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양성과 문화민주주의
- 작성일 200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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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우(문화평론가)
‘문화의 시대’라는 말이 강력한 기호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문화산업과 문화컨텐츠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시대의 산물들이다. 현재 그러한 산물들이 움직이고 있는 양상을 보노라면 애초 ‘문화’라는 말이 갖는 의미와 느낌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그림자라고나 할까. 그렇다 하더라도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를 둘러싼 다양한 활동과 싸움을 보노라면, 문화는 전혀 다른 의미와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알려준 일이 있었다. 2005년 10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이하 문화다양성 협약)이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된 것이 그것이다. 모두 154개국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찬성 148, 반대2(미국, 이스라엘), 기권 4.
이제 ‘문화다양성 협약’으로 인해 문화권 혹은 문화적 권리가 국제적인 규약의 하나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으며, 그 결과 지난 2001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n Cultural Diversity)이 채택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가결된 협약은 그 선언을 좀 더 명시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유네스코 가입국들의 국제적인 구속력을 강화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총회에서는 이 협약을 채택하는 근거로 모두 21개항을 마련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문화다양성이 인류의 중요한 특성임을 확인하고, 문화다양성은 인류 공동의 유산이며, 모든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소중히 하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문화다양성은 선택의 범위를 넓히고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육성해 주는 풍요롭고 다양한 세계를 창조하며, 그러므로 공동체, 민족, 국가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원천임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또한 새롭게 확장하고 있는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정체성, 가치, 의미를 전달하는 문화 활동, 상품 및 서비스는 경제적 속성과 문화적 속성을 함께 지니며, 그러므로 단순한 상업적 가치로 취급되지 않아야 함을 확인하며”, 세계화 과정이 문화간 상호작용의 강화를 위한 여건을 제공하는 반면에 부국과 빈국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물론 ‘문화다양성 협약’이 그 자체로 국제법적 구속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각국의 의회에서 비준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국회 비준 통과 외에도 다양한 문화 관련 법규와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정책의 보완을 통한 기초예술 및 독립예술, 소수예술 등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문화적 공공성 확대를 위한 문화 인프라 구축 등이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된다.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한 변화에 반해 여전히 문화 부문은 ‘중요한’ 것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문화는 더 이상 먹고 살 만해지고 난 이후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는 먹고 사는 문제와 똑같이 ‘여기 지금’의 문제이며, 나아가 먹고 사는 문제와는 다른 심층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의 문제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서도 문화적 권리와 문화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그 일환으로 ‘문화헌장’ 제정을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작년 10월 ‘문화의 날’에 제정, 선포될 예정이었으나 제정위원회의 사정상 좀 늦춰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해 6월 발표된 문화헌장 초안을 보면, 문화권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통해 문화권 개념의 풍성한 의미를 살리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제정위원회는 초안에서 “문화는 민족의 유구한 삶의 경험과 지혜가 축적된 토양이며 공동체의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공감의 바탕이고 사회의 다원적 가치들을 지켜내는 보루이다. …… 문화는 우리 사회가 성찰과 희망,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결합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게 하는 창조적 동력의 원천이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민의 다양한 활동들이 자유롭게 전개돼야 할 터전이다. 우리는 보존과 변화의 역동성 위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세계를 향한 열린 사회의 문화를 일구어 국민 모두가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토대를 다지고자 이 헌장을 제정한다.”라고 적고 있다. ‘문화헌장’ 제정의 근간은 문화다양성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축적된 문화와 현재 떠오르고 있는 문화, 앞으로 펼쳐질 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다양성’ 개념을 둘러싼 싸움이다. 특히 문학을 비롯한 문화계 전반에서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세계화 담론의 문제는 자본의 세계화를 통한 다문화주의를 퍼뜨림으로써 마치 다문화주의가 문화다양성을 옹호하는 것인 양 곡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개념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계화 문제 연구 그룹(GERM)’의 회장을 맡고 있는 프랑수아 드 베르나르는 ‘문화다양성’ 개념에 대한 재정립을 강조한다. 그는 ‘다양함’(diversity)이 상이한(different), 다수의(plural), 복수의(multiple), 다채로운(various) 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라틴어의 ‘디베르수스’(diversus)가 가졌던 의미를 끌어들인다. 그 의미는 ‘대립되는’, ‘불일치하는’, ‘모순되는’ 등이었다는 것이다. 즉 항상 운동과 투쟁, 갈등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문화다양성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고정된 결과나 상태로서가 아니라 싸움과 갈등 과정에서 생겨나는 운동의 개념으로 살려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유사한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은 ‘다문화성’(multicutural)과 ‘상호문화성’(intercultural)에 대한 논의이다. 다문화성은 생물다양성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처럼 ‘존재 자체’를 옹호하는,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상호문화성은 문화들의 만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번에 총회에서 통과된 협약에서 ‘상호문화성’에 대해 ‘다양한 문화의 존재와 문화간의 형평한 상호작용 그리고 대화와 상호존중을 통한 문화적 표현의 공유 가능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상호문화성은 문화와 문화의 평화적인 공존이 원칙이겠지만 상호 충돌과 갈등으로 인한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등장하는 것까지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무엇보다도 ‘문화다양성’에서 강조될 점은 역동성이다. 응고된 형태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파괴와 창조를 수용하고 동시에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정 민족과 종족의 유물과 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은 지극히 소극적인 의미의 문화다양성이라고 한다면, 그보다는 새롭게 떠오르고 창조되는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함으로써 열린 문화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문화다양성의 핵심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를 통한 세계화는 문화의 다양성이 아니라 문화의 획일성을 강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문화가 상당 부분 훼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세계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세계화 과정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문화적 공간의 생성을 주목하는 것은 또 다른 중요한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다양성 협약’을 통해 제기되는 사안들이 법적이고 제도적인 정책을 통한 입법화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기준과 근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다양한 입장과 노선이 맞부딪히는 상황에서 법과 제도의 틀은 하나의 준거점을 제시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물론 법과 제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그것을 위한 우선적인 작업과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또한 문화 향유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통해 문화적 권리를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문화적 권리가 어떤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내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권리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문화다양성이 우리 사회에 보편적인 하나의 논리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다양성에 대한 적극적인 논리를 펼치는 것도 중요하다.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 내용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언어의 다양성이 문화다양성의 기본 요소’라고 한 부분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6천여 개의 언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절반 가량은 정확한 조사가 필요할 정도로 점차 소멸되고 있다고 한다. 언어는 다양성의 핵심이다. 수많은 문학작품들과 역사, 기록 등이 언어의 다양성을 증언하고 있으며, 나아가 언어의 다양성이 어떻게 문화의 다양성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언어는 피부이다. 내 언어를 다른 언어와 부비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언어는 수 백년 내려오는 동안 설득력이 강한 개개인들이 저마다 돌 하나씩을 쌓아 올린 일종의 기념비인 것이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언어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문화와 쏙 빼 닮았다.
문화다양성은 ‘문화민주주의’의 초석이다. 문화민주주의는 문화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문화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화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문화적 혜택과 향유를 통해 지속적으로 해소되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문화는 실상 그렇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문화는 삶의 구성 원리를 민주적으로 바꾸자는 말인데, 여전히 획일적이고 위계적인 군사독재문화의 잔재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 남아 있다. 이처럼 이중적 차원의 노력이 전개될 때 문화다양성에 기초한 문화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문장 웹진/200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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