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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자화상」

  • 작성일 2015-07-08
  • 조회수 8,819


서정주,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숯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빛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 마냥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_ 서정주 -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시집 『화사집』『신라초』『동천』『국화 옆에서』『질마재 신화』『떠돌이의 시』 등, 산문집 『한국의 현대시』『시문학 원론』 등이 있음. 2000년 작고.


낭송_ 강왕수 - 배우. 연극 「아부의 왕」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등에 출연.



배달하며

천부의 시인, 서정주가 스물세 살 중추에 쓴 자화상이다.
병든 수캐로서의 피와 본능과 운명을 격렬한 호흡으로 노래한 이 시는 언제 읽어도 목이 얼얼해지곤 한다.
“애비는 종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등 잘 알려진 시구 속에서 사금처럼 반짝이는 그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2000년 12월 눈 많이 내리는 날, 그가 86세로 타계했을 때 이 시 「자화상」 속에서 그의 처절한 유언을 발견한 한 평론가의 시선은 참 탁월하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올해 그의 탄신 100주년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거쳐 온 시인의 상처와 죄와 비극적인 운명으로서의 「자화상」을 본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 『미당 시전집 1』(민음사)

▶ 음악_ 자닌토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김태형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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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미모마미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그후로도 60여 년 넘도록 언어의 연금술을 당당하게 펼치신 시인이시지요. 스물 셋에 썼다고 하니 더 멋져보입니다 감사합니다.

    • 2015-07-25 22:49:16
    미모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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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깐나

    시를 모르던 시절 20살, 내게 서정주의 '신록'이란 시를 여행지에서 휘갈겨 써보냈던 친구에 감성을 생각해본다. 시 전문이 기억나지 않아 '신라가시내'와 '기찬사랑'을 힌트삼아 '신록'임을 찾아냈다. 그때 그시절, 내게 시를 휘갈겨 써보냈던 친구를 보고싶다.

    • 2015-07-19 16:37:12
    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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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엠스타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마음에 힐링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고운 시간 되세요.^_^

    • 2015-07-13 18:20:21
    포엠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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