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은 나를 알지 못하나이다
- 작성일 20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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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비평]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저들은 나를 알지 못하나이다
진기환
1. 박상영이라는 세계
박상영1)이라는 소설가의 등장은 우리 문학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 “술 먹고 물건을 훔치고, 군대에서 계간(鷄姦)을 하고, 성매매를 하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 이야기가 전부”(「우럭 한 점 우주의 맛」, 75쪽)라 말하는 소설가. 이전의 소설들과는 다른 신선한 감각으로 무장한 박상영은 퀴어-게이2) 소설의 선봉장으로서 많은 독자들을 그만의 세계로 이끌었다. “자기 자신을 망치는 자조 유머에 뛰어난 재능”3)은 독자들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했고, 퀴어-게이의 존재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고 평가됐다. 또한 김봉곤과 함께 오토소설의 대표주자로 읽혀 왔으며, 사랑이라는 보편성에 진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승인하든 말든, 자신이 가진 퀴어함에 집중”4)하는 것으로 읽혀 왔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의 그런 솔직함에 열광했다.
박상영의 소설들은 어딘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쓰였다는 것과 그 정체성의 핵심이 퀴어함에 있다는 것,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세계의 모든 것이 그렇듯 유쾌함의 뒷면에는 그것이 억누르고 있는 것이 있다. 박상영에게 그것은 강지희의 지적처럼 “어떤 쾌락의 순간이 스러지고 난 후 찾아오는 외로움”4)과 쓸쓸한 자조, 그러니까 “나를 통해서만 나를 잊을 수 있는 역설”처럼 유쾌함을 통해야만 가릴 수 있는 “추악하고 부끄러운 순간”(「동경 너머 하와이」)들이 아닐까.
한동안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하는 게 싫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게 누구건 무슨 내용이건 이유 없이 패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다 똑같은 사랑이다, 아름다운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 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
-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168~169쪽 -
1) 이 글에서 다룰 박상영의 소설은 다음과 같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2018, 문학동네), 『대도시의 사랑법』(2019, 창비), 「동경 너머 하와이」(《문학동네》2019년 가을호) 『1차원이 되고 싶어』(2021, 문학동네). 본문에서 인용할 시 작품명과 쪽수만을 표기한다.
2) 이 글에서 ‘퀴어’는 모두 ‘퀴어-게이’로 호명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전승민이 날카롭게 지적했듯 “퀴어를 시스젠더 남성 게이로, 페미니즘을 이성애 여성으로 축소 젠더화”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남성 동성애 서사에 대해 ‘퀴어’라는 용어만 사용할 경우 남성서사가 퀴어서사의 대표성을 띄는 형식이 되지만, ‘퀴어-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어느 정도는 그 대표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고. 전승민, 〈레즈비언 구출하기:침묵, 방백, 그리고 대화〉, 《창작과 비평》 2021년 봄호.
3) 최윤정, 〈소설이라는 스탠드 업 코미디〉, 《실천문학》 2019년 봄호, 218쪽.
4) 성현아, 「이차원의 사랑법」, 『2021 신춘문예 당선 평론수필집』, 정은출판, 2021년, 240쪽.
5) 강지희, 「멜랑콜리 퀴어 지리학」, 『대도시의 사랑법』 해설, 창비, 2019년, 311쪽.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 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 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 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달을 따름이었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이 다 흩어져 오직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는다.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미간에 짙은 주름을 짓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의 호흡만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 「늦은 우기의 바캉스」, 308~309쪽 -
박상영의 인물들에게 사랑은 대상에게서 벗어날 때 느끼는 찰나의 감정이다. 이런 감정의 근원에는 동성애 또한 ‘이성애’와 같은 사랑의 층위에 놓일 수 있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가 깃들어 있다. 인용한 두 대목은 그러한 존재론적 회의를 잘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사랑이 사라지고 난 후의 회의는 자기연민을 낳고, 자기연민은 다시금 그것을 가리려 박상영의 인물들을 유쾌한 가면의 지점으로 이끈다. 박상영의 인물들은 다시금 가면을 쓰고 유쾌함을 연기하며 자신의 존재론적 회의를 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멀어지고 “찰나의 상태”에 도달하고 만다. 이 상태는 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별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이 더욱 심화되는 것은 ‘나’와 엄마의 관계,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다. 이 글은 박상영의 다른 소설들을 경유하여 가장 최근 발표된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중심으로 박상영 소설이 궁극적으로 ‘예수’-‘베드로’-‘사도 바울’이라는 위치를 거쳐 궁극적으로 ‘죄의식 해소의 길’로 나아가고자 함을 밝히는 걸 목적 삼는다. 그것을 말할 때 박상영 소설의 퀴어-게이적 주체에 대해 말할 수 있으리라.
2. 퀴어-게이라는 이율배반
박상영의 소설을 살피기에 앞서 퀴어-게이의 존재론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문학계의 호평과 지대한 관심과는 달리 일반적인 한국 사회에서 퀴어-게이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퀴어-게이들은 ‘똥고충’이나 ‘호모’ 같은 지리멸렬한 멸칭으로 불리거나, HIV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존재로 평가되고는 한다. 특히나 보수기독교계는 퀴어를 ‘사회악’으로 보며 신의 섭리에 어긋난 존재라 부르는데, 그들의 시선은 성서 레위기에 기초한다.6)
그런데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퀴어-게이가 신의 섭리에 어긋났다는 그들의 평가는 이율배반적이다. 퀴어-게이가 신의 ‘실패작’이라면 신은 불량품을 생산해 내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는 신의 전능함을 무용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 신은 인간을 ‘정상적’으로 창조했는데, 인간이 성장하면서 퀴어-게이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해 나간 것이라면? 그것은 신의 방관이 아닌가. 무릇 신이라면 자신의 창조물을 ‘정상적’으로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은 하지 않고 인간이 ‘변질’된 것이라 심판만 하는 신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러한 신에게 더 이상의 권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신을 중심으로 생각할 경우 퀴어-게이의 존재는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신을 전능하다고 절실히 믿을수록 퀴어는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역설적인 존재가 된다. 이러한 이율배반 앞에서 전능한 신은 무기력한 존재가 되며, 그에 대한 믿음조차 이율배반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퀴어-게이뿐만 아니라 모든 퀴어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6)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위기 20장 13절).
퀴어-게이를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대로 만약 퀴어-게이가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존재라면 성서에 등장하는 최고의 이율배반적인 존재는 예수가 아닐까.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신이 보낸 구원자로서 신의 아들이다. 인간의 몸을 쓴 신으로서, 세상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예수는 모두가 알다시피 십자가에 못 박혀 삶을 마감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이다.7)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신의 아들로서 세상에 왔다는 것이고, 신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란 사실이다. 그런데 성서에는 그런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기도를 하고,8)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동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9)라고 울부짖는 대목이 나온다. 신의 아들로서 신의 섭리를 짊어지고 온 자가 신에게 자신을 왜 버렸냐고 울부짖는 대목은 이율배반적이다. 그의 죽음이 예정된 것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의 태도는 신에게 반하는 행동이다. 반대로 그의 죽음이 예정된 것이 아니라 신의 아들을 반대했던 자들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진행된 것이었다면, 신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고도 인류를 자신의 뜻대로 바꾸지 못한 전능하지 못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이율배반 앞에서 예수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신의 뜻을 이루는 ‘신이자 인간인 존재’가 되었고, 신의 이율배반을 해결해 주었다. 인류의 죄의식을 끌어안고 죽음으로써 신이 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진 것은 물론, 신의 이율배반으로부터 탈출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퀴어-게이는 신의 이율배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이러한 존재론은 신을 믿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퀴어-게이의 존재론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박상영 소설을 살피는 이 글에서 이러한 존재론에 대해 말한 건 기독교 신자인 엄마와의 갈등과 거기에서 비롯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이 소설의 주된 갈등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먼저 그 꿈을 발로 차버린 것은 나였다. 이차 성징이 시작된 이후 내가 기독교적 가족 형태에 편입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이 하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두 살 연상의 이과생과 키스를 하다 엄마에게 들킨 것이다. 장소는 (진부하게도) 놀이터였다. 가로등 불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리쬐는 그네에서 반삭의 남고생 둘이 입을 맞추고 있었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성 한 명이 있었다. 바로 25년차 기독교인인 우리 엄마. 현장을 너무 정통으로 들켜버려 뭐라 변명할 처지가 못 됐다. 엄마는 드라마 속 인물처럼 놀라 가방을 떨어뜨리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돌려 아파트의 현관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그녀는 나를 문책하거나 혼내는 대신 자신의 빨간 마티즈에 태웠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의 한 정신병원에 나를 입원시켰다. 싫다고 돌아서는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으며 누구보다도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 엄마가 아무리 봐도, 네 가슴속에 분노가 많은 것 같다. 걱정 마라. 엄마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거다. -
-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96~67쪽 -
7) 여기에 대해선 신학적으로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한 논의들을 모두 말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를 벗어나는 것으로서, 다룰 의지도 없거니와 다룰 능력도 되지 않는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토대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또한 모든 기독교 종파가 동성애에 반대하지 않으며 퀴어-신학 같은 진보적 신학도 존재한다. 다만 소위 ‘주류’라고 평가받는 기독교에서 동성애에 반대하므로 이 글에서는 그것을 기준 삼는다.
8)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태복음 26장 39절).
9) 마태복음 27장 26절.
인용한 대목은 퀴어-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막 깨달은 ‘나’가 남고생과 키스를 하다가 걸린 장면이다. 이 대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엄마의 태도인데, 엄마는 ‘나’를 혼내는 대신 조용히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나’의 휴대폰을 초기화시켰으며, 돌아오는 길에 성경구절을 건네주었을 따름이다.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은 정말이지 인정하기 어려운 존재일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철저히 믿는 신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존재이기에, 신을 믿으면 믿을수록 아들은 교화시키거나 배척해야만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들의 정체성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곧 신의 방관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신의 뜻 아래 이뤄진다면 아들의 퀴어-게이로서의 정체성 또한 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생활함으로써 이율배반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피한다. 때문에 ‘나’가 아니라 엄마야말로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의견 또한 무시해 버린다. 엄마에게 치료란 자신이 믿는 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여 엄마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정체성을 소거시킨 상태로 대함으로써 ‘나’에게 지속적인 수치를 안겨 준다. 그런 측면에서 박상영의 인물들에게 게이 주체성의 가장 고유한 정조인 수치심10)을 안겨 준 건 세상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엄마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 “게이 아들 ‘나’의 커밍아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의 관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의 내면”11)을 그려냈다는 김건형의 지적은 합당해 보인다. 이건 엄마를 기준으로 살필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나’를 기준으로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둘은 어느 한쪽도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는다. 마치 신과 예수 사이의 이율배반처럼 서로의 위치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입장만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박상영의 인물들은 엄마의 시선에서 빚어진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인 채 나아간다. 마치 예수가 자신에게 선고된 죽음을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엄마와의 관계에서만 그러할 뿐, 세상의 ‘보편적 시선’에 대해서는 그것을 유보한다.
3. 배신과 순교자의 길
이성애가 지배하는 ‘보편’의 세계에 퀴어-게이들의 자리는 없다. ‘보편’의 세계 법칙으로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배척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커밍아웃은 ‘보편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일종의 상징적 죽음이다. 박상영의 인물들은 이러한 상징적 죽음 앞에서 구태의연하다. 구태여 이성애라는 ‘보편’에 포섭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퀴어-게이로서의 특수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에 포섭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퀴어-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면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그저 ‘나’라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그러한 입장은 어떠한 것도 정면으로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측면에서 박상영의 소설에 대해 이름을 사용한 트릭으로 자기 자신만을 보호할 뿐 여전히 방에 갇혀 있을 뿐12)이라는 이경의 지적은 날카롭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 본문에서 인용할 시 「자이툰 파스타」로 인용)는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이툰 파병 시기 왕샤와의 사랑과 그 이후의 젊은 시절을 그려낸 이 소설의 주된 갈등은 ‘나’와 왕샤의 정체성 투쟁에 있다. ‘나’는 자신의 퀴어-게이적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왕샤에게 표출하고자 하지만, 혹시나 자신의 사랑이 거절당했을 때를 대비해 조심스러워한다. 왕샤는 반대다. 왕샤는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이 퀴어-게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군대에 오기 전에 여자친구까지 있던 그의 입장에서 ‘나’와의 키스는 그저 한순간의 실수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샤의 입장일 뿐이고 ‘나’의 입장에서 왕샤의 그런 행동은 왕샤에 대한 ‘나’의 사랑을 더욱 커지게 하는 것으로서, ‘나’의 자기혐오를 부추기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10) 김경태, 〈수치심과 퀴어의 사랑/윤리〉,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257쪽.
11) 김건형, 〈지금, 교차하는 퀴어 서사들이 여는 시간〉,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12) 이경, 〈밀레니‘을’들이 사는 법〉, 《오늘의문예비평》 2020년 봄호, 52쪽.
어디론가 도망쳐야만 했다. 자이툰 부대 밖으로. 이라크 밖으로.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아도 될 만큼 먼 곳으로. 끊임없이 그를 생각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한참을 뛰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넘어진 채 한동안 모래 바닥에 계속 누워 있었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로지 나를 위해 흘리는, 혐오스러운 눈물이었다.
- 「자이툰 파스타」, 167쪽 -
그런데 아무리 도망쳐도 왕샤에 대한 감정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랑이란, 자기모멸을 가속화시키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의 사랑을 대상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나’가 사랑해 마지않는 왕샤는 처음에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며 자신의 감정을, ‘나’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일을 거부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종국에 이르러 왕샤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퀴어-게이로서의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나’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할 만한데, 이러한 구도가 깨지는 건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며 그것이 보다 심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1차원이 되고 싶어』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한 인권단체에서 주최하는 아카데미 인문학 교양강좌에서 만난 형과 ‘나’의 사랑 이야기다. ‘나’는 형과 깊은 사랑에 빠지고 아름다운 연애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나’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엄마와의 갈등이 그것이고, 두 번째 문제는 운동권에서 활동하는 형의 사상적 경향으로 인한 ‘나’와의 거리두기가 그것이다. ‘나’는 첫 번째 문제에 대해 엄마에게 형을 소개시켜 주는 것으로 과감히 돌파하려 한다. 그 정도로 ‘나’는 형을 사랑했고, 형과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다. 그런 면에서 ‘나’는 형과의 관계를 통해 엄마에게 받은 상처를 회복하고, 엄마와의 미래까지도 꿈 꾼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런 계획은 ‘나’의 의지와 엄마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두 번째 문제에 의해 깨지고 만다. 형은 ‘나’가 사준 티셔츠에 성조기가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입지 않고, ‘나’가 추천하는 많은 가수들을 미 제국주의의 것이라며 거부한다. ‘나’는 그런 형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형을 사랑했고, 형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한다. 이런 ‘나’와 형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은 산책 중에 형의 선배들을 만나고부터다. 형의 선배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생각을 ‘나’에게 물어보는데 ‘나’는 형과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긴 느낌이 들어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때 그들은 ‘나’와 형에게 이 좋은 날씨에 남자 둘이 뭐 하고 있는 거냐며 장난스럽게 묻는다. 형의 남자 선배는 “둘이 사귀는가 보지”라고 툭 던지듯 말하고, 여자 선배는 그거 미제의 악습 아니냐고 받아친다. 깔깔대며 웃는 그 둘을 보며 ‘나’는 매우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 선배들을 보내고 난 후 ‘나’와 형은 형의 집으로 도피하는데, 거기서 ‘나’는 형이 강성 NL계열로 유명한 학교의 문과대 학생회장이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물론 ‘나’는 그것이 지금의 형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반문하며 형의 몸을 탐할 뿐이다. 형과 몇 번의 갈등을 겪은 후 ‘나’는 형을 엄마에게 보여주겠다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형은 알겠다고 답하지만 애석하게도 일요일날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사상적 성향과 ‘보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나’와의 관계가 사랑이 아니었다며 둘의 관계를 부정한다. 형에게 버림받은 ‘나’는 진정한 사랑이 뭔가 골몰하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한다. 이러한 관계는 『1차원이 되고 싶어』의 ‘나’와 도윤도와의 구도에서도 반복된다. 차이가 있다면 도윤도는 사상적 경향과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보편적 질서’로 편입되기 위해 ‘나’와의 사랑을 저버린다는 데 있다.
“연락이 안 돼서 걱정을 많이 했어”
그렇게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또다시 나를 쥐고 흔들려고. 밧줄 위에 올라선 것처럼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나를 흔들어 놓으려고. 더 이상은 안 돼.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릴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공격적인 어조로 윤도에게 쏘아붙였다.
“걱정은 무슨 얼어죽을 걱정이야. 네 잘난 일진 친구들이랑 여자…… 친구나 신경 써.”
순간 윤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너 진짜…… 돌았냐?”
“응. 돌았지. 너 존나 좋아해서 돌아버렸는데, 몰랐어?”
내 안에 불을 질러 놓은 것처럼 몸 전체가 뜨겁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윤도를 만난 날부터 지금껏 내내 하고 싶었던 얘기였는데, 너무나도 간절했던 그 고백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 진짜 게이냐?”
“응. 몰랐어? 게이니까 너랑 키스하고 섹스했지. 그러는 너라고 나랑 다른 거 같아?”
“씨발! 좆같은 소리 좀 그만 해라. 애초에 너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냐.”
“그럼 우리가 같이 했던 건 뭔데? 수영장은, 머큐리랜드는, 스쿠터는 다 뭔데? 우리 추억은, 기억은 다 어떻게 된 건데?”
“네가 워낙 찐따 같은 새끼라 불쌍해서 놀아 준 거지.”
독한 말을 쏟아낸 윤도의 눈에 천천히 물기가 어렸다, 나는 윤도를 안았다. 그리고 귀에 속삭였다.
“왜? 다른 애들이 우리 사이 알게 될까 봐 무서워? 그래서 여기로 불러낸 거지?”
윤도는 질겁하며 나를 밀쳤다.
“씨, 씨발 넌 그냥 내 좆집이었어. 어? 개만도 못한 게이 새끼가 남자 좋아하는 걸 뭐, 뭐라고 하겠냐만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혼자서 쫓아다닌 걸 갖고 어? 지랄 염병이 나서는 내가, 내가 뭘 어떻게…….”
흥분해 말까지 더듬는 윤도 앞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모든 계절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화선지에 먹이 번지듯 검게 덮여 가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귀에 속삭였던 대화들이 순식간에 혼잣말이 되어버렸다. 너와 하나가 되었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다 없던 일이 되었다.
- 『1차원이 되고 싶어』, 373~374쪽 -
이처럼 박상영의 인물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다. 이는 마치 자신이 제일 사랑해 마지않던 제자인 베드로에게 부인 당했던 예수를 연상시킨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 예언했고, 베드로는 그것을 부인했으나 결국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만다. ‘나’와 사랑을 나눴던 형과 도윤도 또한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험해지는 순간에 ‘나’를 부인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내는데, ‘나’는 예수가 그러했듯 그것을 바로잡을 힘이 없다. 다만 그것 묵묵히 받아들임으로써 ‘순교자’의 길을 갈 뿐이다.
4. 외면을 통한 죄의식의 형성
그런데 박상영의 인물들이 언제나 순교자인 것은 아니다. 박상영의 인물들이 엄마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외면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또한 그들의 엄마처럼 누군가를 외면하고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퀴어-게이적 정체성을 숨기고 ‘보편적 질서’에 들어가고자 한다. 그들은 그들의 엄마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보편’의 세계에 진입하고자 한다. ‘보편’의 세계에서 ‘정상’이라 여겨지는 주체성을 확립하려 하고, 그것이 용이하지 않을 경우 자신에 대한 애정을 무시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1차원이 되고 싶어』의 태리와의 관계가 그렇다.
『1차원이 되고 싶어』는 박상영 소설의 여러 특징이 집약된 소설이다. 엄마와의 관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배신하는 구도, 자기 고백적 언술. 박상영 소설의 주된 특징들이 모두 나타나는데, 여기에 더해 늘 배신만 당하던 ‘나’가 누군가를 배신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나’가 배신하는 인물은 오랫동안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태리다. 태리는 유년 시절부터 ‘나’를 따라다녔는데, ‘나’는 그런 태리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그러한 태도는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이르면서 더욱 심화되는데, 그전까지는 은연중에 태리와 거리를 두려 했다면 태리가 “호모 새끼 게이 새끼” 같다는 이유로 왕따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태리를 무시한다.
앞으로 태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앞으로 내 삶에서 태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조각칼로 태리라는 존재를 파내버리고 싶었다. 멀어져야 한다고, 절대로 엮여선 안 된다고, 누구에게도 태리와의 관계를 들켜선 안 된다고. 나를 위해서. 오직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태리가 나의 엄청난 치부, 나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갈 덫처럼 느껴졌다.
- 『1차원이 되고 싶어』, 206쪽 -
‘나’는 태리가 왕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모른 척했으며, 태리가 이상한 것 같다는 태란 누나의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철저히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가 태리에게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는데, 그것은 태리가 ‘나’의 치부인 도윤도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나’와 비밀번호를 공유했던 태리는 도윤도와 ‘나’의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모두 보았고 그것을 빌미삼아 ‘나’에게 외국으로 도피하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격렬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나’는 ‘보편적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고, 태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그러한 태리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태리의 입을 막아버리기 위해 태리를 호수에 밀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정이 내 안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기쁨과 슬픔과 증오와 행복과 고통과 쾌락을 초월한, 뼛속 깊이 차오르는 어떤 강렬한 충동. 어쩌면 한없이 짐승을 닮아 있는, 근원적이고도 강력한 살의.
“형은 갈수록 더 이상해지고 있어. 병들어 가고 있다고. 여기선 더 안 좋아지기만 할 거야. 우리 가자. 같이 떠나서 행복해지자.”
어떻게 해서든 태리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없는 것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의 존재를 내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야만 했다. 나는 양팔을 뻗어 태리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었다. 작고 가벼운 태리의 몸이 훌쩍 뒤로 밀려났다. 난간에 걸려 넘어간 태리의 몸이 굴러 떨어졌다. 뭔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 『1차원이 되고 싶어』, 322~323쪽 -
‘나’는 자신의 퀴어-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른 측면으로 말하자면 도윤도와의 퀴어-게이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태리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실질적으로 해를 가한다. 퀴어-게이는 죄가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소거하기 위해 혹은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누군가를 해한다면 그것은 죄의식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는 태리로 인한 무거운 죄의식을 갖게 된다. 이때 ‘나’의 위치는 ‘나’를 배신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다. ‘나’에게 해외로 같이 떠나자는 구체적인 ‘구원’의 길을 제시한 태리를 강하게 거부하고 밀어냈다는 점에서 ‘나’는 평생 그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죄의식이 박상영의 인물들로 하여금 자기 죄를 고백하고 싶다는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이 고백의 형식을 빌린 오토픽션의 세계로 이끈다.
5. 고백을 통한 죄의식 해소
오토픽션을 통한 고백의 서사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게이식 대답”13)이다. 퀴어-게이 소설의 대표주자인 박상영의 소설 또한 오토픽션으로 읽힐 여지가 많은데, 작가가 됐다는 대목과 자신의 다른 소설 내용을 언급하는 대목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토픽션 자체보다는, 왜 그러한 작법을 택했는가에 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화함으로써 작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위에서 나는 ‘나’의 죄의식에 대해 짚었다. 이 죄의식은 누군가를 외면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서, ‘나’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면서 죄의식의 정체와 그것이 해소되는 지점에 대해 만들어 놓는다. ‘과거로부터 온 편지’라는 제목의 장들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서 ‘나’만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나’만이 알고 있던 것들이 아니라 친구인 희영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실은 자신의 삶이 “그 시절로부터 멀어지지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설은 그와 동시에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쓰인 회상 형태로 진행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나’의 회고록이자 동시에 ‘나’의 오토픽션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자신의 죄의식의 기원을 찾고 그것을 더듬어 가는 소설, “자신에 대한 소설을 씀으로써 좀 더 나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상을 제시하는) 자기 형성의 방법론”14)적인 소설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자신의 퀴어-게이적 정체성을 유보하고 ‘보편의 질서’에 포섭되고자 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나’는 자신에게 온 편지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결국 수성못에 밀어버렸던, 그래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태리에게 전화를 걸고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이는 한 시절의 죄의식과 맞서겠다는 것이며, 죄의식과 맞섬으로써 진정한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겠다는 결심이다.
그 후로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내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려왔다. 혹자들이 왜 그런 직업을 가지게 됐냐고 왜 그토록 열심히 일을 하는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자신의 유약한 이야기를 고백하면서까지 책을 썼냐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두고 온 것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실은 그저 못난 자기변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1차원이 되고 싶어』, 401쪽 -
13) 강유진, 〈남성 퀴어의 성 정체성과 소설적 재현〉, 《문학과융합》 통권 73집, 492쪽.
14) 김건형, 〈한국 퀴어 소설에 나타난 자기 반영적 서술 전략〉, 《요즘비평들》, 자음과모음, 2021년, 61쪽.
위의 인용문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고 온 것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를 상징적으로 죽이고, 더 나아가 실제로도 죽였다는 죄의식. 그것을 감당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이전의 ‘나’ 베드로의 위치에서 누군가를 배반했다면,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의 위치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와 같다. 누구보다 예수를 배척했던 사도 바울은 예수의 메시아성을 체험하고 나서, 그 누구보다 그에 대해 증언하며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그에게 다가섰다. 바울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주체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박상영의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박상영의 ‘나’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세상 앞에 당당히 나가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를 퀴어-게이적 주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 퀴어 문학이 도달한 퀴어 미학의 한 대목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이 가진 위험성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을 향해 나아가는 것. 박상영은 오토픽션을 통해 그러한 퀴어 미학의 한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기구원에 도달하고 있다.
물론 “‘퀴어’ 속 주체들은 단일하지 않다”.15) 지금까지 서술한 퀴어-게이적 특징들은 박상영 소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김병운, 박선우, 김봉곤 등의 퀴어-게이 작가들은 박상영과는 또 다른 차별점을 보여준다. 그 차이들을 세심히 살피고, 서술하는 것이 퀴어-게이 문학의 논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이 글에서는 예수 같은 이율배반을 경유해 베드로처럼 배신하고,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박상영의 서사만을 살폈다. 그 과정에서 박상영의 여성 인물들에 대한 논의들이 빠진 것은 이 글의 한계라 할 수 있다.16) 그것에 대해선 다음을 기약하며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이것은 M과 내가 보낸 시간, 우리 기억의 맛. 단지에 있던 세라믹 조각들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었다. 그것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갔던 것들이 자꾸만 역류해 올라왔다. 눈물과 콧물, 침이 한데 뒤섞여 흘렀지만, 상관없었다. 흘러나온 세라믹 조각들을 다시 입에 집어넣었다. 기어이 모든 것들을 다 먹었다.
이제 나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우리의 시간으로부터.
- 「세라믹」, 322~323쪽 -
15) 김대현, 〈게이와 페미니즘〉, 《문학과학》 104호, 136쪽.
16) 박상영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과 ‘나’의 관계에 대해선 기회가 생긴다면 꼭 기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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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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