낯선 '나'(생방송 프로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는 사람) 사이에는 무시 못 할 낙차가 있다. 나는 때로 내 생각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단순히 더 '훌륭한' 사람이기만 한 것일까. 슬라보예 지젝은 윤리적인 행위가 '기적처럼' 일어난다고 말한 바 있다.
라캉이 보기에 본래 윤리적인 행위는 드물다. 그것은 사물들의 일상적 흐름을 중단시키는 '기적처럼' 일어난다. 그것은 주체의 전체적인 '인격'을 표현하지 않으며, '개인적 정체성'의 연속 속에서 하나의 단절로 기능한다. (슬라보예 지젝, 조형준 옮김, 『헤겔 레스토랑』, 새물결, 2013, 232면.)
지젝이 보기에 윤리적인 행위의 특성은 그것이 "사물들의 일상적 흐름을 중단시키"며, 개인적 정체성의 연속에도 단절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독재타도'라는 외침은 이런 조건을 충족한다. '독재타도'라고 말하는 낯선 목소리는 방송을 중단시킨다. 카메라맨은 카메라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사회자와 심사위원들은 얼어붙는다. 그리고 그 외침은 발화자인 아버지마저 당황하게 만든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그 소리는 아버지의 정체성(정치나 이념과는 무관한, 그저 복화술사일 뿐인 사람)에 균열을 낸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윤리적 순간이 있다. 나는 때로 내 생각보다 더 '윤리적인' 사람이다.
이처럼, 사회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복화술사」의 '낯선 나'다. 뜻밖에도 윤리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한다. 부당한 사회 구조와 싸우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숲속 작은 집」과 「복화술사」에서 각각 하나씩의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숲속 작은 집」의 은주는 현실의 질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본이 정의내리는 관계들에 대해 반성하고 고쳐 나가려 한다. 메이드를 노동자로 간접 고용하고 있는 은주의 '현실적 정체성' 속에서 그렇게 한다. 뒤틀린 현실에 속해 있는 '나'를 유지한 채, 그 뒤틀린 현실과 싸운다.
복화술사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현실에 맞선다. 그는 먼저 '나'를 버린다. 잘못된 구조 속의 나를 버리고 냅다 외친다. '독재타도'라고. 그리고 '대한 독립 만세'라고. 나를 버렸기에, 현실 속 나의 안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뒤틀린 현실 속에는 그가 지켜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말을 잃게 되거나 실종자로 처리되는 일을 걱정하는 '나'는, '독재타도'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나'와는 무관하다. 복화술사가 낯선 목소리로 말할 때 그의 '현실적 정체성'은 단절되고 낯선 외침만이 남는다.
소설은 이런 낯선 외침이 복화술사 개인만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신을 잊고 관객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잊은 아버지는 관객들이 가진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외친 '독재타도'는 관객들도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그들 마음속의 소리다. 이는 아버지가 한 번에 두 명(오빠, 누이동생)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는 여러 사람의 염원을 발화할 수 있는 존재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나'는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한 번에 낼 수 있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잠꼬대마저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하게 된 화자는 유명한 복화술사들을 찾아가 조언을 얻고자 한다. 대부분의 복화술사들은 나에게 정신과에 가보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한 원로 복화술사는 내가 겪고 있는 일이 '분(分)화술'임을 알려준다. 그는 분화술이 병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덧붙인다.
현실에 맞서는 은주의 방법과 복화술사의 방법은 각각 '낯선 나'와 마주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의 차이만큼이나 그들이 만나는 '낯선 나'의 차이도 분명하다. 은주가 만나는 '낯선 나'와 복화술사가 만나는 '낯선 나'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다. 은주는 잘못된 현실과 멀어지려 노력했던 지점에서 문득 잘못된 현실에 물들어버린 나를 만난다. 복화술사는 스스로가 현실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문득 누구보다 현실참여적인 나를 만난다. '낯선 나'의 층위까지 고려할 때, 우리는 낯설고 새로운 윤리와 마주하게 된다.
내가 만나고 싶은 '낯선 나'는 어떤 모습인가? 물론 복화술사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못하다. 현실 속의 '나'를 버리는 복화술사의 방법은 너무 위험해 보인다. 말을 잃게 되거나 실종자로 처리되는 것은 아무래도 겁나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겨울의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배웠다. 한 명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의 '나'를 버리고 외친다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분화술사'가 된 복화술사는 우리에게 어떤 '능력'을 촉구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다른 곳에서, 당신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불러오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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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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