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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상적인 정조와 회화적 이미지의 혼재

  • 작성일 2005-12-21
  • 조회수 4,037

 

문혜원(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말


김광균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193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추일서정(秋日抒情)」),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外人村)」) 같은 대목은 시의 이미지를 설명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다. 그러나 이처럼 선명하게 살아나는 이미지의 한편에 애상적인 정조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 경우는 많지 않다.

김광균은 모두 네 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우리가 기억하는 몇 편의 이미지 시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집인 『와사등』(1939)과 『기항지』(1947)에 수록되어 있다. 세 번째 시집 『황혼가』(1957)와 네 번째 시집 『임진화』(1989)에 이르면, 선명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애상적인 정조만이 주조를 이루게 된다. 그의 시가 이 같은 변화를 보이는 것은 『와사등』, 『기항지』 출간 이후 『황혼가』와 『임진화』를 간행하기까지 십여 년의 시간이 있고, 그 기간 동안 김광균이 시와는 무관한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 전반을 살펴보면, 애상적인 정조는 김광균의 초기시에서부터 꾸준히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와사등』과 『기항지』에서도 역시 선명한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시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시가 애상적인 정조를 바탕으로 하고 그것에 회화적인 테크닉이 덧붙여진 형태다. 그럼에도 김광균의 시가 선명한 ‘이미지’만으로 설명되는 것은, 모더니즘이라는 테두리를 먼저 부여하고 거기에서 그의 시사적인 위치를 찾고자 하는 의도가 개입된 결과다.



2. 애상의 장치―노대(露臺), 황혼, 풍경


김광균의 시들은 초기부터 애상적인 정조가 짙게 깔려 있었다. 화자는 떠나는 기차를 보고 있거나(「역등의 비애」), 파도가 치는 해안에서(「파도 있는 해안에 서서」) 혹은 영창에 기대어(「어두워오는 영창(映窓)에 기대어」) 슬픔에 잠겨 있다. 시를 지배하는 것은 슬픔과 쓸쓸함, 비애의 감정이지만, 그러한 슬픔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컨대 그의 초기시에는 ‘노대(露臺)’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데, 이와 관련된 풍경들은 슬픔을 미리 함유하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고달픈 기억이

슬픈 행렬을 짓고 창 밖을 지나가고

이마에 서리는 다정한 입김에 가슴이 메어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방울에 눈물지운다

오후의 노대(露臺)에 턱을 고이면

한 장의 푸른 하늘은 언덕 너머 기울어지고

                               ―「지등(紙燈)」 부분


동리는 발 밑에 누워

먼지 낀 삽화같이 고독한 얼굴을 하고

노대(露臺)가 바라다보이는 양관(洋館)의 지붕 위엔

가벼운 바람이 기폭처럼 나부낀다

                              ―「산상정(山上町)」 부분


노대가 있는 풍경에서 화자가 느끼는 것은 슬픈 기억과 먼지 낀 삽화와 같은 고독이다. ‘노대’는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적인 배경이지만, 그것이 왜 슬픈 감정을 느끼게 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공통적인 배경인 ‘노대’는 구체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선택된 공간이 아니라, 애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처럼 여겨진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설정된 상황은 다른 시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그 결과 적지 않은 시들이 유사하거나 동일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멀리 떠나보내는 마음은 아프다

시그낼은 가여운 애화(哀話)를 재촉하고

역등(驛燈)에 물결치는 벨소리가 내 가슴을 두드린다

눈물에 젖은 고개를 들고 차단-한 내 손을 더 한 번 어루만져다오

                              ―「역등(驛燈)의 비애(悲哀)」 부분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와사등(瓦斯燈)」 부분


차단―한 램프가 하나 호텔 우에 걸려 있다

뒷거리 조그만 시네마엔 낡은 필름이 돌아가고

스크린 우엔 어두운 가을비가 나려 퍼부었다.

                              ―「환등(幻燈)」 부분


각각의 시들은 역과 거리, 호텔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등불을 공통적인 소재로 하고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 역시 동일하다. 역에 걸려 있거나 거리의 등불이거나 혹은 호텔에 걸린 램프이거나, 화자에게는 ‘차단한’ 즉 차가운 것으로 느껴질 뿐이다. 차가움은 당연히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등불이라는 객관적인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차가운 것으로 인지하는 화자의 마음 상태다. 즉, ‘차단한 등불’은 화자의 비애감을 뒷받침하기 위한 시적인 장치인 것이다. 황혼 또는 모색(暮色)(「향수의 의장(意匠)」, 「가로수」, 「외인촌」, 「와사등」, 「광장」, 「신촌서」 등)이나 먼 곳의 풍경이 보이는 들(「창백한 산보」, 「외인촌」, 「황량」, 「추일서정」, 「뎃상」 등) 역시 비슷한 장치들이다.

그렇다면 김광균이 초기부터 끝까지 애상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에는 누이나 아버지, 애기 등 혈육의 죽음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이 같은 개인적인 경험은 그가 애상적인 정조에 젖어들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 듯하다. 화자는 밥상머리에 앉아 은수저를 보면서 죽은 애기를 생각하고(「은수저」), 칸나꽃을 보면서 죽은 동생의 얼굴을 생각하고 서러움에 젖는다(「대낮」).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은 시인이 속해 있는 현실을 의미 없고 서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애상적인 정조는 일차적으로 이 같은 개인적인 체험에 바탕하고 있다.



3. 시간의 비약과 시적 논리의 단절


문제는 이처럼 애상적인 장치들이 시마다 배치되어 있음으로 인해서, 시적인 논리가 깨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편의 시 속에서 시간적 배경이 갑자기 바뀌거나(「외인촌」), 시간적 배경과는 맞지 않는 표현이 등장하는 경우(「추일서정」), 행위의 주체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로수」) 등이 그 예다. 선명한 이미지즘 시로 알려져 있는 「추일서정」이나 「외인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낙엽(落葉)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紙幣).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瀑布)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추일서정」 전문


시각적인 이미지로 잘 알려진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은 제목처럼 가을날이고, 그 중에서도 ‘새로 두 시’의 오후,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가을날 오후이다. 화자는 조용한 시골의 한 지점에 서 있다.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 즉 새로 난 신작로가 아니라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멀리서 급행열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 ‘이곳’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한적한 곳이다. 시선을 거두어 조금 가까운 거리를 보면, 포플라 나무 사이로 공장의 흰 지붕이 보이고 구부러진 철책 위에 한가로이 구름이 떠 있다.

여기까지(“낙엽은~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가 풍경에 대한 회화적인 스케치라면, 다음에 연결되는 부분(“자욱한 풀벌레~잠기어간다”)은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속 풍경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는 홀로 ‘황량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허공으로 띄우는 돌팔매’는 그러한 화자의 마음을 반영한 하릴없는 행위다. 풍경의 저쪽에 잠기어가는 것은 띄워 올린 돌만이 아니라 자꾸만 잠기어가는 화자의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자세히 보면 이 시는 오후에서 황혼녘까지의 시간적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풍경을 그린 앞부분이 오후 두시의 들녘 풍경이라면, 화자의 마음속 상황이 두드러지는 뒷부분은 저물 무렵의 느낌이 짙다. 돌이 떨어지는 모양을 ‘잠기어간다’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저물 무렵의 풍경 속에서 서서히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고,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이라는 표현 역시 어두워지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 시는 햇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대낮의 시간과 저물 무렵의 시간이 아무런 연결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풍경을 스케치하는 부분과 화자의 마음을 표현하는 부분의 구분과 일치한다.

그 구분의 경계에 있는 ‘자욱한 풀벌레 소리’를 보자. 상식적으로 볼 때 풀벌레 소리가 자욱하게 들리는 시간은 낮이 아니라 밤이고, 그 중에서도 깊은 밤 시간이다. 시의 시간적인 배경과는 일치하지 않는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이는 실제 풍경을 스케치한 것이 아니라, 화자의 황량한 마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선택된 타성적인 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쓸쓸하고 삭막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저물 무렵’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자욱한 풀벌레 소리’라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외인촌」 전문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모색(暮色)’, ‘노을’로 상징되는 저물 무렵에서 시작된다. 멀리 보이는 산협촌으로 마차가 한 대 지나가는 것이 보이고, 산마루길에 서 있는 전신주 위엔 노을이 졌다. 저녁을 맞는 집들이 창문을 닫고,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화원지의 벤취 위에는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여기까지(“하이얀~흩어져 있다”)는 화자가 바라보는 저녁 무렵의 풍경이다. 그러나 그 다음 부분에서는 갑자기 ‘외인묘지의 어두운 수풀’이 등장하고, 거기에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린다. 저물 무렵에서 갑자기 밤으로 시간적 배경이 바뀌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다음 연의 ‘촌락의 시계가 열시를 가리킨다’는 부분은, 밤이 지나고 그 다음날 아침의 시간으로 읽힌다. ‘밤새도록’이라는 부사가 있고 난 뒤이기 때문에, ‘공백한 하늘’이란 밤이 지나고 새롭게 밝은 아침 하늘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이다. 교당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시간 역시 밤 열시보다는 아침 열시가 더 적절하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시는 노을이 질 때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이틀에 걸친 시간적 배경을 거느리고 있는 셈이다. 이 시간의 변화 역시 별다른 근거 없이 느닷없이 이루어진다.

느닷없는 시간적 비약은 특별히 시적인 효과를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그대로 방치된 것처럼 보인다. 풍경을 사실적으로 스케치한 부분은 실제 경험적인 시간이지만, 화자의 비애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동원된 시간은 저물 무렵이나 어두운 밤이다. 한 편의 시가 서로 다른 시간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쓸쓸한 심회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시들은 실제 풍경을 스케치한 선명한 이미지들과 애상적인 정조가 혼재하는 불균형한 형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4. 맺는 말


김광균의 시들은 회화적인 수법을 사용해서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지즘 시라고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이미지즘이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 범주에 속한다는 점에서 이 시들을 모더니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명하고 객관적인 이미지는 모더니즘 시가 보여주는 특징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모더니즘은 자본주의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 병행하는 문예사조로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문명을 시적 소재로 취한다. 불연속적인 세계관과 전통의 부정, 근대인으로서의 자각 등 역시 모더니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김광균의 시는 근대적인 자아의 인식이나 문명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기에는 미흡하다. 한 예로, 그의 시에는 30년대 모더니즘 시인인 정지용이나 김기림 시의 주요 소재였던 ‘배(포구, 항구)’나 ‘기차’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문명의 상징이 아니라 애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관습적인 장치로 기능할 뿐이다(「역등의 비애」, 「파도 있는 해안에 서서」). 그의 시에서 ‘기차’는 문명의 상징도 아니고 동력의 상징도 아니다. 기차가 단순히 애상적 분위기를 살리는 요소로만 사용되는 것은, 문명에 대한 김광균의 인식이 미흡했음을 증명한다.

1930년대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모더니즘은 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테마이고, 그러다 보니 김광균의 시 역시 모더니즘과의 상관관계 아래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광균의 시 전반을 검토해볼 때, 주조를 이루는 것은 오히려 애상적인 정조다. 그럼에도 선명한 이미지만을 내세워 그의 시 전체를 이미지즘 혹은 모더니즘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1930년대 모더니즘 시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김광균이 빠질 수 없는 시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지닌 한 특징만을 과장해서 평가한다면 심각한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문장 웹진/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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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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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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