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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 작성일 2014-03-31
  • 조회수 3,429

신석정,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몸이 젖어……

란아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 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한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란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

▶ 시_ 신석정 - 1907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시문학』 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등단했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을 간행한 이후,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 등 생전에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 낭송_ 장인호 - 배우. 영화<고지전>, <하울링> 등에 출연.

배달하며

바로 옆에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의 삶은 두 배가 됩니다. 처음 자기의 방을 가졌을 때 어땠습니까? 자신만의 은밀한 장소를 가진다는 것은 한 독립된 나라를 소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추억에 의하면 대숲은 러시아만한 대국입니다.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는, 그 리듬이며 빛깔이며 질서가 대편성 교향곡의 수준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말을 버리고 차라리 대나무 숲의 말을 배우고 싶어집니다. 대숲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댓잎의 모양이 모두 귀의 모양이니 민중에게 한 말이겠지요. 우리에게는 목가 시인으로만 알려져 있는 신석정 시인의 숨은 가편들 속에 드러나는 역사와 생활의 그림자는 ‘한 그루 푸른 대로 심장을 삼’을 수밖에 없던 시인의 서글픔이 짙습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 출전_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창비)

▶ 음악_ 정겨울

▶ 애니메이션_ 제이

▶ 프로듀서_ 김태형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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