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작성일 200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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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냥. 억지로 쥐어 짜내는 어린아이의 눈물과 달리 하염없이 흐르는, 슬픔에 대한 눈물 같이 그것은 검은 구름을 동반한 채 안 그래도 밤이라 어두운 세상을 더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포장된 도로는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그 흐르는 눈물을 살며시 받아내어 넘치는 눈물만을 흘려보낸다. 웅덩이다. 비가 왔기 때문인지 그러한 웅덩이가 정말로 많다. 아니, 애당초 비가 안 오면 그런 웅덩이는 생기지 않으니 적어도 평소보다는 많은 게 당연하다. 그런 웅덩이를 벗어난, 웅덩이에서부터 넘쳐흐른 빗물은 흐르고 흘러서 곧장 길가의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거나 때론 묵묵히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신발에 한껏 부딪힌 후에야 겨우 하수구로 흘러갈 뿐일 테다. 그러니 그러한 빗물의 여행은 딱히 걸음을 멈추고 볼만큼 신기한 광경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할 만한 묘한 광경도 아니지만 사내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맨발을 적시는 빗물들을 지켜보았다. 추워서인가. 그런 사내의 손과 발. 그리고 얼굴은 매우 창백했다. 그 말없는 창백한 사내의 모습은 어떻게 된 건지 너무나도 비와 닮았다.
12월…. 한 겨울의 그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세상에서 사내는 차가운 비를 맞으며 자신의 발을 적시는, 꽁꽁 발을 얼리려는 것 같은 빗물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 입술이 푸르다. 꽁꽁 언 나머지 발음은 부정확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명칭이란 것은 익숙한 발음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누군가의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그 자신일 것이다. 즉 그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자조하는 것이다.
넝마와 같은 옷. 그저 소매라고 할 것은 이미 팔꿈치 밑으로는 뜯겨져서 없었고 그 본색은 울긋불긋한 붉은 피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다. 바지 역시 그와 비슷한 꼴이며 머리카락은 헝클어져있다. 목덜미엔 묘한 상처가 나있고 눈은 그가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다시는 그의 뜬눈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지쳐 보였다.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았었다. 그저 빗물을 직시할 뿐이었던 것이다.
또한 자세히 보면 이미 꽁꽁 얼어버린 손끝에는 약간 붉은 기가 있는데, 손톱 밑에 피가 고여서 굳어있는 것이었다. 빗물에 의해 손등이나 손바닥에 묻었던 피는 씻겼으나 손톱 밑에 들러붙은 그 굳어버린 피는 아직까지 남은 것이다.
그런 손톱을 바라보다가 비틀거렸다.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심란하기도 하다. 잠깐 동안 그는 그렇게 살짝 동요하는 눈빛을 보이다가 그 눈동자로 하늘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내리는 비에 정면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째서?"
자조한다. 그는 한껏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걸었다. 살짝 고개를 다시 들고 힘없이 걸었다. 밤거리. 아니, 새벽의 거리. 추운 12월의 비 오는 새벽의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그 기묘한 사내의 모습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것 하나만은 다행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나타나도 죽어라 도망칠 필요가 없다. 죽을 각오로 검을 들이밀 필요도 없다. 아니, 그러고 보니 검은 이미 깨져서 버린 지 오래다. 총? 그것이 내 몸 어디에 있었던가? 사내는 다 찢겨 나간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자신을 비웃었다. 어지럼증이 몰려왔지만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이미 자신은 동료들에게 버림받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쳐 나온 것이다. 흡혈귀한테 물린 자신을 죽일 것이 분명한 사람들은 절대 동료라고 할 수 없고 같이 있을 수 없는 자들이기에 도망쳤다는 꽤나 설득력 있는 문구가 떠올랐으나 사실 갑작스럽게 몰려온 두려움 때문에 당황해서 도망을 쳤을 뿐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왠지 그 문구에 설득당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더 이상 자책할 마음조차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맥없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문득 가만히 있다 죽는 것보단 좋을 것이니 도망친 것이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도 든다. 분명 힘이 들어도 죽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당연하다. 죽기가 싫으니까 죽여야 했고 지기가 싫으니까 이겨야 했고 살고 싶으니까 싸워야했던 그로서는 계산이 간단할수록 더욱 믿을 만하다. 이제 와서 힘들다고 그냥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니까 걸어간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타당한 이유는 없지만 걸어간다. 눈을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감으면 다시는 못 뜰 것 같기에 눈을 못 감는 것처럼 잠깐이라도 걸음을 멈추면 다시는 걷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에 그는 힘없이 걸어간다.
…시야는 흐릿했다. 그것은 뭔가 이상하게 흐릿했다. 분명히 주위는 어두우나 실지렁이 같은 불빛 아닌 불빛이 눈을 약간 아리게 한다. 묘하게 밝은 느낌. 아니, 밝다고 하기보단 그저 사물이 흐릿하게나마 윤곽이 들어 난다고나 할까. 묘하게 느껴지는 세계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몸이 편하다. 뭔가 몸이 편하다. 분명히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을 감으면 다신 못 뜰 것 같고 걸음을 멈추면 다시는 걷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눈을 깜빡거릴 만큼 여유가 있다. 아니, 자신은 이미 한 차례 잠을 자지 않았던가? 침대에 누워있되 침대에 누웠던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서 누군가가 자신을 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한 차례 쓰러졌다는 것을 뜻한다. 살며시 상체를 일으키고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에 반응한다.
"브리네이드."
맑은 목소리. 그 이유 없이 듣기 싫은 목소리에 브리네이드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의외로 익숙한 목소리다. 쳐다보는 눈빛으로 대꾸한다.
"오랜만이야."
인사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런 그를 보는 여자의 눈매가 약간 휘었다.
“…….”
눈은 점점 더 사물을 잘 분간해간다.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가 가장 먼저 보였고―가장 먼저 느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다음 중세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방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요컨대 이미 그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배경으로 향해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자의 목소리는 약간 높아졌다.
"결국 너도 당하는군."
비웃음이다. 묘하게 높은 톤으로 비웃는 것이다. 의외의 상황이다. 그녀가 브리네이드를 구하지 않았던가. 구원자가 자신이 구해낸 자를 비웃는다. 교만해서 그런가? 잠깐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기 이전에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뭔가 아릿한 느낌이 나면서 손바닥이 뜨끈하다. 그러나 그걸 더 생각할 겨를 따윈 없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방금 상황에 대한 자신의 평가―단 한순간이나마 그녀에게 구원자란 호칭을 붙인 것을 후회하였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자신의 적이었던 흡혈귀였으니까!
이성을 잃었다. 순간적으로 울컥한 것의 여세를 몰아 몸을 벌떡 일으키곤 어느 순간 손가락 끝에 생긴 뾰족한 갈고리 모양의 덩어리를 날카롭게 세우고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아마 그것이 아까 손바닥에 상처를 낸 것일 테다. 어쨌든 그걸 여자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매우 쉽게 피한다. 하염없이 허공을 할퀸 그 손톱은 흡혈귀가 손을 거둠으로써 흡혈귀의 몸으로 돌아왔다.
"후우."
쉽게 피했으나 그녀는 힘든 척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묘하게 흥분된 모양새였다. 두렵거나 하진 않았지만 거부감이 드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살아남은 것에 기뻐하는 게 인간 아냐? 무슨 이유로 그렇게 신경질을 부리는 거야?"
하며 그녀는 한 걸음 내딛는다. 그리고는 천천히 오른손을 곧게 폈다. 가느다랗고 흰 손가락이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느낌. 아니, 한순간이나마 여자의 손은 정말로 빛과 같이 되었다. 어둠 속을 내달리는 섬광과도 같은 모양새로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크윽!”
…몸이 들어 올려 진다. 족히 80kg은 될 것 같은 사내의 그 몸뚱어리를 목을 잡아챈 한 손만으로 여자는 들어올린다. 그러자 여태까지 어떻게 저 어마어마한 상대에게 대항을 하며 죽일 생각까지 품었는지―전직 흡혈귀 사냥꾼은 순간적으로 그런 한탄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생각에 대한 자신의 고찰보단 일단 풀려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몸을 비틀어 흘러내리려 했으나 괴상하게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우연히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자 ‘대항할 수 없다. 어떤 속박에라도 걸린 느낌이다. 죽어도 전혀 특별하지 않다….‘라고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중얼거리는 게 느껴졌다. 본능이다. 어이없게도 본능은 겁에 질려있는 것이다.
"무서운가봐."
입가의 조소. 그것만큼 기분 나쁜 일은 없을 것이나 사냥꾼은 반항은커녕 똑같이 상대방을 억지로라도 비웃기 위하여 안면 근육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겹다. 동시에 숨은 막힌다.
어쨌든 잠시 그렇게 있었다. 연약한 여자가 한 손으로 건장한 사내를 올려 쥐고 있는 기괴한 형상은 굳건한 동상의 모습처럼 잠깐 존재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여자는 곧 말없이 조심스럽게 손에 든 걸 내려놓았다. 조용한 어린 아이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와는 다른 태도다.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던 노련하고 잔인한 흡혈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 괴상한 태도에 브리네이드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바닥에 놓인 후에 체면을 차리지 않고 콜록거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목을 매만졌다.
"어쨌든 이제 너도 흡혈귀인 건 변함이 없을 테니 부디 나를 화나게 하지 마."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적어도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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