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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 작성일 2023-01-01

기획의 말

2023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균탁,「알레그로 스케르찬도」를 읽고(《문장 웹진》, 2022년 12월호)

점점 빠르게, 점점 느리게.
우리의 생은 점과 점 사이에 있으니, 메트로놈은 필요 없어요.

문장웹진 1월호 살펴보기

이웃들

[단편소설] 이웃들 고수경 어두운 건물 복도에 앉아 아는 얼굴들을 떠올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 지금은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회사 근처에서 자취하는 주임님. 나를 초대해 준 적은 있지만 재워 주지는 않았다. 오늘처럼 회식이 자정 넘어 끝난 십이월 초 겨울밤에도. 차로 삼십 분 거리에 사는 같은 과 언니. 연락을 안 한 지 일 년쯤 되었다. 세 손가락을 접었다 편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커터칼이 잡혔다. 문구용이어서 얇은 비닐 정도나 자를 수 있지만 빈손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을 올렸다 내리고 있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의 불이 켜지고 갓 스물쯤 돼 보이는 여자가 복도로 들어오려다 멈춰 섰다. 나와 눈이 마주친 뒤 그대로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불이 다시 꺼졌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암흑 속에서 202호와 203호, 204호의 현관문을 보며 생각했다. 이 중 한 곳에 사는 사람일 텐데. 하긴 휴대폰과 지갑이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원룸 복도에서 커터칼을 든 사람을 발견하고 돌아선 여자가 나보단 나은 처지였다. 도로 바닥에 앉아 내 앞에 있는 201호의 현관문을 바라봤다. 십 분 전만 해도 나는 저 안에 있었다. 새벽 한 시쯤이었다. 그때는 가방과 휴대폰을 내려놓고 수납장에서 돌돌 말린 비닐을 꺼냈다. 이번 겨울에도 웃풍을 막기 위해 창문에 붙이고 남은 에어캡이었다. 택배 박스 안에 에어캡을 깔고 모서리 부분을 커터칼로 그어서 기포를 빼자 어느 정도 모양이 잡혔다. 밖으로 나와서 건물 입구에 주차된 차 뒤에 박스를 두었다. 차 아래 숨어 있던 고양이들이 눈치를 보다가 한 마리씩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패딩 주머니에 들어 있던 아직 온기가 남은 핫팩을 넣어 주고 건물로 들어와 계단을 올랐다. 집에 가면 내일 오전 미팅의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피피티를 검토해 본 뒤에 씻고 나서 바로 잠들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평범한 하루를 마치기 전 오며 가며 보았던 길고양이들에게 집을 만들어 주려던 것뿐이었다. 기온이 올겨울 처음 영하로 떨어진다는 오늘 밤만이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는 작은 공간 한 칸을. 집 앞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어 락은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경고음을 네 번 울리고 나면 이런 음성이 나온다는 것. 비밀번호를 다섯 번 틀리면 오 분 동안 시도할 수 없습니다. 그건 같은 숫자를 네 번 눌렀는데 실패했다면 다른 숫자를 눌러 봐야 한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다른 숫자가 없었다. 이십여 년 전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아이돌 가수의 생일 네 자리를 통장 비밀번호로도 만들고 온갖 사이트에 가입할 때 쓰고 이 집에서도 이 년 가까이 눌러 왔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의 생일을 다섯 번째까지 눌렀다는 이유로 차가운 바닥에 앉아 오 분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센서등이 꺼졌지만 내버려두었다. 손에 입김을 불면서 어둠에 적응하려고 눈을 깜빡였다. 복도 끝에 달린 창문으로 맞은편 건물의 불빛이 들어와 눈앞

  • 2023-01-01
미래가 열렸던 시간들을 위해

[비평연재]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미래가 열렸던 시간들을 위해 양재훈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느낀 개인적인 견해를 담고 있으며, 그중에는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 많다. 일부는 옳을 것이고 어떤 것은 심각하게 틀리기도 할 것이다. 논란과 오류의 가능성이 큰 견해를 내어놓는 것은 요즘 내가 ‘오류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라는 헤겔의 금언에 점점 더 깊이 공감하고 있는 탓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들어 온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디모데후서 3장 14절)는 가르침에 지나치게 붙들려 있었고, 오류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들을 오래 지냈다. 스스로도 그런 줄을 알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오랫동안 품고 살았지만, 오류에 대한 두려움 탓에 무언가를 시도하고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한 문장을 쓰고 또 한 문장을 이어 쓰는 일이 너무나도 힘겨웠는데, 그것이 내 생각을 정확히 담은 문장인지, 내 생각 자체는 정확한지, 그것이 읽힐 때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과연 읽히기는 할 것인지, 모든 것이 정확하다고 해도 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너무나도 많은 두려움이 모든 문장들의 진행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마감시한을 넘겨서야 글을 시작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결국 처음의 몇 문장에 들인 힘겨움에 비해 한없이 허술한 형태로 글을 발표하곤 했다. 매번 오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존재 자체가 오류인 원고를 생산했다고 자평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제 내가 틀려먹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글을 써보려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많이 틀렸다면 누군가 그것을 반박하고 교정해 줄 것을 기대해 보려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 역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고 듣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오류들은 점차 교정되고 옳은 의견은 점점 더 단단해질 것이라 믿는다. 내 아집이 그것을 막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나는 못 하더라도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보다 더 바보가 될지라도 우리는 현명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올바르고 완결된 글을 써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기고 완성되지 않은 생각이라도 세상에 내어놓을 때 누군가는 부족한 것을 덧붙이고 누군가는 틀린 것을 수정할 것이며 누군가는 옳은 논리를 강화하고 넓혀 갈 것이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완성해 가는 글쓰기에 참여해 보고 싶다. 누가 반응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이 실리는 매체가 웹진이라서 더욱 그렇다. 이 글이 완성과 거리가 멀어지는 데는 연재라는 형식도 한몫한다. 나는 보통

  • 양재훈
  • 2023-01-01
노란빛

노란빛 김상희 마음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니 손바닥을 올려다보면 부드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사람을 사랑하고 싶었지 그들이 가지는 애틋함이 좋았다 등 뒤에 죽은 자신을 업고 산을 오르는 사람의 정상에 다다르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얼굴이 마음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자라났다 뼈가 굵어지고 튀어나왔다 새것 같던 피부도 주름이 많아지고 얇아졌다 너는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니 정상에 오른 그 사람의 얼굴이 궁금해 감격에 찬 표정으로 죽은 자신의 볼을 쓰다듬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만세를 부를지도 모른다 그날은 날씨가 좋았다 사람들은 모두 기분이 좋아 보였지 나는 죽어버린 마음을 안고 거리를 거닐었다 마음이 죽었다는 것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천국에도 지워지지 못하는 자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 환한 빛으로 보이듯 그들의 날카로운 자국 뒤통수에 휘갈겨진 검은 물감 이상한 그림처럼 뭉개지는 그림자 그것들을 두고 뒤돌지 않을 수 있는 걸음으로부터 쏟아지는 노란빛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어 재가 된 마음에게 중얼거리면 나도 조금은 밝아질지도 모르지 사람들을 따라 걷는다 죽은 마음을 두고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 장면은 따뜻해 보인다

  • 김상희
  • 2023-01-01
질풍 아일랜드

질풍 아일랜드 구효서 입을 딱 벌려 통밀식빵 조각을 구겨 넣었다. 입을 다물어 보았다. 윗니와 아랫니가 닿으면 다시 입을 벌려 빵을 더 욱여넣었다. 목젖까지. 양 볼이 미어지도록, 여지없이. 위아래 치열이 서로 닿지 않을 때까지. 턱뼈가 얼얼하고, 숨이 막혔다. 눈물이 핑 돌면 충분히 입안을 채운 거였다. 자기 입에 빵 재갈 물리는 고문을 아침마다 반복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의 아침 식사이기 때문이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닿지 않을 만큼 잔뜩 빵을 밀어 넣어도,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다물면 다물어지게 돼 있었다. 닫힌 입술과 벌어진 이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다. 커피가 들어갈 자리였다. 동전 두께만큼 벌린 입술 사이로 조심스럽게 커피를 흘려 넣었다. 커피가 입 속의 메마른 통밀빵을 적셨다. 한 모금 더 흘려 넣었다. 빵은 물에 젖는 모래성처럼 흐무러졌다. 한 모금 더 커피를 머금으면 통밀빵의 퍽퍽하고 깔깔했던 글루텐 분자구조가 와해되어 금세 질척해지며 목구멍으로 빨려들었다. 고문이 만끽으로 변하는 환희의 순간을 즐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우악스런 섭취가 오의 평소 아침 식사 습관은 아니었다. 빵과 드립커피로 아침을 해결하는 방식은 오래되었으나 눈에 핏발이 서도록 꾸역꾸역 통밀빵을 구강 가득 밀어 넣고 커피로 녹여 삼키는 짓은 이 작은 섬 올도에 와서 생긴 버릇이었다. 평소에도 그는 통밀빵과 드립커피로 아침을 시작했다. 바삭하게 구운 통밀토스트에 리코타나 크림치즈를 펴 바르고 슬라이스 사과와 양파, 아보카도와 구운 베이컨 따위를 얹어 천천히 씹어 먹었다. 가끔은 생연어와 하몽을 곁들였다. 이곳 올도에서처럼 치즈만 발라 입안에 미친 듯이 처넣고 커피로 녹여 꿀꺽 삼키는 지저분한 방식이 아니었다. 물론 올도에 올 때 주재료인 통밀빵과 커피 이외의 재료까지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가려 먹는 통밀빵과 치즈스프레드와 커피만 우선 두 달 치 챙기고 나머지 것들은 현지에서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빵을 그런 식으로 밀어 넣어 삼키는 이유가 되지 못했다. 올도에 와서 생긴 버릇이라기보다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 8년 전의 기억에 지배당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마흔을 막 넘기던 해 그는 올도에 왔었고, 지금처럼 평소와는 다른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이 다시 그를 기이한 식사로 이끌었다고 할 수 없었다. 빵을 목젖까지 밀어 넣고 눈물을 질금거리고 나서야 8년 전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으니까. 먹는 게 기억보다 먼저였다. 어쨌든 올도가 처음이 아닌 두 번째였고, 두 번 다 아침을 그 모양으로 먹게 되었으니 올도에 와서 생긴 버릇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시 토스트 두 장을 한입에 연속해 밀어 넣으면서 그는 처음 이 섬에 왔던 이유가 뭐였던가 생각했다. 그러다가 금방 생각을 지우고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섬에 오고는 싶었으나, 오고 싶다는 것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첫 방문 때도 그랬겠거니 싶자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 섬에 오고 싶었는지 모르고, 어째서 기억

  • 2023-01-01
Today’s rain

Today’s rain 강영숙 1. 그날 지수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뚝섬역 근처에 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브랜딩 개념도를 그리는 데만 세 달이 걸렸다. 최근엔 운동도 독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벌써 8월이었다. 오늘 회의로 중대한 고비는 넘겼고 형식적인 최종 발표만 남겨 두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지수는 대표의 호출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클라이언트와 셋이서 잠깐 마무리 대화를 나누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클라이언트를 배웅했다. 그리고 대표와 함께 그의 방으로 돌아가 얘기를 좀 더 나눴다. 그는 클라이언트가 브랜딩 콘셉트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고, 무엇보다 지수를 신뢰한다고 했다. 일이 많아져 힘들어서 그런지 오늘 회의에서 보니 좀 마른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원래 대표들은 이렇게 친절하지 않은데, 지수는 약간 당황했다. 원래 인상이 좋지만 좋은 옷을 입으면 더 보기 좋을 거라며 대표가 개인 카드를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수는 대표 방에서 나올 때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지나치게 많이 숙여서 깜짝 놀랐다. 퇴근 후 연무장길로 나가 팀원들과 같이 오랜만에 와인을 마셨다. 술이 오르기도 했고 피자를 많이 먹어서인지 스커트 허리춤이 터질 듯 배가 불렀다. 지수는 화장실로 가 온몸을 꽉 조이고 있는 올인원의 버튼을 연 채 변기 위에 앉아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강한 탄성의 우레탄 속옷으로 눌렸던 아랫배가 사정없이 튀어나왔다. 어떤 노력을 해도 뱃살은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고 이토록 특별한 하루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였다. 2차로 간 칵테일 바에서는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져 서울숲을 왕복으로 뛰어갔다 와도 기운이 남아돌 듯 쌩쌩했다. 마스크를 벗은 팀원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최영교 팀장이 평소처럼 지수를 챙겼다. 지수는 건너편에 앉은 대리들 두 명이 하는 얘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손석구 진짜 연기 쩔지 않아요? 이민기, 아니 염창희는 어떻고. 난 그 인간만 나오면 나를 보는 거 같아서 눈물이 나.” 그때 민 대리가 지수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말을 붙였다. “부장님도 보셨어요, 나의 해방일지?” 지수는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아니, 그걸 어떻게 봐, 지난 두 달간 프로젝트 하느라 정신없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난봄 지수도 그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드라마는 대부분 다음 회차가 기대되지만, 인물들 각자가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해방에 이를지, 다음 회차가 기대되는 흥미로운 드라마였다. “난 저 드라마 못 보겠던데, 당신은 보네!” 남편 현종이 바나나킥을 먹으며 말했었다. 지수는 앞에 앉은 민 대리에게 물었다. “민 대리는 어때? 해방일지는 재미있게 보는 사람, 답답해서 안 보는 사람 둘로 딱 나뉜다던데.” 민 대리가 반색하며 몸을 틀어 뭔가 말하려는 순간, 지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최 팀장이 옆으로 더 바싹 붙어 앉

  • 2023-01-01
골프 채널을 보는 남자

골프 채널을 보는 남자 정한아 푸른 하늘 아래 초록색 풀밭이 펼쳐져 있네 풀밭은 평화롭고 지저귀는 새 소리 경쾌하지 저 드넓은 풀밭에서 저 멋진 막대기로 조 앙큼한 하얀 공을 좀 때려 봤으면! 남자는 하염없이 풀밭을 보네 저 드넓은 풀밭에서 조 앙큼한 하얀 공을 좀 잡아 봤으면! 고양이도 함께 보네 나뭇잎은 서정적으로 바람에 몸을 뒤집고 사람들은 떨어진 공을 찾아 헤매이는데 불현듯 까아 까까까 까아 까아마귀 울면 사나운 바람 퍼붓는 소나기 천둥 번개가, 이야, 하늘의 불이란 불은 죄다 켰다 껐다 (큰 나무 밑은 위험해요! 어서 대피하세요!) 쇠막대기는 전도율이 높고 아, 어떡하지 내 공 아직 못 찾았는데 깊은 물에 빠진 공 악어는 공을 삼키고 연못은 악어를 삼키고 공 찾으러 간 사람을 삼키고 아, 어떡하지 연못이 삼킨 악어가 삼킨 내 공에 담긴 딱딱한 소원 고양이는 뽀글거리는 물거품을 예의주시하는 중 비 갠 뒤 뭉게구름 빛나고 푸른 하늘 아래 초록색 풀밭이 펼쳐져 있네 평화로운 새 소리는 경쾌도 하지 남자는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에 가려 돈을 벌었네 드레스코드에 맞는 옷과 챙 달린 모자 때리기 좋은 막대기를 살 파격할인을 기다리면서 연못 바닥에 잠든 천 개의 딱딱한 꿈 소파가 삼킨 천 개의 시든 영혼

  • 정한아
  • 2023-01-01
우리

우리 오은 고래보다는 돌고래. 네가 말했고 나는 돌핀을 떠올렸다. 그럼 고래는 핀인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 말은 아직 속사정이었다. 사전을 펼쳐 너는 기역과 디귿을 오갔다. 자유자재로 플립 턴을 하는 수영 선수처럼, 물 위로 솟구치길 두려워하지 않는 돌고래처럼, 이상해. 고래1은 동물인데 돌고래1은 구들장 밑으로 난 길이야. 네가 말했고 나는 돌 밑에서 웅성대는 물소리를 들었다. 그 길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입을 다물고 있어서 바다는 아직 잠잠했다. 올려다보면 높이지만 들여다보면 깊이인 것처럼, 고래와 돌고래와 방고래가 한곳에 있었다. 거품과 물줄이 불길과 연기가 흘러 나가고 새어 나가고 있었다. 소문처럼 비밀인 듯 고래들이 싸울 때 어떤 등도 터지지 않았다.

  • 2023-01-01
사람은 이상해

사람은 이상해 이훤 사람은 이상해 사람을 믿게 하지 사람은 이상해 들고 있던 사람을 떨어뜨리지 사람은 이상해 그게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 사람은 이상해 아침에는 누구든 덜 미워한다 사람은 이상해 기분이 망가지는 데 몇 초가 안 걸리지 사람은 이상해 일어나면 거울을 본다 머리 만지고 자기 얼굴 보는 데 그 많은 시간을 쓴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앞으로만 보면서 사람은 이상해 필요하면 곁눈을 만든다 사람은 이상해 바닥을 보며 걷는다 사람은 이상해 부딪혔는데 왜 사과를 안 해? 사람은 이상해 삼 초 안 지났다며 떨어뜨린 걸 주워 먹는다 사람은 이상해 노숙자를 멀찌감치 비켜 가지 사람은 이상해 그 많은 생일을 기억한다 사람은 이상해 너무 많은 생일을 까먹는다 사람은 이상해 촛농 떨어질 걸 알면서 초에 불을 붙이지 사람은 이상해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축하 노래를 어떻게 다 외우지? 사람은 이상해 파티가 성대할수록 밤이 무거워진다 사람은 이상해 편애를 한다 자신이 공평하다고 믿으면서 사람은 이상해 아니, 사랑에 대해 이렇게 자주 말하는 생명체를 보았어? 사람은 이상해 매일 죄 지으면서 이웃을 탓한다 사람은 이상해 용서를 자격이라고 생각한다 끔찍한 말을 뱉은 목구멍에 음식을 넣지 사람은 이상해 화해를 한다 사람은 이상해 우정을 한다 사람은 이상해 흉내를 낸다 흉내 내다 보면 믿게 되기도 한다 사람은 이상해 몸이 아프면 눈이 많아진다 사람은 이상해 모르는 자신을 발명한다 돌려받지 못할 때까지 빌려준다 그리고 도둑맞는다 사람은 이상해 쉽게 확신하지 누군가는 그게 갸륵하다고 누군가는 불쌍하다고 한다 사람은 이상해 빚을 약속처럼 쓴다 약속을 빚처럼 쓴다 사람은 이상해 자신이 만든 돈보다 자주 작아진다 사람은 이상해 아주 비싼 물건을 만들지 그걸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또 빌린다 그걸 샀기 때문에 그날 누군가는 밥을 먹는다 사람은 이상해 관을 짜고 바다를 잇고 사람과 사람 사이 터널을 짓는다 그런 일은 중요하지 사람은 이상해 타인을 드나들다 자신에게 도착한다 사람은 이상해 이 정도면 잘살았지 생각한다 사람은 이상해 잘사는 게 뭔데? 사람은 이상해 질문한다 사람은 이상해 그만한다 사람은 이상해 다시 한다 사람은 이상해 정말 이상해

  • 장석주
  • 2023-01-01
[책방곡곡] 순천 책방심다(제3회)

[책방곡곡] 순천 책방심다(제3회) 사회, 원고정리 : 오월 참여 : 한솔, 파인애플, 청포도사탕, 현책 : 김화진, 『나주에 대하여』(문학동네, 2022) 오월 : 한 달 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번 달에 함께 읽은 책은 2022년 10월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 김화진 작가님의 『나주에 대하여』입니다. 김화진 작가님은 현직 민음사 편집자이기도 한데요.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나주에 대하여⌟ 단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다고 해요. 총 8개의 단편이 담겨 있는 소설집입니다. 각 단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눠 볼게요. 첫 번째 단편은 ⌜새 이야기⌟입니다. 만화를 그리는 진아가 빈티지 옷 가게에서 만난 천희를 좋아하게 되는데요. 도쿄에 옷가게를 열기 위해 떠나는 천희는 진아에게 파 화분을 선물합니다. 그런데 그 파가 진아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고, 진아는 파에게 사실은 천희가 청둥오리라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요? 청포도사탕 : 판타지적 요소와 새가 등장해서 그런지 지난달 함께 읽은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의 단편 중 하나인 ⌜이상한 녹정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그 이야기에서는 비둘기가 말을 했잖아요. 파인애플 : 갑자기 파가 말을 하고 인간으로 변한 청둥오리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조금 당황하긴 했어요. 아, 그리고 ⌜새 이야기⌟가 《문장 웹진》에 실린 이야기더라고요. 반가웠어요. 청포도사탕 : 그런데 그런 점들이 재밌어서 첫 이야기부터 몰입해서 금방 읽을 수 있었어요. 한솔 : 약간 로맨스 소설 느낌도 들었어요. 중간중간 황치열의 성인식 영상을 돌려보는 진아의 모습이라든지 재밌는 이야기도 있어서 가볍게 읽을 수 있었어요. 웹툰을 글로 풀어쓴 느낌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를 제일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월 : 기사에서 읽었는데 작가님이 일부러 이 책의 처음과 끝에 판타지적 소재를 넣은 단편을 배치하셨다고 해요. 민음사 TV 유튜브 채널에 본인이 나오기도 하고 작가가 아닌 모습으로 본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읽을 때 픽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작가 본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이 이야기는 픽션이라고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 환상을 넣으셨다고 하더라고요. 한솔 : 인간 사이의 관계나 스스로의 내면에 대한 묘사를 잘하시는 것 같아요. 33쪽에 파가 이렇게 말해요. “나는 천희가 남긴 마음이야. 너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 사람들은 그걸 미련이라고 부르지.” 뭔가 미련을 물질적인 걸로 나타낸 것 같아서 좋았고요. 26쪽에 진아가 웹툰에 달린 댓글을 본 후에 “그런 말들이 진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체가 좀 이상했을 뿐이다. 애정어리고 조심스러운 말에 사람이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 그것이 놀라웠다.”라고 해요. 이런 식으로 뭔가 한 사람의 내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파인애플 : 정세랑 작가님의 『지구에서 한아뿐』이 생각났어요. 외계

  • 2023-01-01
[달면 삼키고 쓰면 글이다] 프롤로그

작가소개 / 서재진 2017년도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당선. 명지대학교 졸업 후 동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작가소개 / 정성우 2019 《무등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 《문학의 오늘》 2019 가을호 단편소설 「천막」 수록. 글ego 대표 강사.

  • 2023-01-01
질경이 밟기

질경이 밟기 최정 내가 오가는 흙길은 질경이가 점령했지 아무리 밟혀도 끄떡없지 밟히기 위해 태어났나 봐 질겨서 질경이가 된 게 틀림없어 참 신기하지? 질경이는 밟혀야 살아 밟히는 게 더 속이 편한 걸까 남을 밟는 건 영혼 한 귀퉁이를 도려내는 일 입시학원 팀장 시절 인기 없던 동료 강사를 내 손으로 해고하고 난 후부터였을까 된통 병이 났지 견딜 만하다고 믿었던 삶이 무너졌어 내가 나를 속이고 살았나 봐 질경이를 밟고 걸을 때마다 왜 밟히고 사는지 미안하고 딱해지곤 해 근데 알고 있니? 질경이는 원래 이름이 길경이래 길 위에 사는 풀이라 길경이 잡아먹을 듯 키재기하며 경쟁하는 풀들을 피해 팍팍한 길바닥 위로 나온 거지 길 위는 블루오션이거든 도시를 피해 들어온 작은 골짜기가 내겐 블루오션이야 돌밭을 일궈야 먹고사는 흙바닥 생이 내겐 숨구멍이지 어찌나 잎을 질기게 단련시켰는지 밟혀서 찢긴 구멍 한두 개쯤은 별것도 아니지 밟혀야 사는 생도 있어 아무리 밟혀도 죽지 않는 생이 있어

  • 최정
  • 2023-01-01
우리 소설의 자리 (1)

[비평연재]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우리 소설의 자리 (1) 백지은 인물과 주체와 개인 편혜영의 「포도밭 묘지」는 “성실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최악의 노동자가 되기 십상”1)인 이 사회의 어느 자리에도 안착하기 어려운 네 인물을 보여준 소설이다. 같은 상업고등학교를 다닌 한오, 수영, 윤주, ‘나’,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34) 여상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한 “성적, 자격증, 용모, 세 가지 조건”(15)을 맞추며 지나온 고된 시간 동안 네 친구는 저마다 다른 전략과 추진력으로 이 사회에 적응했겠으나, 가계 형편이나 부모의 교육관 등에서 비롯된 선택을 제 몫의 미래로 여겼던 이들은 이후의 삶에서도 “모두 비슷한 시간을 보”(27)내며 고생한 듯하다. 이 소설의 이야기 전달은 화자인 ‘나’가 맡고 있지만, 이 사회에서 ‘얻어터지기 전’까지 준비한 전략과 추진력을 다 상실해 버린 네 친구는 동등하게 이 소설의 주연(主演)을 맡는다. 매사에 가장 열렬히 진심과 최선을 다해 성실했던 ‘한오’의 비극적 죽음이 이 소설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해도, “시커멓게 죽은 가지가 비석처럼 꽂힌 파이프 지지대를 감싸 안고 있”(33)는 ‘포도밭 묘지’에 이르기까지 이 서사의 주체는 네 친구 중 누구 하나일 수 없다. 소설의 등장인물, 주인공, 주연, 화자 등의 역할이랄까, 그런 것을 서사의 ‘주체(성)’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서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네 인물이 모두, 동시에, 각각 수행한 어떤 자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서사의 주체란 무엇을 말하는가. 전통적으로 소설은 고전적 휴머니즘이 정초한 ‘인간’에 대한 탐구를 기치로, 어떤 사건, 어떤 장소, 어떤 (비)인간이 등장하든 결국 ‘인간’의 이야기 - 이때 ‘인간’이란 마치 ‘국민’이나 ‘시민’처럼 추상화된 개념일 것이다 – 로 이해되어 왔다. 근대소설의 인간-주체는, 『소설의 이론』(루카치)의 ‘문제적 개인’이든 『소설의 발생』(이안 와트)의 ‘자본주의적 시민’이든 『근대의 서사시』(모레티)의 ‘교양 주체’든 대개 ‘한 사람’으로서 개인의 고유성을 띤 인물로 상정되었다. 이언 와트가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근대소설의 확립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듯, 근대의 ‘개인’ 탐구와 ‘소설’의

  • 백지은
  • 2023-01-01
목욕탕의 굴뚝이 있는 풍경

목욕탕의 굴뚝이 있는 풍경 신해욱 목욕탕의 굴뚝은 높았다. 여긴 것 같아. 하나가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언젠가 말씀이 있었어. 언젠가 우리는 들었는데. 전해야 했는데. 하나는 떠올렸다.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어서. 독을 깼어. 우리가? 응. 우리가. 콸콸콸. 쏟아졌어. 콸콸콸. 뜨끈했지. 콸콸콸. 어느새 탕에 들어. 마스크를 벗었어. 몸을 녹였어. 요구르트를 마셨고. 때를 불렸지. 때를 밀었어. 시원했어? 응. 시원했어. 우리는 비로소. 우리는 다 같이 등을 돌리고. 매끈한 등에서 등으로. 손가락을 따라 손가락으로. 하나는 회상에 잠겼다. 등에 말씀을 옮겼던 것 같아. 필사적으로. 피상적으로. 등에서 등으로. 돌고 돌아 요원해질 때까지. 식상해질 때까지. 웃음이 터질 때까지. 손 쓸 수 없는 훼손에 이를 때까지. 현장은 어지러웠다. 목욕탕의 벽돌. 목욕탕의 의자. 나뒹구는 의자의 구멍. 구멍과 비누. 깨진 타일. 구멍과 열쇠. 눈이 내리고 있었다. 굴뚝은 철거가 어렵대. 우리는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등이 가려웠다. 지워버리자. 응. 지워버리자. 우리의 입김이 모락모락 눈발에 섞였다.

  • 신해욱
  • 202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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