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형의 우로보로스
- 작성일 201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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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인 나는 오늘도 도시를 침략해 온 괴물과 맞서 싸워, 언제나처럼 멋지게 괴물을 쓰러뜨리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리라 생각했지만, 졌다. 도시 곳곳이 부서지고 하늘에는 금이 갔다. 드래곤같은 모습의 괴물은 불을 뿜으면서 종횡무진 도시를 유린했다. 세 시간 뒤 가까스로 괴물을 쓰러뜨리기는 성공했지만 이미 막심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나는 슈퍼 히어로로서, 예쁜 애인이 있고, 많은 돈이 있고, 여태까지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지만, 이제 길을 걷고 있으면 그 쓰레기 같은 녀석 때문에 도시가 부서지고 말았어, 하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녀석들의 턱을 잡아채고 내가 없었으면 지구는 이미 옛저녁에 멸망했다고, 여태까지 무사히 지켜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히어로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저들은 그저 누군가를 탓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역시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것이기에, 나는 그대로 주절주절 짜증나게 구는 녀석들의 목을 날려버리고, 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자 내 연인이자 초고층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에서 함께 살고 있는 김수진이 나를 반겨주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나는 그대로 김수진과 관계를 가졌다. 품에 안겨 있으려니 여지껏 쓰러뜨려 온 괴물에게 진 것에 대한 분함, 도시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졌다고 매도당한 억울함, 여러 가지 싫은 감정이 녹아버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 편안했다.
침대 위에서 숨을 고르고 있자 김수진이 미소를 지으며 "이제 네 원래 세계로 돌아가." 라고 말해서, 보자, 하늘의 금이 벌어져 틈새 너머의 풍경이 비치고 있어, 나는 지금 이 세계가 자살에 실패해 혼수상태에 있는 내 망상 속에서 만들어낸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의 가난이나, 아무도 내게 신 경써 주지 않는 주변이나, 무능력한 나 자신에 질려서, 나는 죽어버리고자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하지만 몸을 던진 직후 굉장히 무서워져서 이런 결정을 한 걸 후회하고, 살고자 발버둥 쳤지만,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는 게 보인 다음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다. 하늘 너머로 보이는 건 병실의 풍경으로, 어머니가 옆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현실의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이 하늘의 틈새를 통해 여기 있는 나에게 보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 나는 세금 같은 걸 낸 적도 없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과는 만난 적도 없다. 빵을 살 때도 빵집에 들어가서, 빵을 고르고, 점원과 마주보고, 돈을 내고, 다시 빵집을 나오는 일련의 행동은 모두 생략되고, 빵을 샀다는 결과만이 남는다.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과 전능한 힘을 가진 슈퍼 히어로같은 것도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부조리를 받아들인다. 이 세계는 전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한 편의주의적인 세계다.
내가 김수진을 보자, 김수진은 나를 꼭 안아주면서 말했다. "그동안 행복했어. 저쪽으로 돌아가서도,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걸 잊지 말아 줘."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김수진은, 현실에서는 내가 몇 년 전 짝사랑했던 여자아이로, 실제로는 용기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고, 애초 다른 애인이 있었다. 먼발치에서 음습하게 지켜보기만 하던 아이를 내 망상 속에서 불러내어, 나만을 좋아해 주는 연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보잘것없는 현실의 나에 질려서, 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슈퍼 히어로가 되기를 택했다. 강력한 적들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감사를 받고,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반대로,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란 걸 알고 있기에, 슈퍼 히어로라도 되지 않으면 그런 걸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내게 이 역할을 부여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에게는 돈이 없어서, 누워있는 나의 병원비를 지불할 능력도 없다. 내가 하루를 더 누워있을 때마다 며칠분의 식비가 사라진다. 나는 지금 당장 이 세계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김수진에게 작별을 고하고, 하늘을 날아 저 틈새 너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침대 위에서 김수진을 탐한다. 김수진은 처음에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망상 속의 세계고, 실제로는 한줄기 희망도 없는 현실에, 나는 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란 건 뭐지? 지금 이 허구의 세계도 내게 있어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인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고, 적어도 내 머릿속 안에는 실재하고 있다. 차피 바깥의 현실도 나나 누군가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같은 지루하고 바보같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이 세계가 현실과 다른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었는가의 차이일 뿐, 내가 전지전능한 신이 된 것도 아니며, 일개 개인으로서 물리법칙 같은 세계의 법칙에 마찬가지로 따르며 살고 있다. 이쪽을 내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와 같은 생활을 계속 해나갈 수 있다. 나는 이 세계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면 충분한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해도, 결국은, 무서운 것이다. 다시 돌아가기가. 돈이나, 취업이나, 결혼이나, 가족 같은, 생각하기 싫은 것들 다시 마주대하기가. 아무 걱정 없는 이 세계에서, 가혹한 현실을 외면하며 도피하고 싶을 뿐이다.
이후로 괴물은 점점 더 강해져 왔다. 어떻게든 쓰러트리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건물이 부서졌다. 도시는 점점 황폐해지고,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도 줄었다.
내가 처음 괴물에게 지고, 하늘에 금이 갔을 때, 김수진은 내게 이제 원래 세계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다. 이 세계는 나의 망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도시를 파괴하는 괴물은, 즉 나를 이 망상에서 꺼내, 현실로 되돌려보내기 위한 장치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점점 괴물이 오는 템포가 빨라졌다. 97번째 괴물이 침공해 왔을 때, 나는 언제나처럼 다녀올게, 라고 말하고서 하늘을 날아 괴물에게 향하지 않고, 집 침대에서 김수진을 안았다. 핸드폰으로 계속 전화가 오고, 슈퍼 히어로는 언제 오는 걸까요, 하고 텔레비전의 리포터는 나를 성토했다.
김수진은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의 의미를, 나는 얼마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이 세계에 지켜질 가치같은 게 있는 걸까?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계가 진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이나, 영화나, 소설이라도, 결국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한, 나는 그것을 현실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차피 언젠가 망가질 세계이고, 망가져야 할 세계라면, 운명을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바라는 일을 할 뿐이다. 더는 지금의 쾌감을 맛볼 수 없게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기분좋은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창분 바깥을 괴물이 날아가며 레이저포를 발사했다. 사람들의 비명이 더 가까이서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했다.
아아, 나는 얼마나 더 쓰레기 같은 녀석이 되려고 하는 거지. 결국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하늘에 금이 가고, 김수진이 돌아가라고 이야기한 그 순간 가야만 했다. 지금 이렇게 멍청히 도시가 망가지는 걸 내버려두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무시하고, 김수진을 상처입히고, 부모님을 가슴아프게 하면서, 이 편의주의적인 세상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건, 나 자신의 잠깐의 쾌락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최악의 선택인 것이다.
알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더라도, 나는 하고싶은 것을 하는 거고, 정말로 나 스스로 저기 하늘 너머로 날아가는 것따위는 무서워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가 무너져서 강제로 바깥으로 쫓겨나게 된다면 그때는 체념하고 받아들이더라도, 직접 이 다리로 나아갈 용기는 없다. 아무리 누군가가 나를 탓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거고, 하고싶지 않은 건 하고싶지 않다.
결국 괴물은 내가 있는 빌딩까지 파괴해서, 나와 김수진은 방째로 지면에 떨어졌다. 뻥 뚫린 벽과 천장으로 괴물이 몸을 들이밀었다. 거대 로봇같은 디자인이었다.
만약 이녀석한테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하늘 너머로 날아가야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세계에서 죽어버릴 경우, 현실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건가? 뇌사상태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만약 죽는 것으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돌아가기 싫고, 그 이전에 죽는 건 무섭다. 그래서 나는 괴물과 맞서 싸운다. 어차피 도시는 이미 부서질대로 부서졌고, 더이상 신경쓸 것은 없다.
고 생각했지만, 있는 것이다. 아직 김수진은 남아 있다. 나는 김수진을 보호하면서 괴물과 싸웠다. 어떻게든 괴물을 쓰러뜨리고 나자, 김수진은 물었다.
"계속 여기에 있을 생각인 거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른다. 선택할 수 없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다. 나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고, 여기에 남는다는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세계가 끝날 때까지 나는 김수진과 함께 있고 싶다고 바란다.
"나는 네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일 뿐이야. 내게 도피한다고 해도,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맞는 말이다. 그래도 나는 무서우니까 계속 도망치는 걸 선택한다. 나는 나를 구제하러 온 98번째 괴물과도 싸워 쓰러트렸다. 서커스장 모양의 적이었다. 이로서 도시는 완전히 부서져 폐허가 되고,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건 나와 김수진 둘뿐이다. 하늘은 완전히 깨져 병실의 풍경이 깨끗이 비치고 있다. 이 세계가 끝나는 것도, 이제 머지 않았다.
이제 다다음 번으로 100번째다. 100번째 괴물이 왔을 때, 이 세계는 끝나는 건가? 예로부터 십, 백, 천, 만과 같은 십의 제곱이 되는 수는 완전한 수, 큰 수, 절대적인 수로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는 다음 99번째가 끝일수도 있고, 101번째가 끝일수도 있고, 계속 나아갈지 어떨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건 내 망상 속의 세계고, 내 무의식이 100이 괜찮다고 생각하면 100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수진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이제 머지 않았다.
98번째 괴물을 쓰러뜨린 이후로, 김수진은 계속 울었다. 내 말에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김수진을 좋아한다. 나와는 관계없는 현실의 김수진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내가 만들어낸 김수진을 사랑하고 있다. 김수진도, 이 도시도, 내 머릿속에서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창조물이지만, 나는 정말로 좋아했고, 그래서 여태까지 지켜 왔다. 지난번 싸움에서 이 도시가 파괴당하는 걸 나는 내버려 두었지만, 지키려 한들 어차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키고자 전력을 다했음에도 내 능력에 미치지 못해 지키지 못한 것보다는, 내가 일부러 외면했다는 쪽이 더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나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 스스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쓰레기 같은 나답게, 이 세계가 끝을 맞아 끝내 현실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나는 김수진에게 내가 이 세계의 아담이 되고, 네가 이브가 되어, 다시 도시를 만들어 나가자고 이야기하자, 김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100번째 괴물인걸."
김수진은 울면서 말했다.
"이 세계는 언젠가 부서질 수밖에 없어.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 100번째 괴물을 쓰러뜨렸을 때, 이 세계는 완전히 부서져서, 너는 현실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 괴물들은 너 스스로가 이 세계가 부서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파멸로 이끌어가도록 하는 장치야. 나는 네가 너 스스로 돌아가기를 바랐어. 이 도시가 전부 부서지고, 나를 죽여서, 이 세계에서 모든 걸 잃게 된 네가 강제로 돌아가도록 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김수진의 심장을 뽑거나, 목을 자르거나, 어쨌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 손으로 김수진을 죽이는 것으로, 이 망상의 세계에 이별을 고하고서, 현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하고, 하게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김수진을 죽이고, 나를 좋아해 주는 김수진이 없는 세상으로 가는 것따위는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다. 그게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라고 해도,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받아들여야만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이윽고 99번째 괴물이 찾아왔다. 거대한 시계탑 모양의 적이었다. 싸울 준비를 했지만 괴물은 나를 공격하지 않고, 얼굴에 달린 시곗바늘을 빨리 돌릴 뿐이었다. 바늘이 돌아감에 따라서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빌딩의 잔해는 잘게 부서지고, 나무는 시들어 끝내 바스라졌다. 시간을 가속시키고 있다. 나는 여태까지 온 괴물들이 나를 공격하러 온 게 아니었다는 걸 떠올렸다. 괴물들의 목적은 이 도시를,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지, 나를 죽이기 위한 게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99번째 괴물의 목적은, 내가 100번째 괴물을 쓰러뜨리고, 이 세계에 작별을 고하기 전에, 세계인 이 도시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으로, 마지막을 위한 준비역이었다.
저 괴물의 시곗바늘이 모두 돌아갔을 때, 김수진은 마지막 100번째 괴물이 돼서, 나는 김수진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하고싶지 않다든가,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슈퍼 히어로인 내가 괴물을 쓰러뜨리는 건 결국 정해져 있는 결과이고, 세계에 의해 준비되어 있는 각본이다. 나는 거기에 거스를 수 없다.
나는 괴물의 시곗바늘을 붙잡았다. 풍경이 바뀌는 게 멎는다. 시간이 멈춘다. 그대로 시곗바늘을 움켜쥐고 뽑아 버린다. 이로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김수진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지금 네가 뭘 한 건지 알고 있는 거야?" 라고 김수진은 내게 소리쳤지만, 알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 나아간다는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멈춰 있는 것을 선택한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한가지 선택만을 앞에 두고서, 선택을 보류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내가 강제로 나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김수진이 바란 건 등을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나아가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나아갈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지만, 김수진의 기대는 완전히 배신해 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싫은 건 싫은 거다. 현실로 돌아가는 것도 싫고, 김수진과 헤어지기도 싫다. 나는 바라는 걸 바라고, 원하는 걸 갈구할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거라면, 타인은 물론 나 자신조차 이 선택을 부정하는 일따위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세계 자체를 이 자리에 멈춰세웠다. 99번째 괴물에서 톱니바퀴는 멈추어, 영원히 100번째 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김수진이 무어라 계속 소리치고 있지만, 나는 듣지 않고, 뽑아낸 시곗바늘을 내 머리에 꽂아넣는다. 아프다. 아픈 건 싫으니까, 이 세계에서 나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아프다. 지금만은 아프기로 했다. 아픔이 없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머리가 멍해지고, 눈앞의 김수진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이 시곗바늘을 내 머리에 박아넣는 것으로, 나는 다시 한번 혼수상태에 빠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나의 무의식이 다시 한번 망상 속의 세계를 구축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번엔 자기파멸과 각성으로 이어지는 장치 따위는 하지 않는다.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든가 하는, 일종의 양심이나 걱정같은 건 지금 이 망상 속의 세계에 있는 나의 바깥에 두고서, 이 현재를 '나'의 머릿속의 현실로 만들어, 앞으로 이어질 미래 또한 준비되어 있는 미래가 아닌, 찰나의 현재로 바꾼다. 나는 영원히 현실에서 도피하고, 새로이 만들어질 세계에서, 김수진과 같이 살아간다. 김수진의 의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김수진을 좋아하지만, 어차피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고, 그러면 내가 원하는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 된다. 나를 영원히 사랑해 주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슈퍼 히어로는 이제 질렸다. 이번엔 뭔가 새롭고, 더 편안한 걸 하기로 한다. 김수진 말고도 내 취향에 맞는 여자아이를 몇명 더 만들어 내고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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