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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 작성일 2016-01-27
  • 조회수 553

담요였다. 하지의 새벽이었다. 은지는 날이 이상하게 춥다, 는 이상한 말을 뱉었다. 그러고선 옷장 안에서 두터운 감색 담요를 꺼냈다. 어깨 위에 담요를 두른 은지가 꼭 마법사 같았다. 꿈속의 세계가 펼쳐지는 영화에서는 한때 미소년이었으나 늙어버린 남자 배우가 승강기 안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이 내린 새하얀 벌판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들은 아마 누군가를 구하러 가는 중이었다. 총을 쏜 건, 수류탄을 던진 건 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어떤 가족이 있는지, 어떤 족보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입 안에 물음들이 꼬리를 만 고양이처럼 앉았다. 화면에 눈을 붙인 은지를 봤다. 대충 올려 묶은 윤기 없는 머리카락, 무릎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티셔츠, 제 무릎을 가슴 깊숙이 잡아당기는 두 팔.

문득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소꿉친구였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나오자마자 친구였다는 것이 은지 어머니의 농담이었다. 그녀들, 그러니까 나의 어머니와 은지의 어머니가 대학 동창이었던 것, 우연치 않은 기회에 같은 동네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소꿉친구가 된 유일한 이유였다. 기억이 시작되는 곳은 다섯 살이다. 그곳의 은지는 바닥에 주저 않아 울고 있던 나의 손을 잡았다. 울음의 근원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 은지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에 들렀다 돌아온 나는 어머니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은지랑 결혼할 거야, 라고. 어머, 은지가 그렇게 하겠다니. 나중에 성인이 된 후 어머니는 그 장면에 대해 일절 기억하지 못하고 내게만 그 말이 남아 있었다.

어제 밤, 은지는 중학교 시절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던가?”

“몰라, 그거 중요한 거야?”

“아니, 그냥, 궁금하잖아, 언제부터인지 시작되면 몇 년 친구인지 알기 쉽고 그러면 뭔가 신빙성이 있잖아, 인간관계란 게 그렇잖아.”

“별 말 같지 않은 소릴.”

“내뱉으면 다 말이 될 수 있는 게 인간의 가장 좋은 점이라고.”

“알았으니까 좀 닥쳐.”

기억이 절단되는 건 언제나 처음이나 끝이다. 우리의 기억에 중간은 없다. 오늘 새벽이 그렇다. 자정쯤 영화를 틀었다. 은지가 담요를 덮은 건 영화 초반부였다. 잠에 든 건 중간이 될 수 없다. 현재는 끝 다음의 처음이고 과거는 무수한 끝의 반복이고 미래는 처음이자 끝일뿐이다. 이 문장은 은지가 좋아할만한 문장이다. 마치 사과는 달다, 같이 완전 헐벗은 몸인 것이다. 그러니 애써 덧붙일 것, 구태여 궁리할 것 없는 수식이다. 아마 내가 어제 이 문장에 대해 말했다면 은지는 또 저 지랄, 이라고 중얼거리며 엉덩이를 토닥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이, 소꿉친구였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어.”

친하지 않은 동창은 그렇게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 동창들이 같이 모인 자리였다. 대부분 나고 자란 동네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지방이나 해외에 정착한 친구들은 연락이 아예 두절된 지 오래였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그만 커다랗게 말해버렸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사이는 있지.”

그 동창은 만취해서 제일 먼저 택시에 오른 사람이 되었다. 동창은 택시에 오르기 전, 뒤를 돌아보더니 대뜸 소리쳤다.

“그런 사이가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이냐?”

등 위에 담요가 올라와있었다. 은지가 꺼낸 것이 분명한 담요였다. 커튼을 걷었다. 빛이, 빛이 아닌 것처럼 들어왔다. 어떤 것을 온전하게 망치고 온 뒤 그제야 뒤를 돌아 망가진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빛이 굴러왔다. 식탁 위에는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다 식어버린 식빵 몇 조각, 베이컨, 달걀이었다. 메모 같은 건 없었다. 메모는 은지의 집에서 처음 자고 간 날 이후 전혀 보질 못했다. 식사를 대충 먹고 치웠다. 텅 빈 내부를 잠깐 둘러보았다. 작은 집이었다. 책들이 바닥에 잔뜩 쌓여 있었다. 몇 권을 집어 펼쳤다. 초록색 줄이 그어진 책들이었다.

“구석에 쳐 박아둔 상자 안에서 찾았어.”

은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열쇠는 우편함에 넣었다. 은지는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은지의 어머니가 사는 집에 돌아갈 것이다. 이번 달이 지나면 은지는 다시 그 집에서 나가 결혼할 것이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이 멈췄다. 다시 은지의 집에 들어갔다. 잠깐 사이에 달라진 건 없었다. 바닥에 허물처럼 떨어진 담요를 가지고 나왔다. 가방에 담요를 넣었다. 도둑이 되고 싶었다.

 

은지 어머니와 만난 건 주말 저녁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무렵이었다. 잠이 쏟아지고 흐릿한 영상들이 눈의 안에서 맴돌았다. 그때쯤이었다.

“잠깐 나오지 않을래?”

차 전문점이었다. 갖가지 찻잎을 우려낸 차를 파는 가게였다. 동네에 카페는 많았지만 그곳은 언제나 일정 이상의 손님을 가진 채 우뚝 서 있었다. 우리가 아주 어릴 적, 걷고 말하고 쓸 수 있을 때부터 쭉 있던 곳이었다.

“어차피 아무 것도 안하고 있었지?”

은지 어머니는 대뜸 말하곤 차를 홀짝였다. 그럴 땐 은지와 판박이였다. 한동안 차 마시는 소리가 대화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었다. 침묵에 익숙하지 않은 건 언제나 나였던 것 같다. 누군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면서 얻게 되는 어떤 상처들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곤 했다.

“무슨 일이시죠?”

“대단한 일은 아니고.”

“그렇지만 제게 부탁할 것이시죠?”

“뭔지 알겠니?”

감이 오질 않았다. 은지 어머니와 만난 건 참 오랜만이었다. 변한 것이 거의 없는 중년의 여자가 후후, 다 식어버린 차를 불어 마시며 할 말이란 게 대체 무엇일까? 한 잔이 공짜 리필인 차가 다시 나올 때까지 은지 어머니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쫓는 건 아마 붕어빵을 파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작은 이동 가게를 질질 끌고 와 선반 밑에서 반죽과 팥을 꺼내고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을 킨 다음에 붕어빵을 굽는 여인의 모습.

“예전에 은지랑 너도 많이 먹었어.”

어느새 은지 어머니는 그녀를 따라 여인을 바라보는 나를 본 모양이다.

“기억나요. 열 마리에 천 원 하던 때가 있었죠.”

“마치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말하는 구나.”

“시간이 제법 흘렀잖아요.”

“애송이들이 참, 많이도 컸어.”

“그 얘기가 할 얘기던가요?”

“얘는, 조급하구나.”

그리곤 다시 차를 마셨다. 불편하지 않았다. 은지 어머니는 늘 이런 분위기였다. 집에 찾아가면 우리 곁에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거나 하여튼 뭔가를 읽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자꾸 눈길이 갔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 입술을 혀로 핥는 모습, 늘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흘리는 웃음.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 같았다. 은지 어머니만이 존재하는 공간. 은지의 손에 살결이라도 약간 닿으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빨개야.”

“그런 소리 하면 못 써, 은지.”

면박 아닌 면박, 타박 아닌 타박, 그러다 우리는 이내 익숙해졌다. 마치 누구의 집에나 걸려 있는 사계절 달력처럼, 커다랗고 동그란 시계처럼, 아니면 수저나 젓가락처럼 늘 어딘가에 있는 물건인 것 같았다. 은지 어머니는 책을 덮었고 그러면 우리는 밥 먹을 시간이란 걸 알고 식탁 위에 앉았다.

“은지가 결혼 하는 건 아니?”

“예?”

전혀 몰랐다. 은지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았다. 사귀는 남자조차 없는 줄 알았다. 바쁘다, 를 입에 달고 사는 게 요즘의 은지였다. 일본에서 살다 온 친구에게 배운 오차즈케, 녹차에 밥을 말아먹는 이국의 음식에 매일 집착하는 것이 요즘의 은지였다. 문턱이 닳도록 은지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그동안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신통할 노릇이었다. 그러자 뭔가 까다로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채 받을 것만 같았다.

“보아하니 전혀 몰랐던 모양이구나.”

“예.”

“너희는 서로 알 거 다 아는 사이잖니.”

“그렇지도 않아요, 그냥 친할 뿐이죠, 남들보다 조금 더.”

“어쨌든 네가 설득해보렴.”

“뭘요?”

“은지가 사귄다는 그 남자, 내 보기엔 퍽 별로인데 고년이 우기고 우겨서 한사코 결혼을 한다는 구나. 사귄지 일 년 이 년 된 게 아니라 고작 두 달 남짓 됐다는데, 내달에 결혼한다니 내 허락 따윈 필요 없다느니 하고 말이야.”

이상한 일이었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 어떤 것보다 와 닿지 않았던 건 은지의 집이 이제 다른 남자의 소굴이 된다는 것이었다. 문을 열었을 때 나던 향수 냄새, 텅 빈 방, 은지가 정리하지 않은 잠옷이 침대 위에 있고 이불은 언제나 침대 밑에 떨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난 은지는 이불을 털처럼 휘감고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본다. 그곳 옆에 부자연스럽게 서 있을 알몸의 남자, 그것이 은지의 남편이 될 수 있을까? 주머니 속 은지의 집 열쇠를 만진다. 금속은 차갑게 살갗에 닿는다. 그것은 내 것이었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설득할 수 있을까요?”

“너네는 보통 사이가 아니니까 적어도 들어주긴 할 거 아니니.”

남은 차를 한 번에 마신 뒤, 은지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시기가 끝나자 즉시 자리를 떠나는 것까지, 은지 어머니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자리에 앉아 남은 차를 마셨다. 차 한 잔을 더 시켜서 마시고 다시 차를 받았다. 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

그래서 갔다. 그리곤 영화를 봤다.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잠에 든 건 실수였다. 영화가 끝나고 침대에 누워 넌지시 물어볼 셈이었다. 그럼 은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결혼을 하던 제사를 지내던 무슨 상관이야.”

답변을 준비해두었다. 은지의 등에 조금 달라붙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한다.

“둘 다 돈 내러 가야 하잖아. 경기가 이렇게 불안한데 말이야.”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우연이었다. 떨어진 적이 없었다는 건 떨어지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심지가 되곤 한다. 가끔, 은지가 아주 먼 곳, 해외나 그곳보다 더 먼 우주 너머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건 분명 멋진 일이었다. 그러나 멋져지고 싶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남은 시간이 달아나는 시간보다 더 길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중학교 때, 우리의 테제는 불이었다. 휴지나 신문지, 마른 낙엽 같은 건 불이 잘 붙었다. 은지는 라이터를 좋아하지 않았다. 문방구에서 산 작은 성냥갑에 든 성냥을 꺼낼 때, 은지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딱히 기쁜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슬픈 것 같지 않아서 그냥 웃음이 타버린 것들의 재처럼 흘러나왔다. 불은 따뜻하고 둥글었다. 우리는 한동안 주차장 구석에 숨어 불을 쬐었다. 겨울이거나 여름이거나 계절이 중요하지 않았다. 불 속에 휘젓듯 손을 넣으면 뜨거운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그것이 신기한지 은지는 몇 번이나 손을 넣었다. 몇 번은 어른들에게 걸릴 뻔 하고 실제 걸린 것은 두어 번쯤 되었다. 찔끔 눈물 흘리는 은지 앞에서 어른들은 그저 주의를 주었다. 그뿐이었다. 어른이 돌아가면 은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불을 붙였다. 불은 켜지기도 꺼지기도 쉬웠다. 그때의 불은 발화의 이미지가 아닌, 지펴진 것에 불과했다.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에 묶기기 전, 신들이 인간에게 불을 허락하기 전, 그러니까 우연한 낙뢰에 피어난 불이었던 것이다. 불이 발화된 건 아마 그런 지난한 시간들이 쌓인 후, 견딜 수 없을 만큼 매연이 자욱해진 뒤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우리는 불을 질렀다. 보다 많이, 보다 넓은 곳에, 보다 은밀하게. 당당해졌다.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멀리서 그곳의 불을 누가 제일 먼저 발견하나 내기하곤 했다. 성별에 관한 내기, 나이에 관한 내기, 신고 여부에 관한 내기, 내기는 끝이 없었다. 내기에 이기면 이긴 사람은 딱지, 껌, 알사탕, 온갖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다. 방화는 끊이지 않았다. 불을 지르는 건 언제나 은지였다.

“조심해.”

성냥갑을 양손에 꽉 쥔 채 불을 지르기 전에 주의를 주는 건 내 몫이었다. 신문은 어디에나 있었다. 길거리에 설치된 신문함에는 벼룩시장, 가로수, 갖가지 신문이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 우리의 방화를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비뿐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는 커다란 건물에 딸린 주차장 구석에서 다시 불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 은지는 겁이 없었다. 겁이 많은 건 항상 나였다.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 다가오나 망을 볼 때면 은지는 불 앞에서 커다랗게 나를 불렀다.

“우진아, 이리 와.”

한 번, 지하철 매표소 근처에 불을 지른 적이 있었다. 우발적인 일이었다. 은지와 함께 지하철 역사에 들어간 건 비 때문이었다. 표가 없는 우리는 지하철의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때, 은지는 바닥에 버려진 신문이 있는 반대편 기둥에 다가갔다. 그 기둥은 벽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특히 사람이 항상 있던 매표소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사각이었다. 은지는 한동안 신문을 만지다가 돌연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말릴 틈이 없었다. 불이 팟, 하고 피어났다. 은지는 그것을 바닥에 두고 내가 있는 반대편 기둥까지 여유롭게 걸어왔다. 조그마한 은지의 등 너머에서 불이 아른거렸다. 곧 소란이었다. 이내 매표소에서 사람이 나왔다. 작은 불길이었다. 소화기조차 필요가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젊은 남자 하나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온 건 충분히 수상쩍은 우리의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뒷짐을 진 젊은 남자는 처음에는 우리 곁을 맴돌다가 갑자기 얼굴을 돌려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하니?”

“불을 보고 있었어요.”

“왜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니?”

“말할 참이었어요.”

“얼마나 보고 있었는데?”

“잠깐, 잠깐이요.”

“세상에는 아주 무서운 귀신들이 많단다. 물귀신이나 처녀귀신, 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귀신까지 많은 귀신들이 있어.”

“그래서요?”

“귀신들은 가만히 사람을 보고 있어. 그러다 무언가 기억이 나면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거야. 물귀신은 물 근처의 사람을, 처녀 귀신은 처녀인 사람을, 불귀신은 불과 가까운 사람을,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뇨, 전혀 모르겠어요.”

“그러니, 그럼 이제 집에 돌아가렴, 서둘러야한다.”

나는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은지의 낯빛이 어두웠다. 귀신같은 걸 믿을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은지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몸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 은지의 집 앞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입술 위 입술을 올려놓고 간을 봤다. 짭짤하고 물렁한 맛이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불을 지르지 않았다. 적어도 어떤 종이, 어떤 물체에 성냥을 들이밀진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랐고 고등학생은 고작 불장난 따위에 관심을 가질 만큼 어린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태제는 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우리는 물리적이나마 조금 멀어졌다. 은지를 비롯한 여자 학생들이 수업하는 교실은 학교 서쪽에 위치한 옛 건물이었고 남자 학생들이 수업하는 교실은 동쪽에 건축된 새 건물이었다. 가끔 몇 개의 수업 시간에만 우리는 동쪽과 서쪽 중앙쯤에 위치한 건물, 대부분 예체능 수업 및 실험 수업에 사용되는 건물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오쯤 되면 우리는 방학 때 교장 선생님이 훈화를 읊는 그 단상 앞에서 만나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 걸었다. 우리는 우리의 사이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짓궂은 친구들의 물음에 우리는 제각각 부정 아닌 부정을 내뱉었을 것이다. 이학년이 되자 나는 자주 학교를 빠질 수밖에 없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앓던 지병이 도진 탓이었다. 가끔은 은지가 학교를 빼먹고 문병을 왔다. 그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내가 금방 낫게 해줄까?”

은지는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옆에서 그렇게 말했다. 작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말고 갑자기 물어본 것이 퍽 심상한 일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네, 네가 의사냐?”

“꼭 의사만 사람 낫게 하니, 하여간 넌 변함없이 바보구나.”

“야매는 안 좋은 거야, 어떤 결과가 나오던 말이야.”

“알았으니 좀 닥쳐봐.”

은지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내 몸에 덮인 이불을 걷었다. 바지를 벗겼다. 순식간이었다. 은지의 정수리 근처 쌍가마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고개가 들쑥날쑥했다. 내 몸이 외계인에게 속박된 채 생체 실험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은지는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고 있었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장기들이 달아오르고 온 몸의 피가 두 배, 세 배 빨리 돌아 혈관이 터질 것만 같았던 것이 아주 조금 전이었다. 은지는 처음이 아니라는 듯 자연스러웠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물음이 허락되는 세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세계라는 건 마치 물수제비 같았다. 튕길수록 멀리 가고, 그러나 언젠가 멈춰야 하는 것. 파문이 인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물의 선택은 아니라는 것. 말없이 침대에 누웠다. 저녁이 되었다. 은지는 책을 덮고 가방을 맸다.

“좋았어?”

은지가 물었다. 대답이 필요한 물음은 아닌 것 같았다.

“순 돌팔이야, 나는 아무 것도 낫지 않았잖아.”

“그럼 나을 때까지 해야겠네?”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될 곳까지 말을 놓아야 하는 바둑 속 우둔한 사람들. 그래서 결국 패착이 짙은 게임에서 번갈아가며 자충수를 두고 승리를 양보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것이 여태 우리가 한 어떤 것보다 더 해로운 일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우스운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공사 소리가 났다. 창문 밖을 봤다. 꼭두새벽부터 인부 몇 명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침대에서 나갔다. 물을 마시면서 굴삭기가 땅을 찧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언가 길의 내부에서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기다랗고 뾰족한 철심이 바닥에 박혔다. 평평한 바닥에 몇 번 넣다 뺐다 반복한 철심은 곧 작고 아담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구멍은 곧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인부가 들어갔다. 인부가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유달리 증축 공사가 많았던 학교가 떠올랐다. 은지가 이불을 머리까지 당겨 덮었다.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귀를 막아도 들릴 것 같은 소음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 맞겠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은지와 잠자리를 가진 곳은 상상 할 수 없었던 곳들이었다. 그곳은 우리의 도처이면서 따라서 타인들의 근처이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다. 은지가 주공 아파트에 들어선 뒤부터 우리는 그곳에서만 섹스를 했다. 그곳에서는 섹스가 진짜 섹스 같았다. 죽은 생선 만지듯 애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애써 인정해야만 하는 곳, 둘이나 존재는 하나에서 늘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줄어든다는 걸 인지하게 되는 곳, 그러면서 같은 이불을 덮고 등을 맞대면 부지불식간에 아늑해지는 곳.

우리의 암호는 간단한 것이다. 은지의 집 앞, 주공 아파트 201호의 문고리에 빨간 리본이 걸려 있으면 나는 지체 없이 그곳에서 최대한 멀리 떠났다. 한 달에 몇 번이나 그런 일은 있었다. 그것은 우리 사이의 약속이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것, 몸을 섞지 않는 것,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로 말없이 살 것, 그런 것이었다. 절대 열지 말라던 상자를 열고, 절대 보지 말라던 방의 전경을 보는 치기 어린 짓은 우리 사이에 통용되지 않았다. 금기는 지켜지기 때문에 가장 합당한 함정인 것이다. 가끔, 은지가 리본을 매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리본을 세탁된 옷처럼 탁탁 두 번 털은 다음에 문고리를 쓱쓱 닦았다. 그리고선 왼쪽을 한 번, 오른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거나 그저 주변의 사람이 있길 바라는 몸짓 같았다. 리본을 묶을 땐 꼭 나비매듭을 지었다. 그리곤 문에 붙은 전단지를 떼고 안으로 들어갔다. 간결하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면 그날은 더욱 그곳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은지의 동작은 삼십 년이나 익숙해진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연극 같았다.

“도대체 뭐하는 거야?”

이불 안에서 은지가 물었다. 음성이 뭉개지고 발음이 어눌한 말이었다.

“공사하나봐,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그래, 그렇지 않고서 이 새벽에 주민들을 깨우는 몰상식한 행위를 할리 없지.”

“뭐 어때, 일찍 일어나면 좋잖아, 조금 큰 소리가 나는 자명종인 거지.”

“맞춘 적이 없는 걸, 애초에.”

식탁에 앉았다. 빵을 씹었다. 맛은 없었다. 다만 무언가를 입 안에 넣고 싶었을 뿐이었다. 냉장고를 뒤져서 비엔나 소시지를 찾았다. 차가운 소시지를 꺼내어 입 안에 두 개씩 넣었다. 계란을 삶았다. 커피를 탔다. 식욕이 오히려 달아났다. 인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낮술 한 잔 하러 갈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늦게까지 잠을 청할 때, 잠을 청하지 못한 채 밤을 꼴딱 샌 사람들이 이제 막 침대에 들어갈 때, 선잠 끝에 간신히 이불 밖에 나와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그것들은 시간을 같이 하고 다만 시각을 달리할 것이다. 우리들의 시각은 어떤 것은 좁고 가늘며 어떤 것은 길고 굵고 어떤 것은 좁고 굵거나 길고 가늘었다. 커피가 위에 떨어지는 상상이다. 위는 다락방 같고 커피는 황사 먼지를 쓸어내리는 장마 같다. 은지가 일어나 잔에 조금 남은 커피를 들이킨다.

“물이 아니네.”

“응, 그거 아주 쓴 커피야.”

“모르겠어, 방금 일어나서.”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커피인 걸.”

“사람들은?”

“떠났거나 잠깐 자리를 비웠거나 아니면 죽었거나.”

“그거 농담?”

“조금의 거짓 없는 진담이야, 사람이란 늘 그렇잖아.”

“아침부터 철인처럼 굴지 좀 마.”

“새벽에는 철인처럼 굴어도 괜찮고?”

“말을 말자.”

은지는 씻었고 나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 얇은 이불은 불쾌한 감촉이었고 침대보는 땀 때문에 축축 젖어 있었다. 온기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접시에 담긴 초는 반쯤 남아 있었다. 촛불을 켰다. 불은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불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 오래 전이 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불을 껐다. 보기 싫은 것들을 볼 이유가 없었다. 은지는 젖은 머리카락에 수건을 둘둘 매고 나왔다.

“아직 가지 않았구나.”

“작별 인사도 안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어, 매정하구나.”

“헛소리 말고 빨리 꺼져.”

“그건 헛소리 안 하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

“너, 존재가 정말 암 덩어리 같다.”

“누군가의 고통이란 거구나, 좋지, 고통이란 거 언젠가 한 번쯤 가지고 싶은 거잖아.”

“그러니.”

“물론이지, 그 언젠가를 고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인 거야.”

은지는 식탁에 앉았다. 빵을 씹었다. 커다란 식빵의 한 조각이었다. 섭취보단 충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괜히 긴장이 되자 목이 아파왔다. 기침이 나왔다. 화면 앞에 앉았다. 눈은 화면 속 풍경에 대해 주시하는 흉내를 낼 뿐이었다. 은지가 냉장고에서 당근 주스를 꺼내 마셨다. 시음보단 주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런 여자가 결혼할 수 있을까. 생기 없이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오래 친구인 남자와 몸을 섞는 여자가 온전히 타인인 남자와 함께 살 수 있을까. 물음이 얼떨결에 입 밖에 튀어나왔다.

“너 결혼한다며?”

“응.”

“어떤 남자야?”

“만나볼래?”

은지는, 만나서 확신이 들지 않는 것들을 처리해달라는 것처럼 말했다.

 

멀쑥한 사람이었다. 그의 첫인상이었다. 간단한 음식점이었다. 역세권 근처의, 대부분 면이 들어간 음식이 주된 요리인 가게였다.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곤혹스러웠다. 은지는 면이라면 거의 먹지 않았다. 나쁜 일을 꾸민 것 같았다. 은지와 은지 옆에 앉은 남자는 주문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은 투박하고 가칠했다. 할 말이 딱히 없었다. 은지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는 간간히 은지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불화 없는 것이 오히려 불화일 때가 있었다. 둘은 그런 상태인 것 같았다. 음식이 나왔다. 은지가 포크를 집어 면을 돌돌 말았다. 모든 상념들이 돌돌 말려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그것을 입에 집어넣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배탈이 날 것 같았다.

“오래 친구셨다고요?”

그의 첫 물음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상당히 피곤한 것 같았다.

“예, 태어나기 전부터 친구였던 셈이죠.”

“그거 참 재밌는 표현이군요.”

“진짜로요.”

“그런 게 운명 같은 거겠죠?”

“어쩌면요, 어쩌면 우리 내부에 새겨진 인장들보다 더 강한 것들이겠죠.”

“인장이요?”

“예, 그렇잖아요, 몸이란 거 내 존재가 탈피 할 수 없는 것이잖아요.”

“재밌는 말을 하시는 분이군요.”

“그런가요?”

“은지씨가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은지씨는 나 별로 안 좋아해요.”

“밥 먹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은지가 끼어들었다. 접시가 비워지는 동안 음악이 몇 번 바뀌었다. 은지는 아주 천천히 면을 씹었다. 더 많이 씹어서 삼킨다고 한들 많은 것들 중 소화가 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은지의 내부에서 꿈틀 거릴 것이었다. 그는 면발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자처럼 면발을 들어 유심히 살피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았다. 면을 입에 넣고 빨아먹은 뒤 뱉어 하얀 몸체의 면발을 관찰하다가 갑자기 변명하듯 말했다.

“제가 좀 관심이 있어서요.”

“요식업계에선 나름 유명한 편이야.”

“그냥 좀 이름이 있을 뿐이지.”

그럴 땐 죽이 잘 맞았다. 은지의 호흡이 끊길 때 그의 호흡이 들어갔다. 빈틈없이 꽉 채워진 대화, 행간 사이에 생략된 것이 없는 말들, 그리고 약간 움찔하는 표정들.

“원래 음식 장사 하는 분들이 다 좋은 사람이라잖아.”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어쨌든 감사하네요.”

“걱정이 좀 됐어요, 은지씨가 워낙 새침데기라서 잘 살 수 있을까 괜히 오지랖 넓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부터 혼자 살 게 되면 어쩌나 했어요. 그런데 괜찮을 거 같아요. 사실은 은지씨 어머님한테서 결혼 말려달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말릴 이유가 없네요. 둘, 좋은 부부가 될 것 같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설 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찍혀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지가 이 남자와 결혼하려 하는 이유가 정자로 이름 석 자 적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명함을 지갑에 넣는 척 하며 바닥에 버렸다. 하수구 안에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명함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담배를 방 어딘가에 놓고 온 것이 떠올랐다. 은지는 그의 차에 타기 전 슬며시 다가와 면박을 주었다. 은지다운 일이었다.

“은지씨가 뭐야, 은지씨가.”

“그럼 쟤가, 라고 할 순 없잖아.”

“하여간 엄마는 이런 얘가 뭐가 믿음직스러워서 그런 걸 다.”

“그런 너는 뭐가 좋다고 계속 나랑 친구했냐?”

“좋아서 했니, 네 말처럼 친구가 돼서 한 거지.”

“아니었음 아니었단 거지?”

“뭐?”

“아니야, 가 봐, 기다리시잖아.”

“그럼 식장에서 봐.”

 

식장은 작고 아늑한 곳이었다. 너무 일찍 온 탓에 식장에는 하객이 전혀 없었다. 신부 대기실의 문이 닫혀 있었다. 근처에서 알짱거리던 찰나, 그가 나타났다. 여전히 먼저 손을 내밀어 두 번쯤 쓸어내린 뒤, 그는 멋쩍게 웃었다.

“정장이 썩 어울리나요?”

“그럼요, 아주 새신랑 같아요.”

“다행이네요, 한 번 들어가 보세요.”

“실례가 될 것 같아서요.”

“그럴 리 없어요, 아주 오래된 친구잖아요, 둘.”

“소꿉친구죠.”

화장실에 같이 갔다.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머리를 이리 저리 만졌다. 소변을 누는 동안 그는 제법 시끄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대부분 은지에 대한 사소하고 작은 얘기들이었다. 들뜬 기색이 풀풀 풍겼다. 내밀한 것들을 묻고 싶어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지씨에 대해 뭘 아세요?”

“예?”

“은지에 대해 어디까지 아시냐고요.”

“어디까지라뇨?”

“은지가 어떤 여자인지 말이에요.”

“차차 알아가야죠, 이제.”

“그렇게 잘 살 수 있을까요?”

“예?”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같이 살면서 알아간다는 거, 그래서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을 발견해나간다는 거, 잘 될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당황한 그를 내버려둔 채 바깥에 나왔다. 신부 대기실의 문이 열려 있었다. 은지가 입은 순백의 드레스 끝자락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은지는 거울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는 직원인 것 같은 여자 둘이 드레스를 만지고 있었다. 그가 뒤를 지나갔다. 신부 대기실에 다가가 둘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이, 은지가 알은 체를 했다.

“언제 왔어?”

신부 대기실 문 앞에 서서 작게 대답했다.

“결혼식 날 신부가 그렇게 소리치면 안 되지.”

“하여간 걱정도 팔자다.”

“걱정이 아니라 아주 당연한 거야.”

“좋은 날 투덜거리지 좀 마.”

“좋은 날이지, 암.”

“빈정대는 건 더더욱 싫은데.”

“잠깐만 둘이 얘기할 수 있을까?”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서 은지의 드레스를 잡아주던 여자 둘이 선선히 일어나 대기실을 나갔다. 나는 쪼그리고 앉았다. 대기실 의자에 앉은 은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상체를 약간 기울였다. 은지답지 않은 조신함에 웃음이 나왔다.

“뭐야, 그 자세는.”

“나도 이제 부인이니까.”

“은지야, 할 말 있어.”

“뭔데?”

“너 이 결혼, 안 하면 안되냐?”

“이제 와서 무슨 말 안 되는 소리야?”

“저 사람, 좋은 남자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네가 판단한 일이야?”

“나 아까 화장실에서 봤어.”

“뭘?”

“저 사람 발목에 전자발찌 있는 거, 저 사람 성범죄자야.”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무섭지 않아?”

“내가 선택한 사람이야.”

“은지야, 내 말 들어.”

“싫어, 너 오늘 좀 이상해.”

나는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서 빳빳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명함 위에는 아주 선명한 글씨로 ‘K전자 사장 이우진’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은지는 퍽 놀랐는지 명함을 떨어뜨렸다. 명함을 주워 다시 은지 손에 쥐어주었다. 은지는 위조지폐를 검사하는 사람처럼 명함을 앞, 뒤, 옆면까지 살피다 말고 대뜸 말했다.

“너 이거 안 하려고 그렇게 공부하면서 발버둥 친 거 아니었어?”

“글쎄. 다 잊어버렸어.”

“무슨 소리야, 내가 다 아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지, 너한테는 아니란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은지야, 집에서 기다릴게, 꼭 와.”

낮의 체온은 높았다. 체온이 너무 높아지면 몸이 터져버리는 것일까. 마치 전자레인지에 너무 오래 돌린 가래떡처럼, 몸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는 것일까. 까맣게 난 구멍 속은 텅 비었고 장기들은 이미 다른 몸을 찾아 이사 간 뒤의 일이었을까. 주공 아파트의 앞에 왔을 때에는 기운이 전부 빠져 도무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계단에 앉았다. 은지는 신혼여행을 유렵에 가고 싶을까, 아니면 프랑스에 가고 싶을까. 어디든 날씨가 좋을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지언정 한산한 해변, 밀짚으로 만든 파라솔, 아담하고 색채가 예쁜 작은 집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면 우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함없이 소꿉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