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는 맛있다
- 작성일 2008-11-28
- 댓글수 0
장호는 맛있다
한차현
1차
2008년 9월 5일 금요일. 오늘은 술 먹는 날이다. 시인 박장호가 첫 시집을 냈다. 홍대 69호프에서 6시 반에 모이기로 했고 시간 많은 한따가 홍대역 4번 출구에 도착한 것은 5시 56분. 69에 먼저 가 있을까, 가서 맥주 한 잔 할까, 고민하다가 근처 출판사의 소설가 김도언에게 전화했다. 일찍 나올 수 있냐? 그랬더니 10분까지 나간다고 조금만 기다리란다. 그 편이 낫겠다. 필경은 밤새 마실 술 먼저 시작해서 나쁠 게 없었지만 그러다가 별로 안 친한 시인 소설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건 좀 껄끄럽다. 한따야 상관없지만 그들이 한따를 얼마나 시간 많은 놈으로 생각할까.

그런데 10분까지 오겠다던 도언이 오지 않는다. 15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여전히. 더 참지 못해 도언에게 전화 걸었다. 막 컴퓨터 끄고 나오다가 팀장에게 붙들리고 말았단다. 조금만 기다려 달란다. 망할 놈의 편집장이 어떻게 팀장에게 붙들리냐. 전화를 끊고는 4번 출구 안쪽 골목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혼자 69호프 입장. 넓은 술집은 아직 텅 비었다. 오픈 준비를 하던 직원들이 예약된 자리로 한따를 안내한다. 5백 한 잔을 수줍게 주문했다. 그날의 첫 술을 막 입에 가져가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신동옥이다. 한따를 보더니 멀뚱멀뚱 아는 체도 않고 다가와 빈자리에 가방부터 던진다. 개새끼.
“1등이네요.”
동옥은 시인이다. 장호와 함께 인스턴트 시동인이다. 한따가 알기로 둘은 일주일에 다섯 번 만나 술 먹는다. 술 먹은 한따가 둘 중 한 새끼에게 전화를 걸면 술에 기절해 전화를 못 받거나 둘이 붙어 술 싸움을 벌이거나 중의 하나다. 그렇게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은 늘 티격태격 서로의 인생을 안쓰러워한다. 동옥과 5백 한 잔씩을 다 비울 즈음 도언이, 뒤따라 오늘의 주인공 장호가 들어섰다.
“왔어요 형.”
“축하한다, 좋으냐?”
“좋긴요.”
자리에 앉은 장호가 가방 열고 새로 나온 시집들을 꺼낸다. 제법 익숙하게 펜을 꺼내고 표지를 젖혀 누르고 사인을 휘갈긴다. 칙칙한 술자리에 모여, 잉크 냄새도 가시지 않은 시집 소설책을 영수증 처리도 하지 않고 주고받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어쨌거나 첫 책 나온 시인에게 좋으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슬픈 인사다. 뭘 모르는 인사다. 한따 줄 책에 사인하던 장호가 어, 틀렸다, 중얼거린다. 머쓱하게 웃으며 시집을 건넨다. 한차현 형에게,라고 써야 하는데 ‘현’자가 아니라 ‘형’자를 먼저 쓴 모양이다. ‘형’의 ㅇ받침 위에 진하게 ㄴ받침이 덧칠해졌다. 나쁜 새끼. 안 읽을까 보다. 주인공이 왔으니 안주를 시킨다. 소주도 시킨다. 소주잔은 하나면 된다. 오늘은 장호의 첫 시집 출간 기념 모임. 토할 때까지 마시고 또 마시자. 소주병이 나타나자 애들이 일부 반기고 일부 질겁한다. 폭탄주 시작. 맥주잔에 맥주 7홉을 따르고 소주잔에 소주를 2/3 따라 맥주잔에 붓는다. 이놈을 오늘 몇 잔이나 마실 수 있을까? 소맥 한 잔에 기분이 짝 좋아지는데 안이 왔다. 안이 밖에서 안으로 왔다. 안과 함께 안이 일하는 《현대시》 편집장 이재훈 시인도 같이 왔다. 시인 김안 역시 인스턴트 동인이다. 안을 볼 때마다 한따는 안의 첫인상이 떠오른다. 안은, 중학교 때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노상 교실 맨 앞자리를 지키는 키 작은 아이 같다. 공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그 존재감은 청소도구함의 부러진 대걸레 자루만 못한, 담임선생이 학기 끝날 때까지 이름도 못 외우는, 가끔 뒷자리 키 큰 아이들에게 돈을 뜯기고 자지를 내보이며 험한 문교부 생활을 연명하는. 시인 김안. 정성들여 포장한 선물을 장호에게 내민다. 장호는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데 한따는 낯간지럽다. 시인 새끼들은 시집 나오면 여고생들처럼 선물을 주고받누나. 시인 김요일 선배가 왔다. 선물 포장을 만지작거리는 장호를 보고 요일이 인사한다.
“장호 오랜만이네. 여기 선물이다.”
선물은 같이 온 시인 정병근 선배이다. 시인 소설가들이 헤헤 웃는다. 아, 축구 시작했다. 축구 국가 대표 평가전이 있는 날이다. 월드컵 최종 예선 1차전 북한을 대비한 상대는 요르단. 그걸 못 보는 줄 알고 한따는 애가 탔었다. 핸드폰 DMB로 시청하리라, 그럴 요량으로 보조 배터리까지 가져왔었다. 그런데 시간 되니 가게에서 프로젝션 빔을 쏴 준다. 브라보다. 킥오프. 전반전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한따의 시간은 외따로 흐른다. 물론 술은 마신다. 여기저기서 술잔이 부딪힌다. 철컥철컥. 한 잔을 마시면 저쪽에서 건배하자고 잔을 불쑥 내민다. 그걸 한 모금 넘기면 이쪽에서 오프사이드를 피해 측면으로 날카롭게 술잔을 찔러 준다. 잔을 향해 달린다. 힘차게 달린다. 비우고 따른다. 비워지고 채워진다. 맥주 7부에 소주 2/3잔. 이제 조금 취한다. 안주 접시가 절묘한 공간 패스로 이어지고, 그러다가 아깝게 라인 밖으로 벗어난다. 대형 스크린 속, 회심의 슛이 골문 위로 날아갈 때마다 아프게 몸을 뒤트는 새끼는 단 하나 한따뿐이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니?”
앞에 앉은 요일이 다정히 묻는다.
“1 대 0이요. 이청용이 헤딩슛 한 골 넣은 거.”
“애들 잘하냐?”
“오늘은 조직력이 괜찮은 거 같은데요.”
“표정으로 중계 좀 해줄래? 심심하다.”
요일이 앉은 자리에서는 등 뒤 대형 스크린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게요.”
이후 한따는 미드필드에서 필요 없는 백패스가 나왔을 때, 수비 실수로 실점 위기를 맞았을 때, 상대편 문전에 좋은 크로스가 들어갔을 때, 어김없는 똥볼로 골 찬스를 놓쳤을 때, 그 분노 그 불안 그 희열 그 울화를 얼굴 위에 제대로 재현했다. 시키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었다. 어느새 전반전 35분. 혼자 미친놈처럼 얼굴 생중계에 몰두하다 힐끔 보니 요일은 생각에 잠겨 있다. 피곤한 얼굴이다. 얼마 전 그는 몸 안의 큰 병을 발견했다. 위암. 아직 치료 중이다. 이렇게 외출한 걸 보면 많이 아프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닌가? 미안한 말이지만 남의 아픔을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선배, 요새 술 많이 드세요?”
“응, 그냥.”
“마셔도 되요?”
“그냥 뭐.”
“제 말은, 그래도 되는 거냐구요.”
“안 되지.”
병근이 취했다. 많이 취했다. 여기 오기 전까지 이틀째 음주 중이라고 했다. 갑자기 사회를 보기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의 시선을 한데 모으더니, 장내 마이크를 잡은 양, 극적인 멘트를 날린다.
여러부운, 박자앙호오를 소개합니다아!
사람들은 별 반응 없다. 장호만이 히죽 웃는다. 병근이 다시 외친다. 온몸을 쥐어짜며 격렬히. 목에 굵은 핏줄이 불거진다.
여기이, 박자앙호오를 소개합니다아!
뼈와 살을 붙이자면 “신사숙녀 여러분,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시인. 첫 시집 『나는 맛있다』로 혜성같이 등장한 신예 가수 아닌 시인 박장호를 소개합니다. 열렬한 박수 부탁합니다!” 정도일 것이다. 열렬한 박수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전반전이 끝났다. 1 대 0. 그러고 보니 69호프는 출간 기념 모임의 명소다. 작년 11월 김태용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때도 여기서 모였다. 지난 2월 신동옥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때도 여기였다. 그날 김도언의 첫 장편소설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가 마침 제본소에서 나왔기에 슬그머니 얹혀 가기도 했다. 6월에 한따 소설집―제목은 길어서 생략한다― 때도 여기서 술 먹었다. 빌어먹을. 왜 늘 여기서? 값도 안 싸고 안주도 맛없는데, 대소 연회 홀도 완비되지 않았고 편리한 서비스 넓은 주차장도 없는데, 어째서? 때론 아무 이유 없는 게 이유가 되고 전통이 된다. 후반전 시작했다. 그새 사람들이 많아졌다. 청주에서 시인 함기석 선배도 왔다. 『나는 맛있다』 작품 해설을 써준 시인 박상수도 왔다 (그러고 보니 그는 몇 해 전 첫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를 한따에게 우편으로 보내 준 친구다). 시인 이민하 선배도 왔다. 인스턴트의 유일무이 남류 아닌 여류 시인 강성은도 왔다. 성은이 사온 축하 케이크가 지금 준비 중이다. 초가 꽂히고 불이 켜지고 핸드폰 사진기가 여기저기서 찰칵거린다. 장호가 술김을 후우, 뱉어 촛불을 끈다. 사람들이 박수친다. 이편에서는 시인 소설가들이 열띤 토론 중이다. 시집이 몇 권 팔리면 시집 낸 출판사가 손해를 보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이다. 3천부? 5천부? 소설의 경우는 어떨까. 소설책은 시집보다 3∼4천 원 비싸니까. 하지만 제작비도 그만큼 많이 들어갈 테니까. 아니, 그렇다면 소설처럼 두껍고 가격은 시집 그대로인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씨발주가 만들어진다. 동옥 첫 시집 나왔을 때도 한따 소설집 나왔을 때도 씨발주가 제조됐었다. 맥주 3천CC 안에 일단 소주 한 병을 통째로 처박는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아무거나, 방울토마토건 마른 오징어건 파슬리건 소시지 조각이건 마요네즈건 집어넣고 정성껏 섞어 주면 된다. 한 번 마시면 씨발 소리가 나오려다 들어가는 더러운 술을 동옥도 한따도 주인공이란 이유로 한 잔 가득 마셔야 했다. 오예! 씨발주 만드는 장면에 누군가 신난다고 소리친다. 장호다. 어느새 저렇게 취했나. 옆에 가지 말아야지. 축구 전후반 경기가 모두 끝났다. 1:0 승리. 자, 나가자. 우리 2차 가자. 다들 우르르 일어선다.
2차
2차 자리가 바로 길 건너 골목 안에 잡혔다. 새로 생긴 술집이다. 페인트칠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실내는 지나치게 깔끔하고 조명 환하다. 그게 외려 문제다. 환한 데서 보니 벌겋게 눈 풀리지 않은 작자가 없다. 보통 2차가 시작될 즈음, 세상의 글쟁이들은 이렇게들 취한다. 한따는 항상 궁금한 게 그럼에도 모임마다 2차 아니라 3차 4차에 5차 6차까지 늘 엿가락처럼 이어지는 끈기다. 어디서 나오는 체력일까? 우르르 둘러앉아 술을 주문하고 안주를 주문하고 재떨이를 주문한다. 젖은 솔가지를 태운 듯 삽시간에 연기 자욱해진다. 라면집이건 술자리건 찻집이건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쉬지도 않고 담배를 빨아대는 이들이 시인이다. 담배 끊으라는 말은 잠꼬대로도 주고받지 않는 이들이 시인이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모두 잔을 채워 주세요. 어라, 성은 누나 술 없네? 빨리 건배! 자아, 모두 건배!”
급기야 장호가 사회를 보기 시작한다. 빈 소주병을 마이크 삼아 들고, 고개를 까닥까닥 엉덩이를 씰룩씰룩 미소를 싱글벙글 그렇게 좌중을 부추긴다. 기분 좋은 모양이다. 아까 씨발주를 단숨에 원샷 했었지. 한따가 술을 말았다. 맥주 채운 맥주잔 안에 소주 채운 소주잔을 꼴까닥 집어넣는 폭탄주를.
“마셔라.”
그리고는 옆자리 문식에게 제일 먼저 권했다. 문식이 놀란다.
“뭐야 이거?”
“빨리 마시고 잔 줘. 돌아야지.”
폭탄주 릴레이가 시작되었다고 사람들이 술렁인다. 문식은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소주잔 빠진 맥주잔을 받아들고는 잠시 호흡을 조절한다. 출발점에 서서 기록 갱신을 꿈꾸는 멀리뛰기 선수처럼. 그리고는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잔을 비운다. 맥주잔 안의 소주잔이 딸그락 소리를 낸다. 박수가 쏟아진다. 한따가 부지런히 두 번째 잔을 말았다. 소맥의 장점은 무엇보다 소주보다 맥주보다 맛이 좋다는 것. 맛이 그렇게 좋아서 안주가, 소주 한 잔을 마셔도 맥주 한 잔을 들이켜도 손이 심심해 찾게 되는 안주가 필요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 자리가 줄창 망가지는 사이 새로운 손님이 왔다. 평론가 김지선이다. 지선이 앉은 자리가 마침 네 번째 폭탄주가 지나가는 자리였다. 네 번째 폭탄을 제조한 한따가 무심코 그 자리에 잔을 디밀었다. 소맥잔을 받은 지선이 난감한 얼굴이다.
“죄송하지만 술을 못해서요.”
처음 보는 이에게 폭탄주를 강권할 만큼 나쁜 한따가 아니다. 아니다 아직 그만큼은 취하지 않았다. 퇴주잔을 옆자리에 넘길 수야 없지. 새 소주잔 새 맥주잔을 수배해서 다시 부지런히 폭탄주를 만다. 다음 차례는 박성근이다. 질세라 꿀꺽 꿀꺽 잔을 비우는 성근. 장하구나. 빨리 돌고 진하게 한 잔 더 말아 줄게. 지선이 사 들고 온 케이크를 펼친다. 장호는 복도 많지 두 번째 축하 케이크다. 이번엔 초코크림이구나. 빈 종이상자에 케이크 올리고 초 꽂고 불붙일 성냥 라이터를 찾다가,
“어머나.” 사고가 났다. 누가 지선 옆자리의 폭탄주를 쓰러뜨린 것이다. 식탁 위에 소맥이 왈칵 쏟아져 흐르다가 그녀의 치마를 적신다. 모두 나서 잔을 치우고 흘린 술을 쓸어 담고 휴지를 건네고 상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다행히 케이크는 젖지 않았다. 한따가 괜히 미안했다. 술 아까워라. 드디어 안주가 나왔다. 돼지고기 보쌈이다. 술자리가 일순 번잡해진다. 취한 장호가 쌈을 싼다. 쌈을 싸서 사람들 입에 처넣는다. 상추 깻잎에 편육 마늘 된장 깍두기를 우겨 넣은 쌈이다. 한따가 부지런히 소맥을 말아 사람들에게 돌리면 장호가 뒤따라 쌈을 싸서 폭탄 마신 자의 입에 집어넣는다. 말고 싸고 말고 싸고. 요일이, 도언이, 기석이, 성은이, 동옥이, 마지못해 슬픈 얼굴들로 거기 응한다. 소맥 폭탄이 그렇게 한 바퀴 돌았다.
“수고 많았어 형. 내가 한 잔 타 줄게.”
옆자리 문식이 콸콸 소맥을 섞는다.
“나 아까 마셨는데.”
환멸 오른 도언이 으르렁거린다.
“지랄 말고 마셔.”
“그럼 한 바퀴 더 도는 거?”
한따가 벌컥벌컥 술 마신다. 으윽. 문식이 개새끼, 소주를 얼마나 넣은 거야. 이건 소맥이 아니라 소소맥이잖아. 빈 잔 내던지고 미간을 찌푸리는데 입 안에 뭐가 퍽 들어온다. 장호의 쌈이다. 빌어먹을. 소맥은 안주 없어도 되는데. 입 안에 쌈이 가득 찼다. 이 새끼가 복숭아씨만한 깍두기를 두 개나 넣었다. 한 입 씹는데 깍두기 국물이 입가에 잘잘 흐른다. 왕 깍두기 두 개라니 너무하네, 고기는 넣었니? 입 안의 주체 못할 부피에 어물거리는 사이 문식이 열심히 소맥 폭탄을 만다. 장호도 열심히 쌈을 싼다. 말고 싸고 마시고 씹고. 취한 장호가 식탁 위로 상체를 뻗어 상추를 집다가 다시 사고가 났다. 케이크 접시를 전달하던 누군가의 손을 툭, 건드리면서 말이다. 허공에 붕 떴던 접시가 엎어지고 케이크가 누군가의 허벅지에 철퍽 내려앉는다.
“어머나!”
울상이 된 것은 또 지선이다. 까만 치마가 케이크로 엉망이다. 사람들이 다시 휴지를 건네고 식탁을 정리하고 깨진 접시를 치우느라 바빠진다. 술 한 잔 못 마시고 내내 수난이라니. 한따가 다시 미안해진다. 고개 숙인 지선이 시무룩이 중얼거린다.
“아아, 나 오늘 왜 이래 정말.”
그러자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고 한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참느라 진땀이 났다. 구석자리에서 졸던 병근이 벌떡 일어섰다.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다. 그리고는 온몸을 쥐어짜며 격정적으로 외친다.
여러부운, 박장호오를 소개합니다아!
바지주머니가 부르르 떨린다. 한따가 전화기를 꺼냈다. 소설가 김태용에게서 온 전화다. 술 약속 있으면 초반에는 도통 나타나지 않다가, 자리가 한창 무르익다 시어 꼬부라질 때쯤 다른 데서 잔뜩 마시고 슬그머니 찾아오는 게 태용의 주특기다. 어디서 누구와 그렇게 술 마실 일이 있는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도 예외 없이 모교 문창과 행사가 일산 어디서 있는데 빠질 수 없는 자리지만 늦어도 11시까지는 오겠다고 미리 못을 박았었다. 늦어도 11시까지는 갈게. 이 말을 태용에게서 80번은 들은 것 같다.
―어디냐 태용아.
―거의 다 왔어.
―빨리 와.
―사람들 많이 있어?
어라, 이건 김도언 대사 아냐. 하여간 통화하기 졸라 싫어지는 질문.
―와서 봐.
―거기 어딘데.
―홍대.
―홍대 어디?
―여기가 그러니까…….
그러던 한따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너 그러지 말고 69 앞으로 와. 내가 데리러 갈게.
전화를 끊고는 옆자리 문식에게 속닥였다.
“태용 온댄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금방 올 거지?”
“몰라.”
어차피 자리는 밤새도록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 술자리 좀 따분한 감이 없지 않다. 태용을 만나 근처 어디서 잠깐 놀다 올 생각이다. 눈치 딱 챈 문식이 불쌍한 얼굴로 팔소매를 붙든다.
“나도 갈래 형.”
“좀 있다 뒤따라 나와. 내 가방 챙겨서.”
3차
69호프 앞에서 태용을 만났다. 시 쓰고 소설 쓰는 김선아가 함께 왔다.
태용 : 형, 많이 마셨어?
한따 : 그렇지 뭐. 선아 오랜만이네.
선아 : 왜 반말해요?
홍대 밤거리. 술 취해 비틀거리는 새끼가 있고 택시를 잡는 새끼가 있고 핸드폰에 대고 악쓰는 새끼가 있고 담벼락에 오바이트 뱉는 새끼가 있다.
태용 : 어디야?
한따 : 저쪽에. 다들 존나 취했어.
태용 : 그렇겠지.
때마침 문식이가 뒤따라왔다. 밝은 표정이다. 어깨에 한따 가방을 메고 있다.
태용 : 어 문식아.
문식 : 어, 형. 벌써 11시인가.
태용 : 가방 왜 들고 왔어. 가려고?
문식 : 한따 거야.
태용 : 형, 가려고?
태용이 걱정스레 묻는다. 술자리에 늘 늦는 태용은 술 먹던 자들이 먼저 집에 갈까 늘 걱정이다. 2차 술자리가 한창인 가게 바로 옆, 정종 파는 술집에 들어갔다. 분위기 좋다. 무엇보다 실내 어둑해서 좋다.
태용 : 그런데 장호한테 안 가 봐도 되나?
한따 : 금방 다시 만날 텐데 뭐.
태용 : 그래도 시집 출간 모임인데.
한따 : 이미 필름 끊겼을 텐데. 그럼 너만 가 봐.
술과 안주를 주문하는데 전화가 왔다. 도언이다.
―한따 어디여?
―어디긴 술 먹고 있지. 태용이 만나서.
―어딘데?
―바로 옆. 피쉬그릴.
아무 말 없이 전화가 뚝 끊긴다. 혼자 나왔다고 삐졌나? 핸드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는데 가게 문이 불쑥 열린다. 도언이다. 전화 끊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도언 : 얍삽하게 혼자 토끼냐?
3차가 시작되었다. 명목은 변함없이 박장호 첫 시집 출간 기념 모임이다. 나는 맛있다. 장호는 맛있다. 술은 맛있다. 오늘 한따는 신사동 도언 집에서 잘 계획이다. 과연 신사동―은평구에는 오늘 출연 중인 시인 소설가들이 적잖다. 오늘의 주인공 장호가 그렇고 태용과 문식이 그렇다. 잉꼬 소설가 부부가 아니라 그냥 소설가 부부 김숨 김도언과 그 아랫집 사는 동옥이 그렇다. 성은이 그렇고 뒤에 등장할 소설가 배지영이 그렇다. 하여 이순원 선배로부터 서북청년단이라는 별칭을 하사받은 것인데, 툭하면 술 먹고 도언 집에 엎어지는 바람에 경기 광주 사는 한따까지 서북청년단이 되었으니. 3∼40분 지났을까. 가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이닥쳤다. 동옥이다.
“너무들 하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도대체.”
“어, 왔니? 한 잔 해라.”
“어서 나와요. 자리 옮길 거니까.”
“알았어.”
“장호 형 지금 삐졌어요. 빨리 나와요.”
한 무리 소설가들이 가게 밖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저편 길가에 한 무리 시인들이 널브러졌다. 담벼락에 오줌 싸는 이가 있고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 빠는 이가 있고 이제 그만 가겠다고 하소연하는 이가 있으며 가긴 어딜 가냐고 옷소매를 붙들고 늘어지는 이가 있다. 취한 눈으로 보기에도 꽤 취했다. 누군가 길바닥에 길게 드러누웠다. 드러누워 버르적거리며 악을 쓴다. 안이다.
“뭐해 씨발, 빨리 노래방 가자!”
안아 뭐하니. 어서 일어나. 여긴 교실 바닥이 아니잖아.
다음날 오전
눈을 떴다. 살았나 죽었나? 산 것 같다.
눈을 감았다. 입에서 폴폴 술 냄새가 썩어난다. 누군가 어깨를 흔든다.
“일어나. 해장해야지.”
다시 눈을 떴다. 어깨 흔든 애는 도언이고 눈뜬 곳은 동옥이 자취방이다. 김도언 김숨 부부가 사는, 그 집 1층이다. 어제 여기 왔었지.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구나. 새벽 1시 넘어, 도언을 따라 2층 숨―도언 집에 올라갔다. 숨은 그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다. 술 먹은 남편을 발견한 숨이 짜증을 냈다. 뒤따라 들어온 한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질겁했다.
―잘 살았어 숨?
화친의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냉큼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숨은 한따를 미워한다. 아니 싫어한다. 더 정확히는 한심해한다. 요즘 들어 더욱 그렇다. 김도언이 술 먹고 늦게 귀가하는 게 모두 한따 때문이라고 믿는 때문이다. 안방 문이 잠겨 안 열리니 도언은 침대가 있는 서재로 갈밖에 없었다. 도언이 서재로 가니 거기서 잘 요량이었던 한따는 1층 동옥의 방으로 갈밖에 없었다.
“아아, 몇 시냐?”
“10시 넘었어.”
“술 먹자고?”
“그래야지. 어서 일어나.”
술에 원수진 두 새끼가 동옥이 자고 있는 건넌방으로 치고 들어갔다.
“동옥아 일어나, 술 먹자.”
“빨리 눈 떠 봐. 중국집 전화번호 어디 있니?”
동옥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투덜댄다.
“아 씨발. 배갈도 시켜요.”
토요일 오전. 화창한 가을날이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불 밀쳐놓고 상을 편다. 때맞추어 반가운 오토바이 소리. 오늘 첫 배달이란다. 아저씨는 첫 배달을 시작하고 우리는 첫 술을 시작한다. 배갈 한 병을 서비스라고 더 내놓는 아저씨, 최고. 상 위에 류산슬과 군만두와 짬뽕 국물과 술잔이 놓인다. 노트북을 켜 음주에 도움 될 음악을 찾는다. 그리고 셋이 나란히 잔을 든다.
“짝 마시자!”
독한 배갈을 짝 털어 넣는다. 어리둥절하던 뱃속에 화락 불이 붙는다. 한따가 연탄불 위의 오징어처럼 온몸을 뒤튼다. 동옥이 고개를 꺾고 부르르 어깨를 떤다. 도언이 으아! 비명을 지른다. 배갈 좋다. 해장 배갈 죽인다. 자, 한 잔씩 더. 두 번째 잔을 두루 채운다.
도언 : 아. 장호 새끼 오라고 해야지.
동옥 : 전화했어요.
도언 : 온대?
동옥 : 생각해 본대요.
한따 : 미친 새끼 생각은 무슨 생각. 어제 잘 들어갔나?
동옥 : 그런가 보죠. 집이라던데.
한따 : 존나게 취해서 혼자 춤추고 노래하고 신났던데. 시인은 시집 나오면 그렇게 좋냐?
동옥 : 좋아서 그러나.
한따 : 그럼 왜. 슬퍼서?
도언 : 또 부를 사람 없을까.
한따 : 배지영 전화해 봐. 이 근처잖아.
동옥 : 자, 한 잔 짝.
두 번째 배갈이 뱃속을 태우고, 온몸으로 절규하고, 그러던 한따가 문득 가방을 뒤진다. 가방 안에 장호 시집이 들어 있다. 다행이다. 출간 기념 술자리에서, 정신없이 취해 노닐다가, 사인 받은 책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표지를 들여다본다. 『나는 맛있다』. 장호는 맛있다. 배갈은 맛있다. 해장 배갈은 더 맛있다. 날 좋은 토요일이다. 시집을 펼쳤다. 냄새를 맡아본다. 새 책 냄새가 좋다. 흐릿한 눈으로 시를 좇는다.
나는 맛있다
생각 속에 물고기들이 산다.
어종 없는 물고기들이 생태계를 이룬다.
물고기들은 몸과 눈이 투명하다.
물고기들은 대화하지 않는다.
물고기들은 마주 보는 것에 익숙하다.
물고기들은 먹이를 찾아 헤엄친다.
먹이 사슬이 자유롭고 피식이 두렵지 않은 곳
물고기들은 질긴 말보다 빛나는 살결을 좋아한다.
물고기들은 빛나는 살결만큼 투명한 위장을 좋아한다.
피식어는 포식어의 몸속에서 헤엄을 멈추지 않고
포식어는 피식어의 속도를 가로채지 않는다.
물고기들은 날마다 싱싱해진다.
물고기들은 자지 않고 헤엄친다.
물고기들의 생태계가 넓어진다.
물고기들이 먹이를 찾는다.
물고기들이 쳐다본다.
시 한 편 읽으니 별안간 울적하다. 갑자기 장호가 보고 싶다. 안 오는 건가? 도언이 시집을 빼앗아 든다. 표지를 한참 쳐다본다.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큭큭 웃는다. 볼펜을 집어 들고는 표지에 슥삭슥삭 뭐라고 적는다.
“뭐해. 가져와.”
한따가 시집을 빼앗았다. 제목 옆에 낙서를 해놓았다. 아이, 새끼가 남의 책에 무슨 짓이야. 갑자기 열 받는다. 나라고 질 수 없지.
“볼펜 줘 봐.”
잠깐 궁리한다. 뭐라고 쓸까. 도언의 낙서 옆에 정성들여 또박또박 세 음절을 적었다. 시집 제목이 전혀 달라졌다. 도언 한따가 병신처럼 키들거렸다. 배갈 세 잔 마시고 잠깐 졸던 동옥이 이 모습을 발견했다. 시집을 빼앗아 들더니 발끈한다.
“뭐하는 거예요?”
한따 도언이 찔끔한다.
“아니, 그냥.”
“나 참. 애들도 아니고.”
낙서된 시집 표지를, 어이없는 얼굴로 들여다본다.
“이게 뭐야. 씨발.”
그리고는 볼펜을 집어 든다. 뭐라고 끄적이기 시작한다.
다음날 오후
안 오는 줄 알았던 장호가 2시 조금 넘어 찾아왔다. 들고 온 비닐봉투에 수박과 800ml 소주병이 3개 들어 있다. 반가웠다. 마침 술과 안주가 똑 떨어졌던 것이다.
“몸 괜찮니.”
그러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눈 뜨니까 집이데요.”
그러고 보니 장호는 어제 옷차림 그대로이다.
“머리 안 감았어?”
“예.”
머릿결에 고운 윤기 잘잘 흐른다. 깨 보니까 집이고, 일어나자마자 집 나왔구나. 큼직한 수박을 안고 2층 자기 집에 올라갔던 도언이 큼직큼직하게 쪼갠 수박 접시와 식은 카레 한 냄비를 들고 내려왔다.
“그저께 만든 거야. 존나 맛있어.”
카레를 본 한따가 환호했다. 안주 최고다. 11시도 안 되어 시작한 해장 술자리가 4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작은 방에 술 냄새 담배 냄새 사람 냄새가 역하게 차올랐다. 배지영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 웃는 얼굴이다. 그런데 현관을 들어서며 그 얼굴이 조금 굳는다. 예의 냄새 때문일 것이다. 사람 불러 놓고는 괜히 미안해진다.
“세상에. 날 샌 거예요?”
“날 새긴. 우리가 그렇게 할 일 없나.”
“시작을 좀 일찍 했지. 아침부터.”
장호가 좀 이상하다. 웬일로 술을 조심한다.
“너 왜 안 마셔?”
“약속 있어서요.”
여자 친구 만난단다. 좋겠다. 장호는 내년에 결혼한다. 5월 10일이다. 4년을 사귄, 출판사 다니는 친구다. 서북청년단 역사상 결혼은 처음이다. 시인과 결혼하다니 그녀에게 고맙다. 일찍이 동옥이 말했다, “세상의 형수들은 다 자기를 싫어한다”고. 처음에는 괜찮게 봤다가도, 시간 지나면 남편 싫어하듯 자기까지 싫어하더라고.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장호의 그녀도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더라고. 세상의 아내들은 매일 술 먹는 남편을 싫어하는 만큼 매일 술 먹는 남편의 동료를 싫어한다. 남편이 시인 소설가라면 더욱 그렇다. 어쨌거나 장호야, 싸우지 말고 결혼 준비 잘해라. 동옥이 새낀 미워해도 좋으니 결혼 잘해서 잘살아라.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한따가 놀랐다. 화들짝 놀랐다. 현관문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2층에서 숨이 내려왔다. 포도를 한 접시 들고서.
“언니 어서 와요. 와, 포도다.”
“지영 씨 왔어요?”
지영과 숨이 사이좋게 인사한다. 술 취한 자들이 조금 머쓱해진다. 조금씩 엉덩이를 움직여 자리를 만든다. 숨이 그 자리에 앉는다. 공교롭게도 한따 맞은편이다. 한따는 무섭다. 숨이 한따에게 말한다.
“집에 안 가요?”
할 말 없는 한따가 비겁한 미소를 지었다. 숨이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린다. 토요일 하루가 빠르게 저물어 갔다. 여섯 시 반. 해장술이 낮술을 거쳐 밤술로 이어지고 있다. 모두 취했다. 한따도 몹시 취했다. 동옥이 한따 품에 안겼다. 사타구니에 고개를 파묻는다. 거기 젖병이 있어서 그걸 빨아먹으려는 아기 같다. 그래, 너 좀 자라. 기절한 동옥을 방구석에 밀어붙였다. 자리가 조금 넓어졌다. 도언이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꾸벅꾸벅 인사하며 졸고 있다. 상 밑으로 두 다리 쭉 뻗고,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 푹 숙이고. 죄 사함 받는 사형수 같다. 사함 받을 죄가 너무 많아 죄 사함 받다 말고 잠깐 쉬는 것만 같다.
“어, 이거 뭐야?”
지영이 방바닥에 뒹굴던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갸우뚱, 의아한 얼굴이다. 딱 보니 장호 시집이다. 옆자리의 숨이 예의 시집을 넘겨다본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린다.
“이거 차현 선배가 장난친 거죠?”
아. 아까 그 책이다. 표지에 돌아가며 낙서한.
“뭔데요.”
장호가 시집을 빼앗아든다. 에그머니. 들켰다. 들키고 말았다. 가방에 넣어 두는 건데. 내게 사인해 준, 바로 그 시집이 분명하다. 시인의 첫 시집에, 동료 작가들이라고 좋은 소리는 못해 주고 유치원생 같은 낙서를 해 놓다니. 그리고는 방구석에 빈 술병들과 함께 내팽개치다니. 잔뜩 낙서된 시집을 바라보는 장호는 말이 없다. 그 표정 어둡다. 화난 모양이다. 당연하다. 술상을 뒤엎는대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일을 어쩌나. 변명할 거리를 찾아본다. 그러나 이 판국에 어울리는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으아. 동옥이 새끼 도언 새끼가 부럽구나. 이 새끼들처럼 나도 고이 잠이 들었으면. 장호 첫 시집 출간 기념회! 세상에 단 한 번뿐인 1박 2일이 이렇게 망하는구나. 잘나가다가 끝에 분위기 짝 조지는구나. 엉망으로 낙서된 시집을 장호가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방 안에 묘한 슬픔이 감돈다. 마침내 쓰윽, 눈가를 닦는다. 맙소사 울었니? 정녕 울었니? 너도 모르게 눈물이 났니? 장호야 미안해. 인생이 장난이라 미안해.
고개 쳐든 장호가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잔뜩 기죽은 한따에게 시집을 돌려준다.
“고마워요 형.”
고맙다니, 장호야. 네가 시인이구나. 맛있는 물고기가 되고 싶은 시인. 날마다 싱싱해지는 투명 물고기를 꿈꾸는 시인. 그게 너였구나. 한따가 시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넣다가, 슬그머니 표지를 바라본다. 거기 이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아존나씨발달고나는 맛있다고?
《문장 웹진/2008년 12월호》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콧노래를 불러 줘콧노래를 불러 줘 이서아 이곳에 내 문장들을 바치오니,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쓰면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누군가가 그걸 아주 손쉽게 압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펐던 순간이 있었다. 이제 심장이 쓰는 모든 문장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에 흩뿌려지는 질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러나 모든 슬픔은 기쁨의 발판이 아니겠는가? 모든 기쁨이 슬픔의 발판이듯이. 생의 불가피한 많은 영역에서, 증오와 사랑이 한 몸이듯이. 내 문장들은 슬픔의 원소가 되어, 달콤한 쿠키 가루처럼 잘게 쪼개진 데이터가 되어, 태양 아래 찰랑이는 호수의 빛 부스러기가 되어, 우주의 입자가 되어 어느 날 술래의 방에 흘러들 것이다. 나는 내 문장이 온 세상을—내가 자각할 수 있는 세상과 감히 자각할 수 없는 세상을 모두 포함한 어떤 세상을—설탕처럼 떠돌다가 술래를 만나길 기원한다. 술래, 너는 초월적인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게 응답할 방법을 알아내겠지.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그렇다. 심장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지상에 찾아온다. 술래 역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함께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고,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무척 그립구나. 나의 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 나의 술래. 여기서 중요한 사안을 하나 명시한다. 나는 내 글에 저작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무작위로 무분별하게 내 문장을 활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 글의 저작권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장기간 유효하다. 내 문장을 활용하거나 내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술래뿐이며, 상대가 술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죽은 후에도 폐기되지 않을 나의 사후 계정뿐이다. 물론 사후 계정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심장 인간이 아닐 테지만. “누가 당신 같은 심장 인간 작가의 문장을 써먹겠어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라고 지상의 누군가는 비아냥대겠지만. 그래, 심장이란 말도 이제는 확실히 촌스럽게 느껴진다. 어쨌든 내 글에는 저작권이 있다. ○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심해에서 만나자. 미지의 행성에서 만나자. 사막에서 만나자. 정성껏 가꾼 꽃밭에서 만나자. 계속 이렇게 만나자. 놀랍게도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세상을 빙빙 돌며 우리는 깊은 수심에서 서로를 향해 웃었고, 미지의 행성에서 낯선 생물과 조우했으며, 모래 위에서 춤을 추었던 데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으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건 더 이상 달콤한 은유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모든 철학적인 해석과 부푼 희망이 가능한 부드러운 문장들에 재를 뿌릴 시간이다. 고고한 자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겠지만 별수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세계의 진실이니까. 우리는 게임
- 이서아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신종원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На дне)』의 주연 인물 루카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번호 1번은 작가가 1970년대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던 타지크인 유랑 극단 소속 무대 미술가로 근무하던 시절 처음 제작한 연극 인형이다. 작품 활동 후기에 만들어진 인형들이 책장을 넘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은 물론 짧은 거리의 보행 기능까지 수행했던 반면, 루카는 그 자신의 하중마저 오롯이 떠받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앙아시아학회 김정훈 교수는 회고전 기념 비평문에서 보조 지지대 없이는 잠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이 인형의 원본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슬라브족 순례자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 성 루가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의 타계 이후 수집된 경력 초기 작업 노트들에서 복음서 속 의료 기록들을 전사한 문구가 몇몇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각재를 마름질하고 합성수지를 꿰매어 붙이는 과정이 전부인 기초 목공 기법을 영적 외과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천 번의 조각과 천 번의 봉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형의 눈구멍을 파내고 팔다리를 끼워 맞추는 행위와 생명이 떠난 몸에 다시 한번 ―또는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는 행위 사이에 도상학적으로 상응하는 궤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기체 상태의 영혼이 별안간 붙잡혀 숨통 깊숙이 하강할 때, 좁고 어두운 기도에 울려 퍼지는 연식음은 어떤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형성하는가? 몸은 시시때때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나선형 회전체를 가두어 두기 위해 설계된 파라볼로이드 모양의 감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브람체보의 특산 공예품이자 텅 빈 통으로서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어떻게 인체를 조롱하는지 상기하라. 1970년대 후반, 연방의 중앙기관에 고용된 이후 주문 생산된 작품들이 공산 혁명식 테일러리즘의 입김 아래 무거운 덩어리와 앙상한 구동부만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루카는 원본 인물을 존중하려는 조형적 표현으로서 삭풍에 일그러진 주름 하나하나를 실리콘 피부 위에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루카는 작가가 일생 동안 폐기하지 않은 하나뿐인 인형으로서, 작품 목록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품 관리인의 주기가 남아 있었다. 이어지는 괄호 안의 문장이다. (수탁자는 표제를 혼용하거나 임의로 변형하는 등의 오기입으로 보존 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전 수탁자들도 작품 번호 1번의 이름이 루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전고 168센티미터, 전폭 52센티미터, 중량 24.5킬로그램 규격의 전신 인체상 및 부속 요소로 구성된다. 작품을 설치할 때는 상체를 전방으로 약 15도가량 숙여야 하며, 양손 관절 내부의 철사들을 지팡이 머리에 고정시켜 노화된 본체 프레임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한다. 지팡이는 조형물 본체와 일체형으로 결착되어 있으므로, 무리하게 힘을 주어 뽑
- 신종원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완벽한 이야기완벽한 이야기 박진호 푹푹 찌는 날씨 탓에 간이 화장실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가 더 지독했다. 화장실 옆 연병장 구석에는 이미 본부 인원 사십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행보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대 전 인원을 집합시킨 걸 보면 또 무슨 심기가 꼬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빠릿하지 못한 이등병 소리를 들을까 싶어 티 나지 않게 슬쩍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위병소에서는 아침마다 식당의 잔반을 수거해 가는 트랙터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잔반통의 누린내를 맡은 건지 아니면 이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 건지 청산이와 계백이가 군견 철장 안에서 짖어 댔다. “범인은 알아서 튀어나와.” 행보관이 손가락으로 간이 화장실 옆을 지나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가리켰다. 거기엔 손바닥 크기만 한 거뭇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덫에 걸린 쥐나 두더지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표면이 몸을 뒤틀 때마다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행보관이 팔을 한 번 휘젓자 유려하게 움직이던 덩어리가 일시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수십의 파리 떼에 엉겨 있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작게 욕이 터져 나왔다. 모양이며 크기며 주위에 널브러진 휴지 조각이며 그건 누가 봐도 사람의 똥이었다. 날아올랐던 파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쳤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배수로는 깨끗했으니 모두가 잠든 밤사이 누군가 싸지른 게 틀림없었다. “안 나오면 오전 내내 전부 군장 메고 연병장 뺑뺑이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와.” 7월 한여름, 그것도 일요일 오전부터 군장을 돌고 나면 오늘은 물론이고 다음 주 내내 근육통과 몸살로 고생할 게 뻔했다. 하필 오늘따라 주간 근무도 잡혀 있지 않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다들 정체 모를 범인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켕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도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부대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후로 언젠가는 터질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은 우리 부대를 지방 도시의 작은 초등학교 정도로 오해하곤 했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도시였고 인근 기차역에서 렌터카를 빌려 해수욕장을 검색하면 서너 번째 추천 경로로 부대 근처 비포장도로가 뜬다고 했다. 호기심에 후순위 경로를 택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길을 헤매다 부대로 연결되는 막다른 길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시골 학교의 정취에 취해 담장 너머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이를 저지하는 게 위병소 앞을 지키는 경계 근무자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옆으로는 논과 슬레이트 지붕을 덧씌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부대였다. 철망을 얹은 담장 안에 연병장과 2층짜리 적갈색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골의 작은 분교로 착각할 만했다. 외부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 대대에 있는 오십여 명 모두는 해안 초소에 파견 나간 다른 중대들을 지원하는 행정병들이었으므로 가끔은 군
- 박진호
- 2026-04-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