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과 미로
- 작성일 200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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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과 미로
이치은
1. 미궁(迷宮, Labyrinth)-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

내가 어느 순간 최고의 수학자들과 회계사들을 동원하여 미분방정식이라도 돌리지 않는 이상 찰나의 내 재산이 얼마인지 도저히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부자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부터 나는 더 많은 그리고 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사진가 G였다. G는 주로 건물을 찍는 사진가였는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판에 박힌 듯한 구도로 평범해 보이는 건물들을 찍었다. G와 알게 된 후 그의 사진전에 몇 차례 초대 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가끔은 더 엉뚱하고 더 유쾌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만 빼면 실은 썩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의 사진은 대체로 지루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사진 속에 사람들을 비롯해 움직이고 있는 사물들은 통 볼 수 없다는 공통점을 알아채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통 단조롭고 무의미해 보일 뿐이었다.
작년 가을 <부서진 도시들>이란 그다운 이름의 전시회에는 별로 사람들이 없었다. 단풍이 한창인 주말 오후라 사람들이 전시회 같은 데서 시간 낭비하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같이 시간이 펑펑 넘치는 사람도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하품을 참으면서 따분한 사진들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눈에 들어 온 사진이 있었다.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라는 기다란 제목이 붙어 있는 흑백 사진이었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윤곽이 흐릿하고 더러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뭉개진 검은 폐곡선이 그려진(혹은 인쇄된?) 사다리꼴 종이와(혹은 천과? 판대기와?) 그 밖엔 흰 여백과 검은 여백이 다인 이상한 사진이었다. 다시 보니 고대의 고누판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주 조그만 무늬를 확대해서 찍은 것 같기도 했다. 그거건 저거건 제목과 사진의 묘한 불일치가 눈에 띄었다.

“이 사진이 맘에 드나?”
나는 부자가 된 이후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느니 침묵을 지키는 게 낫다.
“자네도 알겠지만-물론 나는 몰랐다. 몰랐으므로 입을 닥치고 있었다-미궁엔 갈림길이 전혀 없지. 이른바 인간의 주된 죄악인 초조를 물리치고 끝까지 걸어갈 수만 있다면 미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네. 미궁은 그게 아무리 길다고 해도 끝까지 걸어가면 막다른 길이 나오지. 그걸 확인하고는 돌아왔던 길로 다시 걸어 나오면 되는 거야. 그게 다라네. 너무 간단하지. 비결치고는 너무 간단하지. 하지만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나는 그에게 내가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인지 물어보지 않았다-막다른 끝까지 가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고 착각하며 중간에 돌아 나오게 되는 거야. 그리고 십중팔구 돌아 나오다가 또 그 ‘초조’라는 죄악 때문에 또다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반대로 걷게 되는 거야. 그런 거라네. 인생은 미궁처럼 갈라지는 길도 교차점도 없는 외길인데, 그 위에서 우리들만이 진자처럼 우왕좌왕 떠돌다 생을 낭비하게 되는 거지. 거듭 말하지만 미궁은 갈림길이 전혀 없는 길이라네. 갈림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정확히 말하자면 초조 속에 있는 거라구, 미궁 속이 아니라.”
나는 뭐든지 대꾸를 하고 싶어졌다. 한 사람은 그저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만 하는 관계란 결코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으니.
“그게 무슨 상관이지,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라는 거창한 제목과는?”
나는 제목을 끝까지 암기하여 말할 수 있었던 내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가 사람들이 초조를 이겨내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뭘 어떻게 이긴다는 거지?”
“우리는 들어가고, 또 나온다네. 같은 길을 돌아 돌아 같은 구멍으로 말이지. 꿈에선 그게 돼.”
나는 꿈에 길이 있다는 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나로 말하자면 근 십 년간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자네의 설명이 맘에 드는구만. 이거 얼만가?”
내 침실 벽에 지금 이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붙어 있다. 예전 거기다 걸어 두었던 그림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 후로 죽 비워 두었던 바로 그 벽에 말이다.
내 잠 속에 길도 미궁도 막다른 골목도 또 초조도 없으니 사 놓고 걸어 두기라도 하는 수밖에.
2. 미로(迷路, Maze)-38,723개의 분기점이 있는 꿈으로부터 귀환한 천재적인 기억력의 건축가 태정
나와 내 친구들은 양쪽으로 깃발들이 잔뜩 달린 좁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3층 베란다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엔 여남은 명이 넘는 무리였는데, 새벽이 다가올 즈음엔 엄청나게 돈이 많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폴과 역시 돈이 많기는 하지만 돈보다는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더욱 유명한 괴짜 건축가인 태정, 그리고 둘과 달리 항상 돈이 궁한 나, 그렇게 셋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람은 시원했고, 우리들은 새벽까지 위스키와 맥주를 마셨지만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좁은 거리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또 껑충껑충 뜀박질을 하며 떼를 지어 다양한 방식으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폴이 문득 이렇게 말했다.
“꿈엔 갈림길이 없어. 우리는 들어갔던 길로 나오게 되지.”
한동안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도시의 명물인 연푸른색 비둘기가 녹이 슨 금속 난간 위를 곡예라도 하는 것처럼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들어갔던 길로 다시 나온다는 게 무슨 말이지?”
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한참 후에 그렇게 물었다. 거리 아래쪽에서 하늘을 향해 쏘아지는 조명 덕분에 폴의 얼굴은 한결 홀쭉해 보였다.
“입구도 현실이고 출구도 현실이란 말이야. 일단 꿈으로 들어가면 거기엔 어떤 갈림길도 없단 말이지.”
“누가 자네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은 거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태정이 난데없는 기습을 받아 비명을 지르는 꼬마 인디언처럼 입을 열었다. 비명의 꼬리가 채 사라지기 전, 나는 머릿속 작은 칠판에 다음과 같은 단어의 연쇄를 낙서했다.

“사진가 G가 내게 했던 말이라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겐 멋진 말을 만들어 내는 재주는 없다네. 단, 그게 쓸 만한 말인지 아닌지 맛은 좀 볼 줄은 알지. 나는 G의 말이 마음에 들어 <꿈의 정원>이라는 그의 사진을 한 장 샀지. 할 수 없었다네, 나는 꿈을 꾸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으니까.”
나는 사진가 G의 사진들이 얼마나 비싼 값에 팔리는지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단지 사진가의 말이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신이 꿈을 꾸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G의 사진을 샀다는 폴이 부러웠다. 물론 난 사진가의 말들이란 고사상 죽은 돼지 입에 꽂는 돈처럼 불필요할 뿐더러 추악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폴처럼 부자가 된다면 그 모든 걸 용서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네 말처럼 꿈엔 갈림길이 없어, 꿈을 꾼 사람이 만들기 전까진 말이지.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나면 꿈에서 빠져나가기 전까지 그 갈림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네.”
한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태정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계속 또박또박 말했다.
“어쨌건 자네가 사진가 G에게서 그런 생각을 들었다니 정말 다행이네. 혹시라도 미로가 시간으로 조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기꾼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자네들에게 꿈속에 갈림길이 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 거야.”
“그 얘기는…….”
내 말의 허리가 다시 태정에 의해 싹둑 베였다. 나는 다시 머릿속 작은 칠판에 낙서를 했다.

“꿈속에 다른 공간들을 이어 주는 갈림길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야. 시간적인 갈림길이 아니라.”
“그렇다면 가역적이라는 건가?”
폴이 대화에서 빠지지 않겠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질문을 마친 폴은 들고 있던 물방울이 잔뜩 맺힌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나를 은밀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콧등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폴은 내게 태정의 이야기에 뭐 그리 특별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폴 역시 틀림없이 그 꿈속의 갈림길이라는 태정의 이야기에 홀랑 빠져 있었다.
“좋은 지적이야. 늘 그렇지만 폴 자네는 이야기의 앞길을 짚어 내는 혹은 망치는 묘한 재주가 있어. 그래, 맞네. 돌아올 수도 있어, 그리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 갈림길을 만든다는 거지? 꿈속으로 삽이나 뭐 포클레인이라도 가지고 들어간다는 말인가?”
나는 꿈속에 세워진 벽을 곡괭이로 파는 상상을 하며 담배를 깨물었다. 파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견고한 새벽하늘의 성곽을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낙서 하나가 머릿속에 다시.

“재미없는 농담 같으니라구. 내 힌트를 주지. 똑같은 방식이야, 첫 번째 꿈으로 들어가는 방식과. 이치은, 자네는 정말 모르겠나?”
“나는 알겠네.”
폴은 애써 자랑스러움을 숨기려 들지 않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보았다, 회색 수염으로 덮여 있는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리는 걸. 폴의 우쭐대는 미소를 얼마나 자주 봐 왔던지.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폴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구.
“그러니까, 자네 말은 꿈에서 또 잠을 잔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해서 또 다른 꿈으로 넘어간다?”
“빙고”
태정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또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르자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는 곡예를 되풀이하던 비둘기가 새벽의 청회색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게 가능해? 꿈에서 또 꿈을 꾼다는 게?”
“연습을 하면 되네. 처음엔 쉽지 않지 물론. 꿈이라는 공간은 어차피 누구에게나 낯선 곳일 수밖에 없거든. 그런 곳에서 입맛에 딱 맞는 잠자리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폴에겐 불가능한 일이겠군, 그래.”
나는 자신의 집이나 5성급 호텔이 아니면 여간해서 잠을 자려 하지 않는 폴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폴이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다 잠든 새벽에 홀로 내 서재의 책상머리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책을 읽던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다.
“난 어차피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자자자, 싸우지들 말고 내 얘길 들어 보라구. 그러니까 이런 식이란 말이야. 첫 번째 꿈에 도착하면 꿈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조용한 곳을 찾아 거기서 다시 억지로 잠을 자는 거야. 거위 털 이불이나 침대보를 방금 간 퀸 사이즈의 침대가 없다고 해서 불평해서는 안 되네. 잠이 오지 않으면 첫 번째 꿈속 마을을 전속력으로 한 바퀴 달려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도 좋구 말이야.”
나는 점점 태정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이 자리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자마자 태정의 말대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잠이 들고 또 꿈을 꾸게 되면, 꿈 A에서 꿈 B로 넘어가는 거지.”
“거기서 질문 두 개.”
폴이 기묘한 각도로 휘어진 것처럼 보이던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도, 나조차도 내 웃음에 주목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그걸 어떻게 갈림길, 아니 분기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단지 꿈 A에서 꿈 B로 넘어가는 일종의 도약대일 뿐이잖아. 그리고 두 번째…….”
“자네가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다면, 첫 번째 질문부터 먼저 답을 하고 싶은데…….”
태정은 웨이터를 불러 똑같은 맥주를 세 병 더 갖다 달라고 했다, 죄 손짓으로만 말이다. 나는 태정의 그 세련된 손동작을 보면서 다시 낙서를 해보았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그걸로 끝이라면 다이빙의 스프링보드와 다를 게 없지. 하지만 분기점을 만들, 그러니까 꿈속에 미로를 설치할 방법이 있다네. 가령 꿈 B 속에 분기점을 설치하고 싶다면, 꿈 B에서 다시 꿈을 꾸어 꿈 C로 넘어가는 거야. 그런 후에 곧바로 다시 꿈 B로 돌아온다네. 그리고…….”
“아니, 잠깐, 미안하지만 그게 바로 내 두 번째 질문이라네. 자네는 꿈에서의 이동이 가역적이라고 했었잖나. 그래 대체 어떻게 돌아온다는 거지?”
나는 거의 끼어들 틈이 없었지만 뭐 딱히 소외당한다는 기분은 아니었다. 내게는 폴과 태정이 볼 수 없는 작은 칠판이 있었으니.
“아차, 그 설명을 하지 않았군. 내가 그 분기점들이 모두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꿈 C에 도착한 그 장소에서 다시 잠을 자고 꿈을 꾸면 꿈 B로 돌아올 수 있다네.”
“그럼, 만약 꿈 C에서 자신이 그 꿈으로 들어온 바로 그 장소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잠을 자면 이번엔 꿈 D로 가는 거고?”
“맞아. 자네 같은 학생만 있었다면 선생질을 그리 빨리 때려치우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나는 새 맥주를 따서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번엔 좀 새로운 형식의 그림이 필요했다.

“좋아, 다시 앞으로 돌아가지. 꿈 B에 도착한 후 꿈으로 도착하게 된 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꿈을 꾸어 꿈 C로 들어간 후,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다시 꿈 B로 돌아온다네, 여기까지는 아까 했지? 그래, 그 다음에, 이제 자네들도 알겠지만…….”
태정은 마치 내가 그의 말을 잘 듣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착한 학생이라는 증거로 그에게 맥주병을 들어 보였다.
“다른 장소에서 잠을 자는 거야. 그러면 이번엔 꿈 C’가 생겨나는 거지. 이제 꿈 B가 분기점이 되는 거지.”
이젠 거의 자동이었다.

다시 폴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이론상으로는 꿈속의 갈림길이 꼭 두 갈래의 갈림길일 필요는 없겠군 그래. 여러 가지 꿈을 꿀 수만 있다면 C’뿐만 아니라, C’’, C’’’, C’’’’, C’’’’’ 그런 식으로 무한한 개수의 갈림길이 있는 분기점을 만들 수도 있겠는데.”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역시 폴이야,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꿈속 흑판을 지우고 고쳐 썼다.

그때 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 보겠네.”
“왜 그러지? 한 시간 정도만 있으면 싱싱한 홍합을 아침으로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문을 열 텐데. 밥을 먹고 가지 그러나.”
“아니, 사진가 G를 찾아가서 자네 얘기를 들려줘야겠어. 나는 꿈을 못 꾸니까, 그에게 자네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근사한 사진을 하나 찍어 달라고 해야겠네. 아 재미있는 얘기 즐거웠네. 답례로 계산은 내가 하지.”
폴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언젠가부터 머릿속에서 자라나던 물음표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폴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자넨 내가 내 꿈속에 분기점을 몇 개까지 만들어 봤을 것 같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작 중요한 건…….’
“분명히 깜짝 놀랄 거야, 자넨. 하나의 꿈에 자그마치 32,837개의 분기점을 만들었다구.”
마치 태정의 말이 망치가 되어 내 머릿속 얇은 얼음판을 쾅하고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잔금들이, 수많은 분기점을 만들며 잔금들이 한 점으로부터 벋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구 태정 자네는 오늘 여기에 와 있는 거구. 32,873개의 분기점들이 있는 꿈속이 아니라.”
“그래, 그게 뭐 잘못 되었나? 자네 표정을 보니 마치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가 자네를 기억의 천재라고 부르는 거구…… 자네는 꿈들 간의 통로가 가역적이라고 했지만 그건 어쨌거나 개별 통로에 대한 얘기구…… 결국 현실로 돌아오려면…… 자네의 이론대로라면 첫 번째 꿈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나? 하지만 폴은…….”
“내 친구, 아니 우리 친구 폴은 괜찮네. 자네도 들었잖는가? 폴은 꿈을 꾸지 않는다네.”
날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밝아오고 있었다. 청색이 폭발하듯 빨리 백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도로 털썩 앉았다. 나는 예전에 사진가 G가 자신의 전시회에 걸었던 사진들 중 몇 점이 태정이 설계한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났던 불유쾌한 소동도. 태정은 사진가 G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이 설계한 작품을 모독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또 전시한다며 공개적인 장소에서 분노를 폭발시키곤 했다. 술이 취해서는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쳤고,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건물을 찍은 G의 사진들을 폐기해 버리도록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내 건물을 저 따위 저질 사진사의 카메라 파인더에 강탈당하는 걸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단 말이야. 뭐든 하지 않고는 안 되겠어.’ 하지만 태정은 사진가 G의 전시회에 내걸린 자신의 건축물 사진들을 끌어내릴 법적인 이유를 찾아낼 만큼 수완이 있는 변호사를 끝끝내 만나지 못했다고 나는 들었다.
“하지만 사진가 G는……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거야, 꿈속에서 말이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라니? G가 영원히 현실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구.”
“그렇게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는 없네. 꿈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꿈속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만나 거기서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현실의 시간으로 전환하면 0.1초밖에 걸리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0.1초짜리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꿈 따위는 꾸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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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신종원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На дне)』의 주연 인물 루카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번호 1번은 작가가 1970년대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던 타지크인 유랑 극단 소속 무대 미술가로 근무하던 시절 처음 제작한 연극 인형이다. 작품 활동 후기에 만들어진 인형들이 책장을 넘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은 물론 짧은 거리의 보행 기능까지 수행했던 반면, 루카는 그 자신의 하중마저 오롯이 떠받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앙아시아학회 김정훈 교수는 회고전 기념 비평문에서 보조 지지대 없이는 잠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이 인형의 원본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슬라브족 순례자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 성 루가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의 타계 이후 수집된 경력 초기 작업 노트들에서 복음서 속 의료 기록들을 전사한 문구가 몇몇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각재를 마름질하고 합성수지를 꿰매어 붙이는 과정이 전부인 기초 목공 기법을 영적 외과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천 번의 조각과 천 번의 봉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형의 눈구멍을 파내고 팔다리를 끼워 맞추는 행위와 생명이 떠난 몸에 다시 한번 ―또는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는 행위 사이에 도상학적으로 상응하는 궤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기체 상태의 영혼이 별안간 붙잡혀 숨통 깊숙이 하강할 때, 좁고 어두운 기도에 울려 퍼지는 연식음은 어떤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형성하는가? 몸은 시시때때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나선형 회전체를 가두어 두기 위해 설계된 파라볼로이드 모양의 감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브람체보의 특산 공예품이자 텅 빈 통으로서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어떻게 인체를 조롱하는지 상기하라. 1970년대 후반, 연방의 중앙기관에 고용된 이후 주문 생산된 작품들이 공산 혁명식 테일러리즘의 입김 아래 무거운 덩어리와 앙상한 구동부만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루카는 원본 인물을 존중하려는 조형적 표현으로서 삭풍에 일그러진 주름 하나하나를 실리콘 피부 위에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루카는 작가가 일생 동안 폐기하지 않은 하나뿐인 인형으로서, 작품 목록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품 관리인의 주기가 남아 있었다. 이어지는 괄호 안의 문장이다. (수탁자는 표제를 혼용하거나 임의로 변형하는 등의 오기입으로 보존 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전 수탁자들도 작품 번호 1번의 이름이 루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전고 168센티미터, 전폭 52센티미터, 중량 24.5킬로그램 규격의 전신 인체상 및 부속 요소로 구성된다. 작품을 설치할 때는 상체를 전방으로 약 15도가량 숙여야 하며, 양손 관절 내부의 철사들을 지팡이 머리에 고정시켜 노화된 본체 프레임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한다. 지팡이는 조형물 본체와 일체형으로 결착되어 있으므로, 무리하게 힘을 주어 뽑
- 신종원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완벽한 이야기완벽한 이야기 박진호 푹푹 찌는 날씨 탓에 간이 화장실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가 더 지독했다. 화장실 옆 연병장 구석에는 이미 본부 인원 사십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행보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대 전 인원을 집합시킨 걸 보면 또 무슨 심기가 꼬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빠릿하지 못한 이등병 소리를 들을까 싶어 티 나지 않게 슬쩍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위병소에서는 아침마다 식당의 잔반을 수거해 가는 트랙터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잔반통의 누린내를 맡은 건지 아니면 이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 건지 청산이와 계백이가 군견 철장 안에서 짖어 댔다. “범인은 알아서 튀어나와.” 행보관이 손가락으로 간이 화장실 옆을 지나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가리켰다. 거기엔 손바닥 크기만 한 거뭇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덫에 걸린 쥐나 두더지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표면이 몸을 뒤틀 때마다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행보관이 팔을 한 번 휘젓자 유려하게 움직이던 덩어리가 일시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수십의 파리 떼에 엉겨 있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작게 욕이 터져 나왔다. 모양이며 크기며 주위에 널브러진 휴지 조각이며 그건 누가 봐도 사람의 똥이었다. 날아올랐던 파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쳤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배수로는 깨끗했으니 모두가 잠든 밤사이 누군가 싸지른 게 틀림없었다. “안 나오면 오전 내내 전부 군장 메고 연병장 뺑뺑이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와.” 7월 한여름, 그것도 일요일 오전부터 군장을 돌고 나면 오늘은 물론이고 다음 주 내내 근육통과 몸살로 고생할 게 뻔했다. 하필 오늘따라 주간 근무도 잡혀 있지 않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다들 정체 모를 범인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켕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도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부대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후로 언젠가는 터질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은 우리 부대를 지방 도시의 작은 초등학교 정도로 오해하곤 했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도시였고 인근 기차역에서 렌터카를 빌려 해수욕장을 검색하면 서너 번째 추천 경로로 부대 근처 비포장도로가 뜬다고 했다. 호기심에 후순위 경로를 택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길을 헤매다 부대로 연결되는 막다른 길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시골 학교의 정취에 취해 담장 너머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이를 저지하는 게 위병소 앞을 지키는 경계 근무자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옆으로는 논과 슬레이트 지붕을 덧씌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부대였다. 철망을 얹은 담장 안에 연병장과 2층짜리 적갈색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골의 작은 분교로 착각할 만했다. 외부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 대대에 있는 오십여 명 모두는 해안 초소에 파견 나간 다른 중대들을 지원하는 행정병들이었으므로 가끔은 군
- 박진호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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