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유영

  • 작성일 2015-10-31
  • 조회수 202

어떻게 해도 괴로운 처지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나는 가능한 웃고 살려고 했다.

내 주변에는 그런 녀석들이 많았다. 현실의 비참함에 짓눌려 인간성을 잃어버린 불쌍한 종자들. 그들은 정신줄을 놓고 미친 듯 웃어대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을 죽이며 웃고 죽임 당하며 웃었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는 잘 되지 않았다. 내 입가에 맺히는 것은 언제나 허탈과 체념이 뒤섞인 가벼운 냉소 뿐.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나와 같은 처지의 동기가 한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도희. 그녀의 스승이 직접 내려준 이름으로 ‘도를 쓰는 여자’라는 간단한 뜻이다. 살문의 대원들이 받는 이름은 다들 이런 식이다. 내 이름은 유영이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이었는데,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살수라는 놈이 하도 기척을 숨기는데 서툴러서 이런 어거지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차라리 무영이라면 꽤 멋있었을 텐데..

어쨌든 그녀는 아름다웠다. 백이 넘는 동기들 가운데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두드러졌다. 그것이 그녀의, 혹은 그녀를 향하는 칼 끝을 무디게 하지는 않았지만, 좌우간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동기들 중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이는 많았다. 그들 중 아무나 골라 잡으면 될 것을, 그녀는 하필 나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다.

“정말 싫다.”

맨 처음 도희가 나에게 건낸 말이었다. 그때 나는 바위 뒤에 은신한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들려온 인기척에 기절할 정도로 놀라 펄쩍 일어섰다.

눈 앞에 아름다운 여인의 약간 찌푸려진 얼굴이 보였다. 어째서 그녀가 여기 있는 거지? 나를 미행한 것인가? 나는 왜 그녀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햇나. 그녀가 나를 찾아온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너도 그렇지?”

“무슨 말을 하는거요..”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와 이러한 꺼림직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떤 주제라도 말을 섞고 싶지 않다. 그녀는 주목받는 우수한 살수였고 나는 그냥 저냥 조용히 있고 싶은 열등한 대원이었으므로.

“부인할 필요 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왜냐면 평소 네 얼굴에 써 있거든.”

“...그만 두시오. 다시는 내게 말 걸지 마시오.”

나는 두려웠다. 그녀의 밑도 끝도 없는 몇 마디에 담긴 뜻은 아주 간단하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즉 ‘살문이 싫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이 간부들의 귀에 들어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될 것이다. 여기서는 문에 방침이나 존재의의에 의문을 갖는 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흥. 남자라는 녀석이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어차피 여긴 우리 둘 밖에 없어.”

확실히 주변에는 그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도희를 믿지 않았고 나 자신도 믿지 않았다. 여기서는 명이 짧다. 오래 살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한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무언의 의사를 전했다.

“난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하지만 내 뜻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 하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같이 도망가자.”

결국 듣고야 말았다. 예상했던 말이지만 절로 소름이 돋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 있어봐야 희망은 없다. 난 더 이상 살문의 도구로 사용되고 싶지 않아..”

“.....”

도망가다니 어디로? 어떻게? 그녀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무언가 그녀의 헛소리에 답해줄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냥 씩 웃었는데, 그게 그녀의 눈에는 퍽 안 좋게 보인 모양이다.

“난 진심이다. 비웃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 다오.”

“음..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합시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데로 답을 주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썩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난 큰 맘 먹고 말을 꺼낸 거야. 이야기를 없던 걸로 하려면 살인멸구 하는 수 밖에 없다.”

“.....”

내 입가에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자 다시 대답해줘. 같이 갈거지?”

“.....”

그녀가 은연중에 살기를 발해 나를 압박해온다. 도희는 나처럼 덜 떨어진 하급살수와는 다르게 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는 특급의 살수였고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

.

.

 

그날 이후 나는 자주 악몽을 꾸었다.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자주 놀랐다. 가능한 웃고 살려고 했는데, 억지로도 웃을 수 없었다.

‘빨리 방법을 찾아 보라구!’

도희는 나를 자주 닥달했다. 먼저 탈출을 언급한 것은 그녀였지만, 막상 그녀는 제대로 된 계획조차 세워 놓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더 이상 살문에 있을 수 없으니 떠나야 겠다.’는 대전제만 세워 놓고 거기에 맞춰 가려고 했다. 물론 내게는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포기합시다. 살문에서 감시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임무중 도망치는 것도 단맥단 때문에 불가능하오'

'아무튼 방법을 찾아 내라. 넌 동기중에서도 머리가 좋으니까 틀림없이 방법을 찾을 수 있을거야. 만약 석달 안에 여기서 나갈 수 없다면 나는 자결할 것이고 너도 길동무로 데려갈 것이다.’

‘.....’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머리가 나쁘니 어거지만 쓰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다방면으로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도저히 살문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도희를 죽이고 살문 탈출 계획을 접는 것이었다. 물론 나와 도희의 무력은 큰 차이가 있었지만, 차라리 그게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결론을 짓고, 나는 도희를 찾아갔다.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소.”

천연덕스럽게 말을 꺼내는 나를 보고 도희는 살기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너는 죽어.”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당신을 내가 죽인다면, 나 역시 죽을 필요는 없지.”

“....”

잠깐 도희는 내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녀는 어리둥절해서 멀거니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분노로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뭐 뭐? 제정신이야? 너 미쳤어? 감히 나를 죽이겠다고?”

“살문을 탈출하겠다는 미친 생각보다는 정상적이라고 보오.”

“하..”

그녀는 말을 잊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자질 순서로 부여되는 고유번호가 40대가 넘어가는 하급 살수인 나와, 수위를 다투는 특급살수인 그녀와의 무력차는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살문을 탈출하는 것보다는 그녀를 베어 넘기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높은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즉 내 선택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다.

“정말이지..”

한참동안 침묵 끝에 도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깐다.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니..”

“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높은 가능성을 택한 것 뿐이오. 그대가 살문을 탈출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다못해 나를 제외시켜주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소.”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정정당당하지 않느냐. 날 죽여서 내 계획을 막겠다면, 앞에서 직접 검을 겨누는 것보다 기습을 하는 것이 더 나을텐데.. 참 올곧은 녀석이군. 살수 주제에..”

“뭐, 대화로 풀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으니까. 내 협박이 먹혀들어가 그대가 계획을 포기해 줬으면 하오.”

“그럴 순 없다. 난 살문을 벗어 날거야. 너도 함께 말이지.”

나는 도희가 퍽 답답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검을 빼들었다.

“그렇다면 역시 우리는 서로를 죽일 수 밖에 없구려.”

“아니,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게냐. 우리는 살수와는 맞지 않아. 너도 문의 명령에 따라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베어 넘기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수없이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 살문에 더 있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나아.”

“착각하지 마시오. 물론 나도 이 일이 싫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내 목숨을 가볍게 여긴적은 단 한번도 없소.”

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아차했다. 무심결에 내 본심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희의 입가에 알 듯 말듯한 미소가 감돌았다.

“역시 너도 살문이 싫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토록 내 제안을 거부하는 거야?”

“젠장. 당신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나 보군. 나갈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은 없지. 문제는 그 방법이요. 나를 닦달하지 말고 스스로 답을 내 보시오. 그게 가능키나 한 것이오?”

“으..”

내 강경한 답변에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나보다 한두 살 연하인 도희는 이미 약관이 넘은 나이지만 다른 살수가 그렇듯 어렸을 때 살문에 납치되어 오직 살업을 수행하기 위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금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살문이 죽도록 싫어서 도망치고는 싶은데 그 방법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난 정말 이 끔찍한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미안하지만 그런 것은 없소. 살문을 벗어나고 싶다면, 임무 수행 중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끝끝내 살아남아 간부로 승진하면 되오. 뭐 나 같은 하급 살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대 정도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오.”

“하,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라. 억지로 잡혀있는 것도 끔찍한데, 간부가 되라고? 절대 싫다. 차라리 죽을 거야.”

그녀의 대책 없는 대답에. 나는 벌컥 화를 냈다.

“그럼 죽던지.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오?”

“....”

“가겠소. 다시는 나를 찾지 마시오.”

도희가 아무 말이 없자, 나는 검을 집어넣고 그녀를 뒤로했다. 그녀는 나를 막지도 잡지도 않았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가끔 은신처에 멍하니 누워서 22년간의 내 무의미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곤 했다.

맨 처음 기억나는 것은 '피'였다. 내 손에 피 묻은 단도가 들려있고 내 앞에는 내 또래의 아이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기억의 처음이 살인이라니, 이보다 나쁠 수가 없다. 물론 좋아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다. 살문에서는 처음 납치해온 아이들을 아무런 설명도, 배려도 없이 무작위로 짝지어 서로를 죽이게 한다. 여기서 아이들은 반수가 줄고, 그 후에도 가혹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처음의 십분지 일만 살아남는다.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처음 짝지어 준 아이를 죽일 때도 그랬고, 그 후에도 무수히 많은 살업의 순간들도 모두 같았다. 나라고 좋아서 죽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

“여기 있었군.”

“.....”

도희는 종종 나를 찾았다. 언덕 뒤편에 자리잡은 내 비밀스러운 은신처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가져온 그녀의 침입을 허용한 이래, 더 이상 나만의 것이 될 수 없었다.

“내가 계획을 세웠어. 들어봐.”

“.....”

나는 그녀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무시로 일관하는 내 태도에도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예의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름 후에, 내 스승.. 그러니까 총관님이 살문을 비우셔. 낙양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거야.”

“.....”

“그리고 알다시피, 십일호님이 전번 임무에서 부상을 입고 폐관 중이시다. 즉. 네명의 간부 중 두 명이 눈이 우리에게서 벗어나 있다는 거다.

“.....”

나는 그냥 듣기만 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지만, 가만히 있었다.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거야. 보름 후. 총관님이 떠나신 다음날, 우리도 여기를 뜨자!”

“아니.. 도희 당신은 왜 이렇게 단순하오? 간부 두 명이 자리를 비운다고 우리가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당연하다! 성공 가능성이 배는 늘지 않느냐?”

“그래. 확실히 간부의 수가 반으로 줄었으니 가능성도 두 배가 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천분지 일의 확률이 오백분의 일의 확률이 된 거와 다름 없소. 즉 안 된다고!”

“젠장. 너는 언제나 그렇게 비관적이야. 그래서는 살문을 벗어날 수 없어.”

"단맥단 문제는 또 어떻게 하고? 여분의 해약은 금방 떨어질 것이오."

"...그건 생각이 다 있어. 거기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어."

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껏 나 역시 단맥단의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다방면으로 대책을 강구해 봤지만 특별한 소득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요즘 들어서는 조금 실마리가 보이는 듯도 하지만.. 하여튼 도희같은 멍청이가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놨을 리 없다.

“난 나갈 생각 없소.”

“거짓말 하지 마!”

도희는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왜 이해하지 못 하는 거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에 매달려야 함이 마땅한 거야. 왜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냔 말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당신이오. 난 그런 멍청한 도박에 목숨을 걸 수 없소. 살문을 나가고 싶은 그대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만, 조금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소.”

보통 여기까지 말하면 그녀는 수긍하고 물러서곤 했다. 사실 그녀가 살문을 나가자고 칭얼대는 것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적당히 대응해 주면 족한 것이다.

“현명? 대체 뭐가 현명하다는 거지? 목숨이 아까워서 구더기처럼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거냐?”

“.....”

“난 정말로 더는 못 견디겠다. 더는 싫다”

“도희. 그대 심정은 이해한다고 하지 않았소. 허나..”

“아니, 넌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살문이 싫은 이유는 단지 자유가 없고 하루 하루 생명이 위태로워서 뿐만 아니야. 너도 알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반문에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난 듯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더냐? 당연히 사람 죽이는 것 말이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 정말로 더는 죽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임무요. 그걸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게 되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야. 여길 나가면 더 이상 그 지긋지긋한 살인을 안 해도 되는 거잖아. 난 나갈거야. 다음 임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아. 걱정없이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참살하라니 기가 막히는 일이지. 더 사람을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 정말이다.”

“.....”

머리가 복잡해진다. 도희의 흔들림 없는 눈빛은 그녀의 말이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혼자 가시오. 바보짓에 어울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니, 너도 같이 간다. 그게 싫다면 너를 죽이고 나도 죽을 수 밖에.. 양자택일이다. 같이 죽거나 같이 도망치거나.”

“도희. 이건..”

“더는 말하지 않겠다. 보름 후, 내가 너를 찾겠다. 나를 따르지 않으면 널 죽일거야. 마음의 준비를 해 둬.”

“.....”

말을 마친 도희는 훽 몸을 돌려 내 은신처를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잠시 주변을 서성이다 머리를 짚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희의 말은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 그녀는 정말로 나를 끌고 살문을 나가려 할 것이다.

 

.‘뭘 어쩌자는 것인지..’

그녀는 눈이 먼 것이다. 간부 중 두 명이 자리를 비운다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에 유혹당해 질 것이 뻔히 보이는 어리석은 도박을 하려하고 있다. 그리고 그 판돈은 목숨이다. 그리고 내 목숨도.

 

.

.

그렇게 생각했는데 보름 후, 결국 나는 도희의 손에 이끌려 살문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녀는 행여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봐 내 팔목을 꽉 붙들고 어딘가로 앞장서간다.

“서둘러. 우리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금방 추격이 붙을 거야.”

그녀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숲을 가로질러 계곡 밑을 지나 좁은 돌길을 막힘없이 나아간다. 꽤 오래동안 탈출 경로를 구상해 놨음이 틀림 없다. 실제로 우리는 살문에서 벗어나는 와중에 어떠한 경비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굳이 추격해 올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만.”

“무슨 소리야?”

나는 한심하다는 듯 도희를 바라봤다. 이 여자는 정말로 아무 계획 없이 뛰쳐나온 것이다.

“단맥단은 어쩔 생각이오?”

“아.. 그건..”

단맥단은 살문에서 우리를 관리하기 위해 먹이고 있는 독약이다. 일주일 안에 해약을 먹지 않으면 온 몸의 맥이 끊겨 죽게 된다.

“큰 도시에는 고명한 의원이 있을 거다. 그 곳에 가서 치료받으면 돼. 그도 여의치 않으면 당문이나 만독문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고.”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왜 말이 안 돼? 의원에서 우리를 치료해 줄 거다. 난 돈을 많이 모아 놨다. 치료비는 걱정할 거 없어.”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정말로  의원에서 단맥단을 해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인가?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야. 단맥단을 해독하고 남만으로 가면 되는 거야. 거기서 성도 이름도 바꾸고 서로를 의지해서 살면 된다.”

“.....”

“그러니까, 젊은 부부로 위장해서 살면 될 거야. 살문에서도 설마 남만까지 우리를 추적해 올 수는 없을 거다. 집은 마당이 딸린 아담한 크기면 된다. 단 둘이 사는데 굳이 넓을 필요는 없으니까. 개도 한 마리 키우고 텃밭에는 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희가 세상물정에 어두운 것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인줄은 몰랐다.

“그럼 쟁여둔 해약도 없소?”

“응? 무슨 말이지? 해약을 어떻게 모아? 딱 먹을 만큼만 주는데.”

“...해약의 양을 조금씩 줄여서 단맥단에 몸을 적응시킴과 동시에 해약의 여분을 모으는 것이오. 지금의 나는 해약이 없어도 보름까지는 어떻게든 단맥단을 견딜 수 있소. 더불어 두 달치 해약을 모아 놓았소. 당신도 그렇게 대비한 줄 알았는데?”

“와아..”

도희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저 표정이 왜 이리 멍청하게 느껴지지?

“난 생각도 못했어. 하긴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대비를 해 놓는 것이 현명하지.”

“.....”

“해약의 양을 조금이라도 줄이면 말도 못할 정도의 고통이 찾아오는데 그걸 견뎌내면서 까지 단맥단에 대비해 온걸 보면 너 역시 나 못지않게 살문을 벗어나고 싶었던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내 계획에 반대했던 거야?.. 아무튼 두 달치 해약이 있다고? 그럼 지금 지니고 있는 거야?”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감돈다.

“나눠 먹으면 한 달은 거뜬하군. 그 정도면 의원을 찾아 독을 치료하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야. 단맥단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살문에서는 소속한 살수들을 임무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로 만든다. 살문의 살수들은 개개인이 귀신같이 강하고 살인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일류의 살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업에서만 해당되는 사항으로, 다른 일은, 사회생활이나 기타 등등은 전혀 잼병인 것이다. 바로 도희가 그 좋은 예이다.

 

“나는 머리 좋은 남자가 좋다. 역시 너를 선택한 것은 정답이었던 것 같아. 물론 네가 머리가 별로 좋지 않았더라도 너를 택했을 테지만.. 살문에 정상인은 나와 너 밖에 없었으니까. ”

나는 그녀의 헛소리를 끊고 지금 정말로 해야 할 말을 단숨에 꺼내 놓았다.

“....돌아 갑시다. 늦지 않았소.”

“뭐?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 놓고.”

도희가 짜증스럽게 나를 흘겨본다. 그녀는 여전히 내 손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단맥단은 단순한 독이 아니오. 평범한 의원에서는 결코 해독할 수 없을뿐더러 당문이나 만독문의 전문가들도 해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년간 연구를 거듭해야할 것이오. 지금 이렇게 살문을 나갔다가는 우린 죽게 되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거야?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뒤는 없어.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을 거야. ”

“답답하구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오? 나 역시 살문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요. 허나 이대로 가면 죽는단 말이오!”

“안 죽어. 왜 그렇게 부정적인 소리만 하는 거야?”

“부정적인 소리가 아니라 사실이란 말이오!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소? 당신이 멍청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바보 천치인줄은 몰랐소.”

도희는 입술을 깨물고 나를 노려봤다. 나한테 욕을 얻어먹은 것이 분했던지 그녀의 큰 눈에는 약간의 눈물마저 어려 있었다.

“그래. 나 바보 맞아. 그래도 돌아가지 않는다. 차라리 죽을 거니까.”

“고집부리지 마시오. 돌아가야 하오!”

“안 가. 안 간단 말야!”

“그럼 놔 주시오. 나 혼자서라도 돌아 가겠소.”

도희는 그 말을 듣고 내 손목을 더 세게 붙잡았다.

“너도 못 간다. 우린 같이 죽는 거야 아하하.”

‘미친 년 같으니.’

나는 대책을 고민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다. 같이 있다가는 정말로 나를 사지로 끌고 갈 것이다. 어떻게든 떨어뜨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말로 안되면 힘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 하지만 당연히 정면승부는 무리다. 기습으로 그녀를 제압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기습으로도 어려울 정도의 강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자포자기한 그녀에게 끌려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해야 하지?

“좀 조용히 좀 해줄 수 없나?”

“?!”

한참 아웅다웅하는 나와 도희의 귀에 걸걸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우리 둘을 그 자리에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설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달빛 아래 앉아있는 산발한 사내의 그림자가 보인다. 저 머리모양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이의 머리이다.

“저.. 십일호님?”

“그래.”

사내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나를 아득한 절망으로 밀어붙이기에 충분했다. 저 사내야 말로 살문의 4대 간부 중 일인이자 초절정의 무위를 자랑하는 무쌍혈검 십일호 본인이 아니던가? 전혀 라고 할 정도로 가르쳐 준 무공은 없지만 엄밀히 말해 내게 배정된 스승이기도 하다.

도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고 내 옆에 딱 붙어있었다. 그녀도 설마 간부와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십일호는 얼마전 임무 수행 중 큰 부상을 입고 폐관에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유영? 그리고 도희가 아닌가? 네놈들이 그렇게 투닥거리면 내가 달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된단 말이다. 좀 다른대로 가 줬으면 좋겠는데.”

“아 물론입니다. 괜히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대답한 후 여전히 얼어붙어있는 도희를 이끌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우리가 채 세 발자국도 가지 않은 시점에 십일호의 음성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잠깐. 뭔가 이상하군. 왜 네 녀석들이 여기 있는거지? 여긴 살문에서 꽤 떨어진, 아무도 오지 않는 장소인데?”

“아 그냥 별거 아닙니다. 하하”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계속 걸었다. 여기서 멈추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제발 그냥 보내다오 제발.

“잠깐 멈춰봐라. 어르신이 말하고 계시는데 뭐 그리 바쁜가?”

‘제길..’

나는 다시 십일호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역시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인가?

“흐음 이 시간에 새파랗게 젊은 두 남녀가 달빛아래 단 둘이 걷는다라.. 흐흐 역시 그거군.”

“??”

나와 도희는 십일호의 말을 언 듯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흐흐 임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라면 뭐 남녀간의 연애 정도는 눈 감아 줄 수 있지. 하지만 다른 녀석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라. 특히 도희 너는 총관이 애지중지 하는 아이이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조신한 척 하는 네가 남자와 놀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흐흐 그 노처녀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

십일호는 우리의 행색을 보고 밤중에 우리가 살문을 빠져나온 것을 남녀 간의 밀회 정도로 오해한 듯 했다. 뭐 그다지 기분 좋은 오해는 아니지만,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 십일호의 말하는 투로 봐서 이 일을 너그러이 넘어가 줄 듯 하니..

“고언 감사드립니다. 저흰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십일호가 더 수상한 점을 눈치 채기 전에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도희를 재촉해 살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이대로 무사히 끝나면 좋을 텐데..

“아니 아직 가지 마라. 연애질은 살문 근처에서도 할 수 있을 텐데 왜 여기까지 나온 거냐? 거기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군.”

“.....”

여기서는 어떤 변명을 하든 또 다른 허점거리가 생긴다. 이미 우리는 살문에서 한참 떨어진 이 장소까지 나온 것 만으로도 문의 규칙을 크게 위반한 셈이니.. 여기서 가장 그럴듯하고 자연스러운 핑계는 무엇일까?

 

하지만 내가 변명거리를 고민하는 그 잠시간을 참지 못하고 도희가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해 보자.”

“?!!..”

 

나는 그 말을 듣고 일순 정신이 멍해졌다. 도희는 드디어 미친 것이다. 미치려면 혼자 미칠 것이지 왜 멀쩡한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것인가?

“무슨 말이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작게 되물었다. 그녀가 품은 미친 생각이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기를..

“지금이라면 할 수 있어. 십일호를 죽이고 여기서 벗어나자.”

“....”

“....”

“....”

 

나는 고개를 돌려 십일호를 바라봤다. 달빛아래 그는 우리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희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초절정 고수의 예민한 청각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도희.. 이건..”

“너와 내가 힘을 합하면 가능한 일이다. 십일호는 임무에서 중상을 입었고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다. 거기다 혼자라구. 여기서 저 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면 우리는 당초 계획대로 살문을 빠져나갈 수 있다.”

‘난 오늘 여기서 죽게 되는군.’

애당초 도희처럼 정신이 나간 여자와 어울려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살문을 나간다는 말도 안되는 그녀의 생각에 이끌려, 주관도 없이 휘둘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이다.

‘하아..’

도희는 내 팔목을 놔주고 정말로 자신의 도를 꺼내들었다. 정말로 십일호와 싸울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스르릉

 

“고마워. 유영..”

‘하 빌어먹을..’

 

내가 검을 빼들고 그녀 옆에 나란히 서자 도희가 떨리는 음성으로 내 이름을 속삭여온다. 아마 자신의 미친짓에 함께해주는 내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단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따름이다. 이게 다 도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온다. 뭐 이제와선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흐흐 나는 몸이 별로 좋지 않다. 대련하기에는 영 시원치 않아. 모처럼 만났으니 한 수 가르침 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게 좋을거다.”

 

십일호는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으쓱 했다. 그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살문의 네 간부들 중에서도 가장 괴팍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가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살문에 대한 충성심도 별로 없어 보였고.. 어쩌면, 지금이라면 없던 일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흥 당신이 거동도 하기 힘든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안 된 일이지만 무쌍혈검의 악명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동안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으니 별로 억울할 것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도희는 십일호의 호의를 단칼에 걷어찼다. 멍청한 그녀는 십일호가 우리에게 겁을 먹고 이 자리를 모면할 생각으로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봐 꼬마야. 우린 다 같은 살수라고. 나를 욕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같은 살수요? 아니 난 당신과 달라요. 각오하시죠!”

 

말을 마친 도희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계란으로 금강석을 때리는 미친 짓을 정말로 하자는 거다.

‘.....’

더는 어쩔 수 없다. 이왕 하기로 한 이상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전신 잠력을 모조리 격발시켰다. 일격 필살, 그 외에는 조금의 희망도 없다.

 

“흐흐 그래. 한 수 가르쳐주마. 어서 와라.”

 

나와 도희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십일호의 양익을 공격해갔다. 그녀와 합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손발이 제대로 맞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나는 처음부터 도희쪽은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내 검에만 집중했다. 한번, 단 한번으로 끝낸다. 뒤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단 한번이면..

 

 

내 생각은 거기까지 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내 검이 십일호에게 채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의 벼락같은 퇴법이 나를 강타한 것이다. 복부에서부터 끔찍한 격통과 함께 몸이 붕 떠오르는 게 느껴진다.

 

“크 크헉..”

 

피를 토하며 볼썽사납게 나뒹군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말도 안 나오는 고통과 뒤엉킨 내공을 가다듬느라 손 끝하나 움직일 수 없다. 내 쪽이 이렇게 형편없이 당하고 나서는.. 도희쪽은 볼 필요도 없겠군.

 

챙 챙

 

하지만 의외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길게 이어져 왔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어보니 도희가 이를 악문 채 필사적으로 도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꽤 봐줄만 하군. 총관이 애지중지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어. 십년만 더 잘 키우면 나와도 그럭 저럭 겨뤄볼 수 있을 텐데.. 아쉽군.”

 

십일호는 여유있게 쌍검을 휘두르며 도희의 혼을 담은 일격을 살짝 살짝 비껴냈다. 단신으로, 그 대단한 십일호와 어느정도 대적하는 도희의 무위는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무 실력차가 크다. 아니나 다를까,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십일호의 검이 손쉽게 도희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아아악!!”

 

검이 몸을 뚫고 들어오는데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도희는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꽤 버티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이거다. 다 끝났군.. 우린 둘 다 죽게 될 거다.

 

“이십 점 주마. 그 대단한 무위는 칭찬해 줄 정도지만 하지만 설마 이 나와 맞상대를 하려 들다니 쯧쯧.. 무인으로서는 괜찮다고 해도 살수로서는 영 아닌 아이로군.”

 

십일호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이번에는 내 쪽을 바라봤다.

 

“네 녀석은 팔십 점이다. 일 검에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든 것은 잘 한 일이다. 만약 여기 엎어진 이 녀석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한 합에 승부를 보려 했다면 너희들에게 일 할 정도는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

 

이제 죽는 마당인데 그런 칭찬은 전혀 기쁘지 않다. 나는 정좌하고 말없이 눈을 감았다.

 

“너 뭐하냐?”

 

“고통 없이 끝내 주셨으면 합니다.”

 

“흐흐 벌써 포기하는 거냐?”

 

“.....”

 

정적이 감돈다. 문득 눈을 뜨고 십일호를 바라보니 그는 무언가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달을 올려보고 있었다.

 

“오늘은 달이 밝군. 이런 날 피를 보는 것은 영 껄끄러운 일이지.. 없던 일로 해 줄테니 돌아가라.”

 

“?!”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살문의 간부가, 문에서 탈출하고자 한 변절자들을, 더구나 자신을 죽이려 검을 들이대기까지 한 이들을 봐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환청을 들은 걸까?

 

“뭐 하는 거냐. 빨리 이 아가씨 데리고 사라지란 말이다.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십일호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행여 그의 마음이 바뀔새라 급히 도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관통상을 입은 복부를 움켜쥔 채 비통한 표정으로 눈물짓고 있었다.

 

“갑시다. 몸은 좀 괜찮소?”

 

“흑. 으흑..”

 

도희는 내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소리죽여 울기만 했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십일호가 내 물음에 답을 대신한다.

 

“급소는 피했다. 얕게 살갗만 다쳤을 뿐이야. 계집애가 울면 재수가 없으니 빨리 좀 데리고가지 못하겠나?”

 

“아 알겠습니다. 도희. 혼자서 거동할 수 있겠소? 어서 돌아가야 하오.”

 

“....안 가.”

 

“.....”

 

이제 더 할 말도 없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희를 내려봤다.

 

“차라리 죽을 거야. 난 정말 살문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큭.. 제정신이오?”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언제 다시 십일호의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 나는 억지로 도희의 몸을 일으켰다.

 

“어리광 부리지 마시오. 그대의 미친 짓에 더 이상 어울려 줄 생각이 없으니 이번엔 닥치고 내 말을 따르시오.”

 

“싫어. 싫다고!!!”

 

도희는 내 팔을 뿌리치며 완강히 저항했다. 이래서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나 혼자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흠. 고집이 센 아가씨군. 어쩔 거냐. 못 본척 해줄까?”

 

“?!”

 

십일호의 그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설마..

“시 십일호님?”

그리고 그것은 도희도 같은 생각인 듯 했다. 그녀는 십일호를 올려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저희를 보내 주신다는 건가요?”

 

“뭐.. 안 될 것도 없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인데 억지로 잡을 수 있나?”

 

문득 나는 십일호가 살문에 전혀 충성심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살문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조직의 간부가 배신자를 봐주는 이 거짓말 같은 상황이 설명이 된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고.. 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흑.. 정말 고마워요.”

 

내가 십일호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에 도희는 힘겹게 몸을 움직여 십일호의 면전에 고개를 조아렸다. 십일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뭐 고마울 건 없다. 그보다 몇 번이나 말해야 하지? 좀 사라지란 말이다. 나를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고. 이거 달 구경도 마음대로 못하니..”

 

“네 십일호님. 멋대로 검을 들이대서 죄송했습니다. 살문을 나가고 싶은 마음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흑 흐윽...”

 

도희는 눈물을 훔치며 내게 몸을 기대왔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고 십일호의 옆을 지나쳐 몇발짝 걷다가 우뚝 멈춰섰다.

 

“왜 그래 유영. 어서 가자. 십일호님이 우릴 보내주셨잖아.”

 

도희가 불안한 듯 속삭여온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십일호를 돌아봤다.

 

“저 십일호님.”

 

“뭐냐?”

 

“단맥단의 해독법을 알고 계십니까?”

 

십일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왜 묻지?”

 

“도와주시는 김에..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희는 단맥단의 해독법을 모릅니다.”

 

십일호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뭐냐. 설마 그에 대한 대비도 없이 무작정 나온거냐? 기가 막힐 노릇이군. 유영 네 녀석은 조금은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인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내게 죄송할 건 없다. 난 단맥단의 해독법을 몰라. 설령 안다 하더라도.. 내게 더 이상의 호의를 바라지 마라. 내가 네놈들을 못 본 척 하는 이유는 단지 귀찮기 때문이지 네들이 이뻐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빨리 가자. 일단 살문을 벗어난 후에 차차 생각해도 되잖아.”

 

도희가 나를 재촉한다. 한시 바삐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은 십분 이해가 되나,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끌려다닐 생각이 없다. 확실히 해야 할 것은 확실히 해야 한다.

 

“십일호님. 저희가 살문을 나간다면 언제 죽게 될까요.”

 

“단맥단의 약효가 나타나는 일주일 후. . 혹 해약을 미리 챙겨 두었거나 해서 요행히 살아난다 해도 한 달 안에 살문의 척살조가 너희들을 추적해갈 거다. 행운에 행운이 겹쳐 그들의 마수마저 피하는데 성공하면 석 달 안에 간부급 살수가 파견된다. 어쩌면 우린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 흐흐. 그때는 산책 나온 아저씨가 아닌 살수로서 네놈들을 보는 거니 일말의 자비도 바라지 말거라.”

 

“...그렇군요,”

 

나는 도희를 붙들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몸을 돌리자 도희는 기겁을 해서 나를 올려본다.

 

“미 미쳤어? 뭐하는거야?”

 

“돌아갑시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안 돼. 여기까지 와서 왜 이래.”

 

“지금 살문을 나가면 죽음 뿐이오. 십일호님이 우리를 순순히 보내주시는 이유도 거기에 있소. 살문의 추격은 고사하고 우리는 단맥단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소.”

 

“싫어! 안 간다고!! 말 했잖아. 차라리 죽을 거라고!!!”

 

그녀의 격렬한 반응은 예상한 바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똑바로 눈을 마주봤다.

 

“죽는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지 마시오. 난 살고 싶소.”

 

“위에서 시키는 데로 일면식도 없는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가며 사는 것이 정말 살아 있는 거라고 생각해? 우리의 삶은 무가치해. 살문을 나가는 것만이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도희. 나도 당신만큼이나 살문을 나가고 싶소. 하지만, 지금은 아냐.”

 

“난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다음임무.. 정말로 하기 싫단 말야. 사람 죽이는 거 진짜 싫어. 진짜로.. 흑..”

 

도희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고여들었다. 새삼 느끼는 건데 정말 그녀는 살수가 맞지 않는다. 고유번호 사십번 대의 하급 살수인 나보다도 더 맞지 않는다.

 

“지금껏 잘 참아왔지 않소. 도희. 조금만 더 참으시오. 이번에는 내가 직접 방법을 찾겠소. 약속하지. 육 개월, 아니 삼 개월 안에 함께 여기서 나갑시다.”

 

“사 삼개월?”

 

도희는 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 말을 수긍한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 끝났냐? 이제 나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거냐?”

 

멀거니 서서 멋쩍게 기다려온 십일호가 넌지시 말을 건내온다. 나는 십일호에게 제대로 포권을 취하며 사의를 표했다.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저희는 다시 살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쯧쯧. 어차피 난 여기서 있었던 일에는 완전히 장님이 되기로 정해 놓은 참이니 뭐 네들이 어떻게 하던 별 관심은 없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흐흐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고 했을텐데.. 그보다.”

 

십일호가 갑자기 말을 멈춘다. 그는 잠시 달을 올려보다 독백하듯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나?”

 

“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 지금 살문을 떠나지 않으면 다시는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거야.”

 

“....”

 

십일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유영,,”

 

도희가 불안한 듯 내 팔을 붙든다. 기껏 설득해 놨더니 십일호가 말 몇마디로 그녀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그녀의 불안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단호한 어조로 답을 내놓았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좀 더 준비를 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살문을 나갈 겁니다. 그때가서는 십일호님이 직접 저희를 추적해 온다 하셔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내 대답을 듣자 십일호의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그럼 됐다. 가 보거라.”

 

“네. 그럼 이만.”

 

나는 다시한번 십일호에게 포권을 취한 후 도희를 부축해서 살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울 듯한 얼굴로 내 옆에 딱 붙어 있었다.

 

.

.

.

부상을 입은 채로 숙소에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도희는 관통상을 입었기에 이를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칼침을 맞았는데 멀쩡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나는 도희를 내 은신처로 데려갔다. 바위 뒤에 그녀를 뉘이고 근처에 보관해 둔 의료 도구를 꺼낸다.

“여기에 약도 있었어?”

“알다시피 살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어떤 상황에도 대비해야 하오. 심각한 부상은 무리지만 간단한 상처 정도는 수습할 수 있을게요.”

금창약과 바늘을 준비한 나는 도희의 옷을 걷어 올리려 했다. 그러자 얌전히 있던 도희가 당황하여 내 손길을 피해  물러서는 게 아닌가?

“무슨 문제라도 있소?”

“그.. 내가 알아서 할게. 나도 어느 정도 응급처치는 할 줄 안다. 굳이 네 도움을 빌릴 필요 없어.”

“하지만 혼자서 상처를 수습하는 것은 꽤 불편할 텐데.. 나는 무공이 약한 대신 다른 잡기에 능하오. 의술도 틀림없이 그대보다 나을 테니 그냥 내게 맡기시오.”

“....”

내 말을 듣고 도희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얌전해지자 나는 그녀의 옷을 걷어올리고 상처를 드러냈다.

“좀 아플 수도 있소.”

“아 알았어. 빨리 끝내줘.”

나는 그녀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달군 바늘을 들이댔다. 바늘이 살갗을 파고들자 그녀는 잠깐 얼굴을 찡그렸지만 묵묵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치료를 끝마친 후 나는 다시 그녀의 옷을 내렸다. 그러자 도희는 옷자락을 움켜쥐고 도망치듯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깊은 상처가 아니라 다행이군. 며칠 지나면 다 나을거요.”

“그.. 흉터는?”

“흉터? 당연히 꿰맨 자국이 남겠지. 왜 그런 걸 묻는거요.”

“흉이 남으면 보기 안 좋잖아. 난 너와 달리 여자란 말이야. 아무래도 외모에 신경쓸 수 밖에 없다.”

“허허..”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사람 죽이는 살수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실없는 농담 하고는..

“그보다 이제 숙소로 돌아갑시다. 오래 자리를 비우면 곤란하니..”

“조금만 여기서 쉬다 들어가자.”

“으음..”

달은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 멀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예쁘긴 예쁘군.’

달빛아래 드러난 도희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몇 안되는 여동기 중에서도 그녀의 미모는 발군이었다. 만약 도희가 살문에 납치되어 살수로 길러지지 않았다면 그녀는 주위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갔을 지도 모른다. 별로 의미 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저기 유영.”

 

한동안 상념에 빠져 있는데 도희가 정적을 깨고 말을 걸어온다. 내가 그녀에게 눈을 돌리자 그녀는 기어들어가듯 작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야?”

 

“??”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언 듯 알 수 없었다. 이름이라니? 왜 지금 그걸 묻는거지?

 

“유영이오. 있을 유자에 그림자 영자를 써서, 살수로서 영 기척을 숨기는데 능하지 못하다는 수치스러운 이름이지. 차라리 무영이었으면 꽤 멋있었을 것을”

 

“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영은 근사한 이름이야. 그것은 세상에 네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잖아. 무영이야말로 끔찍한 이름이지. 빼도 박도 못할 살수의 이름이니까.”

 

“음.. 뭐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려. 그런데 갑자기 내 이름은 왜 묻소? 설마  건망증이라도 왔다던가.. 지능이 낮은 것은 그래도 희망이 있지만 기억력이 나빠지면 그건 진짜 안 좋은 징조요.”

 

내가 짐짓 도희를 놀리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아니 바보야. 내가 바보인줄 알아? 네 이름을 내가 왜 까먹어. 그게 아니라, 나는 네 진짜 이름을 물은 거라고?”

 

“진짜 이름?”

 

“그래. 살문에 납치되기 전에 네 이름 말야.”

 

나는 잠깐 머리를 굴려봤다. 하긴 처음부터 내 이름이 유영이었을 리는 없다. 내게도 부모나 가족이 있었을 테니.. 하지만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너무 어렸을 때 살문에 끌려왔다.

 

“기억나지 않소.”

 

“저런.. 가엽기도 하지.”

 

도희는 안타까운 듯 내 손을 살짝 붙잡았다. 그녀는 살수가 되기 전의 기억이 전혀 없는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 이름은 혜아야.”

 

“혜아?”

 

“응. 혜아. 소혜아. 부모님이 지어 주신 내 이름.. 그분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혜아야 혜아야 하고 나를 부르는 그분들의 목소리만큼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나. 내 이름은 소혜아야.”

 

도희가  살수가 되기 전의 기억과 자신의 본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꽤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그런 기억은 살문에서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떠올릴 때마다 괴로워질 뿐인  의미 없는 옛 기억을 뭐라도 되는 양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도희가 참 딱하게 느껴진다.

 

“소혜아.. 좋은 이름이구려.”

 

그래도 나는 그녀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 그녀도 나름 큰 맘 먹고 자신의 본명을 밝혔을 텐데 굳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겠지.

“후후 그렇지?”

나의 칭찬에 도희는 환히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녀의 표정에는 그늘이 드리우는 게 아닌가?

 

“그런데.. 다음 임무에서 내 암살대상은 하남지방에 위치한 소가장의 가주야.”

 

“소가장?”

 

“응.. 나랑 성이 같지? 소가장의 가주에게 자식이 있다면 나 정도 나이가 아니었을까?”

“.....”

 

나는 도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즉 소가장의 가주가 자신의 혈연일수도 있다는.. 물론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되지만 그녀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감안하면 꽤 꺼림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인 것이다.

 

“세상에 소씨 성을 가진 사람은 백사장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소. 지나친 생각이요.”

 

“후후.. 그렇겠지. 그래도 왠지 싫어. 이번임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데..”

 

도희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는 걸 보니 또 훌쩍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도희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도희는 말없이 내게 몸을 맡겨온다.

'너무 여리군.'

살수가 저렇게 눈물이 많아서야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이 지옥도에서 저토록 마음약한 여자가 지금껏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역시 그녀는 살수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도희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살문을 떠나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 그녀는 예의 그 은신처로 나를 보러왔다.

“갈게. 나 없는 동안 몸조심해야해.”

“걱정할 거 없소. 나는 한동안 임무가 없으니 살문을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겠소. 그대가 돌아오면 함께 살문을 나갈 수 있을 거요.”

“으응.. 그래도 걱정이 된다. 넌 무공이 별로 강하지 않잖아. 행여 다른 동기하고 시비라도 붙어서 잘못되면..”

살문의 짐승 같은 놈들은 가끔 넘치는 살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를 해치기도 한다. 그 정도로 미쳐버린 놈들은 곧 숙청되거나 하지만, 도희는 자칫 내가 그런 일에 휘말릴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내 걱정은 하지 마시오. 오히려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러 나가는 그대 자신을 걱정해야 하지 않소?”

“난 괜찮아. 총관님께서 말씀하시길 소가장의 가주는 나보다도 약하데. 정면 승부를 해도 내가 이기는데 암습이야 말할 것도 없지. 깔끔하게 끝마치고 돌아올 거야.”

“그럼 만사형통이요.”

“그.. 그렇지?”

도희는 일견 내 말을 수긍하는 듯 보였지만,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불안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아무 걱정할 것 없소. 탈출 경로는 도희 그대가 세워 놓은 경로를 조금 손보면 되고, 단맥단에 대한 실마리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소.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소”

“그래?”

나는 도희를 안심시키기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단맥단을 연구해왔소. 투약량을 줄여가며 내 몸에 몇 차례 실험을 반복했는데, 해독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가설을 세웠다오. 그대가 임무를 나가있는 동안 나는 이 가설을 확인해 볼 것이오.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좋소.”

“으음... 넌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으니까 알아서 잘 할거라 생각해. 걱정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도희의 음성에서는 조금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도희가 단맥단이나 탈출 따위가 아닌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희. 일은 잘 되어가고 있소. 대체 무엇을 불안해하는 거요.”

“...그냥. 기분이 영 이상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어. 이번임무가 하기 싫기도 하고.. 또.. 그냥.. 네가 걱정 돼. 행여 잘못되기라도 할 까봐. 다시는 볼 수 없을까봐..”

 

그 말을 하는 도희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하다. 나는 그녀의 불안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생각을 거듭했다. 도희는 왜 저렇게 눈물이 많은 걸까? 전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차가운 여자인 줄 알았는데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여린 성격이 부담스럽게 두드러졌다.

 

“도희. 약속하겠소. 난 아무 일 없을 거요. 반드시 탈출 계획을 완성시켜 놓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요.”

“정말이지?”

“대신, 당신도 약속해야 하오. 별 탈 없이 임무를 끝마치고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는 거요. 알겠소?”

그 말을 듣자 도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마 서로 약조한다는 행위에 크게 위안을 받은 것 같다. 내게는 큰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걸로 그녀의 불안을 달랠 수 있다면 딱히 나쁠 건 없었다.

“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임무 잘 수행하고 올 테니까 너도 계획 꼭 세워놔야 해. 삼 개월 안에 살문에서 나가게 해준다는 네 약속. 나 절대 잊지 않는다.”

“염려 마시오.”

“그 그리고..”

도희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짐짓 내 시선을 피하며 자꾸 손가락을 꼰다.

“내게 할 말이 있소?”

“그게..”

내 재촉에도 그녀는 머뭇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결국 체념한 듯 홱 몸을 돌리고 말았다.

“돌아와서 말해줄게. 나중에 보자.”

“갔다 오시오.”

도희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녀의 작은 몸이 점점 더 작아지고,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자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다시는 도희를 볼 수 없었다.

.

.

.

 

도희와 헤어진지 한달 후 내 고유번호 43호는 42호가 되었다. 나 뿐 아니라 내 동기들은 1호 일검이란 놈을 제외하고 전부 한 단계씩 번호가 낮아졌다. 2호 도희의 빈 자리를 채운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임무를 끝마친 후 스스로 자결했다고 한다. 아끼던 제자의 죽음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던지 총관은 시커멓게 죽은 눈으로 나를 포함한 평자객들에게 일장 훈시를 늘어놓았다.

“도희는 소가장주를 죽인 후 탈출이 요원해지자 정보누설을 염려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문의 살수로서 끝까지 본분을 다한 것이다. 그녀의 명예로운 죽음을 다들 본받도록. 이상.”

말을 마친 총관은 비틀거리며 단상을 내려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저 철혈의 마녀가 저토록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동기들에게도 도희의 죽음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애당초 그녀는 우리와 급이 다른 특급의 살수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도 임무를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깔끔하게 성공시켰을 뿐 아니라 본신의 무위도 살수로서는 지나친 감이 있을 정도로 고강했다. 간부들을 제외하면 우리들 중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1호 일검조차 정면승부에 있어서는 그녀에게 한수 접어두고 가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녀 정도 되는 강자가 소가장주 암살이라는 쉬운 임무에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언제나 생과 사의 경계에서 위태로이 외줄타기하는 우리의 처지가 실감된다.

총관도, 동기들도, 모두 도희의 불의한 죽음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녀의 죽음에 가장 영향을 크게 받은 이는 바로 나였다.

‘약속했는데, 왜 죽어버린거지?’

나는 도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조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죽은 것인가. 그것도 자결이라는 가장 형편없는 형태로..

‘왜 죽은 거지?’

나는 그녀가 임무를 떠난 후 고작 일 개월만에 대부분의 준비를 끝마쳤다. 일단 나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살문을 벗어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나니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단맥단의 영향을 벗어나는 방법을 알아냈고 탈출경로도 좀 더 철저하게 연구해서 세워놓았다. 하지만 정작 도희가 죽어서는 이 모든 것이 전혀 쓸모가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우물 안 개구리로, 좁은 천장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막연히 갈망해온 내게 벽을 기어 올라가 우물을 빠져 나가라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 그녀는 이제 없다. 내게 잔뜩 바람만 불어 넣고 스스로는 죽어버리다니 한심하기 이를 대 없는 일이다. 이제 어쩐다..

 

“가야겠지.”

 

그 길 뿐이었다. 형편없이 죽어버린 도희는 이제 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면 족한 일이다. 원래 나는 혼자였다. 머리가 나쁜 동반자가 잠깐 생겨서 나를 꽤 고생시키기는 했지만 이제 다시 홀가분하게 되었으니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혼자서 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휘엉청 달이 밝은 어느 밤. 나는 조용히 살문을 빠져 나왔다. 한달여 전 처음 살문을 나갔던 때와는 달리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사사건건 나를 괴롭게 했던 짐덩어리가 없어지자 그렇게 일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래.. 아주 편했다.

 

“다시 만났군.”

 

그리고 나는 얼마 전 십일호를 만난 그 자리서 또다시 십일호와 마주쳤다. 그는 환한 달을 올려보며 이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길을 열어 주십시오.”

 

“뭐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단맥단은 해결 한거냐?”

 

“네. 간단한 이치더군요. 애당초 우리 살문의 일원들은 처음부터 단맥단에 중독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해약이 독이었죠. 복용을 중단하면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것 뿐.”

 

“똑똑하군. 영구적으로 중독시켜놓고 주기적으로 해약을 복용해 증상을 완화시키는 그런 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맥단은 처음부터 없었고 해약이 독인거다.”

 

“...저는 한번에 복용하는 해약의 양을 점점 줄여나갔습니다. 금단증상을 견딜 수 있는 양이 삼분지 일 까지 줄어든 후 아예 복용을 중단해 보았죠. 만 하루에 걸쳐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금단증상을 극복한 겁니다.”

 

“맞다. 이제 너를 구속하는 것은 없다. 여길 떠나라. 추격조가 너를 처단하러 찾아올 때까지 잠깐의 자유를 만끽하거라.”

“....”

 

나는 십일호의 옆을 지나쳐갔다. 그는 여전히 내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올려 달만 보고 있었다.

 

“십일호님.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뭐냐.”

 

“도희는 자결한 게 맞습니까?”

 

내 말을 듣고 십일호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다. 임무를 완수 한 후 스스로 목을 찔렀다.”

 

“어째서죠?”

 

“.....”

 

“어째서죠??”

 

“.....”

 

십일호는 침묵했다. 나는 그에게서 대답을 듣기 전 까지는 이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한동안 정적이 감돈다. 내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올려보고 있자, 결국 십일호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우.. 나는 분명 말했다. 몇 달 전 처음 너희들이 이 장소에서 나와 대치했을 때, 굳이 다시 살문으로 돌아가겠다는 네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물었지.”

 

“네.”

 

“그때 살문을 나갔으면 도희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단맥단 문제도 해결 했겠지. 분명 너는 그 당시에도 해약의 양을 줄여서 복용하고 있었을 테니 금단증상을 극복할 수 있었을 테고 도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거다.. 뭐 살문의 추적을 뿌리치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그 때라면 무위가 빼어난 도희도 너와 함께 있었을 테니 혈혈단신인 지금보다는 좀 나았을 테고. 흐흐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 이것 저것 머뭇거리며 제다가는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바로 나처럼, 그리고 너처럼 말이다.”

 

“.....”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치 심장이 후벼 파이는 느낌이다. 차라리 그때, 십일호의 호의를 받아들여 살문을 나갔더라면.. 틀림없이 도희도, 나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지난 일입니다. 후회하냐구요. 네 후회합니다. 하지만 후회하는 그 이상으로 후회가 무의미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 흐흐. 그래도 가끔 견디기 힘들 때가 찾아올 거다. 평생에 걸쳐서 말이다.”

 

“..의미없습니다. 그보다. 어서 알려 주십시오. 도희는 왜 죽었습니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째서 도희가 자결을 했느냐는 거다. 함께 살아남자고, 함께 살문을 나가자고 철석같이 약조했으면서 왜 나를 배신하고 혼자 죽어버렸냐는 거다.

 

“그래 말해주마. 소가장주가 도희의 친부였다. 자신이 친부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희는 죄책감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 일부러 그녀로 하여금 소가장주를 죽이게 한 겁니까?”

 

“총관은 도희를 무척 아꼈지만 동시에 도희가 살수로서 심히 부적합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총관은 도희가 자신의 옛 인연을 끊어버림으로서 완전한 살수로 거듭나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오판은, 도희가 자신의 혈육을 끊어내고 감정을 버릴 정도로 독하지 못했다는 것이지.”

 

“.....”

 

의문을 해소했으니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십일호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후 터덜 터덜 산을 내려갔다.

 

달이 지고 먼동이 터 온다. 청하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넓은 강을 건너고 살문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내 눈에서 절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도희..’

 

평생에 걸쳐 견디기 힘들 때가 찾아올 것이라는 십일호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살문에 있을 때는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이 없던 나는, 살문을 벗어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댔다. 아마 나도 도희처럼 살수라는 직업이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