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하프의 스펙

  • 작성일 2015-01-14
  • 조회수 296

 

하프의 스펙 

양지예

 

 

한 달 전 재판이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 변론을 마친 것이지만 결과는 뻔했다. 변론을 마치고 법원 근처의 카페에 홀로 앉아서 아버지와 마주보고 있다는 상상을 해 봤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면서. 사진보다 더 깊게 파인 주름, 화이트 칼라 특유의 섬세한 손 끝, 안경알 너머 언뜻언뜻한 나와 닮은 눈매. 물론 아버지와 이렇게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우리, 그러니까 엄마와 나와 셋이서 함께 살았었고 나를 안아주기도 하고 내게 키스하기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 슬프게도 그 아름다웠을 장면은 엄마의 기억 속에만 남아 이제 재가 되어 흩뿌려졌다.
 

한국에 정착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웃었다. 자아 찾기니 뿌리 찾기를 하며 방황할 나이는 이제 아니지 않느냐고. 대학 교환학생 시절 받았던 수모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면서 남남처럼 살면 된다고.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맞는 소리였다. 다들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내가 한국에 온 건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동안 내 마음을 빼앗아간 여자가 그저 한국인 관광객이었고, 미친 듯이 그녀가 보고 싶었으며, 운 좋게 서울에 영어강사 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 뿐이다.
 

-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그랬지?

 

“그러겠다고 한 적 없는데요.”

 

- 뭐? 너 지금 말장난 하자는 거야?

 

“저 지금 아버지 회사 앞이에요.”
 
전화가 뚝 끊겼다. 아버지는 영어가 서툴렀다. 어쩌면 서툰 척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정적이고 중요한 말들은 항상 놓치지 않고 알아들었으니까. 회사 출입문 근처에서 늦은 저녁이 될 때까지 아버지를 기다렸다. 어디 눈에 띄지 않는 다른 출구로 도망갈 확률이 만나게 될 확률보다 높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리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것이 몇 년 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던 첫 날 있었던 일이다. 왜 굳이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무거운 짐을 그대로 이끌고 아버지를 찾아갔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를 원망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솔직히 나의 존재가 아버지의 결혼생활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는, 그런 한국인의 가치관을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짧게 이어졌던 우리 사이의 냉랭한 전화통화가 분노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물론 내가 한국에 왔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셔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아버지의 반응이 유감스럽기는 했었다. 또 정말 폐가 된다면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니까 몇 년이 지나 친자확인과 인지청구의 소를 제기하게 될 거라고는 그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한국에 정착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아버지는 운이 나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땅에서 어쩌면 나 역시 아버지가 되어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가 될지, 아버지의 이야기가 될지, 혹은 우리 엄마의 이야기가 될지는 일단 써 봐야 알 것 같다. 어차피 모든 이야기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정직하자는 목표를 잡았다. 그러니까 정정하자면, 나는 지금 영어로 말을 하고 있고 펜을 들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친애하는 동반자 사라, 한국이름 권진원이다.
 
우리는 늦은 점심으로 피자를 먹던 도중 이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녀가 받아 쓴 다음, 한국어로 번역해 줄 것이다. 직접 쓰지 않는 것은 읽기와 쓰기가 서툰 내 한글 실력 때문이고, 한국어로 말할 수 있음에도 영어를 선택한 것은 최대한 사실을 왜곡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통번역학과를 나온 사라의 번역 실력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자칫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에 그녀가 중심을 잡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의 이야기에 명확한 사실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최종 결과물은 무엇인지 아무도 결론 내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다. 이하는 모두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났으며 동시에 그 누구와도 관계없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흔한 이야기들처럼 일단 큰 맥락에서 우리 엄마, 노라의 이야기는 다른 엄마들과 거의 비슷하다.
 
젊다고 하기에는 아직 어리던 시절, 노라는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어쩌면 쫓겨났는지도 모른다. 철이 들 때까지 멋도 모르고 뛰어놀던 고향은 쓰레기장이었다.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곳이 구렁텅이라는 것을 깨달아 갈 때 쯤 기회가 찾아왔다.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르는 나라의 다큐멘터리 촬영팀이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모두 덩치 큰 백인 남자였다. 단 한 사람을 빼면.
 
나중에 알았지만 그 남자는 스물한 살이라고 했다. 백인 치고도 유달리 피부색이 희었다. 쓰레기장에서 십오 년을 지낸 노라만큼이나 왜소했고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는 창백한 얼굴에 입술이 보라색과 회색이 뒤섞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키에 비해서도 다리가 눈에 띄게 짧았는데, 밭은 숨을 쉬면서 그 다리를 놀리며 때론 제 몸보다 큰 장비들을 들고 뛰었다. 눈이 마주치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인사했다. 그 때마다 노라는 몸을 배배 꼬면서 근처 어딘가에 몸을 숨겼다. 물론 눈은 그 남자에게서 떼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남자는 인사를 하며 초코바나 껌 같은 걸 내밀었다. 처음에는 피했지만 세 번째 쯤 인가엔 남자의 손에 있는 빵을 잡아채 멀리 달아났다. 허겁지겁 비닐을 뜯는 동안 남자는 어느 새 다가와 발치에 자신이 먹던 망고주스를 두고 갔다. 노라는 그 이후부터 남자가 주는 걸 거부하지 않게 됐다. 몇 번인가 마주 인사도 했다. 그러면 남자는 먹고 있는 노라의 어깨나 팔, 엉덩이를 괜히 툭툭 치고 히죽 웃으며 자리를 떴다.
 
그 날은 초코바였다. 남자는 노라가 껍질을 뜯어 한 입 물 때까지 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른 느낌에 초코바를 입에 문 채 올려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누런 이가 차츰 가까워졌다. 남자는 바지를 반 쯤 내린 채로 노라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참 가슴이 성장하는 시기이던 노라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엉겁결에 남자는 입을 막았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노라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주변은 곧 아이를 신부로 삼으라는 사람, 돈을 내놓으라는 사람들로 시끄러워졌다. 누군가 노라의 엄마를 부축해 데려왔고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 엄마의 쉰 목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촬영감독은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몇 번인가 지갑을 열었다. 누군가 도망가려던 남자의 뺨을 때렸다. 그게 신호인 것처럼 점차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원이 좁아들었다. 원의 중심에는 노라와 다리 짧은 남자가 아니라 촬영감독이 있었다. 그는 뭐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텅 빈 지갑을 보여주었지만 눈빛에서 샘솟는 탐욕의 물줄기는 끊길 줄 몰랐다. 감독이 한 걸음 물러났지만 뒤로도 사람들이 벽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 때 백인일행 중 누군가가 그 둥근 벽 너머로 돈을 던졌다. 다들 일제히 돌아서서 손을 뻗었다. 그 중 운이 좋은 자는 동전을 쥐었고 더 좋은 자들은 찢어지지 않은 온전한 달러를 잡았다.
 
촬영은 계속되었다. 엄마는 노라를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놈에게 시집가라고 악을 썼다. 노라는 쓰레기장에서 방황하며 새우잠을 잤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야 노라는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발작하는 자세로 굳어버린 시신을 보고 있던 노라에게 백인들은 여느 때처럼 카메라 뒤에 숨어 조곤조곤 질문을 쏟아냈다. “슬프지 않니?” “눈물이 나지는 않니?” 하면서. 엄마가 없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노라는 반복해서 자기를 바깥에 데려다 달라고만 대답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내치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는 다리가 짧은 남자를 잡고 늘어졌다.
 
남자는 대신 돈을 주겠다고 했다. 노라는 자신이 받은 백 달러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자기를 데려가라고 말했다. 처음에 남자는 화내는 것처럼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러던 어느 밤 히죽 웃으며 노라를 차에 태웠다. 도착한 곳은 철조망 외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지만 마닐라 시내의 불빛이 똑똑히 보였다. 남자는 “어쨌든 난 돈을 냈으니까.”라고 말했고, 노라는 곧 백 달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도 배웠다.
 
몇 년간 마닐라 거리를 전전하던 노라는 아직 젊던, 아니 어리던 아버지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많은 필리핀 여자들이 그러하듯 엄마도 외국인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노라의 어머니, 어쩌면 훨씬 더 윗세대로부터 내려오는 일종의 미신 같은 믿음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검은 것보다는 흰 것이 좋다’는 것이고, ‘희면 흴수록 좋다’는 것이다. 노라에게 필리핀은 어중간했다. 유럽에는 백인이, 아시아에는 황인이, 아프리카에는 흑인들이, 미국에는 이 모두가 섞여서 산다고 하는데 필리핀은 셋 중 아무 곳에도 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필리핀은 적극적으로 그 순혈들과 섞일 필요가 있었다. 혼혈 아기들은 노라의 눈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다들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며 텔레비전 화면을 차지했다. 흑인 혼혈을 본 적은 없었지만 당연히 제외하고. 그러니까 ‘희면 흴수록 좋았다’는 말이다.
 
아이를 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자친구는 아이를 지우자고 말했다. 노라가 반대하자 며칠 뒤 싸구려 반지를 사왔다. 둘은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곧장 구청에 가서 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러면서 함께 한국에 돌아가서 직장을 구한 다음 정식으로 부모님 모시고 결혼식도 올리자는 꿈같은 계획도 세웠다. 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물론 남편의 말을 진심이라 믿을 정도로 노라가 순진했는지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이제 남편이라고 부르게 된 남자친구는 학교를 다니면서 오후에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야했다. 노라도 임신한 몸으로 아기를 위해 카페테리아 여급으로 일했다. 어렵게 태어난 아기는 다른 건 몰라도 피부만큼은 노라보다 아빠를 더 닮아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은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며 한국에 잠시 ‘다녀와야’겠다고 했다. 그 말은 어쩌면 영어가 서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노라를 안심시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정말로 ‘다녀올’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떠난 후 세 번째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 안내음성이 쏟아졌다. 노라는 몇 년 동안 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레이스에게 상담을 한 다음에야 모든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제대로 미친 짓이라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깨끗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아직 젊었던 노라는 다시 예전 일에 복귀할 수 있었다.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었기에 후회나 원망 같은 것은 없었다. 주변의 모두 비슷한 처지였기에 불행이 닥쳐왔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예쁜 아들 알렌을 잘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집으로는 손님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면 알렌은 울다 지쳐 잠이 들어있었다. 엄마가 보고 있지 않은 사이에도 알렌은 쑥쑥 자랐다. 성장만큼 옹알이도 빠르고 글도 빨리 배웠다.
 
몇 년 뒤 알렌이 학교에 다닐 때 쯤 생긴 남자친구는 은퇴한 뒤 잠시 여행 왔다가 필리핀에 눌러앉은 독일 남자였다. 학생이었던 전 남편과는 달리 그는 좋은 호텔에서 여유롭게 지냈다. 오후가 되면 소시지에 독일식 맥주를 찾았고 여덟 시가 되기 전에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약간 편집증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던 그는 미친 듯이 물건을 사들였다가 버리기도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는데, 무엇보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걸 참지 못했다. 노라가 마음에 든 이유는 ‘쓰레기장에서 도망쳐 온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본능적으로 깨끗한 것을 향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제 초기에 그는 노라에게 각종 성병 검사를 받도록 했다. 그 덕분에 혈액형이 O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치료를 받은 후 모든 검사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그는 항상 콘돔을 몇 박스 씩 사서 침대 옆에 두었다. 의심을 거두지 못한 광적인 결벽증 때문이었는지 단순히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함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설령 무엇이 어떻더라도 그는 좋은 남자였다. 아들을 좋아해 주지는 않았지만 노라의 모성본능을 존중해 주었다. 노라나 알렌을 때리거나 하지도 않았고 변태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부유했다. 노라는 일을 그만둘 수 있었고 알렌은 돈을 벌 필요 없이 학교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가 노라와 함께 지내기 위해 새로 빌린 집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서 청소가 힘들다거나 여유가 있음에도 별도로 가정부를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단점이었고 이런 것들 역시 그레이스가 말해주기 전에는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알렌이 열일곱이 되던 해, 노라는 첫 번째 발작을 경험했다. 죽기 직전의 엄마와 흡사한 거울 속 자신을 마주보며 앞으로 오래 살수 없음을 직감했다. 세 번째 발작 때 남자친구가 노라를 발견했고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간 그녀는 입원해서 각종 검사를 받았다. 입원한 동안 그녀를 혼자 놔두다가 결과가 나오는 날 병원으로 찾아온 남자친구는 다짜고짜 전염 되는 병인지 아닌지를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모계유전병이며, 아들에게는 유전되지 않고 당연히 전염되지도 않는다’고 말하며 ‘증세를 아주 조금 호전시킬 수는 있지만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남자친구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병원비를 지불하고 나서 이번에는 태국에 가 보겠다며 떠났다. 알렌에게는 마지막 선물로 손 소독제를 주었다.
 
기운이 점점 없어지기는 했지만 당장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발작 외에는 아주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다. 알렌은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 대신 장학금을 줄 곳을 찾아 무사히 대학진학을 약속받았다. 남자친구와 함께 집도 사라져서 알렌과 따로따로 각자의 친구 집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지만 몇 주 후엔 다시 모자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밤이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바깥에 나가서 숙제를 해야 하는 알렌은 짜증을 부렸다. 그런 아들을 계속 공부시키기 위해 노라는 옷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예전 일을 계속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로 팔려나갈 옷들은 노라의 손에서 차곡차곡 메이드 인 필리핀을 품었다.
 
알렌은 장학금을 받으며 무사히 대학에 입학했다. 알렌의 입학식 날, 부유해 보이는 한 남자가 노라에게 말을 걸어왔다. 슬쩍 손을 잡는 남자를 뿌리치고 노라는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갔다. 아랍인은 싫었다. 자신보다 피부가 아주 조금이라도 밝아야 했다. 내일을 꿈꾸는 것이 허락된다면, 자신의 다음 남자는 스페인인이었으면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엄마의 이야기도 물론 상당한 각색이 되어 있을 테지만 적어도 본인에게 직접 들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아버지 쪽의 이야기는 분명 변호사가 작성했을 변론조서와 답변서를 통해서 알게 된 것뿐이다. 아버지는 기억의 우물에서 되새기고 싶지 않은 것들을 억지로 길어 올렸을 테고, 변호사는 그 중에서 불리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을 추려 각색 또는 미화했을 것이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엄마를 만날 때까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유는 낯선 필리핀 땅에서 외로웠기 때문이란다. 반면에 아버지 쪽의 답변서에 따르면 아버지가 필리핀에 와서 엄마를 만날 때까지는 삼 주가 걸리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즈음이다. 아마 아버지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즐겁게 지내고자 했던 젊은 시절의 치기를 탓하는 건 아니다. 고맙게도 그냥 떠나버리는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어머니에게 한 때나마 ‘남편’이 되어줄 결심을 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친구들과 달리 내겐 그래도 아버지의 흔적을 되새길 만한 매개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이건 내 자존심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필리핀인 아내를 인정받고자 아버지는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절연을 선언하기도 하고, 정말로 확 죽어버리겠다고 부모님을 협박했다고도 했다. 나와 엄마가 사랑스럽게 찍힌 사진을 보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냥 죽어버리라는 답장을 받았다.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 집에서 보내던 용돈이 뚝 끊어졌고 그는 학업과 생업을 동시에 해결해야했다. 필리핀의 값싼 인건비가 갑자기 발목을 잡았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운 좋게 한 술집에 매니저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냥 말이 좋아 술집이고 또 매니저지 그냥 온갖 궂은일을 해야 하는 남자 종업원이었다. 엉덩이를 슬쩍거리며 바지 주머니에 팁을 꽂아주는 여자 백인 손님들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여자 옷을 입은 빠끌라들과 게이들이었다. 그 전에는 단지 더럽다고만 생각했을 뿐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자신의 문제로 맞닥뜨리자 혐오스러웠다고 한다. 인내심의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물론 정말로 어머니가 쓰러졌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단다. 다만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또 장남인 자신에게는 형식적으로라도 행동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담담히 한국에 돌아가 임질 치료를 받은 다음 누나가 소개해 준 여자와 결혼했다.
 
 

 
나의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 동네엔 유달리 무슨 피노들이 많았다. 나는 코피노, 옆에 아인 재피노, 또 그 옆엔 치피노. 동양계 중에서는 물론 치피노가 제일 많고 재피노가 그 다음으로 많고 코피노와 그냥 필리피노를 포함한 다른 피노들은 고만고만했다. 동네 친구들에게는 모두 아버지가 없었다. 그게 중요하다. 필리핀에서 아버지가 있는 혼혈들은 아주 잘산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그냥 균형을 맞추는 대척점의 무게추일 뿐이다.
 
내가 코피노가 된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네 아버지는 한국인이야. 지금은 멀리 있지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아버지 사진을 보여줬다. 여러 명이 찍힌 사진은 이미 너무 바래서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국계라는 것 정도는 대충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동네는 가난하고 볼 것도 없었지만 관광객이 많이 왔다. 거의가 남자인 그들은 밤이면 친구 엄마들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엄마들이 하는 일은 거의 비슷했다. 어렸을 적 나는 그 틈새에서 원인 모를 우월감을 느끼며 자랐다. 첫째로 우리 집에서는 돈으로 사고 파는 남녀 사이의 그 혐오스러운 헐떡거림을 듣지 않아도 됐다. 두 번째로 나는 아버지가 없는 코피노가 아니라 아버지가 있었던 코피노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 거리 어떤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했고, 똑똑했고, 동양계 중에서는 피부가 제일 희었다.
 
엄마는 항상 결혼은 숭고한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 앞에 한 번 맺어진 인연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끊으실 수 있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것이 내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엄마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독일인이었던 양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서 살기로 정해졌을 때 어린 마음에도 대체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혼자 힘으로 나를 키우는 것은 어렵다. 아니, 나를 제대로 키우는 것은 어렵다. 새로운 남자는 나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낡은 가톨릭 대신 나는 새롭고 개방적인 세대가 되고 싶었다. 엄마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하면서 덤으로 부잣집 아들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결국 양아버지라 불렀던, 엄마의 부자 남자친구의 도움 없이도 대학에 갔고 장학금을 받았지만.
 
대학 3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일 년 동안 한국에 왔던 것은 솔직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무언가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아버지가 ‘진짜 가족은 여기 따로 있으니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한국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분해서였을 것이다. 국가장학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굳이 한국행을 선택했던 것은.
 
한국이 ‘아버지의 나라’라는 인상도 차차 사라졌다. 입국한 첫 날 이후로는 한 번도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한국 친구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말도 한 적이 없다. 필리핀에서 내 피부는 흰 편이지만 한국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흰 피부의 혼혈 엘리트 대학생이라는 내 존재기반이 온통 뒤집어졌다. 한국은 일 년이란 시간동안 나를 끌어내리고 무너뜨리고 가라앉혔을 뿐이다. 사라가 아니었다면 다시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악몽 같던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 필리핀으로 돌아와 취업준비에 한참이던 때 나는 이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내가 다니던 학교를 수소문한 끝에 이 메일 주소를 알게 되었으며 우리가 찾고 있는 노라의 아들이 맞다면 연락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발신인은 태국의 한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로 되어 있었다. 이 메일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양아버지가 태국에서 세상을 떠나며 엄마에게 약간의 재산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약간의 재산’이라고 했지만 그 때 독일과 필리핀의 경제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며 갑자기 난 취업을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다. 사라가 필리핀으로 여행 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이제 마무리할 때다. 나는 소송에서 졌다. 최종적인 판가름을 낸 것은 나는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의 친자일 확률이 최대 86퍼센트 미만’이라는 유전자 검사결과였다. 그러니까 더 이상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것이 맞겠다.
 
“……존경하는 판사님. 코피노라고 확인되는 경우에 한국 정부에서 거액을 지원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필리핀 현지에서 흔히 돌고 있다고 합니다. 피고인은 이 지원금을 노리고 이미 사망한 공소외인과 공모하여 선량한 피고인을 모함하고자 한 것이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듭니다……”
 
“……때문에 본 혼인은 유효하지 않음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며 설령 이 혼인이 유효하다고 하더라도 별첨한 친자확인검사 결과를 보시면 원고가 피고인의 친자가 아님은 명확하다 할 것입니다. 피고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려 했던 원고의 선량한 마음씨를 배신한 공소외인, 원고의 어머니의 외도로 태어난 아이이며……”
 
“……이번 인지청구의 소로 인하여 피고는 아내로부터 이혼을 청구 받았으며 또한 지리멸렬한 법정 다툼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어 가정이 완전히 파탄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사랑하는 두 딸과도……”
 
자학하듯 반대편의 답변서를 읽고 있는 내게 변호사는 소를 취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굳이 변론날짜에 맞추어 법원을 찾았다. 사라는 마조히스트의 개그를 보는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판사 역시 소를 취하할 의사가 없는지를 물었다. 가능한 최대치의 단호함을 담아 없다고 대답했다. ‘No’ 라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판사는 내가 아닌 통역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한 때 아버지라 믿었던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변호사가 나왔을 뿐이다. 나는 변호사와 통역관까지 대동하여 출석했는데도 말이다. 법원에서는 내가 한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는데도 굳이 통역관을 대동시켜 영어로 말하도록 했다. 어차피 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 통역관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말이 별로 없었던 것은 우리 쪽 변호사도, 상대방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나는 퇴정하지 않고 판사를 향해 질문했다.
 
“제가 한국인이긴 한 건가요?”
 
판사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그 동안 내가 아버지라 믿었던 그 남자처럼. 판사가 무어라 이야기 하자 통역관은 내게 퇴정해야 한다고 했다. 눈이 시뻘개진 것이 느껴졌지만 눈물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한국말이었다.
 
“제가 한국인이긴 한 거냐고요? 그것도 저는 알 자격이 없어요?”
 
“진정하게. 알렌, 이러다간 괜히 벌금 물거나 감치처분 받고 갇히는 수가 있어.”
 
“왜 쳐다보지도 않고 모른척해요. 왜? 피부가 까매서?”
 
차근차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누구의 얼굴을 패버려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내 옆의 통역사도, 변호사도, 테이블 너머의 서기관도, 저 높은 곳의 판사도, 아버지도, 엄마도 모두 허상일 뿐. 아니 애초에 이 땅에서의 나는 그냥 유령일지도 몰랐다. 검은 유령. 그들의 시선은 그냥 나를 투과한다. 지도 위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보이기는 할까.
 
안다. 코피노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다는 걸. 값싼 동정심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적어도 그들에게는 악의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몇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여운가?’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가엾다면 어째서인가?’ 역시 규명해야 한다.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아서? 개발도상국인 필리핀이라는 나라에서 보통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까? 아니면 단순히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척박하기 때문일까? 정말로 정말로 그냥 까만 우리의 피부색이 연민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다들 내 앞에서 맹세할 수 있을까? 만약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이 나아가서는 미국인들과 스페인인들이 여기에 대답을 망설인다면 결국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것은 우리들 피노들이 아니다. 일단 필리핀 전체가 먼저 그들과 동등한 지위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코피노들의 이익과 배치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코피노가 아닐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제 그들에게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애초부터 코피노는 내부에 어떤 소수자를 배출할 만큼의 어떠한 사회도 이룬 적이 없다. 많은 한국인들의 착각과는 달리 코피노는 많아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적어서 문제다. 그렇지 않은가. 머릿수가 많으면 일단 모여서 이익집단이 될 수 있다. 집단은 어딜 가나 이기적이다. 또 비논리적이다. 우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여, 부디 안심하길. 머릿수가 작은 코피노는 결코 우길 수가 없으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원하는 경우에 한국 국적을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 정도 아닐까. 그리고 아버지를 찾는 소송비용을 절감해준다든지, 다른 절차를 만들어준다든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리라 본다. 전쟁의 잔상이 아직도 남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게 연민과 책임감을 느낀다? 그래서 돈을 준다? 일자리를 준다? 일자리는 한국 청년한테도 부족한데? 전혀 포커스가 틀렸다. 나는 케이팝이나 드라마, 런닝맨에 열광하는 소녀가 아니다. 대부분의 코피노가 바라는 것은 필리핀에서의 행복한 삶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냥 가끔 궁금해 하다가 말겠지.
 
모두 알아야 한다. 애초에 문제라는 것은 없다. 거짓말을 하고 멀쩡한 처자식을 버린 아버지 외에 내 인생에 그늘 따위 없었다.
 
내가 요구하는 건 우리를 버린 그 남자를 함께 비난해주는 거다. 비난의 이유는 가엾은 필리핀 모자를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줄이 늘어선 모텔 앞에서 섹스를 부정하는 무책임하고 뒤틀린 성욕과 형태도 근거도 없는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영유아 수출 세계 일위라는, 바로 그 무책임함을 반성해 주기를 바란다.
 
그 반성에는 나 역시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엄마가 지금 눈앞에 나타난다면 묻고 싶은 것들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물어보아야 할 것들이 아니라 내가 인정해야 할 것들이다. 엄마는 필리핀에서 주변에 살던 다른 엄마들과 거의 똑같았다. 유일한 다른 점은 최소한 내게 다른 양식의 사고방식을 씨앗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설령 그 결과로서 내가 엄마를, 또 엄마의 삶을 경멸하게 되더라도 엄마는 내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렇다. 작은 차이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격차를 크게 벌린 셈이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정말로 따져 묻고 싶다. 순수한 필리피노에 비했을 때 조금 더 하얀 내가 느끼던 우월감은 진짜일까?
 
굳이 회의적으로 적는다면 최종적으로는 내게 경멸당하는 것이 엄마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엄마는 성공했고, 또한 실패했다. 나는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미신을 믿지 않으며, 매춘을 혐오한다. 그것들은 결코 필리핀적인 그 무엇도 아니다. 약간 어두운 피부를 가진 자신의 혈통이 부끄럽지 않다고 나는 의식적으로 되새긴다.
 
적어도 사라만큼은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첫 만남부터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랍인이었다면 또는 흑인이었다면 그녀에게 선뜻 데이트를 신청했을까. 위안이 되는 것은 한국인치고는 많이 어두운 편인 사라의 피부색이다.
 
나는 오늘 한국어능력시험 6급 시험을 치르고 돌아왔다. 열심히 공부했고 아마도 무난히 딸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은 토익을 보아야 한다. 필리핀 출신으로서 영어강사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매달 토익을 보는 것이다. 영어가 모국어라는 사실이 아니라, ‘2년 연속 매달 토익 만점’에 중점을 두고 광고를 해야 하는 것은 필리핀 출신의 핸디캡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미국 출신의 흑인이 훨씬 유리하다. 희면 흴수록 좋다는 미신은 여기 이 작은 나라에서 이미 깨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자 가게에 들러 사라가 좋아하는 피자를 샀다. 사라는 언제나 쉬림프와 불고기가 반반씩 섞인 피자를 주문한다. 하프 앤 하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름이다. 글쎄, 우리가 결혼한다면 아이는 하프가 아니라 쿼터겠지. 어쩌면 필리핀인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면 사라의 부모님도 우리 사이를 인정해 주실 지도 모른다. 사라에게 청혼을 하고 지금부터 한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해서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고. 그런 다음 귀화신청을 하고. 발버둥 쳐도 뗄 수 없는 외국인 근로자라는 이름표를 이마에 써 붙인 채. 내가 그렇게 살게 될까. 엄마는 이걸 바랐던 걸까. 당신이 쓰레기장에서 도망쳐 왔듯이 나 역시.
 
내가 가진 패를 헤아릴 겸 여기서 모두 공개해 본다. 아버지는 아마도 한중일계의 아시아인, 어머니는 필리핀인. 나이 만 27세. 키 179센티미터에 몸무게 68킬로그램. 필리핀 유명대학 법학과 졸업. 학업성적 우수. 한국의 일명 인서울 대학교에서 일 년 교환학생 경험 있음. 한국에서의 아르바이트 경험 있음. 현재 영어강사로 근무 중. 유창한 한국어/영어 회화 가능. 토익 만점 20여 회. 한국어 능력시험 5급. 취미는 헬스와 수영. 양아버지의 유산으로 서울 소형 아파트 전세 보유.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