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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 작성일 2007-12-31

 

정사




박형숙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콩콩거리는 작은 소리였지만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내 손놀림도 빨라졌다. 어쩔 수 없는 인연의 사슬처럼 세탁기 안에서 뒤엉켜 있는 빨래 더미 속에서 청바지를 꺼냈다. 탈수가 된 청바지는 몹시 구겨져 있었다. 청바지에 남은 구김은 얼핏 조잡한 큐빅 모양 같았다. 그것은 아내의 표정을 닮았다. 다 돌린 빨래 너는 일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물기를 짜낸 빨래처럼 인상이 구겨졌던 아내를 닮았다.  

 

 

아내의 얼굴이 다림질한 것처럼 펴지려면 빨래들은 일제히 건조대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그쯤은 나도 안다. 내 손을 거쳐 건조대에 매달린 빨래들이 아내가 늘 주장하는 페미니즘이니, 가사 분담이니 하는 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콩콩거리는 소리는 더 가까이 마치, 내 심장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려대고 있었다. 그 소리는 이제 현관 앞에서 멈출 거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청바지가 다시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내의 비난이 떠올랐다. 아내의 비난, 그것은 사실 두렵다기보다는 좀 성가신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청바지를 탈탈 털고는 건조대 봉 위에 재빨리 걸었다. 베란다를 빠져나오는데 건조대에 걸려 있던 옷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섬뜩한 느낌이 얼굴과 목덜미를 축축하게 휘감았다.   

디잉동

베란다 문턱을 넘고 있을 때 벨소리가 들려왔다. 벨소리는 누르다가 만 듯했다. 그녀의 것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무슨 말이든 끝을 잘 맺지 못하는 그녀의 말투와 닮았다. 

현관문이 열리자 그녀가 문틈으로 재빨리 들어왔다.

휴우.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그녀는 주위를 둘레둘레 살폈다. 한쪽 문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거실장과 그 위에 놓여 있는 25인치 TV, 전화기, 충전기, 세금 고지서, 머리빗, 노란 고무줄이며 거실 바닥에 널려 있는 수건, 돌돌 말린 스타킹, 보다 만 신문, 재떨이, 다리미, 분무기, 아이가 갖고 놀던 레고와 기차 레일. 그리고 벽에 걸린 달리의 복제화와 달력과 오래된 시계. 그녀의 눈동자에 내가 살고 있는 16평 아파트의 거실 풍경이 후줄근하게 되비치는 것을 느꼈다.

뭐 해?

…….

들어오지 않구.

…….

그녀는 샐쭉한 표정으로 현관에 서 있었다. 이 후줄근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 될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아파트는 환상이 끼어들기에는 너무나 견고한 공간이었다. 게다가 낡아빠진 이 아파트는 그녀가 기대하고 있는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로맨틱한 분위기라니? 그녀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단 말인가? 에이프런을 두른 웨이터가 바삐 오가는 이태리 식당, 팬지꽃 화분이 늘어 선 이층 창가, 말끔하게 정돈된 호텔 룸, 발코니로 보이는 소나무 숲……, 그런 것들? 나는 그녀의 기대를 보란 듯이 배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 왜 이래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상체를 뒤로 뺐다. 그러나 곧 그녀의 등은 현관문에 닿았고 더 이상 물러날 공간은 없었다. 반쯤 벌어진 그녀의 입술은 생각보다 순순히 열렸다.

이럴려구…….

그녀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소매로 입을 쓰윽 닦으며 말했다.

왜? 어때서?

집이잖아요. 

집이니까 더 좋지.

어쩐지 불경스럽단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거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어젯밤 아내가 벗어둔 채 그대로 방치된 검정색 스타킹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섭기도 하고.

무섭긴. 오히려 안전해서 좋지.

너무 고요해요.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를 것처럼.

아파트는 늘 쥐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들, 회사로 공장으로 공공근로 장소로 자신의 노동을 팔러 나갔을 것이다. 현관문 바깥에서 저벅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양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발소리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서너 번 벨이 울렸다. 아무 반응이 없자 발소리는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걸쇠를 걸으며 말했다.

걱정 마. 안에서 열기 전에는 아무도 못 들어오니까.

그녀는 결국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거실 바닥 어디에도 그녀가 앉을 만한 공간은 없었다. 블록 조각과 수건과 신문지 사이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거실 문갑 위에 놓인 액자 앞에서 멈췄다. 원목 액자 안에는 내 아내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기 직전의 여자 사진이 들어 있었다.

와, 예쁘다.

안 예쁜 신부 봤어? 식장에서 드레스 입혀 놓으면 다 예쁜 거야.  

대학 과 후배였던 정연은 정말 예뻤다. 동기들로부터 선후배에 이르기까지 정연에게 눈독을 들이지 않는 남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정연을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운이 좋았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그런 행운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1년 만에 그런 마음은 곧 잊혀지고 말았다. 불운은 가슴에 각인이 되는 법이지만 행운이란 쉬이 잊혀지는 법이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는 기다란 쿠션이 놓여 있는 거실 한구석으로 갔다.

뭐 할려구요?

좀 편히 앉자구.

나는 발끝으로 수건이며 신문지 따위를 닥치는 대로 밀쳐내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쿠션 위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 사이에 그녀를 앉히기 위해 그녀의 오른손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잠시 뒤로 빼는 듯하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이, 참.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교태와 약간의 망설임이 비등하게 섞여 있었다. 잠깐, 잠깐만. 나는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 사이로 손을 넣었다. 움찔, 그녀의 몸이 수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내 손이 그녀의 가슴을 더듬는 동안 그녀의 숨소리는 차츰 거칠어졌다. 나는 한손으로는 가슴을 움켜쥐고 스커트 벨트 밑으로 다른 손을 넣었다. 거들과 팬티를 힘겹게 들쳐 내고 맨살에 닿는 순간 그녀는 부르르 떨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결국 섹스에 불과해. 너는 거기에 현실보다 더 그럴듯한 환상이니 뭐니 하면서 포장을 하려 애를 쓰긴 하지만. 나는 놀랄 정도로 빠른 그녀의 감응에 한편으론 감탄했고 또 한편으론 비웃었다. 무성한 음모의 수풀을 지나 그녀의 입구에 닿았을 때 그녀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여기선 싫어요.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아내의 사진이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사진 속 아내의 비웃는 듯한 눈길을 피해 비스듬히 누운 채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복숭아씨처럼 단단한 그녀의 발뒤꿈치부터 파리한 느낌을 주는 목선까지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엉덩이였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풍만하게 벌어진 엉덩이. 그 엉덩이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 한 거리에 있었다.

여기가 뭐 어때서?

지저분하고 또…….

쳇, 까다롭게 굴긴.

그녀는 마치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거실 바닥 때문이라는 듯 발끝으로 레고로 만든 성을 툭 찼다. 성은 손쉽게 쓰러졌다. 쓰러진 성은 절반쯤 부서졌다.

그거 건드리지 마.

왜요?

꼬마가 싫어해.

그러나 그녀는 쓰러진 레고 사이를 발끝으로 걷다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의 나머지 부분마저 부서뜨렸다. 저녁 때 집에 돌아온 아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막무가내로 울 것이다. 무너진 성을 어떻게든 복원시켜야겠다고 생각해 보지만 나는 원래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이는 어쩌면 벽에 머리를 들이박을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거실의 끝, 베란다 앞에 서 있었다. 베란다의 반쯤 열린 문틈으로 널다 만 빨래들이 건조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여기 온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뒷모습은 비틀어 짜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수건과 신문지와 블록을 피해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이번에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주방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쓰레기통은 음식 쓰레기와 비닐 껍질 등이 뒤엉킨 채 넘쳐나고 있었고 개수대에는 며칠째 씻지 않은 식기들이 겹겹으로 포개져 있었다.

살림은 도통 안 하나 봐요?

내 마누라?

응.

청소, 설거지는 내 담당이야.

당신이 안 하면?

할 때까지 내버려 둬.

그럼 늘 이런 상태로?

그렇지 뭐.

좋은데요.

아깐 지저분해서 싫다며.

이건 다른 문제예요. 뭐랄까, 방치되고 버려진 듯한 상태로 있는 이 물건들이 좋아 보인다구요. 이 안에서는 뭐랄까, 삶이 제대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어요.

그녀의 말은 늘 그렇듯이 논리적이지 않았다. 미희. 그녀가 논리적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지는 않았을 거였다. 대학 동창 가운데 가장 잘 나가는 진석의 처, 시가로 10억은 한다는 전원주택의 안주인, 두 아들의 엄마, 완전한 가정을 행복의 표상처럼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여자, 송미희. 그녀가 논리적이었다면 사십대 중반의 내 삶은 아마 심심해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방치된 게 뭔 줄 알아?

나는 미희 가까이에 다가가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엉덩이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손을 잡아 내 바지 앞섶으로 끌어당겼다.

바로 이거야.

내 손에 끌려온 미희의 손이 바지 아래쪽 나의 페니스에 닿았다.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고 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빼내려 꼼지락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포기한 듯 내 페니스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더니 그것을 꼭 잡기 시작했다. 어찌나 세게 잡는지 나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몸을 조금 뒤로 뺐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바지 지퍼를 내렸고 사각 팬티를 더듬더니 팬티의 안쪽 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단단해진 내 페니스를 꽉 잡고는 아래위로 서툴게 손을 움직였다.

아아.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녀의 손은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얼굴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기름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가스레인지 후드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살살 다루어야 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성이 나 있거든.

피이. 

나는 지퍼를 올리며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불뚝 서 있는 내 남성을 달랬다. 조금만 기다리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커피 줄까?

응.

그럼 저 방에 들어가 있어.

화장실 옆에 있는 문을 가리키자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놓는데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 나왔다. 작은 가아슴을 모두 모오두어어 시를 써 봐도 모자란 다앙신……. 이게 무슨 노래였지? 죽은 김광석이었던가? 작은 가아슴을 모두 모오두어어……. 같은 소절을 두 번 반복하는 동안 물이 끓었다. 커피 설탕 프림의 비율은 2대 2대 2로 했다. 언젠가 모텔에 비치된 일회용 커피를 맛있게 홀짝이던 미희의 얼굴이 갈색의 커피 위로 어른거렸다.

룸서비스를 하는 호텔 보이 같은 심정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방은 내가 서재로 쓰고 있는 방이었다. 책장이 두 개, 커다란 사무용 책상과 회전의자가 하나씩, 컴퓨터가 들어 있던 빈 상자와 이사 올 때 박스에 들어갔다가 아직까지 나오고 있지 못한 책들, 여행용 가방 등이 책상과 책장 사이에 놓여 있는 방. 나머지는 한 사람이 간신히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손바닥만 한 공간이었다.

미희는 까만 인조 가죽으로 덮인 회전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다 턱을 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는 기척에도 까딱도 안 하는 것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나는 두 개의 머그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왜 그래?

……이 방이 당신 방?

응.

왠지 낯설게 느껴지네요.

뭐가 어때서?

저거 다 당신 거잖아요.

그녀는 책장에 빽빽이 꽂힌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그건 어쩐지 당신의 과거 같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당신의 일부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사실이 나를 두렵게 해요.

뭐가?

내가 모르는 당신의 어떤 부분이.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른들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해 대는 아이처럼 끈덕진 눈동자였다.

책이란 일종의 정신의 표현이라는 말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나요.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책은 그 사람의 정신을 대변해 주고 있는 거라고.

어디서 그런 걸 읽었어?

몰라요.

그럼 대형 서점 주인이 정신적으로 가장 풍부한 인간이겠네.

농담할 기분 아닌데.

눈을 흘겨 대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오래된 책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러시아혁명사, 볼셰비키당사, 세계경제체제론 등과 같은 책들은 까마득히 오래 전 대학 신입생 때 읽었던 책들이었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책들이 두어 권 꽂혀 있었고 니체, 푸코, 데리다의 책들이 간간히 끼어 있었으며 나머지는 소설과 시집 나부랭이 들이었다. 갖고 있는 책이 그 사람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만일 그렇다면 내 정신은 아마도 저 정리되지 않은 책꽂이의 책들처럼 산만하고 뒤죽박죽일 것이다. 혁명사를 이해하기도 전에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였음이 입증되었고 대중문화를 반쯤 읽었을 때 현실의 대중문화는 더 빠르게 변화해  나갔다. 니체와 푸코와 데리다는 또 제각각 내 정신의 주인이 되려고 내 안에서 발버둥 쳤지만 나는 누구의 철학에도 동화되지 못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나. 역사도 철학도 더 이상 내 삶의 나침반이 못 된다. 지방대학 강사 자리라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고학력 실업자. 시대의 주류에서 밀려난 주변인.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정신은 오로지 눈앞의 여자, 친구의 아내이자 나의 연인인 미희에게 쏠려 있다.

이봐, 미희. 나는 나야.

지금 내 안에는 당신에 대한 성적 충동밖에 없어, 라고 말하고 싶은 걸 나는 간신히 참았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녀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 눈앞의 현실을 낯설어 하고 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두려워 하지만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다만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 자신의 정신적 단순성을 피로한 표정을 지음으로써 복잡한 그 무엇으로 위장할 줄 아는 여자. 자신이 던진 질문을 곧 잊어버리는 여자.

나는 나다. 그 말 참 명쾌하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의 두려움은 곧 전환되었다. 역시 문제는 그녀의 일시적인 기분이었다. 서재라기보다는 오래된 창고 같은 이 방이 그녀의 기분을 흔들어 댔던 것일까? 하긴 정신이 복잡하기보다는 감정이 복잡한 미희 같은 여자는 다루기에 따라서는 더 흥미로울 수도 있었다.

언젠가 했던 약속 잊었어?

뭐죠?

심각해지지 말자는 말.

그녀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전 교외의 강변으로 나가는 차 안에서 우리의 약속은 시작되었다. 심각해지지 말기.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전날 진석의 집에서 집들이가 있었고 진석이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동창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사이에 나는 미희와 마당의 한구석, 스토브에 쓸 나무토막이 쌓여 있는 창고 앞에서 담배를 나눠 피웠다. 불쑥 내민 내 손과 불쑥 덮친 내 입술을 미희는 거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율배반적인 욕망을 갖는 모순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의 실현은 하나의 현실 안에 또 다른 현실을 들여놓지 않을 때만이 가능했다. 사랑스럽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미희의 입술에 대한 욕망을 느낄 때 그녀는 내 앞에 놓인 하나의 여자일 뿐, 내 동창 진석과는 무관한 존재이듯이. 그것은 마치 비즈니스맨이 환경을 염려하는 양심적인 시민이 될 수 없거나 독립투사가 자상하고 책임감 강한 가장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성공한 비즈니스맨은 모범적인 시민으로 추앙받고 역사책에 기록된 독립투사는 가족을 비참과 곤경에 빠뜨린 죄악에서 면죄부를 받는다. 동일한 시간 내에 겹쳐 있는 여러 층위의 시간들. 우리는 그 안에서 매번 하나의 역할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매순간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다면 그 역할이 다른 시간대에 펼쳐진 다른 역할과 충돌한다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 역할이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능에 맞닿아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그날 강변의 끄트머리에 있는 모텔에서 섹스를 했다. 가벼웠지만 진지했고 진지했지만 결코 심각해지지 않을 최초의 섹스.

지금은 우리 둘 뿐이야.

나는 그날의 섹스를 떠올리며 그녀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불을 만지기 시작했다. 미희의 귓불은 도톰하게 살집이 잡혀 있어 말랑말랑한 젤리 같았다. 내 손가락은 그녀의 귓불로 시작해서 귓바퀴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고개가 점점 더 뒤로 젖혀졌다. 아, 아.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누가 말했던가. 삼십대의 여자는 수박이라고. 겉보기에는 단단해 보이지만 대기만 하면 쩍 갈라진다고 말이다. 나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들은 음담패설을 떠올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미희,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똘똘 뭉쳐 있는 그녀의 껍질은 작은 접촉만으로도 이렇게 벌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누워!

나는 그녀에게 명령했다. 그녀는 주인에게 충실한 하인처럼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웠다. 방안은 그녀가 눕기에 비좁았다. 그녀는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치마 올려!

그녀가 치마를 올리자 보풀이 일어난 거들과 무릎 위까지 올라온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드러났다. 그녀는 스타킹을 벗어 내리고 눈을 감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려 바지를 벗으려는 순간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려 댔다.

받을까, 말까. 그러나 이미 내 손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회의가 있어서 늦겠다, 아이를 5시에 데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빨래는 다 널었느냐. 아내였다. 응. 응. 응.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짧게 대답했다. 미희는 눈을 뜨고 핸드폰을 받고 있는 나를 훔쳐보다가 내가 핸드폰 폴더를 닫자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럴 땐 피차 모른 척 하는 것이 예의라는 듯이.

미희의 거들과 팬티를 한꺼번에 벗겨 내리고 나는 섹스를 하기 시작했다. 단단해진 내 페니스를 압박하는 그녀의 수축된 질.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만세를 부르듯이 위로 올리고 교성을 질러댔다. 죽을 거 같아. 그녀가 헉헉대며 소리쳤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죽여주기 위해 상하 좌우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곧 사정을 하고 말았다. 정액이 빠져나간 페니스가 힘없이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내 밑에 깔린 채 죽여줘, 죽여줘, 하고 되풀이 했던 그녀의 말은 어느덧 색색거리는 숨소리로 변했다.

텅 빈 듯한 고요.

그녀와 나는 아랫도리만 벗고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한동안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회전의자와 책장과 빈 박스 사이에서 팔베개를 하고 내 오른쪽 옆에서 누워 있느라 그녀도 나도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할까? 알 수 없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침묵 속에서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을 떠올렸다. 그날 산 중턱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는 모텔 3층 구석진 방의 하얀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 위에서 그녀와 나는 담배를 나눠 피웠다.

어쨌든 첫 섹스는 우발적인 거요.

그럼 두 번째는요?

그건 대개 첫 섹스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이어지지.

지난번에 좋았나요?

그럼.

왜죠?

처음이니 좋을 수밖에. 모든 게 미지의 가능성으로 어른거리니까. 물론 당신 몸도 좋았고.

오늘도 좋을까요?

물론. 심각해지지만 않는다면.

심각해진다?

그래. 그건 죄의식을 갖는 거요.

당신에게도 그게 있어요?

있지. 그러나 무시하오.

그날 미희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열 가지가 넘는 체위로 나와 섹스를 했다. 몇 번이나 그녀는 죽여 줘, 죽여 줘, 라고 소리를 지른 후 잠잠해졌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 차안에서 미희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핸들을 쥐고 오른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어 조금 전 섹스의 기억을 되살려보려 했으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죄의식의 발동? 나는 이죽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참 만에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행복해서…… 두려워져요. 나도 모르게 엑셀 위에 올려 있던 오른쪽 발에 힘이 주어졌다. 속도계가 제한속도 100을 넘도록 엑셀을 밟자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을 등지고 심각한 표정 위에 약간의 죄의식을 얹은 채 이제 막 불륜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여자의 나른하고 복잡한 얼굴이 차체의 진동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유부녀. 그것도 남편의 별 볼일 없는 동창 녀석과, 아무리 미화시켜 본다 한들 결코 순수하다고 할 수 없는 섹스에 빠진 유부녀. 따지고 보면 모든 문학의 영원한 테마는 사랑이고 불륜이 아니었던가. 마담 보바리나 안나 까레리나 역시 불륜에 빠진 여자들이었다. 나는 미희와 함께 사랑이라는 저 도도한 역사의 주인공으로 일약 부상하는 듯한 환희에 젖었다. 만약에 그 여자가 내 아내였다면? 그러나 나는 심각해지는 것은 질색이었다. 섹스에 대해서 무관심한 아내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무엇보다도 아내 정연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만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는 건조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던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너무 행복해서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미세하게 눈꺼풀이 떨리고 있는 그녀는 무슨 생각에 골똘해 있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섹스처럼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몸으로 뒤얽혀 더 완전한 결합을 위해 몸부림치던 육체가 섹스가 끝나고 난 뒤에는 제각기 자기만의 고독 속에 빠져들고 만다. 그 고독이 싫어서 섹스는 계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른쪽 팔이 저려왔다. 자세를 조금 바꾸어 보려고 움직이자 그녀가 눈을 떴다. 나는 그녀의 어깨 밑에 깔려 있던 내 팔을 빼냈다.

오늘로 몇 번째죠?

그녀가 물었다.

몰라.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지?

있어요.

무슨?

회를 거듭할수록 죄의식이 깊어지니까.

어쨌든 우린 함께 있잖아.

죄의식 때문이에요.

그건 이상한 말인데?

사랑의 높이만큼 깊어지는 죄의식, 그런 죄의식으로 묶여진 관계.

미희가 지금껏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언제나 주저하면서 말꼬리를 흐릴 뿐이었는데. 나는 그런 그녀를 조금은 낯설게 바라보았다.

그뿐인가요? 더 많이 요구할 수도 없고 더 많이 줄 수도 없는 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관계. 마치 평균대 위의 체조 선수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 좋아하지?

뭘요?

섹스 말이오.

아, 섹스.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천장 위의 어느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그녀의 두 눈만이 생기를 띄며 빛나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 이후 있었던 부부 동반의 동창 모임이 떠올랐다. 물 좋은 사시미로 이름 나 있는 시내의 일식집. 다섯 쌍의 부부가 자리 잡은 테이블의 끄트머리에 진석이 있었다.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미희.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진석이 출현하자 동창 모임은 더 활기가 넘쳤다. 야, 진석아, 돈 벌어 뭐 하니? 한턱 쏴라. 돈은 거저 버는 줄 아니? 가정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게 지내고 있다. 현우 넌 뭐 잘났다고 혼자냐? 누군가 혼자 온 나를 걸고 넘어졌다. 내 마누라가 나 대신 돈 버느라고 못 왔다, 됐냐?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속에 미희는 조용히 술만 마셔 대고 있었다. 성공한 진석에게 달라붙는 동창 녀석들 보기도 그렇고 마침 요의도 느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은 이층에 있었다.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다 누고 변기 밸브를 누르는데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왔다. 미희였다. 미희는 나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시큼한 술 냄새가 그녀의 입안 가득 배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은 채 팔을 뻗어 화장실을 걸어 잠갔다.

여기서 이럼 어떡해?

나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죄의식. 그런 거만 갖지 않음 되잖아요.

미희는 혀가 약간 꼬부라진 발음으로 말했다.

그래도 여긴 너무 불안해.

그딴 거 무시해요.

그녀는 벨트 안으로 손을 넣어 내 페니스를 만지려 애를 썼다. 그때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 바지 안에 들어가 있는 그녀의 손을 재빨리 빼내고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숨을 죽이고 서 있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똑똑.

나는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진석이 아니기를 바랬다.

자, 자, 어서 내려가자구.

오늘로 세 번째예요.

그런가?

처음은 우발적, 두 번짼 처음의 뒷수습, 이번에는 뭐라고 할 거죠?

자, 나중에 얘기하지.

필연이 된 사…… 윽.

그녀가 토하는 바람에 그녀의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술만 마신 것인지 그녀가 게워 올리는 것은 노란 액체뿐이었다. 그녀는 엎드린 채 한참 동안 웩웩거렸다.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어느 틈에 진석이 옆에 와 있었다.

어이쿠, 이 여자가 왜 이러지? 현우야 미안하다.

다행히 진석에게 어떤 의심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는 진석이 곁에 머쓱하게 서 있다가 내려왔다.

그날 이후 미희는 변했다. 그러나 미희가 어느 쪽으로 변한 것인지 나는 종잡을 수 없었다. 어느 날은 만나자마자 내 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또 어느 날은 싸늘하고 냉담한 시선으로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가 감정과 윤리 사이에 가파른 널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그녀가 어느 한 극단으로 빠져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예컨대 감정의 절제를 잃을 정도로 내게 매달리거나 이제 와서 윤리를 내세우면서 부정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생긴다면 그 어느 쪽도 내게 유쾌할 리 없었으므로. 매순간 자기 앞에 놓인 시간에 충실하다면 무엇이 문제되겠는가 말이다.

그래요. 섹스는 좋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당신과도 좋지만…….

좋지만?

내가 되물었다.

남편과도 좋고.

미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예상했던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녀와의 관계가 지속되는 중에 만난 진석에게서 나는 한 번도 불안이라든가, 의심이라든가, 그런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진석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진석을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씁쓸했고 또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뭔가가 더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또……

또 뭐지?

남자들과의 섹스는 내게 다 좋아요.

남자 둘이요, 남자들이요?

나도 모르게 경어체가 나왔다. 젠장, 빌어먹을 경어체 같으니라고. 나는 그녀의 말에 긴장하고 있었다.

남자들이라니까요. 두 남자가 아니라 내가 아는 남자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눈꺼풀을 서너 번 깜박였다. 마치 모르겠어요? 하고 묻듯.

당신이 내게 가르쳐 주었잖아요.

내가? 

네. 첫 만남이 있던 날, 당신이 말했죠. 심각해지지 말자고, 지금 이 순간에만 충실하자고 말이에요. 당신은 늘 내게 그것을 상기시켰어요.

그건 당신이 남편과 아이들 걱정을 할까봐 한 말이었지 않소.

맞아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단 한 번의 외도로 가정이 붕괴되리라고 믿었던 어리숙하고 순진한 여자였으니까요.

그럼 지금은? 지금은 가정의 붕괴 따윈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요.

그럼 대체 뭐요?

내 목소리에 조바심이 묻어났다.

난 이미 멀리 나가 버렸어요. 멀리, 또 멀리.

그녀는 누운 채로 두 다리를 통통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두 다리 위에 진석과 나 이외의 다른 남자가 오르내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질투심이 솟구쳤다.

멀리? 쳇, 이 남자 저 남자 품으로 말이요?

빈정대지 말아요. 가정보다 더 소중한 게 있어요. 그건 바로 내 안에 있는 욕망이에요.

차라리 성욕이라고 하지.

나는 빈정거렸다.

좋아요. 한낱 성욕이라고 해도. 당신과 두 번째 만나던 날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성이 바깥으로 뛰쳐나온 거예요. 처음엔 죄의식을 느꼈죠. 그러나 그날 밤 남편과 섹스를 하면서 느꼈어요. 죄의식이란 한낱 과거의 불투명했던 의식의 그림자란 것을요.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넘쳤던 그날 밤을 잊지 못해요.

그녀의 눈동자는 추억에 젖듯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오래 전 일식집 화장실에서 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줄 알아요?

운명적인 사랑, 뭐 그런 말 아니었소?

비슷해요. 필연이 된 사랑. 그런 말을 하려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랑이라든지 뭐 그런 말들로 내 자신의 울타리를 삼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군.

그래요.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었어요. 당신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몸부림치는 욕망. 당신 품에 안겨서 또 다른 육체를 꿈꾸게 되는 욕망. 당신의 육체 위에 겹쳐지는 수많은 다른 남자들. 세상에 어떤 남자들이 있는 줄 아세요? 약혼 중에 있는 동생의 애인과 잠자리를 해서 파혼을 시켜 놓고 동생의 애인을 만나는 남자, 술만 마시면 한 번만 줘, 한 번만 줘, 하고 구걸하는 남자,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아서 하굣길의 열 살짜리 여자애의 치마를 힐끗거리는 남자, 간절히 원함에도 아내 외의 여자 앞에선 임포가 되고 마는 남자, 오래 전 임포가 된 자신의 성을 회복시켜 줄 단 하나의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채찍을 들고 있는 여자 앞에서만 섹스가 가능한 남자……. 당신과 섹스를 할 때면 나는 이 모든 남자들이 내게 다가오는 걸 느껴요.

한마디로 당신은 헤프게 된 거군.

헤프다. 뭐 그렇게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어떻죠?

나? 난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지.

사랑이라구요? 

그녀는 신랄한 어조로 되물었다.

물론 그 안엔 성욕도 있소. 그건 오로지 당신에게만 향하고 있는 거요.

고작해야 섹스에 무관심한 아내와 친구 부인 사이에서의 뻔한 줄타기잖아요. 당신 스스로는 아슬아슬한 균형 감각 어쩌고 하겠지만.

그녀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의 불안을, 나를 전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불안을 사랑이라는 말로 위장을 하곤 하죠.

끄응.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당신은 나를 당신의 집 안으로 끌어들였어요. 밤에는 지적인 부인과 낮에는 성적인 정부와……. 절묘한 이중생활에 대한 꿈.

그만! 그만 해.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내 품에서 잠시 퍼덕이다가 포르르 자신의 둥지를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그녀가 내 곁을 떠날 때 안개처럼 스며들던 불안. 사랑이든 사랑이 아니든 그 불안을 삶의 기운으로 간직하던 나날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둥지로 날아가는 새가 아니었다. 가시덤불을 헤매고 술집 처마를 드나들며 어두운 뒷골목 부랑자 틈을 기웃거리는 더러운 떠돌이새였다.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마지막으로 나는 물었다.

죄의식은? 당신이 아까 말했던 죄의식은 그럼 뭐였소?

그녀는 대답 대신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움.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당신 앞에 있으면 지난날의 내 모습이 되살아나니까요. 이 손가락처럼 죄의식에 떨고 있던 내 모습이요.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옷을 입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기 전 그녀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이미 뿌연 안개가 가득 차 있었다. 이 여자가 두어 시간 전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서 들어오던 바로 그 여자인가. 게다가 여자는 이제 거침없이 이 방을 나가고 있다. 현관문 걸쇠를 여는 소리, 꽝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는 이제 쿵쿵쿵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 말은 내가 늘 하던 말이었다.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었던 것도 같다.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또 아주 늙은 노파 같기도 한 그 얼굴은 어쩌면 둔기로 한방 맞은 듯한 내 의식이 만들어 낸 환영인지도 몰랐다. 내게는 여자의 얼굴 전체가 이제 막 떨어지려는 커다란 눈물방울처럼 보였다.

죄의식 따윈 추억으로나 간직하고 있는 여자. 나는 그 여자를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감정과 윤리 사이의 숨 막히는 갈등 속에서 그녀는 멀리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그 여자를 이제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밤거리, 윤락가, 정신병동, 혹은 기차 레일 위에 묻어나는 몇 점의 살점……. 더 이상은 상상하지 말기로 하자. 불현듯 진석이 불쌍해졌다. 그 녀석은 지금 아무것도 모른 채 돈 버는 일에만 온 정력을 쏟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진석의 전화는 피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게 무엇인가……. 눈앞에 신기루처럼 떠다니는 것은 먼지였다. 늦은 오후의 햇살에 비껴 먼지는 현미경의 피사체처럼 정밀하게 보였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나도 모르게 죽은 김광석의 노래가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먼지는 바로 나였다. 날아가는 먼지가 아니라 제자리에서 둥둥 떠 있는 먼지, 그게 나였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무력감이 엄습했다.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먼지만 한 무게로 허공에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사십대 중반의 배가 불룩하게 나온 사내가 허공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그러다 문득 베란다에 널다 만 빨래가 떠올랐고, 뒤이어 아내의 잔소리가 귓가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구석에 처박힌 팬티를 끄집어 낸 후 구멍 사이로 다리를 집어넣기 시작했다.《문장 웹진/200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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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오

히데오 서장원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저녁나절, 한적한 거리를 걷던 중에 히데오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줬다. 이후 히데오는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더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히데오의 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꿸 수 있게 됐다. 히데오가 태어난 곳은 교토 외곽으로,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지 교토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택가였다. 히데오는 그곳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습한 여름 날씨나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자기 기억인지 교토에 대해 보고 들은 뒤 상상해 낸 이미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곤 했다. 교토에서 있었던 일 중 히데오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나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 책상 가득 자이니치나 조센진, 총 같은 단어가 적혀 있던 풍경이나 동급생 남자애들이 그의 가방을 걷어차며 드리블 시합을 했던 일, 그를 조롱하려고 반 아이들이 케이팝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일, 그런 사건들. 한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히데오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나고야로 이주하는 일을 의논했다. 히데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나고야에서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히데오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데오가 아는 한, 히데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도 아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 거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날 밤, 히데오는 코의 통증과 식도로 넘어오는 피, 어머니의 고요한 얼굴과 나고야에서 보낼 새로운 나날의 환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히데오의 부모는 나고야행을 두고 갈팡질팡했고, 히데오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히데오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에서의 삶을 철저히 숨겼다.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첫 번째 이름 히데오를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히데오를 처음 본 건 연극원 강의실에서였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3월, 나와 히데오를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이 강의실에 책상을 둥글게 붙여 앉았다. 그해 연극원에서는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을 모아 15분 내외의 단막극, 일명 “짤막극”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신설했다. 입학 전에 그룹별로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3월 개강과 동시에 연극원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이색적인 신입생 환영회라 할 수 있었다. 학보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신입생 그룹 중 하나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해 들어 나에게 처음

  •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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