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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비

  • 작성일 2015-10-31
  • 조회수 206

하늘비

 

서하는 의자에 앉아서 잡지책을 뒤적이다가 몸을 뒤로 기울여 건너편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연구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게 예쁠 것 같지 않아?”

그러자 연구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21세기 패션잡지잖아. 그걸 봐서 뭐하게?”

이 원피스가 예쁠 것 같아서.”

서하가 말하는 것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흰색 원피스였다. 그림 옆에는 작은 글씨로 14~17세 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연구원은 그 단색의 원피스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청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결정했다. 이걸로 할래! 시대별로 다 봤는데, 이게 가장 예쁘고 그리고 나들이 하기 좋을 것 같아.”

그러니까 대체 왜?”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연구원이 말했다. “그리고 21세기 옷들은 일반섬유를 사용하는데다가 내장 컴퓨터도 없고 보온 기능도 없어서 실용성이 떨어져. 입자밀도가 약해서 압축광양자도 코팅할 수가 없고.”

그러나 서하는 연구원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중얼거렸다.

그런데 LN-8558 재질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의상에 관련된 정보라면 중앙 데이터실 쪽에 있을 거야.”

연구원은 몇 초 정도 미심쩍은 눈으로 서하를 보다가 다시 자신의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분석해야 할 제4구역 피험체들의 게오르그 필터값이 무려 3일치나 밀려있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눈이 침침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얽히고 설켜있는 그래프의 수치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모니터가 꺼졌다. 순간적으로 그는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그 다음에는 화면이 새하얗게 변했고, 그 하얀 화면의 왼쪽에서 까만 개 한 마리가 걸어 나와서 컹컹 짖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 떠오르는 자막.

[Liberi Vivite]

“……서하! 내가 멋대로 시스템 해킹하지 말라고 했지!” 그의 옆에 앉은 다른 연구원이 온 몸을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연구실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란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죽은 컴퓨터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연구실의 모든 컴퓨터가 통제권을 빼앗긴 것이다.

그 소란의 주범은 그러나 우아하게 몸을 일으키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 손에는 여성패션잡지를 들고.

[허가되었습니다.]

단조로운 기계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쇳소리를 내며 연구실 문을 열었고, 서하는 그대로 충격과 공포에 빠진 연구원들을 뒤로 하고 걸어 나왔다.

어디 가는 거야? 한 시간 후면 테라포밍이라고?”

미안합니다. 오늘은 일에서 빠질게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저녁때까지는 돌아올게요!”

그리고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연구실에 남은 사람들은 잠시 후에 모든 컴퓨터들이 정상으로 돌아왔는데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로부터 수 초 후였다.

감사관에 전화해! 서하가 나갔다!”

 

그 무렵, 서하는 이상한 곡조를 흥얼거리면서 길고 긴 복도를 걸어서 내려가고 있었다. 바로 위층에서는 감사관의 사람들이 그의 위치를 파악하느라 분주하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아주 태연했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는 락이 걸려있었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한참을 걸어서 조명이 미약한 어느 갱도에 이르렀다. 그 곳은 제1구역부터 제8구역을 이어주는 오래된 수직 통로로 이용되지 않은지 조금 오래된 곳이었다. 먼지가 곳곳에 쌓여있었고, 전조등이 깜박였다. 함내를 수리하기 전에는 보조 제네레이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폐쇄되고 없었다. 서하는 그 자리에 선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비가 탈출을 시도한 것은 오전 10시경었다. 그날 하늘비의 담당은 이금 박사였는데, 그는 완두콩 커피를 내린 다음 방으로 돌아왔고 거기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너무 놀라서 그만 커피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곧 이어 들이닥친 감사관 사람들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운 시간이 채 8초도 되지 않는다고 열심히 변명했지만 그 시각 하늘비는 이미 그 짧은 다리로 있는 힘껏 달려서 구역분리획이 있는 곳까지 도착해 있었다.

한 감사관은 위성추적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재밍이 너무 심합니다. 아무것도 안 잡히는군. 서하인것 같습니다. 방금 전에 비상연락망을 통해서 전문이 왔는데, 서하도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이금 박사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14살짜리 여자아이가 달리 갈 만한 곳이 있습니까?” 감사관이 박사에게 물었다.

그 애는 여기서 태어나서 이 방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습니다. 길도 몰라요.”

그런 것치고는 대범한 범행인데요. 박사님, 저희가 이 일을 위에 보고하시기를 원치 않으시겠지요.”

그러자 이금 박사는 새하얗게 질렸다.

우리는 우리대로 이 근방을 뒤져보겠지만, 박사님이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수습하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감사관은 조금 짓궂을 정도로 씩 웃었다. 그리고 이금 박사가 허둥지둥 문으로 가자 그의 뒤통수에 대고 뛰세요, 박사님! 하늘비보다는 빨리 달리셔야 따라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소리쳤다.

이금 박사는 복도를 따라 무작정 달리다가 하늘비가 갈 만한 곳을 생각해보았다. 그 아이가 어디를 갈 수 있을까?

 

하늘비는 왜소하고 조그만 여자아이였는데, 이것은 처음 저지른 탈출이었다. 처음에는 폴짝폴짝 뛰면서 이 멋진 자유를 즐겼지만, 지나다니는 과학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하면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하늘비, 잠깐! 잠깐만 기다려라!”

하늘비는 놀라서 몸을 홱 돌렸다. 복도 끝의 계단에 이금 박사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감사관들의 충격요법이 아주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늘비, 이리와라.” 그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왜 그러니? 여기 있으면 안돼. , 돌아가자.”

그러나 소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박사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더 걸었다.

싫은데…...”

뒤로 물러나며 하늘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이렇게 할까? 돌아가면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 네가 좋아하는…….”

그것도 싫어!”

아직 다 듣지도 않았잖니.”

뭐든지 하여간 싫어, 싫어. 싫어!”

하늘비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재차 말했다. 그러나 이금 박사는 아이가 투정을 부리건 말건 턱까지 찬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아이를 달랬다. 그는 복서도 아니었고 400미터 단거리 육상선수도 아니었지만, 이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하늘비를 붙잡든가, 아니면 감사관의 말처럼 옷을 벗든가.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럼 말해보렴. 무엇이 싫니?” 그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하늘비는 딴청을 피우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의 단발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났을 뿐이었다.

나는 네 편이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으마.”

이금 박사는 하늘비가 막다른 곳에 몰렸음을—심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정말로 그 그 곳은 막다른 길이었다알고 너무 아이를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조명이 그렇게 밝지는 않았지만 하늘비 뒤로 폐쇄된 수직갱도를 보았던 것이다. 그 너머는 낭떠러지였다.

다행히도 폐쇄된 구역이었군. 그런데 출입금지 팻말도 걸어놓지 않다니. 시설관리팀에 항의해야겠군.’ 이금 박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금 박사는 곧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늘비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두 눈을 깜박이다가 곧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고, 그는 급히 아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중력장 제어]

 

그 시각 가만히 제자리에 선 채 고개를 위로 젖히고 있던 서하가 공중에서 움직임을 포착하고 떨어지는 소녀를 받기 위해서 두 팔을 뻗고 있었다. 그런데 서하가 하늘비를 붙잡는 순간 여러가지 일이 동시에 생겼다.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인공적인 중력장의 힘을 수직갱도가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은 하늘비를 잡으려고 몸을 날렸던 이금 박사가 거꾸로 중력장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일어난 일은이것이 가장 신기한 일이었다하늘비가 서하의 손에 닿는 순간 미립자들이 변화될 때 나는 특유의 소리가 나면서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이 변한 것이었다. 아무런 특색이 없는 피험체복에서 밑단이 사락거리는 하얀 원피스로 바뀌었다.

서하!” 하늘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보고 두 눈을 더 크게 떴다.

옷이 마음에 들어? 내가 골랐어. 재질까지 똑같이 구현시켰는데, 네가 좋아하는 촉감이었으면 좋겠다. , 하지만 지금은 우선 여기서 나가야겠는데…..”

수직갱도의 벽들이 무너지며 쏟아지고 있었다. 이금박사가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한 녀석아! 여기는 폐쇄구역이라 그렇게 강한 중력장을 견딜 수 없어!”

그러나 이금 박사의 고함 소리는 곧 떨어지는 잔해 소리에 지워졌고, 세 사람은 완전히 콘크리트와 철근 더미에 파묻혔다.

잠시 후, 수직갱도는 흔들림을 멈추었다.

서하는 한 손으로는 하늘비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위로 쓰러지는 내벽을 받치고 있었다. 이금 박사는 그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자신의 발이 끼었다고(“난 죽었어! 죽게 된 거야! , 이럴 수가!”)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 서하 너 팔이.” 하늘비가 말했다.

서하도 탈골된 자신의 팔꿈치 관절을 보았다. 인공신경과 철심이 피부를 뚫고 나와 있었다.

괜찮아. 일상용 B형 장비라서 내구도가 낮아서 그래. 큰 문제는 없어.”

그들은 수직갱도의 최하층에 말 그대로 잔해에 파묻힌 꼴이었다. 그나마 떨어지던 잔해들이 서로 기댄듯한 형태로 멈추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흔적도 남지 않고 깔려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통로를 울리던 소리가 천천히 줄어들면서 사방은 곧 조용해졌다.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무게가 상당했는지 서하가 무릎을 꿇었고, 이금 박사는 요란스레 삐걱이면서 죄어오는 감옥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참 요란한 탈출이구나! 서하, 너 아직 내장 재머 켜두고 있지? 어서 끄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해라. B형 장비로는 우리 다 깔려 죽을 거야.” 이금박사가 끙끙대며 말했다. “어서! 난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 당장 병원에 가야 해.”

서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무너져 내리던 내벽 조각들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잔해들은 세 사람의 주위로 떠올라서는 방해가 되지 않는 쪽으로 움직이더니 저절로 쿵 하고 떨어졌다. 하늘비는 여전히 서하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채 머리를 묻고 있었다.

몸에 안 좋으니까 사상력은 너무 사용하지마.” 서하가 하늘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잔해가 치워지자 엉망이 된 수직갱도가 눈에 들어왔다. 서하는 옆에 하늘비를 내려주고 이금박사의 다리를 갈고 있는 커다란 철근덩어리를 치워주었다. 다행히 이금 박사의 다리는 부러져 있지 않았지만 심하게 부어있었다.

그는 거꾸로 누운 채 하늘비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좋아서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을 지켜보았다.

구조요청은 해 둘게요. 제가 나가면 재밍이 없어질 테니 금방 구조대가 올 거에요, 박사님.”

잠깐 어디를 가는 거냐.” 이금 박사가 말했다.

그러자 하늘비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밖에 나갈 거에요!”

 

하늘비는 서하의 손을 잡은 채 폴짝폴짝 뛰면서 걸었다. 그리고 비록 먼 거리였지만, 희미하게 울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통로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서하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쫓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서하가 허리를 숙여 하늘비에게 속삭였다.

다 부숴버리자!”

그건 안돼. 그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다쳐. 너 인성훈련 제대로 받은 거야?”

별로 상관없잖아. 인성훈련 따위.” 하늘비가 샐쭉하게 말했다. “그리고 항상 날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다치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렇게 행동하면 안돼.”

너야 휴머노이드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지. 난 사람이라고. 화도 나고 기분도 나빠지는 걸. 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

서하는 말없이 하늘비를 보다가 소녀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목마를 태웠다.

멋대로 행동하지 않는 대신 내가 밖에 데려다 주기로 했잖아. 그리고 나는 기동한지 오래되어서 유사감정기관이 다른 기종보다 잘 발달되어있어. 네가 왜 화가 나는지 이해 할 수 있어.”

서하는 밖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늘비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행동을 보이는 휴머노이드와 탈주한 초상능력 발현 피험체를 잡기 위해 파견된 무장군인들이 둘을 둘러싸고 있었다.

 

서하, 멈춰라.” 어떤 날카로운 목소리가 말했다. 곧이어 흰 가운을 입은 여자과학자가 무장군인들 틈에서 걸어나왔다. 6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가 많은 과학자였다.

아무리 너라도 이 이상 월권행위를 하면 강제로 정지시킬 수 밖에 없어.”

서하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려봐!” 하늘비가 맞받아쳤다. 제 딴에는 겁준다고 한 말이었겠지만 여자과학자는 피식 웃는 것으로 넘겨버렸다.

얘야, 그 머리카락은 누가 다 심었는지 아니? 내 어머니랑 내가 다 심었어. 내가 그걸 뽑고 싶으면 뽑는……”

그 순간 여자과학자가 들고 있던 서류가 퍽 소리를 내면서 터져버렸다. 동시에 그녀가 쓰고 있던 안경도 깨졌다.

하늘비, 그만. 거기까지.” 서하가 다시 소녀를 들어서 자신의 앞에 내려주었다.

냉랭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여자과학자는 깨진 안경을 벗은 다음에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여분의 안경을 꺼내서 다시 썼다. 사실 하늘비가 부순 그녀의 안경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저녁때까지는 돌아올게요.” 서하가 그 침묵을 깨면서 말했다. “나들이 가려는 거에요. 하지만 꼭 돌아올게요.”

그건 누구 생각이지?”

제 생각이에요.” 서하가 대답했다.

네 역할은 탁아소가 아냐.”

그러자 서하는 특유의 위화감 없는 얼굴로 웃었다. 휴머노이드는 많지만 그렇게 사람과 비슷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기종은 별로 없었다.

약속합니다. 만약 저희가 5시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절 폐기하셔도 좋아요.”

“……좋아. 대신 돌아오면 네 기억을 일정량 소거할 줄 알아.”

알겠습니다.”

여자과학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무장군인들이 총구를 치웠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통행증을 꺼낸 다음 허가코드를 서하에게 불러주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멋대로 시스템 해킹하지 말고. 허가코드 줄 테니까 돌아올 때 쓰도록 해.”

 

탈출극이 평범한 피험체의 외출허가로 바뀌자 더 이상 자신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을 안 군인들은 망가진 휴머노이드 또는 반항하는 피험체를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물러났다.

네가 몇 년 전에 한번 오작동을 일으켰을 때 그때 폐기처분했어야 하는 건데.” 여자과학자가 중얼거렸다.

그건 오작동이 아니었다고 제가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서하가 말했다.

기계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

어휴, 그럼 믿지 마세요.”

 

하늘비는 그러나 밖으로 나왔을 때, 고대유물실에서 보았던 것과는 많이 다른 우중충한 하늘과 탁한 물 그리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땅을 보고 적잖이 실망한 것 같았다.

나 물에 발 담가보고 싶어.”

저 강은 산성도가 너무 높아서 들어가면 피부가 타버려.” 서하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저게 하늘이야? 뭐 저래?”

저건 하늘이 아니고 구름이야. 오늘은 구름이 많이 껴 있네. 으음— D형 장비로 교체하고 나올 걸 그랬나. 그랬다면 구름들을 치워버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늘비는 앞서서 강둑을 느릿느릿 걸었고, 서하는 조금 뒤쳐져서 걸었다. 큰 호수에서는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머리 둘 달린 개구리를 물고 있던 새 한 마리가 갈대에 앉아 있다가 포르르 날아갔다.

조금 높은 곳으로 가보자.” 서하가 나무가 듬성듬성한 언덕을 가리켰다.

메마른 곳이었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바람이 불었다. 하늘비는 눅눅한 바람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치마자락을 흩고 지나가자 깜짝 놀라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은 30분 정도 걸어서 완만한 둔덕에 올라섰다. 이파리가 누렇게 뜬 개망초와 질경이가 땅에 납작하게 달라붙어있었다. 서하는 그 풀들의 이름을 하늘비에게 알려주고 여름이 되면 어떤 꽃을 피우는지도 알려주었다.

자전축이 뒤틀려서 사계절이 사라져 버렸지만, 예전에는 여름이 되면 꽃들이 만발했어.”

언덕 위에서는 호수의 끝이 보였고, 그 너머에 솟아있는 침엽수림도 보였다. 우중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하늘비가 지냈던 좁은 방에 비하면 엄청나게 넓었다. 하늘비는 어느새 배실배실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여기저기 오가고 있었다. 흙을 발로 차보고 조약돌도 걷어차고 물에 빠뜨렸다.

세상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해서, 하늘비와 서하가 길을 걷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짐승 같은 것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하늘비는 손바닥을 내려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얀 원피스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서하가 하늘비의 코피를 닦아주었다.

잠시만 고개 젖혀봐. 여기가 방사능 수치가 높아서 그래.”

나 얼마나 더 여기 있을 수 있어?”

한 두 시간 정도? 그 이상 있으면 몸에 좋지 않아.”

지금 몇 시야?”

“1 30.”

하늘비는 근처의 바위에 앉아서 서하가 챙겨온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는 언덕을 내려가 계속해서 강둑을 따라 걸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구름이 자욱한 날이라서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기 직전에 잠깐 하늘이 개었고, 소녀는 처음으로 붉은 빛을 뿌리는 늙은 해와 서쪽하늘을 진홍색으로 물들이는 석양을 보았다. 서하는 잠자리 하나를 잡아서 하늘비에게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비가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려서 서하가 업은 채 걸었다.

다음에도 또 놀러 나왔으면 좋겠어.”

아마 다음에는 어려울 거야. 원래 사람들은 방주 밖으로 나오면 안돼.”

너는 자주 나가잖아.”

나는 방사능에 아무 영향을 안 받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방에만 갇혀있는 것은 지겨워.”

방주에서는 아까의 여자과학자와 군인들 몇이 서하와 하늘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뜯고 있는 이금 박사도 거기에 있었다. 이금 박사는 두 사람이 보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고, 서하에게서 반쯤 잠든 하늘비를 받아들었다.

조금 지친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래 걸어본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서하가 말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 하늘비.”

안녕, 서하. 오늘 재밌었어.” 하늘비가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말했다.

이금 박사는 하늘비를 데리고 다시 제 8구역으로 돌아갔다.

다음 같은 소리하네.” 여자과학자가 말했다. “너는 왜 이렇게 항상 말썽인지 모르겠다. 네 할 일만 하란 말이야. 너는 기계야. 인명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시하게 여겨야 하는데 14살짜리 아이가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해서 정말로 데리고 나가다니. 한두 번은 괜찮겠지만, 잠정적으로 몸에 안 좋다고. 그걸 알고도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래도 데리고 나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사람 흉내는 내지마.”

그리고 그녀는 옆의 연구원들에게 말했다. “서하-102은 이대로 동결 처분합니다.”

, 그래도 폐기는 아닌가요? 난 예쁨 받나 봐요.” 서하가 웃었다.

최대한 널 고쳐 봐야지.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여자과학자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뻗어서 서하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10 5천개였지……”

지금은 10 1 280개 남았어요.”

, 뼈빠지게 심어놨더니 진짜 두피조직도 아닌데 머리카락은 왜 빠지는 거야. 그런데 그거 알아? 네 머리카락은 여자 머리카락이다? 기증자가 여자였거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라이터가 시원치 않자 신경질을 냈다.

너희 둘이 밖에 나가있는 동안 생각을 해보았는데,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은 879년에 추가된 아모레라는 프로그램인 것 같아.”

그러니까 오작동이 아니라고……”

제발 말대답 좀 하지 말아라.” 그러나 퉁명스러운 태도와는 달리 여자과학자는 그렇게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네 담당자니까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해. 하지만 뭐…… 너는 내 고충 따위는 관심도 없겠지?”

그렇지는 않아요.”

여자과학자는 서하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너는 구형이라서 최대한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아모레 프로그램은 제거를 할 거고, 하늘비에 대한 네 기억도 지울 생각이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남기고 싶은 말이있다면 지금 하거라.”

서하는 생각에 잠겼다.

딱히 남기고 싶은 말은 없어요. 또 친해지면 되니까요.”

그래 알겠다. 그럼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미안하다던가 아니면 죄송하다던가 유사감정기관이 너처럼 발달이 잘 되어있으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서하는 긴 침묵에 잠겼다. 여자과학자는 서하가 오늘 일을 사과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가 들은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하늘비에게 잘 대해주세요. 따님이시잖아요.”

물론 서하의 말은 엄밀하게 맞지는 않았다. 생물학적으로는 딸이지만 법적으로는 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내 딸을 아직 테라포밍도 끝나지 않아서 방사능이 가득한 저 바깥에 데리고 나갔다고?”

하늘비는 산책하는 것을 좋아해요. 가상 산책로 말고 진짜 땅을 밟는 것을 좋아해요.”

그 산책 한번에 수명이 뭉터기로 줄더라도 말이냐?”

.” 서하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