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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옵스큐라

  • 작성일 2007-11-02

 

[조경란이 만난 사람 8] 사진작가, 주명덕



카메라 옵스큐라




글을 쓰는 일은 물론 쉽지가 않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역시 소설가가 된 것 같다. 소설가가 되어서 좋은 일 중 하나는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종종 생긴다는 거다. 농담 아니다. 은근히 더 기분 좋을 때는 그 유명한 상대방이 되레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해 줄 때다. 이건 농담이다. 너무 여러 번 한 소리지만, 청춘시절엔 한동안 방에 틀어박힌 채 내도록 책만 읽은 적이 있었다. 남독(濫讀)에 가까울 정도라 좋지 않은 책도 더러 읽었으나 그런 시행착오 덕에 좋은 책을 선별할 줄 아는 눈이 제법 생긴 게 사실이다. 그땐 책 욕심도 있어서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손에 쥐어 주곤 했던 용돈을 매번 모두 쏟아 부어 책을 사들이곤 했다. 그때 모았던 책들 중에 ‘열화당 사진문고’ 시리즈들이 있었다. 그때는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1세대에 속하는 주명덕 선생이나 강운구 선생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스물두어 살의 나는 그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전형적인 ‘히키코모리’였으니까.

 

지난해 7월. 부정기적으로 모여 함께 밥을 먹곤 하는 모임의 선생들이 내가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에 밥을 사 주겠다고 하여 교보문고 2층 식당에서 만났다. 가벼운 프랑스식 점심을 먹고 Y선생은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으로, P사장님은 출판사로 들어가고 건축가 K선생과 나, 이렇게 둘만 남게 되었다. 몇 시간밖에 못 자고 기껏 일찍 나왔는데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뭣해 K선생과 광화문 근처에 있을 강운구 선생에게 연락해 모처럼 셋이 커피 한잔 더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부암동 ‘카페 에스프레소’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이 다 차 있었다. 커피가 맛있는 건 나도 알겠는데 손님이 더 많아질수록 종업원들이 불친절해지는 게 느껴져 자주 오게 되지 않게 된 곳이다. 강운구 선생이 곧 여기로 오기로 했는데 어쩌나, 그냥 나갈 수도 없고. 실내를 두리번거리던 K선생이 아, 저기 합석하면 되겠다! 하더니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이 앉을 만한 테이블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어른과 한 여성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노인, 어쩐지 낯이 익다, 라고 생각하며 K선생 뒤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K선생이 그 노인에게,

“아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곤 철퍼덕 자리에 앉는다. 그리곤 나를 돌아보더니

“주명덕 선생님 아시죠?”

한다.

……아, 주명덕 선생님! 그럼요, 알다마다요.

나는 수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주명덕 선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환히 웃으며

“아, 어서 앉아요.”

했다. 

원래 가만히 있어도 웃는 얼굴인지, 선생은 내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틀린 짐작이라는 건 그 후 일 년이 더 지나서야 알게 된다.

십여 분 후쯤 강운구 선생이 카페로 왔다. 나는 강운구 선생과 주명덕 선생이 주고받는 말에 귀 기울였다. 형과 아우 혹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서로 무람없이 안부를 묻고 그 자리에 없는 구본창 사진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마치 그들의 사진집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던 스무 살 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선생들 말에 고개나 끄덕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강운구 선생은 주명덕 선생을 처음 만나던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졸업을 앞두고 사진으로 먹고 살 일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던 중에 조선일보사에서 견습기자를 뽑는 광고를 보았다. 그리고 합격했다. 그때 그 회사의 사진부장이 정범태 선생이었다. 견습기자 노릇하며 몸살하고, 코피 흘리고 하던 어느 날 주명덕(朱明德) 형이 내가 서울에 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전시회를 통해서 서로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첫 대면이었다. 그 뒤 주명덕은 친구로서 형으로서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다. 크게 싸울 일이야 없었지만 작게 다툴 일은 더러 있었다. 번번이 주명덕은 형으로서 너그럽게 져 주었다.’

                                     ―열화당 사진문고, 『Kang Woon-Gu』중에서―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 위의 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평소 말이 거의 없는 강운구 선생이 주로 말을 하고 있었고 주명덕 선생은 그저 웃거나 맞장구를 칠 따름이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강운구 선생이 말을 많이 할 때는 상대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좋아할 때다. 설혹 다툴 일이 있어도 번번이 주명덕 선생이 너그럽게 져 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났다.

한가로운 오후의 티타임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나를 힐긋 바라보던 주 선생이 사진을 찍고 싶은 얼굴이네, 하며 말끝을 흐렸다. 선생에게 사진을 찍히는 일이라면 오래전부터 그분 사진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뜻밖의 선물처럼 즐거운 일이겠으나 나는 정말요?라는 애매모호한 대꾸를 맥없이 했다. 김흥수 화백을 만났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아트 페어 오프닝 때 여러 사람들 속에서 김화백과 첫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선생이 문득 그리고 싶은 얼굴이네, 라고, 진짜로 나를 그리고 싶다는 눈빛으로 말하였다. 그게 사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정말로 연락을 드려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갈등하기도 했다. 딱 육개월 후, 권이나 선생이 상을 받던 ‘석주 미술상’ 시상식 때 선생을 다시 만났다. 아니 그건 만났다, 라는 말은 틀린 것 같다. 먼발치서 선생을 발견한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이 짙은 선글라스를 콧등으로 천천히 밀어 올리며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주명덕 선생 일행은 카페에 남고 강운구 선생과 K선생, 그리고 나는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구본창 사진전’을 보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카페 유리문 앞에서 선생은 다시 나에게 사진을 꼭 찍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두 달 후 베를린에서 돌아오는 대로 연락드리겠다고, 못 지킬 것 같은 약속을 하곤 꾸벅 인사를 드렸다. 

그것이 선생과 나의 첫 만남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나는 단박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인지 아니면 그 자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인지 알아차린다. 맞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대개는 내 직감이 맞는다. 주명덕 선생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베를린에 돌아와서도 해가 바뀌어도 계절이 다시 일 년 전으로 돌아왔어도 연락하지 않았다. 망설이기만 했다. 용기를 내어 전화했는데,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하며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쩌나. ……어쩌긴 뭘 어째? 그냥 피식 한 번 더 웃고 말면 그만이지! 그렇게 마음먹게 되기까지 일 년 넘게 걸렸으니 나도 어지간하다. 시간은 더 자꾸 지나갔다. 마음에 자꾸 걸렸다. 내 경험이지만, 지금 마음에 걸리는 건 나중에도 걸리고 지금 안 해서 후회할 것 같은 일은 나중에도 꼭 후회하게 된다. 에라 모르겠다, 기억을 하든 말든!

선생과 처음 만난 지 일 년 삼 개월 만에 나는 전화를 드렸다.


선생이 태어난 해가 1940년이니, 우리 아버지보다 두 살 연상이다. 선생은 황해도에서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산을 열심히 찾아다니던 서울중고등학교 시절, 산악 사진가 김근원 선생을 만났고 선생은 ‘작고하시기 전까지 평생토록 무엇이든지 마음으로 믿어 주는 유일한 분’이 되어 주셨다고 한다. 1966년, 화랑이나 갤러리 같은 게 거의 없다시피 했던 그 시절 선생은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첫 개인전 <포토 에세이-홀트씨 고아원>을 연다. 훗날 우리나라 사진 역사에 기록을 남게 될 그 ‘사회성을 띤’ 첫 전시회를 통해서 선생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진작가로서 크게 이름을 얻게 된다. (선생의 많은 사진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 고아원의 아이들을 찍은 사진들이다.) 그 후 중앙일보 출판국 《월간중앙》에 입사해 1973년까지 사진 기획 및 편집 일을 하게 되고 1988년에는 성철(性澈) 종정 사진집 『포영집(泡影集)』, 그리고 성철 스님 열반 후 생전의 모습과 다비식 과정을 담은 사진집 『성철 큰스님』을 출간하게 되어 사진작가로서 다시 한 번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선생은 지금도 ‘가까이서 오랫동안 성철 스님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겐 큰 행운이었다’라고 고백한다. 나중에 내가 ‘성철 스님은 어떤 분이셨어요?’라고 물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성철 스님은 선생께 한 번도 친절했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까지 유일하게 주 선생에게만 당신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묵인해 준 사실은 사실 ‘친절’ 그 이상이 아니었을까. 선생은 성철 스님 생전에 유일하게 ‘포즈’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지난해 6월에는 경주 아트선재에서 습작기부터 최근까지의 모든 작품을 보여 주는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어떤 약속이든 십 분쯤 늦는 걸 예사로 아는 나는 그날은 딱 오 분 늦었다. 교보문고 소설 코너에 선생이 서 계시는 것이 보였다. 전화하길 잘했다. 아주 오랫동안 알아 왔던 선생 같다. 선생도 그랬는지 어쨌는지 반갑게 내 팔을 잡아끌곤 ‘커피가 아주 맛있다’는 찻집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생 사진을 찍어 온 선생의 작품세계는 세 번 변화했다. 현실의 단면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회학자 이효재 선생과 공동작업으로 연재했던 ‘한국의 가족’ 시리즈, 그리고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던 ‘풍경사진’. 그러나 선생이 가장 관심을 갖는 대상은 역시 ‘인물’이다. 그의 1960년대 70년대 사진에는 유난히 인물을 찍은 사진들이 많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 고아들, 보호시설에서 지내는 노인들, 집이 없는 사람들. 사진 속 인물들은, 그러나 아무도 슬프고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의 눈빛은 어떤 불가사의한 존엄성과 생에 대한 희망, 기다림, 뭐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인다. 한 사진 평론가는 이것이 바로 사진작가가 그들을 바라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거라고 말한다. 실제로 선생은 자신의 사진이 보는 사람들에게 센티멘털리즘을 부추기는 것,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삶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 중심의 가치나 전통의 힘, 잃어 버린 것에 대한 소중함과 향수를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것은 아마 ‘인간’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은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할 작업일 것이다.

 

 



한번 만나니 자주 만나게 된다. 10월에는 선생을 무려 세 번이나 만났다. 만날 때마다 우리는 종로구청 뒤 ‘커피 친구’에서 정말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밥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맛있는 식당이라면 제법 알고 있는 내가 무색할 만큼 선생은 장안의 맛있는 거의 모든 식당을 섭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 번 만나 선생과 함께 간 식당은 황해도식 굴밥으로 유명한 ‘풍년 명절’, 이따금 나도 불고기와 냉면 생각이 나면 가곤 하는 ‘우래옥’(여기서는 평범한 불고기를 ‘특별하게’ 먹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떡갈비로 유명한 ‘목포집’, 이렇게 세 군데 식당을 순례했다. 나는 먹는 일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충 아무 거나 먹자’는 사람도 싫고 또 ‘꼭 그걸 먹어야 된다’고 까다롭게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싫다. 상황에 따라 나는 그 중간쯤 되는 사람인데, 같이 밥 먹을 사람도 그런 타입이면 아무리 가깝지 않은 사람과는 밥을 잘 먹지 못하는 나로서도 별 문제가 될 게 없다. 선생과는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겁지만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정말 어느 책에서도 읽어 보지 못한 신기한 이야기들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러느라 밥 먹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길어질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한때 선생의 집에는 하룻저녁에도 이삼십 명씩 후배들, 친구들이 저녁을 먹으러 드나들곤 했다고 한다. 선생에게 최초로 미각에 대해 알게 해 준 사람은, 1960년대 미국 유학을 한 큰누님이었으며 그 첫 번째 것이 바로 ‘커피’였다고 한다.     


천천히 지하철역 쪽으로 걷던 선생이 문득 한숨처럼, 혹은 혼잣말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변할 기회를 갖고 싶다.’ ……다 알아듣는 척,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육십 세가 되던 해, 후배 사진 작가들(강용석, 구본창, 김영신, 박주석 등)이 만들어 준 『주명덕 초기 사진집』후기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다 솔직하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의 작업은 철저한 파인 아트 영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사진은 세 번 변해 왔는데 지금 욕심 같아서는 앞으로 두 번 더 변할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신의 축복이 필요하겠지요.’


나는 방금 전, 카페에서 손때가 묻어 더 근사해 보이는 ‘라이카’ 카메라를 들어 내 쪽을 향해 셔터를 누르던, 순간 웃음도 미소도 말도 사라지고 번쩍! 하고 빛나던 선생의 한쪽 눈빛을 떠올린다. 사진을 찍을 때의 선생은 커피를 마실 때의 선생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 순간적으로 나는 긴장한다. 그러나 곧 저것이 ‘작가’의 모습일 거야, 라고 생각한다. 나는 라이카를 피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린다. 지금까지 내 문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달라졌다면 어떻게, 달라진다면 어떻게, 무엇을 향해서 다가가야 할까. 앉은 채로 나는 그런 상념에 빠져 있었다. 만약 나에게도 저런 번쩍! 하는 빛이 있다면 그 빛은 불합리하고 파괴적인 것, 증오와 어둠을 지나 내일로, 미래로 향하게 해야 할 텐데.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진실한 모습을 향해. 선생과 나는 침묵을 지키며 계속 걷는다. 나는 다시 의문에 잠긴다. 만약 내가 언젠가 육십칠 세의 소설가가 된다면, 그때 나에게는 다시 한 번(아니 두 번씩이나!) 내 작품세계를 뒤바꿀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열정이 남아 있을까, 없을까? 힘겹게 그런 것을 시도하고 싶을까, 아닐까? 소설을 계속 쓰기는 하고 있을까, 아닐까?

밤 11시의 거리, 나는 선생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그 얼굴 어딘가 전봉건 시인이 그에게 지칭해 준 ‘작가 정신’ 같은 게 남아 빛나고 있는. 전봉건 시인이 그의 사진에서 본 것은 ‘사진’이 아니라 ‘빛의 흐름’이다. ‘빛의 정신’이다. 그것을 시인은 ‘작가 정신’이라고 말했다. ‘한 장의 종이에 구워 놓은 영상. 그 안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게 흐르고 있는 빛의 정신이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생각게 해 준다’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이 왔다. 아아, 육십칠 세.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있지만 단 한 가지는 내 자신에게 호기롭게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뭐가 됐든, 소설, 쓰고는 있을 거야! 라고.



*P.S: 그나저나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내게 선생이 내준 숙제, 즉 ‘사진 일기’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공이 많이 드는 일이라 요즘 쩔쩔 매고 있는 중이다. 공연한 얘기를 했나 보다, 후회할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사진 한번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은 일은 나중에도 꼭 후회하게 되어 있으니까.《문장 웹진/ 2007년 11월》           

 


                                                        

* 주명덕(朱明德) 사진작가. 1940년 황해도 출생. 경희대학교 사학과 졸업. 2005년 10월 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위원장. 1999년~2002년 민족사진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다큐멘터리 사진, 문화유산 기록, 초상 사진, 자연과 도시 풍경 등 사진의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사진작가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전쟁이 낳은 혼혈고아들, 인천 중국인인촌, 서울시립아동병원 등 소외된 계층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 사진의 ‘사회적’ 기록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1980년대 말 선보인 ‘주명덕의 검은 풍경’은 언어화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것, 말 바깥의 그 무엇을 시각적으로 추구한 독특한 경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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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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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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