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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 작성일 2021-12-01

기획의 말

2021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서윤후, 「아무도 없는 우리」를 읽고(《문장 웹진》 2021년 11월호)

사랑의 자세만 남겨 둔 채 우리는 방으로 돌아갑니다

문장웹진 12월호 살펴보기

그릇

그릇 민구 내 그릇을 본 건 처음이었다 청소하다가 우연히 꺼내본 그릇 너무 낡아서 웃음이 나왔다 내 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원형이나 사각형은 아니었고 강박 때문에 금이 갔으며 군데군데 녹이 슬어서 보여주기 민망했다 크림 컬러의 플레이팅 접시나 바로크 엔틱 찻잔이 나왔더라면 꿈을 더 크게 가질 수 있었을까 내가 조금 넉넉한 사람이었다면 당신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그릇은 종이 접시처럼 볼품없었다 접히고 찢어져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주방을 정리하다가 그릇을 내놓았다 이사할 때 가져온 밥공기도 있었고 한 번도 쓰지 않은 냄비도 있었다 내 것을 함께 놔두었지만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구겨진 그릇은 주머니에 넣거나 급한 용무를 받아 적을 수 있었다 떡이 되도록 술 마시고 돌아온 날 세탁기에 돌릴 때도 있었다

  • 민구
  • 2021-12-31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송경동 기름 묻은 스패너가 투덜거린다 나는 왜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냐고 덩달아 밀링도 투덜거린다 내가 뚫은 수많은 요점들이 근래 한국문학에 제대로 인용된 적 있느냐고 콘베어도 투덜거린다 뺑이치며 이 세상 돌려줘 봐도 우리에 대한 서사는 한 줄도 없다고 그냥 듣고 있던 미싱들도 공작기계들도 건설공구들도 농기계들도 어구들도 덩달아 한마디씩 하고 나선다 시끄러워 죽겠다 다 자기들 얘기 쓰는 거라고 니들 얘기는 니들이 쓰면 되지 웬 투정들이냐고 한마디 하고 만다 *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오스트롭스키는 1904년 9월 16일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뒤 기차역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발전소 화부 조수로 일하며 세상에 눈떠갔다. 1919년 혁명군의 일원이 되어 전선에 나갔다가 중상을 입고 제대했다. 병상 생활을 하며 시력까지 잃었으나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신의 자전소설인 장편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썼다. 이 소설은 전 세계 100여 국에서 출판되었다.

  • 송경동
  • 2021-12-31
간다

간다 김현 아주 간다 끌려서 끌고 가는 줄 알고 모르고 간다 아주 간다 개 끌고 개에 이끌려 설상가상 냅다 뜀 인생 본다 뒤에서 우하하 푸하하 웃으며 간다 점심 먹고 얼죽아 마시러 끌려서 끌고 가는 듯 보이지만 죽어가면서 제정신일 때마다 근황 차분한 준비 메리 크리스마스 해시태그를 붙여서 누구라도 괜찮다는 식으로 좋아요 다른 시라면 이쯤에서 꿈이 나올 텐데 다른 삶이라면 이쯤에서 개똥을 치우게 해줬을 텐데 부고 모월 모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던 천둥벌거숭이 ○○씨 (시에 이름을 쓰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내 이름은 언제? 묻고. 그럼 살짝 묻어 둡니다. 어느 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겨울 무 뽑듯 거두려고. 깊게 묻으면 파헤쳐야 하니까. 사람 속을 가지고 그러면 안 되니까. 그냥 갉아먹으려고.) 숙취 해소를 위해 오전 반차 써본 사람은 다 알지 오는 데 순서 있지만 가는 데 순서 없다 생각하고 침을 퉤퉤 뱉지 않으면 가보면 다 끌려갔다 영정은 다 애매한 얼굴 평소엔 확실히 울상이었는데 (자기야, 웃어야 웃는 얼굴이 되는 거야.) 한때 손을 잡고 다녔지 겨울 산 겨울 강 천하절경 로또부지 온 김에 보러 가자 대자연 뷰 같이 살자는 가짓부렁 믿는 발등 도끼 찍기 생이 별거니 코로나19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장례식장에서 나와 천변을 걸었다 마흔 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답하지 못해서 좋아요 누를까 말까 이런 태그에 목매는 사람은 어떤 사람 (마흔살까지, 마흔살까지살아야해, 마흔살까지만, 마흔살까지만살자, 마흔살까지써야지) 크리스마스이브에 대궐 같은 옥탑에서 혼자 사는 중년 게이 우리 죽기 전까지 가까이 어울려 지내요 말을 받들었다 이 악물고 간다 아주 간다 개 죽음에 끌려 곧 곤두박질치겠지 아아 마시고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똥 치우는 사람 개 얼굴에 (팀원) 은주 씨 얼굴을 주인 얼굴에 (팀장) 용희 씨 얼굴을 따 붙이고 싶네 크게 웃었다 한 번뿐인 인생 막 살자 막사막사 이런 건배사도 하는 마당에

  • 김현
  • 2021-12-31
그에 걸맞은

그에 걸맞은 이근화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 그 안에 내가 잠자고 있다 그에 걸맞은 옷을 벗고서 눈을 입고서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 그 안에 내가 웃고 있다 그에 걸맞은 찬 입술로 주문을 외우며 염소젖과 소금을 상상하며 발을 헛딛는 상상 바퀴가 돌아가는 상상 나는 살았네 나는 살았네 세상에는 없는 높이로 뛰었지 땡그랑 땡그랑 바람은 무관심했지 제자리로 다시 나의 집으로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 너의 주문은 역겹다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살았다

  • 이근화
  • 2021-12-31
그린

그린 배시은 그림과 그린 이가 나란하다. 그림은 그린 이와 나란하다. 그린 이는 그림의 대체 텍스트를 작성하고 있다. 버스가 철망을 따라 달리고 창밖에 원형 혼합물이 떠 있다. 스티커 뗀 자국 같다. 언제나 창밖은 일어난 일이 최대한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 중에 법적 감염병자가 있습니까? (경유) (경유) (경유) 여기서부터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데 (경유) (경유) (경유) 물줄기는 기계 같다. 저압 전류가 흐를 것 같다. 그린 이는 주머니에서 헝겊을 꺼낸다. 이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린 이는 손바닥에 난 땀을 닦아 내고 그린 이는 자신의 그림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길게 늘어나 있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 배시은
  • 2021-12-31
대장을 찾아서

대장을 찾아서 여세실 하나뿐인 가짜가 좋았다 거리에 옷무더기가 쌓여 있다 헐값에 팔고 있는 금속 시계가 가판에 널브러져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청바지를 목에 둘러보고 옷소매에 묻은 얼룩을 문질러 보았다 세탁을 한다고 지워질 게 아닌 걸, 소매를 오래 쥐고 있다가 흔들어보았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보라색에 가까웠다 그건 연한 것과 진한 것 사이 너를 부르면 네가 돌아본다 옷감은 부들부들하다 옷걸이가 휘어있다 이 뜨개와 자수는 사람이 일일이 짠 것 같고, 너는 거의 사람이다 일부는 버리고 몇몇은 나누기도 하며 매대에 있는 옷 중에 제일 이상한 옷 옷 중의 대장 내가 쓰지 않는 것과 네가 찾지 않는 것들이 다시 쓰임을 찾아갈 때에도 밑단이 짧은 셔츠, 콩단추가 달린 자켓 이 거리의 상인들은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홈이 페인 그릇과 유리들 그 사이를 걸었다 그릇 위에 그릇이 쌓여 있었다 반짝인다 이 그릇들을 차례로 쌓아놓았을 주인의 걸음걸이를 본다 제각기의 안목과 이 그릇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이 코트는 곧 안감이 뜯어질 것 같다 이 찻잔은 받침과 함께 버려졌으니 값어치가 더 나간다 너는 짝이 없는 빛 위로 넘어진다 컵과 그릇들이 무너지고 깨지고 내가 찾아 헤매던 게 바로 이런 순간이라고 아귀가 제대로 맞지 않는다 계속 열리는 중 쏟아지는 중 아주 작은 이염을 알아보고 평범한 옷에 새 단추를 다는 마음은 단 한 벌뿐이라서 어그러진 마음을 비밀이라고 부르지도 말고 코위찬이라고 해도 다 같은 코위찬이 아니듯 이걸 입는다고 해서 내가 북유럽 부족의 일원처럼 보일까 아니 너 엄청 더워보여 이 옷은 주인이 필요 없습니다 너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재채기를 멈추지 않는다

  • 여세실
  • 2021-12-31
엄마 온 엄마 오프

엄마 온 엄마 오프 김혜순 부엌에는 털실로 짠 냄비가 있다 저 냄비는 불에 올릴 수 없다 이제 저 부엌은 끝났다 안방에는 털실로 짠 가위가 있다 저 가위로 헝겊을 자를 순 없다 이제 이 집의 바느질은 끝났다 주전자는 말해서 무엇 하랴 저 털실 주전자에 물을 부을 수 없다 이제 차 마시기는 글렀다 주전자에서 털까지 자라니 주전자와 냄비가 부부라니 엄마는 털실을 끌고 온 사람 털실은 흡반 달린 촉수를 어디에나 뻗었다 집에는 늘 털실로 짠 물건들이 늘어났다 저것을 짜는 동안 몸이 알아챈 불안감을 재울 수 있었다고 엄마는 회상했다 저 숟가락은 끝났다 구멍이 뚫렸으니 게다가 저 숟가락에서 뿌리가 어마어마하게 돋아났으니 태어나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만 만들다가 6일만에 죽는 나방이 있다 나방의 꼬리는 털실로 땋은 머리처럼 길다*) 그 나방은 세상에 나올 때 이미 입이 없었다 나방이 떠나자 이제 집이 털실로 따 짜여졌다 금붕어 두 마리가 어항 밖에서 헤엄치며 털실로 짠 어항을 들여다본다 뭐 하는 물건일까 하는 표정으로 어항은 방치된 정신 병동처럼 뿌옇다 이 집은 끝났다 집이 털실 꽃병에 꽂혔으니 이 마을도 끝났다 집들이 전부 털실 꽃병에 잠겼으니 (엄마는 이제 아 방에 이렇게 진열되었습니다) 이 방에 불을 켜는 스위치는 털실 뭉치 안쪽에 숨겨져 있고 털실로 짠 이불을 들추자 그 안에 집 안의 칼들이 전부 눕혀져 있다 이제 칼을 찾는 숨바꼭질이 끝났다 게다가 털실로 짠 칼이라니 *) 장대꼬리산누에나방 Argema mittrel

  • 2021-12-31
너만 아는 농담

[단편소설] 너만 아는 농담 이정연 “다음 주 목요일은 어때? 화요일이면 프로젝트도 끝나 갈 테고…… 우린 금요일이 좋긴 한데 네가 가족의 날이라고 번번이 거절하잖아.” 전화기에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건우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고, 목요일이 안 되는 이유를 생각했다. “널 생각해서 날도 맞춘 거야. 코로나 때문에 한참 못 봤는데, 넌 그전부터 안 나온다고 얼마나 씹어대는 줄 아냐? 우리가 뭉친 게 네 결혼식이 마지막 아니었어?” “그게, 그렇게 됐나?” 축의금석에 봉투를 건네고 식권을 받느라 몰린 사람들, 나를 알은체하고 호기심에 두리번대던 얼굴들, 문득 결혼식 하객들이 떠올랐다. 동네 친구들과 대학 동기들은 축하 인사를 건네고, 채경과 채경의 친구들에게 곧장 관심을 돌렸다. 여느 결혼식과 비슷하게 분주히 오가는 하객과 행사 진행요원, 예식장 입구에 즐비하게 늘어선 화환과 대형 결혼사진은 식전부터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동시 예식으로 엉킨 사람들을 보며 비용이 부담되더라도 단독 홀에서 진행할 걸 후회했다. 그러나 회사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차라리 번잡한 상황이 낫지 싶었다. 건우는 내가 답을 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준기랑 형민 선배. 아, 최 팀장님도 오신댔다. 그 양반, LK에 스카우트돼서 한동안 힘들다고 하시더니 이번에 인사부장으로 승진하셨나 봐. 얼마 전에 통화했는데 그 회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냐고 물으시더라. LK면 완전 대박 아니냐? 근데 너, 아직도 그 일로 애매한 건 아니지?” 건우의 제안은 나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가 빠진다 해도 그들이 모이는 데 지장이 없을 테니까. 모임에서 유일하게 불편한 사람이 최 팀장이라고 옆에 앉는 것도 꺼리던 놈이 웬 존대를 저리도 깍듯이 하는지. 4년 전 우리는 마케팅팀에서 같이 근무했다. 그때 최 팀장은 팀장급 차장으로, 형민 선배는 과장, 나와 건우는 2년차 사원, 준기는 막 들어온 신입사원이었다. 나름 팀워크가 좋아 형민 선배가 사업한다고 퇴사하고, 최 팀장이 스카우트되어 나간 뒤에도 가끔 만나서 애경사를 챙기는 사이로 남았다. 하지만 나는 결혼 뒤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알았어, 장소 정해지면 알려줘.” 나는 최 팀장의 얼굴을 오랜만에 떠올렸고, 문득 이제는 그와 얘기해도 감정이 동요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둘이 따로 만나는 것보다 부담이 적을 것도 같았다. 이번엔 확실히 풀어 봐, 라는 건우의 말을 곱씹으며 얼린 모유 팩을 뜨거운 물에 넣어 중탕으로 데웠다. 채경은 교육 일정이 갑자기 추가돼 자정이 되어서야 끝날 것 같다고 점심이 지나서 연락해 왔다. 아이를 출산하고 당분간 입사는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마케팅 보조 경력이 인정돼 중소 규모의 홍보대행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채경은 회사에서 경단녀를 우대한 덕분이라며 기회를 잘 잡았다고 신입사원 연수일 뿐인데도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이른 나이에 사회

  • 이정연
  • 2021-12-01
핀셋과 물고기

[단편소설] 핀셋과 물고기 문서정 “핀셋 훔치는 거 다 봤어요.” 2층 계단 벽에 어떤 여자가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다가 내가 지나가자 툭, 말을 던졌다. 나는 4층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오던 참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그 여자를 째려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이어 턱을 높이 쳐들었다. 한 번만 더 무슨 말인가를 내뱉었다가는 계단 밑으로 처박히게 해주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항공 점퍼 주머니에 손을 급히 넣었다. 끝이 뾰족한 핀셋이 손끝에 만져졌다. 내 주머니 속에 휴대폰 대신, 지갑 대신 지녀야 할 것이 있다면 단 하나, 바로 핀셋이었다. 핀셋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자는 20대 후반쯤 됐을까. 도수가 높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여자가 이비인후과로 달려가 이르겠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핀셋으로 저 여자의 손등을 찍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발로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여자는 조금 통통한 체격이었는데 온몸으로 바닥을 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발길질에 시멘트 바닥이 균열이 나서 언젠가는 남극의 빙하처럼 둥둥 떠내려갈 것 같았다. 나는 여자를 뒤로하고 1층으로 계단을 뛰다시피 걸어 내려왔다. 이비인후과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의료용 시술 기구인 핀셋 종류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오늘 훔친 핀셋을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놓았다. 이비인후과에서 귀 치료를 받고 난 뒤 진료실을 빠져나갈 때마다 어떤 날은 드레싱 티슈 포셉을, 또 어느 날은 트위저나 락킹 플레이어를 슬쩍 가방 안에 넣어왔다. 오늘은 드레싱 티슈 포셉 중에도 날이 있는 드레싱 티슈 포셉을 가지고 왔다. 이제 집에는 드레싱 티슈 포셉이 일자형과 커브형, 날이 있는 것으로 다 갖춰졌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핀셋을 바라봤다. 훔친 핀셋으로 귓속의 거즈를 더 깊숙이 밀어 넣거나 뺄 때면 어쩐지 더 시원했다. 커피를 내려서 소파에 앉자 귓속에서 곤충 날개가 파르르 떠는 듯한 소리가 났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솨솨, 솨솨솨, 솨솨솨. 귀에서 대나무 숲을 헤집는 듯한 바람소리가 났다. 다르게 표현하면 수천 마리의 곤충이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 같았다. 들릴 듯 말 듯한 사람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몇 달 전부터 마치 주문에 불려 나온 듯 이런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이어폰을 오래 껴서 생긴 이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오랜 불면 때문에 잘못 들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바람에 커튼 자락이 쓸리는 소리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바람소리도, 곤충소리도, 커튼 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조그맣게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며칠 뒤에 다시 이비인후과에 갔다. “귀가 이 지경이 되도록…… 상당히 아팠을 텐데요.” 의사가 내 귓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귓속에서 소리가 나서 자주 후볐다는 말

  • 문서정
  • 2021-12-01
누구나의 반란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누구나의 반란 김정빈 시도 소설도 평론도 아니지만 문학적인 글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수필, 일기, 산문 등 여러 이름이 붙을 수 있겠으나 최근 가장 급부상한 이름은 단연 ‘에세이’일 테다. 그런데 에세이는 그 범주를 도저히 모르겠다. 시처럼 보이는 짧은 글귀도, 그림과 함께 적힌 글도, 꽤 긴 글도 전부 에세이라고 한다. 문학장이 에세이라는 부류에 주목한다면 에세이를 어디서 어디까지로 한정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문인 즉, 시인이나 소설가의 손에서 탄생한 산문만을 건져낸다면, 에세이를 규명하기 위한 기준이 다른 장르적 구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에세이는 부차적인 장르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문학관을 조망하기 위한 부가 자료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니 에세이라는 부류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문학장에 소환하기 위해서는 에세이에 대한 다변적인 고찰이 먼저 필요하다. 이 글은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글들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며 에세이에 대한 고찰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은 에세이 베스트셀러의 목록을 살피는 것으로 한다. 다른 무엇이 아닌 에세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단연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에게 가닿고 있는 도서들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위 목록은 ‘교보문고’에서 제공하는 월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를 기준으로, 21년 1월부터 10월까지의 에세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산출한 것이다.1) 교보문고는 오프라인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 두 분야에서 모두 가장 큰 판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유통사이므로,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기준으로 삼았다.2) 상위 20권의 작가들을 크게 분류하면 총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직업/경험이 독특하거나, 작가이거나, 인플루언서이거나. 찬찬히 살펴보자. 『어린이라는 세계』의 저자 김소영은 어린이 책 편집자로 10년 넘게 일하다가, 현재는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의 공동 저자 김새별, 전애원은 모두 유품정리사다. 이들은 직업상 겪어 왔던 독특한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얻은 깨달음을 에세이로 작성한 것이므로, 첫 번째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저자 박완서와 『지구인만큼 없어지구를 사랑할 순』의 저자 정세랑은 모두 소설가다. 『나라는 식물을 키워보기로 했다』의 작가 김은주는 10년 넘게 카피라이터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2008년 『1cm』를 시작으로 다수의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남겼으므로 에세이스트라고 지칭할 수 있겠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의 저자 김범석 작가

  • UNTON
  • 2021-12-01
제우스와 아폴로

[단편소설] 제우스와 아폴로 이홍 암흑 속 두 개의 점이 나란했다. 산부인과에서 진료와 수납을 마치고 병원 건물을 나서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란성 쌍둥이라니. 무턱대고 건물 일층의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들고 창가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의 연녹색 이파리들이 쟁쟁한 생명의 기운을 뿜어냈다. 생명, 어쩌면 나는 이 두 개의 점처럼 작은 생명체를 더 늦게 발견할 수도 있었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나는 임신 가능성이 칠 퍼센트 이하인 노산이다. 지난 일 년간 이 미미한 수치의 희망을 쫓아왔다. 생리주기가 오면 박스 채 주문한 임신 테스트기들 중 하나를 꺼내어 매일 아침 임신여부를 확인했다. 유난스러운 수고 끝에 맺게 된 결실이었다. 기뻐해야 마땅한 순간이었으나 초음파 촬영기에 잡힌 두 생명체를 목도한 후 내리 당혹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야 진정을 찾았다. 카페를 나서기 전 루에게 임신소식을 알리기 위해 문자를 보냈다. 제우스와 아폴로! 내 문자를 받고 대뜸 전화를 걸어온 루의 첫 마디였다. 목소리 음역이 고른 루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높았다. 약간 떨리는, 고무된 목소리를 들으며 카페 안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방향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다가 아까 앉아있던 자리로 황망히 돌아가 앉았다. 루는 태아들의 생물학적 아버지고 나는 이미 루와 헤어진 연인사이였다. * 통화를 마치기 전 루는 재우에게 이 소식을 알렸는지 물었다. 나는 아직, 이라고 말미를 흐렸다. 아들 재우에게는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재우는 동생을 바랐었다. 전남편과 이혼 후였다. 재우가 이따금 동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비추곤 했었다.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어서 더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오래 전 일이다. 재우는 이제 열아홉 살이다. 성인식을 앞두고 생기는 배다른 동생에 대해선 어쨌든 소감이 다를 터였다. 인도를 걷다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샀다. 임신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담배를 끊었었다. 일 년 가까이 금연한 게 아까워서라도 다시 피우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물었다. 라이터 불을 붙였다. 두 모금 빨다가 담배와 라이터를 몽땅 쓰레기통에 버렸다. 집으로 돌아갔다. 신발장 앞으로 나이키에어 농구화가 놓여있었다. 곧장 재우의 방 쪽으로 걸어가서 방문을 열었다. 책상에 앉아 킨들로 책을 읽던 재우가 기척을 듣고 뒤돌아보았다. 나는 할 말이 있어, 라고 운을 뗐다. 재우가 당장 나올 것처럼 기지개를 켜고는 이따가 얘기해도 되는지 물었다. 다른 날이었다면 식사시간이니 어서 나오라고 재촉했겠지만 어쩐지 조심스러웠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재우가 방에서 나온 건 그로부터 두 시간 후였다. 허리밴드가 늘어져서 엉덩이 절반까지 흘러내린 파란색 사각팬티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 상의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나는 오는 길에 사온 김밥 세 줄을 꺼냈다. 그릇에 김밥들을 덜어서 식탁 위에 올렸다.

  • 이홍
  • 2021-12-01
물들지 않고는 가까이할 수 없는 세계

[리뷰 - 창작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물들지 않고는 가까이할 수 없는 세계1) 양근애 고통을 느끼는 존재의 권리 2019년 7월 경기도의 한 종돈장에서 돼지가 구출되었다. ‘새벽이’라는 이름을 얻은 돼지는 생추어리(sanctuary)에서 올해 두 살 생일을 무사히 맞았다. 종돈장에서 태어난 돼지는 6개월 만에 도축된다. 그렇게 한 해에 천 팔백여 마리의 돼지가 도축된다고 한다. 새벽이는 동물권단체 직접행동 디엑스이(DxE)코리아 활동가들이 ‘공개구조(Open Rescue)’했다.2) 돈을 주고 돼지를 사 오는 것이 아니라 농장주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구조한 사례였다. 생추어리는 미국의 동물권 활동가 진 바우어가 만들어낸 공간으로 공장식 축산 등으로 피해 입은 동물들의 ‘안식처’이자 ‘피난처’다. 구조된 새벽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폐허가 된 지구에 마지막 남은 인류처럼 외로웠던 것은 아닐까. 다행히 ‘새벽이생추어리’에 최근 ‘잔디’라는 돼지가 구조되어 새벽이와 함께하게 되었다. 제약회사의 실험동물이었던 잔디는 새벽이와는 다르게 경계심이 없어 사람에게 잘 다가온다고 한다. 동물도 인간들처럼 다 다른 외양과 성격을 가진 고유한 존재다. 인간만이 고유한 존재라는 환상은 근대 이후를 오래 지탱시켰다. 직립보행, 사회성, 자의식, 지능 등을 토대로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 피터 싱어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토대로 ‘동물 해방’을 주장했다.3) 벤담은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가’, ‘말을 할 줄 아는가’가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가’라고 보았다. 피터 싱어 역시 인간이 다른 종들이 누리지 못하는 권리를 가지는 것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부여한 지위일 뿐, 종차별은 인종차별과 차이가 없다고 했다. 동물과 인간을 종이라는 기준으로 나누고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1978년 10월 15일, 유네스코에서 ‘세계 동물 권리 선언’이 발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인권 선언이 선포된 지 삼십 년 만의 일이었다. 세계 동물 권리 선언 제1조는 “모든 동물은 생태계에서 존재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권리의 평등은 개체와 종의 차이를 가리지 않는다”, 제2조는 “모든 동물의 삶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 동물은 권리 없는 ‘물건’에 해당한다.4) 생명 없는 유체물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최초로 동물권을 인정한 독일은

  • 2021-12-01
[문학생활탐구] 프롤로그

[문학생활탐구] 문학생활탐구 - 프롤로그- 설하한, 최아현 이 이야기는 책 동산 세계에서 펼쳐지는 부추와 삑 그리고 그 친구들의 모험 이야기랍니다. 부추와 삑은 이제 곧 무지개 동산을 찾아다니며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될 거예요. 그리고 친구들이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게 될 거랍니다. 삑 부추 부추와 삑은 아직 자신들이 곧 모험을 떠나게 될 거라는 걸 까맣게 몰라요. 하지만 이제 곧 모험이 시작될 거예요. 친구들도 부추와 삑과 같이 모험을 떠나요! 삑 안녕? 부추아이고, 깜짝이야. 넌 누구야? 삑나는 삑이라고 해. 넌 누구야? 부추나는 부추야. 여기에는 왜 왔는데? 삑예쁜 책을 찾아서 이 동산까지 왔어. 부추예쁜 책? 삑응. 예쁜 책. 나는 이렇게 책을 뜯어서 엉덩이에 꽂아서 장식하는 걸 좋아하거든. 그래서 예쁜 책이 필요해. 부추나는 예쁜 책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없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 모양의 책이 있다면 구경은 해도 좋아. 삑이 핑크색 책이 예쁜 것 같아. 삑은 부추의 핑크색 책을 부리로 찢으려 했답니다. 부추는 화들짝 놀랐어요. 부추뭐 하는 거야? 책은 읽는 거야! 놀란 부추는 삑에게서 책을 뺏어 들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부추의 표정에 삑이 당황해서 되물었답니다. 삑읽는 거? 부추표지 말고 여기 안쪽을 보라고. 엄청나게 재밌는 세상이 이 책만큼 펼쳐져 있단 말이야! 삑희고 검은 글자뿐이잖아. 하나도 예쁘지 않아. 예쁘지 않은 책이 무슨 의미가 있어? 장식도 못 하구 말이야. 부추몸에 붙인 장식은 닳아 없어지지만 읽은 책의 이야기는 없어지지 않아! 말랑하고 푹신한 구름, 반짝이는 햇살 같은 건 없어지지 않는다고! 삑넌 참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책의 희고 검은 색뿐인 부분을 좋아한다니. 이런 장식은 금방 떨어져. 이 장식도 곧 떨어질 거야. 어서 예쁜 책을 내놔. 부추말도 안 되는 소리! 내 책은 너에게 절대로 줄 수 없어. 대신 언젠가 모든 동산을 돌아다니는 책 모험가에게서 들은 소문을 알려줄게. 삑어떤 소문? 부추동쪽으로 한참 가다 보면 아름다운 무지개 동산이 있대. 말랑한 구름을 만질 수 있고, 반짝이는 햇살은 무척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굴러다닌대. 그 동산의 한가운데 가면 거대한 책장이 있는데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모아 놨다는 거야! 구하기 어려운 아주 오래된 고서도 있고! 작가들이 발표하지 않은 원고를 묶어 둔 책도 있대! 당연히 표지가 예쁜 책도 많겠지. 멋지지 않니? 어쨌든! 내 책은 건드리지 마! 삑그 동산이 어디에 있는데? 부추그건 나도 모르지. 얼마나 먼 곳인지, 얼마나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나는 많이 걷고 싶지 않으니 모험가에게 그곳이 얼마나 먼 곳인지는 따로 묻지 않았지. 그냥 그곳이 어떤 곳인지만 들었을 뿐이야. 삑예쁘고 좋은 책이 많다니……. 정말 대단한 동산일 것 같아. 나를 꾸며 주는 예쁜 장식들이 떨어지기 전에 당장 거기로 가야겠어. 부추저기 혹시…… 그 동산에 갈 생각이라면 나도 데

  • 2021-12-01
플라이

플라이 최세운 직선은 곡선이 되고 곡선은 직선이 되고 허공을 가르는 살갗이 찢 어지는 그리고 붉은, 플라이 벌어진 틈새로 갈라진 형태로 깊게 파인 직선과 곡선으로 원스트라이크투볼 쓰리아웃체인지 다시는 아물지 않 을 형태로 어둡지 않을 자세로 그대로 가만히 플라이 플라이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르는 기울어진 의자의 모습으로 더 깊이 플라이 형은 집에 없었고 직선은 곡선이 되고 곡선은 직선이 되고 허공을 가르는 살갗이 찢어지는 붉은, 플라이 글러브 안으로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주 머니칼을 가만히 쥐면서 신발이 벗겨지고 머리가 감기고 허공을 가르 면서 더 깊이 플라이 플라이 급커브를 그리면서 킥, 킥, 머리 위로 쏟 아지는 중력을 느끼면서 도미노와 도미노 그대로 가만히 도미노와 도 미노 더 멀리 그리고 붉은, 포물선을 팔목에 긋는 사인을 기록해 기울 어진 의자의 모습으로 더 깊이 플라이 플라이 직선은 곡선이 되고 곡 선은 직선이 되고 멀리 더 멀리 붉게, 쏟아지는 플라이 불 꺼진 거실 로 싱크대가 없는 부엌으로 나무와 놀이터가 엉겨 붙은 한낮으로 달콤 하게 맺혀 떨어지는 붉은, 플라이 바닥으로 흘러가는 기억을 잊지 말 아요 아물지 않은 형태로 닦지 말아요 허공을 가르는 살갗이 찢어지는 그리고 붉은, 플라이 벌어진 틈새로 갈라진 형태로 깊게 파인 직선과 곡선으로 원스트라이크투볼 쓰리아웃체인지 공기 중에서 녹는 설탕처 럼 형은 집에 없었고 직선은 곡선이 되고 곡선은 직선이 되고 눈을 감 고서 현기증을 느끼며 플라이 플라이 원스트라이크투볼 쓰리아웃체인 지 형과 하늘을 찢고 붉은, 더 멀리 날아가 플라이

  • 최세운
  • 2021-12-01
꽃꽂이

꽃꽂이 이기리 어쩌면 며칠 생활을 잠시 두고 온 것뿐인데 오늘은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날이 벌써 밝아지고 있어서 수평선이 보일 것 같아서 숲을 걷다 노래를 부르고 생선 구이를 먹다 혼자라는 단어에 가시가 박혔길래 그냥 살다 보면 다 넘어가겠지 싶었는데 그런 결론은 너무 무책임했는데 책임지는 건 또 왜 이리 싫은지 보기만 해도 좋을 이 삶을 누가 꺾어 갔으면 하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에게 말도 걸어보았습니다 갑판 위에 올려놓은 말린 오징어들 뜯은 빵 부스러기들 나날들 모두 당신 것이지요 눈빛을 부러뜨리고 도망쳤습니다 구두를 벗으니 살갗이 까진 뒤꿈치 바다는 혼잣말을 하지요 계절을 실재하는 것으로 증명하기 위해 비와 눈이 내리고 나무는 열매와 잎을 맺고 열매와 잎을 떨구고 바닥은 낙엽을 치우고 발자국을 새기고 두들겨 맞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몸을 내어 주고 사람과 만나고 사람과 헤어지고 사람과 죽는 일 다음 세대 다음 세기가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지난 일이 될 수 있다 파도가 부지런히 몰고 온 물의 가능성에 발끝을 적실 뿐이지요 그렇다면 가능하지 않은 물이 되고 싶습니다 무효한 석양 아래서 그림자의 발목만 두고 옵니다 취하고 싶습니다 이거 너무 약합니다 강한, 더 강한 사건을 주세요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요구한 대로 조명이 어두워지니 이제야 모든 창문을 벽으로 볼 줄 압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아무 팔을 붙잡고 차가운 가로등에 기대 오물을 뒤집어써도 발견되지 않을 만합니다 당신 없이도 지내볼 만합니다 나날이 죽어가고 있는데 계속 주어지는 생활 생활을 버리자 또 다른 생활이 침대를 흔들자 삐걱거리는 소리 헤아리는 뜻은 안감 다정한 목소리는 겉감 입어보니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릎까지 오지도 않는 생일 이런 걸 누가 입니 어울리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듯이 검은 풀밭에 엎드려 자신의 상처를 핥는 길고양이는 태어나자마자 주인을 잃었을 듯합니다 일종의 자가수분인 셈입니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 주고 싶습니다 스스로 흩뿌리는 꽃가루 거기에 몰려드는 각기 다른 유서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무슨 모양일지 궁금합니다 그래도 언젠가 세상에 내놓을 푸념조차 없어 몸이 바싹 마르더라도 우리를 예쁘게 묶어주세요 아무렇게나 의미하세요 너무합니다 단 하루 잘 자라고 싶었을 뿐인데

  • 이기리
  • 2021-12-01
사춘기

사춘기 김미소 집을 짓다 쓸모없어진 벽돌처럼 엄마는 앉아 있었다 힘껏 내려치지 않은 마음의 균열 나를 괴물이라 놀리는 아이의 이름을 벽에 적고 빨간 줄을 긋는다 완벽한 거미집, 사람을 찌를 수 없으니까 한 사람의 이름을 가두고 조금 웃는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해진다 깨진 창문에 붙여놓은 테이프가 이탈한다 검은 봉지 속의 벽돌, 이대로 은폐할 수도 있다 손끝이 닿는 곳에 두고 천장을 응시한다 나는 중얼거린다 방 안 가득 외로운 포자가 떠돌았지만 벽돌은 교감을 모른다 교감 선생님이 잡아당겼던 귓불이 따갑다 벽돌은 가만히 듣는다 슬픔은 가공되지 않아 둔탁하다 아빠가 집을 떠나는 나쁜 꿈이 사라지도록, 수맥이 흐르지 않도록 주먹을 쥔다 듣는 귀가 늘어난 것만 같아 자는 척 했다 연기가 조금 더 늘었다 연극을 사랑할 수 있니, 밤의 역할은 가만히 웅크려 귀를 막는 것 두 손에 마임이 생긴다 울음은 나를 가두는 작은 집 바깥에 슬픈 귀가 더 있다

  • 김미소
  • 2021-12-01
허공에 걸터앉은 나의 구체적 자세

허공에 걸터앉은 나의 구체적 자세 황성희 최승자를 읽을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시가 들려주고 보여주는 세계보다는 자신의 시를 살아낸 한 여자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감당해야 하는 게 실존이라면 나는 누구에게도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물의 귀퉁이가 투명해진다 싶은 날에는 얼른 뛰어가 텔레비전을 켠다 거기에는 이국의 전쟁고아들도 있고 불치병으로 투병하는 환자들도 있다 후원단체의 스케치북에 감동하는 아버지와 주민센터의 도배로 곰팡이가 숨겨진 방에서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가족도 있다 그들 옆에서 잠시 나의 허공을 잊고 옷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후원계좌를 받아적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건강한 게 최고야 먼 세계의 메아리 같은 내 목소리를 듣지만 숨소리의 직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시각각 실존의 정면이다 대대로 이어져 온 나는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 이 세계는 어떤 기원에 대한 상동과 상사의 기관인지 유서 깊은 벽에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1)이 되어 명상을 가능하게 했던 햄버거2)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지만 어떤 식으로든 없어지고야 마는 구체적 생애에 대하여 생각한다 1) 최승자 「일찌기 나는」 중에서 부분 인용. 2) 장정일의 시 「햄버거에 관한 명상」의 제목 변용.

  • 2021-12-01
[책방곡곡] 천안 가문비나무아래 (제3회)

[책방곡곡] 천안 가문비나무아래(제3회) 사회 : 박진숙 참여 : 우연주, 이정희, 이영민, 한승연책 : 조해진, 『환한 숨』 박진숙 :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작품집 『환한 숨』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전체적인 감상을 먼저 나누어 주세요. 한승연 : 저는 조해진 작가를 처음 알게 되어서 이 작품집으로 책모임을 하기 전에 『완벽한 생애』라는 장편을 먼저 읽었어요. 단편집을 읽기 전에 작가가 쓴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문체로 쓰는지 어떤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인물의 일생을 읽다 보니까 슬프기도 하고 공감되기도 했습니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기록을 하기 위해 한 번 더 읽다 보니까 플래그를 정말 많이 붙일 정도로 좋은 문장이 많았습니다. 이 모임 후에 친구들과도 이 책으로 모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하나의 숨」이라는 작품이 가장 와 닿았는데, 예전에 읽은 책 중에서 미성년자의 산업재해를 다룬 작품들이 같이 떠올랐어요. 최근에 읽은 작품 중에는 최진영 작가의 『일주일』이 생각났고요. 작품 속의 인물은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되면 취업률이 떨어지니까 학교 측에서는 버티기를 권유할 뿐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해주지 않는 현실이 마음에 안타깝게 남아 있습니다. ‘하나의 숨’이라는 제목은 하나가 내쉬는 숨이 결국에는 우리에게도 돌아온다는 사실, 산업재해와 우리가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해서 아주 의미 있게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정희 : 『단순한 진심』을 읽을 때도 슬픔이나 아픔에 관한 이야기를,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특별하게 느껴지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작품집도 마치 앞의 결과 뒤의 결이 다른 파이처럼, 아프긴 아픈데 어떻게 아픈 건지, 슬프긴 슬픈데 어떻게 슬픈 건지 잘 느껴지게 표현하고 있더라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과해 버리거나 뭉뚱그려 받아들이는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고 풍부하게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의 숨」에서 하나 담임선생님이 비정함에 관해 얘기하는 부분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녀는 평소와 달리 존댓말을 섞어가며 그렇게 말을 이었고,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쉬운 단념에 사나워졌던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녀의 말은 모두가 공평하게 비정하다면 한 사람의 비정은 모두의 비정으로 희석된다고, 세상 어디에도 더 비정한 비정은 없다고, 그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 「하나의 숨」 96쪽 이 부분이 마음에 너무 와닿았어요. 그리고 하나의 담임교사가 기간제 교사여서 2주 뒤에는 계약이 끝난다는 것을 하나 어머니가 알게 되었을 때, 하나 어머니의 체념하는 듯한 표정 변화가 눈에 그려졌어요. 제 얼굴이 화끈화끈해질 정도로, 제가 마치 택시 기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요. 「경계선 사이로」도 무척 재미있었고, 「문래」의 문장들도 그 ‘차이’를 고

  • 2021-12-01
ㅎㅇㅅㄴㄷ

ㅎㅇㅅㄴㄷ 나하늘 이거 무슨 뜻일까 활엽수 농담한 이상 너도 형용사 냉동하였습니다 허언 세뇌 대학원생 난데 핫이슈는 다회용 수납대 여러 번 수납할 수 있다는 뜻이야 한 번만 수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니 휴일 시낭독회에서 늙다 헛 예술 노동 후 읽습니다 흑역사 낭독했어 신난다 땡. 정답입니다. 꿈을 몇 개 꿨어? 많이 많은 얼굴 많은 열쇠 많은 너 행운 샀는데 하얗습니다 하연수는 동행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 우리가 잘하는 건 둥글고 넓은 농담 여러 번 담을 수 있는 비유 네가 우릴 어떻게 읽을지 궁금해 발음해 봐.

  • 2021-12-01
식물인간

[창작 - 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식물인간 어단비 등장인물 남자 여자 기타 외 1명 무대 와이드한 무대 위, 센터에 침대, 침대 옆 협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무대 바닥 상하수 양옆으로 마킹테이프가 화살 표시처럼 붙어 있고. 군데군데 겹쳐진 선은 마치 너비와 길이 x, y같다. 암전 상태인 무대를 걷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이내 들려오는 외 1명의 목소리 외 1명유엔 산하 IPPC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기후변화에 관한 비관적인 미래를 전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IPPC에 따르면 금세기 말까지 지구의 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3도 이상으로 앞당겨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체 조명 in 상하수 양옆으로 마킹테이프가 화살 표시처럼 붙어 있는 무대 무대 중앙 침대엔 남자 여자 누워 있다. 외 1명이 수화를 하며 대사를 이어 가고 하수에 스탠드처럼 서 있는 기타는 8박자로 탭 댄스를 추기 시작한다. 외 1명(수화를 함께하는) 이에 과학저널 네이처는 뼈를 깎는 탄소배출 억제와 지구온난화 억제 조치를 하지 않으면 2100년 자칫 지구는 여섯 번째 대멸종과 더불어 죽기 전 인류재앙을 보게 될 것이라며 경고했다. 점점 격렬해지는 탭 소리, 기타의 탭 댄스는 처절해 보이다 이내 조금씩 잦아든다. * 외 1명은 계속해서 무대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현 상황을 수화로 설명한다. 남자(잠시 뒤 놀란 듯 잠에서 깨며 자리에 앉아 호흡하는) 여자(뒤척이며 깨어나며) .......왜 그래? 꿈꿨어? 남자(호흡 고르며) ... 하아... 하아... 어...? 어.... 여자(배를 감싸며) 어휴 놀래라... (호흡 고르며) 노티스 지금 몇 시야? 남자(탭 댄스 속삭이듯 작게 치며) 지금 시간은 여섯 시 삼십 분입니다. 남자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여자그런가 봐. 남자슬슬 준비해야겠네. 여자응. 남자너는 언제야? 여자다음달. 남자지겹다 지겨워. 여자물 줄까? 남자응. 고마워. 여자(침대 옆 협탁에 놓인 이름표가 붙여진 300ml 물통을 건네는) * 300ml 물통엔 시간대별로 하루 먹을 양이 눈금 표시 되어 있다, 남자(표시된 눈금만큼 먹는) 여자(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중앙 창문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근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남자(여자를 바라보는) 기타(탭 댄스 점점 격렬하게 추는) 여자(겁에 질린 목소리로) 자기야..? 남자왜? 여자잠깐만 이리 와봐. 남자(귀찮아서) 아 왜? 순간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가 무대 안에 가득 퍼진다. 탱크 소리 점점 커지는, 그때 포탄소리 쾅! 여자꺄아아아아. 남자(잔뜩 몸을 움츠린 뒤 고개 드는) 뭐야!? 여자빨리 이리 와보라고!!! 남자(창문 쪽으로 걸어가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무대 안으로 탱크 수십 대의 그림자. 남자서울 한복판에 웬 탱크

  • 어단비
  • 2021-12-01
[문학생활탐구] 1-1화 :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

[문학생활탐구] 문학생활탐구 설하한, 최아현 -1화-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 부추와 삑이 처음 사귀게 될 친구들은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에요. 아 마침 저기 멀리서 부추와 삑이 오고 있네요. 우리 함께 부추와 삑을 지켜볼까요! 삑헥헥…… 부추야. 언제쯤……. 헥헥…… 도착하는 거야? 부추 힘드니? 삑헥헥…… 하나도…… 헥헥…… 힘들지…… 헥헥…… 않아……. 부추잠깐 쉬었다 가자. 저기 봐! 저 동산에 누군가 있어. 저 사람들도 혹시 무지개 동산을 아는지 물어보자. 또, 다른 동산의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어. 삑은 기다렸다는 듯 날갯짓을 멈추고 동산 위에 내려앉았어요. 삑궁금한 거? 헥헥……. 그게 뭔데? 부추나는 남들의 책 이야기도 궁금하거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산을 물어보면서 그것도 같이 물어보려고. 최고의 책을 아는지! 부추는 삑의 등에서 내려 책을 읽고 있는 리수와 리치 그리고 진에게 다가갔어요. 삑은 헥헥거리며 터벅터벅 부추의 뒤를 따랐답니다. 부추안녕. 나는 부추 삑나는 삑이야……. 헥헥……. 너희 무지개 동산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리치나는 리치! 진안녕. 진이야. 리수나는 리수라고 해. 무지개 동산은 내가 좀 알지! 삑무지개 동산을 알아? 리수내가 아주 어릴 때 거기에 가본 적이 있어. 아주 빛나고…… 빛나고…… 빛나는 곳이지. 한 번 더 가보면 좋겠네. 삑어디에 있는데? 리수아마…… 동쪽에 있지! 그나저나 너희는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리수는 사실 무지개 동산에 대해 더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답니다. 리수는 얼렁뚱땅 대답했어요. 부추우리는 무지개 동산으로 가고 있어. 최고로 재미있는 책과 최고로 예쁜 책을 찾기 위해서지. 나는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느낌인지를 무척 궁금해 하거든! 나에게 너희가 읽은 책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 무지개 동산을 더는 알지 못해 리수는 삑의 질문이 곤란했어요. 마침 다른 것을 묻는 부추의 물음이 반가웠죠. 여러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며 부추는 호들갑을 떨었답니다. 리수(학교 밖 청소년) 리치(예술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 진(외국어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 Q. 너희는 누구니? 리치글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 주로 시를 쓰고 있어. 리수나는 학교에 다니고 있진 않고. 앞으로 무얼 할지 골몰하고 있지. 진나는 외국어를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 나에게 가장 즐거운 취미는 읽고 쓰는 일이야. Q. 지금 들고 있는 책은 뭐야? 리치『WHY』 책이야. 동생 책이지. 진『폭풍의 언덕』! 리수강영안의 『타인의 얼굴

  • 2021-12-01
미래는 도시의 이름은 아니지만

미래는 도시의 이름은 아니지만 임수현 배롱나무에 각목을 대어놓았어요 기우뚱한 나무의 운명을 걱정할 때 등에 파스를 붙일 때도 이상한 동작이었는데 떼 낼 때도 간단하지 않네요 괜찮아 물을 때와 괜찮아 대답할 때가 비슷해져요 표정을 담담하게 지으면 덤덤한 사람이 되거든요 나는 등으로 손을 뻗어 닿지 못한 먼 미래의 등뼈를 쓰다듬어요 이렇게 많은 비 이렇게 많은 비둘기 이렇게 많은 과오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뼈들의 말 골밀도가 낮은 구름을 향해 새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요 바닥은 파스가 붙었던 자리처럼 그림자에 기대 조금 더 휘어져요 조금 더 멀어져요 거기서부터 출발할 거예요

  • 임수현
  • 2021-12-01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없습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없습니다 박규현 문을 도둑맞았다 태평한 오후였다 해안가로 밀려오는 동물 여러 마리는 거의 죽어 있었고 그중 하나를 데려와 쓰다듬었다 털이 빠지고 앙상해질 때까지 가족이 될 때까지 체하면 손을 따주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핏방울 그달에도 그달에도 그달에도 떨어졌다 욕실 타일과 타일의 틈으로 피가 번지면 그 위로 물을 끼얹었고 자면서 피 흘리면 안 되었다 꽤 다정하고 정겨운 모양새로 창밖으로 화재가 난 건물이 보여 구경했다 주민들이 옥상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구조는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나 출구가 없다는 이유로 이사할 수는 없었다 보증금도 가구도 문도 없었고 여기가 상자였더라면 오히려 명쾌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공간을 잘 개어서 놔두면 누군가 수거해 가는 것을 기대할 수도 동물은 입을 벌린 채 여기 이 목구멍을 통해 나갈 수 있다며 아내와 어머니가 되어 줘 어머니와 아내가 필요해 인간이었다면 신고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가족이 안 될 때까지 배를 갈랐더니 희고 빛나는 솜만 가득했다 방의 가장자리에서 동물 여러 마리는 아주 죽어 있었고 한가로운 오후의

  • 박규현
  •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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