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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댄스

  • 작성일 2007-09-28

 

댄스댄스



정한아




아버지는 스위스에 있는 신부 학교 얘기를 자주 했다. 호숫가에 서 있는 고성(古城)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세계 부호의 딸들 이야기. 아침을 시작하는 섬세한 크로아 상 한 조각과 꿀을 타서 마시는 커피, 벨벳으로 만든 자주색 승마복, 날렵한 가죽 부츠, 밤색 애마가 좋아하는 각설탕과 고전문학을 주제로 하는 티타임, 삼중주의 실내악, 장밋빛 실크 가운, 열린 창문을 통해 보이는 별들…….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모든 것을 약속했다. 나에게 가장 친절한 어른은 언제나 아버지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전부 믿었다. 아버지는 내게 모든 걸 다 잃어도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만이 나의 유산이다. 아버지는 그 말을 하길 좋아했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들에 홀딱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모두 그런 식으로만 돌아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 학교란 곳에서 옆자리에 앉은 애가 아빠한테 맞은 곳이라고 시퍼런 멍 자국을 보여 줬을 땐 무척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애에게 집을 나오라고 말했다.

 “그것만이 품위를 지키는 길이야.” 

짝꿍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짐 싸는 것을 도와주려고 그애네 집에 같이 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짝꿍의 집은 그때까지 내 생애에서 호숫가의 고성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에는 분홍색 리본을 단 애마는 없었지만 커다란 귀를 가진 리트리버 종의 강아지와 나무에 매달린 그네, 이층의 발코니에서 펄럭거리는 크림색 커튼이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그애네 엄마가 앙증맞은 꽃무늬 접시에 담아 주는 스펀지케이크를 먹었다.

“슈퍼마리오 할래?”

짝꿍은 가방 한가득 게임기를 집어 넣다 말고 물었다.

“슈퍼, 뭐?”

볼이 미어지게 케이크를 삼키던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좀 울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병아리 색 멜로디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 생애 최초의 도둑질은 내게 한 가지를 분명히 알려주었다. 내가 지켜야 할 건 품위가 아니라 자존심이라는 것.


아버지는 장애 때문에 한 쪽 다리를 절었다. 대신 키가 컸고 아주 멋진 목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게는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가 동생을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장미와 백합을 섞은 굉장한 꽃다발을 선물했다. 장미색이 너무 붉어서 나는 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동생은 예상일보다 석 달이나 앞서 세상의 문을 두드렸다. 의사는 수술실에서 나와 아버지를 부르더니 산모와 아기 중에 선택을 하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겁니다, 라고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의사는 과감한 처신을 하지 못하고 탈진한 엄마 앞에서 너무 오래 망설였다. 동생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아기였다. 2kg도 안 되었던 그애는 괴로운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의식을 잃고 꽤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병원 생활은 육개월이 넘게 계속됐다. 아버지가 돈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나는 한 끼도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희멀겋게 부어오르는 내 얼굴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

“잠깐 동안이야. 캠프에 간다고 생각해라.”

나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달리 보낼 곳이 없었던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했기 때문에 누구도 원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가 얘기했던 무도회와 진주, 나이트 드레스는 점점 더 희미하게 멀어져 갔다. 산타클로스가 멀어지듯이, 비슷한 상실감이었다.

고아원에서 일 년을 지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동생에게 젖을 먹이느라 나를 안아 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괜히 큰소리로 웃으면서 나를 숨도 못 쉬도록 세게 끌어안았다.

“우리 공주님이 오니까 집이 다시 환해지네!”

엄마가 낯설어 보인 건 동생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마의 얼굴은 자잘한 회색 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특수 분장을 한 배우처럼 살이 쪘다. 마치 몸집이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엄마는 웃어도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두 달 전에 해고당했다는 걸 나는 그날 저녁에 알게 됐다. 

“지금 데려오지 않으면 영영 데려오지 못할 것 같아서.”

아버지는 내 짐이 든 가방을 내려 놓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잠든 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딸꾹질을 참았다. 그 날 밤 엄마는 누워 있는 내 옆에 와서 양말을 벗기고 한참동안 내 발을 만졌다.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싶었지만 엄마를 위해서 잠든 척을 했다.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내 성적은 시원치가 않았고 동생은 뜻밖에도 수재였다. 엄마는 살이 빠지지 않았지만 별로 괘념치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아파트의 경비직과 택시 운전, 구두 수선 같은 일들이 차선책으로 떠올랐지만 아버지는 그런 일들을 하기에는 너무, 섬세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전화 판매로 일선에 나서자 우리는 그럭저럭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이건 너무 절망적인 게 아닌가 싶을 때마다 동생이 전교 일등을 했다. 우리는 꿈꾸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살아갔다.


매일 아침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시디를 틀었다. 초라하고 복잡한 살림으로 가득 찬 열두 평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미뉴에트는 늘 조금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아버지는 가벼운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면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베란다의 창문을 힘껏 열어 젖혔다. 열린 창 앞에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쉬는 것은 아버지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일어나요, 일어나.”

아버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의 잠을 깨웠다. ‘강요는 아니야.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겠지. 하지만 햇살이 이렇게 따뜻하게 비치는 걸’ 같은 식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배우의 저음처럼 멋진 데가 있어서 그건 또 하나의 자장가로 오히려 잠을 부르고는 했다. 그래서 더욱 이불로 파고 들면 아버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동생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 있곤 했으므로 언제나 늑장을 부리는 사람은 엄마와 나였다.

“정말 안 일어날 거야?”

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끌어당겨 앉히고는 가볍게 간지럼을 태웠다. 엄마는 밤새 드잡이를 한 사람처럼 헝클어진 머리로 비몽사몽간에 아버지를 쳐다봤다. 나는 잠에서 번쩍 깰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모습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괴로운 부분이 있었다. 나는 매번 이상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바라봤다.

“일어나야지, 이 사람아.”

아버지가 등을 툭툭 두드리면 엄마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고 화장실로 가서 문을 슬쩍 밀고 소변을 봤다. 변기에 앉아 있는 엄마의 멍한 표정이 밖에서도 보였다. 아버지는 계란프라이를 공중에 띄웠다가 미뉴에트의 리듬에 맞추어 사뿐하게 받아냈다.

“오늘 상인이 학교에 갈 건가?”

“그러려고 해요.”

엄마는 식탁 의자에 앉아 눈썹을 그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대입 상담 때문일 거예요.”

“응.”

아버지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벽에 걸린 동생의 교복을 바라봤다.

동생은 얼마 전에 학교를 옮겼다. 전학 오기 전 학교에서는 지독한 따돌림을 당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까지 동생은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애가 공중목욕탕에 가지 않겠다고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을 때 이상하게 여긴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완력으로 옷을 벗겼고, 나오자마자 엄마와 함께 경찰서로 갔다. 잡혀 온 애들은 자기들이 상인이를 고문하기 위한 ‘기구’까지 발명했다고 순순히 털어 놓았다.

아버지는 동생을 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학교 측의 권유를 거절했다. 대신 상인이가 갖고 싶어 했던 삼천 피스짜리 모형 비행기 조립 박스를 구해 왔다. 상인이는 한 달 동안 방에 처박혀 조립에만 매달렸다. 실제 비행기를 탔으면 지구를 열 바퀴는 돌고 올 시간이었다. 조립 비행기가 날개를 기울이며 하늘로 날아올랐을 때 동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학교에 갈래?”

동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구부정하게 어깨를 기울이며 책상에 앉았다. 가끔 악몽을 꾸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때면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동생은 복잡하게 엉킨 것들을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출근 준비를 마친 엄마의 옷차림을 망설이듯이 훑어봤다.

“다른 옷은 없을까?”

엄마는 매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는 베이지색 정장 차림이었다. 여기저기 보풀이 일어난 데다 목 주위가 늘어난 블라우스에는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엄마는 힘겹게 허리를 굽혀 스타킹을 신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귀찮은데.”

아버지는 묵묵히 밥을 먹는 상인이에게 국을 한 그릇 더 떠 주고 안방으로 가서 밤색 머플러를 꺼내 왔다. 지난 엄마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스카프를 엄마의 목에 둘러 줬다. 엄마는 좀 불편하다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동생은 학교로,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로 나설 때면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으로 나왔다. 엄마는 언제나 뒤늦게 허둥대면서 우리를 따라 나왔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매일매일 용돈을 줬다. 나는 그게 언제나 부족했고, 동생은 한 푼도 쓰지 않아 쌓이는 편이었고, 엄마는 돈을 남겨 과일이나 간식을 사 왔다. 우리 집의 가난은 교묘해서 위장하려면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지만 정말 그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항아리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간혹 더욱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가게의 형광등 스위치에 전시대의 불빛이 일제히 보석들을 비췄다. 대입시험을 끝마치자마자 나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모조 보석을 취급하는 액세서리 전문점이었다. 대학에 다닐 마음 따위 없이 시험을 치렀던 것처럼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도 앞으로의 계획이랄 게 없었다. 사장은 개인 사무로 바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가게 열쇠를 던져준 뒤에 며칠에 한 번씩 가게에 들렀다. 나는 온종일 에프엠을 들으면서 밥을 시켜 먹고, 빈 가게를 어슬렁거렸다.

낮에는 오가는 손님도 별로 없었다. 나는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해가 쨍 빛나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움직이고, 붉게 노을이 지고,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는 장면들. 생각해 보면 그만큼이 꼭 내 이십대의 값인 것 같았다.

오후 시간이 넘어 가면 직장인들과 여대생들이 제법 들어왔다. 나는 스탠드 뒤쪽에서 각도를 달리 하며 거울을 비춰 주고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가게에서는 만 원 한 장이면 루비 목걸이 세트를 살 수 있었다. 가끔 ‘이거 진짜인가요?’ 라고 물어 오는 사람도 있었다. 

손님 몇 명이 몰려가고 난 저녁 무렵, 어디선가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엄마가 유리창 밖에서 검은 봉지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엄마가 가게에 들른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가 같이 가게 셔터를 내렸다. 이른 저녁의 길가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여름밤의 가로수 한 쪽에 수영장 셔틀버스가 멈춰 서더니 샌들을 신은 여자애들이 내려섰다. 그들이 우리를 앞질러 뛰어 가자 샴푸 향기가 공기 가득히 퍼졌다.

“딸, 스무살인데 아까워서 어떡하지.”

엄마가 한참을 걷다가 말했다. 나는 뭔가 웃긴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런 쪽으로는 원래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자그마하게 아니야, 하고 중얼거렸다. 엄마의 낡은 구두굽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에 엄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고기를 구워댔다. 우리 가족은 입을 크게 벌리고 쌈을 싸서 먹었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오늘은 일찍 자거라.”

아버지가 말하자 동생은 네, 하고는 거실 한 쪽의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밝혔다. 자기 몫의 방이 없는 동생은 거실 구석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었다. 그애는 도수가 높은 안경을 치켜 올릴 때에만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는 커다란 러닝셔츠를 입고 선풍기 앞에 앉아 있었다. 얇은 옷자락이 선풍기 바람을 따라 엄마의 늘어진 가슴에 가 닿았다. 드라마를 보는 엄마는 무표정했다. 아버지는 걸레로 바닥을 꼼꼼히 닦은 후에 안방으로 들어가 양말을 벗었다. 아버지의 발목은 내 팔목보다도 가느다랬다. 나는 좁은 집 안을 서성거리다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누우니 공기가 몹시 후덥지근했다. 안방에서 새어 나오는 여배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아침부터 매미들이 유난스럽게 울었다. 새벽 늦게 잠들었던 나는 억지로 눈을 떴다.

“지겨워, 정말!”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오자 상인이가 나를 쳐다봤다.

“나무에 약이라도 뿌리지.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잖아.”

“그냥 참아.”

상인이는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가을이 오면 다 죽고 없을 걸.”

아버지보다 더 키가 자란 상인이는 문을 열고 나갔다.

오랜만에 가게에 나온 사장은 장부를 정리하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도 좋다고 등을 떠밀었다. 사람 좋게 웃는 사장 앞에서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거리 위에 떨려 나왔다. 문을 나서자마자 날카로운 햇볕에 눈이 부셨다. 피시방에 들어갔지만 채팅창에 접속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이름도 낯선 지방대학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 넣었다.

공터에 낡은 탁자가 하나 버려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무심코 그 옆을 지나다가 손등을 긁혔다. 오후 두 시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빛바랜 청바지를 벗고 파자마를 입었다.

가족들이 없는 시간에 아버지는 더 분주했다. 빨랫감을 두 차례로 나눠 삶고, 집 안 곳곳을 쓸고 닦은 후, 요리책을 보며 새로운 반찬을 만들었다.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있는 나를 흘금흘금 바라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친구들이랑 만나지 않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두꺼운 패션 잡지를 첫 장부터 꼼꼼히 읽어 나갔다. 일찍부터 하늘이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대기에서 훈훈하고 촉촉한 기운이 나른하게 떠 다녔다. 아버지는 발목을 주무르며 베란다 턱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러도 답이 없던 아버지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뒤늦게 나를 뒤돌아보았다. 아버지가 겸연쩍게 웃을 때 눈가의 자잘한 주름들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엄마는 그날 많이 늦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엄마를 현관에서 부축했다.

“오늘 새로 오신 소장님 때문에 회식이 있었어요, 미안.”

엄마는 거울 앞에서 양치질을 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엄마의 목덜미가 불그레했다.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아버지는 거실의 커튼을 내렸다. 좁고 어두운 거실 한 쪽에 선 엄마는 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방에 들어갔다.


엄마의 일과란 하루 종일 한 뼘짜리 책상에 앉아서 낯선 사람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회사의 주력 상품은 캡슐 형 비타민과 내비게이션 시스템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필수품일 수도 있었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간혹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서 물건을 파는 시늉을 했다. 그럴 때는 상사가 엄마 옆에 서서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엄마의 불안한 소프라노 톤 음성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과연 이런 식으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문이 들었다. 세일즈 실적 때문에 우리 집 구석에는 어디에나 비타민 상자가 쌓여 있었다.

새로 온 소장은 우연찮게도 엄마와 초등학교 동문이라고 했다. 그즈음 어떤 일에도 표정이 없던 엄마는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내게 그 이야기를 했다. 거절당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서서히 소모되어 온 엄마는 오랜만에 두 볼이 패이도록 미소를 지었다. 

그 날 새벽, 나는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엄마가 거실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희미하게 불빛을 밝힌 부엌 식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둔중한 뒷모습에 비해 엄마의 목은 가늘고 길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창문 밖에서 무언가 두드려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공터의 버려진 탁자인 것 같았다. 나는 창문을 열어 보고 싶었지만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참았다. 한참이 지난 뒤에 거리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이후 엄마는 자주 뭘 까먹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침 일찍 일어난 엄마는 긴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로 옷장 앞에 서서 삼십 분이 넘도록 이리저리 조합을 바꾸어 보았다. 엄마는 갑자기 두 갈래로 나뉜 사람처럼 보였다. 무척 다정했다가도 갑자기 신경질적이 되곤 했다.

엄마는 별로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낡은 바지와 블라우스를 아침 내내 입고 벗었다. 아버지는 립스틱을 바르는 엄마를 보고 웃었다. 엄마는 계절이 바뀌니까요, 라고 중얼거렸다. 아침 식사를 끝낸 엄마는 다시 한번 안방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엄마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천천히 현관으로 나왔다. 그리고 신발장에서 두 켤레밖에 없는 구두를 꺼내 한 번씩 바꿔 신었다.

기온이 오르자 주위의 모든 것이 열기에 어른거렸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회색 도로도, 나를 툭툭 치는 손님들의 손길도, 누군가 떠들어대는 소리도 길게 늘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창가에 턱을 괴고 하염없이 앉아 있는 나를 위해서 라디오를 틀어주었다. 기타 소리가 통통거리는 라틴 재즈밴드의 음악이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좋아했다.

“이 사람들한테 노래는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야. 사실 그건 음악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 이 사람들은 그저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뿐이야. 아무런 목적이나 가치 없이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거야.”

동생은 모아둔 지폐를 몇 장 가져가서 재즈밴드의 시디를 사왔다. 동생이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시디를 꺼냈을 때 아버지는 잠깐 숨을 멈췄다. 아버지는 매일 소중하게 그 음악을 들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존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부부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계절엔 어딘가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엄마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발걸음에 무게가 없어졌다. 엄마가 날마다 늦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동생이 들어온 뒤에도 문을 잠그지 못했다.

“누나.”

집에 돌아온 동생은 가방을 내려 놓지도 않고 현관에서 나를 불렀다. 동생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려서 흠칫 놀란 나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왜?”

“저기, 바깥에 엄마가 어떤 남자 차 안에 있는데, 꼭 싸우는 것처럼 보였어.”

“…….”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멀리서 보기만 했거든.”

“회사에서 아는 분이겠지. 얼른 씻기나 해.”

동생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잠시 후에 엄마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말없이 베란다의 빨래를 걷어냈다.

엄마가 할인 매장에서 사 온 노란색 투피스를 보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엄마의 움직임은 어떤 파장 같았다. 그즈음 엄마는 뭔가를 열심히 쫓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에 끝없이 쫓기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아주 피곤해 보였다. 그녀는 매일 기록을 늘리듯이 더욱 늦었고 어느 날은 울었던 게 분명한 눈으로 화장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며칠 뒤 저녁, 사장의 심부름으로 갔던 거래처 거리에서 나는 엄마를 만났다. 한순간 누구인지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엄마는 비슷한 차림의 아주머니들 틈에 서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아주 요란스러운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고 그 사이에 남자도 끼어 있었다. 남자는 빗어 올린 머리에 말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아주머니들이 함께 와아, 웃었다.

엄마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노란색 투피스를 입은 엄마는 혼자 입을 꽉 다물고 서 있었다. 엄마의 새로 한 파마머리가 유난히 고불거려 보였다.

나는 거래처 앞에서 주문서를 잃어 버려 그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혼자 흰 돌과 검은 돌을 하나씩 놓는 아버지를 지나서 방으로 들어간 나는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목걸이 판매량이 늘어 일주일에 한 번씩이던 사입이 두 차례로 늘었다. 공장에서는 이교대로 물건을 만든다고 했다. 모조보석은 대개 2천100도 이상의 고열에서 만들어진다. 원료를 녹여서 결정화시킨 뒤 냉각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면 가게는 유난히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보석을 손에 쥐어 보면 그 속에 뜨거운 불길이 갇혀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현관에 낯선 사람의 구두가 있었다.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는 그 여자는 엄마 회사의 동료였다. 나는 작게 목례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그런 걸 믿고 싶지는 않지만…….”

침대 위에 움직임 없이 앉아 있자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모두 새어 들어왔다.

“……날마다 사무실에 남아서 소장님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소문 때문에…… 소장님도 아주 곤란하신 눈치예요.”

“……예.”

“상인이 아빠가 잘 얘기해 봐요. 무슨 큰 허물이 되는 거라면 내가 이렇게 와서 말 못하지. 내 마음 알죠?”

인사말이 몇 번 더 오가고 여자는 떠났다. 집 안이 너무 조용해지자 갑자기 걱정이 된 나는 우장창 소리를 내며 방문을 열었다. 

“깜짝이야.”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신발을 닦고 있었다. 몇 켤레 안 되는 구두들을 꺼내서 일렬로 늘여 놓은 아버지는 아주 꼼꼼히 정성을 들여 윤기를 냈다.

“이것 봐라, 새것 같지.”

대답을 바라지 않는 그 한 마디를 하고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계속 구두를 닦았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그대로 흘러내릴 것처럼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형식적인 말을 몇 마디 나누고 집의 불을 껐다. 아버지는 화가 나 있었다. 엄마도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 식탁 앞에 앉은 나는 연신 다리를 떨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아 조용한 가운데 상인이가 벌떡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켰다. 여름휴가의 후유증과 직장인들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바다와 파도, 비키니, 얼음 셰이크가 둥둥 떠 다니는 장면이 이어졌다.

“저녁에 많이 힘들지? 피곤할 텐데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자리 하나 없고.”

엄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뭐.”

엄마는 고개를 젓고 국을 한 수저 떠 먹었다. 엄마는 시선을 돌리고 음식을 꼭꼭 씹었다.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엄마는 다시 밥을 떠서 입에 넣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미안해.”

엄마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봤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엄마의 어깨를 한번 만지고 일어나 식탁을 치웠다. 

엄마가 먼저 집을 나서자 아버지는 동생에게 ‘이제 너는 버스를 타고 다녀야겠다’고 말했다. 동생은 몇 년 동안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자전거 열쇠가 동생의 손에서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갈 때 아주 맑게 쨍, 하는 소리가 났다. 동생이 자전거를 집으로 끌고 들어오자 아버지는 베란다에 앉아서 뭔가를 계속 두드리고 이어 붙였다. 나는 거실에 서서 오랫동안 그걸 바라봤다.

“십 퍼센트 보너스야. 이번 달엔 정말 고생 많았어.”

사장은 봉투 두 개를 같이 내밀었다. 나는 백화점에 가서 십만 원이 넘는 청바지를 입어 봤다. 뒷주머니에 날개가 그려진 그 청바지는 선이 미끈했다. 나는 자꾸 그 뒷모습을 거울에 비춰 봤다. 내 옆에 선 점원이 커다란 가방을 내밀었다.

“청바지를 구입하시면 대용량 여행 가방을 드려요.”

내가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크기의 가방이었다. 나는 시커먼 구멍 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날 저녁, 아파트 계단을 올라오다가 나는 아버지를 만났다. 무언가가 바닥에 끌리고, 텅텅 튕기고 끼익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자전거를 끌고 나온 아버지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계단을 힘겹게 하나씩 내려오고 있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좁은 복도를 내려오는 아버지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내가 다가서서 받아 들려 하자 아버지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어딜 가시려고요?”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아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계단을 내려 온 아버지는 도로 위에 섰다. 작은 보폭으로 아버지를 따라 온 나는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한 발을 폐달 위에 올리고 바퀴를 굴리면서 땅을 훌쩍 딛어 운전석에 앉았다. 시험하듯 아파트 앞 놀이터를 한 바퀴 돈 아버지는 바라보고 서 있는 내게 손을 흔들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인용이었던 동생의 자전거에는 보조석이 새로 장착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자전거를 지금처럼 뒤에서 한참 바라봤던 적이 있었다. 오래 전, 내가 고아원에 있었을 때. 그 시절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왔다. 고아원에 있는 애들은 모든 부모들이 그렇게 찾아오다가 점차 횟수가 뜸해지고 결국은 연락을 끊어 버린다고 일러 주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아버지는 매주 수요일에 나를 만나러 왔다. 애들은 아버지가 올 것인지 오지 않을 것인지 내기를 걸었다. 나는 늘 허세를 부리듯이 내기 돈을 높였다. 수요일 오후가 오면 나는 철창으로 된 정문에 이마를 기대고 서 있었다. 나는 일부러 머릿속으로 복잡한 암산을 맹렬하게 해댔다. 다리를 떨면서 엉터리 숫자를 계산하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먼 허공에서 검은 점이 나타나고, 그게 점점 위로 올라오고, 남자의 머리가 되고, 아버지의 얼굴이 되고, 달리는 자전거가 되어서 가까워졌다. 아버지는 멀리서 노래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는 자전거의 바구니에 초코볼 두 봉지를 넣어 왔다. 그리고 그 한 봉지를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날 보고 서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옆에 있는 것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초코볼을 혀 위에서 천천히 녹여 먹었다.

아버지는 엄마와 동생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경과가 어떤지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 줬다. 크리스마스 주간에는 초코볼과 함께 작은 상자가 함께 왔는데 아버지는 그걸 단단히 봉해서, 크리스마스 날에 열어야만 한다고 약속을 받았다.

이브 날 밤, 안달이 난 나는 몰래 일어나서 상자를 열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주위가 몹시 조용했다. 기대감 속에서 상자를 열어 본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상자 속에는 종이 인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선을 따라 깨끗이 오려진 인형과 드레스들. 금발머리 공주의 납작한 몸과 파티용 모자, 비즈가 달린 수십 개의 원피스, 핸드백들. 그 속에 담긴 눈부심과 사각거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릴 때 어린 나는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럴 때 아버지는 장애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찾아온 고열과 마비, 다리가 뒤틀려 짝짝이 구두를 신는 것을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묘기를 부리듯이 손을 놓고 폐달을 굴렸다. 그리고 쌩쌩, 신나게 달렸다. 자전거 위에서 아버지는 균형을 잘 잡았다.


나는 아버지가 긴긴 도로를 지나,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사이를 빠져 나가고 엄마에게 가 닿는 모습을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었다. 밤공기는 시원하고 청명해서 아버지가 깊은 숨을 쉬기에도 적절할 것이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쉰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한한 공기 중으로 빠르게 분산되어 흩어지고 오래된 지구의 단단함이 아버지를 위로해 줄 것이다.

엄마를 데리러 간 아버지는 절대로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를 보고 놀라겠지만 결국 말없이 그 뒤에 앉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엄마는 결국 아버지의 허리를 잡고 머리를 기대게 될 것이다. 엄마는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엄마는 땅 위에서 다리를 까딱거려도 괜찮다. 자전거 위의 아버지는 웬만해서는 잘 쓰러지지 않으니까.

창 밖은 점차 어두워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 안의 불을 환하게 켰다. 상인이의 책상을 지나갈 때 조립식 비행기가 내 앞으로 가볍게 떨어졌다. 나는 무릎을 구부려서 그것을 주웠다. 떨어질 때 충격으로 비행기의 날개 한 쪽이 부러져 있었다. 접착제도 없이 작은 조각들을 이어 만드는 그 조립식 비행기는 쉽게 망가졌지만 이어 붙이면 또 곧잘 날아갔다. 나는 비행기를 주워 동생의 참고서 위에 올려 놓았다.

시간이 지나서 집에 돌아온 엄마와 아버지는 코 아래가 검게 변해 있었다. 내가 어, 하고 소리를 지르자 엄마는 말했다.

“매연이 너무 심하잖아.”

엄마의 볼은 저녁 바람에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아버지는 싱겁고 뜨거운 된장찌개를 끓였다. 동생이 돌아와서 신발을 벗자, 낡은 여덟 개의 구두가 나란히 긴장을 풀었다.

그 날부터 아버지는 매일 엄마를 데리러 갔다. 나는 엄마를 위해서 사파이어 반지를 준비했다. 반지가 조금 작았는데도 엄마는 그것을 빼지 않고 다녔다. 동생은 언제나 홀로 책을 읽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것이었으므로 그대로도 좋았다. 나는 나만의 모조 보석 가게를 갖게 될 때까지 좀 더 낡은 청바지를 입기로 했다. 다만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멋진 벨트를 맸다. 가을이 오자 거짓말처럼 매미 울음 소리가 멈췄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라틴 재즈 가수들은 춤곡을 부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는 쑥스러워서 춤 같은 건 나서서 추지 못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전거, 그 뒤에 앉은 엄마를 떠올릴 때면 나는 그게 아주 균형 잡힌 춤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그려 준 호숫가의 고성은 그 뒤에도 결코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걸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으로. 품위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아버지는 옳았다.《문장 웹진/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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