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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동경』론

  • 작성일 2006-04-28
  • 조회수 5,356

 



최성실 




1. ‘어느’ 시절 ― 생의 복병들이 출몰하다


대학 2학년 무렵 무더운 여름이었다. 나는 모 학술단체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브레히트 서사극과 판소리를 비교하는 논문을 쓰겠다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땀띠를 견디면서 여름을 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던 그 해 여름에 누군가는 분신을 했고, 누군가는 최루탄을 피해 도서관으로 숨어들었다. 그 때 금지도서를 찾아서 읽고 독일문화원에서 연극 테이프를 몰래 빌려보는 것으로 숨 막히는 갈증을 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보지 못하느냐고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계속 투덜거리고 또 투덜거리면서 남산 길을 걸어 다녔다. 내 안의 반골기질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밖으로 튀어나왔고,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대회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냈고, 태어나서 정말로 큰 돈(?)이 수중에 들어왔다. 그 돈으로 한국문학 전집, 세계문학 전집과 몇 가지 이론서와 신간, 음반을 모조리 샀다.(물론 지인들과 술도 마셨지만 그 돈은 오히려 내 쌈지 돈으로 충당했다. 정말이다.) 바로 그 배낭 안에 오정희의 『바람의 넋』이 들어 있었다.

브레히트 시를 읽으면서 칼날 같은 언어에 매혹되어 있었던 터라, 언어를 부리는 사람의 자의식이 묻어나 있는, 그리고 그 언어에 절망해 본 사람의 글을 갈망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 자체가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권력의 횡포와 ‘밖’으로부터 주어지고 강요된, 무엇보다 치졸하게 합리화된 것들의 강압으로부터 간신히 고유성을 지키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오정희 소설은 그렇게 추억 멀리에서부터 시작된 내 첫 연애 상대였다.

오정희는 최근 산문집에서 「바람의 넋」의 은수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해 “예기치 않게 불쑥 얼굴을 내미는 생의 복병들” 때문이었다고 적어 놓았다. 예기치 못한 그 복병 때문에 누군가는 거리에서 죽어가고, 누군가는 더욱 치열하게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내면으로 파고들었을까. 삶의 “생의 복병들”은 언제가 본 것들 중에서 이해가 되지 않거나 어처구니가 없어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것들 속에 숨어 있는 것일까. 


수수한 용모와 성품, 은행원의 아내와 다섯 살배기 사내아이의 엄마로서 평균치의 소시민적 삶을 살게 될 당신에게 바람의 넋을 불어 넣은 것은 예사롭고 평온해 보이는 인간 내면의 무서운 불길과 회오리, 예기치 않게 불쑥 얼굴을 내미는 생의 복병들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내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떠도는 넋처럼 펄럭이는 바람소리와 깊은 적막감, 새하얗게 볕바른 마당에 나뒹구는 두 짝의 검정 고무신이었습니다.―오래 비어 있는 채로 퇴락해가는 집의 댓돌에 놓여 있던 신발이거나 어쩌면 교통사고로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의 발에 신겨져 있었던 검정 운동화에서 얻은 이미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오정희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 101면)


오정희의 『바람의 넋』은 나오기를 기다려서 샀던 책이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거의 다 읽었다. 뭔가를 비워낸 문체의 마력을 느끼면서부터 난 오정희 소설에 마니아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바람의 넋』에 실린 「동경」은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아 있었다. 어린 마음에 뭔가 해결을 해보겠노라고 열심히 해설을 찾아 읽었지만 ?동경?에 대한 해설만이 빠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동경」은 학생 운동을 하다가 죽은 아들을 마음에 묻고 살아가는 어머니가 끊임없이 옆집 어린아이의 도벽에 집착하는 일종의 편집증을 보이는 장면, 그의 아버지가 아들 영로를 묻고 돌아서면서 한 조각 거울을 묻었다고 회상하는 장면이 연쇄적으로 맞물리면서 거듭되는 의문만을 낳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거울이었을까. 아내는 무엇 때문에 어린 아이를 싫어하고, 심리적으로 괴롭히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는 어린 아이의 만화경을 훔쳤을까. 온갖 의문들은 갈수록 깊어졌다. ??유년의 뜰?? 해설을 쓰면서도 오정희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원형이 혹시 「동경」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강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이제 이 글을 통해 그 지난한 숙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다시 한번 왜 하필이면 ‘동경’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2. 미메시스-미메시스를 넘어서고자 욕망하다


 ?동경?은 오정희의 세 번째 소설집 『바람의 넋』에 실려 있다. 이 소설집에는 오정희가 1980년대 초중반에 쓴 소설들이 묶여져 있다. (참고로 『불의 강』과 『저녁의 게임』이 1970년대, 그리고 1990년대에 『야회』, 『불꽃놀이』, 『새』가, 1980년대에 『바람의 넋』이 나왔다.) 

오정희 소설에서 여성인물의 섬세한 내면이나 일상의 흔들리는 균열을 섬세하게 그려가는 화자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화자는 작가와 인물 사이를 떠다니면서 정황에 따른 심리적인 변화를 그대로 진술하거나 추론한다. ‘그’,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밖’의 서술자가 우세하며, 인물을 관찰하거나 사건을 이끌어가는 서술자의 태도가 지극히 섬세하다. 일종의 위장된 서술자의 냉엄하고 직관적인 시선에 의해서 인물들의 심리가 행동으로 객관화되어 자연스러운 울림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서술자는 독자에게 알 필요가 있는 것만 말해주며, 한번 내뱉은 말을 반복하거나 거기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소위 반영자(反映者)라고 불리는 이 위장된 서술자는 복잡한 정신적 경험을 비추는 잘 닦여진 맑은 거울이거나 카메라다. 하여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는 것이 없는 척 냉정한 시선으로 인물들을 관찰한다. 어린 소녀에서부터 나이가 든 중년의 여성에 이르기 까지 그녀의 소설에서 여성화자들은 다양하며, 그 만큼 다층적인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

「동경」에는 서술자에 의한 관찰자적 시선과 인물의 내적독백, 대화가 불규칙하게 섞여 있고, 동일한 장면을 바라보는 2중 혹은 3중의 균열이 존재한다. 이웃집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자. 먼저 ‘그’에게 이웃집 아이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유치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돌아다니는 아이는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내에게 이 아이는 죽은 아들의 유년을 떠올리게 하는 아픈 존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를 되비추는 대상이기도 하다. 미장원을 하는 아이의 엄마와 중동에 가있다는 아이의 아버지도 인물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으며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어긋나는 시선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죽은 아들 영로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갈라지고 분열된다. 서술자의 시선 또한 소설 안에서 인물들을 따라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더욱 혼란스러운 문구로 대치시키기도 한다. 서술자는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고 어딘가로 숨기도 하면서 소설의 ‘안’과 ‘밖’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든다. 일종의 복화술을 부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뿐만 아니라 「동경」의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한 ‘거울’의 이미지 또한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거울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이들의 욕망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비추면서 ‘반영’을 넘어선 또 다른 ‘반영’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오정희가 「동경」을 통해서 미적 주관성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순한 미메시스를 넘어선 미메시스에 대한 욕망과 언어에 기초한 현존의 이상을 자신의 몽환적인 지평이 「동경」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3.  ‘그’-만화경을 훔치다


공동체를 유지해주는 유령들이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출몰하면서 죽지 않는 유령. 공동체는 상징적인 전통을 지키고 따르는 행위적인 것이 아니라 결핍과 왜곡을 통해 끊임없이 행간 사이를 떠도는 외상적인 환상, 그 비밀의 역사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다. 정말로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도 그 외상적인 환상에 일조하며 경험적인 과거 또한 ‘기억’이란 그물에 걸린 환상을 만들어내고 유령들을 불러낸다.

그러나 「동경」의 ‘그’에게는 그런 유령이 출몰하지 않는다. ‘그’를 구성하는 현실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가. ‘그’는 직장을 다니다 정년퇴직을 했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는 누구보다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일처리도 정확해서 신임을 얻었다. 특히 글 쓰는 일에 다른 사람보다 더 재능이 있었으며 상사는 그런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버려질 휴지에 쓰는 글일지라도 함부로 쓰는 일이 없었으며 스스로 자신의 반듯한 글쓰기에 자신감을 갖고 살아왔다. 이렇게 빈틈없는 성격의 소위자인 그에게 다 빠져버린 이빨 구멍을 메우는 틀니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은 못마땅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완벽한 자신의 신체에 뚫린 구멍이란 일종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틀니라니. 그는 평생을 시청 하급관리로 살아왔다. 상사의 지시나 그의 부서에서 결정된 내용을 기안하고 깨끗이 정서하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일의 거의 전부였다. 그는 글씨 쓰는 일을 좋아했고 약자나 오자를 쓰지 않았다. 자신이 올린 서류가 결재가 난 뒤면 타이핑이 되어져 곧 휴지통에 버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정확하고 반듯한 글씨에 기쁨과 긍지를 느꼈다. 그의 부서 책임자들은 그가 정리한 서류를 볼 때면 한결같이 말했다. 자넨 글씨가 좋군.(164)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고 안심하게 해주었던 글쓰기와 대조적으로 틀니란 구멍 안 자신의 일부를 메워주는 땜질용 수단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적으로 이전 목표가 분명했던 자신의 삶과는 다르게 오히려 자신에게 난 ‘구멍’에 집착한다. 거리를 걷거나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라본다는 의식조차 없이”(161) 바라보는 것이다. 산책을 하긴 하지만 거기에 대한 뚜렷한 목표도 없다. 그러므로 날씨가 더워지면 그만 두면 그뿐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규칙에 얽매이려고 노력한다. 흰머리가 생길 때마다 부지런히 염색을 하며 가능하면 시간의 변화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부단하게 노력한다. 


그는 스스로가 정한 몇 가지 규칙과 질서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얻어지는 성과를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겼다. 하루하루가 마치 당기지 않는 입맛으로 억지로 숟갈질을 하듯 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정지할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결코 모르는 것처럼 육체와 생활을 지배하는 규칙과 리듬에 순종하는 기쁨을 느꼈다.(162)


그는 자신에게 억압되어 있는 기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며, 문자 그대로 문자적 의미에서 자신의 환영(delirium)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특별하게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가 단 한 가지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만화경’이다. 옆집 어린아이가 갖고 노는 만화경을 갖고 싶어 하며 심지어는 몰래 훔치기까지 한다. 아이는 만화경이 없어져서 여기 저기 찾고 다니지만 그는 모른 척한다. 왜 그토록 만화경에 집착하는가. “아이의 눈이 되어 아이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만화경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품에 감추고 어제 오후 내내 그는 잃어버린 만화경을 찾기 위해 헛되이 모래 더미를 헤치는 아이”(170)를 지켜본 이유가 도대체 뭘까. 그는 “뭐든지 볼 수 있대요”라는 아이의 말을 흉내 내어 중얼거리며 빠르게 만화경을 돌리면서 무엇인가 신기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정작 만화경 속에서 발견한 것은 현란하지도 신기하지 않은 빛의 집합과 확산일 뿐이었다. 아이가 보았던 신비한 빛의 세계가 그의 눈에는 비치지 않는다. 


그는 만화경을 눈에 갖다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잘게 자른 색종이 조각들이 거울면의 굴절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며 여러 가지 꽃 모양을 만들었다. 만화경 속의 조화는 현란하지 도 신기하지도 않았다. 홑잎과 겹잎꽃의 단순한 집합과 확산일 뿐이었다. 옛사람들은 만화경을 돌리며 우주의 원리와 이치를 본다고 했다.(169)


만화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통 속에 여러 가지로 물들인 유리조각을 장치하고 또 사각형의 유리판을 세모지게 짜 넣어 통 끝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면 온갖 형상이 대칭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통거울이다. 사물을 대칭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적 형식의 면에서 본다면 수직 축을 중심으로 좌우 두 부분이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하나의 대칭을 이루는 모양. 그런데 그가 만화경을 통해 확인한 것은 대상 하나, 즉 중심이 분명한 어떤 대상의 집합과 확산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모양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만화경의 판타지를 보지 못하듯이 삶과 죽음이 서로 대칭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 기저에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욕망의 틈새가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이력을 통해서 어느 순간도 실현되지 못한 채 안에서 쪼그라들어버린 욕망의 찌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아들 영도가 죽었을 때도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애도하며 영도를 묻었다. 문제는 바로 이 장면에서 드러난다. 학생 운동을 하다가 죽은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영도는 20살에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영혼이다. 부모로서 그 장면을 떠올린다는 것은 생의 마지막 바닥을 치는 고통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삶의 구멍을 인정하지 않고 모르는 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땅 속에 ‘아들’을 묻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죽은 아들의 몸이 썩어가고 서서히 사라져 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땅 속에 아들이 아니라 ‘거울’을 묻었다고 생각한다. 원시적인 상상력 안에서 영로를 죽지 않은 영혼으로 땅 속에서 되살려 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언젠가 박물관 전시실에서 본 동경, 다시 말하면 죽음 사람들의 부장품들과 함께 묻어 둔 오래전의 거울을 꺼내 다시 녹을 닦아낸 거울에서 그가 확인한 것은 바로 옛날 사람. 이미 죽어버린 사람의 형상이다. 그에게 죽은 사람, 혹은 죽음이란 어느 정도 덤덤하게 받아 드릴 수 있는, 말 그대로 특별한 갈등과 상처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죽은 아들 영로에 대한 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토우(土偶)나 동경(銅鏡) 따위 죽은 사람들의 부장품들만을 진열한 방이었다. 땅 속에 묻혀 천년을 산, 이제는 말끔히 녹을 닦아 낸 구리거울을 보자 그는 자신이 아주 오랜 전에 죽은 옛사람인 듯 느껴졌었다. ―영로를 묻었을 때 그는 그가 묻고 돌아선 것이, 미쳐 가는 봄빛을 이기지 못해 성급히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가 아니라 한 조각 거울이었다고 생각했었다.(173)


물론 여기에는 루이스 캐롤이 <거울의 나라 엘리스>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집 안에 거울을 묻어 두면 영혼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신화적 상상력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동경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거울이 상징하는 영혼의 다중성, 시간적 거리를 소멸시키면서 유령을 불러오는 거울의 신화성, 상징적 의미를 넘어선 곳에 ‘동경’이 있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꺼내서 닦으면 뭔가를 비추어 주는 거울은 항상 자신 본연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무덤 속의 거울을 통해 그가 확인하는 하는 것은 아들 영로가 아니라 어쩌면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울은 단순한 거울이 아니라 동경이었다는 것이 문제적인 국면이다. 자신의 모습조차 제대로 비추어보지 못하고 땅 속에 묻혀 있는 아들 영로는 결코 밝은 겨울일 수 없다. 닦아서 보고자 하는 욕망을 좌절시키거나 적어도 그 오만함을 깨닫게 해주는 동경이어야 하는 것이다. 깨지지 않은 채 분열의 위험을 견디는 동경으로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볼 수 있을까. 거기에 동경의 존재론적 한계가 있다. 동경은 죽은 자의 영혼을 보여주는 대상일지는 모르만 자신의 은밀한 내면까지 볼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의 비밀스럽고 은밀하며 철저하게 감추어진 욕망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문제는 그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


그는 이제 늙어 귀신이 다 되었다고 집의 한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집안 곳곳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보고 들 수 있다는 아내도, 그가 비듬을 털고 손톱을 깎고, 억지로 책상 앞에 앉은 숙제하기 싫은 아이처럼 서랍이나 여닫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에 아내 모르게 행하는 하찮은 손짓 하나라도 대단한 음모인 양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다.(169)


그에게 남은 욕망은 누구에게도, 아내에게조차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방을, 아무도 침투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온갖 신비한 것이 다 보인다는 만화경으로도, 동경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틈새로 무엇이 보이는가. 바로 일상이다. 어떠한 인상인가. 손톱과 발톱을 깎는 일, 혹은 혼자서 비밀스럽게 책상 서랍을 열고 뒤지는 일 따위의 것. 아내조차도 모르는 내밀한 자신의 방에서 향유하고 싶은 일상만이 고요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자신만의 구멍. 그는 그 구멍 속에 들어가 편안해 하며 들킬까봐 불안해한다. 땅에 묻은 동경은 그 일상을 되비추는 낯익은 자신일 뿐인 것이다.  

   


4. ‘아내’-착한 아이는 꽃을 꺾지 않는다고 말하다


「동경」에서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은 서술자의 눈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눈에 의해서 되비추어진 아내의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아내를 따라다니는 외부의 시선은 그녀의 심적인 상태를 한번도 정확하게 언급하나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유추, 상상해야 한다. ‘그’의 움직임과 동선의 의미가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반면에 아내의 경우 그 움직임이 내면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어 섣부른 추론을 배제하게 한다. 르끌레르(S. Leclaire)가 기표는 문자인 동시에 신체이고 진정한 의미의 기표를 구성하는 것은 신체의 움직이며 문자는 단지 선택적으로 고정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오정희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와 달리 아내에게는 죽은 아들을 대신할 동경(銅鏡)이 없다. 그녀의 의식 속에서 땅 속에 묻은 것은 동경이 아니라 아들 영로다. 원시적인 영혼에 대한 믿음으로 다른 세상으로 가서 살아 있을 아들을 기억하며 충분하게 애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 배선 공사를 하려고 집에 온 아들 또래 청년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내가 청년에게는 과도할 정도의 애정을 보이면서 어린 유치원생이 아이에게는 계속 상처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계속 집 안에 들어와서 무엇인가를 훔쳐간다는 망상을 떨치지 못하며, 옷에 더러운 것이 묻으면 엄청나게 혼이 나는 아이를 향해 옷이 더러워졌다고 알려주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를 울리기도 한다. 꽃잎을 손가락으로 비비는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참지 못하여 “너는 정말 말을 안 듣는구나. 못된 아이야. 혼 좀 나야 알겠니?”(175)라고 하면서 한 손을 치켜들고 눈을 부라리기까지 한다. 아내는 영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키우고 그  대상 파괴의 욕망을 아이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한 파괴적인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내는 그와 달리 ‘타인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참 이상하죠. 난 요즘 자주 죽은 사람들 생각을 한다우. 꼭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사람들 생전의 일이 환희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정작 우리가 살아온 세월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 희미한 꿈같아―스무 살 때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웠어요. 대학에 들어가던 해였지요. 어제처럼 또렷이 떠오르는 걸요. 늘 발이 가렵다고 했지요. ―기억나세요? 시공관에 구경을 갔던 게 다섯 살일 때일 거예요. 그 때 그 애는 내 숄을 잃어버렸어요. ―구경을 하고 나와서 화장실에 들르려고 잠깐 그 애 어깨에 걸쳐 주었는데 흘러내리는 것도 몰랐나 봐요. 그 앤 그렇게 멍청한 구석도 있었죠. ―겨우 스무 살이었어요. 스무 살에 뭘 안다고. 여드름이나 짤 나이에 세상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요. 그 애가 죽었어도 우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177-8)

  

이처럼 그녀는 아직도 영로를 기억하면서 괴로워한다. 영로는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은 영혼이며, 그 영혼을 자신도 사회도 지켜주지 했다는 것이 그를 쉽게 애도하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거울에 반사되는 영혼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시간들을 되새기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시달리는 죄책감이란 범박하게 말하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그녀에게 자학과 비난 죄의식은 점차로 강해져서 세상에 대한 혐오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신조차도 그녀에게 위안의 대상이 아니다. “땅 속에 갇힌 생명, 땅 속에 갇혀 아우성치는 빛들―땅 속에 갇힌 아우성을 들으려는 시늉으로 수굿이 귀를 기울이며 나무를 보라보는 사이 무성한 나뭇잎은 편편이 떨어져 내리고 메마른 가지만 섬유질로 남아 파랗게 인(燐)처럼 타오르며 자랑스럽게 가지 뻗었던 자리는 이윽고 냉혹한 죽음만이 떠도는 공간이 된다.”(163) 바로 그 순간 시간의 흐름에 균열을 내고 달려오는 아이는 토우나 동경으로 치환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시간의 응어리들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매개인 것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거울은 바로 그 아이였던 것이다. 만화경을 보며 불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우주의 한없음을 재미있어 하던 아이, 꽃밭의 꽃을 훼손시키거나 유치원을 빼먹고 노는 아이, 옷이 더러워지면 엄마에게 혼날까봐 두려움에 떠는 아이, 살아온 삶의 나락 저편에서 항상 시간의 균열을 내고 비집고 들어오던 삶의 환상. 그것은 그녀가 두려워하면서도 언제나 닿고 싶은 동경(憧憬)의 세상이었다. 



5. ‘관계’-밖에 존재하는 전율, 그 어긋남을 말하다


사랑이란 주체를 전율시키는 둘(Deux)이라는 것임을 코르네이유, 베케트가 이미 우리에게 말해준 바 있다. 사랑에 의해서 진리도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사이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의 말처럼 개인의 경험이란 완전히 다른 것이고 하나로 통합된 통로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확인하면서 관계는, 사랑은 산출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진리는 상호간의 자립적인 개인성의 존중만이 진정한 사랑에 다가가는 진리일지도 모른 다는 것이다. 사랑은 황홀경의 하나(I'Un)가 아니라는 것. 가족과 사랑은 그렇게 어긋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관계란 일종의 사건이며 우연한 것이며 예측 불가능 한 것이다.

삶의 충동과 죽음 충동 사이.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죄의식에서 비롯된 대상파괴의 욕망. 그리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지 못한다는 사실. 거울의 기표가 탈중심화시키는 매개적인 언어의 놀이, 오정희 소설의 비의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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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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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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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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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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