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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시간의 기록

  • 작성일 2008-07-31

 

저주받은 시간의 기록




강경희




1. 자학과 증오로 얼룩진 가난 


김신용의 시적 출발은 가난과 직결된다. 그의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고려원, 1989)은 그 제목이 상징하듯 현실로부터 소외되고 추방당한 인간에 대한 눈물과 고통의 기록들이다. 김신용이 형상화한 가난은 현장의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시적 리얼리티를 지닌다. 김신용에게 가난의 문제는 푸념과 상념을 쫓는 넋두리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증명의 방식이다. 그의 시는 가난을 매개로 계급적 모순을 폭로하고, 억압적 현실을 타계하고, 혹은 세계의 전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목적론적 고발 시와는 다르다. 그의 가난은 실존 그 자체에 대한 천착으로 일관한다.

“적십자병원 뒷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채혈의 주사바늘 쓰레기통에 버리며 뒤돌아서던/ 그때”(?작은 告白錄?)의 기억은 가난의 치욕과 설움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김신용에게 가난이 치욕인 것은 그것이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고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사회적 문제아, 정신병자, 비정상인으로 취급당하는 권력의 폭력적 지배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죄를 담은 이 육신 덩어리 어쩌지 못해 오후는 웃고/ 삼청교육 호루라기 소리의 가지에서 운동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罪果들/ 목봉을 들고 죄의 씨를 후벼 내야 한다”(?모스크바에서의 하루?)는 구절처럼 ‘버려진 사람들’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죄의 씨’를 천형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존재들로 표상된다. ‘배고픔’ ‘빈혈’ ‘강제 노역’의 육체적 고통을 ‘죄’의 대가로 인정해야만 하는 부조리한 현실이야말로 김신용이 끊임없이 가난의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가난’에 대한 혐오와 공포의 심리는 두 번째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세계사, 1990)에서도 지속된다. 태생부터 저주받은 존재라는 부정과 회의의 시선은 “항문으로 날 낳았나요” “이 인분만 지나다니는 길에, 씨 뿌려 놓고” “독버섯으로 돋아난 저주” “畸形의 돌연변이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에이즈를 위하여?)라는 표현처럼 스스로 더럽고 추악하고 저주받은 생임을 토로하게 만든다. 또한 ?불알 두쪽?에서 그는 노동에 지치고 병든 육체를 “허물어져 가는 집”으로 비유한다. 허물어져 가는 “더러운 빈민굴 벌집”은 자신의 육체가 기거하는 “관”이 되고, 급기야 자신을 “무덤 속 시체”로 동일화시킨다. 그에게 “생활”은 “노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이때 삶은 죽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노동에 의해 썩어 가는 병든 육체, 육체를 저당 잡힌 생은 ‘텅 빈 공허’로 자리한다. ‘육체의 허기’는 ‘꿈의 허기’로 이어지고, ‘텅 빈 육체’는 ‘영혼의 공허’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김신용에게 가난은 자학과 증오로 얼룩져 끝내는 존재 의의마저 상실한 극단적 현실 부정으로 이어진다. 



2. 동물로 전락한 변형된 몸


‘지게꾼’ ‘막노동꾼’ ‘잡역부’ ‘주정뱅이’ ‘걸인’ ‘수감자’ ‘정신병자’ ‘행려병자’ ‘돌연변이’에 이르기까지 밑바닥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김신용의 시는 마침내 인간을 인간으로 명명할 수 없는 동물화 된 존재로 변형시킨다. “노려보는 도살자 앞으로/ 터벅…… 터벅 쉬임없이” 걸어가는 ‘소’(?소?), “아무거나와 흘레붙는” ‘개’(?개 같은 날 2?), “화살이/ 빗나갈 때마다” 부르르 떠는 ‘고슴도치’(?지푸라기 한올에 목을……?)와 같은 동물로 비유되기도 하고, 또는 “그저 온몸으로 꿈틀거”리는 ‘지렁이’(?지렁이의 시?), “로프의 밥줄에” 걸린 ‘거미’(?밧줄타기 아니 밥줄타기?)와 같은 벌레로 변용되기도 한다.

동물과 곤충으로 비유되는 존재 전환은 자학의 다른 방식이다. 혐오스러운 ‘뱀’(?龍?), 징그러운 ‘벌레’(?어두운 기억의 집 2?)로 은유된 인간의 모습은 삶의 비극성을 표출하는 자조적 태도이며, 동시에 인간성 상실을 강요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공격의 심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특히 ?어느 행려병자의 노래?의 동물화 된 자아는 문제적 현실을 반성하고 풍자하는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인간적 가치들이 모두 소거된 살벌한 현실은 화자에게 인간이 아닌 동물이 될 것을 상상하게 한다.

시집 『환상통』(천년의시작, 2005)에 이르면 벌레로 형상화된 인간의 몸은 혐오와 부정의 대상으로만 비유되지 않는다. ?시멘트 침대?는 이러한 그의 인식 변화의 측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지하도 바닥에서 잠을 자는 걸인은 벌레처럼 꿈틀거리지만 그 꿈틀거림은 추악하고 징그럽지 않다. 오히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걸인의 모습은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 시에서 자신의 몸을 자양분으로 존재 전환을 꿈꾸는 애벌레처럼, 걸인은 “자신이 흘린 땀방울이/ 자신을 갉아 먹는”, “그 땀으로 피워 올린 소금꽃이, 자신의 몸속에 뿌리박아 그 몸속의 영양분을 다 빨아들여” 드디어는 빛나는 꽃으로 환생하는 꿈을 완성하는 존재이다.

『환상통』에 이르면 가난이 초극의 대상일 수는 없지만, 가난에 대한 치열한 자기 응시, 가난에 대한 “그 참담함”을 포용하려는 꿈의 의지야말로 새로운 존재 전환의 계기가 됨을 전언한다. 현재적 삶의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다름 아닌 ‘꿈’이다. 꿈은 그에게 끔찍한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방편이자, 자신의 인간적 가치를 지탱할 수 있는 무기로 작용한다. 더럽고 추악하고 끔찍한 존재로 형상화된 동물 이미지는 『환상통』에 이르면 연민과 사랑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물렁해, 슬픈 것들?은 세상을 향한 날 선 의식과 증오의 심리가 어느새 한없이 부드러운 달팽이처럼 물렁한 것들로 변모했음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견고한 세계의 성채로부터 도주할 수 없었던 비극적 자아는 이제 스스로 물렁해짐으로써 세계와 조응한다. 이는 그가 마주한 세상이 평화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비애스러운 세월을 견디는 몸짓을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가난을 형벌처럼 업고 다녀야 했던 지독한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그는 슬픔을 삶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성숙한 내면을 지니게 된 것이다.

부랑자, 감옥살이, 지게꾼, 노동자로 밑바닥 인생을 유전(流轉)했던 그에게 ‘가난’은 꼬리표처럼 자신을 구속하는 고통의 상징이다. 스스로를 위장하지 않으면 꿈조차 지킬 수 없는 추악한 세상에서 그는 이중 삼중으로 위장한 보호색을 지닌 달팽이가 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 세계의 공격으로부터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는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어 내어 줄 것이 없는 가난의 방패 속에 고통을 숨긴다.



3.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는 법       


가난은 그에게 결핍된 현실을 안겨 주었으며, 이러한 결핍의 심리는 그것을 보상하고자 하는 욕구로 대치된다. 이때 그의 욕망은 현실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허기와 수난의 연속인 가난한 현실은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밖에 없어, 그 어진 짐승 같은” 가난은 그에게 “부끄러움”만을 안겨 주었을 뿐이다. 이때 그의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허공”에 “집”(?오늘도 꿈은 허공을 집 짓고?)을 짓는 공허와의 싸움이다. 허공에 집을 짓는 그의 노력은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이 아니라 절망적 현실을 치유하고자 하는 대체물이다. 허공에 집을 짓는 부단한 노동은 ‘꿈의 건설자’가 되어 고통스런 현실을 돌파해 가려는 의지이다.

특히 ?풀밭에서?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와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비록 “꼽추처럼” 휘어진 육체로 “등의 질통”을 날라야 하지만, “흙 속에 담긴 사막”을 “무너뜨려” “햇빛 포근한 마을을” 건설하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는 “온몸 등짐으로” “이 작은 세계를” 떠받칠 수 있는 힘이 된다. 불모의 대지에 마을을 일구고, 튼튼한 “기둥”으로 세계를 받치는 “저 땀”의 숭고한 가치는 고통마저 껴안을 수 있는 힘이다. 

김신용은 “하찮은 먼지”조차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 줄 아는 꿈을 지녔으며, “이름 없는 풀꽃 한 송이 피워내는” 것이 노동의 숭고한 가치임을 터득한 것이다. 이때 노동은 강요된 헌신과 희생이 아니라, 창조적 인간으로 자신을 변모시키는 기제가 된다. 그는 노동을 통해 핏물로 일궈 낸 사막의 꽃을 탄생시키며, 아름다운 기하학적 무늬로 엮어 낸 “땀들의 구도”를 완성한다. 그는 비루한 현실과 끊임없이 마찰하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건설자가 되고자 한다. 세계의 건설자는 타율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삶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깡통을 위하여?는 헐벗고 굶주린 육체, 상처와 죄, 결핍의 산물인 가난의 흔적을 보여 준다. 하지만 깡통은 비어 있음으로 인해 다시금 새로운 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용기(容器)가 된다. 깡통은 “만나는 그 어떤 것과도 몸”을 섞을 수 있는 열린 세계이다. “깡통”은 “화분”으로, “쓰레기통”으로, 가난한 자들의 ‘신음과 고통’, ‘뼈아픈 기억의 시간’까지 담아내는 안식처로 탈바꿈한다. 그 무엇도 담아낼 수 있는 깡통의 변신은 존재의 새로운 부활을 의미한다.  



4. 상처로 밀고 가는 아름다운 생 


김신용의 시에서 삶의 모습은 긍정보다는 부정의 표정으로 얼룩져 있다. 어둡고, 음습하고, 우울한 이미지들, 노동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몸, 끔찍하게 변형된 곤충과 무지몽매한 동물로 비유된 인간, 스스로를 갉아먹고 부패시켜 살아가는 기생하는 존재, 거대한 타율의 힘에 떠밀려 가는 허약한 삶, 알몸으로 불모의 사막을 걸어가는 비극적 숙명, 가난의 결핍으로 결핍을 채우는 위선적 삶은 그의 시 전편을 통해 드러난다. 이 피폐한 가난의 흔적들을 그는 눈물겹게 전달한다. ‘감옥’ ‘삼청교육대’ ‘청계천’ ‘역’ ‘양동 철거촌’ ‘함바’로 표상되는 밑바닥 인생들의 처절한 모습은 곧 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그는 이 상처의 흔적들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상처로 밀고 가는 생, 불구의 몸과 안식 없는 영혼이 만들어 낸 이 생생한 사실화는 관념의 유희와 현실을 배제한 의식의 놀음에 허덕이기 쉬운 오늘의 시를 반성하게 한다. 그는 “남은 생애 속으로” 자신의 여리고 약한 “지느러미 흔들어 갈” “허리 굽은 바다”를 항해하고자 한다. “녹슬고 삐걱이는 관절”이지만 “아직도 핏줄 속을 물결치”(?後捕 2?)는 그의 인간적 꿈과 사랑이 난파되지 않기를 바란다.《문장 웹진/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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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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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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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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