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호
- 작성일 2023-02-01
- 댓글수 0
기획의 말
2023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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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월호 살펴보기
아마도 문정희 그래도 라는 섬에 살고 있는 시인 이 겨울, 안녕하신지? 아마도 나는 아직 아마도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얼음장 아래 속울음 바스락거리는 낙엽들, 땅 위를 구르다가 낭떠러지 아래 처박힌 맨발들 계곡에서 겨우 일어서는 햇살들 사이 지난겨울 내 등에 꽂힌 칼 날카로운 칼 꽂힌 그대로 나는 아직 아마도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여기가 어디쯤일까? 두리번거리며 긴 터널 끝, 그 끝에 선물처럼 문이 하나 있을까 알 수 없어 두려운 우리는 더 깊이 사랑할 수 없을까 그럴지도 몰라 아닐지도 몰라 아마도 나는 지금 아마도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아
- 문정희
- 2023-02-28
불가능한 얼굴 설하한 언젠가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두렵고 당혹스러워 우는 얼굴을 그려 너에게 주었다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너는 그 컵을 간직했지 플라스틱은 썩는 데 몇 백 년이 걸리고 우리가 죽었을 때 세상에 남긴 것들을 우리들의 아이라고 한다면 그 플라스틱 컵도 우리의 아이일 텐데 새를 떠나보내고 각자가 서로의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죽고 몇 백 년 동안 플라스틱 컵은 혼자 울게 되겠지 아니, 플라스틱 컵은 분자화합물 덩어리일 뿐이므로 그것은 슬퍼하거나 행복해하지도 않으며 매립지의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들판에 버려진 시체처럼 조용히 썩어 갈 뿐이다 그럼에도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그 플라스틱 컵이 정말로 울게 되는 일 아이들이 자신의 인형에게서 인형의 감정을 발명해 내듯 영혼을 직조하는 일 물질이 물질을 넘어서듯 우리가 이미 죽은 이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에게 영혼을 나누어 받고 우리가 우리를 초과하고 하지만 테오, 천국에서 만나자1) 테오는 아마도 친구의 아버지에게 유언을 전해 주며 친구는 마지막까지 정말 용감했다고 말했을 것이고 시신 없는 묘 앞에서 그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가족과 조국을 사랑했다고 추도사를 했겠지 장례식에 참여한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그 옆 사람이 눈물 흘리는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그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었겠지 그때 그들에게 어떤 천국이 있고 그들이 그들을 넘어서는데 그 천국에는 병약자가 없고 폴란드인이 없고 들판에선 시신이 이름 없이 썩어 가고 어떤 인형은 인형이어서 칼에 찔리고 산 채로 불태워진다 사랑하는 일의 폭력 사랑하지 않는 일의 폭력 나는 우리가 천국에서 새와 다시 만날 거라 믿는데 우리가 우리를 초과해서 다시 우리인 일 얼굴이 얼굴을 가린다 다 커버린 어떤 아이들은 인형을 내다버린다 사람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얼굴에 이목구비를 그려 넣지 못했는데 이미 얼굴인 얼굴 다시 다시 이해하기 우리가 인형이 되어 얼굴이 되어 1) 하인리히 엘러Heinrich Ehrler의 유언. 나치 독일의 전투기 조종사.
- 설하한
- 2023-02-28
벌매를 기다리며 문동만 말벌들이 꿀벌들을 잡아먹을 때 꿀벌의 약한 침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다 유일한 저항법은 꿀벌 수십 마리가 말벌 한 마리를 에워싸는 것뿐 낱낱의 체열을 모아 열사 시키는 것뿐 제 살들을 내주며 포식자를 덮어버리는 것뿐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 없을 때 보다보다 못 볼 것들이 많을 때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벌을 주고 있을 때 벌을 벌주는 벌매가 말벌들의 유충까지 다 발라 먹는 벌매가 지친 꿀벌들을 구하러 아니, 오래된 유업 같은 자신의 일을 하러 벌매가 날아오는 날이 있다고 한다 어떤 독침으로도 뚫지 못하는 깃털을 치며 날아오르는 날이 있다고 한다
- 문동만
- 2023-02-28
비어 있는 방 유선혜 고대인들은 영혼이 없다고 말하면 재판장에 세워졌다 영혼은 텅 비어 있는 직사각형 무딘 가위에 잘려 당신의 손을 베이게 하지 않는 벽지 공간이 되어 당신의 사생활을 가만히 바라보는 책장 지나가는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고 당신이 오래 머물 듯이 기웃거리는 곳 영혼에는 불가능한 것들이 머문다 둥근 삼각형, 뜨다 만 곰 인형, 혹은 추리소설 속 괴도 뤼팽 당신이 네모라고 부르면 원이 되고 직선이라고 부르면 점이 되는 방에 당신은 영혼을 임대하고 어느새 침실이 생기고 춥다고 말하면 보일러가 켜지고 샤워를 하면 온수가 나오고 만두를 사오면 전자레인지가 나타나는 당신이 켠 구석의 스탠드에서 잠시 낮은 채도가 번진다 가능하다고 말하면 세계가 생기는 이제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현대인은 지하철역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으로 감싸십니다 임대는 끝의 개념을 내포한다 당신은 온통 짐을 빼고 다시 영혼은 비어 있는 방이고 그 옆에는 펄럭이는 임대 문의 현수막이
- 유선혜
- 2023-02-28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을 좋아해야지 김상혁 집에서 쥐 키우는 친구랑, 우리 만난 카페에 강아지 데려온 친구, 그리고 아이 키우는 내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아내도 애인도 없이 고양이랑 살면서 그냥 늙은 엄마 모시는 친구, 이렇게 넷이 모이면 사랑하는 것이 다들 다르다네. 쥐 친구 마음은 내가 잘 알지, 길어야 고작 2년 사는데 사랑까지야 뭐, 남들 앞에서 그리 말해도 집으로 돌아가면 케이지 자꾸 들여다보면서, 죽지 말자 우리 아가, 이렇게 작은 애기인데, 한다는 거. 강아지 친구는 보통 개 키우는 사람들처럼, 개나 애나 키우면 똑같아, 정도 얘기 입에 달고 사는 평범하게 공격적이고, 그래서 꽤나 당당하고, 그러다 친구 많이 모이는 자리에 나가서는 문득 조마조마해지는 착한 사람이라네. 엄마랑 사는 친구는, 고양이는 얘기를 안 하니 잘 모르겠고, 그냥 엄마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애라서 쥐니 결혼이니 다 관심 없는 편이지. 노모랑 같이 밥 먹고 산책하고 담배 사다 드리고, 봐서 엄마 잠들면 방에 들어가 창문 닫아 주고 티브이 소리 낮추고 하는 정도로 만족한다지. 나는 뭐랄까,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을 더 좋아해야지, 하고 편협하게 살고는 있는데 이런 생각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는 거. 나도 내 개가 있고, 내 개를 좋아하고, 꼭 나만, 나만 바라보는 그 노견의 눈빛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속이 아프기는 한데 이럴 수가 세상에 시간이 없으니 가난할 마음도 없구나, 일 끝내고 집에 가면 내 앞에 앉은 생명에게 말한다네. 혼자 그럭저럭 놀고 있는 시무룩한 아이에게, 그리고 이제는 푹 꺼진 솜뭉치같이 순해진 개에게, 다들, 우리는 왜 하필 우리 같은 모습으로 만났을까, 한다네.
- 2023-02-28
시간에 대하여 유혜빈 시간에 대하여 너는 선택해야 한다 너는 안다, 눈앞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걸, 혹 운이 좋다면 차츰차츰 사라지게 될 수 있다는 걸 다 나으면 우리 공원에 가 산책을 하자, 다 나으면 가고 싶어 했던 영화관에를 가자, 그렇게 나중으로 미뤘던 것들은 결코 다시 할 수 없게 된다는 걸 너는 이미 뼈에 새겨 알고 있다 그러나 한정된 시간과 수많은 선택과 머뭇거림과 사용함과 그 뒤섞임, 뼈에 새겨진 실수들을 혼란이라는 두 글자로, 나는 그렇게밖에 읽어낼 수 없는 것을 어디 어디에 닻을 내리고 어디 어디의 풍경을 지나쳐 누가 너의 손을 흔쾌히 잡아 연도 없이 잡아끌어 이윽고 네가 어디로 이끌리는지 당도한 뒤에도 모르겠다만, 이름 모를 언덕에 올라 지나온 선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영혼은 알고 있다 여덟 글자를 재갈 물려주었다던 얼굴 모를 조상이 네 척추에 새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기어이 놓고 온 것들의 이름을 기리며 멀리 있는 시간의 때에 용서를 맡겨 놓을게 부디 웃으며 나를 맞아 주겠냐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지 않기로 선택한다 내가 만들지 않은 영화와 내가 출연되지 않는 영화 속에서 널리 알려진 대사들을 비켜 걸으며 카메라 워킹의 라인을 교묘히 탈선해 걸으며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나만을 위한 영화처럼 (그래서 우리는 그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을) 귀를 기울이면 나의 목소리가 문득 들려오는 음악 속에서 그래, 몸을 타고 흐르는 시간에 대하여 툭 건드리면 촤르르 펼쳐지는, 펼쳐지다 멈춰버리는, 조금의 충격에, 다시 촤르르 멀어지는 * 윤상의 노래, My cinema paradise
- 유혜빈
- 2023-02-28
추운 사람 조용미 참 추운 겨울이야 이렇게 추운 적이 있었나 집이 추운 사람은 어딜 가나 추워 넓은 카페의 푹신하고 하얀 의자에 앉아 카페라떼를 마신다 앉은 자리의 벽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온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집에서 추운 사람은 나와도 춥고 마음이 시린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냥 뜨거운 것이 되어 화르륵 타버릴까 넘어가 버릴까 두꺼운 목화솜 이불을 덮어도 지그시 눌러 주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까 동해도 남해도 춥겠지 그냥 이 자리에서 견디자 조금 비겁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자 강은 얼어서 하얗게 새털구름처럼 눈이 깔려 있네 하지 않았던 말이 나의 진심에 더 가까웠다는 걸, 하지 못할 말을 연습해 보았다는 걸 너는 결코 모를 테지 참 추운 겨울이야 다음 겨울은 더 춥겠지, 하지 못할 말들은 눈이 되어 다정하게도 하얗게 하얗게 쏟아지겠지
- 조용미
- 2023-02-28
서울 그리고 겨울 이수명 어디서 주워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돌 하나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빛을 들이고 오후 내내 집에 있는 날은 돌을 센다.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 둘 셋 넷, 다시 처음부터 하나 둘 셋 넷, 쓰지 않는 형형색색의 펜들이 펜 통에 가득 꽂혀 있다. 잉크가 말라 나오지 않는 펜을 쓰레기통에 던진다. 하나 둘 셋, 그러다 네 번째 펜은 쓰레기통 옆으로 떨어진다. 통 안으로 떨어져도 밖으로 떨어져도 던지기는 계속된다. 빛이 더 퍼져 나가면 펜들이 자꾸 통 밖으로 날아가 떨어지면 집이 조금씩 부서질 것이다. 집은 실제로 움직이지도 않고 부서진다. 밖에는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 대낮이 한 번에 으스러진 듯이 고양이가 울고 있다. 너는 돌 같은 것이 몸속에 생겼다고 말한다. 돌이 몸속을 돌고 있다고
- 이수명
- 2023-02-28
인생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의 인생 박판식 인생은 우리를 씻어 주고 있다 외롭거나 괴로울 때 우리는 허물을 벗고 생명 그 자체로 돌아간다 어떤 인생이 지금 당신을 건져 올리고 당신을 누르는지 궁금하다 인생은 꼬리가 있고 가시가 있고 비늘이 있다 돌로 눌러 놓으면 숨을 헐떡이며 죽은 시늉을 한다 대문 앞에 버려지는 우편물과 죽어가는 전화번호 12각형의 소음으로 시간은 인생을 죽이고 가끔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저쪽 세상을 향하여 두 손을 합장하고 기적은 소량생산이라 아직 희소가치가 있다 인생은 기적적이다 깨물면 사과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비린내가 후추 냄새에 섞여 하늘에서 쏟아진다 나보다 10센티미터쯤 큰 어린 아들이 예수님의 석고상처럼 왼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과분한 은혜와도 같은 사랑이 내 인생의 차가운 그릇에 넘쳐나고 있다
- 박판식
- 2023-02-28
눈보라 정다연 사람을 죽인 것이니. 네가 물었다. 귤이 쌓인 식탁에, 부드러운 손으로는 어중간한 이빨로는 끊어지지 않는 질기고 질긴 불길함에 나를 혼자 둔 이유가 정말 그것 때문이었니. 네가 묻는다. 정말 찔렀던 것이니. 우는 나를 두고 너와 함께 살고 싶은 나를 두고 밤길을 나선 이유가 무엇이니. 나의 곁이 아니라 어떤 이의 마지막 장면이 되고 싶었던 것이니. 잠든 나의 등 뒤에서 어떤 살의를 남몰래 키우고 있던 것이니. 계획과 계획. 찌르고 찌르기. 어떤 변명을 할 거니. 고요한 눈보라. 악몽 속에서 네가 잠꼬대한다. 깨울 수 없다.
- 정다연
- 2023-02-28
변상벽의 고양이 눈을 빌려 손택수 공원 덤불숲이 가늘게 떤다 방금 전까지 내놓고 흔들리다가 일순 쭈뼛해진 풀잎들, 누구인가, 그만 튀어오를 법도 한데 등을 잔뜩 부풀린 채 어서 지나가 주길 바라며 숨을 죽이고 있다 인기척을 감지한 숲이 뚝. 떨림을 멈춘다 내심 조마조마한 느낌, 얼음 땡 놀이라도 해보련 거리를 벌렸다가, 다물어 본다 소소소 소름이 돋았다가 긴장을 푸는 풀잎을 내 머리털인 양 세웠다 눕혀 본다 문득 사람들이 버리고 간 반려 토끼의 행적이 궁금해 온다 미진이라도 온 듯 바스락거리는 낙엽 사이로 고개를 내민 두더지 생각도 난다 지난 가을 본 배암이 똬리를 틀었다면 어쩌나 코로나 역병이 도는 동안 인기척 뜸해진 숲길을 돌아다니던 삵은 어디로 사라졌을지 나는 멀찌감치 물러서기로 한다 너무 명백해지는 일은 없도록, 누군지 모를 그와 이 관계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숲의 뜻이 아닌가도 싶어서
- 손택수
- 2023-02-28
지는 것은 노을의 일 김안녕 허기진 저녁이면 솥단지 선짓국이 먼저 끓는다 밥물 끓듯 강물 뒤척이고 귀 어두운 여섯 식구 대신 들개 우는 소리 서녘 하늘로 퍼져 가는 요령소리 슬픈 것들은 모르고 연대한다
- 2023-02-28
비가 온 다음날 조용우 홍콩야자 화분이 사라졌다 여자는 큰길에서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나래옷수선’ 앞에 모아 둔 화분 중 하나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본다 가게 문을 열고 안팎을 두 번 둘러본다 홍콩야자 화분이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는 밤에 누군가 ‘나래옷수선’ 앞을 지나가다 홍콩야자를 보고는 멈춰 서는 모습을 여자는 상상한다 비가 오는 밤에 그는 그것을 가만 바라본다 화분을 한번 들어 보니 무게가 꽤 나간다 그러나 집까지 들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비가 오는 밤에 그는 몸을 반쯤 굽힌 자세로 화분을 들고 천천히 큰길을 간다 비가 오는 밤에 길을 가다 서 있는다 엉거주춤하다 비가 오는 밤에 그는 홍콩야자 화분을 들고 길을 간다 여자는 이면지를 찾아 파란 마카로 이런 문장을 적어 유리창에 붙인다; 화분 가져가지 마세요. 모두 소중한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비가 온 다음날에 저 밝은 화분들
- 조용우
- 2023-02-28
9201 이민하 얘들아, 집에 가자 이제 곧 폭설이 올 텐데 많은 것들이 쏟아지고 더 많은 것들이 묻힐 텐데 희끗희끗 철근이 드러나는 나무들과 층층이 휘어지는 나뭇가지들 잠들 수 없는 창문들이 와르르 쏟아지듯 가을이 무너졌는데 집에는 불볕처럼 끓고 있는 미역국이 있고 냉장고에는 화내서 미안하다는 쪽지가 있고 옷걸이에는 세탁소에서 막 돌아온 슈트 한 벌 귀가를 서두르는 종종걸음으로 거리의 눈은 우리의 눈을 지우고 어떤 날은 날씨 이야기만으로 하얗게 지새우겠지 몇 페이지의 밤이 찢어지고 끼워 맞출 수 없는 기억들 거리에 두고 온 건 우리였을까 내일의 약속을 취소하고 슬픔을 꾹꾹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 우리는 영원히 숨기고 싶은 비밀번호를 가졌구나
- 이민하
- 2023-02-28
자하문로, 이상과 윤동주. 자하문로 7길 한파가 들이닥친 12월 말, 우리는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만나 서촌 거리를 걸었다. 서촌은 편안한 공간이다. 배고픈 작가들이 한 끼 때울 수 있는 밥집과 그들이 글을 쓸 법한 카페가 도처에 있고, 조금만 빠지면 바로 누군가의 생활공간인 주택과 빌라가 나온다. 거주지에 밀접한 상권이나 규모가 거대하거나 화려하진 않다. 그 소박한 맛에 사람들은 서촌을 찾는 것이리라. 자하문로 7길. 우리는 고즈넉한 오르막길에서 두 시인의 흔적을 줍고자 했다. 이상과 윤동주. 이상의 집을 둘러보고 윤동주가 하숙하던 집 문을 두드린 뒤 윤동주 문학관에 죽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로 일정을 짰다. 아쉽게도 월요일인 당시에 윤동주 문학관은 휴무라 동선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집 샛길로 빠지지 않고 잘 직진하다 보면 이상의 집이 나온다. 그곳은 우리의 예상보다 작았다. 양편의 연립 절반 높이에 완만하게 얹힌 기와, 내부 조명을 아예 잡아먹어 버린 통유리 벽 선팅. 이상의 집은 폐업한 카페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무거운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상의 흔적이 가득한 공간이 나온다. 이상(李箱), 이상(理想). 조도가 낮은 조명이 따뜻하게 비치는 그 공간은 우리가 익히 들어 온 작가 이상의 이미지와 완전히 같진 않았으나 편안했다. 천재 작가 이상이 스물여섯에 요절했다는 사실은 많이들 알고 있으리라.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주가 남달랐다고 하고 고교 시절 졸업사진 속 여장을 한 모습을 보면 위트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상의 글을 읽을 때 드는 이해할 수 없는 느낌, 나아가 거기서 찾아오는 독특한 감상과 이상의 집은 퍽 다른 모습이었다.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대던 관리자가 밍기적밍기적 안내 방송을 틀었다. 이상이 김연필에게 양자로 오면서 약 20여 년을 살았던 공간으로 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곳 그가 살던 집의 홑창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집터도 여러 필지로 나뉘어 옛 모습은 잃어버렸지만 이상의 숨결이 남아 있는 이 공간은…… … 성우의 부드럽고 정중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둘로 나뉘어 주변을 둘러봤다. 다섯 평 정도 될 것 같은 안뜰을 디귿 자의 건물이 감싸고 있었다. 이상의 집은 과연, 이상(李箱)의 집보다는 이상(理想)의 집에 조금 더 가까웠다. 그 따스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당황했으나 나름대로 괜찮은 공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서촌 한복판에 기괴한 건물을 짓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상이라고 해서 꼭 기묘하고 튀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일지 모르겠다. 통유리에 접한 선반에는 이상의 책 표지나 내용 일부를 인쇄한 엽서가 펼쳐져 있었고, 천장을 떠받친 나무 기둥마다 이상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초상화, 흑백 사진, 그리고 친구인 화가 구본웅이 표현한 이상의 얼굴.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였다. 담배를 물고 아래쪽을 비스듬히 흘겨보는 사내. 왠지 여느 사진보다 구본웅의 그림이 더 입체적으
- 2023-02-01
[비평연재]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우리 소설의 자리 (2) 백지은 움직이는 신체의 표면 - 이번 생의 나는 웅덩이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금도 실망은 없었다. 언제나 바다일 수는 없는 법. 우리들에게 이 문장은 누구나 바다일 수는 없는 법이라는 문장과 똑같이 읽혔다. 우리들은 말하곤 했다. 누군가는 주전자에 담겨 끓여져야 하고 누군가는 오줌이 돼 악취를 풍겨야 한다고. 달리 말하자면 언젠가는 주전자에 담겨 끓여져야 하고 언젠가는 오줌이 돼 악취를 풍겨야 한다. 물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니 우리 물들에게 너라는 말은 지난 생의 나 혹은 다음 생의 나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1) 이렇게 시작하는 현호정의 「한 방울의 내가」는, ‘한 방울’로 탄생한 ‘나’가 거치는 물의 다사다난한 일생을 서사화한 소설이다. ‘메이’의 눈물로 태어난 나는 ‘한 방울의 몸’으로 굴러 떨어진 이후, 강물로, 오리알의 흰자로, 웅덩이로, 바다로, 구름으로, 몸을 바꾸며 변화하는 생을 이어 간다. 물방울은 빙글빙글 돌고, 찢기고, 끌려 들어가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쉬고 또 쉰다. 물방울(들)은 서로 뭉치고 나뉘고 커지고 작아지고 삼키고 삼켜진다. ‘동화의 춤’이라고도 불리는 이 과정에서 ‘나’는 오로지 ‘한 방울’의 신체이자 웅덩이, 바다, 구름 등의 거대한 물(방울들)로의 전환을 겪는 신체로 존속한다. 메이의 눈물로 태어났으니 언제까지나 메이의 눈물이고 싶다는 생각, ‘온’이라 불리는 그 기억과 감정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그 “이기”(171)를 ‘나’는 잃지 않으나, 춤을 멈추지 않는 물의 운명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한 방울의 나는 이윽고 바다가 되고 구름이 된다. 그러나 ‘온’을 잃는 것이 아니다. 바다가 내가 되고 구름이 내가 되는 것이어서, 나의 ‘온’은 큰물에 잡아먹히거나 수증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처럼 출렁이고 구름처럼 고요해질 뿐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물의 일생, 물의 운명, 물의 세계에 빗대어진 서사적 주체는 ‘한 방울’의 신체로 표상되어 있다. ‘한 방울’ 안에서 ‘나’를 이끄는 온갖 동력이 가동된다. 한 방울의 힘, 한 방울의 입, 한 방울의 의지, 한 방울의 호기심, 한 방울의 충동, 한 방울의 부끄러움, 한 방울의 궁금증……. “한 방울의 몸 혹은 마음”(167)인 이것은, ‘나’를 다른 물과 구별되게 하는 ‘온’과 함께 탄생한 신체이자 ‘온&rsqu
- 백지은
- 2023-02-01
읽기 어려운 것 김상혁 어디 사는 누구네 개는 좋은데 시에서 만나는 개는 얼마나 싫은지 몰라 다들 개에 대해서 쓰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울어도 잘 듣지도 않고 함께 보자는 곳 가지도 않으면서 사람 좋은데 나도 아는데 시에 나오는 사람들 얼마나 지겨운지 다들 걷다가 이상한 말이나 툭툭 뱉고 마음이 구름 같네 결별이란 무엇이네 멋이나 부릴 줄 알지 가까운 가게 나가 껌 한 통 사오는 법이 없고 내가 뭐 먹는 모습 지켜볼 줄도 모르면서 사람이 말하면 나는 잘 듣는데 원래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말소리가 겹치지 않아 서로를 실망시킬까 봐 귀를 쫑긋 세우고 있거든 나 잠자는 거 진짜 좋은데 또 먹는 것에 미치지 특히 두부로 만든 건 몽땅 그런데 시는 진짜 꿈도 음식도 담지 않네 돈이 세상 좋다 아니면 싫다 그런 생각만 늘어놓다가 우리는 왜 슬퍼할 줄 모를까?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지 책처럼 지난 꿈들을 잘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꿈속에서 오백 원 동전이라도 줍는 날엔 얼마나 행복한지 사실 독서란 책 앞에서 조용한 기계처럼 행동하는 일이지 너가 말하면 나는 듣는다 내가 말할 때 너는 듣는다 그런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엄격함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지 나 오래 사는 거 나쁘지 않은데 시가 말하는 노인은 얼마나 쓸쓸한지 몰라 다들 죽음에 대해서 쓰고 별로 냄새 맡아 본 적도 없으면서 남이 늙는 거 죽는 거 딴사람 어릴 적 사진 들여다보듯 오래 마음도 못 쓰면서 그래도 요절하면 좋을 일 하나 없네 어쩐지 거북하던 그 새끼 알짱거리더니, 뒈져서 속이 다 시원하네, 젊어서 죽은 착한 사람 두고 이런 말 하는 나쁜 사람들 적지 않은데 시가 아주아주 못된 생각을 담는 법은 없거든 상징적인 개처럼 잠 속의 잠처럼 나나 당신이나 약간 반성하고 나서야 백지 앞에 앉거든
- 2023-02-01
마주 보지 않고 유선혜 말하자면, 섬과 섬 사이에도 땅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서 갈 수 있지만 계속 여기에 서 있고 파도가 바다 쪽으로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피가 거꾸로 흐르면 안 되잖아. 심장에 있는 판막은 혈액이 거꾸로 흐르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해준다. 우리는 정해진 방향으로만 서로를 바라보고 나는 우리의 언어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다는 하늘과 아무래도 다른 채도지만 흐름이 틈새를 서서히 실어 나른다. 섬의 공기는 고막을 뚫고 고요를 만들고. 나무 나무, 풀 풀, 돌 돌, 구멍이 나버린 숲 숲, 그리고 귀 귀 찰랑인다는 말을 고르고 싶지는 않은데 꽤 선명하게 보이는 걸 어떡해. 목소리가 섬과 섬을 가로막고 있잖아. 저기까지 걸어서 갈 수도 있다. 머리끝까지 젖고 말 테지만. 피는 전승되는 거잖아. 네가 노루의 엉덩이가 하얗다고 말하면 나도 이내 그 말을 알아듣고 노루의 엉덩이를 빤히 바라보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야. 근데 소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해안에는 부서진 조개껍데기와 유리가 흩어져 빛난다. 발이 유리 조각에 맞닿아도 상처가 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니니. 굳은살이 시간을 막아 줄 수도 있다. 사이에도 틈이 없을 수 있다. 빛이 제멋대로 번지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말이 없다.
- 유선혜
- 2023-02-01
토요일 아침의 로건 서유미 젤다와의 수업이 끝났다. 두 시간은 컵 안의 음료처럼 사라졌다. 그는 네 개의 컵들을 쟁반에 옮겼다. 그의 머그잔에는 아메리카노가 조금 남아있고 곡물이 들어간 라떼를 마신 젤다의 유리컵에는 긴 티스푼과 침전물과 얼룩이 남았다. 두 개의 물컵은 모두 비었다. 쟁반을 챙기며 그는 수업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노렸다. 수업이 시작됐을 때 젤다는 그를 보고 로건, 모자 쓴 건 처음 봐요, 라고 했다. 아침에 그는 이발할 때가 지나 덥수룩해진 머리에 골프 모자를 썼다. 이발을 못했어요. 그가 대답하자 젤다가 헤어 컷, 하며 표현을 영어로 바꾸어주었다. 그런 뒤에 새로 배울 표현이 정리된 프린트를 건넸고 스마트 패드에서 영화 속 장면을 재생시켰다. 사 년 가까이 수업하는 동안 그는 대체로 그 타이밍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카페인이 들어가야 머리가 돌아가며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 오전 중에 커피를 마셔야 밤잠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이가 되기도 했다. 영화에는 백발에 가까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자가 나왔다.1) 남자는 양복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앉아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막이 없는 화면을 보며 그는 남자가 하는 말을 절반 정도 알아들었고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는 동안 의미가 좀 더 이해되었다. 은퇴한 남자는 회사에 인턴으로 지원하며 ‘자신의 인생에 어딘가 빈 구석이 있고 그걸 채우고 싶을 따름’ 이라고 했다. 그가 남자의 말을 따라하자 젤다는 긴 티스푼으로 곡물 라떼를 저었다. 라떼를 꿀꺽꿀꺽 마시는 동안에도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갸웃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가 단어를 빠뜨리고 말하거나 발음이나 억양이 이상할 때는 바로 컵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럴 때 젤다의 입술 양옆에는 곡물 라떼의 흔적이 하얗게 남았다. 입 모양을 잘 보라며 젤다가 입술을 크게 움직여 발음할 때마다 고소한 곡물 냄새가 풍겼다. 라떼를 다 마신 뒤 젤다는 물을 한 잔 마셨는데 그때 입술 옆의 흔적이 지워졌다. 그는 시니어 인턴에 지원한 칠십대 남자의 말 속에서 몇 개의 표현을 새로 배웠다. 남자가 새롭게 시작하는 삶에 대한 궁금증과 상관없이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두통약이 있는지 확인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로건. 젤다가 슬레이트를 치듯 두 손을 경쾌하게 맞잡았다. 그는 의자에 걸어놓았던 백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테이블 위의 프린트는 두 번 접어 백팩에 넣었고 안경을 벗어 냅킨으로 문질러 닦았다. 한 달 전에 안경을 새로 맞췄는데 두통이 오자 시야가 부옇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젤다는 의자에서 일어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수업하는 동안 자꾸 걷어서 팔꿈치까지 올라간 데님셔츠의 소매를 정리했고 손목에 늘 끼고 다니는 얇은 고무줄로 머리를 묶었다. 바깥쪽 손목에 새긴 나뭇잎 모양의 타투에 고무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침에 카페의 스터디룸에 들어올 때 젤다는 언제나 머리가 덜 마른 상태였고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는 수업이 끝날
- 서유미
- 2023-02-01
공기와 춤 김설아 1. 스포츠센터는 도서관 옆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유리로 된 여닫이 현관문 위에는 수영, 헬스, 요가를 하는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1층은 수영장이었다. 2층은 헬스장, 3층은 다목적 체육관으로 농구장 겸 강당에서 에어로빅, 요가, 필라테스, 벨리 댄스를 했다. ‘여기란 말이지.’ 주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벽면에 5단 사물함이 늘어선 3층 복도로 들어섰다. 떨려서 그런 건 아니고 숨이 차서였다. 이왕 운동하기로 결심했으니 기회 있을 때마다 조금이라도 활동량을 늘려야 했다. 그때 승강기에서 내린 중년 여성 몇 명이 대화를 나누면서 한쪽만 열린 회색 철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주경도 따라 들어갔다. 녹색 냉 난방기에 걸터앉아 실내용 운동화를 갈아 신거나, 물을 마시거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대화를 하는 여자들이 보였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부러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신청했다. 놀랍도록 살찐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 기간 동안 총 15kg이 쪘다. 연애 시절부터 알게 된 지 20년이 넘은 남편은 이제 집에 오면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었다. 코로나가 길어지자 주경은 소질 없는 요리에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주경은 배달 앱과 천생연분이 되었다. 고등학생 아들 역시 몰라보게 살이 쪘지만 성장기였다. 하지만 자신은 갱년기였다. 코로나에 감염될까 집에만 있으니 살이 찌고 밤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으로 커피를 들이키며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일에 진력이 났다. 주경은 매일 불쾌했고 반쯤 미쳐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귓가에 째깍째깍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달라지겠다고 결심한 건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고 집을 뛰쳐나온 다음날이었다. 남편이 심심하면 내뱉는 ‘당신은 사회생활을 모른다.’란 말에, 주경은 흥분해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아무 신발이나 꿰어 신고는 집에서 나왔다. 주택가를 벗어나자 밤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주경을 쳐다보았다. 뚱뚱한 사람 처음 보나 싶어서 마주 쏘아보던 주경은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가장 먼저 보이는 약국으로 들어가 일회용 마스크를 샀다. 마스크를 썼더니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주경은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밤거리에 나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늦은 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처럼 아무 목적 없이 산책을 하니 어느덧 기분도 풀렸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주경은 오랜만에 푹 잤다. 다음날 아침. 주경은 남편인 정석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고 어제의 산책과 숙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석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참에 운동을 해보는 건 어때?” 평소라면 코로나 핑계를 댔겠지만 이번에는 정석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주경이 되물었다. “운동? 어떤 거?” 정석은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더니 주경을 보았다. “그건 당신이 찾아봐야지.
- 김설아
- 2023-02-01
가벼운 마음 김연희 아내는 알람이 울리자 끄고 밖으로 나갔다. 자는 척하고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댔다. 닫힌 문을 통해 아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드레스 룸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이동했다. 창가에서 잠을 자던 재용과 용진이 깨어났다. 녀석들은 말티푸 형제였다. 말티푸는 말티즈와 푸들의 혼합 견종으로 말티즈의 귀여운 외모와 푸들의 곱슬곱슬한 털이 섞여서 인기가 많았다. 그는 2년 전에 전문 브리더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재용과 용진을 분양받았다. 개들은 창가의 쿠션에서 침대로 뛰어 올라왔다. 그가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개들이 꼬리를 홱홱 흔들었다. 아내는 재용과 용진이 지서를 닮았다고 했다. 지서는 아내의 약국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국문과를 전공하는 4학년 학생이었다. 그도 국문과를 나와서 지서를 후배로 여겼다. 아내는 재용과 용진의 크고 까만 눈동자와 얼굴형이 어딘지 모르게 지서와 닮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데 지서는 얼마 전에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어서 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지서가 쓴 소설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인터넷 판 신문에 전편이 실려 있었다. 소설 제목은 『시크릿 우먼』이었다.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사는 아기 엄마인 두 여자가 아파트 층간소음의 원인을 파헤치는 내용이었다. 두 여자에게 아파트는 끝없는 미로이고,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통로이고, 지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괴상한 소설이고, 아무 내용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여운이 길었다. 거의 30년 만에 소설을 읽은 그는 충격을 받았다. 30년 전에 읽은 소설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소설들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반면에 지서의 소설은 다른 세계의 계시처럼 읽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었다. 아내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가 욕실로 갔다. 그가 샤워하는 동안 재용과 용진이 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기다렸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주방까지 따라왔다. 그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도 개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다리 주위를 맴돌고, 뒷발로 일어서서 그의 다리를 긁었다. 그는 개들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아내가 자주 이야기해서인지 개들을 보니 지서가 떠올랐다. 그가 지서에게 했던 말들도. 그는 전직 제약회사 CEO로서 지서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가 한 말들은 평범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나처럼 CEO가 될 수 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해야 앞서 나갈 수 있다, 성공은 멀리 있지 않다. 개들이 큰 소리로 짖었다. 그가 조용히 하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개들이 원하는 건 소고기 특식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개들에게 특식을 만들어 주었다.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는 소고기를 삶아서 깍둑 썰거나, 프라이팬에 살짝 구워서 야채를 곁들이거나, 간 소고기를 익혀서 아보카도나 블루베리를 섞어 주었다. 아내는 자식 키울 때보다 정성이라
- 김연희
- 2023-02-01
회류하는 가시 2 문동만 생각이 잦으면 꿈에라도 오는 것인지 내가 잘하는 것은 생각뿐이어서 꿈을 꾸기 위해서라도 생각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술에 취해 눈이 부어 돌아온 아들이 - 사는 일이 이렇게 괴로운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한탄을 뱉으며 더 울고 자던 섣달그믐, 나는 내가 물려주지 말아야 할 서정의 유산이라도 물려준 듯 어지러운 생각에 빠져 잠을 뒤척였다 새벽꿈에 막내 누이도 나타나 같이 빙판길에서 긴 미끄럼을 탔다 뒤란에 대숲이 있는 낡은 집들이 많은 마을이었는데 - 하나같이 그늘이 오래가는 집들이군 이제는 우리도 따뜻한 집터에서 살아 봐야지 그렇게 말하는 중에 누이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더 빨리 얼음을 지치며 산모퉁이로 사라져 갔다 애틋한 것들은 늘 미끄러웠고 그 새벽에도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설날이라고 어떻게든 모여드는 핏줄들 어제의 울음을 오늘의 성찬으로 올려놓고 절 받아야 할 사람 세어 보니 하나 둘 셋 넷 다섯… 생각이라는 것을 많이 하면 사람이 오고 사람이 오면 상이 차려지고 같이 밥을 먹고 거기서 다시 우리가 살아야 할 집을 생각하고 털어야 할 슬픔 같은 건 가시처럼 발라버리며 가시 없는 집은 살점도 없지 못했으리라, 지느러미를 떨며 비늘을 털며 일제히 등 굽은 물고기 되어 큰절을 올린다
- 문동만
- 2023-02-01
[비평연재]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미래가 열렸던 시간들을 위해 2 양재훈 ‘통합’을 다시 생각하기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에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주는 대목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들이 당대에 민족문학을 과제로 내세웠던 이유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이들에게 민족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혈연 집단이 아니었다. 민족의 기반에 있는 민족체(Nationality)의 존재 여부와 별개로, 그것이 근대적 정치체제로서의 국가를 안 받치는 이념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언어, 혈연, 문화, 지리, 정치, 경제 등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던 중세적 민족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민족에 미달하는 집단이다. 장차 민족으로 발전할 예비적 집단이 존재해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근대적 국민국가 체제의 바탕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만 민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이제 상식이 되어 있다. 혈통이라든가 장기간 같은 지리적 조건에서 형성된 공통생활문화를 공유하는 운명공동체라는 식의 관점은 민족에 대한 통속적 관념으로 기각된다. 근대적 합리성의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합리성의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는 관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이념에 달라붙어 있는 그러한 상상적 허구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예컨대 정치인들은 결코 국가/민족 구성원의 분열이나 분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 통합을 외친다. 내면에 품은 생각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이 통합을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은 분열이라는 기표를 통해 유권자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가/민족 단위 내에서의 통합을 당연히 달성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하고 있다. 민족은 하나(여야 한)다. 민족의 분열은 극복해야 할 이상 상태다.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관념보다 자기 삶의 구체적 국면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을 맞으면 느닷없이 애국자가 되곤 한다. 이때만은 서로를 무한히 적대하는 정치적 대립 따위도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유년 시절 나는 그러한 국제대회들에서 자국 대표선수단을 응원하는 일에 의구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내가 아홉 살이던 시절에 열린 올림픽에서였는데, 내가 우리나라를 응원하며 우리나라의 승리에 기뻐하고 패배를 안타까워한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러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선수단은 이기고 어느 선수단은 지며, 그것이 나 자신의 승부도 아니고 나의 직접적 이해관계와도 무관한데 어째서 누군가의 안타까움을 대가로 기쁨을 얻는 것이 가능한가? 이후 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선수들이 거두는 성적이나 경기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가대표를 응원할 마음이 생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내가 국제 스포츠에서 민족적 교감에 참여한 기
- 양재훈
- 2023-02-01
[책방곡곡] 춘천 실레책방(제1회) 사회, 원고정리 : 동무 참여자 : 붓꽃, 개똥벌레, 마리, 햇살책: 허태연, 『플라멩코 추는 남자』(다산북스, 2021) 달콤한 100인생 독서모임 1회, 2023년 1월 5일, 실레책방 동무 : 새해 첫 만남을 독서모임으로 하니 참 좋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플라멩코 다 읽어 오셨을 텐데 어떻게 읽으셨나 궁금하네요. 책 잘 넘어갔죠? 햇살 : 제 첫 소설이에요. 올해 읽은 첫 소설! 동무 : 역시 책을 늘 가까이하는 분이니까 올해 첫 소설로 의미가 있군요. 1월 5일밖에 안 되었으니 당연히 첫 소설 아닐까요? 하하. 저는 책을 많이 안 읽으니까 ‘첫’이라는 의식을 하지 못했나 봐요. 첫 소설 어떻게 읽으셨어요? 대강의 감상평? 햇살 : 이 책을 1월 1일에 읽었거든요. 그래서 메모를 해왔는데 일단 67세 이 남자 꽤 귀엽다고 느꼈어요. 가공인물이기는 한데 너무 소설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사람이 우리 옆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끝부분으로 가면 좀 달라지기는 한데 소설 캐릭터가 조금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동무 : 저도 똑같은 느낌을 가졌어요. 그런데 그 의문이 맨 나중에 풀렸어요. 작가 후기에 1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늘 머릿속으로 아버지를 창조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아, 그랬구나 그러면서 의문이 풀렸어요. 주인공이 생각하는 방식이나 문제를 해결해 가는 방식이 30대처럼 느껴졌어요. 되게 유연하다. 이런 67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맨 마지막 작가의 말로 그 의문이 풀린 듯해요. 햇살 : 우리가 작품을 읽을 때 작가도 파악하면 좋잖아요. 그런데 이분이 몇 살이죠? 붓꽃 : 40세요. 82년생. 우리 아들과 동갑이어서……. 아버지를 열여섯에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로망이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주인공이 나랑 동갑이에요 67세. 그래서 더 이입되었던 것 같아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들으며 일하려고 굴착기에 그런 시스템도 해두고 또 매일 쓸고 닦았는데 그런 거 내 나이에 할 수 있어요. 어색하지 않아요. 하하. 동무 : 할 수 있어요? 올~ 너무 멋져요. 저는 노인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나 봐요. 붓꽃 : 그리고 버킷리스트가 많잖아요. 그 버킷리스트 너무 와 닿는 거예요. 햇살 : 그래요? 저는 그 나이면 더 올드 취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군요. 붓꽃 : 버킷리스트 1번 남보다 먼저 화내지 않기, 예전에 우리 아버지가 톡 쏘는 성격이어서 엄마가 아버지를 ‘땡비(땅벌)’라고 흉 보곤 했어요. 나도 땡비 기질이 있어서 나타날까 봐 늘 ‘온유’라는 단어를 가슴에 간직하고 지내거든요. 성경에 보면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저도 온유를 얼마나 외치며 다니는지 몰라요. 그리고 버킷리스트 2번이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어느 날 우리 손녀
- 2023-02-01
세상의 기원1) 이수안 니콜라는 금방 전화를 끊을 것 같았습니다. “니콜라, 전화를 끊지 말아요, 부탁이야. 나 무서워서 그래.” “무섭다니, 뭐가?” “밤하고…… 소리하고…… 다 무서워.” “음, 네 목소리를 들어 보니까 작은 여자 아이 같은데, 도대체 누구지?” “나 작은 여자 아이라서 무서운 거야…….” “이것 봐, 울지 마. 너 이름이 뭐야?”2) “조이(Joy)예요.” 입가에 미소를 달고 조희가 말했다. 스물세 살,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솔직히 놀랐는데, 그녀가 보기보다 어렸기 때문이었다. 조희에게는 그 나이 또래들이 흔히 가진 앳되고 무른 인상이 없었다. 다 자란 성인에게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조숙해 보였다. 그래선지 조희가 나이를 밝혔을 때, 우리 중 누군가가 ‘스물셋이요?’ 하고 되묻고 말았다. “왜요? 더 들어 보여요?” 조희는 이렇게 맞받았다. 웃음기는 거두지 않았지만 쏘아붙이는 말투여서 일순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 역시 ‘뭐? 스물셋?’ 하는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뿐이어서 조희의 반응에 움찔했다. “나 노안인가 봐.” 조희는 이렇게 말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내가 오랫동안 조희라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첫인상이었다. 조희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속마음을 다 내뱉는 사람이었고,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도 웃는 여유가 있었다. MBTI의 첫 글자가 ‘I’가 아니라 ‘E’일 것이 분명한,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은근히 동경해 왔다. 할 말, 안 할 말 구별하지 않는 사람은 겉과 속이 같으리라는 막연한 환상을 품었다. (훗날 동하와 나는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같은 일을 두고 우리의 의견이 엇갈렸다. 동하는 조희가 사람 말을 고깝게 듣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스물셋이요?’라고 물은 것이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는 뜻은 아닌데 조희가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었다는 거였다. 그건 스스로가 조로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온 반응 아닐까, 라고.) 나도 ‘해나(Hannah)’라고 닉네임을 밝히고, 얼마 전 회사를 나와 재취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물아홉이라고 나이도 말할까 하다가 관뒀다. 그 당시 나는 ‘내일모레 서른’이라는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를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본명이 ‘조희’와 ‘혜나’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뚜렷한 이유 없이 가까워졌다. 나는 단순히 내 이름의 음을 따서 닉네임을 지은 것뿐이었지만 조희는 &lsqu
- 2023-02-01
식물의 기분 조용미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비 그친 뒤의 숲으로 우산을 두고 갔는데 누가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게 저 수없이 겹겹 총상꽃차례로 피어있는 만첩빈도리일 줄은 더듬더듬 아는 덜꿩나무 근처로 갔는데 꺼끌꺼끌한 그 잎을 그냥 만져볼까 했는데 빗물에 번쩍이는 초록 잎들의 숨을 나도 쉬어볼까 했는데 흰 털 보송한 종 모양의 꽃받침 길게 나와 있는 암술머리의 연두색 여린 붉은색 줄기가 이제 마주 보는 얼굴이 되었다 모든 세부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뭇가지에 아래 들어 흰 꽃들을 올려다본 순간 속눈썹에 빗물이 떨어졌는데
- 조용미
- 2023-02-01
스톡홀름 소년 문정희 백야가 뜬눈으로 잿빛 아침을 데려왔어 음울한 어깨 늘어뜨린 거리에서 스톡홀름 소년을 만났어 이름이 성호라고 했어 남은 치약을 쥐어짜듯이 기억을 짜내어 그는 말했지 코리아에서 태어났다고 베리만인가 마르틴손인가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성호야! 하고 그를 불렀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하나의 꽃이 되지’못하고 한쪽이 찌그러진 별처럼 묘한 웃음이 되었지 처음 듣는 자기 이름! 성호야! 를 듣고 그는 갑자기 개구리처럼 어기적거리며 내게로 왔어 소름 돋아 오소소 나도 그에게로 갔어 늘 배가 아프다며 성호가 부끄럼도 없이 대뜸 내 앞에 배를 내밀었지 자궁으로부터 배제당한 입양이 심장 깊이 총알이 된 것일까. 어린 짐승처럼 어미 냄새를 킁킁 맡은 것일까 순간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노래 하나 꺼내어 나는 낮게 부르기 시작했어 “엄마 손은 약손! 성호 배는 똥배!” 대낮에도 춥고 흐린 달이 떠 있는 북구의 거리 탯줄처럼 길고 질긴 손으로 스톡홀름 소년을 포대기처럼 친친 감았어
- 문정희
- 2023-02-01
공영주차장 설하한 주차장에 놓인 한 조약돌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기 전까지 영영 꿈을 꾼다 조약돌은 꿈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주차장에서 주차장과 함께 영원히 살아간다 돌의 꿈속 신이 돌에게 그것을 보장했다 돌이 꿈을 꾸는 동안 수많은 차들이 머물고 떠난다 어느 날 주차장 부지 건물이 들어서고 조약돌은 존재가 사라지고도 자신의 꿈에서 그의 신과 함께 주차장에서 살아간다
- 설하한
- 2023-02-01
젊은 연인들의 키스 -“ ”를 읽고 유혜빈 발에 채이는 사랑을 발견했네 사랑을 발견한 순간 나는 전력으로 질주를 시작하네 드디어 당신이 있는 곳에 도착한 순간 당신 입에 있던 담배를 뺏어 문 순간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나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하네 나는 달리기 시작하네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날을 상상하던 장면으로부터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던 장면으로부터 당신에게 달려가던 순간으로부터 당신과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으로부터 나는 달아나네 나는 달아나기 시작하고 있네 나는 전력으로 달아나 반대편에서는 바람이 당신을 데려가네 먼 곳으로 데려가네 당신과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으로 당신이 나를 기다리던 순간으로 담배를 피우던 순간으로 당신과 마주 보고 있던 순간으로 지금은 우리가 입을 맞추려던 순간이다 당신은 어디에 있지?
- 유혜빈
-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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