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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하늘에서 달을 본다

  • 작성일 2015-12-31
  • 조회수 340

 

 

"제길, 죄다 약해빠진 놈들뿐이군. 이봐, 거기 너, 이놈 밖으로 던져버리고 새로 하나 데려와."

입가에 정돈되지 않은 수북한 수염을 늘어뜨린 남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군복 차림의 남자 두 명이 커다란 크랭크 옆에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기름때나 먼지에 뒤덮여 꾀죄죄한 몰골을 한 사내는 힘없이 축 늘어진 채로, 그들은 적당히 구멍이 뚫려있는 곳을 찾아 사내를 던져넣었다. 구멍 사이로 마치 지도를 보듯이 넓게 펼쳐진 숲과 강이 들여다보였다. 기체가 크게 요동칠 때마다 저 아래에 새떼가 날아올랐다. 내던져진 사내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내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은, 누군가에게 꼭 안겨 있다는 따뜻한 감촉이었다. 뒤로는 높은 폭발음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함성으로 생각되는 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건 마치 유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애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시각도 흐릿했다. 하지만 촉각만은 어째서인지 선명하여 방금 겪은 일처럼 생생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생생함은 이내 시각에까지 뻗어나가, 문득 눈을 뜨고 고개를 들면 피를 뒤집어쓴 채 머리가 반쯤 날아간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돌연 그 기억이 떠오르거나 꿈 속에서 재현될 때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고, 이것이 그때의 기억이라는 걸 깨닫는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폭발음과 신음. 분명 거칠거칠할 터이지만 왠지 부드럽게 느껴지는 젖은 천의 감촉. 퀘퀘한 축축함에 섞인 질척한 화약과 피의 냄새. 하나하나 오감이 다가오며 내 깊은 곳에 새되게 각인된 감각을 일깨우는 실로 찰나의 사이, 아직 눈앞이 흐릿할 적에 고개를 들지 말라고 나는 마음 속으로 바란다. 그리고 그 헛된 바람은 이내 제발 고개를 들지 말아 달라는 애처로운 애원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런 소망도 무색하게, 애석히도 환상 속의 나는 현실에 유리된 나의 의지를 배반하고서 왼쪽 눈썹 윗부분이 날아간 어머니의 텅 빈 눈과 마주한다.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 가운데 검붉게 물든, 익숙할 터임에도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표정없는 얼굴이 시계視界를 메우고, 그리고 나는 눈꺼풀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백일몽이나 꿈의 마지막까지 언제까지나, 끝없는 수렁과도 같이 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어둡고 불투명한 동공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눈을 떴을 때는 땀으로 온몸이 축축했다. 얼굴을 훔치려 팔을 들자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퍼지며 온몸을 내달렸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뱉었지만 바싹 마른 목구멍에서는 신음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방금의 고통으로 잠이 달아나고 나서야 나는 팔뿐 아니라 온몸이 그런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목 역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안구만을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나무로 된 낡은 천장만이 전부였다. 기침을 할 때마다 자그마한 폭약이 연이어 터져나가는 듯한 무거운 아픔이 곳곳에 스몄다. 거기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근육이 움직이면 그만큼 고통이 더해졌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내 눈앞에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고 생각하자, 여자는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저, 그, 움직일 수 있어요?"

내가 대답을 않고 있자 그녀는 "…어, 내 말은 알아들을 수 있나요?" 하고 뒤이어 물었다. 그것은 아마 내가 다른 인종이기 때문일 터로, 나와 달리 여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귀는 들려요?" "눈은 보이나요?" "살아있는 거 맞죠?" 그렇게 계속 물어 왔지만, 물론 나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으어어, 하고 삐걱거리는 성대를 울려 가까스로 소리를 내자 여자는 깜짝 놀라더니 안심한 건지 뭔지 모를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힘들면 더 쉬고 있어요. 배는 안 고파요? 마실 거라도 줄까요?" 먹을 것도 물도 당장 필요했지만 나한테 물어봤자 대답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건지, 여자는 "대답이 없는 걸 보니 필요 없나보네요." 하고 생글생글 이쪽을 보았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이틀 후였다. 아직 몸을 움직이기는 조금 힘들었지만 통증이 덜해진 게 느껴졌다. 그사이 여자는 내 자세를 바꿔 주거나 먹을 걸 입으로 흘려넣고, 몸을 닦아 주면서 어째서 내가 여기에 누워있는지, 여기는 어디고 자신이 누구인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종교 경전에 나오는 성모의 이름인데, 이쪽의 글자로는 '麻理亞'라고도 쓰지만 음을 맞추기 위해서일 뿐 딱히 글자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마리아는 말했다.

마리아가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강가에 빨래를 하러 갔더니 내가 강 사이의 퇴적지에 흠뻑 젖은 채 쓰러져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익사체인가 하고 놀라서 다가가 보자 아직 숨이 붙어 있어, 옆집 사람을 불러 여기까지 옮겨왔다고 했다. 보름이 넘게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었다는 말이었다.

"옆집 아저씨, 그쪽 얼굴을 보더니 이녀석 적국 놈 아니냐면서 죽여버려야 한다고 그러는 거 있죠."

나로서는 전혀 웃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마리아는 웃었다.

눈을 뜨고부터 이틀째 되는 밤, 나는 다시 꿈을 꾸었다. 이따금씩 꾸는 언제나와 같은 꿈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 언제나와 같은 어머니의 공허한 눈을 보았다.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현실로 돌아오자 역시 언제나와 같이 호흡이 흐트러진 채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망막에 새겨진 듯한 어머니의 잔상에 겹쳐 마리아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마리아는 으그그, 하고 소리를 내고서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가 하나뿐이라며 같이 잠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쪽을 보는 마리아의 까만 눈동자가 창문으로 새들어온 아침해를 받아 낮게 반짝였다. 나른함을 걸친 눈꺼풀 너머로 맑은 어둠이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아……." 하고 내가 소리를 내자 눈을 반쯤 감은 마리아는 손을 뻗어 짙게 젖은 내 눈가를 닦고서, "왜 울고 있어요." 하고 배시시 웃었다.

 

몇 번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가 나오는 걸 확인하고 고맙다고 말하자, 마리아는 놀란 눈으로 "말 할 수 있었어요?" 하고 물어 왔다.

"왜 여태까진 안 했던 거예요?"

"아파서. 말이 안 나왔어."

"지금은 괜찮아요?"

"조금은."

내가 대답하자 마리아는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여기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나는 태어난 곳을 말했다. 마리아의 얼굴에 잠깐 당혹이 스쳐지난 것이 보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국 사람이면서 우리말 잘 하네요. 어떻게 배운 거예요?"

"아는 녀석중에 이쪽 출신이 있어서 어쩌다보니. 글은 읽을 줄 모르지만."

마리아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움직일 수 있게 된 목을 돌려 조용한 방 안을 둘러보고, 물었다.

"혼자서 살고 있는 건가? 다른 가족은?"

거기에 마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고서, 이내 작게 웃었다.

"…이런 시대에, 가족이 없는 것정도,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

어른이 되면 전쟁이 끝나겠지. 형의 손을 잡고 방랑하던 어린 시절, 나는 생각했다.

"옛날에는 말이야, 일을 하다가 쉬는 날이면 가족들끼리 차를 타고 극장이라는 곳에서 연극이나 영화를 봤는데, 거기는 텔레비전이랑 달리 화면이 굉장히 커다래서……"

하지만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나는 그게 어떤 광경일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난 물론이고 형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쟁은 계속되어 왔고, '옛날에는 이랬다'든가 '전쟁이 끝나면 이렇게 될 거다'하는, 어디서 주워들은 건진 몰라도 형이 이따금씩 내게 해 주는 이야기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게 무언가 '자연스러운' 풍경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것은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이나 몸 어딘가가 떨어져나간 시체들이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광경뿐이었다.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골목의 다른 아이들과 같이 도둑질로 목숨을 연명하면서 버려진 건물에서 잠을 자는 생활만이 살아온 전부였다. 다른 마을로 갈 때면 그쪽에 먼저 있던 녀석들과 주먹다짐을 해야 했고, 도둑질을 하다 잡히거나 하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거나 시체 행렬에 합류해 길거리를 장식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었다. 모두가 끼니 걱정없이 하루에 세 번씩 밥을 먹고, 매일같이 목욕을 하고, 깨끗이 세탁된 푹신한 이불에서 잠을 잔다는 말을 듣는다 한들, 그건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책 속의 이야기, 그 이상이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자식, 또 이상한 소리 내고 있어!"

한밤중, 어머니의 꿈을 꾸다 깨어나자 눈앞으로 발이 날아왔다. 나는 얼굴과 배에 몇 번이고 발길질을 당했다. 얼굴을 가리고서 몸을 웅크린 채 충격에 맞추어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깨어난 형은 뭐 하는 거냐며 때리던 녀석 앞을 가로막았다. 그 무엇보다 널찍하게 느껴지는 형의 등이 팔 사이로 보이는 좁은 시야 안에 가득 찼다.

어린애들의 사회도 어른들의 사회 못지않게 녹록치 않았다. 오로지 힘만으로 모든 게 결정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을 괴롭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나는 밤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로 이상한 소리를 지른다며 패거리들의 눈밖에 나기 일쑤였기에 적어도 잠을 잘 때만은 형과 둘이서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우리는 고립되었지만, 어린애 둘이서만 살아간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라, 훔치거나 받아온 물건을 당연한 듯이 빼앗기거나 이유라곤 없이 거슬린다며 얻어맞아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정도 힘을 쓰게 될 수 있는 나이가 된 뒤로는 공장이나 밭에서 일을 하는 녀석도 있었으나 보통은 그대로 약탈을 계속하거나 매춘으로 몸을 돌렸다. 다만 가장 많은 경우는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우리에게 있어 군인이라는 건 와서 사람들을 잡아가거나 강제로 물건을 뜯어가거나 하는 나쁜 녀석들이었으므로, 군대에 들어간다는 건 온전히 폭력에 희생당하는 쪽에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쪽이 된다는 더없이 달콤하고도 멋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형이 군대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조금 달랐다.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탄다고 한다면 대개는 아머(이족보행병기)에 타고 싶어했어서 나는 갸우뚱했지만, 자유롭게 넓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다는 형의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내게 있어 비행기 하면 공습 때마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무섭고 끔찍한 것이라는 인식뿐이었기에, 떠올리자면 역시 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비행기가 떨어뜨린 폭탄으로 인해 나는 형과 헤어졌다. 형이 다른 녀석들과 같이 마을에 먹을 걸 구하러 갔을 때 갑작스럽게 폭음이 울렸다.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을 때였다. 폭탄은 우리가 있던 건물에 직격했다.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다니엘도, 언제나 나를 괴롭히던 앤소니도, 항상 친절해서 내심 좋아하고 있었던 나타샤도 전부 폭발에 휘말리거나 부서진 잔해에 깔려 온몸이 터지고 박살났다. 도처에 불길이 치솟았다. 팔만 남은 앤디나 몸이 반쯤 날아가 피를 토하며 구해달라고 외치는 레이첼을 지나 나는 미친듯이 도망쳤다. 결국 밖으로 나오자, 지옥도 속에서 살아남은 건 나와 조슈아 뿐이었다.

형을 찾기 위해 마을 쪽으로 가려 했지만, 조슈아가 나를 붙잡았다.

"저쪽은 지금 공폭이 계속되고 있어. 지금 가는 건 자살행위야."

"하지만 형이!"

"니콜라스는 분명 살아있을 거야. 비행기가 지나간 다음에 같이 찾아보자."

그러나 결국 형은 찾을 수 없었다. 무너져버린 은신처에서 밤새 기다렸지만 끝내 형은 오지 않았다.
이후로 나는 조슈아와 둘이 다니게 되었다. 같은 나이인 조슈아는 검은 머리칼과 눈을 가지고 있어서, 제국 놈 주제에 왜 우리같은 이름이냐며 언제나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서 같이 괴롭힘당하던 처지의 나는 혼자 무릎을 감싼 채 돌바닥에 주저앉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조슈아의 모습을 보며 어렴풋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가까이 지낸 건 아니었다. 우리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그걸 빌미로 다른 녀석들의 괴롭힘이 심해지지 않을까 두려웠고, 나 역시 한편으론 우리와는 다른 용모를 가진 제국인에게 익숙치않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그 두려움은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둘이 다니게 됐다는 건 말 그대로의 상황으로, 어딜 가도 우리를 끼워주지 않았다. 그야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예전부터 울타리 바깥에 있던 녀석들이니까. 제국인과 허약해 보이는 소년 두 명이라니, 돌아보면 강도나 시비에 휘말려 싱겁게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었다.

둘이서 감자를 훔치다 붙잡혀 두들겨맞고서 도랑에 버려졌을 때, 만신창이가 된 조슈아는 밤하늘을 빤히 쳐다보다가 진흙투성이가 된 손을 들어 하늘 한켠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저기 저게 오리온자리야, 하면서 내게 별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조슈아는 이리저리 아는 게 많았다. 대부분의 별자리를 알았고, 식물을 보면 무슨 이름인지 거의 알아맞췄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알고 있어서 나는 조슈아의 말을 듣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에는 이건 우리 어머니가 쓰던 말이야, 라면서 내게 제국의 말을 가르쳐 주었다.

햇빛 한가운데서 우리는 강변을 걸었다. 그날은 높게 솟아오르는 잿빛의 연기도, 죽음이 녹아든 폭약의 매캐한 냄새도, 각양각색의 높낮이로 들려오는 비명도 없이, 그저 여름의 투명한 하늘 아래 낮게 흘러가는 강물만이 한결같은 소리를 내며 빛나고 있었다. 조금의 비릿함이 섞인 말간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물결이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반사해 반짝일 때마다 흐름에 맞추어 물풀이 흔들렸다. 조슈아는 수면 위로 채 잠기지 않은 돌멩이들을 밟으면서 물 위를 걷듯이 앞을 향해 내디뎌 갔고, 나는 그 옆에서 자갈길 위를 나아갔다. 조슈아가 다음으로 걸음을 옮기며 한번 휘청일 때마다 내 발밑에서는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따금씩 마치 현실에서 지금의 이 순간만이 도려내어진 것만 같은 평화에 감싸일 때마다, 어쩌면 전쟁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묘한 착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이미 극적이 아니게 되어버린 비극이 도처에 만연하고 있음에도, 어딘가에는 그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가─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일순이,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발이 미끄러진 듯 조슈아의 한쪽 발이 첨벙 소리를 내며 작게 물보라를 튀기자, 이런, 하고 말을 뱉고서 조슈아는 폴짝 뛰어 이쪽으로 건너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고 강을 향해 던졌다. 날아오른 돌멩이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물 위에 파장을 일으키고선,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강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 얘기, 알아?"

이마에 송글하게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조슈아는 말을 꺼냈다. 검은 머리카락이 해로부터 내리쬐인 새하얀 빛과 대비되어 칠흑과도 같이 떠올랐다. 나는 조슈아가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는 걸 알아채고서 뭐 말이야, 하고 들을 준비를 했다.

"수많은 다리를 가진, 엄청나게 커다란 괴물에 대한 소문."

조슈아의 말을 듣고 나는 잠깐 멍해졌다. 그야, 지금같은 분위기에 괴물 얘기가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슈아는 웃으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세상에는 말이지,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다란 괴물이 있어서, 그게 지나간 곳은 다 쑥대밭이 된다는 거야. 그 앞에서는 전투기도 자그마한 날벌레처럼 보이고, 사람은 미처 보이지도 않을 정도지. 마치 성서에 나오는 거대한 짐승처럼, 신이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 같은,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인 거야."

"아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그치만, 그렇잖아. 상식적으로."

"상식이라. 뭐어, 믿든 안 믿든 상관 없어.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나 사건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그때 '어째서?' 라고 물어 봐야 의미는 없어. 어쨌든 그런 게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뭔가 현학적인 말이로군, 하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랬으니까 달리 신경쓰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실제로 박식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가끔씩 그럴듯한 거짓말로 나를 속여넘기고는 했던 것이다. 인간이 달에 착륙했다든가, 인류가 쏘아보낸 로켓이 아직도 우주를 날고 있다든가 하는 얘기는 시행착오 과정에서 우주선이 폭발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스토리까지 더해져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 사실 거짓말이지롱─ 하고 조슈아가 깔깔 웃었을 때는 더이상 세상의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대한 괴물에 대한 얘기는 거기서 끝나고, 조슈아는 강변의 돌멩이가 둥근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앉아 있던 조슈아는 바닥에 벌러덩 눕고, 자그마한 돌 두 개를 주워 잘각잘각 소리를 냈다. 나도 그 옆에 누웠다. 조슈아의 말에 따르면 돌은 원래 산이나 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날카롭지만, 물의 흐름에 의해 쓸려내려가면서 지금 보이는 것처럼 동그랗게 깎인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물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돌은 각진 모습이며, 커다란 녀석들은 그대로 바닥에 가라앉거나 부러져 버린다고. 조슈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손에 잡히는 돌 하나를 집어들었다. 둥글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돌은, 다른 수많은 돌 가운데서도 깎이고 무디어져 우연히도 현재의 형태로 지금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이다. 왠지모를 감동을 느끼고 있으려니 조슈아가 토끼의 눈이 붉은 이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 흥이 깨어져 버렸다.

우리는 따뜻한 햇살 아래 누워 싱거운 회화를 주고받았다. 실없는 웃음소리가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다. 커다란 뭉게구름이 존재감을 발산하며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세 개쯤 되는 구름이 저 멀리로 사라졌을 무렵, 깜빡 잠이 들었다.

…내가 잠들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때'의 감각─ 슬픔과, 절망과, 공포와, 온갖 감정들이 아무 재료나 쏟아부은 잡탕의 묘한 냄새처럼 세계에 뒤섞여 있는 듯하면서도, 정작 감각하는 '나'만은 지독한 현실감 가운데 어째선가 관조적인, 가상과 실재,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한 애매모호한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표정이 담겨 있는 한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 수도 없이 겪어 왔지만 몇 번을 겪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온몸을 뒤덮으며 내부를 향해 스며드는 감각. 꿈속에서 예정조화와도 같이 일어나는, 아마 현실의 모방일 일련의 행위가 언제나처럼 반복되고, 어머니의 공허한 눈 속에서 나는 무엇을 간구하는지, 멈추어진 시간 속에서 그 한순간을 영원히 맴도는 것이다…….

무언가 코끝을 때리는 가벼운 충격에 정신이 들어, 그 감각이 코끝만이 아닌 온몸에 느껴져 번쩍 눈을 떴다. 어느샌가 하늘은 흐려져 있어 햇살 대신 가느다란 빗방울이 지상에 내려오고 있었다. 태평히 자고 있는 조슈아를 흔들어 깨웠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나와 조슈아는 무작정 뛰었다.

우리는 뭔가를 뺏고, 훔치고, 가끔은 심부름을 해 주고 하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삶을 이어나갔다. 어딘가에 오랫동안 정착하는 일은 없었다. 여럿이 모이면 누가 먼저 배신을 하고 당하는가의 눈치 싸움이었다. 직간접적으로 여남은 명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녀석을 앞에 두고 몸을 떨고 있자, 조슈아는 피묻은 쇠파이프를 쥐고 있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빼앗을 수밖에 없어. 원래 세상이란 그렇게 되어 있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따윈 없으니까." 우리는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어?, 같은 말을 처음에는 몇 번인가 했지만, 어느샌가 그런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비행기가 하늘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떨며 나타샤를 죽이고 형과 헤어지게 만든 비행기를 저주하면서도, 어쩌면 지금 저기에 형이 타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형은 살아있을까. 살아있을 게 틀림없다. 분명 무슨 일이 있어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일 뿐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조슈아와 함께 먹을 걸 찾아다니던 도중,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의 공포와 함께 형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올랐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하늘을 보자, 그건 평소의 비행기와는 무언가 다른 기색이었다. 폭탄을 떨어뜨리며 오지도 않았고, 더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어쩌면 형이 나를 데리러 온 건 아닐까.

잠깐 그렇게 기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역시 그럴 리는 없었다. 비행기에서 무언가가 연이어 떨어졌다. 역시 공폭이라며 숨으려 했으나, 조슈아는 내 팔을 붙잡았다.

"구호물자야."

떨어진 물건은 낙하산을 매달고 천천히 내려와, 가까이에 착지했다. 조슈아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른 녀석들이 오기 전에 먼저 챙겨야 해!"

구호물자, 라는 단어의 의미는 알았지만 비행기가 떨어뜨린 게 그런 것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구호물자같은 걸 대체 누가 보내는 거지? 나는 조슈아를 따라 물건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펼쳐진 꾸러미에 든 게 무엇인지 보려 다가갔을 때, 조슈아는 이쪽을 돌아보며 "오지 마!" 하고 크게 소리쳤다. 어딘가 슬픔이 섞인 듯한, 애처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어? 뭐야? 지금 혼자서 다 가질 거니까 저리 가라는 거? 하고 발이 멈춘 다음 순간, 큰 소리를 내며 조슈아가 눈앞에서 폭발했다. 나는 멍하니 산산조각난 조슈아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구호물자라고 생각한 건 폭탄이었던 것이다. 무차별 폭격인 공폭과 달리, 인간을 꾀어들여 확실히 죽이기 위한 장치였다. 폭발이 일어난 주변에는 이상한 색깔의 연기가 맴돌고 역한 냄새가 났다. 조슈아에게 생화학병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나는 직감했다. 인간을 확실히 죽이기 위한 물건. 그것은 여기에 있다가는 폭탄에 맞지 않아도 죽는다는 말이다. 결국 망설이던 나는 조슈아의 시체를 뒤로한 채, 숨이 다할 때까지, 땀과 침과 눈물에 흠뻑 젖은 채로 멀리로 뛰어갔다.

그 뒤로 당분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구토와 설사가 계속되었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혼자 남은 나는 꿈을 꾸었다. 언제나 꾸는, 어머니에 대한 꿈이었다. 아니, 실은 그게 어머니가 맞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내가 가진 최초의 기억이 그것이라는 건, 즉 살아있는 어머니와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저 어머니라고 생각되는 여자의 텅 빈 눈만이 언제까지고 생생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꿈에서 깨어나, 그 눈매만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고 있음에도, 어느샌가 형의 빈 자리나 조슈아의 죽음은 기억 속에서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울었다.

어째서 나만 계속 살아남는 거지?

어머니도, 나타샤도, 조슈아도 모두 죽어버렸다. 아버지와 형도, 죽는 걸 본 건 아니지만 아마 죽었을 것이다. 매일같이 많은 사람이 죽고, 길거리에 새로운 시체들이 쌓이고 있음에도, 나는 죽지 않았다. 모든 게 사라졌지만 나만은 살아있다. 그 사실에 대해 금할 수 없는 슬픔과 불합리함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깊은 안도가 자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나는 가슴 속에서 스미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차피 조금만 더 지나면 강제로 징집되었을 테지만, 군에 지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어도 중앙본부와의 연락같은 건 전혀 없었다. 지휘관은 대기 명령만을 계속했다.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아 군화는 밑창이 다 닳아빠지고 그마저도 없어 나막신을 신는 녀석도 있었다. 강물로 몸을 씻으며 야생동물을 잡거나 나물을 캐먹고, 민가에서 강제로 뺏는 걸로 끼니를 해결했다.

나는 무얼 위해, 무엇으로부터 뭘 지켜야 하는 거지?

나와 같은 일반 병사들은 애초 우리가 왜 전쟁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아무도 몰랐다.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도박같은 걸로 시간을 죽였다. 군대에 있는 게 더 살아남을 가망이 높아서 있는 것 뿐, 전쟁은 이미 목적을 잃은 관성이 되어 있었다.

노숙과 약탈로 삶을 이어나가는 건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형의 행방을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형은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와 같은 일반병이 파일럿으로 차출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옛날에는 대부분의 전투에 아머나 전차가 사용되었다는 모양이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생산공장이 거의 파괴되어 병기를 조종할 수 있는 건 일부 간부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비행기는 귀중한 자원임에도 그대로 적국에 투항하거나 탈영을 시도할 위험을 안고 있기에 보다 허들이 높았다.

형은 간부가 되었을까. '그럴 리가'라는 단어가 수없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

콜록, 하고 작은 기침 소리가 집안에 퍼졌다. 마리아는 몇 번 기침을 잇고서 목을 가다듬었다.

"뭐하다가 그런 데 쓰러져 있던 거예요?"

마리아의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군대에 있을 때, 군법을 어겼다고 수감됐었거든. 거기 있던 와중에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노예로 부려졌는데, 그렇게 살다가 정신을 잃고 깨어나보니 여기였어."

"옆집 아저씨 말이 맞았네요. 적국 군인이라니."

"군인이라는 것도 옛날 얘기야. 복무하던 것보다 노예로 부려진 시간이 훨씬 길다고. 그보다 이런 시대에 군인인 것정도, 이상하지 않잖아."

다행히도 마리아는 나를 헌병에 신고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헌병대가 들이닥치거나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지만, 마리아는 "괜찮아요. 못 본지 몇 년도 훌쩍 넘었으니까. 이런 시골까지 올 여유는 없는 거겠죠." 하고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다.

몇 주 정도가 지나자 천천히나마 바깥을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 "이 근처에는 의사가 없어서 부러진 뼈가 장기라도 찔렀으면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텐데, 신기하게 멀쩡했네요. 척추나 목도 부러진 것 같지는 않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태까지 죽음의 위기는 수도없이 겪었지만, 장애나 신체적인 후유증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하늘의 가호라도 받고 있는 건가. 계속 험한 꼴을 당하면서 목숨만을 연명하는 것이 과연 가호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농사 일을 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바깥에 나와 논의 잡초를 뽑거나 밭을 돌며 다 익은 열매나 채소를 수확했다. 낫을 꺼내들고 나무의 가지를 치거나 풀을 베기도 했다.

"이걸 다 혼자서 하는 거야?"

"익숙해지면 의외로 할 만 해요."

조금 더 회복되고부터 나도 마리아의 농사일을 도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서툴러서, 마리아가 순식간에 끝내버린 일에도 나는 몇십 분씩 매달렸다. 단순작업이라면 제법 자신이 있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이러지 말고 그냥 들어가서 먹을 거라도 만드는 게 어때요? 청소도 좀 하고."

"환자한테 너무한 거 아냐?"

"환자는 무슨. 이제 다 나은 모양인데."

"다 나았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리아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왜?"

"아뇨, 아무것도. 그야 그렇겠네요."

하지만 문제없이 몸이 움직이게 된 뒤로도 나는 마리아의 집에 계속 눌러앉아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애초 갈 곳이라곤 없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집이라곤 가져본 적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사일도 익숙해져 어느정도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과일을 따고 있으려니 마리아가 곁에 다가왔다. 내가 일하는 걸 빤히 보고 있다가 "아직 멀었네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뭐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강제로 따면 과육이 다 망가진다고요. 이렇게 꼭지를 비틀어서 따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마리아는 가볍게 하나를 따냈다. 나도 따라해 보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낑낑거리고 있자 마리아는 코미디 연극이라도 보는 듯 와하하 웃었다.

"이건 동생이 참 잘 했었는데."

마리아의 말에 나는 "동생이 있어?" 하고 물었다.

"있었죠."

"……."

"그렇게 노골적으로 입다물 필요는 없어요. 죽은 건 아니니까. 군에 끌려간 거거든요."

"……."

"…알아요. 돌아오기를 기대할 수 없을 거라는 것정도는. 벌써 몇 년동안 소식이 끊겼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알아. 나도 형이 있었거든. 설마 살아있으리라는 기대는 안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러게요. 왜일까요."

"동생은 어떤 녀석이었어."

"그냥 평범했어요. 별로 다른 집 동생이 어떤지 잘 몰라서. 동생이 끌려간 게 열두 살 때였으니까, 아직 살아있다면 훨씬 키가 커 있겠네요."

"…열두 살인가."

"네."

그게 뭐 어쨌냐는 듯 마리아는 이쪽을 보았다. 나는 아니, 하고 말을 줄였다.

*

어릴적, 이곳저곳을 흘러가다 해안가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풀숲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조슈아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짧게 말을 뱉었다.

"왜?"

"나 생일이야."

"생일?"

"태어난 날짜."

"그걸 알고 있어?"

"정확히는 몰라. 다만 저기, 저 별자리가 보이는 날에 태어났다고 했어."

그렇게 말하며 조슈아는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런 거라면, 오늘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맞아. 어제였을 수도 있겠지. 내일일 수도 있고. 실은 전혀 다른 날이고, 별자리를 착각한 걸지도 모르지."

조슈아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런 조슈아를 잠시 바라보고서 다시 별이 뜬 밤하늘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아무렴 어때. 오늘이 태어난 날인 걸로 치지 뭐. 그럼 하는 김에 나도 오늘이 생일인 걸로 할래. 괜찮지?"

"마음대로."

그렇게 우리는 날이 밝으면 함께 열두 번째 생일을 자축하기로 결정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이곳저곳을 살펴놓고서, 밤이 깊자 민가로 숨어들어가 비쩍 마른 닭 한 마리를 훔쳐냈다. 도중에 들키는 바람에 주인이 죽일 듯한 기세로 쫓아와, 닭을 품에 안고서 달리던 조슈아는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지는 지점에서 내게 닭을 건네고 일부러 눈길을 끌었다. 따돌리기에 성공하면 해안가에 있는 큰 바위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나는 닭을 안은 채 숲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내 숨소리에 섞여 조슈아와 주인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얼마간을 걸어들어가자 이내 곳곳에서 작게 울리는 풀벌레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휴 안심하고 긴장을 푼 순간, 품 속에 있던 닭이 날개를 퍼덕이면서 뛰어나갔다.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런 힘이 있었을 줄은. 나와 조슈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인 만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풀숲을 요리조리 헤쳐나가는 닭을 나는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드디어 닭을 몰아넣었다고 생각하자 나는 절벽 위에 있었다. 멀리서 해가 떠 오고 있어 안개에 둘러싸인 어두운 바다가 어렴풋이 보였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갗을 훑었다.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에 어서 닭을 붙잡아야겠다 했을 때, 멀리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모르게 고개를 들자 눈앞에 비치는 건 어둠에 덮인 바다 뿐이었으나, 소리만은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바다를 응시했다. 이내 저 멀리 무언가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슴푸레해 잘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배나 비행선이라기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고, 육지나 섬이라기엔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의 형태가 조금 일그러졌다고 생각하면, 이내 저편에서 덮쳐온 커다란 파도가 절벽에 산산이 부서지며 거칠게 조각난 소리를 흩뿌렸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한참 찾았잖아."

조슈아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뒤를 돌아보자 조슈아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안개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조슈아가 닭에 대해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그건 무엇이었을까. 문득 언젠가 조슈아가 말했던, 수많은 다리를 가진 커다란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방금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조슈아를 바라보았으나 그만 두었다. 괴물 같은 게 정말로 있을 리가 없다. 결국 그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로 시간이 지나, 헛걸 본 거겠지, 하고 천천히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뭐 재밌는 얘기같은 거 없냐?"

"우리한테 재밌을 일이 뭐가 있겠어."

"왜 있잖아. 옆 소대 잭이 사슴이랑 싸우다가 다리가 부러진 거라든가."

군에 입대한지도 얼마간 시간이 흘러, 동료들과 둘러앉아 포커를 치고 있을 때였다. 판돈은 담배. 나는 담배를 피지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어 자리에 끼어 있었다. 별로 흡연가가 아니라도 담배는 우리 사이에서 통화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받은 패를 확인했다. K 트리플. 오늘은 운이 나쁘지 않다. 손에 원 페어를 숨기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예전에 말이지……."

나는 열두 살 때 해안절벽에서 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중에 피터가 "네가 말하는 거, 혹시 그거 아니냐?" 하고 입을 열었다.

"그거?"

"제국의 '망령' 말이야."

피터는 말을 이었다. 하나의 섬이나 작은 도시국가에 맞먹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거대병기가 있어, 사실상 우리가 싸우는 제국은 이미 멸망한 거나 마찬가지고 제국의 모든 여력이 담긴 그 병기만이 유령처럼 세계를 떠돌며 파괴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걸 본 건 이미 몇 년 전이야. 사실이라면 왜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건데."
"그야 우리가 있는 북부가 아니라 남부 쪽에 있었으니까. 계속 이쪽으로 피난민들이 몰리고 있잖아. 윗선에선 쉬쉬하고 있지만, 남부랑 중부는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도 시간문제지. 살고 싶으면 미리 펭귄 고기에라도 익숙해 지는 게 좋을 걸. 여기, 레이즈."

나는 내 앞에 있던 담배 개비 몇 개를 다 밀어넣었다. "섬 크기만 한 기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그걸 어떻게 몇 년씩 움직인다는 거야? 게다가 중부랑 남부가 다 끝장이라니, 그게 말이 돼?"

피터는 자기 앞의 담배 더미에서 하나를 집어 붙을 붙이고, 내가 낸 것과 같은 개수를 던져넣었다. 다른 녀석들은 이미 다 따라오길 포기해 남은 건 우리 둘 뿐이었다. 연기를 내뱉으며 피터는 대답했다.

"그런 걸 낸들 알겠냐. 나한테 묻지 말라고. 그리고 말이지, 우리한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시시껄렁한 거대병기의 정체나 세계멸망 따위가 아니야."

"그러면?"

피터는 패를 내려놓았다. 하트 3, 스페이드 4, 하트 5, 클럽 6, 다이아몬드 7. 스트레이트.

"지금 이 담배들을 누가 가져갈까 하는 거지. 자, 네 패는 뭐지?"

그날 밤, 해안에 적국의 함선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긴급 보고가 들려왔다. 처음 맞는 긴급 상황에 부대는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든 병력이 수습되고 나는 다른 녀석들과 함께 그쪽으로 보내졌다. 적 부대의 기습일지도 모른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멸시키라는 것이 상부의 지시였다. 그러는 도중에 탈영병이 속출하고, 남아있는 병사들은 육지에 배치되어 다가오는 배에 총을 겨눈 채 빛을 비추었다.

그리고 빛 속에서 나타난 것은, 적의 특공대는 커녕 추레한 몰골을 한 민간인들이었다. 어머니의 소매를 꼭 쥔 어린애나 피골이 상접한 초로의 남자, 겁을 먹고 얼어붙어있는 노인. 제국인과 연합국민 가릴 것 없이 여러 인종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주위에는 정적이 돌았다.

발포 명령이 떨어진 건 직후의 일이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첫 탄환이 발포되자 모두가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계속되는 총성 가운데 여러 척의 배에 올라타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우리는 도주하는 녀석들을 쫓아가 사살했다. 허둥지둥 도망치는 뒷모습에 총알을 박아넣고 있을 떄, 내 뒤에서 무언가가 달려나갔다. 홱 총구를 돌리자, 눈을 크게 뜨고서 이쪽을 바라보는 제국인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이봐, 뭐 하고 있어! 빨리 쏴 버리라고!"

내가 가만 있는 걸 보고 옆에서 다른 방향으로 총을 쏘던 피터가 소리쳤다. 하지만 결국 나는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의 눈. 단 한순간에 모든 것을 이미 체념해 버린 듯이 공허한, 한편으로는 슬픔이 비쳐들어 있는 눈매. 그때 소년의 얼굴에서 조슈아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라왔던 것이다.
이내 소년은 아무도 없는 쪽으로 달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시체를 전부 바다에 흘려보내는 걸로 일이 수습되고, 나는 군사재판을 받았다. 어째서인지 단순한 명령불복종이 아닌 제국의 스파이라는 식으로 얘기가 흘러가 총살형이 확정되었다. 아마 내가 정말로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은 없을 테고, 애초 전쟁 자체에는 관심도 없을 게 틀림없다. 그저 심심한 것이다. 이런 걸 구실로 따분함을 달랠 사건을 원할 뿐이다. 분명 내가 벌집이 되고 나면 모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품을 하며 뭐 재미없는 일 없나, 하고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집행일을 앞두고 피터가 영창에 들어왔다. 도박을 하다가 이건 도저히 질 수 없겠다 싶은 패가 나와서 전재산을 털어넣었더니, 상대가 제일 높은 패가 나오는 바람에 사기라고 행패를 부리다가 상사를 때리고 끌려왔다는 모양이었다. 판결은 물론 사형.

"그 자식들, 분명 나를 털어먹으려고 다같이 짰던 거야, 빌어먹을."

피터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 중얼거렸다.

바닥에 앉아 멍하니 금이 간 천장을 쳐다보았다. 나는 이제 죽는 건가? 어쩐지 드디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영창 안에서 도박은 금지임에도 헌병이 없는 사이 피터는 돌조각으로 주사위를 만들어 다른 녀석들과 내기를 하고 있었다.

"내일이 형 집행일인데, 잘도 도박이나 하고 있을 마음이 드나보군."

내가 말하자 피터는 픽 웃었다.

"죽는 건 내일이지 오늘이 아니거든. 어쨌든 오늘은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는 거야."

"그런 건가."

"그런 거지. 그런데, 왜 밥이 안 오는 거야? 어차피 죽을 것들 줄 건 없다는 건가? 제길, 쓰레기같은 밥이라도 하루종일 굶으니 그리워지는구만."

피터는 창살 밖에 대고 이봐, 하고 소리를 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깥에 이상한 적막이 감돌았다. 전날부터 헌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지금 아사시키겠다 이거냐? 죽일 거면 차라리 총으로 쏴 죽이라고!"

여전히 돌아오는 말은 없이, 피터의 목소리만이 점점 작아지며 복도에 퍼졌다.

며칠이 지나도 우리는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물론 배급도 오지 않았다. 감시하러 오는 녀석조차 없이, 철창 안에 갇힌 채 바깥에 대고 소리를 지르다가 지쳐 쓰러질 뿐인 반복. 탈출도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리 낡아빠졌다곤 해도 맨손으로 벽이나 철창을 부수는 건 역시 무리였다. 계속되는 굶주림과 탈수에 하나둘씩 움직임이 덜해지기 시작하며 서서히 체념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원래부터 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졌던 게 아니기에, 단 며칠만에 탈진상태에 접어들었다. 살 사람은 살자며 누구 하나를 죽여서 잡아먹자는 말도 나왔지만, 첫 사망자가 나온 뒤로도 그 시체에 손대려 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창살로 막힌 방 안은 완전히 죽음의 공기에 감싸였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시취와 오물의 냄새도 어느샌가 익숙해져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몇몇은 시체에 꼬인 쥐나 벌레를 잡아먹거나 밤사이 벽에서 스며나온 이슬을 핥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살아남을 희망 따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하며 하루이틀을 더 연명한들 의미가 있을까. 생존자중 하나인 피터는 누운 채 "젠장…… 빌어먹을……." 하고 이따금씩 욕설을 내뱉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방 안은 조용했다. 구더기들만이 썩어가는 시체에서 꿈틀댔다. 언제나의 악몽 때문에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고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스탠리에게 손을 뻗어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던 스탠리의 몸은 차게 식은 채 맥이 짚어지지 않았다. 바싹 마른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자, 움직이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피터가 눈을 떠 이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농담을 건넬 기력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는 누군가가 아직 곁에 있다는 것에 우스꽝스런 안도를 느낄 따름이었다.

그때, 가까이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강한 진동에 몸을 일으키며 피터는 어떻게 된 거지,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지만, 나도 같은 표정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 더 폭음이 울렸다고 생각하자 우리가 있는 감옥의 천장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몇 명의 신체가 파편에 깔려 부서지거나 매몰되었다. 나와 피터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주위가 잠잠해지고, 붕괴가 멎은 듯해 우리는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얼마간 손바닥만 한 창 사이로만 보이던 하늘은 굉장히 크고, 파랬다.

우리는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나 작은 파편들을 그러모아 쌓아올렸다. 혼자라면 어려웠겠지만, 둘이라면 어떻게든 뚫린 구멍을 통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까스로 남아있는 힘을 끌어냈다. 내 어깨를 밟고 피터가 먼저 올라가, 피터의 손을 잡고 나도 천장 위로 기어올랐다. 숨을 몰아쉬며 나와 피터는 씩 웃었다. 맑은 공기와 탁 트인 시야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의 소리는 역시 폭격이었던 것인지 곳곳이 무너지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서, 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 순간 눈앞에 총구가 드리워졌다. 제국군 군복을 입은 몇 명이 우리를 둘러쌌다. 방독면을 쓴 병사들은 제국의 언어로 반항하지 마라, 너희 외에 다른 녀석은 없는가, 따위를 물어 왔다. 조슈아에게 배운 말을 떠올리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피터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어쨌든 살았으면 됐지. 이봐 형씨들, 총은 나중에 맞아 줄 테니 먼저 먹을 것좀 주지 않겠어?"

나는 수감소에서 옆 소대의 잭과 만나 그에게서 일의 전말에 대해 들었다. 우리가 있던 부대가 제국의 거대병기가 나아가는 진로상에 있다는 보고가 들어와 미리 물자와 군수품들을 챙겨 도망쳤다는 말이었다. 나를 호송하던 제국군 병사가 허탕이었다며 혀를 차던 게 떠올랐다. 그 도중에 수감자들이나 잭과 같은 부상병들은 걸리적거린다며 두고 가 버려, 다리를 다쳐 어떻게 할 수도 없던 잭은 일단 부대를 빠져나왔지만 결국 멀리 가지 못하고 붙잡혀 왔다고 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철판으로 된 벽과 바닥은 곳곳이 뚫려 전선이나 파이프가 들여다보이고, 곳곳에 녹이 슬어 있었다. 사방에서 끼익대는 마찰음이나 증기가 뿜어져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형 증기기관이라도 사용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이게 그 '괴물'의 정체였던 건가.

내가 무너진 감옥에서 빠져나와 제국군 병사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본 것은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한없이 펼쳐진 강철 덩어리의 집합이었다. 하나의 섬에 맞먹을 듯한 질릴 정도의 크기. 수만 킬로미터나 되는 장성이나 거대한 조각상을 일컬을 때 달에서도 보일 것 같다고들 말을 하지만, 이거라면 과언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나와 피터는 제국군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비행선에 태워졌다. 기체가 뜨는 감각이 들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움직임이 멎었다고 생각하자 병사 하나가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여기가 어디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방독면 탓에 표정까지는 읽을 수 없었으나 "네놈, 우리 말을 할 줄 아는 거냐?" 하고 병사는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알 필요 없다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수감소로 옮겨졌다가 각 구역으로 배치되었다. 기계는 많은 부분이 수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연료나 조작을 관리하는 것만이 아닌, 직접 계속해서 밸브나 장치를 돌려야 하는 부분마저 있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노소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부품을 돌리는 데에 쓰이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어른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아 어린아이를 사용해야만 했는데, 그 끔찍한 노동강도에 거기에 사용된 아이는 머지않아 온몸이 망가진 채 죽고, 그러면 쓸 수 없게 된 부품을 빼내고 다른 부품이 충당되었다. 그건 아이들만이 아닌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톱니바퀴와 같은 부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제국의 병사들은 지상으로 내려가 식량이나 쓸만한 물건들과 함께 기계를 돌릴 인간들을 잡아들였다. 날짜가 지날 때마다 보이는 얼굴이 하나둘씩 바뀌었다.

계속되는 노동 가운데 식량으로는 수경재배로 키운 작물 조금과 벌레를 배급받았다. 잠깐 주어진 식사 시간에 튀긴 애벌레를 씹고 있자니 옆에 로이露伊 노인이 다가와 앉았다.

"이거 알고 있나? 우리한테는 이런 걸 주고서 간부나 요인들은 매 끼마다 쇠고기로 된 스테이크를 먹는다더군. 여기 어딘가에는 소를 기르는 곳이 있다는 말이야. 쇠고기 1kg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열 배에 가까운 사료를 먹여야 하고, 그 사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 톤이나 되는 물이 사용돼. 소를 기르기 위한 축산 인력도 적잖게 필요하지. 이런 상황에서 위에 있는 녀석들은 되도 않는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거야. 거 너무하지 않나?"

로이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애벌레를 입에 털어넣었다.

다들 박사님이라 부르는 그는 원래 병기의 제작에 참여한 연구자였으나, 간부에게 밉보여 바퀴를 돌리는 처지가 되었다고 했다. 원래 수다스러운 성격인 듯, 주위에 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기에 자주 와서 말을 걸고는 했다. 그는 내게 거대병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언젠가 피터가 말했던 것처럼 이 거대병기는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던 제국의 국운을 건 발버둥으로, 공폭에 사용되는 항공기지의 역할과 함께 제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화약과 병기 대부분이 수납되어 있다는 모양이었다. 만에 하나 파괴당하여 이 안에 든 것들이 폭발하면, 폭발 자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로부터 뿜어져나온 방사능과 세균병기로 인해 대륙의 절반은 죽음의 땅이 될 것이라고 로이 노인은 설명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면 이동하는 경로에 바이러스와 폭탄을 투하하면서 서서히 세계를 파괴해 나가고, 연료나 조종할 인간이 모두 떨어져 움직임을 멈추면 격납된 무기들을 전세계의 요충지에 발사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 이 악의로 가득찬 괴물은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뒤로한 채 인류가 멸절할 때까지 움직이길 계속하며 세계를 죽음으로 물들이는, 말 그대로 세계멸망기계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어차피 마지막은 다 죽음 아닙니까? 제국군 녀석들은 뭘 목적으로 이러고 있는겁니까?"

"광기지. 다른 게 더 있겠나. 어차피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어. 패전이 가까워지자 쿠데타로 황가마저 숙청해 버린 지금 제국 본토로 돌아간들 남은 건 병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난민들 뿐이니. 나중 일 따위를 생각했다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나?"

"…우리는, 결국 죽음을 기다릴 뿐인 겁니까?"

"인간이란 원래 죽음을 기다릴 뿐인 존재지.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명을 남기고 싶어서 아이를 낳고 글을 쓰지만 결국 끝은 동일해. 부와 명예를 휘감고 푹신한 침대에서 죽으나 더러운 시궁창에서 쓰러져 죽으나 그 너머에 기다리는 건 뇌와 심장, 생명활동의 정지라는 같은 결과 아니겠나. 그런데 무엇을 걱정하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건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차피 죽으니 마찬가지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또한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박사님은 왜 살아 있는 겁니까?"

로이 노인은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서 살고 있지.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더라도 두려운 건 두려운 거니까.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게 된다는 건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닌가? 원하는 걸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알게 된다는, 그런 일련의 행위들을 내려놓는다는 건 말이지. 그래서 나는 구속당하는 게 싫어. 보다 다양한 것들을 감각하고 싶으니까. 때로는 뭔가 더, 쾅─ 하는, 그런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여긴 그런 게 없어서 유감이겠군요."

"잘 알고 있군. 자네는 어떤가? 그저 죽음으로 다가가기만 하는 삶은 원하지 않지?"

"그야……."

주위를 둘러보고서, 로이 노인은 내게 작은 종이 꾸러미를 건네며 속삭였다.

"그렇다면 오늘 수면시간에 2구역으로 오게. 간수에게는 이걸 건네면 문을 열어 줄 거야. 선택은 자네 몫이지만, 될 수 있으면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지."

건네받은 꾸러미 안에는 담배 몇 개비와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간수를 불러 받은 물건을 넘기자 문이 열렸다.

"이런, 자물쇠가 낡아서 풀어져 버렸군. 나는 자리를 뜰 수 없으니 자네가 관리소에 대신 보고해 주겠나."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2구역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로이 노인을 포함해 몇 명이 이미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피터의 얼굴도 보였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려 했을 때, 옆의 탁자에 가득이 놓인 음식들을 발견했다. 쇠고기로 보이는 스테이크와 얼음이 뜬 과일 주스, 크림이 올라간 케이크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자, 사양 말고 들게나. 천천히 이야기하지."

로이 노인은 내게 포크와 나이프를 내밀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병기에서의 탈출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제국어와 연합국어 모두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고 했다. 띄엄띄엄 몇 가지 단어로 겨우 대화해 오던 참에 내가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덧붙여 로이 노인이 화학지식으로 만들어낸 약을 통해 병사들을 매수하며 준비를 해 오던 중, 도박으로 간수들에게서 담배를 쓸어담다가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 피터를 영입했다는 모양이었다.

"별로 반란이나 해방운동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네. 그러다가 잘못돼서 폭발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이고. 수송기 하나를 탈취해서 우리끼리 빠져나가는 것. 그게 목표야. 다만 거기까지는 담배나 약 같은 걸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 일부러 다소의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지."

"혼란이라면?"

"확보해 둔 무기 몇 개를 흘려서 봉기를 일으킬 거야. 그 사이에 우리는 비행선이 있는 격납고로 향하고, 그러면 이미 말을 맞춰 둔 조종사와 합류해 탈출할 걸세. 여기까지 오는데 참으로 긴 시간이 들었어. 자네는 우리가 차려놓은 요리를 집어먹기만 하면 되네. 마음같아서는 억울하기도 하지만, 되도록이면 만전을 기하고 싶거든."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자 고깃덩이로부터 육즙이 입안 가득히 스며나왔다. 부드러운 탄력과 함께 달콤한 기름기가 혀를 맴돌았다. 벌레 따위에 익숙해져 있던 몸으로서는 감전이라도 된 듯 짜릿한 감각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몇 명은 여기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도 죽지. 그러느니 총이라도 들어 보는 게 그들로서도 가능성이 있지않겠나."

"……."

나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편히 있으라며 로이 노인은 내게 다량의 약과 담배를 건넸다. 약도 담배도 하지 않지만, 간수에게 건네면 노동에서 빠지거나 식사 메뉴를 바꿀 수는 있었다.

얼마 뒤 예정한 날짜가 다가왔다. 뇌물을 주고 미리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곧 로이 노인과 합류해 총성을 신호로 움직임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로이 노인 대신 제국군 장교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병사 두 명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군모의 장식으로 볼 때 준장 계급인 듯했다. 몸을 피하려 했지만 남자에게 불러세워졌다.

"너는 뭐냐? 지금은 노동 시간 아닌가? 배치된 지역에서 이탈해서 뭘 하는 거지?"

제국어를 모르는 척 얼버무릴까 했지만, 그러다가 심기를 건드려 즉결처분이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생각했다. 어설픈 억양으로 죄송합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빠져나가려 했을 때, 남자는 말을 꺼냈다.

"로이는 잘 있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마찬가지로 어설픈 억양으로 예?, 하고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말을 이었다.

"로이 그 양반, 예전엔 참 유능한 인간이었지. 성격때문에 크게는 못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머지않아 예상대로 되더군. 우리 병사들이 많이 신세를 지고 있다는 모양이던데."

"……."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자보다 더 유능한 연구원들이 많이 있지. 그런 저질 약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훨씬 순도높은 약을 만들 수 있는 이들도 많아. 굳이 그런 퇴물 노인은 필요없다 이말이야. 그런데 주제를 모르고 비행선을 탈취하고 폭동을 일으키겠다니,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나?"

"……."

"물론 그정도로 우리가 흔들릴 일은 없지만 일은 되도록 얌전하게 끝맺는 게 좋지. 너희들의 계획은 이미 대비가 끝났어. 격납고로 가는 길은 모두 확보되어 있고, 병사들도 무장해서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한마디로 희망이 없다는 말이야."

"…어째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남자가 고갯짓을 하자, 옆에 선 병사가 허리춤에서 권총과 탄창을 꺼내 이쪽으로 던졌다. 권총에는 소음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최근 들어온 제국어를 할 줄 아는 연합국민 녀석이 로이와 함께 움직인다고 들었다. 아마 네가 틀림없겠지. 다른 녀석이었으면 이런 제안은 하지 않아. 녀석 패거리는 괜히 충성심이 강하거든. 하지만 너는 그 노인네에게 지켜야 할 의리가 옅을 터. 녀석이 곧 도착할 거다. 집결 장소를 알아낸 뒤 쏴버려. 그 뒤 집결지를 내게 보고하면 된다. 이 일을 알린 파일럿 녀석도 거기까지는 모른다고 해서 말이야. 덧붙이자면 네게 선택권은 없다. 일을 잘 처리하면 네 목숨만은 붙여 주지."

그럼 보고를 기다리지, 하고 남자는 병사들과 함께 지나쳐 갔다. 나는 권총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에 총알을 장전하고 남자를 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잘 되더라도 옆의 병사들에게 벌집이 될 건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이 새어나간 이상 이대로면 죽음 외의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

곧 로이 노인이 조직원 둘을 대동하고 도착했다. 나는 옆구리에 손을 대었다. 품속의 권총이 옷 너머로 만져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알 수 없었다.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조슈아였다면. 마찬가지로 알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로이 노인에게 방금의 일에 대해 말했다.

조직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로이 노인은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군. 마로摩盧 준장인가. 조종사를 미리 확보해 두는 게 아니라 즉석에서 해결해야 할 걸 그랬군. 이제와서 후회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마로가 원하는 건 내 목숨일 걸세. 나를 원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리고 혹시 모를 무장봉기의 가능성을 막는 것이겠지."

이어 로이 노인은 "나를 쏘게." 하고 말했다.

"하지만, 박사님!" 조직원중 하나가 소리쳤다. 그에 로이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우리가 가진 무기로는 잠깐 소동을 일으키는 정도밖에는 할 수 없어. 비행선을 통한 탈출도 이제 글렀네. 이대로면 희생이나 의미있는 반항이 아니라 무의미한 죽음이 일어날 뿐이야. 녀석들도 굳이 번거로운 일을 하고 싶지는 않겠지. 내가 목숨을 내놓고 무기만 압수한다면 귀찮은 걸 싫어하는 마로의 성격상 더 건들지는 않을 거야. 좀 대우가 가혹해 질 수는 있겠지만."

"……."

"집결 장소로 가 이 사실을 알리게. 그리고 자네는 마로가 말한 대로 해. 나를 쏘고 적당히 기다린 뒤에 녀석에게 가 집결지를 알려줘."

"박사님……."

"탈출 계획은 실패다. 해산하도록."

방아쇠를 당기자 소리가 퍼졌다. 총성을 신호로 움직임을 개시하기로 했지만, 이건 분명 거기까지는 들리지 않으리라. 눈을 감은 로이 노인은 이마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나는 얼마간을 기다리다가 보이는 병사를 붙잡고 마로 준장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 로이 노인을 사살했으며, 집결 장소는 이쪽이라고 보고했다. 마로 준장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조직원들은 대부분 도망쳤지만 몇 명이 남아 저항하다가, 이내 제국군 병사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피터도 있었다. 이렇게 된 거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잘못됐을 떄는 그때가서 생각하자고, 라고 말하며 무기를 들었다는 모양이었다. 피터다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무기는 압수되었으며 시체는 벽이나 바닥의 뚫린 구멍을 통해 밖으로 던져졌다. 나는 다시 벌레를 먹으며 쉴새없이 기계 부품을 돌리는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던 도중 끝내 탈진해 쓰러지자, 병사들에게 붙들려 버려진 모양이었다.

*

나는 마리아와 함께 무덤 앞에 섰다. 마리아는 둥글게 솟은 봉분 앞에 과일이나 음식을 차리고 몇 번 몸을 숙였다. 제국에서 치르는 의식인 듯했다. 나는 옆에서 그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희 부모님,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전쟁으로. 어머니는 병으로. 사실 이 안에는 어머니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전사했다는 서면 통지가 다였거든요. 그래서 저랑 제 동생은 옆집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키우다시피 했어요.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저와 비슷한 나이였을 거라고."

마리아의 집에 온지도 제법 시간이 지나, 옆집 부부와도 친해지게 되었다. 호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서로 일을 돕고는 했다. 같이 술을 마실 때면 간경화로 죽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계절은 겨울에 접어들어 밭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침대를 하나 더 만들자는 마리아의 말에 나무를 잘라 조립했다. 계속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아무래도 아니었지, 싶었지만, 마리아는 동생이 돌아오면 잘 곳이 없으니까, 라고 이야기했다.

"2층침대로 증축할까?"

"그럼 저는 위에서 잘게요. 아래에서 자다간 깔려 죽을지 모르니."

쇠고기 스테이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국수나 말린 과일로 하루 세 번씩 식사를 하고, 매일같이 강에서 몸을 씻고, 딱딱하지만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면 투명한 공기와 함께 창가에서 비쳐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마리아의 얼굴이 있었고, 잠들 때는 자그마한 숨소리와 온기가 곁에 있었다.

우리는 자주 바깥에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숨을 내쉬자 희게 얼어붙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화로에서 발해진 불에 얼굴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조슈아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별자리에 대해 이야기하자, 마리아는 "저걸 거기서는 그렇게 불러요?" 하고 웃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누군가에게 꼭 안겨 있다는 포근한 감촉에 감싸여 가까이로부터 어렴풋한 콧노래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곡조였다. 따뜻한 우유 같은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자 미소를 띤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있었다.

어머니의 온화한 두 눈에 어린 나의 모습이 비쳤다. 나는 연분홍빛으로 뺨을 물들인 어머니의 낭랑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이었던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눈을 감았다. 고요한 가운데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지나며 노래에 맞추어 몸이 작게 흔들렸다.

기분좋은 선율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마리아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운 나를 내려다보며 "일어났어요?" 하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하늘을 보았다. 까만 밤하늘에는 희게 반짝이는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고, 한켠에 뜬 커다란 달로부터 내려온 은은한 빛이 지상을 감쌌다. 그런 밤하늘 너머 저편에서 흐릿한 형체가 보였다.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삐걱이는 소리를 울리며 멀리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마리아는 몇 번 콜록 기침을 하고는 내게 고개를 기댔다. 나는 마리아의 어깨를 감쌌다.

"…달이 예쁜걸."

"그러네요."

새 한 마리가 나뭇잎을 헤치며 날아올랐다. 새는 여러 번 날갯짓을 하고는 바람을 타고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달빛에 녹아들듯이, 이내 벽야碧夜에 스며들어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