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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를 만나다

  • 작성일 2008-02-11

[조경란이 만난 사람]⑨- 現代文學, 양숙진 주간



숙녀를 만나다




누군가 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싶은 날


장편소설을 끝내자마자 뭣에 홀린 듯이 사흘 만에 단편소설을 한 편 쓴 적이 있다. 몇 달 동안 매일 매일 앉아 왔던 책상을 떠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미리 구상해 둔 게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아무려나 내 소설 중 가장 분량이 짧고 명랑한 그런 소설을 썼다. 그게 지난 가을의 일이다. 그 후 책상 앞에 앉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단편소설을 쓰고 싶었을 거다. 한번 책상 앞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애를 써야 한다는 걸 뻔히 잘 알고 있으니까. 소설쓰기란 오래했다고 해서 점점 쉬워지는 것도 만만해지는 것도, 딱히 지름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쓸 때마다 언제나 곤혹스럽다 못해 좌절감을 느끼기까지 할 때가 있다. 게다가 너무 오래 쓰지 않으면 그나마 글쓰는 솜씨도 어째 퇴행해 버린 건 아닐까, 스스로 의심스러울 때도 많다. 대가들의 인터뷰나 산문을 읽다 보면 그들은 조금씩 매일 매일 쓰는 것 같다. 그것 참 좋은 방법일 것 같은데, 난 평생 못할 것 같다. 나는 오래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첫 문장이 떠오르면 그날부터 일상적인 생활은 잠시 접어 둔 채 하루를 삼등분으로 나눠 자고 먹고 쓰고 자고 먹고 쓰는 타입의 작가인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갖고 있는 최상의 집중력, 육체적인 에너지를 다 쏟아 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따지고 보면 쓰는 날보단 쓰지 않는 날이 훨씬 더 많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매일 매일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지만 일기는 제법 자주 쓰는 편이니 그걸로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까.


아무튼 몇 개월 만에 단편소설 한 편을 쓰고 나니 ‘잠수’한 지 열이틀 만에 밖에 나가고 싶어졌다. 나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술도 한잔 걸치고 찬바람도 쐬고 책도 사고 음반도 사고 싶다. 혼자 뭘 하는 데 퍽 익숙한 편이어도 원고 마친 날 만큼은 정말이지, 안나 가발다의 소설 제목처럼 ‘누군가 날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저녁엔 현대문학 양숙진 선생과 저녁 식사 선약이 있었다. 밖에 나가고 싶었는데, 다행이다. 한번 ‘잠수’를 타면 휴대전화도 물론 꺼 놓는데 그래도 틈틈이 메시지 같은 건 확인하곤 한다. 뭐랄까.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고독을 원하지만 고독에 대한 증인이 필요한 그런 심정이랄까. 문자메시지는 이랬다. ‘하여간 잠수하는 버릇, 그 단호함이 신통해요. 빨리 수면으로 급부상하길 소망, 2월 5일 교보문고 이층 라브리에서 만나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이라는 부사는 양선생의 단골 어법이다. 이를테면, 하여간 그 사람은 왜 그런 짓을 할까? 하여간 못 말리는 사람이지 뭐예요, 하여간 그 작간 정말 끝내주게 잘 쓰잖아? 하여간, 하여간…… 나는 외출 준비를 한다. 문득 다른 일행이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는 그런 자리엔 안 가지만 양선생이 초대한 자리라면 간다. 그러고 보니 양선생과 이제 꽤 ‘우정’이라는 게 생긴 모양이다. 물론, 처음엔 안 그랬다.


 




상원사에 가다


나는 대개의 도덕주의자들처럼 소심한 데다 붙임성도 없고 인사성도 없는 사람이다. 친구가 없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소심하고 붙임성도 없어서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과 가까워지지 못한 적도 많다. 어째볼 도리가 없지만 역시 성격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게다가 처음 만난 사람이 생김새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내면 나는 정말 까칠하게 반응한다. 처음 만난 사람이 내 소설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좀 납득할 수 없는 데가 있긴 한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양선생을 처음 만난 건 인사동 ‘평화 만들기’ 화장실 앞에서였다. 화장실에서 막 나오는데 거기 나처럼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 단발머리를 한, 또 나와는 다르게 체격이 아주 좋은 한 여성이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조경란씨?’ 했다. 그리곤 잡지에서 얼굴 많이 봤어요, 했다. 역시 난 까칠하게 네, 그러곤 그만이었다. 그러느라 작가가 되기 아주 오래 전부터 《현대문학》을 매호 구독하고 있다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월간지라는 것도 말하지 못했다. 게다가 《현대문학》은 등단작 이후 처음으로 내 소설이 게재된 그런 지면이기도 했는데.

 



불문학자 김화영 선생에게 연락이 왔다. 현대문학 편집위원들이 상원사로 1박2일 여행을 가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상원사, 적멸보궁 앞에서 보는 보름달이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고 했다. 달은 원래도 아름다운데 기가 막히게까지 아름답다면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걸까?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현대문학 건물 앞에서 막 자동차를 주차하고 있는 양선생을 만났다. 내 기억으론 그게 두 번째 만남이고 지금으로부터 한 오년 전 일이다. 기껏 들떠서 갔는데 운이 좋지 않았는지 그날 밤 흐리고 안개가 가득했다. 보름달은 터진 노른자처럼 불분명하고 희끄무레해 보였다. 그래도 달을 볼 땐 언제나 기분이 좋다. 나는 내 옥탑방이 있는 옥상에서 보던 달을 떠올렸다(그 후 돌아와서 「나는 봉천동에 산다」를 썼다). 모두에게 거기서 보는 크고 선명한 그런 달을 보여 주고 싶었다.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동행자가 중요할 때가 많다. 달이 흐리거나 말거나 유쾌하게 웃고 떠들면서 저녁도 술도 맛있게 먹고 마셨다. 그러는 사이에 양선생과 《현대문학》 윤희영 팀장이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머물게 될 숙소에 문제가 생겨 여기저기 숙소를 알아보러 다닌 모양이었다. 자동차가 없으면 기동력이 전혀 없는 그 한적한 일대를 줄곧 걸어 다니면서 말이다. 결국 여성들은 모두 한방에서 자게 되었다. 겨우 하룻밤이었는데 선생은 다른 여성들, 김소연 시인, 윤희영 팀장, 그리고 나에게 몹시 미안해하였다. 정말 그럴 일은 아니었는데.

 



 

이런 여자가 좋더라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가장 연장자인 양선생이 먼저 욕실을 쓰기로 했다. 잠시 후 머리에 커다란 타월을 두른 양선생이 나왔다. 일본 온천에서나 입는 ‘유카타’처럼 소매가 넓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더 이상한 사람 같다. 선생이 하는 양을 왜 그렇게 유심히 봤는지 모르겠다. 이미 나는 선생에 대해 어떤 장난스런 호기심 같은 걸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선생이 이불을 펴고 반듯하게 누웠다. 그게 마치 차렷! 자세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쿡쿡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래도 궁금한 건 역시 못 참겠어서 그 옆으로 살금살금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선생에게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왜 베개는 안 베고 주무세요? 선생이 말했다. 목에 주름 생겨서요.

어쩌면 바로 그 순간이었을까. 양선생한테 ‘인간적인’ 친밀감 같은 게 생긴 때가(선생이 지난해 육순이었으니 그때는 오십대 중반쯤 되었겠다). 나는 정말 단박에 선생이 좋아지고 말았다.


여성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런 타입의 여성들을 좋아한다. 변진섭 버전으로~: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 짧은 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 다리가 예쁜 여자, 진주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여자, 검은색이 잘 어울리는 여자, 포크와 나이프를 우아하게 사용하는 여자, 운동을 열심히 하는 여자, 책을 많이 읽는 여자,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 엽서를 자주 쓰는 여자, 운전을 잘하는 여자, 하이힐이 잘 어울리는 여자, 운동화가 잘 어울리는 여자, 웃는 게 매력적인 여자,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여자, ‘나이’를 무기로 삼지 않는 여자, 경청을 잘하는 여자, 밥을 잘 사주는 여자,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 여자, 너무 마르지 않은 여자, 목소리가 좋은 여자, 싫고 좋은 걸 분명하게 말하는 여자, 그리고 책을 만드는 여자.


그 여행 후, 일 년에 한두 번쯤 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작가와 편집인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서로 호감은 있어도 사적으로 친밀해졌거나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다. 어느 땐 데면데면하게, 어느 자리에선 반갑게 만났다. 주로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가고 있었다. 건축가 P선생에게서 저녁을 먹자는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 사진작가 강운구 선생이나 도서출판 까치 사장님이 나오겠거니 하고 갔다. 부정기적으로 밥을 먹는 모임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양선생을 다시 만났다. 서로, 어머 여긴 어쩐 일로? 하는 눈빛을 일이초쯤 주고받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하곤 어머 반가워요, 악수를 나눴다. 그 멤버에서 한두 명 부정기적으로 새로 나오는 사람을 제외하곤, 그렇게 고정 멤버가 되었다. 그러니까 선생과 내가 그 멤버의 유일한 여성 멤버이며, 우리는 적어도 두서너 달에 한 번씩은 저녁 모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문화적인 일


몇 년 전 《현대문학》이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주간이자 사장인 양선생에게 힘들게 월간지 만들지 말고 이제 그만 포기하고 편하게 살아라, 라고 설득하는 사람도 선생 주변에 꽤 많았다. 《현대문학》은 1955년 1월에 ‘한국의 현대문학’을 건설하자는 것을 그 목표로 창간된 순수문학 월간지이다. 배출해낸 작가로는 그 이름만으로도 화려한 박재삼, 황동규, 마종기, 이승훈, 정현종, 이범선, 최일남, 박경리, 이문구, 김원일, 김윤식, 조정래 등의 작가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그 순수 문예 월간지가 폐간 위기를 맞은 것이다. 얼마 후 선생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작가들에게, 주변의 문학인, 문화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후원금을 모금한다는 간명하고 슬픈 편지였다. 그 편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선생의 넓은 친화력 때문이었을까. 《현대문학》은 다시 만들어졌고 그때부터인가 표지나 디자인 같은 것들도 더 세련되고 근사해져 갔다. 디자인과 그림을 보는 눈, 잡지에 실릴 현대미술 작가를 선택하는 눈에 있어서는 선생을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때, 《현대문학》이 위기에 처했을 때 선생의 심정을 물어봤다.

‘새벽마다 산에 올랐어요. 너무나 막막해서, 그땐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거든. 그리고 기도했어요. 이 난관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다른 건 몰라도 《현대문학》만큼은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한 나라에 문화라는 게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문학잡지 같은 게 한두 개쯤은 꼭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여간 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 때문에라도 포기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도 선생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새벽 네 시쯤, 산에 오르곤 한다. 그러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 난관을 어떻게 해쳐 나갈 것인가, 하고. 잘 팔리지 않는 잡지를 만들지 않아도, 책을 만들지 않아도 어쩌면 선생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현대문학》을 지탱하고 있는 건 ‘문화’에 대한 선생의 갈망, 욕구 때문일 거라고 나는 짐작해 본다. 한 나라의 문화란 정말이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누군가는 아주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 ‘문화적인 일들’을 위해 애를 써야 하니까.

 

 





사랑을 하지 않는 자들의 두 가지 변명

  

내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이와 너무 친밀해지는 것도 있다. 나도 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두려움인지. 하지만 난 너무 가까워서 느끼게 되는 고통(특히 상대가 이성일 때), 너무 가까워서 느끼게 되는 불충분한 기대 같은 것이 두렵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틈’을 잘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안다. 그러니 때때로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애인도 없고 친구가 없는 이유를, 다른 사람 탓을 해서는 안 되겠지? 예전처럼 단편소설을 일주일 동안 써내지 못할 정도로 나이를 먹었는데도 철이 들긴 아직 멀었나 보다. 아무려나 동성의 누군가와 새로 교제를 할 때도 나는 잔뜩 몸을 사린다. 상대방이 가까운 걸 무기삼아 너무 무람없이 아무 질문이나 해대는 것도 싫다. 내 방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는 것도 싫다. 책을 빌려 달라고 하는 것도 싫다. 내 가방을 마구 열어 보는 것도 싫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엄마는 짝 소리 나게 내 등짝을 후려치며 사람이 혼자 사는 줄 아냐! 라고 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이제 좀 가까워졌다는 걸 핑계 삼아 양선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11월이었고, 여름내 붙들고 있던 장편소설 『혀』가 나온 직후였다. 게다가 그날은 <색, 계>가 개봉한 날이었다. 선생과 나는 그 영화를 함께 관람한 후 작고 아담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사십대 중반쯤 선생이 사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다시 사랑을 하지 않는 걸까? 왜 다시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걸까? 궁금했다. 누가 나에게 물어봤다면 단박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을 그런 질문들을, 이번엔 내가 선생에게 하고 만 것이다. 선생의 부군을 L이라고 하자.

‘L이 출장에서 돌아올 때면 난 아침 일찍 일어나 꽃시장으로 달려갔어요. L이 좋아하는 꽃들을 사다가 온 집안에 꽃아 놓곤 남편을 기다렸죠. 그건 L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여행이나 출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랬죠. 우린 서로를 정말 사랑했어요. 이 세상에 단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요. 일생 동안 받을 사랑을 L에게 다 받았고 내가 줄 수 있는 사랑도 L에게 다 주었어요.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요. 난 정말로 행복한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인데.’

선생의 눈빛이 촉촉해 보인다. 누가 그런 말 안 했나? 진정한 사랑이란 건 순수한 사람만이 해 볼 수 있는 생의 가장 큰 경험이라고. 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는 순수하지 못한 사람 같다.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말이다. 나는 선생이 말한 그런 사랑을 해 보지도 못하고, 지금은 그런 사랑을 원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나도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다. 가슴에 아직 흉터 같은 게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하고 다니기는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사실일까.      

선생의 부군은 간단한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게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와인 잔을 들어 잔을 부딪친 뒤 한 모금씩 마셨다. 나이차도 한참 나는 어려운 선생과 둘이 마주앉아 갑자기 사랑 이야기라니. 이게 다 방금 보고 온 <색, 계> 때문인 것 같다.    



하여간, 숙녀를 만나다


또 지각이다. 연장자를 만날 때는 늦지 않으려고 더 고심하는데도 늘 이 모양이다. <라브리>, 한갓진 룸에 미리 앉아 있는 사람은 양선생과 까치 사장님, 그리고 곧 K가 오고, 이렇게 나까지 네 사람이 모두 모였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다. 나는 연장자들 앞에서도 붙임성 있게 굴거나 우스운 이야기를 해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기껏 잠수를 끝내고 나왔더니 세상은 연휴가 시작되더라, 라는 썰렁한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실수를 해도 이젠 그러려니 이해해줄 것 같은 사람들과 함께 있고 맛있는 음식과 와인이 놓여 있으니 말이다. 밖에서 먹는 밥이 가장 맛있게 느껴질 때는 역시 원고를 끝내 놓고 첫 외출을 했을 때다. 새로 쓴 원고, 어디에 발표하게 되느냐고 양선생이 묻는다. 이럴 땐 진짜 미안하다. 그 원고, 펑크만 안 냈더라면 《현대문학》 12월호에 실릴 원고였는데. 선생님 죄송해요, 라고 나는 속으로 사과한다. 한 가지 더 사과할 일이 있는데.

 



 

원고를 쓰기 전에, 구상이 잘 되지 않으면 나는 주로 이 세 가지 것들을 한다. 국립도서관에 가서 책 읽기, 무작정 걷기, 시장이나 백화점 쇼핑하기. 구상이 전혀 안 되면 이 세 가지 것들을 한꺼번에 할 때도 있다. 12월 말쯤이었다. 국립도서관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세 정거장만 가면, 우리집에서도 가까운 S백화점이 있다. 딱히 어떤 물건을 찾거나 구경하는 게 아니라 나는 그 복잡한 백화점 안에서도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식당가에서 혼자 밥을 사먹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어슬렁어슬렁 S백화점을 걷고 있는데,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낯익은 검은 단발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크, 나는 잽싸게 에스컬레이터를 지나갔다. 역시 양선생이다. 아들과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반가웠는데, 왜 나는 나답지 않은 잽싼 몸놀림으로 자리를 피했을까. 아니, 그게 나다운 것 같다. 그래도 소심주의자답게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모른 척한 게 무척이나 마음에 걸린다. 정말로 미안한 일은 그 다음 다음 날 생겼다. 생일 선물로 양선생이 택배로 와인을 보내온 것이다. 그건 S백화점 포장지로 잘 싸여 있었다.

K까지, 네 사람이 모인 건 처음인 것 같다.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작가가 나올 것인가 못 나올 것인가, 그럼 어느 작가가 수상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클까? 나훈아 괴담은 어디까지 진실이고 허구일까?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무엇일까? 궁서체가 왜 촌스럽게 느껴질까? 뭐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양선생에게 지난 일월 보스톤에 갔을 때, 하버드 북샵, 그리고 COOP라는 서점에서 내가 본, 거의 매대 전체에 전시돼 있다시피 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본 즐거움에 대해 말했다. 이건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 책을 한 권 더 사왔다는 사실도. 그리고 지난번 한 대형문고에서 그 책 특별전을 했을 때 세 권이나 구입했다는 사실도. 똑같은 책을 왜? 라고 묻는다면,

나는 《현대문학》을 정말 오랫동안 읽고 싶은 사람 중 하나니까.   

K는 다시 회사로 들어가고 방향도 다른 세 사람이 함께 택시를 탔다. 정말 연휴가 시작되려는지 도심이 한적하다. 택시는 쌩쌩 한강다리를 건넌다. 문득 숙녀(淑女)라는 고전적인 단어가 생각난다. 숙녀: ①교양?예의?품격을 갖춘 점잖은 여자. ②상류사회의 여자. ↔신사. 딱 양선생이다. 

그런데, 다음에 양선생이 이런 말을 하면 어쩌나 싶다.

“나에 관한 글을 왜 썼어요, 하여간!”《문장 웹진/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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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기획

많이 배웠다

[조경란이 만난 사람⑬]- ‘유진 목공소’, 윤대오 목수 많이 배웠다 손 얼굴보다 손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밤새 원고를 쓰고 난 후에는 내 손으로 내 손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 말하기도 하고 핸드로션 같은 것도 자주 바르고 손톱 소제도 열심히 한다. 이런 말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내 육체 중에서 눈과 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읽을 수 없게 되거나 쓸 수 없게 된다는 상상은, 그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하고 가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면 맨 먼저 보게 되는 것도 눈,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손이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 턱을 괸 손, 술잔을 잡는 손, 제스처를 하는 손, 벌린 손, 오므린 손, 뭔가를 자꾸 가리키려고 하는 손, 그리고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 손, 숨는 손. 그 손들을 통해서 어떤 이는 일종의 몸짓의 언어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손들에게서 풍기는 아우라를 본다. 그게 그건가. 아무려나 내게는 손의 이미지가 그 사람의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혹여 누가 나를 같은 눈으로 볼까 싶어 친밀하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는 내 손 역시 더욱 긴장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주로 왼손은 방심한 듯 자연스럽게 펼쳐놓고 오른손은 찻잔을 잡거나 연필을 쥔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굵고 짧고 게다가 흉터들도 많다. 최근에 손에 관한 불쾌한 일이 있었다. 도쿄의 네기시마로 떠나기 전날, Y라는 기자를 만나게 되었다. 초면인 데다가 무슨 일인가 내 쪽에서 거절하는 자리여서 여느 때보다 긴장해 있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다 말고 갑자기 Y가 손금을 좀 보자고 했다. 무슨 엉터리 같이.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싫습니다, 하곤 뾰족한 포크를 무기처럼 집어 들며 밥 먹는 시늉을 했다. 그가 물끄러미 내 손, 그것도 오른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불편했다. 아무 말도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윽고 그 Y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도시처녀인 척 하고 싶어 하는 시골 여자 손이군요. 되묻지 않아도 알아들을 말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쾌했지만 다시 안 만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국수를 먹는 사이에 잠깐 방심해 있었던 것 같다. Y가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뒤집어보았다. 그러고는 잠깐 와본 손님처럼 내 손바닥 안에서 많은 것을 본 것 같다. 이어 하는 말. 타고난 작가는 아니로군요, 인생선이 이렇게 희미할 수가! 혀까지 쯧쯔 차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타고난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또박또박 말했다. 집에 와서 스탠드를 켜놓고 유심히 오른손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정말로 인생선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희미해서 단박에 기가 죽고 말았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더 투박하고 거칠게 느껴지는 오른손. 영락없이 아버지의 손을 축소해놓은 손이다. 태생은 속일 수가 없다.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 조경란
  • 2009-04-29

문장웹진 기획

꽃 보러 갔다

[조경란이 만난 사람⑫]-미국 난(蘭) 협회 심사위원, 안나 최(Anna S. Chai) 꽃 보러 갔다 난(蘭)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매화·대나무·국화와 더불어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은둔자나 선비 혹은 군자의 덕을 뜻하는 식물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난을 잘 길러 본 경험도 없고 난을 갖고 싶은 욕심을 내 본 적도 없다. 어디 가서 꽃 핀 난을 보면 그저 아 정말 아름답고 고고하구나, 감탄했고 간혹 난을 선물 받을 때면 이게 또 언제 죽을까, 키우기도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하다못해 그냥 두기만 해도 잘 자란다는 선인장도 못 키우는 사람이고 그런 것에 어느 정도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에게 난이라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꽃’이었다. 게다가 그 선명한 빛깔과 특이한 형태도 내 취향은 아니다. 나를 가졌을 때 엄마는 고작 스무 살, 아버지는 그것보다 일곱 살 더 많았다. 그래도 시퍼런 청년이었다.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고 정말로 좋은 목수가 되고 싶기도 했던 그 청년은 첫딸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몹시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서울 경(京)에 난초 란(蘭),은 너무했다. 내 이름이 불리는 것, 내 이름을 말해야 하는 순간을 오랫동안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 게다가 성(性)까지 붙여 부르면 더더욱 촌스럽게 느껴지니까. 그래서인지 친구 사귀는 데 영 젬병이었으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는 한반이었던 미란이 노란이 수란이 애란이와 함께 ‘란 클럽’을 만들어 도시락을 함께 까먹었던 기억이 난다. 농담이다. 미주 한국일보 손수락 위원과 샌프란시스코 상하수도 공사 프로젝트 매니저이자 수필가인 김희봉 선생과 함께 지난 12월 26일 아침, 벨몬트(Belmont)로 향했다. 안나 최 선생이 1976년부터 살기 시작한 후 현재 네 개의 온실을 갖고 있다는 그 언덕 위의 집으로. 김희봉 선생에게 안나 최 선생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지 거의 삼 개월 만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내가 버클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안나 최 선생이 난 심사를 하느라 세계 각지로, 혹은 서울에 있었고 내가 11월 초 잠깐 서울에 다니러 갔을 때는 다시 벨몬트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버클리에서의 캘리포니아 대학과 대산재단의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가까스로 이루어진 약속이었다. 중국계 작가이면서 그곳에서 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맥신 홍 킹스턴이나 『조이럭 클럽』을 쓴 에이미 탄과의 약속이 깨졌을 때는 아쉽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안나 최 선생은 꼭 만나고 싶었다. 고백하건데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난 협회(American Orchid Society) 심사위원’이라는 안나 최 선생보다 그녀가 매일 아침 7시면 일어나 거의 하루 종일 손으로 만지고 다듬고 물을 주며 돌본다는 그 네 개의 온실,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850여 종의 이천여 개 화

  • 조경란
  • 200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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