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 와 K
- 작성일 201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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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른 하고도 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섹스를 해보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뭐 어찌됐든 간에 뭇 싱글 족들은 그게 뭘 그리 호들갑 떨일 이냐며 콧방귀를 껴댈지 모르겠지만 나는 남자다. 그것도 사지가 멀쩡할 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가슴살을 빵처럼 부풀리는 헬스를 제외하고는 웬만한 운동도 즐겨하는 젊은 남자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연애의 필요충분조건인 상대방의 성기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얘기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나는 35년 동안 단 한 번도 이성의 몸속에 내 살덩이를 섞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민의 눈빛은 정중히 사양한다. 나는 그런 당신들에게 지린내라는 조소를 선물하고 싶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종족번식을 위한 동물적 행위일 뿐이다.
두두두 작업실 창문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하다. 바닥으로 하릴없이 낙하하는 빗방울을 바람이 창문으로 밀어 붙이고 있다. 빗방울이라고 창문에 부딪혀 얼굴을 구기고 싶겠는가. 그냥 놔두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시뻘겋게 녹이선 창틀위에서 생을 마감한다. 나는 그런 빗물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나약한 녀석 제 생을 그깟 바람에 떠밀려 끝내다니”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나는 밤사이 전기를 먹어치워 배가 꽉 찬 아이 폰에 새로 산 도핑 스피커를 연결했다. sleep maker라는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그중에서 <gentle onto forest foliage>를 선택했다. 어플을 열자 창밖의 빗소리와 스피커로 나온 빗소리가 서로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도시 한가운데 들리는 숲에 내리는 잔잔한 빗소리라. 아.. 이 얼마나 모더니즘한 상황인가. 나는 만족스러웠다. 아_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사 오던 날 조잡한 시트지가 붙어있던 싱크대를 가구용 페인트로 검게 칠해버린 일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한 번 더 덧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후 커피포트에 수돗물을 받았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들어가는 양을 보며 카운트를 셌다. 먼저 컵라면이 채워질 만큼의 물을, 이어 커피를 마실 정도의 물이 채워졌을 때 나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손잡이를 비틀자 끽- 하며 신음이 새어나왔다. 커피포트의 빨간 불을 켜지는 것을 확인한 후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 전원을 켰다. 내문서-숨김 파일 그 안에서 나는 어젯밤 거금 350원을 주고 구입한 수지 닮은 일본배우 파일을 클릭했다. 전체화면으로 전환한 후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컵라면 겉 투명 비닐을 벗기자 수지가 아니라 수저를 연상케 하는 얼굴만 크고 빼빼마른 일본 여자가 혀를 날름거리며 화면을 핥아댔다. “아. 씨발 또 낚였네.” 꺼버릴까 순간 생각했지만 본전 생각이 나서 그냥 두었다. 대신 모니터를 끄고 음성만 듣기로 결정했다. 침대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훨씬 나았다.
비가 내리는 숲속 한적한 데크 위에 그녀와 나는 뒤엉켜 있다. 내 등위로 빗물이 사정하듯 떨어졌다. 그녀의 신음소리는 점점 빗소리 보다 커져갔다. 그녀와 나는 이미 온몸이 젖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두루마리 휴지처럼 하얀, 그녀의 쿨럭이는 배위에 빗물과 함께 정액을 쏟아냈다.
창문을 열자 빗물이 내 얼굴을 할퀴듯 달려들었다. 나는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고 출근을 서두르는 우산 정수리에 침을 뱉었다. 강물에 돌을 던지는 것만큼 흔적 없는 범죄. 그것은 범죄가 아닐 테지. 끝내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날카로운 빗물을 이끌고 방안으로 쏟아졌다.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은 봄비였다. 오늘밤 뉴스에서는 절정을 이룬 벚꽃 잎이 봄비에 처참히 죽어간 장면을 쉴 새 없이 틀어 댈 것이다. 순간 나는 뉴스거리도 못되는 선술집에 앉아 독한 사케 따위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내린 결론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다시 한참을 잠들었다가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다. K였다. 나는 받지 않았다. 아직 숲속에서 빗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창밖을 보았다. 비가 그쳤는지 차바퀴들만 고인 빗물을 칙칙 깔아뭉개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아보았으나 K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콧잔등을 간질이고 있었으므로 나는 더 이상 잠을 잘 수 가 없었다.
내가 K를 처음만난 것은 대학 2학년 이맘때다. 그날도 오늘처럼 오전 내내 비가 왔다. 오후 수업이 없어 하나둘 어디론가 빠져나간 실기실에서 나는 하릴없이 그 전 시간에 그렸던 시커먼 풍경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기실은 칸막이로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그 안에 두세 명이 함께 사용했다. 나는 M라는 여자아이와 같이 사용했지만 그는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았으므로 혼자 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자리는 가장 구석자리였기 때문에 직접 나가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한 출석을 했는지 조차 알기 힘들었다.
빈 공간에 빗방울을 그려 넣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날카롭게 종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화판에 붙일 화지를 제단 하는가 싶어 별 신경 쓰지 않았으나 그 소리가 점점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칸막이 밖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처음 보는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동기들의 그림을 노란색 싸구려 커터 칼로 경쾌하게 잘라내고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아니 심장이 너무 큰소리로 소리치고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유난히도 희고 긴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는 나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주며 미소를 지었다. 190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키가 인상적 이였다. 옷차림은 허름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새것 같았다. 흠집 하나 없는 구슬 같다고 할까?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다른 색을 자아내는 듯 오묘했다. 살짝 검은 피부, 오뚝한 콧날, 적당히 올라간 입술, 허름한 옷차림과 검게 그을린 얼굴만 제외하면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가수로 데뷔한 아이돌 같기도 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가는 집중하지 못했고 오로지 그에게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마치 누드모델이 정물에서 깨어나 나에게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는 계속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가 내 등 뒤에 뭐라고 물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취방까지 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티브이를 켤까 침대로 뛰어들까 잠시 고민을 하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벌컥 벌컥 마셨다. 그러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맥주 한 캔이 다 비워갈 즈음 몸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실기실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 동기들이 학교에 왔을 때 그림이 전부 찢어져 있다? 그럼 범인은? 갑자기 어지러웠다. 나는 다시 학교로 갔다. 누가 볼세라 조심조심 2층 실기실의 계단을 오르던 중 실기실 문 앞에서 심각하게 얘기 주고받고 있는 과대표와 조교의 뒤통수를 보았다. 실기실안에서는 비명 같은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다시 돌아내려갔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왜 실기실로 들어가지 못했을까?
취하고 싶었다. 나는 학교 앞 H바로 들어갔다. 지하2층에 있는 H바는 작기도 작은데다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다 보면 점점 음산해 지는 것이 꼭 관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 애들은 거의 오지 않는 곳이다. 대낮 임에도 그곳은 충분히 어두웠다. 나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늘 앉던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우선 코로나 한 병을 주문했다. 한 병을 비우고 얼음과 위스키 그리고 맥주 세트를 주문했다. 주문한 술이 테이블에 올라오는 동안 나는 멍하니 내 앞에 놓이는 그것들의 상표명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길고 검은 그림자가 하나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양 같은데, 어떤가. 같이 한잔 하는 것이?”
나는 몇 해 전 졸업했지만 학교에서 숙식하고 있는 작가가 되기 전에는 그 어떤 작자도 되지 않겠다던 선배 K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가끔 그는 술을 얻어먹기 위해 학교 앞 술집들을 찾아다닌다고 동기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몇 번 그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기에 나는 당연히 그 일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까 실기실에서 만난 그 남자였다. 심판하듯 커터 칼을 휘두르던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다시 서있는 남자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덜컥, 생각할 틈도 없이 그는 내 앞에 앉아버렸다.
점원은 술을 내려놓은 채 가버렸고 남자와 나 만 남았다. 범인과 목격자가 한자리에 조우한 것이다.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주춤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 남자의 몸짓, 손짓에 그만 넋이 나갔다고 하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유난히 길고 희던 손가락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오른손에 두껍게 붕대가 감아져 있었다. 그러나 붕대 사이로 2마디 정도 나와 있는 손가락마저 아름다웠다. 아마 아까 칼을 휘두르던 중 다친 모양이었다. 덕분에 왼손은 더욱 돋보였다. 왼손을 살짝 들어 자신의 컵과 재떨이 등을 주문하는 그의 손을 그대로 석고 틀에 넣고 싶다는 생각과 피아노 건반위에 올려놓고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잔에 얼음을 채운 후 술을 따랐고 두세 번 잔을 흔들고는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예술이 뭔지도 모르고, 지가 뭘 그리는 지도 모르면서 그림이랍시고 그리고 있는 작자들을 보면 구역질이 난단 말이야. 제 그림이 찢겨 나가도 제일 먼저 중간고사 학점 따위를 걱정하는 것들. 아까 내가 찢어버린 것은 작품이 아니고 그저 그런 시험지 였네, 싸구려 참고서 뒤에 있는 정답 란의 해설을 그대로 베껴 놓은 그저 그런 시험지 답안이었단 말일세. 그런데도 내가 한 행동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때까지도 그의 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나는 순간 그의 질문이 쇠처럼 단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새 철창이 되어 나를 묶고 있었다. 꼼짝도 못하겠다는 표현은 이때 쓰는구나. 라고 느꼈다.
“아니요, 그렇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남의 작품을 찢는 것은…….”
나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냥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작품? 그 것들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정말 그것들이 창작품이라고 할 수 있나? 대답해 봐. 그렇게 생각 해?
그는 연기를 꽤 잘하는 배우처럼 깊고 신뢰감 있는 눈빛으로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치만…….”
나의 말을 끊고 그가 소리쳤다.
“자 시끄럽고 술이나 마시자고! 썩어빠진 사회와 소수만이 지키고 있는 이 아름다운 정의를 위해 건배!”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쯤 그는 자신을 K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술이 꽤 들어가자 그는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았노라고 나 같은 전위적 인간이야말로 진정 예술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며 내 작품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의 정도라고 추켜세웠다. 나는 그날 기분이 꽤나 좋았던 것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리치며 술을 마셨고 그가 우리학교 학생이라는 점과 휴학생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으며 나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그와 대화를 하는 일은 마치 새벽녘 4차선 도로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내일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학생, 학생!”
영업이 끝났다며 늙은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 그는 없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야! 아티스트라고! 시팔”
나는 엉덩이위에 붙어 있는 지갑을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그 후 나는 이틀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아니 깨어나지 않았다. 다시 학교에 갔을 때 교수들과 조교, 학생들은 나를 범인으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모양새로 대했다. 증거는 충분했다. 내 그림만 온전하게 남아있었고 허둥대며 뛰쳐나가던 나를 본 목격자의 증언이 있었다. 나는 어떠한 변명도 하기 싫었다. 심지어 그 보다는 내가 범인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찢겨진 그림들과 내 그림이 같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했듯이 그것들은 그림도 작품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과 나의 징계 문제는 곧 있을 자신의 정년퇴임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염려하는 학과장의 배려로 휴학과 입대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K는 내가 군대에 있는 2년 동안 주기적으로 초콜릿, 과자 따위나 벌거벗은 여자들이 웃고 있는 잡지 등을 보내주곤 했다. 나는 둘 다 관심 없었지만 선임들이 그 덕분에 나를 조금 덜 괴롭혔기에 그냥 두었다. 황금 같은 휴가 기간 동안에도 나는 K와 술을 퍼마시고 떠들고 웃다 복귀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그와 비밀을 공유한 진정한 동지가 되었다. 그는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연락을 해왔다. 내가 언제나 술값을 계산해서 나에게 연락을 하나라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유가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내가 아버지만큼 키가 자랐을 때 아버지는 적당한 만큼의 유산을 남기고 죽었다. 동남아 출장 중에 보트가 뒤집혔다고 한다. 어머니와 나는 곧장 그곳으로 날아가 현지 경찰과 실종에서 사망으로 결론짓고 돌아왔다. 나와 어머니는 그 돈을 쓰며 적당히 살아왔다. 스파게티 보다 라면을 좋아했고 도박하는 인간들은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것들이라 여기며 살았기 때문에 돈은 부족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3년 전 집 앞에 있는 텃밭에 나가 소일을 하시다 쓰러지셨다. 두 번의 큰 수술을 겪고 젓가락처럼 말라가던 어머니는 “술 좀 그만 마셔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나는 그렇게 서른 초반에 고아가 됐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돈은 아직도 꽤 남아있었고 사는데 불편은 없었다. 앞으로도 이정도만 유지한다면 10년은 너끈히 버틸 수 있는 있었다. 나는 작년에 기천만원을 들여 크게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한번 한 이후로는 별다른 작업도 하지 않았고 가끔 재료를 사고 술을 마시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지출을 하지 않았다. 작가라는 게 특별히 티 나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었기에 주위에서도 나의 수입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 되어 가끔 어울리는 몇몇 작가들 역시 정작 내 전시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으면서 작품이 정말 좋다며 자의식, 무의식 어쩌고 추켜들며 나에게 술을 얻어마셨다. 나는 그 말들이 짜식, 무식으로 들리곤 했다. 그러나 K는 분명 그들과도 달랐고 나와도 다른 인간이었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자 지독한 염세주의자에 멀쩡한 미치광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그림을 정확히 읽어 낼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K와 세 시간 후쯤으로 약속을 정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묘한 흥분에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페니스를 만져보았지만 그쪽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생각했다. 그의 손을 생각했다. 그를 만나면 늘 10여 년 전 그 사건이 생생히 떠올랐다. 데생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수학문제 몇 개 더 잘 풀어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놈, 영어 몇 마디 지껄일 줄 안다고 우쭐되던 년들의 그 건조한 그림들이 찢겨나가던 그 순간이 얼룩처럼 선명하게 그의 손에 남아있었다. 그의 오른손 바닥에 손금처럼 남아있는 흉터를 보면 짜릿한 쾌감이 순간 온몸에 탄산처럼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흥분은 그 짜릿함의 기대에서 오는 걸까? 그러나 요즘 들어 k가 변해가는 기분이 들어 씁쓸하다. 결국 그도 다른 연놈들과 다를 바가 없단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그는 요즘 내가 혐오하는 다른 인간들처럼 연애에 대해, 그보다 섹스에 대해 내가 아직 경험 해보지 못했다는 점을 은근슬쩍 조롱하고 비웃기 시작했다.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섹스를 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멍청하고 저속한 짐승 같은 인간들처럼 말이다.
최근 K와의 술자리에서 여자들이 끼게 되었고 그도 마찬가지 짐승이 되었다. 그전에 나와 나누었던 얘기들은 시시콜콜한 잡담이 되어 버리고 모든 이야기는 여자들의 옷을 벗기는 것에 집중 되었다.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먼저 적잖은 적의를 들어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나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대부분 짐승을 좋아한다. 남보다 빨리 뛰고, 힘이 세고, 먹이를 잘 구해오는 수컷에게 관심을 보인다. 남보다 느리고, 힘이 없고, 먹이를 잘 먹지도 않는 나 같은 예술가에게는 애초에 어떤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나 같은 예술가란 경제활동은 특별히 하지 않으며 남들 사는 것에 관심이 없고 남들도 내가 사는 것에 관심이 없는, 몸보다 생각을 가지고 운동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내가 이렇게 소개를 하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때부터 코를 막고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여자들을 혐오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그런 여자들에게 호감을 느낀 적이 많다. 특히 얼굴이 예쁘거나 속된말로 몸매가 육감적인 여자들에게 더욱 그런 감정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건 육체적 호감에 불과하다. 그렇다 단순한 육체적 호감.
마음에도 없는 말로 상대의 기분을 맞추는 것도,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선물을 사주고 섹스를 하는 행위를 연애라고 한다면 또 그게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보다 귀찮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영화도 혼 자보면 그만이고 밥도 혼자 먹으면 되고 섹스는 안 해도 살 수 있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욕구를 해결하며 살 수 있다. 내 주변의 모든 짐승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 내가 그가 아니고 그가 내가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이해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다름을 인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다름, 너와 나의 다름. 아주간단한 문제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너와 다르다. 고로 너도 나와 다르다. 이 간단한 명제를 인정하지 않아 관계는 악화된다. 불쌍하다, 멍청하다, 비사회적이다. 등등으로 자신들과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 나는 이점이 탐탁지 않다. 그럼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았으나 최근 들어 K까지 나를 그런 식으로 동정 하거나 비하 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K에게 보여줄 셈이다.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짐승이 될 수 있다. 얼마나 쉬운 일인가. 내가 못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너희들이 갈구하는 사랑이, 연애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보여줄 것이다.
얼마 전 K는 복잡한 여자관계를 자랑삼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한 모든 순간을 사랑이라 기록한다.’ 그날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오늘은 K에게 각인 시켜 줄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어머니 이외 모두 창부다’ 듣기 거북하겠지만 이것이 네가 말한 사랑이라는 것의 실체고 너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오늘 똑똑히 말해 줄 것이다. 아니 몸으로 보여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K는 나를 진정한 사랑을 위해 욕구를 절제 할 수 있는 진정한 인간이었다고 뼈 속 깊숙하게 각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K에게 말할 것이다.
‘멈춰라 너의 그 소비적 사랑과 섹스를!’
나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호감 가는 상대의 기분에 맞춰주기 위해서. 둘째는 상대의 관심을 끌고 위해서. 그렇지만 보통 술자리에서 그들은 그 점을 숨기고 그저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 라고 얼버무린다. 술 마시는 분위기가 도대체 무엇인가. 또 술을 마시면 상대를 알 수 있고 솔직해 진다고 말한다. 물론 솔직해 질 수 있겠지만 그건 지극히 한정적인 진실에 불과하다. 가령 ‘네가 오늘 입은 티셔츠에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구나. 라고 하는 1차적 진술만을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다. 함께 술을 마시는 남자들은 ‘너와 자고 싶다’는 것이고. 여자들은 ’오늘 너를 유혹하리라‘ 이것이 진실이다. 사실 대부분의 남녀는 그 사실을 안다. 그것이 사랑의 과정이라고 착각 하는 것 일 뿐이다. 즉 육체적 욕구해소 행위를 사랑이라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내가 하는 얘기들을 연애의 패배자인 루저 인간이 내뱉는 지나친 열등감에서 나오는 궤변이라 생각하겠지만 열등감은 상대와 동등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나처럼 환멸을 넘어선 사람은 관찰자로서 그저 객관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언제 꿈꾸기라도 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책에는, 대다수의 연구에서는 이미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들이 있다. 그걸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요점은 너희 들이 꿈꾸는 사랑은 그저 욕구일 뿐이다.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욕구, 그게 해결되니까 성욕이 생기는 것이고 그 성욕의 대상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오늘 그걸 증명해 보이려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K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약속시간 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았다. 나는 목욕재계를 하고 의복을 정제하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환락의 거리 홍대다. 문래동인 내 작업실에서 30분이면 당도하는 거리였기에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가는 길에 체인 미용실에 들려 3만원을 주고 헤어도 최신 스타일로 다듬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k는 아마 나를 보자마자 놀랄 것이다. 내가 봐도 완벽한 변신이었다. 나는 K에게 다시 한 번 약속장소인 상수역 인근 홍대B2클럽의 위치를 문자로 찍어주었다. 평일에도 발 딛을 틈조차 없이 젊은 남녀로 북적인다는 소위 물이 좋은 곳이다. 거리에는 배란일에 맞추어 한껏 치장한 젊은 여자들이 속속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훑어보고 혀를 차고 지나쳤겠지만 오늘 나는 짐승이다. 저 여자들 중 한명이 나의 첫 섹스의 대상이 될 거라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그녀들의 모든 발걸음과 눈빛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늘 반드시 내 인생의 첫 섹스를 해낼 것이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비웃어 줄 것이다. 내 성기는 벌써 한참 전부터 발기 되어 있다.
클럽 안은 포그머신과 담배연기가 공기 중에 뒤섞여 무겁게 떠다니고 있었고 여기저기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무대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남녀가 볶음밥처럼 뒤섞여 있었다. 나는 바에 가서 잭콕 한잔을 주문했다. 바에 기대어 홀에서 흔들고 있는 멍청한 인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재밌었다. 남자들의 눈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 했다. 여자들은 등 뒤에서 자신의 성기를 엉덩이에 부비는 남자들을 하나둘씩 받아주고 있었다. 짝짓기시기에 여기저기 암컷을 찾아다니고 있는 맹수들을 관찰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흥미로웠다. 지켜보는 중간 중간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11시가 조금 넘자 클럽 안은 누구든 스치지 않고는 지나치지 못할 만큼 만원이 되었다. 그때 까지 K는 오지 않았다. 약속을 어기는 친구가 아닌데 나는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내가 보낸 문자 이후에 답장은 없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오지 않으면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클럽을 떠날 준비를 했다.
“어? 조로 오빠 아니에요?”
가슴을 시원하게 드러낸 흰색 탱크 탑에 걷기 불편해 보이는 스키니 진, 그리고 짙은 화장. 분명 내 이름을 들었지만 동명이인이겠지.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다시 말을 걸었다.
“맞네. 조로 오빠. 오빠! 저 모르겠어요? 주안대 서양화과 02학번 S에요 S!”
시끄러운 클럽 음악 때문에 내가 못 들었다고 판단했는지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소리쳤다. 나는 주안대 S? 순간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찌됐든 나를 알고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는 게 확실해 졌으니 모른 체할 필요는 없었다.
“어. 그래 너 오랜만이다.”
그녀가 안 들린다는 듯 왼쪽 귀를 내 입가에 갖다 댔다.
“오랜만이라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계속 그녀를 기억해 내려고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긴 생머리에 서클렌즈 오뚝한 콧날 작은 입술 갸름한 턱선. 분명 낯익은 얼굴이다. 강남역 앞에 붙어있는 성형외과 광고 포스터에서 봤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은 터질 듯 탱크 탑을 밀어내고 있었고 보일 듯 말 듯 배꼽은 티셔츠 와 벨트 사이에서 씰룩거렸다. 성형외과 포스터 이외 학교에서의 후배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빠 되게 멋있어 졌다! 클럽 자주와? 여기 죽이지 않아?”
그녀의 말은 음악소리와 섞여서 뭘 죽인다는 것과 멋있다는 두 가지 의미 밖에 파악이 안됐다.
“어 그래! 재밌게 놀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클럽을 빠져 나왔다. 머릿속에서 아직도 둥둥 거리는 이명이 남아있었다.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나는 근처 일본식 선술집에 들어갔다. 따끈한 도쿠리 한 병과 꼬치구이 2인분을 시켰다. k에게 문자를 보냈다.
“B2클럽 앞 선술집이야. 여기서 기다릴게”
가게 안은 조용했다. 듬성듬성 직장인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이 “마셔라 마셔라"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도쿠리 한 병이다 비워갈 즈음 “이랏샤이마세~” 소리와 함께 K가 등장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K는 나와 눈이 마주친 후 아무 말 없이 내 앞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나는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던 K에게 변명을 요구했다.
“시원한 걸 좀 마시고 싶군.”
“난 그냥 따뜻한 게먹고 싶어서.”
K는 생맥주한잔을 들이키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씨를 만나러 오는 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났지 뭐요”
“뭐? 취한사람처럼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돌아가신 줄 알았지 벌써 15년이 넘은 일이지. 슬리퍼 차림으로 집을 나가 그길로 들어오지 않으신 게. 그 후로 여기저기 수소문 해봤지만 흔적조차 없었지. 사라졌다는 표현이 맞겠군.
“그래서? 만나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뭐라고 하긴 나는 확실히 아빠를 알아봤지. 단번에 알 수 있었어. 별로 늙지 않았거든 근데 그는 날 못 알아보더군 옆에는 젊은 아가씨도 있었고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그래서는 뭐 그냥 지나쳤지”
“뭐? 그냥 지나쳤다고? 가서 신원확인이라도 했어야지”
“행복해보이더라고……. 살아있으면 그냥 살만하니까 살아있겠지. 살만한 사람 뭐 하러 건드려.. 뭐 나도 살만하고…….”
“그래서 늦은 거야?”
“아니 그냥 따라가 봤지. 나도 모르게 어디로 가나. 혹시 이 동네 집이라도 구해서 살고 있나. 쫒아갔지. 택시를 타더라고 영등포에서 내리더군. 그러더니 다시 사라져 버렸어. 마치 사람들 속으로 투신하듯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 거기서 한 시간 정도 찾아 헤매다 그냥 발길을 돌렸지. 근데 웃긴 건 뭔지 아쇼? 아버지를 찾는데 자꾸 젊은 여자들 가슴이, 엉덩이가 눈에 들어오는 거 아니겠소.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 잊을 정도 였어! 하하하 ”
그가 정말 재밌다 는 듯이 크게 웃었다.
“아닐 수도 있잖아? 잘못 봤을 수도 있잖아?”
“아니오. 확실해. 그는 제 삶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분명하오.”
K는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무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때나 확실한 자기주장을 하기 전에 나오는 버릇이었다. 우리는 조금 더 K 아버지의 도박실력과 여성편력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술이 조금 오르자 내 얘기로 화제를 돌아왔다.
“그나저나 형씨 연애는 안할 생각이오? 계속 그렇게 살건 아니겠지 말이오? 내가 볼 때 섹스를 안 해봐서 그렇소. 그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한번 맛보면 헤어 나오지 못할 거요.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예술가들이 예술과 결혼했네. 어쩝네 하는데 그거 순 개수작이오. 뒤로는 얼마나 많은 호박씨를 까고 다니시오. 알잖소. 교수라는 작자들은 학생들 한번 따먹어 보려고 얼마나 갖은 지랄을 하는지. 다 그런 거요. 환상은 개나 줘버리시오 ”
“교수가 무슨 예술가야 사기꾼이지”
“아니 그 말은 맞소만. 어쨌든 내말은 형씨도 이제 남들 사는 것처럼 살라 이거요. 뭐 젊었을 때야 객기로 예술이 어쩌고 철학이 어쩌고 살았지만 그게 다 뭔 소용 있소. 형씨 그림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 있소? 뻣뻣하게 굴지 말고 이제 연애도 하고 섹스도 하고 꼰대들께 선생님 하면서 아부도 떨고 해서 어디 강사 자리라도 하나 얻어야 될 거 아니오? 안 그렇소?”
나는 K를 이제 그만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교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남들처럼 못사는 게 아니라 안사는 것이란 걸 보여주고 나서 깨끗이 정리하리라.
“남들처럼 사는 게 뭔데? 사랑이 뭔데? 결혼하고 취직하고 애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거? 그건 그냥 짐승처럼 사는 거야, 적어도 인간은 고통스러워해야해, 자신이 누군지 사는 게 뭔지 죽는 게 뭔지에 대해 늘 고통스러워야 된다고. 그게 인간이야. 다른 사람들은 그냥 시계처럼 사는 거야. 그냥 자신도 모르게 자전하는 거라고. 여자를 만나야 되니까 사랑하는 거야. 사랑하기 위해 만나는 게 아니라고. K 기억나? 처음 만 날날 당신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난 말이오. 예술을 학습하는 것들을 증오하오.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 것들이 역겹소. 이봐, 형씨 난 형씨 그림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디다. 아_ 재미없다. 진짜 사는 맛 난다. 젠장. 이게 리얼 이다. 이게 진짜란 말이오. 형씨야 말로 진정한 예술가요. 세상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단 말이오. 저 무지렁이들 속에서 벗어납시다. 육체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우리함께 이데아로 가는 거요. 하하하하”
“나는 아직도 기억나. 행복하냐? 즐겁냐? 좋냐? 묻지 말고 살자고 했던 당신이. 나 역시 그러자고 했지. 근데 당신은 요즘 자꾸 물어보고 있어.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냐고? 좋냐고? 난 그런가. 없어 그냥 사는 거야. 그냥 뭐도 아니고 나로 사는 거라고. 당신은 지금 내 인생에 좌측통행해라 우측통행해라 명령하는 것 같다고! 난 그냥 걷고 싶어. 그 딴것 신경 안 쓰고 그냥 걷고 싶단 말이야.”
나는 살짝 취기가 올랐다. 사케 한 병을 더 주문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K를 보았다.
“12 시오. 오늘이 밝았소. 어제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소?”
K는 능청스럽게 담배연기와 함께 말을 뱉었다.
“사랑? 만나서 밥 먹고 섹스하고, 섹스하고 밥 먹고 몇 년 하다가 지겨워 지면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 만나서 밥 먹고 섹스하고 그게 사랑이야? 난 말이야 사랑은 정신이라고 봐 육체가 아니라고. 세계에서 오로지 둘만 남게 되는 정신! 무아지경 말이야! 둘 빼고 다 사라지는 거야. 그렇게 되면 모텔을 찾을 필요도 없어. 이미 세계가 다 사라졌는데, 주변이라는 것이 없는데 그딴 게 뭐가 필요해. 그런 사람은 분명 있어. 난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 치만 K 내가 오늘 너에게 보여줄게. 남들처럼 사는 게 얼마나 쉬운 건지.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건지. 섹스란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걸…….”
“조로 오빠! 호호호. 여기서 또만 나네?
S였다. 아니 S라는 여자였다. 나는 아직도 그 여자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이 들어온 남자하나가 나를 힐끔거렸다. 근육이 우락부락 한걸 보니 형편없는 놈이 분명했다. S는 멀뚱히 서있는 그놈에게 가서 뭐라 뭐라 하더니 녀석은 나를 한번 쏘아보고는 인상을 구기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우리 친오빠라고 말하고 보내버렸어. 호호 잘했지? 나 여기 잠깐 앉아도 되지?”
이미 앉고 나서 물어보았다. 나는 K의 눈치를 봤다. 상관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보였다.
“아까부터 징그럽게 들러붙기에 술이나 한잔 얻어먹고 보내버리려고 했지. 잘됐지 뭐. 솔직히 별로였거든. 근데 오빠 왜 이렇게 멋있어 졌어? 학교 다닐 때는 매일 모자에 후드에 얼굴한번 제대로 보여 주지도 않았잖아?”
그녀가 호들갑을 떨며 박수를 치는 순간 기억이 났다. 그 사건 이후 나는 3년이 지나고 복학 했다. 그 사건을 아는 이들은 모두 졸업을 했거나 소수만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누가 나를 알아보기라도 할까봐 줄곧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학교에 다녔다. 학번으로 봤을 때도 그렇고 이 여자는 아마 신입생 이였을 것이다. 선배들 실기실에 놀러와 남자 선배들에게 당돌하게 과제를 해달라고 조르던 신입생, 나에게도 몇 번 왔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그 후로 K에게 보란 듯이 시쳇말로 썰을 풀기 시작했다. K가 여자들을 대할 때 취하는 태도였다. 술이 한 병 두 명 늘어나면서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고 S는 “오빠..우리 한번 만나볼래?”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아냈다. 나는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다. K는 그동안 연실 담배를 피워대며 나와 S의 애정행각? 을 불만스럽게 지켜보았다. 술자리가 끝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근처 모텔로 갔다.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옷을 벗고 나도 놀랄 정도로 능숙하게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애무를 했다. 특히 무릎과 목뒤를 지날 때 그녀는 몸을 비틀며 신음을 질러댔다. 그녀의 몸은 생각 이상으로 뜨거웠으며 기계로 깍은 듯 굴곡이 매끄러웠다. 나는 미끄럼틀 타듯 몇 번이고 그녀의 몸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이제 됐어! 얼른 넣어!”
그녀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나는 그동안 동영상에서 보던 모든 체위를 넘나들었다. 그럴 때 마다 그녀는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수십 번 더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 움직임은 끝이 났다. 사랑한다니. 그래 결국 섹스가 사랑이 그녀는 큰대자로 누워 담배를 하나 집어 물고 말했다.
“오빠 정말 최고였어! 씨발! 아까는 진짜 미치겠더라. 근데 오빠 아까부터 봤는데 오빠 손…….그 손 진짜 예쁜 거 알아? 솔직히 아까 오빠 손보고 뻑 갔다니까? 남자 손 보고 흥분되긴 처음이었어.”
S는 내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입술에 갖다 대곤 했다.
“어? 상처 있네? 칼자국 같은데? 손바닥에 이 상처 뭐야 오빠?”
“무슨 상처?”
나는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내 손바닥을 살펴보았다. 분명 손바닥 중간부터 손목까지 상처 자욱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 이후 그녀가 뭐라고 몇 마디 더 물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손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엇에 이끌러 가듯 한달음에 작업실까지 뛰어갔다. 무엇에 홀린 듯 붓을 휘둘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무엇을 먹을 수도 없었고 잠을 잘 수 도 없었다. 내가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붓이 내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물감들과 붓들이 물에 풀린 휴지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내 작업실이었다. 그런데 너무 낯설었다. 한기까지 느껴졌다. 답답하고 어두웠다. 창문을 열고 싶었다. 창문엔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서있었다. 나는 일어나 형광등을 켰다. 이윽고 검은 그림자의 형체가 드러났다. 화판이었다. 세로로 세워져 있는 100호 화판이었다. 적어도 수십 번 이상은 덧칠한 것 같은 검은 배경의 그림. 자세히 들여 다 보았다. 검은 물감 뒤로 희미하게, 발가벗은 K가 서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림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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