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과 화엄사상
- 작성일 20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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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2022년 문학비평활동지원사업 선정작]
『님의 침묵』과 화엄사상*
-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해설
김광원
차례
* 재판(再版) 머리말
* 머리말
1. 미리 알기
1) ‘님’의 상징성과 그 상징의 근원
2)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의 상관성
2. 『님의 침묵』의 분석
1) 심인(心印)
(1) 군말
(2) 님의 침묵
(3) 이별은 美의 창조
(4) 알 수 없어요
(5) 나는 잊고저
(6) 가지 마서요
(7) 고적한 밤
(8) 나의 길
(9) 꿈 깨고서
- 이하 생략
재판(再版) 머리말
만해 선사는 “선(禪)은 진여(眞如) 불성(佛性) 즉 무한 절대의 자아를 실현하는 유일무이의 도(道)가 되는 것이다.”1)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은 내 안의 ‘법신불’인 ‘자성불’[참나]을 만나고자 하는 일이지요. 선사께서는 50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았고, 1925년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여 불성의 세계를 구현하는 대승보살의 마음으로 ‘님’을 노래하였지요. 선사의 이러한 노력은 조국을 빼앗긴 아픔을 문학으로 형상화하고 승화시킴으로써 중생들에게 새 희망의 불씨를 보여주고자 한 육바라밀2) 의 실천행이었습니다.
호운 박항식 시인은 만해 시의 정신세계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만해를 정신차원이 높은 세계 10대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보면서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서요」를 들었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를 담고 있는 『님의 침묵』의 시들은 모두 상대성을 초월한 동시성, 동일성의 순수직관이 담겨 있다고 하였지요. “한용운의 시는 그 어느 것이거나 ‘만유(萬有)와 자아의 일체화’의 이치가 들어 있지 않은 데가 없다.”3) 라는 말은 만해의 『님의 침묵』과 관련하여 일찍이 없었던 탁월한 표현이었지요.
영운조사(靈雲祖師)는 도화(桃花)를 보고 견성하였느니 그것은 누구라도 아는 일이지만, 영운이 도화를 보고 견성할 때에 그 도화가 영운을 보고 견성한 줄은 천고에 아는 사람이 없느니 그것은 일대 한사(一大恨事)다.4)
불교의 교지는 평등입니다. 석가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나 물(物)은 다 각기 불성을 가졌는데, 그것은 평등입니다. 오직 미오(迷悟)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소위 미오의 차라 하는 것도 미(迷)의 편으로서 오(悟)의 편을 볼 때에 차이가 있으려니 하는 가상뿐이요, 실제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으면 마찬가지입니다.5)
* 이 글은 졸저 『님의 침묵과 선의 세계』(2008년)의 오류를 바로잡고 좀 더 정밀하게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필자의 뜻이 수용되어 2022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비평활동지원사업’에 선정된 결과물입니다. 전체를 수록할 수 없어 일부만을 발표하며, 책명도 『님의 침묵과 화엄사상』으로 바꾸었음을 밝힙니다.
1) 「선과 자아」, 『불교』 108호, 1933, 『한용운전집·2』 1973(2006 재판), 323쪽 수록
2) 바라밀: 자성불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도(菩薩道)의 원만구족한 여섯 가지 수행덕목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함.
3) 박항식, 『시의 정신차원』, 원광대학교출판국, 1985, 47쪽.
4) 「선과 인생」, 『불교』 92호, 1932, 위의 책, 317쪽 수록
5) 『개벽』 45호, 1924, 위의 책, 288쪽 수록
만해 선사는 위 인용문에서 사람과 물(物)은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영운조사의 견성(見性)을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영운조사가 도화를 바라보는 일이나, 도화가 영운조사 앞에 피어 있는 일이나 사실 조금의 착오도 없이 똑같은 법신불의 작용으로 평등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무명(無明) 탓으로 가상적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일 뿐, 사실 만유는 한 덩어리의 법신불로 평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해인삼매(海印三昧)가 바로 그것이지요. 파도가 일렁이는 밤바다 위로 달빛이 비칠 때 그 밤바다에서 파도를 따로 떼어내지 않듯이, 세계는 오로지 한 덩어리의 바다일 뿐이지요. 바다 위의 거품도 결국 법신불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기에 바다 전체는 평등하게 돌아가는 한 덩어리 우주적 현상이 되는 것이지요.
절대계의 각성한 눈으로 바라보면 ‘해인삼매’의 ‘평등’으로 세계가 들어오게 되지만, 우주에 가득한 그 ‘한마음[一心]’을 만나기 이전 현상계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는 천차만별의 차이로 가득하고, 일체고(一切苦)를 안고 살아가는 중생의 다양한 모습이 부각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만해선사가 시집 『님의 침묵』을 창작하기 일 년 전인 1924년, 위의 둘째 인용문에 이어 쓴 마무리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컨대 불교는 그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적(自信的)이요, 사상에 있어서는 평등이요, 학설로 볼 때에는 물심을 포함, 아니 초절(超絶)한 유심론이요, 사업으로는 박애ㆍ호제인바6), 이것은 확실히 현대와 미래의 시대를 아울러서 마땅할 최후의 무엇이 되기에 족하리라 합니다. 나는 이것을 꼭 믿습니다.
‘일체고’에 놓여 있는 현상계의 ‘불평등’을 ‘평등’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만해선사는 현대와 미래의 시대를 아울러서 ‘박애ㆍ호제’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제에 의해 조국을 잃고 비탄에 빠져 있는 중생을 향하여 ‘박애ㆍ호제’의 사상을 주장하였던 것이니, 이게 곧 대승보살의 정신이요 예토(穢土)를 정토(淨土)로 되돌리고자 한 그의 시대적 선언이었던 것이지요.
만해선사는 1925년 백담사의 ‘오세암’에서 매월당 김시습의 『십현담요해』를 우연히 만나 크게 느낀 바 있어 당신께서도 『십현담주해』를 탈고하였고, 이를 계기로 곧바로 여름철 내내 ‘벼락’을 품은 듯 열렬하게 『님의 침묵』을 창작하였습니다. 당시는 일제에 의해 통제를 받는 ‘관리문학(管理文學)’7) 의 시기였기에 그의 ‘박애ㆍ호제’ 사상은 오히려 장엄한 사랑의 시로 형상화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남녀 애정시를 계승한 그의 『님의 침묵』은 선(禪)의 셰계를 기초로 하여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의 세계로 승화되어 피어올랐고, 대승보살의 정신을 문학으로 구현한 만해선사의 자취는 화엄정신의 절정에서 ‘화엄삼매’의 꽃밭을 일구어낸 영원한 모델이 된 것이지요.
대표적 대승경전인 『반야심경』의 중심 주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색’[현상계]은 인연 작용으로 끝없이 변화할 뿐 실체가 없고 그 뿌리는 항상 ‘공’을 바탕으로 하기에 ‘색즉시공’이라는 것이며, ‘공’[절대계]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6바라밀이라는 본유종자(本有種子)를 품고 있고 그 본유종자가 발현하여 ‘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공즉시색’이라 하지요.
공성(空性)은 6바라밀이라는 근본원리를 품고 있고 이 공(空)의 원리와 작용으로 현상계가 창조되지만, 현상계는 생장수장(生長收藏)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운행 속에서 균형이 깨어지고 무명(無明)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지요. 바로 이 무명의 현상계 속에서 대승의 정신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현상계도 법신불[참나]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대승불교는 현상계를 거부하지 않으며, 절대계의 입장에서 무명의 현상계를 6바라밀로 품고 끝없이 정화해 나가려 하는 것이지요.
만해선사가 이 땅에 평등세계를 회복시키고 구현하기 위하여 대승보살의 길을 걸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지요. 『유마경』을 번역할 만큼 만해선사는 『유마경』을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으로 여겼던바, 그는 대승보살 ‘유마’를 영원한 모델로 삼고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6) 호제(互濟): 힘을 합하여 서로 도움
7) 이청원, 한국민족문학사론, 원광대학교출판국, 1982. 참조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광대한 자비심을 항상 지니고, 일체를 깊이 아는 지혜를 구하여 한 순간도 잊지 않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일에 권태를 느끼지 않고 … 중생의 병을 알고 있으므로 영원불변한 것에 안주하지 않으며, 중생의 병을 없애기 위해서 인연으로 생긴 것을 버리지 않는다.”8)
‘평등’이라는 본래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하여 현상계의 ‘거친 돌밭’을 ‘화엄의 꽃밭’으로 일구어가는 보살정신이 위대한 것은 상(相)이 없는 ‘한마음’으로 이루어가는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정신으로 뭉쳐진 것이 바로 『님의 침묵』이지요. 만해의 『님의 침묵』은 당대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을 본래의 정상적인 상황으로 되돌리고자 한 그의 대승정신이 솟구쳐 나온 결과물이지요. 또한 필자가 『님의 침묵』의 ‘님’을 “본래성 회복의 한 표상”이라고 표현한 것 역시 『님의 침묵』의 작품 전체에 녹아 있는 ‘선의 세계’와 ‘화엄사상’을 반영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군말」과 「독자에게」를 포함한 『님의 침묵』 90편의 시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한마디의 말로 함축할 수 있는9) 것도 영원불멸한 것에도 안주하지 않고 ‘인연’으로 생긴 것도 버리지 않는 ‘화엄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인으로서의 만해를 대변하고 있는 『님의 침묵』의 주인공 ‘시적 화자’는 ‘거친 돌밭’도 본래 ‘법신물’의 한 작용이요 ‘화엄의 꽃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거친 돌밭’을 ‘사랑의 눈물’로 품어 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필자가 졸저 『님의 침묵과 선의 세계』(새문사, 2008년)를 다시 정리하게 된 것은 만해선사의 시집 『님의 침묵』을 해설함에 기존의 ‘선의 세계’라는 관점에 더하여 ‘화엄사상’이라는 관점을 좀 더 강조해야겠다는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발간한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필자의 인식에 새로운 변화가 일게 되었고, 만해시집 『님의 침묵』에 담긴 화엄사상과 대승정신이 필자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던 것이지요. 사실 알고 보면, 깨달음을 얻고 속세로 돌아와 실천하는 ‘선의 세계’의 출출세간적10) 특성과 화엄의 대승사상은 둘이 아닌 같은 세계라 할 수 있지요.
마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모하는 ‘비평활동지원사업’을 만나 신청하게 되었고, 고맙게도 필자의 뜻이 받아들여져 『님의 침묵과 선의 세계』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님의 침묵과 화엄사상』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등세상’을 이루고자 한 만해선사의 수많은 활동과 저술 작업은 사실 우리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요, 인류의 영원한 평등평화를 이루고자 한 대승보살의 큰 열망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중 시집 『님의 침묵』은 한민족의 위기 속에서 길어 올린 영원한 ‘화엄의 꽃’으로 인류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님의 침묵』의 위대함을 밝히고 전달하는 일에 졸저 『님의 침묵과 화엄사상』이 조그만 돌다리 구실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저에게 만해시 연구를 제안하여 길을 열어주신 김진국 은사님과 『화엄경』을 비롯하여 많은 경전과 고전을 쉽게 풀어주시는 ‘홍익학당’ 윤홍식 대표님, 그 외 이 책의 집필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8) 「보살의 수행」, 『유마경』(현대불교신서·16), 박경훈 역, 동국대 불전간행위원회,
9) 졸고,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번뇌즉보리」, 『한국언어문학』63집, 2007.
10) ①세간(世間): 속세, ②출세간(出世間): 도를 구하기 위해 속세를 떠나는 단계, ③출출세간(出出世間): 깨달음을 얻은 후 중생구제를 위해 속세로 돌아오는 단계.
머리말 - 『님의 침묵과 선의 세계』
필자가 연전(年前)에 만해시(萬海詩) 연구서 『만해의 시와 십현담주해』를 발간했을 때 한양대 이도흠 교수께서 축하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참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를 상호 관련시켜 해석하시니, 『님의 침묵』이 화엄(華嚴)의 깊이를 갖게 되고, 『십현담주해』가 시(詩)의 비단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짧은 표현은 『만해의 시와 십현담주해』를 두고 한 말이지만, 사실 이 말의 뜻은 오히려 바로 이 책 『님의 침묵과 선의 세계』에 맞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만해의 한시[禪詩], 시조, 자유시를 연구 대상으로 한 『만해의 시와 십현담주해』의 내용 중 『님의 침묵』에 해당하는 부분만 뽑아내어 시집 『님의 침묵』 전편 해설서로 거듭난 책이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은 우리 온 국민의 가슴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시집이 되었고, 나아가 인류의 문학 자산으로 길이 남을 시편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시집이 지니고 있는 치열한 시대성, 차원 높은 사상성, 뜨겁고 섬세한 문학성이 삼위일체 승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해 선사는 1925년 6월 『십현담주해』를 탈고하였으며, 같은 해 8월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였다. 만해의 두 저작(著作) 사이의 상관성은 학자들에 의해 이전부터 논의되어 왔으나, 90조각으로 나눠지는 이 책들이 일대일의 순차적 관련성을 지니고 저술되었다는 사실은 필자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고, 이미 여러 논문으로 발표된 바 있다.
현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몇몇 작품이 실리고 애호되고 있으나, 만해의 시는 다소 어렵게 여겨지고 있다.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 사이의 구체적인 상관성이 밝혀져서 많은 독자들이 『님의 침묵』의 참맛을 더욱 쉽고 명쾌하게 알게 되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를 알리게 되었으니, 1989년부터 시작된 필자의 만해 연구가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
독자들이 선(禪)을 종교[불교]의 차원에서 알기보다는, 우리 앞에 놓인 삼라만상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히 볼 수 있게 하는 진리 또는 과학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가깝게 하게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님의 침묵』을 감상하면서, 우리들 앞에 놓인 삶의 아픔이 곧 깨달음의 에너지로 승화되는 이치를 더욱 새기게 되고, 그리하여 모든 생령(生靈)들이 아침 이슬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행복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이끌어 주신 많은 은사님과 선학(先學) 제위께 감사의 마음을 올리며, 흔쾌히 발간의 기회를 열어준 ‘새문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1. 미리 알기
1) ‘님’의 상징성과 그 상징의 근원
『님의 침묵』의 해석을 위해서는, 시적 화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인 ‘님’의 상징성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보통 『님의 침묵』의 ‘님’을 민족적 차원에서 ‘조국’ ‘민족’ 등으로, 불교적 차원에서 ‘부처’ ‘진리’ ‘진아(眞我)’ ‘참나’ 등으로 이해되고 있는바, 문학에서의 상징성이란 단정적으로 어느 한 가지만을 의미한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님의 침묵』 창작의 배경을 생각할 때, 문학적 결과물인 『님의 침묵』은 근원적으로 시대성과 사상성을 분리하여 설명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님의 침묵』은 시대성, 사상성, 문학성이 단단하게 결집하여 이루어낸 삼위일체의 복합적 상징체계인 것이다. 민족적 차원(시대성)과 불교적 차원(사상성), 남녀의 애정(문학성) 등 이 모두를 포괄하여 필자는 『님의 침묵』의 ‘님’을 ‘본래성 회복에의 한 표상’이라는 상징적 개념으로 정리하였다.11)
물론 문학으로서 『님의 침묵』의 일차적 감상은 사랑하는 남녀 관계의 입장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님의 침묵』의 감상에서,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과 무명(無明) 중생이 본래의 불성을 회복해가는 선(禪)의 원리를 간과해서는 그 본질적 해석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어쨌든 『님의 침묵』의 ‘님’은 본래성 회복을 염원하는 만해 한용운의 열망을 그대로 담고 있는 중요한 상징적 언어임에 틀림없다.
불교적 개념으로 선(禪) 수행은 내 안의 법신불(法身佛)인 ‘자성불(또는 참나)’을 찾고[見性], 이를 내면화하며[養成], 실천해가는[率性] 과정이다. 즉,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편견과 아집, 선입견을 내려놓는 작업이다. 긴 수행을 통해 내려놓는 일에 익숙해지고, 시공을 초월하여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자리 즉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세계에 이르고 보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곳[眞空]에서 영롱하게 깨어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게[妙有] 된다. 이때가 바로 법신불 ‘참나’와의 접속이 이루어진 상태가 되며, 주체와 객체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세계’를 직관하게 된다.
이 ‘참나’는 무명의 중생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항상 깨어 있어 불변의 법칙으로 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각성(覺性)을 향한 발심과 수행이 없으면 내 안의 ‘참나’는 자기와 무관한 듯 따로 작용하게 되고, 현상계의 ‘자아(自我)’는 단지 연기(緣起) 작용에 의해 흘러가게 된다. 그러는 중에 뜻한 바 있어 발심을 내고 수행을 하게 되면 직관을 통해 ‘자성불’을 만나게 되고, 나아가 절대계[空]와 현상계[色]는 둘이 아닌 세계임을 알게 된다. 즉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현상계는 끊임없는 연기(緣起) 작용으로 변화할 뿐 본래가 텅 빈 것이요, 그 텅 빈 공성(空性) 안에는 신령한 본유종자(本有種子)12) 가 내재되어 있는바, 우주는 본유종자의 발현에 의하여 운행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때 본유종자의 발현은 물론 자성불의 또 다른 이름인 ‘한마음[一心]’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선각자들은 누누이 말씀해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바로 그러한 뜻이라 하겠다. 그러한바 생멸하는 현상계가 아무리 억겁을 돌고 돌아도, 현상계의 뿌리인 법신불[空性, 참나, 우주의 진리]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하여 변함이 없다.
늘지도 줄지도 않는 절대계의 공성(空性)은 바로 그런 점에서 ‘선(禪) 수행’의 뿌리가 되며, 이는 『님의 침묵』에서 시적 화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인 ‘님’을 ‘본래성 회복에의 한 표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근원적 의미를 제공하게 된다. 그런즉 현상계의 관점에서 볼 때 무명의 중생, 빼앗긴 조국, 이별 상태의 ‘님’은 비록 ‘아픔’으로 가득 차 있게 되나, 이 또한 ‘법신불[참나]’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알기에 대승보살은 불이(不二)의 평등심과 보리심으로 현상계의 비정상성을 정상성의 상태로 회복시키려는 일심(一心)을 품게 된다.
『님의 침묵』의 모든 시들은 ‘이별의 아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바, 시집 전편의 주제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한마디 말로 함축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현상계와 절대계를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보는 대승의 사상에서 찾아진다 하겠다. 즉, 비정상의 상태를 정상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한 만해의 자유정신의 뿌리가 바로 ‘선의 세계’라 할 수 있겠고, 시집 『님의 침묵』의 저술을 통해 무명중생 ‘어린 양’을 각성하게 하고 불평등한 세계를 평등정토의 꽃밭으로 만들고자 했던 만해의 기본사상이 바로 ‘화엄사상’이었던 것이다.
11) 졸고, 『만해 한용운 시 연구』(박사학위논문), 원광대대학원, 1995, 119-123쪽.
12) 불교에서는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원불교에서는 천지팔도(天地八道, 해탈, 정성, 순리, 공정, 광명, 무념, 무량, 수용), 유교에서는 인의예지신, 음양오행 등과 같은 본유종자가 법신불(또는 자성불, 참나, 양심) 안에 갖추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용어는 각기 다르나 결국 우주는 같은 진리, 같은 원리로 운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의 상관성
「십현담(十玄談)」은 당나라의 상찰 선사(常察禪師)가 지은 10수(首)의 게송(偈頌)이다. 이 「십현담」을 일찍이 당나라 말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開祖)인 청량 문익(淸凉文益 885~958)이 주석을 시도한 바 있고, 우리나라의 김시습(雪岑 金時習 1435~1493)이 성종 6년(1475)에 강원도 양양 오세암에서 수도할 때, 「십현담」 원문과 청량 문익의 주(註)에 다시 주를 보태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저술했다.
만해는 1925년 오세암에서 지내면서 우연히 이 『십현담요해』를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만해 역시 「십현담」을 주해하여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그 해 6월 오세암에서 탈고하게 되고, 같은 해 8월 만해는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완성하게 된다. 같은 지역(강원도 양양의 설악산)에서 같은 무렵에 집필한 사실만 가지고도 『님의 침묵』에 끼친 『십현담주해』의 영향은 크다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만해의 『십현담요해』와의 만남은 비록 우연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글을 통해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을 같은 오세암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십현담요해』의 서(序)를 통해 “사람을 수백 년 후에 만났으나 느끼는 바가 오히려 새롭다(接人於數百年之後 而所感尙新)”라고 말한 만해의 감흥이 충분히 다가온다 하겠다.
「십현담」은 10수(首)로 되어 있으며, 각 수는 8구(句)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과 순서는 <심인(心印), 조의(祖意), 현기(玄機), 진이(塵異), 연교(演敎), 달본(達本), 파환향(破還鄕), 전위(轉位), 회기(廻機), 일색(一色)>으로 되어 있다. 즉 「십현담」은 총 10개의 제목과 80구로 구성된 게송이라 하겠다. 만해는 이 10개의 제목과 80구의 게송 즉 90조각 하나하나에 각각 비(批)와 주(註)를 달아 『십현담주해』를 완성한 것이다. 각 수의 제목에 붙인 만해의 비(批)만을 뽑아 미리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직역 위주로 간단히 정리해 본다.
① 심인(心印): 畵蛇已失 添足何爲(뱀을 그리는 것도 이미 그르쳤는데, 여기에 발까지 그려서 무엇하리.)
② 조의(祖意): 博地凡夫 本自具足 一切賢聖 道破不得(평범한 범부도 본래 스스로 구족하고, 일체의 성현도 말로써는 얻을 수 없다.)
③ 현기(玄機): 不是秋花不是紺(이는 가을꽃도 아니고, 감색13) 도 아니다.)
④ 진이(塵異): 一室千燈(한 방안에 천 개의 등을 켜 놓았다.)
⑤ 연교(演敎): 無數黃葉葉 盡作止啼錢(수없이 많은 누런 잎을 모두 울음을 그치게 하는 돈이라 하였다.)
⑥ 달본(達本): 踏破雲山無限路 還家依舊離家在(운산의 끝없는 길을 다 돌아 집에 돌아와 보니 떠날 때의 집이 옛 그대로 있다.)
⑦ 파환향(破還鄕): 何地非故鄕(어느 곳인들 고향이 아니겠는가.)
⑧ 전위(轉位): 步步白水靑山(가도 가도 흰 물과 푸른 산이다.)
⑨ 회기(廻機): 風起花香動 雲收月影移(바람이 이니 꽃향기가 일고, 구름이 걷히니 달그림자가 비친다.)
⑩ 일색(一色): 一色知在一色外(한빛은 한빛의 바깥에 있음을 안다.)
13) 감색(紺色) : 검은빛을 띤 남색
『십현담주해』의 비(批)는 각 제목이나 게송에 대한 간단한 평(評)이라 하겠고, 이어 「십현담」 게송에 대한 만해의 구체적인 풀이는 주(註)를 통해 이루어진다.
『님의 침묵』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만해의 『십현담주해』가 지니는 『님의 침묵』과의 상관성을 간과하고 있으나, 이 둘 사이의 관련성을 거론한 글들도 이미 있어 왔다. 한종만, 김장호, 최원규, 이인복, 손종호 등의 글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해의 『님의 침묵』에 끼친 『십현담주해』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둘 사이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업적과 관심은 미미한 실정이다.
한종만, 김장호, 최원규 등의 논문은 『님의 침묵』의 작품을 『십현담주해』와의 비교를 통해 고찰하고 있으나, 둘 사이의 상관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작업이 미진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 논문은 『님의 침묵』의 작품 전체와 『십현담주해』의 전체 내용 사이에서, 단지 어구가 비슷한 것들을 골라 연결시키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위 논자들의 예를 각기 하나씩 들면 다음과 같다.
한종만14) 은 ‘심인(心印)․1-3’15) 의 “滿地蘆花 一天明月(땅에 가득한 갈대꽃이요, 하늘에 한결같은 밝은 달이다.)”의 소재를 중시하여, 이를 「비방(誹謗)」의 “달빗을 갈꼿으로 알고 흰 모래 위에서 갈매기를 이웃하야…”에 대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실 “滿地蘆花一天明月”은 억천만 년의 장구한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아 다른 빛이 없는(歷劫坦然無異色:心印․1-3) 자연 그대로의 본연의 모습을 의미하는바, 이는 내용상 「알 수 없어요」의 ‘오동잎, 하늘, 향기, 시내, 저녁놀’ 등의 표현과 일치한다.
또한 「비방」은 내용상으로 볼 때, ‘심인’이 아니라 오히려 ‘진이(塵異)․4-5’의 “妄息法泯 一心之妙體始現(망령이 그치고 법마저 없어지면 일심의 묘한 본체가 비로소 나타난다)”과 일치한다. ‘진이․4-3’의 “再刖不三刖則鑑玉終有人也(<변화의> 발뒤꿈치가 두 번 잘리고 세 번 잘리지 아니하였은즉, 이와 같이 옥을 알아 볼 사람이 마침내 있으니)”라는 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김장호16) 역시 ‘현기(玄機)․3-2’의 “蓮生水中 曾不着水(연꽃이 물속에서 생겼지만 물에 젖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소재의 중시하여 「비」의 “당신이 비 오는 날에 연잎옷을 입고 오시면, 이 세상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에 대비시키고 있다. 물론 소재상으로는 그 이상 일치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단지 소재상의 일치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의 세계를 표현할 때, 그러한 소재상의 일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불교적인 소재일 뿐이다.
내용상의 관련으로 보면, 「비」 작품에서 취할 것은 ‘연잎옷’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시구이다. 이는 ‘연교(演敎)․5-1’의 “不辨牛馬秋水至(소와 말을 분별할 수 있을 만큼도 배우지 못하여서 벌써 가을물이 이르렀으니)”라는 표현과 상통한다. 바로 앞 ‘연교․5-0’의 “無數黃葉葉 盡作止啼錢(수없이 많은 누런 잎을 모두 울음을 그치게 하는 돈이라 하였다)”라는 내용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다시 말해, 부처의 49년 설법은 방편을 사용한 것으로 깨달음이 없는 중생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곳에 다시 말할 것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연결된다.
위의 “蓮生水中 曾不着水”라는 말은 「비」보다는 오히려 「사랑의 측량」과 관련하여 풀이해야 정확하게 연결된다. 연이 물속에서 생기지만 물에 묻지 아니한다 함은, 「사랑의 측량」의 “질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量)이 만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버요.”라는 내용과 상통한다. 즉 “蓮生水中 曾不着水”는 시적 자아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과의 차별성을 강조한 「사랑의 측량」의 표현과 연결된다 하겠다.
최원규17) 는 『십현담주해』의 ‘진이(塵異)’와 『님의 침묵』의 「낙원은 가시덤불에서」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둘 사이의 상관성은 단지 선의 세계로서의 상관성일 뿐이다. 『십현담주해』든 『님의 침묵』이든 모두 선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둘 모두에서는 선의 역설 내지 이중부정이 나타나게 되는바, 『십현담주해』의 어느 한 부분과 『님의 침묵』의 전체 내용 사이에 연결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님의 침묵』의 어느 한 부분과 『십현담주해』의 전체 내용 사이의 관계도 서로 걸림이 없이 연결될 수 있다.
그런즉 여기서 중시되어야 할 것은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 사이의 전체적인 흐름이며, 또한 부분적인 언어의 일치가 아니라 각 게송과 각 시 사이의 핵심 내용이 어느 정도 관련되고 일치하고 있는가의 여부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낙원은 가시덤불에서」는 ‘진이’보다는 ‘달본(達本)․6-3’의 ‘雲水隔時君莫住(운수경에 막혔을 때 그대는 거기에 머무르지 말라.)’와 일치하는바, 아픔 속에 진정한 기쁨이 있다는 것과 운수경(雲水境)에 머무르지 말라는 대승적 내용은 그대로 상통한다.
이인복18) 은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의 탈고 및 간행 시기가 거의 동일한 점, 「십현담」이 80구게, 『님의 침묵』이 88편으로 숫자상 비슷한 점 등을 들어 두 저작의 동질성을 추론하고 있으며, 만해가 「십우도송」과 「십현담」을 즐겨한 사실을 중시하여 한 단락을 9편씩으로 묶어 모두 10개의 단락으로 『님의 침묵』을 나누고 있다. 『님의 침묵』을 10개의 단락으로 나누고, 각 단락의 중심내용을 밝힌 점은 『님의 침묵』의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두 저작의 상관성은 추론으로 끝나고 있으며, 『십현담주해』의 내용과 『님의 침묵』의 내용 사이의 구체적인 상관성 고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손종호19) 는 이인복의 추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내용을 제시하였다. 그는 『십현담주해』의 각 문(제목1, 시구8)과 시 9편씩을 묶고, 이렇게 해서 「십현담」의 십문과 『님의 침묵』의 10묶음을 대응시키고 있다. 그 결과, 각 묶음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발견됨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이인복의 추론 이후의 괄목할 만한 발견이나, 묶음별로 고찰한 탓으로 『십현담주해』 90구(10개의 제목 포함)와 『님의 침묵』 90편(「군말」과 「독자에게」 포함)이 일대일의 상관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십현담주해』 90구와 『님의 침묵』 90편을 일대일의 순서대로 대비시켜 보았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대일의 대응관계로 연결되고 있었으며, 『님의 침묵』은 『십현담주해』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창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님의 침묵』에서 상당히 나타나는 난해한 부분들이 다소 쉽게 해결되었고, 이런 표현들이 어떻게 하여 나오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해소되었으며, 창작 당시 만해의 심리까지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의 상관성을 검토한 결과, 『님의 침묵』 90편 중 그 내용의 핵심이 『십현담주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51편(☆),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그 상관성의 정도가 매우 높다고 여겨지는 것이 29편(◎), 분명 상관성이 있으나 그 상관성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되는 것이 10편(○)으로 나타났다.20) 물론 그 분류 기준에서 필자의 자의성이 다소 있을 수 있으나, 이 정도의 내용상 상호일치는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의 상관성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둘 사이의 상관성에 대한 구체적인 도표는 책 뒤에 부록으로 싣는다.
14) 한종만, 「박한영과 한용운의 한국불교 근대화사상」, 『원광대 논문집 제5집』, 1970, 132쪽.
15) 여기의 번호는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의 상관성 도표>(부록3)에 의함.
16) 김장호, 「한용운시론」, 『양주동박사 고희기념 논문집』, 1973, 48쪽.
17) 최원규, 「만해시의 불교적 영향」, 『현대시학』, 1977년 9월호, 160쪽.
18) 이인복, 「한국문학에 나타난 죽음의식 연구 -소월과 만해의 대비연구를 중심으로 하여」, 숙명여대 박사학위논문, 1978, 100-104쪽.
19) 손종호, 「<십현담주해>를 통해 본 <님의 침묵>의 시세계」, 『국어국문학 95호』(29회 전국 국어국문학연구 발표대회 요지), 1986, 454-457쪽.
20)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의 둘 사이, 상관성의 정도에 관한 편수는 졸고 「만해 한용운 시 연구」(박사학위논문, 원광대, 1995, 129-139쪽)에 수록.
3. 『님의 침묵』의 분석
1) 심인(心印)
(1) 군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21) 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22) 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너냐. 너에게도 님이 있너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어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풀이> 이 「군말」은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며, ‘군말’이라 하여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이 시집의 성격을 규명함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군말’의 사전상의 의미는 “아니 하여도 좋을 객적은 말”23) 이다. 이는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하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화사첨족(畵蛇添足)의 의미와 상통한다. 『십현담주해』의 비(批)[1-0]24) “畵蛇已失 添足何爲(뱀을 그림에 이미 그르쳤는데, 여기에 발까지 그렸으니 어쩌자는 것인가?)”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님의 침묵』의 ‘군말’이라는 제목은 결국, 선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는 말로 표현할 것이 못 되지만 그래도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어 표현하게 된다는 형식을 갖춘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어야 달의 존재를 알려 줄 수 있지 않은가!
서문 형식의 「군말」과 후기 형식의 「독자에게」를 포함한 『님의 침묵』 90편 중, 「군말」과 「독자에게」 두 편은 현실인으로서의 만해 입장에서 쓴 것이고, 나머지 88편은 시적 화자를 통해 표현된다. 『님의 침묵』의 해석에서 「군말」과 「독자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해는 여기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25) 은 다 님이라고 말하면서, 석가의 님은 중생이요, 칸트의 님은 철학이요, 장미화의 님은 봄비요,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논리로 만해의 ‘님’은 해 저문 벌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임을 밝히고 있는바, 당대의 현실로 볼 때 이 어린 양26) 은 곧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이요, 우리 조국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이 「군말」은 ‘어린 양’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식민지 치하 우리 민족의 ‘본래성 회복’을 염원한 창작 배경을 밝힌 것이며, 그 ‘어린 양’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이별의 아픔 속에서도 그 아픔을 극복하여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만해는 『님의 침묵』의 시적 화자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너냐. 너에게도 님이 있너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라는 표현을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라는 말은 곧 “진정 자유의 경지에서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의 대상인 님도 분명 자유의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님’을 향한 ‘나’에게 존재한다. 우매한 중생들은 ‘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사랑하는 것은 ‘님’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해는 식민지 치하 현실인의 입장에서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향하여 자신의 안타깝고 애틋한 심정을 밝힌 것이며, 그 어린 양들에게 진정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별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시적 화자의 대승적인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21) 초판본에는 ‘긔룬 것’으로 되어 있음.
22) 마치니(Mazzini, 1805-1872): 이탈리아의 정치지도자. 순수한 정열을 지닌 인물로 국가통일기의 초창기 청년층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침.
23) 신기철․신용철, 『새우리말 큰사전』, 삼성출판사, 1983.
24) 『님의 침묵』의 작품 순서에 대응한 『십현담주해』의 각 내용에 일련번호를 붙임.
25) ‘기룬’의 기본형은 ‘기룹다’인 바, 이는 “그립고 소중한 대상을 향하는 애틋한 마음의 작용”이라 하겠다.
26) 이 ‘어린 양(羊)’을 『님의 침묵』의 시적 화자인 ‘나’와 동일시하여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대단히 잘못된 시각이다. 깨달음을 얻은 선사로서의 만해가 현실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무명(無明)의 중생과, 이별의 아픔 속에서 참 사랑의 의미를 절절히 느끼는 시적 화자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 속의 시적 화자인 ‘나’는 분명 길을 잃고 헤매는 자의 모습이 아니며, 『님의 침묵』의 첫 작품부터 시적 화자는 이별 속에 진정한 만남이 내재해 있음을 이미 아는 자이다. 이별 속에 진정한 창조가 있고, 아픔 속에서만이 진정한 기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는 각자(覺者)의 모습이 곧 『님의 침묵』의 시적 화자인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각자’와 ‘어린 양’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 심인(心印, 1-0) : 心印(심인)
* 비(批) : 畵蛇已失 添足何爲(뱀을 그리는 것도 이미 그르쳤는데, 여기에 발까지 그려서 무엇하리.)
* 주(註) : 心本無體 離相絶跡 心是假名 更用印爲 然萬法以是爲準 諸佛以是爲證 故名之曰心印 本體假名 兩不相病 心印之旨明矣(마음은 본래 형체가 없는 것이라, 모양도 여의고 자취도 끊어졌다. 마음이라는 것부터가 거짓이름인데 다시 인(印)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만법은 이것으로써 기준을 삼고 모든 부처는 이것으로 증명을 하였기에, 이것을 이름하여 심인(心印)이라 한다. 본체와 거짓이름이 서로 병(病)이 되지 않는 데서 심인의 뜻이 밝아진다.)
(2)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빗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꼿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풀이> 작품 「님의 침묵」은 시집 『님의 침묵』의 첫 작품으로서, 이 시집이 가지는 이별과 사랑 그리고 만남의 의미를 총괄하면서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이해의 핵심은 처음과 끝 부분의 상관성에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1행)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4행)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8행)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9행)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0행)27)
이 작품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이별의 아픔과 탄식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첫 만남[불교적으로는 견성]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꿀 만큼 순수하고 본질적 인 것이었기에 시적 화자는 이별의 아픔을 극복한다. 그리하여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라는 사랑의 깨달음을 외치게 된다.
여기서 ‘나’는 현실인으로서의 만해가 아니며, 작품 속의 시적 화자임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시적 화자인 ‘나’는 사랑하는 ‘님’과 이별한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님은 분명 떠났는데 님과 이별한 게 아니라는 역설적 표현 즉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는 『십현담주해』의 「심인(心印)」(1-1)을 통해 찾아진다.
만해의 주(註) “花月已謝 美人全如玉(꽃과 달은 이미 시들고, 미인은 옥(玉)처럼 온전하구나.)”28) 은 겉으로는 ‘님’이 떠난 것 같으나 사실 ‘님’은 내 곁에 그대로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님의 침묵」 9행의 뜻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꽃과 달’은 현상계의 사물이며 ‘미인’[님]은 절대계의 ‘법신불’[참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꽃과 달’은 이미 시들고 있는데, ‘미인’은 왜 시들지 않고 옥(玉)처럼 온전하게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즉, 「님의 침묵」은 주객 대립의 상대적인 세계를 초월하여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텅 빈 공성(空性) 즉 선(禪)의 세계를 인용한 작품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의 이러한 의도는 ‘님’의 진정한 가치는 ‘님’과 이별했을 때 찾아진다는 것이며, ‘님’이 침묵하고 있을 때 오히려 ‘님’의 진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님의 침묵’ 속에 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터져 나온다는 9~10행의 내용이 바로 그러하다. ‘님의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마힐(維摩詰)의 ‘묵연(黙然)’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다음은 『유마경』의 일부이다.
27) 앞으로 인용되는 『님의 침묵』의 시들은 송욱의 교정본 『‘님의 침묵’ 전편 해설』(일조각, 1980)에 의한다. 그러나 “현행 맞춤법으로 고치는 경우에 발음이 달라지면 고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라는 이 책 교정의 기준에 의해, 교정본의 ‘갔읍니다’와 같은 경우는 ‘갔습니다’로 고쳤으며, 띄어쓰기가 틀리게 된 경우도 바로잡았음을 밝힌다.
28) 본 논문의 『십현담주해』 풀이는 『한용운전집(3)』을 참고, 인용함.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저의 생각으로는 모든 것에 있어서 말이 없고, 설(說)함도 없으며, 가리키는 일도, 인지(認知=識)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수사리는 유마힐에게 “저희들은 저마다 자기의 생각을 말하였습니다. 당신께서 이야기하십시오. 어떻게 하여 보살은 절대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유마힐은 오직 묵연(黙然)하여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문수사리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도다. 참으로 훌륭하도다. 문자와 언어도 전혀 없도다. 이것이야말로 절대평등한 경지에 진실로 드는 것이다.”29)
29) 박경훈 역, 『유마경』(현대불교신서․16), 동국대 불전간행위원회, 1982, 193-194쪽.
유마힐의 ‘묵연(黙然)’이 있기 전에 수많은 보살들이 절대평등한 경지에 대하여 각자 언설로써 표현하였던바, 위 내용은 보살들의 표현 이후 ‘유마힐’이 오로지 ‘묵연’을 통하여 그 절대평등한 경지를 통쾌하게 구현해내고 있는 부분이다. 보살들의 그 어떤 언설보다 큰 깨달음으로 울려온 유마힐의 ‘묵연’은 「님의 침묵」의 마지막 행(10행)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가 내포하는 의미와 그대로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도의 세계는 말을 초월한 세계이기에 유마힐의 ‘묵연’은 수많은 보살들의 어떤 표현보다도 그 구경(究竟)의 경지를 훨씬 더 실감나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해는 “불교의 교지는 평등입니다.30) 라고 말한 바 있는데, 여기서 『유마경』에서 말하는 ‘절대평등한 경지’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 ‘절대평등한 경지’란 공(空)과 색(色)을 하나로 보고, 절대계와 현상계를 하나로 보는 세계라 할 것이다.
현상계가 일시 천지자연의 질서에서 어긋나 있을지라도 이 또한 근원적으로는 ‘법신불’의 한 작용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일시 어긋난 그것마저 품어내고 되돌리려는 세계가 바로 절대평등한 경지를 깨달은 세계요, 중생의 아픔을 끌어안는 대승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있는 「님의 침묵」의 시적 화자이기에 ‘님’과 헤어져 있는 ‘님의 침묵’ 속에서 오히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사랑의 노래)가 절로 터져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시집 『님의 침묵』의 ‘님’을 ‘정상성 회복에의 한 표상’이라는 말로 정리하였던바, 이 또한 일체의 상대적 선입견을 초월한 ‘선의 세계’의 본래면목 즉 절대평등한 세계에 대한 직관을 담고 있는 표현으로 여긴다. 비록 ‘님’은 이별상태인 것 같으나, 이는 현상계의 일시적 인과 작용일 뿐이요,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면 ‘님’과 ‘나’ 사이의 본래면목[법신불, 참나]은 조금의 변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님이 부재(不在)하는 상황 속에서 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오히려 더 크게 터져 나오게 되는 역설적 이치를 담고 있다 하겠고, 이러한 이치의 근본은 현상계를 초월한 선(禪)의 세계와 중생의 아픔을 끌어안는 대승보살의 화엄정신 속에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 심인(心印, 1-1): 問君心印作何顔(그대에게 묻노니 심인은 어떤 얼굴을 지었는가.)
* 비(批): 脂粉滿地 世無傾城(연지와 분 냄새가 땅에 가득한데 세상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은 없구나.]
* 주(註): 三十二相 八十種好 在心印 盡屬空華 果何顔之有 五彩不足以染 規矩不足以形 且道果作何顔 (良久云) 花月已謝 美人全如玉[(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가 마음에 있으나 모두 공화(空華)31) 에 속한다. 과연 어떤 얼굴이 있으리오. 다섯 가지 물감으로도 물들이기에는 부족하고, 규구(規矩)32) 로도 형태를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과연 어떤 얼굴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말해 보라. (오래도록 말이 없다가 이르기를) 꽃과 달은 이미 시들고, 미인은 옥(玉)처럼 온전하구나.]
30) 『개벽』 45호, 1924, 위의 책, 288쪽 수록
31) 공화(空華): 본래 실체가 없는 대상계(對象界)를 망견(妄見)에 사로잡혀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안질(眼疾)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꽃이 있는 것처럼 잘못 보는 일에 비유한 것임.
31) 규구(規矩): 그림쇠. 지름이나 선(線)의 거리를 재는 기구.
(3) 이별은 美의 창조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糸) 없는 검은 비단과 죽엄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꼿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 <풀이> 이 작품은 이별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1행과 4행에 보이듯이, 같은 어법의 문장에 ‘미’와 ‘이별’을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이별과 미의 긴밀한 상관성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가장 숭고하고 완전한 미는 오로지 이별의 아픔 속에서 창조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인간과 자연의 대비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별의 미는 영원하고 완전한 자연의 모습 즉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아침 햇빛)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어둠)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자연)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푸른 하늘)에서는 찾아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영원하지도 아니하고 완전하지도 아니한 인간의 이별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비록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오히려 자연의 미보다 아름다운 이별의 미를 불러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앞의 시 「님의 침묵」의 침묵 속에서 사랑이 터져 나오는 내용과 일치하며, 또한 이후 전개될 시적 화자의 ‘이별의 아픔’ 속에 찾아오는 온갖 사랑의 현상을 함축한다. 선의 세계로 말하자면 한마디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의 세계라 할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병들었기에 자신 스스로 병들어 누웠던 인도의 ‘유마힐’과 같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별이 미로 승화되고, 진정한 미는 이별의 아픔에서 오게 된다는 이 역설은 「심인(心印)」(1-2)의 주(註) “心印以不傳爲傳(심인은 전하지 않음으로써 전해진다.)”라는 역설적 표현과 그대로 일치한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이미 사랑이 아닌 것처럼 진리는 말로써 전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말 없음으로써 전할 수 있다는 불립문자로서의 선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별이란 주제어를 끌어내어 작품화하고 있는 이 두 번째 시는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이별시를 총괄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이별에서 진정한 미가 탄생되는 이치는 번뇌에서 참다운 보리[菩提, 깨달음]가 터져 나오는 이치와 동일하다. 선의 세계에서 볼 때, 현상계의 이별이나 번뇌 역시 텅 빈 공성(空性)의 한 작용일 뿐임을 알기에 비록 무명 속에 있다 해도 ‘참나’[법신불]의 한 나툼으로 이해된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그대로의 현상을 보여준 것이 된다.
그러나 ‘번뇌즉보리’를 단순히 선의 세계에 대한 이해로만 접근하게 되면 삶의 역동적인 현상을 담아내기가 어려워진다. 번뇌가 보리로 승화되는 과정은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선’의 개념보다는 현상계의 중생을 품으면서 교화해나가는 보살도(菩薩道)의 ‘화엄정신’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는 시집 『님의 침묵』의 ‘님’을 ‘정상성 회복의 한 표상’으로 보는 필자의 취지와도 잘 들어맞는다.
현상계의 어떤 무명중생(無明衆生)도 모두 법신불의 한 나툼이요, 작용이기에 현상계와 절대계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그러하기에 이 무명중생을 각성하게 하여 본래의 부처로 되돌리려는 대승의 화엄정신은 천지자연의 근본도리를 실천하려는 평상심의 소산이다. 시대적 비정상성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고자 만해의 정신과 이별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구현해 나가는 시적 화자의 정신세계는 결국 지극히 순리자연한 평상의 세계를 회복하려는 ‘화엄정신’의 구현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 심인(心印, 1-2): 心印何人敢授傳[심인을 어느 누가 감히 전할 수 있으리오.]
* 비(批): 衣鉢早非心印[의발(衣鉢)은 일찍이 심인이 아니다.]
* 주(註): 心印無體 衆生不能受 諸佛不能傳 三世佛祖之傳法 仍是謾語 世法以傳爲傳 心印以不傳爲傳[심인은 형체가 없어서 중생이 능히 받을 수 없는 것이요, 모든 부처도 능히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삼세의 부처와 조사(祖師)들이 법을 전했다는 것도 하물며 부질없는 말이니, 세상의 법은 전함으로써 전해지나, 심인은 전하지 않음으로써 전해진다.]
(4)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최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꼿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뿌리33) 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꼿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33) 돍뿌리: 돌부리. ‘돍’의 발음은 ‘독’. 독은 돌의 사투리임.
☞ <풀이> 이 작품은 아이러니(Irony)가 바로 느껴진다. ‘알 수 없어요’라는 제목 하에 계속 이어지는 물음은 시적 화자가 몰라서 던지는 물음이 아니다. 이별 속에 참 사랑이 있다는 사랑의 원리를 깨달은 자의 의도적인 물음이다. 알면서도 ‘알 수 없어요’라고 한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폭을 넓힌다.
1행에서 4행까지의 핵심어 “오동잎, 푸른 하늘, 향기, 시내” 등의 낱말은 대자연의 표상물로서, 어느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순연한 세계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즉, 자연 사물을 지칭한 이들 시어들은 순수한 선의 세계를 표상한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이러한 순수세계가 곧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구현하는 지극한 정토세계임을 암시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심인心印」(1-3)의 주(註) “超古越今 萬色俱泯 不異不立 異者何物 (良久云) 滿地蘆花 一天明月”에서 찾아진다. 이는 곧 주객대립의 차별상(差別相)을 벗어나게 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깨달음의 참모습(님의 실존)을 보여준다는 뜻이니, 여기의 “滿地蘆花 一天明月(땅에 가득한 갈대꽃이요, 하늘에 한결같은 밝은 달이다.)”이라는 표현은 구별 없이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펼쳐져 있는 선의 세계로서의 이러한 순수 자연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4행까지 삼라만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여(眞如, 법신불) 그대로가 일대 조화를 이루며 드러나고 있는 선의 세계와, 5행 밝음에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장엄하면서도 비극적인 태양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받들고 있는 저녁놀에서 느껴지는 비극적 인식, 6행 절망적 처지의 어둠 속에도 좌절하지 않고 본래의 청정한 세계를 향하여 끝없이 타오르겠다는 시적 화자의 화엄일념(華嚴一念)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6행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역설은 인간사(人間事)를 담고 있는 선(禪)의 역설적 표현이다. 여기서 ‘타고 남은 재’는 ‘이별의 아픔’을 상징하는바, 이때 시적 화자인 ‘나’는 상대성을 초월한 법신불[참나]의 힘으로 ‘재’를 오히려 ‘기름’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반전을 이루고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게 된다. 여기서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에서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결코 ‘약한 등불’이라고 할 수 없다.
‘재’가 ‘기름’이 되고, 그칠 줄 모르고 영원히 타오르는데 어찌 ‘약한 등불’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둠을 지키는 ‘약한 등불’로 보일지라도 밤새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등불이기에 이는 곧 절망적인 상황 속에도 굴하지 않고 피워 올리는 등불이기에 ‘위대한 등불’이 되는 것이며, 반어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알 수 없어요」의 문학성은 먼저 ‘알 수 없어요’라는 제목 아래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물음을 통해 아이러니 효과를 얻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둘째, 내용 전개상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이 작품의 점층적 구조에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조는 ‘낮-저녁[일몰]-밤’으로 이어지면서 마지막 ‘어둠’의 시간에 극적인 전환을 이루면서 시집 『님의 침묵』 창작의 의도까지를 함축하는 장엄한 상징구조로 승화된다.
여기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시집 『님의 침묵』의 앞부분에 배치된 세 작품 「님의 침묵」, 「이별의 미」, 「알 수 없어요」 등의 시들은 앞으로도 계속 전개될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의 시세계를 총괄하는 형식의 함축성을 띠고 있음이 확인된다. ‘님’과의 이별 이후 시적 화자의 구체적인 개인 심리와 그 생활상을 담고 있는 사랑의 시는 다음 작품 「나는 잊고저」부터 전개된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 심인(心印, 1-3): 歷劫坦然無異色[오랜 겁(劫)의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다른 빛이 없으니]
* 비(批): 千眼失明(천 개의 눈이 밝음을 잃었다.)
* 주(註): 超古越今 萬色俱泯 不異不立 異者何物 (良久云) 滿地蘆花 一天明月[고금(古今)을 초월하고 만색(萬色)이 모두 없어졌다. 다르지 아니함도 존재하지 않는데 다르다는 것은 또 무슨 물건인가. 不異不立 異者何物(다르지 아니함도 존재하지 않는데 다른 것은 또 무슨 물건인가.)34) (오래도록 말이 없다 이르기를) 땅에 가득한 갈대꽃이요, 하늘에 한결같은 밝은 달이다.)
34) 不異不立 異者何物(다르지 아니함도 존재하지 않는데 다른 것은 또 무슨 물건인가.): 다르지 아니하다는 것은 곧 같다는 의미인바, 그런즉 “不異不立 異者何物”은 결국 “같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르다는 개념이 생길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임. 즉, 우주의 삼라만상은 각기 다르면서도 하나의 조화를 이룬 덩어리이기에 ‘같다’ ‘다르다’의 개념으로 따질 것이 아니라는 것임.
(5) 나는 잊고저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야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히기로
행혀 잊힐까 하고 생각하야 보았습니다.
잊으랴면 생각히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어 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야요.
귀태여 잊으랴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엄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야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 <풀이> 「심인(心印)」(1-4)의 원문에서는 ‘심인’을 ‘심인이라고 부르면 벌써 헛된 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바, 이는 언어라는 ‘차별심’을 떠난 텅 빈 선(禪)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심인’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나는 잊고저」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진정한 ‘님’은 일부러 떠올려서 생각나는 ‘님’이 아니라, 저절로 떠오르는 ‘님 생각’이 ‘님’을 그리는 진정한 사랑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한바 남들과 ‘나’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그 분별점은 이 시의 2연 “잊으랴면 생각히고 /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 잊도 말고 생각도 말어 볼까요. /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에서 찾아진다. 시적 화자는 님을 향한 끝없는 그리움에 괴로워하면서, 아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어 볼까요. /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하며 잊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 내려놓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 모두 결국 분별심에 불과한 것으로 끝없는 그리움과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님을 두고 ‘잠’과 ‘죽엄’으로 도피하고 싶지도 한다. 그 결과 시적 화자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라는 말로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다. 너무도 괴로운 나머지 잊으려 하는 마음속에 살고 있음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비록 고통으로 가득하다 해도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현재 그리움의 실상이 참 사랑의 한 표현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이 시의 2연 “잊도 말고 생각도 말어 볼까요. /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의 내용은 『십현담주해』의 ‘원문’(1-4) 외에도 주(註)의 “名之則錯 不名亦錯(이름을 붙이는 것도 잘못이요,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라는 표현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 사랑과 참 도의 세계는 작위적인 분별심(分別心)을 떠나야 함을 주장하는 표현들이다.
결국 위의 시 「나는 잊고저」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이 시의 화자가 처해 있는 상황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랑은 아픔을 버리고 떠나려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삭이고 극복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상대적 분별심을 떠난 ‘참나’[법신불] 속에서 ‘인욕바라밀’35) 로 현상계의 아픔을 품고 삭이고 승화해가는 시적 화자의 마음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 심인(心印, 1-4): 呼爲心印早虛言(심인이라고 부르면 벌써 헛된 말이다.)
* 비(批): 呼心非印亦虛言[심(心)을 일컬어 인(印)이 아니라 하는 것도 또한 헛된 말이다.]
* 주(註): 無相無色 何有言說 千呼萬名 元不相稱 此諱尊嚴 千佛莫能犯 名之則錯 不名亦錯 天下廣長舌 一時俱斷(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으니, 어찌 말할 수 있으리오. 천 가지로 부르고 만 가지로 이름 짓는 것이 원래 서로 맞지 아니하니, 이것은 존엄하여 천불이라도 능히 범할 수 없다. 이름을 붙이는 것도 잘못이요,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천하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도 일시에 그 말길이 끊어져 버린다.)
35)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자기 내부에 이미 갖춰져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수용하고, 이 입장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과 모욕을 참아내는 바라밀.
(6) 가지 마서요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숙이고 자기자기한 사랑을 받으랴고 삐죽거리는 입설로 표정하는 어여쁜 아기를 싸안으랴는 사랑의 날개가 아니라 적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자비의 백호광명(白毫光明)이 아니라 번득거리는 악마의 눈빗입니다.
그것은 면류관과 황금의 누리와 죽엄과를 본 체도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돌돌 뭉쳐서 사랑의 바다에 퐁당 너랴는36) 사랑의 여신이 아니라 칼의 웃음입니다.
아아 님이여 위안에 목마른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서요. 거기를 가지 마서요. 나는 싫여요.
대지의 음악은 무궁화 그늘에 잠들었습니다.
광명의 꿈은 검은 바다에서 자먁질37) 합니다.
무서운 침묵은 만상(萬像)의 속살거림에 서슬이 푸른 교훈을 나리고 있습니다.
아아 님이여 새 생명의 꼿에 취하랴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서요. 거기를 가지 마서요. 나는 싫여요.
거룩한 천사의 세례를 받은 순결한 청춘을 똑 따서 그 속에 자기의 생명을 너서38) 그것을 사랑의 제단(祭壇)에 제물로 드리는 어여쁜 처녀가 어데 있어요.
달금하고 맑은 향기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꼿이 어데 있어요.
자신의 전체를 죽엄의 청산에 장사 지내고 흐르는 빗(光)으로 밤을 두 쪼각에 베히는 반딧불이 어데 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에 순사(殉死)하랴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서요. 거기를 가지 마서요. 나는 싫여요.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만상의 모든 생명의 쇳대를 가지고 척도(尺度)를 초월한 삼엄한 궤율(軌律)로 진행하는 위대한 시간이 정지되얐습니다.
아아 님이여 죽엄을 방향(芳香)이라고 하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서요. 거기를 가지 마서요. 나는 싫여요.
☞ <풀이> 이 작품은 『님의 침묵』의 ‘님’이 완전한 존재자가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적 상황에서 님은 “적의 깃발, 악마의 눈빛, 칼의 웃음”을 향하는 걸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님을 향해 “걸음을 돌리서요, 거기를 가지 마서요, 나는 싫여요.”라고 하면서 호소하고 있다. ‘님’을 “열반의 경지에 들게 하는 참다운 아(我) 즉 무아(無我)”로, 시적 화자를 “해탈한 무아를 찾아 끝없이 구도하는 무명(無明)의 범부”로 보는 관점39) 은 이런 점에서 설득력이 약해진다. ‘님’의 정체는 시집 『님의 침묵』에 나오는 모든 ‘님’ 또는 ‘당신’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님’은 완전성을 지닌 존재자요, ‘나’는 이별의 아픔 속에 울고 있는 ‘어린 양(羊)’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주검을 방향(芳香)이라고 하는 나의 님이여”가 보여주듯이 ‘님’보다는 오히려 시적 화자의 세계가 사리에 밝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실, 『님의 침묵』의 전편(全篇)에서 ‘완전함’의 개념이란 ‘님’과 ‘나’와의 만남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의 “적의 깃발, 악마의 눈빛, 칼의 웃음”이란 곧 ‘님’과 ‘나’와의 이별상황을 표현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별상황 속에 만남의 세계를 암시하는 말은 마지막 연의 “그 나라에는 허공(虛空)이 없습니다.”라는 표현이다. 이는 곧 “적의 깃발, 악마의 눈빛, 칼의 웃음”이 없는 이곳 ‘허공’의 세계로 돌아오라는 의미이다. 이 ‘허공’이란 표현은 「심인(心印)」(1-5)의 원문 “須知體自虛空性[모름지기 체(體)는 스스로 허공의 성질임을 알지니]”라는 내용과 상통하는바, 만해는 이를 “離相而存 超色而明 拔乎性命 曾不生滅 不與有爲之有形有壽爲伍 虛空性故 有若此者[모양을 떠나 존재하고, 색을 초월해서 밝으며, 성명(性命)에서 빼어나 일찍이 나고 죽는 것도 없다. 세상의 형체 있고 수명 있는 것들과 더불어 짝하지 아니한다. 허공의 성질이기 때문에 이와 같다.]”라고 주해하고 있다. 이는 지눌(知訥)의 다음 말과 그대로 일치한다.
36) 넣으려는
37) 자먁질: ‘자맥질’의 사투리
38) 넣어서
39) 오세영, 「침묵하는 님의 역설」, 『국어국문학 65․66』, 1975. pp.267-270.
마치 허공이 어디나 두루한 것처럼, 그 묘한 본체는 고요하여 온갖 실없는 말들이 끊어져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아 고요히 항상 머무른다.(如大虛空徧一切處妙體凝寂絶諸戱論不生不滅非有非無不動不遙湛然常住)40)
위에서 ‘묘체(妙體)’ 즉 ‘허공’[空性]에 대한 만해와 지눌의 해설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묘체’는 현상을 초월해서 두루 존재하며, 나고 죽지도 아니하며, 또한 허공과 같이 텅 비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바, 이는 곧 만유(萬有)의 본원(本源)이요, 제불조사 범부중생의 성품 원불교의 ‘일원상서원문’에서도 “일원(一圓)은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生死門)인바,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諸佛祖師) 범부중생(凡夫衆生)의 성품41) 즉 ‘참나’[법신불, 참마음, 일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가지 마서요」의
40) 지눌(김달진 역주), 「진심직설」, 『보조국사전서』, 고려원, 1988. p.111.
41) 원불교의 ‘일원상서원문’에서도 “일원(一圓)은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生死門)인바, 천지․부모․동포․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諸佛祖師) 범부중생(凡夫衆生)의 성품으로”라고 하여, 부처나 중생의 마음은 모두 본래 ‘법신불’[참나, 일원]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불교와 동일함을 보여주며, 결국 한민족의 ‘한사상’(하느님), 동학의 ‘인내천’, 동양사상의 ‘도’, ‘무극’, ‘태극’, 기독교의 ‘하나님’ 등의 개념이 같은 자리에애서 만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 나라에는 허공(虛空)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만상의 모든 생명의 쇳대를 가지고 척도를 초월한 삼엄한 계율로 진행하는 위대한 시간이 정지되얐습니다.
라는 표현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쉽게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허공’이란 위에서 거론한 대로 텅 빈 공성(空性)을 가리키는 말로 파악되는바, 이는 곧 우주 삼라만상의 본래면목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진리 ‘법신불’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마지막 연의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란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본래의 정상성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허공이 없는 나라’를 향하고 있는 ‘님’을 되돌리고자 하는 그 간절함은 곧 이별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적 상황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아픔이다. 또한 이러한 이별은 일시적인 것이요, 한때의 미혹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적 화자는 알고 있다 할 수 있으니, 허공처럼 티끌 하나 없이 고요한 “본체는 일체 중생이 본래부터 가진 불성이요, 또 모든 세계의 발생 근원(此體是一切衆生本有之佛性乃一切世界生發之根源)”42) 이기 때문이다.
미혹한 중생이 살아가는 현상계도 ‘법신불’이라는 절대의 세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화엄사상의 출발이요, 미혹한 중생을 끌어안고 깨우침을 주려는 보리심(菩提心)이 보살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시의 시적 화자가 떠나가는 ‘님’을 안타까워하며 아파하는 세계가 바로 대승보살의 세계요, 화엄의 세계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 나라’는 ‘깨달음의 경지’를, ‘그림자 없는 사람’은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보는 관점43) 과, ‘아만(我慢)’에 차서 ‘님’을 대하고 있다고 하는 관점44) 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깨달음의 나라로 가는 것을 못 가게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으며, 적과 악마의 나라를 시적 상황으로 설정한 후 님을 걱정하여 그곳에 가지 못하게 만류하는 간절한 행위는 결코 시적 자아의 아만(我慢)으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시적 화자를 깨달은 자가 아닌 ‘어린 양’으로 본 결과라 여겨진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 심인(心印, 1-5): 須知體自虛空性[모름지기 체(體)는 스스로 허공의 성질임을 알지니]
* 비(批): 天下之不具 莫此甚也(천하의 불구(不具)가 이보다 심한 것은 없다.)
* 주(註): 離相而存 超色而明 拔乎性命 曾不生滅 不與有爲之有形有壽爲伍 虛空性故 有若此者[모양을 떠나 존재하고, 색을 초월해서 밝으며, 성명(性命)에서 빼어나 일찍이 나고 죽는 것도 없다. 세상의 형체 있고 수명 있는 것들과 더불어 짝하지 아니한다. 허공의 성질이기 때문에 이와 같다.]
42) 지눌, 위의 책, 113쪽.
43) 송욱,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전편 해설』, 일조각, 1980, 44-45쪽.
44) 윤재근, 『만해시 ‘님의 침묵’ 연구』, 민족문화사, 1985, 228쪽.
(7) 고적한 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宇宙)는 죽엄인가요.
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적은 별에 걸쳤든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꼿을 꺾든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 손을 마주잡고 눈물의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어요.
우주는 죽엄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엄은 사랑인가요.
☞ <풀이> 1연에서 3연까지 ‘님’이 내 곁에 없어 우주 전체가 죽은 것 같이 여겨지는 고적하고 괴로운 밤을 뛰어난 상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괴로운 밤은 4연의 “인생이 눈물이면 죽엄은 사랑인가요.”라는 표현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즉 님이 없는 삶을 절망적으로 인식하던 화자가 갑자기 새 삶의 창조적 원동력으로 인식하면서 ‘죽음’마저 ‘사랑’으로 전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중심 단어들은 “없습니다, 주검, 잠, 정사, 눈물, 사랑” 등이다. 여기서 “없습니다, 주검, 잠, 정사, 눈물” 등의 말은 님을 향한 시적 화자의 ‘사랑’이 생성되기까지의 전제 요소가 된다. 즉, 이 시는 무(無)에서 다시 태어나는 참 사랑의 묘리를 밝힌 것이다. 「심인(心印)」(1-6) “將喩紅爐火裡蓮(뜨거운 화로 속에 피어난 연꽃에 비유해 볼까.)의 내용 중 ‘뜨거운 화로’는 이 시의 ‘없습니다, 주검, 눈물’ 등과 통하고, ‘연꽃’은 ‘사랑’과 통한다.
그러하나, 만해는 ‘연꽃’이라 이름 붙이는 것도 의미 없는 일임을 말하고 있는데, “性若虛空 無以爲名 喩之火中蓮 取其名有實無也(성질이 허공과 같아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불 속의 연꽃으로 비유한 것은 그 이름은 취했으나 실제는 없는 것이다.)”라는 만해의 주(註)가 그것이다. 절대계의 입장에서 보면, ‘불 속의 연꽃’이란 비유도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말하고 있으나, 현상계 처지에서 보면 이는 ‘죽엄’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원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런즉, 이 시의 구조 및 전개 과정을 중심 단어를 통해 정리하면, <1연: 없습니다 → 2연: 주검(잠) → 3연: 눈물의 정사 → 4연: 사랑>와 같이 정리된다. 1연에서 3연까지는 ‘주검’과 같은 이별의 상황 속에서 ‘주검’을 ‘주검’으로 바라보는 자의 직관적 인 눈물을 보이는 부분이라 하겠고, 4연에서는 ‘주검’이라는 현상계의 비정상적 상황을 시공을 초월한 ‘참나’의 힘을 발휘하여 ‘사랑’이라는 정상적 상황으로 반전시키는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의 ‘고적한 밤’이 겉보기에는 ‘주검의 밤’처럼 보이나, 실은 ‘주검의 밤’이 아닌 ‘참 사랑의 밤’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이 눈물이면 주검은 사랑인가요.”라는 설의적 표현으로 아픔(눈물, 죽음)이 곧 사랑임을 암시하며 끝을 맺고 있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1-6): 將喩紅爐火裡蓮(뜨거운 화로 속에 피어난 연꽃에 비유해 볼까.)
* 비(批): 百花元從火裡生[모든 꽃은 원래 불 속에서 피어난다.]
* 주(註): 性若虛空 無以爲名 喩之火中蓮 取其名有實無也 道之無名 喩之無物 火中蓮 亦何足世喩哉(성질이 허공과 같아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불 속의 연꽃으로 비유한 것은 그 이름은 취했으나 실제는 없는 것이다. 말은 하되 이름이 없고 비유는 하되 실물이 없으니, 불 속의 연꽃은 또한 어찌 좋은 비유라 할 수 있으리오.)
(8) 나의 길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돍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최를 내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어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야는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츰의 맑은 이슬은 꼿머리에서 미끄름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45)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엄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엄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엄의 길은 웨 내섰을까요.
45) 초판본에는 ‘둘밧게’로 표기됨.
☞ <풀이> 이 시의 ‘길’은 「心印」(1-7) “勿謂無心云是道[무심을 이르되 이것을 도라고 말하지 말라.]의 ‘도(道)’와 일치하는 표현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길’을 ‘님의 품에 안기는 길’과 ‘죽엄의 품에 안기는 길’ 둘을 제시하고 있다. ‘님의 품에 안기는 길’ 외의 다른 길은 ‘죽음’보다 고통스런 일이라면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님의 품에 안기는 길’을 『십현담주해』와 관련하여 찾는다면, 「心印」(1-7)의 “有心者滯於有心 無心者碍於無心 有無雙忘 近於道矣[유심자(有心者)는 유심에 막히고, 무심자(無心者)는 무심에 걸린다. 유와 무를 둘 다 잊어야만 도에 가까워진다.]라는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유심자’는 현상계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자라고 하면, ‘무심자’는 현상계를 떠나 텅 빈 공성(空性)에 안주하려는 자라 할 것이다. 그런즉 ‘유무쌍망(有無雙忘)’ 유도 무도 잊어버리고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에도 무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월한 자리가 바로 절대계의 ‘참나’ 자리이다. 이 ‘참나’의 자리에서 현상계를 바라보는 세계는 유와 무를 모두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품어 안는 세계이다. 진정한 대승이 바로 여기서 이루어지는바, 현상계의 아픔을 끌어안고 이 땅에 화엄정토를 이루려는 보살도(菩薩道)가 그런 길이라 하겠다. 이 시 「나의 길」에서 말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이 바로 아픔을 끌어안는 대승의 길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 심인(心印, 1-7): 勿謂無心云是道(무심을 이르되 이것을 도라고 말하지 말라.)
* 비(批): 網盡桃花武陵春 漁郞依舊到仙源[무릉의 봄 복숭아꽃을 모두 그물로 건졌지만 어부들은 여전히 신선의 세계에 찾아온다.]
* 주(註): 非徒有心爲病 無心均是病也 何也 有心者滯於有心 無心者碍於無心 有無雙忘 近於道矣[한갓 유심(有心)만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심(無心)도 같이 병이 되는 것이니, 어찌하여 그러한가. 유심자(有心者)는 유심에 막히고, 무심자(無心者)는 무심에 걸린다. 유와 무를 둘 다 잊어야만 도에 가까워진다.)
(9) 꿈 깨고서
님이면은 나를 사랑하련마는 밤마다 문 밖에46) 와서 발자최 소리만 내이고 한번도 들어오지 아니하고 도로 가니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러나 나는 발자최나마 님의 문 밖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사랑은 님에게만 있나버요.
아아 발자최 소리나 아니더면 꿈이나 아니 깨었으련마는
꿈은 님을 찾어가랴고 구름을 탔었어요.
46) 초판본은 ‘문밧게’로 표기됨.
☞ <풀이> 이 시의 ‘꿈’이란 소재와 「심인(心印)」(1-8)의 비(批) “初擬萬事到夜定 其奈閒愁入夢多(처음에 생각하기를 밤이 되면 만사가 안정될 줄 알았더니, 도리어 그 한가로운 근심이 꿈에 많이 들어오니 웬일인가.)”의 ‘夢’이란 표현이 우선 일치한다.
님의 발자취 소리에 꿈을 깬 시적 화자는 “꿈은 님을 찾어가랴고 구름을 탔었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즉, 낮에 겪는 이별과 사랑의 아픔이 밤에도 계속됨을 보여준다. 님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은 꿈속에서도 님을 찾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윤재근은, 이 작품의 “사랑은 님에게만 있나버요.”라는 시구는 앞의 “「가지 마서요」(6)에서 ‘나’ 자신이 ‘님’의 오류라고 원망했던 것이 아만(我慢)이었음을 정지(正知)”47)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 그는 “꿈은 ‘나’에게 자오(自悟)의 계기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마서요」에서, 이의 내용은 아만이 아니라 떠나는 님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라 말한 바 있다. “꿈은 자오의 계기”라 하는 윤재근의 표현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꿈은 자오의 계기”가 아니라 함은, 꿈을 꾸기 이전이나 꿈을 꾼 이후나 ‘님’을 향하는 시적 화자의 사랑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사랑은 님에게만 있나버요.”라는 표현은, 시적 화자가 님의 문에 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 시적 표현일 뿐이지, 실제 님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도 아니고, 님의 사랑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각이 있어서도 아니다. 이는 “님을 찾어가랴고 구름을” 탄 시적 화자의 꿈의 내용이 님의 발자취 소리 이후의 것이 아니요, 님의 발자취 소리 이전의 것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심인(心印)」(1-8)의 비(批)에 보이는 만해의 표현을 통해 분명해진다. 즉, “初擬萬事到夜定 其奈閒愁入夢多(처음에 생각하기를 밤이 되면 만사가 안정될 줄 알았더니, 도리어 그 한가로운 근심이 꿈에 많이 들어오니 웬일인가.)”라는 내용의 ‘夜定’은 소승선(小乘禪)의 세계를 비유한 것임을, 이에 대한 주(註) “絶慮爲宗 墮於小乘(생각을 끊는 것으로 종(宗)을 삼아 소승(小乘)에 떨어지고 만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위의 “閒愁入夢多(한가로운 근심이 꿈에 많이 들어오니)”라는 표현은 곧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대승선의 입장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별의 아픔 속에서 밤낮으로 간절하게 님을 그리워하며 애를 태우는 대승적 사랑이 참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준다.
◉ 『십현담주해』의 원문, 심인(心印, 1-8): 無心猶隔一重關(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에 막혀 있다.)
* 비(批): 初擬萬事到夜定 其奈閒愁入夢多(처음에 생각하기를 밤이 되면 만사가 안정될 줄 알았더니, 도리어 그 한가로운 근심이 꿈에 많이 들어오니 웬일인가.)
* 주(註): 初學者 妄念紛起 常以無心爲期 及到無心 往往落空 絶慮爲宗 墮於小乘 至是而無心之病 更甚於有心也 此法不可以有心得 亦不可以無心求 如何始得 (放下拄杖云) 山雨未晴 春事在邇[처음 배우는 자는 망념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항상 무심의 경지를 기약한다. 마침내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때때로 허공에 떨어져서 생각을 끊는 것으로 종(宗)을 삼아 소승(小乘)에 떨어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무심의 병이 오히려 유심의 병보다 더욱 심하게 된다. 이 법은 유심으로도 얻을 수 없고 또한 무심으로도 구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겠는가. (주장자를 내려놓고 말하기를) 산에는 비가 아직 개지 않았어도 봄 농사는 이미 가까이 와 있도다.]
<이하 생략>
47) 윤재근, 위의 책, 230쪽.
* 이 글은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비평활동지원을 받아 집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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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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