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김채원, 『초록빛 모자』중에서

  • 작성일 2014-06-05
  • 조회수 1,762



“일테면 아주 다른 인생 속으로 헤엄쳐 들어갈 수 있을 듯 했다.”

-김채원 단편「오후의 세계」중에서 -



김채원, 『초록빛 모자』중에서





내 성격이 부서지기 시작하는 걸까. 나는 친구들의 말도 함부로 가로채고, 남이 얘기하고 있는 도중에 벌떡 일어나기도 하며, 혹은 다방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발로 장단을 맞추며, 이 노래 참 좋지? 좋지? 들어 봐. 강요하기도 한다. 나오는 노래마다 좋다고 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내 강요에 못 이겨 귀를 기울이다가도 곧 싫증을 내버리곤, 하루종일 집에서 라디오만 듣니? 라고 나를 나무란다.
그러나 어찌하면 좋은가. 나는 전축도 라디오도 갖고 있지 않다. 작은 카세트 녹음기가 한 대 있었지만 그것은 언니가 퍽 아끼던 물건이어서 언니의 무덤 속에 넣어 주었다. 자주 외출도 하지 않으니 다방에서 유행가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 나는 정말 음(音)과는 먼 곳에 살고 있다. 아마 음과는 먼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조그만 음에도 민감하여 세상의 모든 노래를 많이 알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나는 친구 애인들 사이에 눈치없이 끼어앉아 있기도 한다. 눈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데에 잔신경 쓰기가 귀찮아서다. 아니, 사실 나는 아주 소심한 사람이다. 조그만 일에도 잔신경을 몹시 쓴다. 그럴수록 그렇게 자신을 아끼느라 바들거리는 것이 피곤해져, 함부로 나를 굴리기 시작하고, 그러한 자신에 대해 스스로 가슴이 아파 쩔쩔매게끔 되어 버렸다.
처음, 나는 나의 그러한 행동 - 남의 말을 가로챈다든가, 남의 얘기 도중 일어난다든다,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든가를 - 충분히 의식(意識)하면서 하는 행동들이므로 마음만 먹으면 그러지 않을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나는 이제 아무리 의식(儀式)이 갖는 미덕의 세계로 들어가려 해도 들어가지지 않는다. 자신을 한겹씩 여미는 일, 부수어 그 파편들을 드러내어 놓지 않고 감싸는 일, 소중히 잘 가꾸어 보는 일, 이런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차츰 깨닫게 되었다.




▶ 작가_ 김채원 - 소설가. 1946년 경기도 덕소 출생. 이화여대 회화과 졸업. 1975년 「먼바다」로 《현대문학》에 황순원 선생의 추천을 받아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초록빛 모자』『봄의 幻』『형자와 그 옆사람』『달의 강』등이 있음. 제13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 낭독_ 전현아 - 배우. 연극 <쉬반의 신발>,<베니스의 상인>,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 등에 출연.



배달하며

이 젊은 단편소설의 첫 문장처럼 사람의 정이 몹시 그리워지는 어느 날이면 평소엔 하지 않았던 일들이 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연락도 안 하고 지내던 이의 전화번호를 불쑥 눌러보거나 입고 쓰지도 않을 모양의 옷이나 물건을 사거나, 아니면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남장(男裝)을 하고 거리에” 나서보거나.
설령 이렇게 가만히 방안에만 앉아 있어도 무슨 일인가는 생길 겁니다. 그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가 어느 때는 무겁고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지요. 나 자신을 한 겹씩 여미고, 소중히 잘 가꾸는 일처럼. 모성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아, 이 세상 어딘가 ‘미덕의 세계’는 정말 있는 것, 맞겠지? 라는 기대가 저절로 들기도 한답니다.


문학집배원 조경란


▶ 출전_『달의 몰락』(청아출판사)

▶ 음악_ The Film Edge - Casual-Every Day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양연식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