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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과 기번의 틈새 로마사

  • 작성일 2016-03-06
  • 조회수 459

(1) 조작된 간통사건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동부 지역을 점령하고(BC 58), 라인 강을 넘어 두 차례나 게르마니아와 바다 건너 브리타니아(영국)까지 원정했으면서도 속주로 삼지 않았다. 그 후에도 적의 침략이 계속되자, 라인 강 서쪽 방위사령관이었던 드루수스와 도나우 강 동쪽 방위사령관이었던 티베리우스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엘베 강과 도나우 강을 잇는 새로운 방위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군사작전을 펴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의 루그두눔(리용)에서 드루수스와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다음 해(BC 9) 1월 어느 날, 드루수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에 동의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동안 미루어 오던 후계자를 확정지었다.

 전선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드루수스는 형이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가로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미안해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나는 애초부터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었네.’하면서 형제간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계자가 되고 달포가 지난 2월 말, 드루수스는 한파가 몰아치는데도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정찰에 나섰다가 말이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크게 다치고, 병영에 돌아와서 형을 애타게 찾았다.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맥과 인접한 평야지대의 포 강과 티치노 강이 합류하는 티키눔의 겨울 숙영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티베리우스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드루수스는 당시 27세였던 부인 안토니아와 6세였던 아들(게르마니쿠스), 4세였던 딸 그리고 갓 태어난 클라우디우스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근심하지 말라고 동생을 안심시키고, 죽은 동생의 운구 행렬 선두에 서서 로마로 돌아왔다. 남편을 따라 외지에 갔던 안토니아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정신이 없어서 갓 태어난 클라우디우스를 보모에게 맡겼었다.

추운 겨울, 운구 행렬을 따라오던 보모의 실수로 갓난아이는 병에 걸려 하반신 마비가 왔다. 다행히 로마에 돌아와서 병세가 호전되었다. 다리를 절기는 했으나 목발을 짚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르키소스의 어미는 자신의 잘못이 크다면서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살았다.

로마인들과는 달리 갈리아인, 아니우니족은 한 장소에 모여 살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러니 전쟁 중에도 가족을 데리고 다녀야만 했고, 싸움에서 지면 아녀자들은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르키소스, 칼리스투스, 팔라스, 그리고 또래 아이들도 포로로 잡혀 와서 클라우디우스 집에서 함께 살았다.

졸지에 미망인이 된 안토니아는 첼리오 언덕의 본가에서 유학 온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살았다. 당시 속주의 왕이나 권세가들은 자녀를 로마에 유학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로마 황실 자녀들과 친교를 맺어두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여섯 살이 되던 해(BC 4), 서른 살 가량 되어 보이던 유대 여자 베레니케가 11세 딸(헤로디아)과 6세 아들을 데리고 왔다. 남편이 시리아 주둔 군단 사령관 바루스 휘하의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었다면서 찾아왔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온 베레니케는 예루살렘에 있었으면 호강할 수 있었는데도 고생을 사서 했다. 아들이 장성하면 유대 왕 칭호를 받고 금의환향하려는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가사를 돌보게 된 베레니케는 열심히 일했다. 허드렛일은 노예들이 했다. 하지만 유학 온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이 야단법석을 떠는데다가 노예를 부리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아서 몸과 마음은 늘 지쳐 있었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토니아는 ‘망측한 종교적 관습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베레니케는 정직한 내 친구랍니다. 최고의 살림꾼이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망측한 종교적 관습’이라는 표현은 유대인 누구에게나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특히 베레니케는 유대인임을 고집스럽게 내세웠다. 아들이 장성하면 유대 왕이 될 것이라서 더욱 유난을 떨었다.

그녀는 아들을 ‘헤롯 아그립바’라고 불렀다. 극동 지역 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예루살렘 성전 본당 준공식에 참석하여, 청동 포도주 잔과 황소 100마리를 선물한 적이 있었고(BC 15), 행사에 참석한 이들이 고기를 배불리 먹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빌리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그립바가 클라우디우스 집으로 오고 2년이 되던 해(BC 2), 황궁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외동딸 율리아가 외간 남자와 간통했다면서 고발을 당했던 것이다.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법’(BC 18)이 만들어지고 첫 번째 발생한 사건이었다. 황제의 딸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경고성 차원에서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더군다나 황실에서 발생한 사건이라서 황후 리비아의 노여움은 컸다. 율리아에게는 변호사를 사서 변론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판결이 났다. 그 서슬에 상대 남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율리아는 종신 유배형으로 아드리아 해의 판다타리아 섬으로 보내졌다.

졸지에 유배를 가게 된 율리아는 당시 37세였고, 고인이 된 전 남편 마르쿠스 아그립바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가 있었다. 두 번째 남편 티베리우스와는 별거 중이었다.

장남 가이우스는 18세, 장녀 율리아(소)는 17세, 차남 루키우스는 15세, 차녀 아그리피나는 12세, 막내 포스투무스는 10세였다.

율리아는 유배지로 가기 전, 루키우스와 아그리피나 그리고 포스투무스를 클라우디우스 집으로 보냈다. 간통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장남 가이우스는 예정 집정관 칭호를 받고 20세가 되면 자동적으로 집정관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 남아 있었다.

장녀 율리아(소)는 명문 귀족 아이밀리우스와 결혼하고,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다. 차남 루키우스도 클라우디우스 집으로 오던 해에 예정 집정관이 되면서, 그 또한 20세가 되면 자동적으로 집정관이 되도록 원로원에서 승인이 났다.

명색이 율리아의 남편이었던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의 유해와 함께 로마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로도스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올림피아 대회(195회)에 출전하여 기마경주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AD 1).

율리아가 유배지로 떠난 다음, 아이들은 국법의 지엄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모두들 모친(율리아)의 간통사건에 대해서 모른 체했다. 되레 즐거운 척 하면서 어른들을 속였다. 차남 루키우스는 18세가 되던 해(AD 2)에 이스파니아 지역에 출몰하는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사령관을 따라갔다가 전사했고, 장남 가이우스도 외지에 나가 있으면서 정서불안 증세를 보이다가 말썽을 피워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정서불안 증세를 보이게 되었는지 클라우디우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음 해,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명을 받고 로도스 섬에서 돌아와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를 결혼시켜, 자신의 근무지로 데리고 갔다(AD 3). 티베리우스는 임지로 가기에 앞서, 전처 빕사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스토르를 데리고 와서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지내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았던 카스토르와 친구처럼 지냈다.

그 무렵, 클라우디우스의 누이 리비아(소)는 가이우스와 결혼하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 후, 황후의 총애를 받으면서 황궁에서 살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자기보다 나이가 두 살 더 많은 포스투무스, 한 살 더 많은 카스토르, 동갑내기인 헤롯 아그립바, 그리고 나이가 엇비슷한 칼리스투스, 팔라스, 나르키소스와 유학 온 또래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포스투무스는 나이에 비해 체격이 월등하게 컸다. 싸움도 잘했다. 전쟁놀이에서는 항상 대장이나 왕 행세를 했다. 다른 아이를 목마 태우고 달리면서 힘자랑도 했다. 의협심이 강해서 동네 아이들이 클라우디우스에게 무례한 짓을 하면, 자신에 대한 무례로 간주하고 혼을 내주었다. 이처럼 평온하기만 하던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변방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아그리피나가 자신의 생모 율리아가 조작된 간통으로 유배를 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였다.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생모가 간통과 난교로 유배 간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황후가 없는 죄를 만들어 유배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판다타리아 섬으로 찾아갔다.

“이게 얼마만이냐? 이리 오너라. 그런데 왜 그러느냐? 내가 더러운 여자로 보이느냐?”

오랜만에 만난 딸을 얼싸안으려고 다가섰을 때 아그리피나가 뒤로 물러섰고, 율리아는 섭섭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한 말이었다.

아그리피나는 반가우면서도 간통과 난교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는 생모가 원망스러워서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런 딸을 보면서 율리아가 다시 말했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음탕한 년으로 보이느냐?”

이처럼 어색한 모녀의 상봉을 지켜보고 있던 스크리보니아가 화를 내면서 아그리피나에게 말했다.

“네 어미가 무엇이 부족해서 간통을 하겠느냐. 티베리우스와 남남처럼 지내기를 십여 년 가까이 했으면서도 불미스러운 일은 한 번도 없었단다. 그리고 정식으로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면 했지, 무엇 때문에 간통을 하겠느냐. 티베리우스가 본처를 그리워하면서 거들떠보지 않았을 때도 우리는 금실 좋기로 소문난 티베리우스와 빕사니아를 억지로 이혼시킨 황후를 미워했지 티베리우스를 원망하지 않았단다. 네 어미는 너희 다섯이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러워 했다. 안토니아를 보거라. 남편이 죽었는데도 재혼을 하지 않고 잘 살고 있지 않느냐?”

스크리보니아는 유배지에 와서 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아그리피나는 외조모의 말을 듣고서야 율리아의 품에 안겨 대성통곡을 했다.

율리아는 슬퍼하는 딸을 달래면서 간통 혐의로 자살한 율루스 안토니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너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를 게다. 그 사람은 너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죽기 바로 전 해(BC 13)에 법무관을 지냈고, 집정관(BC 10)을 거쳐 속주 총독까지 지낸 사람이란다. 간통으로 고발당했을 때, 그 사람은 38세였고, 나는 37세였다.”

그러면서 황궁의 복잡한 가족관계를 말해주었다.

판다타리아 섬을 다녀 온 아그리피나는 생모 율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리비우스가 쓴 『도시의 건설로부터』 후속편에 해당하는 『역사』를 쓰기 위하여 자료를 정리 중에 있었기 때문에 황궁의 혈육관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아그리피나가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살한 율루스 안토니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클라우디우스의 외조부 마크 안토니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풀비아 사이에서 태어났다(BC 40). 그가 두 살이 되던 해에 풀비아가 죽었기 때문에 마크 안토니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재혼을 하면서, 전처 아이를 옥타비아에게 맡기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마크 안토니와 재혼한 옥타비아에게도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겔루스와 마르겔아 두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마크 안토니와 재혼하면서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그중 한 사람이 클라우디우스의 모친이라서 그에게는 이모가 한 분 더 있었다.

이처럼 옥타비아는 혈육관계가 복잡한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도 차별하거나 구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모양처로 소문이 자자했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개명(BC 27)을 하고, 황제가 된 다음에는 마르겔루스와 마르겔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15세가 되던 해에 18세였던 마르겔루스와 결혼을 시켜 사위로 삼았다(BC 24). 사촌지간의 결혼이었다. 그리고 부인과 어린 딸 빕사니아가 있는 마르쿠스 아그립바에게 이혼을 하게하고, 마르겔아와 혼인을 맺어 조카사위로 삼았다.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르겔루스는 결혼하고 2년이 되던 해에 죽었다. 17세에 과부가 된 율리아는 다시 2년 뒤, 극동 지역에서 돌아 온 마르쿠스 아그립바와 혼인을 맺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아그립바를 사위로 삼으려고 42세 늙은 신랑과 18세 신부에게 새살림을 차리게 했다(BC 21). 그런 다음 과부가 된 마르겔아를 율루스 안토니아와 혼례를 시켰다.

이로써 조카사위를 사위로 승격(?)시키기 위한 작업이 끝났다. 마르겔아와 결혼한 율루스 안토니아도 조카사위가 되면서 후계자 반열에 올랐다. 그래서 법무관과 집정관에 이어, 속주 총독을 역임하면서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황후는 율루스 안토니아가 후계자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할 요량으로 티베리우스와 별거 중인 율리아와 율루스 안토니아를 간통으로 엮어 고발했던 것이다.

율루스 안토니아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히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부친 마크 안토니를 닮아서 체격이 우람하고 영리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변호사를 사서 무죄를 주장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체포 즉시 죽이라는 판결이 났다. 그는 치욕스럽게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판다타리아 섬을 다녀온 아그리피나는 생모의 간통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황제를 찾아갔었다. 그러나 황제 옆에 황후가 버티고 앉아 있어서 말하지 못했다. 아그리피나는 생모의 유배지를 바꾸어 달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 어느 섬에 있더냐?”

황제는 무남독녀 율리아가 어느 섬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키프로스 섬이나 레스보스 섬 어딘가에 있는 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그리피나의 간곡한 요청으로, 율리아는 이탈리아 반도 남단과 시칠리아 섬 사이의 메시나 해협의 항구도시 레기움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AD 5).

생모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부터, 아그리피나는 황후와 티베리우스를 싸잡아 원수처럼 여겼다. 사사건건 시비를 달았다. 그렇지만 자기도 언제 음모에 휘말리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서 황후 앞에서는 조심을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해(AD 6), 황제는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입적했다. 그리고 나서 2년이 지났을 무렵, 또 다시 간통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율리아의 다섯 자녀 중에서 장녀이고, 아그리피나의 언니가 되는 율리아(소)가 간통과 난교로 고발당했다(AD 8). 그녀는 슬하에 가나메데와 아이밀리아 남매를 두고 있었다. 남편 아이밀리우스는 의처증이 심해서 수시로 아내를 의심하는 발언을 했다.

또 다시 임신한 부인에게,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아이를 배가지고 왔느냐고 소리소리 질렀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황후가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황후는 율리아(소)를 원로원에 고발했다. 원로원에서는 황후의 말만 믿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율리아(소)는 풀리아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트게메루스 섬으로 유배를 갔다. 간통 상대 남성은 『사랑도 가지가지』, 『사랑의 기교』를 발표하면서 인기 절정에 있었던 시인 오비디우스였다. 그는 쉰 살이 넘은 나이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오비디우스는 율리아(소)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간통을 인정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간통을 시인하고 흑해 연안의 토미스로 유배를 갔다.

그는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카이사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갖가지 신화와 전설을 담은 『변신 이야기』를 써서 황제에게 바쳤다. 그 책에는 천지창조를 비롯하여, 신과 인간 사이에 빚어지는 온갖 사건, 특히 트로이 전쟁 당시 아이네이스가 팔라디움 신상을 가지고 와서 로마를 건국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카이사르가 죽어서 승천한 이야기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유피테르 신과 비교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그는 황제의 환심을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AD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