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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다음 날에는

  • 작성일 2015-11-28
  • 조회수 167

눈 내린 다음 날엔 / 흑비

 

 

눈이 내린 다음 날에

뼈를 때리는 바람이 지나가고

세워놓았던 눈 무덤이 사라지면

세상은 마치 폐허(廢墟)처럼 변해간다.

 

 

그런 날에는

폐허(廢墟)같은 세상에서 빠져나와

허허로운 마음으로 상상을 한다.

다정하게 걸어가는 연인들을

눈송이로 추억을 만드는 사람들을

어느 아담한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을 동창생들을,

그러다가

빈방에 홀로 앉아서

둥그런 거울속의 나와 대화를 한다.

그녀는,

후줄근한 내 감성을 비난하고

아웃사이더가 된 나를 놀리고

머릿속 가득 찬 생각을 비웃고,

그런 그녀의 태도에

맘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드러눕는다.

 

 

이불 속 세상에서

나는 화원을 만들고

벌과 나비를 불러와서

꽃들의 향연에 흠뻑 빠져든다.

그곳에는 집도, 차도, 사람도 없고

거울 속의 나조차도 없어 즐겁지만

그 시간은 아쉽도록 짧기만 하다.

갑자기 이불이 젖혀지며

불쑥 들어온 폐허(廢墟)의 아우성에

순식간 사라지는 비밀의 화원(花園)

이어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녀의 비난(非難) 소리는

다시 폐허(廢墟)같은 세상 속에

날 집어 던지고 나는,

 

 

비좁은 바늘구멍 속으로

커다란 낙타 한 마리를 몰아넣어

누더기 같은 삶을 다시 깁기 시작하고

다시 눈 속에 세상이 매몰되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