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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 작성일 2011-07-26

 2011년 《문장웹진》이 주목한 젊은작가 6인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임수현

 

 

 



 
 

파란 모자를 눌러쓴 건 이틀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제가 가진 모자라고는 V가 두고 간 이 파란 야구모자 하나밖에 없어요. 게다가 갑자기 눈이 쏟아졌잖아요. V가 폭설이라고 이야기는 했어요. 첫눈치고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쏟아진 건 아마 몇십 년 만의 일일 거예요. 집에 우산이 없어요. 보름 전인가, V가 들러서는 하나밖에 없는 우산을 들고 가버렸어요. 우산살을 펴면 두 팔 벌린 너비 정도 되는 자루우산이었어요. 제가 오랫동안 아낀 우산이었죠. 고작 우산이라니요? 일 년에 비 오는 날만 따져 봐도 얼추 백 일은 넘을걸요. 솔직히 어떤 사람이 애지중지하는 니콘카메라를 찍는 날보다 훨씬 많을 거예요. 몇 년 전에 읽다 말고,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은 책을 누군가 빌려가겠다고 하면 언짢아하는 것보다 훨씬 논리적이잖아요. 날마다 쓰는 지포라이터나 머그잔, 시계라면 인정할 수 있어요. 게다가 저는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접이우산은 좋아하지 않아요. 왜 사람들이 어깻죽지도 제대로 못 가리는 우산 따위를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그 자루우산은 뭐랄까, 그래요 제 정서와 궁합이 참 잘 맞았어요. 그런데 그걸 V가 냉큼 들고 간 거예요. 이튿날인가, 라면을 사려고 편의점에 가려고 보니 우산이 없더라고요. 우산을 세워 놓은 모서리에 V가 집게손가락으로 퉁긴 담배꽁초만 거미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어요.

사실 그날은 유난히 일진이 사나웠어요. V의 전화를 받고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대학로로 가는 길이었거든요. 싫다고 했는데, 곡이 전화를 낚아채서는 택시비를 주겠다며 얼른 나오라고 떼를 썼어요. 그러고는 둘이서 한참동안 무어라 웅얼거리더니, 합승한 택시 안에서 승강이라도 벌인 것처럼 느닷없이 전화가 툭 끊어져버렸어요. 곡요? V의 후배라고 하는데 두세 번 함께 어울린 적이 있어요. V는 한 번도 제게 누구를 소개해 준 적이 없는데, 특별한 경우죠. 눈은 한 뼘 정도 쌓였고, 골목길은 벌써 얼어붙어 촛농처럼 굳은 눈을 아무리 구두코로 파헤쳐 봐도 어림없더라고요. ‘염화칼슘 보관하는 집’ 대문을 두드릴까 하다가 담벼락을 붙잡고 엉금엉금 골목길을 기다시피 내려갔어요. 택시를 잡는 데 이십 분 넘게 걸렸어요. 도로 집으로 돌아갈까 한참 동안 고민했죠. 사실 V는 혀가 풀려 있었고, 곡은 원래 발음이 또렷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잘 모르죠. 늘 흐리마리해 보이는, 그런 사람 있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집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현명했던 것 같아요. 창덕궁 사거리에서 택시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한 바퀴 반을 돌아 중앙선을 침범하고 건너편 길가에 멈춰섰었거든요. 택시기사도 되게 놀랐는지 미안하다, 괜찮냐는 말도 하지 않고 겸연쩍게 웃기만 했어요. 다행히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라 거리가 텅 비어 있었기망정이죠. 만약 길 건너편에서 다른 차가 달려오기라도 했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죠. 덤덤하게 짝짝이가 된 풍경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어요. 273번 버스를 타고 종로타워를 지나는데 길 건너편에서 종로3가 쪽으로 가고 있는 273번 버스를 보는 기분 같은 거예요. 시간이 뒷걸음치면서, 눈도 하늘로 소급되는 듯, 성겨진 눈발 새로 방금 왼쪽으로 스쳤던 공간 사옥과 횡단보도와 골목길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거예요. 택시기사가 담배를 한 대 피워도 되느냐고 묻더군요. 저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죠. 운이 좋은 편일 수도 있죠. 그렇게 따지면 동전 뒤집듯 달리 안 보이는 게 어디 있겠어요.

집은 썩어 가고 있을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올 때 보일러를 ‘외출’로 돌려 놓을 걸 그랬어요. 아니면 냄비 뚜껑이라도 닫아 둘걸. 마침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라면은 너구리예요. ‘너구리 찾는 사람은 너구리만 찾아요.’ 하는 광고는 정말 맞는 말이에요. 쫄깃쫄깃 오동통한 면발, 게다가 명함만 한 다시마 한 조각은 신라면도 좇아올 수 없는 어떤 격을 느끼게 하죠. 너구리는,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라 요리 같다고 할까요? 달걀이 가장 잘 어울리는 라면도 너구리일 거예요. 혹시 남은 라면 국물을 데워 먹어 본 적 있으세요? 물을 한 컵 정도 더 붓고 끓이다가 오줌버캐처럼 끓어오르는 윗물을 걷어내고 먹으면 기름기도 싹 가신 게 제법 얼큰해요. 물론 너구리가 안성맞춤이죠. 저는 그렇게 너구리 하나로 두 끼니를 때우곤 해요.

그래도 집은 참 아늑할 거예요. 너구리가 남은 냄비만 빼고, 젖은 수건과 싱크대에 담긴 그릇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완전히 물기가 빠져 있을 거예요. 건조하고 휑뎅그렁한 청결은 그렇게 갑작스레 며칠 동안 부재한 뒤 돌아가 집에게서 받는 겸연쩍은 인사 같은 거예요. 집도 기운이 있잖아요. 사람들도 집을 웅크리고 있는 짐승 같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정말 그래요. 괜스레 서먹해져 있다가 마치 큰 구름이 지나간 하얀 운동장처럼 슬그머니 마음이 풀려 화색이 돌아오는 집…… 콘센트, 가스 배관은 몸속의 무수한 세포와 혈관이나 다름없을 거예요. 집의 벽을 뜯었는데 부연 흙먼지만 일어난다면 어떻겠어요. 그렇잖아요, 장난감 로봇도 건전지를 끼우려고 등을 뜯었는데, 그 속에 껌껌한 구덩이뿐이라면. 게다가 그것들은 낱낱이 확인해 볼 수 있잖아요. 얼마나 근사해요. 그래서 사람보다 더 미더운가 봐요. 사람은 말 그대로 뜯어 볼 수 없잖아요. 확인은 곧 죽음이잖아요. 정작 그 정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인데, 그땐 이미 게임오버인 거잖아요. 그건 무의미한 거잖아요. 이건 정말 중요한 믿음의 문제예요.

저 이런 생각 자주 해요. 직업이 없다는 건, 생각이 넓고 깊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거잖아요. 그래서 일이 없는 사람은 늘 깊은 생각 때문에 이마에 주름이 가득하고, 늘 한 곳에 머물러 있는데도, 오랫동안 떠돈 사람보다 더한 객수나 노독 같은 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V를 처음 봤을 때, 저는 V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참 힘들겠구나, 하는 연민 같은 게 생겼어요. 물론 V도 한때 직업 같은 게 있었겠죠. 하지만 V는 늘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무료하고 어색한 일상에 포박돼 살다 보면 포르노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위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겠죠. 텅 빈 방에 들어가기가 겁나 뒷골목을 몇 번씩 어슬렁거리다가 욕지기와 어지럼증이 몰려와 허겁지겁 이불 속을 그리워하며 열쇠를 따는 일을 며칠씩 반복했겠죠. 그러다 사직서를 냈거나 무작정 출근을 하지 않았을 테고, 직장을 나가지 않은 이튿날부터 구직 사이트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을 테지요. 그러다 이내 나날에 익숙해졌을 테고, 어느 순간 정신은 우물처럼 깊어졌을 거예요.

왜 그 시간에 전화를 했는지 저도 모르죠. 아마 곡과 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어떤 내기를 했는지도 모르죠. 삼십 분 안에 오면 만 원, 진 사람이 술값도 내기, 하는 식으로……. 자존심, 그런 건 상관 안 해요. V와 곡은 나를 혀로 구슬리는 고양이처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오랫동안 틀어박혀 있다가 모처럼 걸어 줘야겠다,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운동하는 셈 쳐요. 그건 눈에 띄는 성과는 물론, 지각도 하지 않는 평범한 샐러리맨이 회식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V는 늘 그런 식이었죠. 새벽 두세 시에 불쑥 전화를 걸어서는 어디어디라며 당장 나오라고 전화를 끊어버리기 예사였어요. 그렇게 호기로울 때는 주머니가 넉넉하다는 얘기여서 저는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물론 곡이 있을 때는 곡의 주머니를 믿었겠죠. 대개 막차가 끊긴 지 한참 돼서 저는 반으로 자른 페트병에서 동전 한 움큼을 쥐고, 동전만큼 택시를 타고 가다 내려 V한테 뚜벅뚜벅 걸어가기 일쑤였죠. 물론 V가 제 방을 찾아올 때는 전화 따위 없었어요. 변덕 많은 날씨처럼 환하게, 우중충하게, 싸늘하게…… 들이닥치는 거죠. 물론 처음에는 늘 V와 약속한 것처럼 잔뜩 긴장해선 마치 남의 집에 누운 것처럼 함부로 옷을 늘어놓지도, 빨랫감이나 설거지거리도 미루지 못하고 며칠을 보냈죠. 하지만 언제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날씨에 대기한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겠어요. 저는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고, 바지런하지도 않아요. 허튼 약속에 집착하고, 상대방의 마음 씀씀이에 일일이 반응하는 사람은 얼마나 바지런한데요. 늘 애인이 끊이지 않는 사람 보면 대개 말라깽이에다 얼마나 바지런을 떠는지 몰라요. 저는 그러는 대신 맑은 날이 훨씬 많은데도 모든 집에서 우산을 챙겨 두는 것처럼 너구리와 햇반, 부탄가스, 소주 따위를 마련해 두는 걸로 만사 오케이였어요. 그게 V에 대한 저의 최선이었죠.

곡이라는 친구, 두세 번 보기는 했어요. 그 친구는 지구력의 이해, 보통 사람들, 여행하지 않을 계획 같은 소설을 쓴다고 했어요. 일테면 이런 글이에요. 아마 곡에게 그날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면,

 

2005년 12월 1일, 뢰는 고아가 되었다. 아직 한겨울에 들어서지 않은 터라 날마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경신했다. 뢰는 외출할 때 네어버에서 첫눈이 온다는 뉴스를 보았고,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마시고 삼십 분 넘게 도로 가에서 종종거리며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창덕궁 사거리에서 택시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한 바퀴 반을 돌아 중앙선을 침범하고 건너편 길가에 멈춰섰다. 택시기사는 겸연쩍게 웃었고, 뢰도 덤덤하게 짝짝이가 된 풍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뢰는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날 새벽을 계속 떠올렸다. 뢰는 다섯 번째 근친의 장례를 치른다고 했다. 열다섯, 열아홉, 스물, 스물다섯, 서른하나, 사춘기를 치르고 마치 새로운 연애를 했다고 할 만한 나이에 뢰는 근친의 장례를 치렀다. 연애를 새로 시작했다면, 한 연애가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뢰는 홀가분하다고 했다. 익숙한 방향이 송두리째 바뀌는, 기분 좋은 일탈…… 뢰는 요리를 시작했다. 뢰는 오랫동안 조미료를 모았다. 미원과 다시다, 조미료의 대명사는 모든 음식을 엇비슷한 맛으로 두루뭉술하게 하고, 조금 과하면 혀끝에 아린 맛이 감기는 게 거슬려 그는 천연조미료 쪽으로 취향을 바꿨다. 하지만 뢰는 냄비에 물을 붓다가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제 음식을 사먹을 거야. 그리고 뢰는 타자기 앞에 앉았다.


- 지구력의 이해 -



뢰가 처음 쓴 소설의 제목이다. 뢰는 잠든 새어머니가 깰세라 새어머니가 벗어 놓은 브래지어를 눌러 보듯 두 검지로 건반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이것은 딱 한 모금에 관한 이야기다. 어제 죽은 할아버지는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것을 두고두고 자랑했다. 뢰는 대학 시절, 할아버지에게 처음 대든 일을 기억했다. 전쟁의 참상을 견디지 못해 탈영해서 북한을 택하거나, 유럽으로 간 군인들도 많았어요. 미 항공모함 인트레피드 호에서 탈영한 병사들도 있고요. 할아버지는 입 다물고 반성이나 하세요…….


 

하는 식으로 술을 마시는 내내 떠드는 사람이었어요. 곡은 한 번도 글을 써보지 않았을 게 분명해요. 그 얇고 뾰족한 혀가 펜이었겠지요. 사실 그건 V와 둘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공통점일 거예요. 둘은 많이 닮았어요. 사실 어느 날 V가 한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게 V가 한 이야기인지, 곡이 한 이야기인지 헷갈리기까지 했으니까요. 둘은 목소리도 비슷했고, 한 시간에 쏟아내는 말의 양도 비슷했어요. 어찌나 쏟아내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죠. 둘의 혀의 성실함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해요.

저는 가끔 집에 돌아와 다이어리에 그날 V가 한 말을 적어 보기도 했어요. 정치인이 당정에 따르는 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무조건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내 머릿속에는 98퍼센트가 성기로 들어차 있다, 여성이 데이트 비용에 소극적인 한 남녀평등은 이뤄지지 않는다, 식초를 하루 소주잔 한 잔 정도 마시면 위궤양이 낫는다, 중국보다는 인도에 눈을 돌려야 한다……. 시내버스 버저 옆에 붙은 “부자를 울리면 문이 열립니다.” 같은 문구처럼 명제도, 정의도, 비유도 아닌 그저 말, 누수처럼 잘금잘금 입속에서 새는 소용없는 말, 얇게 베어낸 껍데기로만 돌돌 만 구(球) 같은 말, 공허도 남지 않을 말…… 혼자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한때 가계부를 쓰고, 다이어린 빈칸에 그날 산 책, 본 영화, 누구와의 만남 따위를 기록하고는 하잖아요. 혼자 사는 사람은 나처럼 기록이 아니면 V처럼 말로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증명하죠. 그건 아마 고독의 알리바이일 거예요. 그 기록이나 말은 모두 고독의 자기마당 주위에서 쇳가루처럼 팽팽하게 떠돌던 것들이었어요. 저는 지금 고독의 알리바이를 말하는 거예요. 그날 V가 어떤 이야기를 했다는 게 아니라, V의 고독 말이에요. 나는 V의 말길이 흘러 들어간 삼각주의 스산한 공기를 짐작할 수 있어요. 물론 증거 따위는 있을 수 없죠.

그래도 생각해 보면……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골목 막바지의 철문에 부딪혀 따끔거리던 모래알 같은 것 말인가요? 축 늘어진 배를 쓸며 천천히 기어가던 개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접혀진 벽 모서리의 장판에서 고물고물 기어나오던 그리마 같은 것, 전봇대 밑에서 주운 녹슨 동전 같은 것 말인가요? 그래요, 어쩌면 모두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 비롯한 일이었는지도 몰라요. 결국 그것들이 일깨운 고독이 동기였을 테지요.

V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물론 다이어리에 어떤 메모가 남겨져 있을 거예요. 아마 V의 흔적은 유통기한처럼 느닷없고, 일방적일 거예요. 결국 선택은 제가 한 것이지만, V와 나의 내용은 그 속의 정체성이나 상태와는 상관없이 시작과 함께 유효기간이 정해졌을 거예요. ……물론 그 유통기한이 그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요. 그렇게 느닷없는 게 유통기한일 수는 없죠. 유통기한이 오늘내일인 통조림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사실 V 소식을 처음 듣고는 황망하면서도 아뜩해 줄곧 담배만 물고 있었어요. 아직 유통기한이 몇 년 남은 참치 캔을 땄는데, 나이테처럼 얌전하게 말린 붉은 살코기의 동심원 새에서 고물거리는 구더기를 본 것처럼 말예요. 모처럼 담배가 제대로 감겼어요. 온종일 담배를 연달아 피우고 싶도록, 속이 헛헛하고 팔다리는 어깻죽지와 샅에 옷핀으로 걸린 것처럼 맥없이 떠들렸어요. 초능력자가 되고 싶지 않은 초능력자의 아이가 이를 사리물고 자꾸 공중부양하려는 몸을 붙들어 매는 것처럼, 무릎을 두 팔로 감싸안았어요. 그래도 오한이 들려 보일러를 높게 올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계속 담배를 피웠어요. 마치 굴뚝이 되고 싶은 것처럼.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을 거예요. 잠이 깼을 때도 오한이 가시지 않아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 너구리를 끓였던 거예요.

V 소식을 어떻게 먼저 알고 있었냐고요? 곡이 전화를 했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 연락을 받지 않았어도 저는 V의 소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럴 리 없다고요? V와의 관계를 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라고요? V와 제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누구도 저를 알지 못한다고요? 당연히 그럴 거예요. 저는 늘 V와 혼자서 만났어요. V는 누군가와 섞여, 저를 만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V는 철저하게 저와 내밀해지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런 면에서 V는 다른 남자애들하고는 달랐죠. 남자애들은 대개 자기가 만족스럽지 않은 여자와 사귄다고 생각하고, 조금 수치심을 느끼잖아요. 둘이서 마주할 때는 냉랭하다가, 곧잘 과시처럼 여럿이 어울리기를 좋아하죠. 그럴 때는 정작 여자애는 구색으로 내팽개쳐 두고, 쟤네들끼리 실컷 놀다가 실컷 취해서는 사창가를 뒤지듯 여자를 탐하잖아요.

정말 V는 남다른 사람이었죠. V는 나를 철저하게 감추었고, 저 혼자 몰래몰래 꺼내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저는 V의 그림자처럼, 아니 비밀의 화원처럼, 아니 어쩌면 V의 성기처럼 존재했어요. 누구나 짐작하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던 거죠. 정말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아무에게도 드러내놓고 확인시키지 않지만 V의 연애의 정체성은 바로 나였을 거예요. V는 저와 한 번으로 끝내는 일이 없었어요. V는 늘 허겁지겁 벨트를 풀면서 오늘은 열 번 하자, 그렇게 속살거렸어요. V를 알고 난 뒤부터 저는 밥과 문장에 조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렇게 중요하던 두 가지가 V 앞에서 부질없게 느껴졌으니까요. 그래요, 그렇게 조의를 표했기 때문에 V가 제 문장을 버젓이 제 사상인 양 떠들어대는 걸 보고도…… 그나저나 언제쯤 V를 볼 수 있는 거죠? 무슨 이야기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V와 저 사이에는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랄 만큼 내밀한 사연들이 있었단 말이에요.

V와 저는 거울 앞에서 벌거벗은 채 앉아 “거울과 섹스는 사람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에요. 국수를 삶거나, 사과를 베어 먹으면서 서로의 겨드랑이에 코를 박고 너즈러지게 오후를 보내는 낭만 따위가 얼마나 허약하고 부질없는 관계의 제스처인지 이미 간파한 사람들인 거죠. 그래도 그게 연애의 가장 자연스러운 제스처라고요? 우린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요. 그런 걸 기대하거나 실천하기에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육체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저는 제가 욕심낼 수 없는 건, 욕심 내지 않아요. 그건 숱한 여자애들이나 V에게 바라는 거예요. 저는 V에게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유치한 짓거리 따위는 기대하지 않아요. 그게 저의 변별력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먼 잣대를 내밀어 V와 제 관계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속아넘어간 거죠.

혹시 그런 사연을 기대하는 건 아니시죠? V가 제 지갑처럼 제 몸도 모자라 주머니를 털어 가고…… 하는. 물론 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에요. 저는 직업도 통장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V와 저는 ‘완전히’ 서로의 존재에만 이끌린 셈이에요. 아무 조건도 없이. 물론 V가 제 물건을 묻지도 않고 가져간 적은 몇 번 있어요. 자루우산처럼 말이죠. 하지만 가끔은 제 물건을 얼결에 흘리고 가는 적도 있죠. 몇 닢의 동전이나…… 파란 모자처럼 말예요. 물론…… V는 빤히 제가 한 말을 자기 상상인 양 털어놓는 버릇이 있기는 했어요. 물론 그건 자루우산 따위에는 비할 수 없는, 더 엄청난 범죄일 수 있죠. 그건 영혼을 도둑질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아무렴 어때요. 아까 한 말대로라면 오히려 곡이 더 그런 것 같다고요? 그럴 수 있죠. V와 곡은 속이 훤히 보이는 시샘을 정당화하려고 어떤 구실이든 갖다붙이려고 그렇게 수다스러웠던 거죠. 대개 수다스러운 사람은 사실 정직하지 않잖아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말들의 대부분이 표절이거나 거짓말이죠. 사실 살면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문장이라는 게 한두 줄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나는 비겁하다. 나는 욕심쟁이다. 나는 못됐다. 나는 못생겼다. 나는 거지 근성이 있다. 나는……그런데 하루에도 좋이 한두 시간은 넘게 떠들어대는 사람이 그 내용을 채우려면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는 오히려 V와 곡 같은 사람이 안쓰러워요. 저는 제 자신의 명제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영혼을 도둑질하는 것 따위는 상관하지 않아요. 뚜껑이 열린 판도라 상자는 시끄러운 혼돈뿐이잖아요. 희망마저 떨어내 버린 빈 상자만 그러안고 있는 둘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어떤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다고요. 제가 이때까지 한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은 게 분명해요. 그래요, 더 솔직해지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V와 제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단정지어 버리겠죠……. 한번은 V가 물구나무를 서서 펠라치오를 해달라고 했어요. 벽에 거꾸로 버티고 선 V는, 이마에 핏줄이 서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마치 바위를 끊임없이 들어올려야 하는 숙명에 빠진 시시포스 같았어요. 시시포스도 거세를 안 한 이상 섹스는 했을 거 아니에요. 바위를 들어올린 채 말이죠. 그래요. V가 마냥 좋았던 건 아니에요. 사실 저는 그렇게까지 만신창이는 아니에요. ……V는 화장실이 붙어 있는데도, 싱크대에 오줌을 누고, 양치질을 하고,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어요. 한번은 V의 집인지, 곡의 집인지 모를 어느 방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람 앉은자리마다 흩인 머리카락을 훔치고 까탈을 부리던 그를 생각하면 아나꼬아 미칠 지경이었죠. 한번은 V가 그런 말까지 했던 적이 있어요. 방 한가운데 신문지를 깔아 놓고 똥을 눠본 적이 있냐고요. V는 정말 바지를 끄집어 내리고 똥을 눌 태세였어요. 제가 V의 성기를 움켜쥐지 않았다면 우리는 누런 변이 칠갑된 이불 위에서 배내 강아지처럼 며칠을 뒹굴었을지도 모르지요. 몸에 욕창이 생기고, 우리는 지금 제 방처럼 썩어 갔을지도 몰라요. V의 눈과 제 콧구멍으로 너구리 면발 같은 구더기가 고물거렸겠지요. 그런 V와 저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확인시켰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차지하지 못해 비겁하게 의심으로 둔갑시킨 속마음을 솔직히 인정했을까요.

그날 밤 이야기를 해보라고요? 좋아요. 고독의 알리바이 따위는 믿지 않아도 좋아요. 살을 다 발라먹고 덩그러니 남은 뼈를 보고 고등어를 추측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죠 뭐.

한번 맴을 돈 택시는 북극곰처럼 아주 천천히 달렸어요. 왠지 미터기의 요금은 점점 올라가는데도 주머니의 동전을 헤아려 볼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설령 모자랐다고 해도 너무 추워 내릴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택시기사가 요금이 모자란다고 지랄을 하면 택시가 뱅글뱅글 맴돌았던 사실만 들먹이면 되겠지, 하는 눈치어린 배짱을 집어 먹었어요. 다행히 동전은 모자라지 않았고, 택시기사도 동전을 헤아릴 생각을 하지 않더라고요. 물론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딱딱해진 뒤통수만 쳐다봐도 그 사람이 ‘재수 옴 붙었다’고 가래를 돋우고 있다는 게 빤히 느껴졌지만요.

둘은 완전히 필름이 끊어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몇 잔만 더 돌면 간질 환자처럼 쓰러질 듯 눈이 반 넘게 풀려 있었어요. 곡은 늦은 벌로 폭탄주를 세 잔 마시라고 했어요. 맥주 컵에 양주잔을 넣어 위스키를 부운 다음, 빈 공간에 맥주를 딱 양주잔 높이만큼 채우고, 레드와인을 부으면 붉은 기둥이 생겨요. 그걸 ‘드라큘라 주’라고 해요. 저는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앞에 술을 두고 마다하지도 않아요. 저는 간단하게 곡이 건넨 벌주를 원샷 했죠. 처음엔 한 모금 마시다가 캑캑거리는 시늉이라도 할까, 하다가 V 앞에서는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죠. 더욱이 그렇게 취한 V 앞에서 그런 연출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제가 드라큘라 주를 비우자마자 곡은 수혈하듯 폭탄주를 제조했어요. 그러면서 네 덕택에 V와 화해할 수 있었다고 웃더라고요. 뱀이 든 자루 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부르르 진저리가 쳐지는 웃음이었어요. 곡이 무슨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 거냐고요? V의 옆에서 곡은 제 존재를 흐리마리하게 지우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왕따 소년처럼 그림자 같은 곡의 침묵 뒤에는 적의와 질투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지요. 아무 주장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 뚜렷한 메시지가 있는. 곡요? 정말 두세 번밖에 본 적이 없다니까요. 하지만 한 번 보고도 딱 느껴지는 그런 게 있잖아요.

어느 날, 곡이 V 일로 할 말이 있다며 전화를 걸어 온 적은 있어요. 그때 전 호되게 감기를 앓고 있었어요. 곡은 V가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제게 짜증을 부렸어요. V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젖은 도배지처럼 수화기에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어요. 너 정말 징그럽게 군다. 곡이 도무지 전화를 끊을 기미가 안 보여 저는 귓구멍에 틀어박힌 축축한 종이를 끄집어내듯 심호흡을 하고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어요. 곡의 물컹한 존재감이 어릴 때 기억을 들쑤신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어요. 하필 옛날 생각이 났는지 몰라요. 아파서 그랬을 거예요. 그렇다고 너무 거창한 이야기를 기대하시지는 마세요. 그저, 제가 정말 싫어하는 물컹한 느낌의 원형을 뚜렷하게 떠올린 것뿐이니까요. 아버지는 저를 꼭 이발소에 보내 머리를 깎였거든요. 널빤지에 앉아 앞사람의 잔 머리카락이 묻은 까끌까끌한 보자기를 두르면 제가 정말 싫어하는 끔찍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누런 비누거품이 부걱거리는 남양분유 통에서 솔을 꺼내 왼쪽 귓바퀴에서 오른쪽 귓바퀴까지 목덜미를 따라 원을 그리는 거죠. 마치 이발사가 혀로 제 얼굴을 핥는 것처럼 물컹한 느낌에 저는 진저리를 쳤어요. 제가 진저리를 치면 이발사는 제 어깨를 탁, 치며 엄숙하게 이야기했어요. 주님의 자식은 참을성이 있어야 해. 저는 거울을 지릅떠봤어요. 평소보다 길쯤해진 사람들이 줄줄이 장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이발소는 몇 달 전부터 만원이었어요. 개척교회에 열심인 이발사는 동네 사람들이 주말마다 집이 집을 이고 있는 것 같은 동네 어귀 슬래브 집에 나오는 대가로 공짜 이발을 해주었거든요. 언제부터인가 더벅머리에 선인장처럼 잔가시 같은 수염을 달고 있던 어른들은 죄 명절을 앞둔 사람처럼 귀밑이 푸르스름하고, 책갈피처럼 갈라진 가르마는 번들거렸어요.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뒤통수는 떡지고, 무전취식하다 소금 세례를 맞으며 쫓겨난 사람처럼 가르마에 굵은 비듬을 달고 석유 냄새를 풍겼지요. 목사는 젊고 점잖은 사람이었고, 교회 분위기에 압도당한 사람들은 얌전한 양 같았어요. 목사는 성경 구절을 아주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었어요. 목사의 재미난 설교를 듣고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주르륵 코피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떠보니 곡이 제 옆에 택배상자처럼 누워 있었어요. 곡이 어떻게 제 방을 알았는지는 저도 몰라요. 언제인가 V가 지나가듯 제 사는 동네 이야기를 했던 걸 기억해 내고는 무작정 찾아와 반지하방의 문이란 문은 죄 열어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죠. 아까도 말했지만 변덕스러운 날씨 같은 V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저는 문을 잠그지는 않아요. 샤워를 하고 나서도 벌거벗은 채 방 한가운데 드러누워 담배를 태우기도 해요. 반지하방이라 누가 일부러 쪼그려 앉지 않으면 안을 들여다볼 수 없거든요. 쇠창살 사이로 가끔 사람들의 종아리가 지나가는 게 다예요.

제가 곡의 어깨를 흔들었는데도 곡은 눈을 뜨지 않았어요. 억지로 울고 있는 사람처럼 질끈 감은 눈초리에 주름이 패어 있었어요. 정말 잠들었는지도 모르죠. 주먹을 꾹 쥐고 마치 싸움을 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잠자는 사람 있잖아요. 제 머리맡에 놓인 약봉지를 훔쳐 먹었는지도 모르죠. 어쩐지 곡은 늘 제 거라면 무조건 샘낸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저는 곡을 V가 흘려 놓고 간 파란 야구모자쯤으로만 생각하고 겨우 일어나 냄비에 물을 올리고, 그랬어요. 온몸이 결리고 어지러웠지만 뭔가를 먹어야 약을 먹고 제대로 땀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조각상에 냄비를 올리고, 면발을 호르르 감아 먹으려고 할 때, 곡이 부스스 일어나 제 앞에 앉아 젓가락을 빼앗았어요. 저는 어이가 없어 곡을 노려봤지요. 곡은 갑자기 냄비에 침을 퉤, 뱉고는 라면이 목구멍에 들어가니, 하고 말했어요. V가 며칠째 소식이 없단 말이야.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겨우 며칠? 나는 곡을 같잖게 쳐다보며 억지로 냄비에 젓가락을 밀어넣었어요. 내 서슬에 놀랐는지 곡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고요. 막상 라면을 먹으려고 하니 입맛이 싹 달아났어요. 오기로 바닥까지 핥고 싶었지만 라면가닥은 목구멍으로 겨우 넘기는 그만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어요. V를 기다리는 일 말고는 그렇게 할 일이 없니. 저는 정말 곡이 짜증스러워 그렇게 역정을 냈어요. 몸이 쇠약하면 마음도 약해진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향한 마음일 때만 해당되는 것 같아요. 아프면 타인에 대해서는 정말 모진 적의밖에 생기지 않아요. 아무 힘도 없는 갓난아이의 붉은 뺨이 나는 건강하다는, 살아남으려는 의지에서 생긴 유전인 것처럼. 곡의 눈빛이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크게 흔들렸어요. 밥상을 뒤엎을 배짱은 없는 인간이군, 하는 생각을 하며 저는 밥상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는 약봉지를 뜯어 입에 털어넣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어요. 가늘게 코 고는 소리라도 낼까 하다가 너무 치사해지는 것 같아 가만히 눈을 감았어요. 빈속에 털어넣은 약기운 때문인지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등이 축축하고 뭔가 훌쩍거리는 소리에 놀라 화들짝 잠이 깼어요. 어느새 곡이 소주 냄새를 풍기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제 등짝에 얼굴을 묻고 있었어요. 어떻게 찾았는지 V가 흘리고 간 파란 야구모자를 눌러쓴 채 말이에요. 왜 V는 연락을 하지 않는 거지. 왜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거지. 그러면서 왜 그렇게 허튼 약속은 남발하는 거야. 물음표처럼 몸을 말고 얼굴이 시뻘게진 곡의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러웠어요. 아픈 저를 위해 위문공연을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 저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는지 곡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얼마간 관객의 반응에 안도하는 눈치였어요. 그러더니, 그거 아니? V가 얼마나 많은 약속을 했는지. 며칠 전만 해도 그래. 실내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데 텔레비전에서 강원도 원주 이야기가 나오더라. V가 뭐랬는지 알아?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날더러 원주 가봤느냐고 묻더니,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진고개 넘어가는 길에 송천식당이라는 데가 있대. 산나물이 정말 죽여. 언제 한번 같이 가자, 이야기를 했다고 했어요. 스타가 되고 싶은 철부지 소년이 얼떨결에 주연을 맡은 부조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웃을 수도,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몰두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장면이 거듭됐어요. 곡의 취기의 진위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저는 할 수 없이 곡의 어깻죽지에 손을 얹고 몇 차례 두드려 주었어요. 가면을 쓴 갈채라도 있어야 이 웃기지도 않은 공연이 끝날 것 같았으니까요. 물론 덕담도 잊지 않았어요. 정말 V가 약속을 한 거라고 생각하니, 그 인간은 애초에 약속 따위 할 의지가 없는 사람이야. 저는 V가 곡 너한테만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아니라고 위로를 했어요. 그건 약속이 아니라 거래 같은 거야. 네가 술값을 내주는 것에 대한. 설령 진고개를 갔더라도 V는 송천식당이라는 정보를 먼저 내놓았으니, 네가 밥값 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할걸. 제가 동전 한 움큼을 쥐고 걸음조차 계산하야 하는 처지라고 곡을 질투해 그런 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나요. 물론 속으로는 약속 따위는 없이, 완전히 서로의 존재에만 이끌려 아무 조건도 없이 지속되는 V와 나의 관계를 폭로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어요. 하지만 V의 허튼 약속 때문에 눈물이 범벅된 곡에게 비수를 꽂을 만큼 저는 몰인정하지 않아요. 특히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친 손가락의 느낌만 가지고도 자랑을 일삼을 게 빤한 곡 같은 인간 앞에서는 더더욱. 저는 영혼의 문장까지 훔쳐가도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 사람이잖아요. 어느새 역전된 상황이 우스웠지만, 저는 곡이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 주는 걸로 이제 그만 이 웃기지도 않은 공연의 막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집으로 돌아가면서 고무장갑을 잘근잘근 씹은 것처럼 탑탑한 혀로 내가 한 이야기를 완전히 제 것인 양 떠들어댈 게 빤한 곡을 위해, 저는 불면증에 지친 셰에라자드처럼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래 전 들었던 약속에 관한 우화를 들려 주었어요.

 

사자는 농부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사자는 밭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다가가 딸을 주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버지에게 사자의 말을 들은 딸은 수굿이 바느질을 하며 말했다. “수염을 모두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사자는 수염을 모조리 뽑고 농부에게 약속을 지켰으니 딸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딸은 아버지에게 사자를 찾아가 “발톱을 모두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하고 전하라고 했다. 농부가 말을 전하자 사자는 다시 열 발가락의 발톱을 모조리 뽑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딸은 덤덤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사자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했다.



-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


결국 모든 약속을 지키고 하룻강아지로 전락한 사자는 농부에게 돌로 맞아죽었다. 허튼 약속 앞에 사자의 진정과 정체성은 모두 깨어져버렸고, 사람들은 그것을 지혜로 기억했다. 아름다운 약속은 사자에게 목숨을 담보로 한 냉혹한 희망일 뿐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곡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대답이 나왔어요. 곡이 한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너무 상식적인 말이었죠. 그래도 약속은 믿음이야. 설령 그 사람이 거짓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해도,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 그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될 수 있어. 너무 어이없는 대답에 저는 헛웃음만 뱉어내다가 정색을 하고 다시 곡에게 물었어요. 너는 정말 V를 믿니. 곡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했어요. 곡은 V를 위해서라면 생니를 뽑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건 곡의 진심이 아니었어요. 아니 진심일 수는 있죠. 하지만 순수하게 곡이 생각해 낸 충동은 아니란 거죠. 곡은 제 진심마저 어떤 이야기를 시늉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 놓고 곡은 그날 제 덕택에 V와 화해할 수 있었다고 자루 속에 든 뱀처럼 웃었던 거예요. 아마 그날 곡은 제가 오기 전에 V에게 이 이야기를 똑같이 들려 주면서 약속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라고, 한껏 쿨하게 굴었을 게 빤해요. V가 다시 파란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던 걸 보면 더 확신이 가요. 아마 곡이 그 모자를 보증금 같은 걸로 V에게 건네주었을 거예요. 그러고도 아마 증인이 필요했을지 모르죠. 술집을 나설 때는 얼추 새벽 다섯 시가 넘었을 거예요. 물론 곡이 비틀거리면서 계산을 치렀고, 저는 완전히 걸음이 뒤엉킨 V를 겨우 부축해 거리로 나섰어요. 채 몇 발짝도 걷지 않았는데 얼음사막에서 좌표를 잃은 것처럼 막막해졌어요. 고작 하룻밤 사이인데, 이제까지 한겨울에만 갇혀 살았던 것처럼 지긋지긋하게 추웠어요.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거리는 텅 비어 있고 그나마 길을 지나는 택시는 영업 등을 끈 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지요. 결국 저는 V를 은행나무 둥치에 기대어 놓고 곡에게 가까운 곳에 들어가 몸을 녹이자며 주위를 둘러봤어요. 맞아요. 그 술집의 옆 골목에 있는 디브이디방.

그래도 곡은 아직 의식은 있는지 어느새 은행나무 그림자처럼 빙판길에 널브러진 V를 추슬러 세우고는 먼저 디브이디방으로 들어가겠다며,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제게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고는 편의점에서 술을 몇 병 더 사오라고 했어요. 평소 같으면 성큼성큼 걸어가면 금세 닿을 편의점도 파랑에 떠도는 부표처럼 잡힐 듯 잡힐 듯 멀었어요. 고작 첫눈이 쏟아진 날 벌써 겨울이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어요. 얼음조각에 얼굴이 벤 것처럼 화가 치밀었어요. 그래도 편의점에 들어가 언 몸이 풀어지니까 누가 귓바퀴며 손등을 간질이는 것처럼 날섰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어요. 소주 한 병과 캔맥주 세 개, 포장오징어 하나를 사서 디브이디방에 들어갔지만 둘이 어느 내실에 자리를 잡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들어올 때, 출입을 알리는 센서가 울리지 않았던 걸 보면 카운터에 엎드려 혼곤히 잠든 노랑머리 종업원이 일부러 꺼놓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어 깨워 물어보기도 뭣했어요. 하지만 미로처럼 얽히고 어둠침침한 좁은 복도에 몇 발짝 들어서지 않아 딱 한 군데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볼 수 있었어요.

둘은 어느새 널따란 소파 위에서 스크린에서 흘러나온 조명을 덮고 널브러져 있었어요. 어두운 방에 갇혀 불그스름한 빛 속에 잠든 두 짐승은 어쩐지 그러구러 참 따뜻해 보였어요. 마치 두 팔 벌린 너비 정도 되는 자루우산을 쓴 것처럼, 불빛은 지금 이 지상에서 둘의 몸 위에만 드리워진 것 같았죠. 저는 소파 구석에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잠바를 무릎에 덮고 멀거니 스크린을 쳐다봤어요. 그것은 제가 극장에서 이미 본 영화였어요. 연쇄살인마가 아무 영문도 모르는 두 사람을 감옥 같은 방에 가둬 족쇄를 채워 놓고는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풀지 못하면 가족까지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불쾌하고 끔찍한 이야기였지요. 저는 벌써 결론을 알고 있는데, 여전히 연쇄살인마의 약속 하나만 철썩같이 믿고 전전긍긍하는 두 주인공이 오히려 너무 멍청해 보여 얄미울 지경이었어요. 저는 까만 봉지를 더듬어 소주를 꺼내 병째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어요. 딱딱한 오징어를 잘게 찢어 소파 아래 놓인 히터의 쇠살 사이로 그슬린 다음 질겅질겅 씹어대며 혼잣말로 싸늘하게 뇌까렸어요. 그렇게 치사하게 목숨을 구걸해도 너희는 이미 죽게 되어 있어. 마치 주인공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때 V가 무릎을 덮은 잠바가 벗어지면서 동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소주병을 그러쥔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어요. 바닥에는 동전 말고도 V의 퓨마 운동화와 목을 접은 양말과 가죽 벨트와 한쪽 다리가 뒤집어진 청바지…… 그리고 파란 야구모자가 흩어져 있었어요. 저는 쪼그린 다리를 고쳐 아예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V의 옷가지를 얌전하게 개켰어요. 붉은 히터 앞에 앉아 사내의 옷을 개키고 있는 제 모습도 그러구러 참 따뜻해 보였을 거예요. 소파에 널브러져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잠에 빠진 것 같은 둘을 잠시 부럽게 힐끗거리기는 했지만, 저는 두 사람의 따뜻한 잠을 존중해 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사람이에요. 저는 마지막 술을 들이켜고 파란 모자를 눌러쓴 다음 천천히 일어났어요. 찰나 어지럼증이 일면서 뭔가 흔들리며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마 V와 곡이 따뜻한 자루우산 속에서 뒤채는 소리일 거라고 짐작했어요. 제가 마지막으로 V와 곡을 돌아봤을 때 둘의 따뜻한 잠 위에 드리워진 불빛은 무슨 축복인 것처럼 더욱 활활 타올랐어요. 정말 둘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해 보였어요.

왜 처음부터 V가 두고 간 파란 모자가 V에게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요? 제가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고요? V는 저란 사람을 알지도 못할 거라고요? 아니에요. 그깟 파란 모자는 이때까지 V와 곡이 훔쳤던 제 영혼에 비하면 그나마 유일한 전리품에 지나지 않아요. 파란 모자는 그저 순례를 마치고 있어야 할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에요. 설마 제가 그마저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까짓 파란 모자 하나로 저 역시 V에게 어떤 부질없는 약속이나 희망 따위를 품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곡처럼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요. 약속이라는 건, 희망이라는 건…… 늘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 거짓말인 거잖아요. 설령 언젠가 이뤄져도 결국 지금과는 같은 얼굴일 수 없기 때문에 늘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는 걸, 왜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아마 V는 제 이런 생각을 분명히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완벽한 관계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고요.

 

《문장웹진 8월호》

 

 

 

창작 노트
 
 
 
오랜 장마와 짧은 폭염 뒤에 소나기가 온다.
모기는 왜 늘 한 마리일까.
계절이 심심하다.
 
즐겨찾기를 지운다.
대한성서공회. 국립국어원. 한겨레. 씨티은행. 알라딘. 구글아트. 내셔널지오그래픽.
비밀이 없는 애인은 사귀지도 않고, 헤어지지도 않았다.
당신은 내가 찾지 못할 것처럼 당신만의 밀어 속으로 숨고는 했지.
 
한여름에 어느 한겨울의 새벽을 쓰고 고쳤다.
내가 여름 내 골몰하던 소설은 이것이 아니다. 그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실패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지 않나, 하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죠. 그렇게 실패한 것들이 진짜이고, 나는 실패의 부스러기를 몽쳐 겨우 체를 시늉했다고. 그러니까 실패했으나,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그거면 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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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의 방식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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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01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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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1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

  • 관리자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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