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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의 춤

  • 작성일 2008-04-11

 

[조경란이 만난 사람⑩], 화가-프리야 이강



노라의 춤




유리 한 장이 있다. 어느 쪽에 반사 은도금을 해야 할까?

이쪽, 아니면 저쪽? 유리판 앞에, 아니면 뒤에?

                                 ― 클로드 카훈(1930)


낮 2시에 남의 차를 얻어 타고 양평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이건 정말 나답지 않은 일이다. 낮과 밤을 완벽하게 뒤바꿔 생활하는 나에게 그 시간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난 후 한 접시나 되는 과일을 먹으면서 느긋하게 신문을 읽는 시간이다. 하루 중 두 번째로 내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때이다.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세수하고 옷 입고 현관을 뛰어나가다니. 출발하기 전부터 나는 갑자기 피곤해진다.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코트 깃을 올려 세운다. 겨울이 다 지나간 것 같아도 경칩(驚蟄)은 아직 열흘이나 더 남았다. 서울보다 쌀쌀하니 옷을 단단히 입고 오라고 그 화가 선생이 당부했다는 말도 전날 들은 터였다. 옆 자리에 앉은, 오늘 이 만남을 주선한 B출판사 이현정 편집장이 내 쪽으로 슬쩍 종이봉투를 내민다. 고소한 빵 냄새가 풍긴다. 나는 머핀보다 베이글을 더 좋아하지만 일단 빵 냄새를 맡자 신경이 누그러지는 것 같다. 현정씨는 지금 우리가 만나러 가고 있는, 현정씨와 이름이 똑같은 화가, 이현정 화가에 대한 프로필 몇 가지를 알려준다. 나에게 맨 처음 ‘이현정’이라는 화가에 대해 말해준 사람도 바로 저 부지런하고 성실하기로 소문난 이현정 편집장이다. 이 일은 2006년부터 시작된다.


한 해가 시작되면 나름대로 착실하게 계획이라는 걸 세우는 편이다. 그 계획이라는 건 내 의지로 지켜질 수 있기도 하고 또 지켜질 수 없는 그런 모호한 것이긴 하지만, 계획을 세워놓지 않으면 약간 불안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까봐 나름대로는 일상을 단도리 해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전적으로 성격 탓이겠지만. 그 해는 이상하게 뜻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반기엔 어디 먼 곳에 가서 체류하게 될 줄 알고-집을 오래 비울 때면 늘 그렇듯이 나는 엄마에게 생활비를 마련해 놓고 가야 하는 입장이어서-이현정 편집장이 제안한 산문집의 번역을, 그럼 번역료를 많이 주시면 하겠다며 덜컥 맡아버렸다. 책의 내용보다 그 책에 몇 점 함께 실을 계획이라는 우리나라 화가의 그림에 더 마음을 빼앗긴 것이 사실이다. 그 그림들에 기댄다면, 아주 근사한 책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 낯선 도시에 가서 놀지만 말고 번역도 하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하고 새 소설 구상도 해야지, 생각했다. 그 일이 뜻대로 안 되었다. 나를 둘러싼 거의 모든 일이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지고 풀이 죽은 채로 여느 해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셨고 무참하게 취하는 날도 많아졌다. 번역? 소설도 못 쓰고 있는데 번역은 무슨 번역. 2007년이 되자 정신이 번쩍 났다. 삼 개월 동안 작은 방을 하나 얻어 6년만에 새 장편소설을 썼다. 책이 나오고, 그 뒷일을 하느라 2007년이 다 지나가버렸다. 종종 이현정 편집장이 선생님 번역은 어디까지? 하는 애가 탄 얼굴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나는 말을 돌리거나 먼 데를 바라보는 시늉을 하기 일쑤였다. 차일피일 내가 미루고 있던 양평, 그 화가 선생 작업실 방문을 현정 씨가 날짜를 못 박아 이메일을 보냈다. 2008년 2월 23일 토요일, 그렇게 우리는 양평으로 가고 있다.


‘편집장 이현정 씨’가 내민 ‘화가 이현정’의 팸플릿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그림은 아기를 업고 있는 한 여자의 측면을 그린 그림이었다. 여자의 왼손에는 흰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고 주위는 붉은색 연두색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뭐랄까, 그림은 첫눈에 대체로 화려하고 대담해 보였다. <원더풀 라이프>라는 그림의 제목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났다. 머리엔 꽃을 꽂고 원더우먼 복장을 한 한 여자가 한 손으로는 젖병을 든 채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고 다른 손으론 붓을 든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 속의 여자들은 모두 그 원더우먼 여자처럼 붓을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거나 아이를 안고 있었으며 배경에는 산과 집과 나무와 고양이와 닭과 무당벌레와 달과 새가 그려져 있었다. 주로 원색을 써서 그런지 모든 그림이 얼핏 보면 화사해 보이기만 한다. 나는 천천히, 그림들을 한 번 더 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눈을 사로잡는, 매혹하는, 현혹시키는 원색이 아니라 그 그림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 쪽짜리 팸플릿을 덮고 나자 어어? 이게 뭐야? 어이없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이현정 화가에게 이런 엽서를 받게 된다.


‘Line은 솔직합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라인의 강약만으로도 감정이 드러나고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 모양새로 색의 도움 없이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합니다. Color는 눈을 현혹시키고 우울한 영혼을 달래줍니다. 가끔, 아니 거의 대부분의 제 그림은……슬프기 때문에 화려합니다.’    



여성 미술가는 오랫동안 독창적인 방법으로 매력적이고 멋진 자화상을 그려왔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 프란시스 보르젤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다』(1998)


화가 선생은 ‘이현정’이라는 자신의 본명을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건네받은 명함에도 ‘프리야 이강’이라고 쓰여 있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지어준 새 이름이라고 했다. ‘이강’은 부모의 성에서 따온 첫 글자들. ‘프리야’는 ‘사랑’이라는 뜻의 인도어. 서양 여성처럼 큰 키와 위풍당당해 보이는 체형, 작고 갸름한 얼굴형에 또렷하고 우뚝우뚝한 이목구비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래도 이름치곤 좀 화려하군,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화장기 하나 없는 ‘프리야 이강’의 아름다운 프로필을 훔쳐보고 있다. 별채로 지어진 작업실을 다 둘러보고 일층 거실과 방들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다 보고 작은 갤러리 같은 느낌이 드는 2층에 앉아 있었다. 차를 마시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나는 어떤 그림을 보았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 그림이 걸려 있는 방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마치 내 이름을 소리 내서 부른 듯한 그 그림을 마주보고 섰다. 물끄러미 그림을 맞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래 서 있었다. 책상 의자를 돌려 그 그림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앉았다.

 

 




온몸이 창백한 나부의 한 여인이 파랑이 섞인 희미한 초록색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단순한 구도의 그림이었다. 배경은 마찬가지로 파랑과 검정이 섞인 듯한 어두운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소파 한 쪽엔 그 그림 속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선명하고 화려한 원색의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닥을 짚은 여자의 왼손 손등에서 가느다란 나무가 한 그루, 여자의 어깨 높이만큼 자라 있었고 그 가지 끝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때 나는 왜 여자의 손등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나무, 그 끝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 그게 그 그림에서 유독 동떨어진, 유독 낯선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을까. 시력이 나쁜 나 같은 사람은 두서너 발짝만 떨어져도 안 보일, 그런 희미한 나무와 새. 나는 머릿속에서 그 나무와 새를 지워 보았다. 그러자 방 밖, 저 밖에서 내가 맨 처음 그 그림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아 보였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여자의 오른손. 그 손에 들려 있는 원색의 손거울. 그제야 그것들이 원래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두드러져 보였다. 나부의 한 여자. 깊고 슬픈 눈, 응시하는 눈. 원색의 과일 바구니. 가장자리가 희미하게 지워져가는 소파와 배경. 그리고 손거울.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무와 새는 장식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엇이듯, 사람이든 예술이든 보태는 것보다 덜어내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나무와 새를 지워버린 걸까. 아니면, 나는 거기서 또 나의 어떤 다른 걸 봤기 때문에 지워버린 걸까.


어느새 등 뒤에 화가 선생이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는 참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저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라고 물었다. 나는 순순히,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화가 선생이 말했다. 실은 나도 저 그림이 좋아요. 그래서 전시를 했을 때, 한번은 아주 턱없이 높은 가격을 붙여 놨고 지난번 전시 땐 아예 빨간 딱지를 붙여놨었죠, 아무한테도 팔고 싶지 않아서요. 선생과 나는 그 그림 앞에 나란히 앉아 무슨 바보들처럼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선생이 끄덕이고 선생이 끄덕이면 내가 또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나보다 더 말을 느리게 하고 나보다 더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다. 그런 두 여자가 십이 년 전, 그림 공부를 하고 있던 뉴욕에서 가장 고독하고 가장 쓸쓸하고 가장 가난했던 시절에 그린 초기작이라는 그림 앞에 나란히 앉아 있다. 십이 년 전이라면 나 역시 그런 한 시절을 겪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말이 더 잘 통하는 걸,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는 걸 확연하게 느끼게 될까봐 서서히 불안해지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와 너무 쉽게 너무 빨리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터라, 그런 순간이 오면 잽싸게 의심하고 한발 뒤로 빼는 스타일이다. 그림 제목을 물어보는 척하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리야 선생은 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그림에 ‘Thinking, 사색’이라는 제목을 내 멋대로 갖다 붙이고는 일행들을 재촉해 서울로 돌아왔다.


한때 열심히 화실에 다닌 적이 있었다. 아마 소설가가 안 되었더라면 지금쯤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만큼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고 잘 그리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그렸다. 궁극적으로는 특히 이 두 가지, 자화상과 누드를 무척 그리고 싶었다. 그걸 시도해보기도 전에 화실을 그만두어야 했고 점점 그쪽과는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대신 틈이 날 때마다 열성적으로 미술관을 다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역시 다른 어떤 것보다 자화상과 누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야말로 보태는 게 아니라 덜어내고 빼야 더 잘 보일 수 있는 정물, 자화상과 누드. 

 

 



서양 미술사(美術史)를 읽어보면 자화상은 16세기 이후 여성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기록이 있다. 16세기 이전에는 자화상이라고 부를 만한 그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거의 최초의 여성 화가가 그린 자화상은 12세기 ‘구다’라는 화가가 그린 <이니셜 D의 자화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완전한 형태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작품의 일부인 서명 같은 그림이라고 한다. 공식적인 자화상의 기록은 16세기, 카타리나 반 헤메센이라는 여성화가가 그린 <자화상>이라는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나 카타리나, 스무 살의 나를 그리고 있다.’ 고로 ‘나는 그린다, 나는 존재 한다’는 여성 화가들의 그림들이 출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화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화가가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일종의 또 다른 ‘언어’인 셈이다. 그러므로 어떤 화가의 지속적인 자화상 연작은 ‘진정한 자아 찾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 주로 자화상을 그린 여성 화가들은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는 화가인가, 아니면 모델인가?’ 그것은 즉 그림을 그릴 때의 응시자, 혹은 화가와 응시하는 대상자를 확실히 구분할 수 없다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러니까 ‘관찰하는 사람’은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모델, ‘관찰 당하는 사람’은 수동적이라는 오랜 통념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이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화가는 ‘로라 나이트’였다. 런던 국립 초상화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녀의 ‘자화상’은 성장한 한 여성이 여자 누드모델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특히 ‘자화상’과 ‘누드’라는 분야는 남성 화가들의 독점이었던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 그림이 암시하는 것은 화가 자신의 자신감, 능동성을 나타낸 셈이다. 주로 여성성을 상징하는 ‘꽃’ 연작 그림으로 잘 알려진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도 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릴 수 없는 바보는 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했다, 라고.

나는, 했다.

이 말을 나는 가슴에 새겨 넣은 적이 있다.

프리야 그림 속의 여성들은, 대개 나부(裸婦)이며 한참을 쳐다보다보면 그것이 ‘자화상’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 자화상에서 보게 되는 건 화가 프리야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어떤 자화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자기 재현’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양평에 다녀온 이후 줄곧 그 그림, 내가 ‘사색’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온 그림이 머릿속에서 왔다갔다했다. 너무 열심히 그 그림을 생각하다 못해 내가 탐욕스럽게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탐욕이란 게 있었다면 이제 서서히 덜어내도 모자랄 그런 나이로 접어들었는데, 정말 모양 사납군 하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열흘 전쯤인가 파리에서 활동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개인전을 연 화가 권이나 전시에 가서 1호 크기의 ‘사과’ 그림을 보고났을 때도 아 저 그림 좋다, 가 아니라 아 저 그림 갖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한 터였다. 이제는 그림을 보면 예전처럼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다’라는 생각이, 그것도 열흘 사이에 두 번이나 든 것이다. 물욕만큼은 적다고 제법 자부했었는데 영 아닌 모양이다. 나는 생에 두 번째로, 그 그림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느 날 프리야 선생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 그림 제목이 떠올랐다고. ‘Joy Bird.’ 십이 년 전에는 없었던 나무와 새를, 이년 전 전시를 앞두고 새로 그려 넣은 것이라고 했다. 십이 년 전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 내가 모르는 많은 일들이 그녀의 삶을 관통하기도 했을 것이다. 더 많은 것을 나는 알려고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림을 보면 되었다. 말이 없어도. 그것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Joy Bird. 그것은 그녀의 자화상인 동시에 나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그날, 그 그림 속에서 나는 보았을 것이다. 십이 년 전의 나. 어떻게 그 자리를 딛고 끙, 하고 일어설 수 있을까,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시간을 건너갈 수 있을까,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고 사색하던 나. 철저하게 혼자였던 나. 그래서 한 손에 손거울을 들고 내가 나에게 말을 걸던 나, 그때의 나.    


태초에 대지의 여신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커다란 외투를 짜듯 세상을 만들었다. 세상은 실제로 거대한 나무들 위로 펼쳐진 커다란 외투다. 그것을 합한 것이 현실이다.

                                            ― 머세아 엘리아드, 『둘과 하나』(1965)


빈센트 반 고흐 전(展)이 열리는 시립 미술관에서 프리야 선생과 만나기로 했다. 누구와 함께 그림을 본 적이 거의 없는 나는 시간보다 일찍 가서 먼저 그림을 보았다. 삼년 전, 일주일 동안 혼자 암스테르담에 머물면서 매일 아침 ‘반 고흐 뮤지엄’을 걸어 다녔던 적이 있다. 오직 그 뮤지엄 때문에 암스테르담에 머물렀다. 그때 다 가슴에 담아 왔던 그림들이다. 나는 37살로 죽기 전,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떠올린다. ‘내 그림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서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늘 미어질 듯 한 고통을 느낀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 역시 늘 미어질 듯 한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내 ‘그림’을 내 ‘문학’으로 뒤바꾸어서 읽곤 하니까. 

우리는 시립 미술관 2층,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마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금방 뛰쳐나온 듯 한 모습이다. 머리카락은 뻗쳐 있고 스웨터에는 잔뜩 보풀이 일어나 있다. 저런 차림으로는 아직 추울 텐데, 그런 것도 아랑곳없어 보인다. 눈빛도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저기, 딴 곳을 향해 있다. 관심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얼른 작업실로 돌아가 마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런 말이, 그냥 전해진다. 고흐 그림 앞에서도 고흐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것, 나도 빤히 안다. 나 역시 고흐 그림이 아니라 내가 찾고 싶은 것, 내가 향하고 싶은 곳, 더 멀리 가고 싶은 곳을 보고 있었으니까. 아무려나 이게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 말없이 그저 앉아 있기만 한데, 누구도 밥을 먹자는 말, 차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하지도 않는데 그런 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그림이 생각난다. 한 여자가 한 손에는 붓을, 한 손에는 꺾인 붉은색 장미를 손에 든 채 침실에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 그림이다. 그 그림 밑에 그녀는 이런 글귀를 적어 넣었다. ‘빨리 2월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나의 해산하는 수고가 끝나면 일회용 팔레트로 부끄러운 데를 가리고 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 아마 마흔 살에 얻었다는 딸, 이제 네 살이 된 지후를 갖고 있었을 때였을까. 일회용 팔레트로 부끄러운 데를 가리고 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 라는 그 말을 나는 읊조려 보았다. 딸, 아내, 어머니, 그리고 화가로서의 그녀. 그녀의 몸속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한 존재들. 서양 미술에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이 등장하고, 그 중 대다수는 역시 일상 속의 여성의 모습이다. 이렇게 가만히 그녀와 앉아 있자니 그 중 맨발로 땅을 고르는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강한 생명력과 능동적인 모습. 그런 것이 고스란히 다 드러날까 부끄러워 앞치마 속에 몰래 숨긴, 나는 그녀 옆모습을 흘긋 바라본다. 어쩐지 그녀는 땅 밑에서 들리는 목소리, 바람과 나무가 속삭이는 말을 다 알아차릴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녀가 빨리 작업실로 돌아갔으면 싶고 그녀 역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네, 그럼 다음에. 밥도 차도 안 마시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헤어져서도 그러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총총히 그 시간을 아껴 그녀는 한 번 더 붓을 들 수 있을 테니까.


여자인 나는 나라가 없고, 여자인 나는 나라를 원치 않으며,

여자인 내게는 이 세계가 나의 나라이다.

                        ― 버지니아 울프, 『3기니』(1983)


봄이 되었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원색으로 가득 찬 화려한 그녀의 그림들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길치인데다 운전도 못하는 데 어떻게 거길 가나? 궁리하다가 나처럼 그림을 좋아하고 프리야를 보면 좋아할 것 같은, 나와는 다르게 운전도 잘 하고 미술을 전공한 이PD에게 도움을 청했다. 4월 첫 번째 금요일. 우리는 양평, 서후면으로 출발한다.  

어떤 화가예요?

이PD가 물었다.

그냥……, 가서 직접 보세요.

이상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림을 보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테니까.

2006년,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전시를 했을 당시 그녀의 팸플릿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사주신 색동옷 오랜 시간 꿈이 되어 내 기억을 들락거렸다. 옛 신촌 시장 어느 골목 어둡고 쾨쾨한 공기가 뺨을 스치고 어머니를 꼭 잡은 내 손에 두려움의 땀이 배어올 즈음 바람 따라 팔랑팔랑 춤을 추던 색동옷의 꿈. 그 후 30년, 인도…… 삼등칸 창 밖 난지도 같은 마을에서 형형색색 나비처럼 훨훨 날아오르던 사리의 춤을 보았을 때 어릴 적 색동옷의 꿈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난 내 예술이 이와 같기를 소망했다. 아름다운 색채의 형상들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사랑을 줄 수 있게 되기를……’

이런 걸 말해준다면 그가 그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 사이, 작업실에 새 그림들이 걸려 있다. 아니, 걸려 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그녀가 요즘 하고 있는 작업은 울타리를 확장해 놓은 것 같은 길고 커다란 나무판자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렇게 나무에 그린 그림들을 실내 전시장이 아니라 공원이나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야외 장소에 세워둘 계획이다. 일종의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그림들 속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규모면으로도 꽤 거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 그림들이 공원을 찾은 이들에게 보편적이며 국경이 없는, 상처를 치유하는 그림이 되었으면 하는 게 그녀 바람일 것이다. 

오후 네 시. 그녀가 유치원으로 딸을 찾으러 간 사이 이PD와 나는 그녀의 집 2층에 한가하게 앉아 있다. 그림들 속에 둘러싸여 있으니, 이 기운만으로도 가뿐히 봄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이야기들을 관찰하듯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PD가 어떤 사건을 두고 이야기하는 건 쉽지만 그림을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아요, 라고 칭찬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내가 각별히 마음에 들어하는 그녀의 그림들을 보곤 정말 좋은 그림들만 골랐다고 해 나는 그만 우쭐해지고 만다. 그림을 보는 눈? 그런 건 없다. 다만 나는 나를 끄는 그림, 내가 끌리는 그림, 그런 그림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따름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국의 설치 작가 앤토니 곰리가 한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요청해서 된 것이 아니라 던져진 존재(thrown being)으로서의 ‘나’이다. 이것을 깊이 새기면 그러한 존재가 갖는 남과의 관계 또한 말이나 의식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관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새 시대의 미술은 앞으로 이러한 소통의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다룰 것이라고. 소통의 문제. 그것은 내 문학의 가장 큰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느낀, 프리야 그림의 가장 큰 주제. 나는 너무 착한 사람도, 어떤 종교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사람도, 너무 순수한 사람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그림을 보면 내가 그런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된다. 그게 그녀의 색채의 힘일까? 아니면 솔직하고 거짓이 없다는 line의 생명력 때문일까.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라. 높은 담벽을 헐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그녀의 외할머니가 즐겨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그녀는 그 노래를 떠올리며 한 손에 붓을 든 채 노라처럼 춤을 춘다. 그 춤은 보는 사람을 위로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춤,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춤. 그 춤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높은 담벽을 허물고 자유의 대기 속에서, 국경 없는 나라 속에서, 영원히.

Joy Bird 앞에서 한 십 분쯤 혼자 고요히 앉아 있다가 이PD에게 갈까요? 했다. 나 역시 그만 집으로 돌아가 글을 써야할 시간이었으므로.《문장 웹진/ 2008년 4월》




*프리야 이강 : 1993년 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졸업. 미국 L.A 전공 Illustration.

?개인전: 2007년 Opera House, 2006년 인사 갤러리, 아트링크, 2002년 갤러리 대안공간풀, 2001년 Great Great Neck Arts Center 초대전, 뉴욕, 2001년 Mosely Gallery 초대전, 메릴랜드, 1997년 21세기 갤러리.

?그룹전: 2001년 Agora Gallery. 미국, 뉴욕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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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REWIND]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서. 누구에게나 방이 필요하지만 중심인물인 이십구 년 차 중개업자인 김 씨는 “햇빛이 잘 들고 보증금 천오백만 원 정도의 방을 원하는&rdquo

  • 조경란
  • 2025-07-01

문장웹진 기획

많이 배웠다

[조경란이 만난 사람⑬]- ‘유진 목공소’, 윤대오 목수 많이 배웠다 손 얼굴보다 손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밤새 원고를 쓰고 난 후에는 내 손으로 내 손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 말하기도 하고 핸드로션 같은 것도 자주 바르고 손톱 소제도 열심히 한다. 이런 말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내 육체 중에서 눈과 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읽을 수 없게 되거나 쓸 수 없게 된다는 상상은, 그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하고 가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면 맨 먼저 보게 되는 것도 눈,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손이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 턱을 괸 손, 술잔을 잡는 손, 제스처를 하는 손, 벌린 손, 오므린 손, 뭔가를 자꾸 가리키려고 하는 손, 그리고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 손, 숨는 손. 그 손들을 통해서 어떤 이는 일종의 몸짓의 언어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손들에게서 풍기는 아우라를 본다. 그게 그건가. 아무려나 내게는 손의 이미지가 그 사람의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혹여 누가 나를 같은 눈으로 볼까 싶어 친밀하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는 내 손 역시 더욱 긴장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주로 왼손은 방심한 듯 자연스럽게 펼쳐놓고 오른손은 찻잔을 잡거나 연필을 쥔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굵고 짧고 게다가 흉터들도 많다. 최근에 손에 관한 불쾌한 일이 있었다. 도쿄의 네기시마로 떠나기 전날, Y라는 기자를 만나게 되었다. 초면인 데다가 무슨 일인가 내 쪽에서 거절하는 자리여서 여느 때보다 긴장해 있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다 말고 갑자기 Y가 손금을 좀 보자고 했다. 무슨 엉터리 같이.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싫습니다, 하곤 뾰족한 포크를 무기처럼 집어 들며 밥 먹는 시늉을 했다. 그가 물끄러미 내 손, 그것도 오른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불편했다. 아무 말도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윽고 그 Y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도시처녀인 척 하고 싶어 하는 시골 여자 손이군요. 되묻지 않아도 알아들을 말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쾌했지만 다시 안 만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국수를 먹는 사이에 잠깐 방심해 있었던 것 같다. Y가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뒤집어보았다. 그러고는 잠깐 와본 손님처럼 내 손바닥 안에서 많은 것을 본 것 같다. 이어 하는 말. 타고난 작가는 아니로군요, 인생선이 이렇게 희미할 수가! 혀까지 쯧쯔 차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타고난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또박또박 말했다. 집에 와서 스탠드를 켜놓고 유심히 오른손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정말로 인생선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희미해서 단박에 기가 죽고 말았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더 투박하고 거칠게 느껴지는 오른손. 영락없이 아버지의 손을 축소해놓은 손이다. 태생은 속일 수가 없다.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 조경란
  • 2009-04-29

문장웹진 기획

꽃 보러 갔다

[조경란이 만난 사람⑫]-미국 난(蘭) 협회 심사위원, 안나 최(Anna S. Chai) 꽃 보러 갔다 난(蘭)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매화·대나무·국화와 더불어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은둔자나 선비 혹은 군자의 덕을 뜻하는 식물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난을 잘 길러 본 경험도 없고 난을 갖고 싶은 욕심을 내 본 적도 없다. 어디 가서 꽃 핀 난을 보면 그저 아 정말 아름답고 고고하구나, 감탄했고 간혹 난을 선물 받을 때면 이게 또 언제 죽을까, 키우기도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하다못해 그냥 두기만 해도 잘 자란다는 선인장도 못 키우는 사람이고 그런 것에 어느 정도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에게 난이라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꽃’이었다. 게다가 그 선명한 빛깔과 특이한 형태도 내 취향은 아니다. 나를 가졌을 때 엄마는 고작 스무 살, 아버지는 그것보다 일곱 살 더 많았다. 그래도 시퍼런 청년이었다.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고 정말로 좋은 목수가 되고 싶기도 했던 그 청년은 첫딸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몹시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서울 경(京)에 난초 란(蘭),은 너무했다. 내 이름이 불리는 것, 내 이름을 말해야 하는 순간을 오랫동안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 게다가 성(性)까지 붙여 부르면 더더욱 촌스럽게 느껴지니까. 그래서인지 친구 사귀는 데 영 젬병이었으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는 한반이었던 미란이 노란이 수란이 애란이와 함께 ‘란 클럽’을 만들어 도시락을 함께 까먹었던 기억이 난다. 농담이다. 미주 한국일보 손수락 위원과 샌프란시스코 상하수도 공사 프로젝트 매니저이자 수필가인 김희봉 선생과 함께 지난 12월 26일 아침, 벨몬트(Belmont)로 향했다. 안나 최 선생이 1976년부터 살기 시작한 후 현재 네 개의 온실을 갖고 있다는 그 언덕 위의 집으로. 김희봉 선생에게 안나 최 선생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지 거의 삼 개월 만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내가 버클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안나 최 선생이 난 심사를 하느라 세계 각지로, 혹은 서울에 있었고 내가 11월 초 잠깐 서울에 다니러 갔을 때는 다시 벨몬트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버클리에서의 캘리포니아 대학과 대산재단의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가까스로 이루어진 약속이었다. 중국계 작가이면서 그곳에서 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맥신 홍 킹스턴이나 『조이럭 클럽』을 쓴 에이미 탄과의 약속이 깨졌을 때는 아쉽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안나 최 선생은 꼭 만나고 싶었다. 고백하건데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난 협회(American Orchid Society) 심사위원’이라는 안나 최 선생보다 그녀가 매일 아침 7시면 일어나 거의 하루 종일 손으로 만지고 다듬고 물을 주며 돌본다는 그 네 개의 온실,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850여 종의 이천여 개 화

  • 조경란
  • 200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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