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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계[怪異]: 해프닝

  • 작성일 2012-11-08
  • 조회수 888

세상에 해피엔드란 없어, 다만 좀 편해질 뿐이지.
 
1
 내가 이 이야기를 어디서 어디까지 서술해야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지만.
 최소한의 의무로써 일단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것인지는 알려야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이 커다란 이야기의 한걸음으로써, 그리고 첫번째 이야기로 다들 지루해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선하게 보이지만, 마치 돈받고 강연하는 교수와 같이 누군가 듣든 말든 이야기를 완결해야하는 의무감이 들고, 또한 나는 그래야만 한다.
 실제로 이 일은 내 바보같고, 병신 같으며 어리석은 소원 때문에, 그리고 이 소원을 실제로 이루워준 빌어먹을 망할 신에게 책임을 나눈다.
 어째서 나인가?  왜 그 많은 사람들중 내가 걸린거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제 구골처럼 길어질 무렵, 문득 이제 난 이런 생각에 지쳤고 이제 난 이 괴담을 누군가에게 털어야만 이 시커멓게 응어리진 고민 덩어리가 조금이나마 풀어질듯했다.
 세계에서, 그리고 이 넓은 우주에서 이렇게 괴상하고, 뜬구름 잡으며 또한 믿을수 없는 이야기는 거이 없을테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마치 위인전 세트를 억지로 읽는 어린이처럼 지루한 느낌과 너무나 먼 이야기 같을수 있을 것이다.
 아마 매니악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 이야기는 외국 방송을 보는것처럼 무슨 소리인지 모를테지만 어쨌는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최후의 마지막 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나 도저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이렇게 변명이나 줄줄 늘어놓는 이 한심한 이야기꾼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슬슬 시작하는게 좋을것 같다.
 잊을래야 잊을수없는, 이제는 언젠가였는지 살짝 가물가물해지는 그녀와의 만남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
 
2
 고등학교 3학년.
 대한민국 학생이 학생의 신분으로 가장 힘든 고비.
 그리고 지금 난 이 뭐같은 타이틀을 달아야할때가 가까워졌다.
 즉,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말.
 3월 초중반의 슬슬 따듯해지기 시작하는 시기.
 마침 오늘 학기말 방학식(흔히 봄방학이라고 부르는 그 방학)을 끝내고 집에 가려던 찰나 방학이라고 해봐야 잔소리와 걱정어린 지긋지긋한 말 몇마디를 들어야한다는 혐오감에 대강 어느 공원에 걸터 앉아 쉬고있다.
 딱히 방학 자체가 나쁜것이 아니다. 사실은 기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긋지긋하고 구역질 날 뿐이다.
 이미 부모님들의 신뢰는 나보다는 내 여동생에게 기울었고 이제 내게는 단 1Kg의 신뢰도 남아있지 않다. 아마 3g 정도 남아있을수는 있지만은 이제는 눈꼽 만큼의 신뢰도 버거워졌다.
 뭐 그런 이유로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하든, 책을 읽는 공부를하든 '집안' 이라는 필드 때문에 나에겐 저절로 네거티브한 효과가 나타난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집보다 편한곳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집에 있다는 것보다는 '집에 있는 이유로 받는 눈총' 이 따가워서 버틸수가 없다.
 게다가 고등학교도 집안 사정상 원개 진학해야하는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 그것도 입시전문 학교에 입학해서 이래저래 스트레스에 성적 수직 하강에 내신 하락 등등 중학교 성적도 겨우겨우 중상위를 유지하던 실력으로는 그런 괴물 같은 녀석들을 이길수가 없었다.
 이젠 in 서울은 커녕 대입 자체가 버거워진 실정이다.
 이런 이유로 방학식 후에도 적당히 배고픈 점심 이후의 오후. 아직까지도 교복차림으로 멍하니 속편한 초등학생들이 노는걸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벤치에 앉아있다.
 딱히 누구를 기다리는것도 아니고 볼일이 있어서 이런 공원 벤치를 혼자 차지하고 앉아있는건 아니다. 단지 집에 계신 부모님이 거북하고 그렇다고 어딘가 놀러갈 만큼 인맥이 넓거나 까발려진것도 아니다.
 공부를 따라잡기엔 이미 너무 멀리와서 다시 성적을 쌓는다는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도서관도 기각해버렸다.
 한마디로 이렇게 벤치에 앉아있는 이유는 '시간 죽이기'.
 '시간 때우기' 도 아니고 '죽이기' 다.
 ...아, 저렇게 힘차게 뛰는 애들을 보니 왠지 이런 내 처지가 비참해지기 시작한다. 젠장...어째서 초등학생들이 노는것 따위에 내가 굴욕을 느끼는 거냐...
 이봐요, 거기 학부모! 난 방학식이 끝나서 당당하게 하교하던 길이야! 농땡이가 아니야! 그런 눈빛하지 말라고 이 오지랖아!
 측은해 하지마...!! 그 눈빛이 제일 기분 더러워!
 "뫼향 아니야?"
 "어?"
 어디서인가 많이 들어본 하이돈의, 적당히 미성의 목소리다.
 아아, 기억났다. 내가 이 목소리를 잊다니, 머리를 너무 안쓴 모양이다.
 "강지혜? 맞지?"
 "오오, 기억하네?"
 검은 단발에 평범하지만 자세히 보면 꽤나 귀여운 얼굴을 한 이 오지랖 넓으신 여고생을 내가 어찌 잊으리, 중학생 때 친히 그 성격을 발휘해서 작은 판도 큰 판으로 연성 시켜버린 덕분에 중학생 시절을 정신없이 보낸게 아직까지 생생하다.
 동기는 재미. 참 속편한 여고생이다.
 물론 그때마다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만 이 당돌한 여고생에게 당해서 징계를 받은 그간 모든 학생에게 묵례.
 "근데 머슴, 너희 학교도 방학했냐?"
 "응, 오늘 방학했어. 그보다 머슴이라고 하지 말랬잖아, 산양. 매번 방학식 끝날때면 이렇게 시간만 죽이니까 효율성이 떨어지잖아."
 이 발언으로 보면 내가 이렇게 멍하게 있는것은 방학식이 끝날때면 하는 일종의 패턴 같은것 같다.
 하지만 당사자인 난 인지도 못한걸 니가 어떻게 아는거냐.
 "그보다 지금 이 시간에 방학식을 끝냈어? 늦었네."
 "에이~말도마라~방학식때 병크 터뜨리는 바람에 담탱이가 우리반 다 남겨서 무지하게 갈궜다고."
 방학식 때 무슨 바보짓을 했기에 담임이 반 전체를 남겼는지 물어보지 않으면 왠지 신세 한탄만 할것 같아 슬슬 입을 뗀다.
 "그래서 대체 그 병크란게..."
 "바보 같이 귀신은 무슨 귀신이래냐~"
 말이 잘렸다.
 하지만 더 걸리는 말이있었는데...귀신?
 "글쎄, 우리반에 왠 신기들렸다는 애가 있단 말이야, 그 년이 뭐 퇴치? 어쨌든 그런거 한다고 교실을 완전 개판으로 해놔서 그거 청소하고 담탱이가 뭐라고 잔소리하는 바람에 무지하게 늦었다고~"
 분명히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재수없는 이야기를 들은것 같다...
 게다가 신기 들린애...괜스리 몸에 소름이 돋는다.
 "에고야, 그럼. 난 이만 간다 산양."
 "어? 아아,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잘가라."
 "바이바이~"
 ...흔히 이 기분나쁜 느낌을 기분탓이라고 하겠지.
 "지금 몇시더라..."
 슬슬 시간이 걱정되서 아직 피처폰인 내 핸드폰을 꺼낸다.
 2시 43분.
 이제 브라콤 여동생이 돌아와서 적당한 채널을 틀고 소파에 누워있을 시간이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는것도 애들이 불어나서 힘들것 같으니, 마지막 선택지에 있는 집에 가기를 선택한다.
 
3
 "오빠?"
 "다녀왔다."
 언제나 소파에 착 달라붙어 똑같은 말로 반기는 브라콤 여동생이다.
 "넌 방학이면서 뭐라도 좀 하지 그러냐? 하다못해 니가 생업으로 삼는 그림이라도 그리던가. 백수처럼 뭐하는거냐?"
 "냅둬, 아 맞다. 오늘 오빠 방학했지?"
 "그건 왜?"
 갑자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눈에 별을 달고서는 이족을 바라보는게 상당히 부담스럽다...
 목덜미 근처까지 내려오는 까맣고 큐티클이 반짝이는 머리카락에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 순해보이는 인상을 주는 느긋해보이는 눈에 눈꼬리까지 살짝 내려가서는 완전무결한 순동이...처럼 보이지만.
 저 요망한 브라콤은 저걸 무기로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저런 눈으로 그렇게 쳐다보면 상당히 거북하고 피하고 싶어진다.
 으으...부담스럽다고...
 "왜...? 무슨일인데?"
 "방학동안 절대로 나가지마."
 "뭐? 그보다 왜 내가 나갈수 없는건데?"
 대충은 짐작가지만 말이지, 이 브라콤 여동생은 집착이 상당히 강하다.
 자고있을때 여동생의 초크로 기절한 오빠가 여기 말고도 더 없기를 기도한다.
 "소문이 있으니까."
 "소문?"
 의외의 대답이 들어왔다. 그것보다, 겨우 소문?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인데?"
 "오빠는 몰라도 돼, 단지 밤에는 나가지마."
 새삼이 철없는 여동생의 어울리지 않는 진지함에 놀랐다.
 "야, 내가 무슨 소문인지는 알아야지 피하든, 숨든 할거 아니야? 안그래? 장심향?張甚響"
 "그건...그렇지만..."
 주눅과 함께 아주 잠시, 아주 잠깐이지만 무섭다는 표정이 지나갔다.
 그렇게 무서운 소문인가?
 "....됐다. 알았어. 밤에는 안나갈게, 그 정도는 들어주는 융통성있는 오빠라고."
 "응...!"
 거참, 사춘기여서인지 기분이나 분위기가 분단위로 팍팍 바뀐다.
 나중에는 저 왈가닥도 조금은 얌전해 질지 모르겠다.
 
4
 봄방학부터 5월 하순까지 꽤 긴 시간동안 외국에 나가있겠다는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어디에 나가 계시는데요?"
 "스위스에 나가 있을거야, 꽤 중요한 일이라서 오래나가있는거야. 고3 인데도 못챙겨줘서 미안하다. 생활비는 매달 통장으로 넣어줄테니까 필요할때마다 꺼내 쓰렴."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는 두분이 외국으로 가면 나도 같이 갔었지만, 중학교 입학후에는 나와 동생만이 집을 봤다. 그덕에 이제 두분이 외국에 가시는것도 일상처럼 받아들었고, 외롭지도 않았다. 게다가 신뢰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지금은 오히려 외국에 가시는게 더 편하다.
 괜스리 씁쓸해지는건 기분탓이다. 기분탓일게 뻔하잖아. 분명해.
 "그럼 심향이 잘부탁하고, 너도 공부 열심히해라,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아, 시간 없어서 끊는다."
 뚜뚜뚜...
 "매정하시네..."
 아들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끊어버리다니, 어지간히도 바쁜 모양이다.
 씁쓸하게 웃고서는 슬슬 저녁준비를 해야햐지 때문에 부엌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아무것도 없다고...사와야하는거 아니야?"
 언제 앉아있었는지 심향이가 의자에 앉아 식탁에 퍼질러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보이는건 잼 한통과 마요네즈 같은 소스만 덩그러니 있다.
 "약간 좀 늦었지만 장을 봐야하나? 귀찮은데 그냥 시켜 먹을까?"
 "밥솥에 밥 없으면~"
 다행히도 밥솥에 밥은 있었다. 약간 모자른듯 보이지만 대충 2인분은 되보였다.
 "밥이 있기는 하네, 아슬아슬하게 2인분."
 "장봐오자, 어차피 지금 뭐 시키기엔 늦었고 어차피 장봐야하잖아?"
 어차피 지금은 8시 반쯤, 이미 중국점은 문닫았고 피자집은 (상당히) 비싸다.
 귀찮지만 내일을 위해서 마트를 다녀와야겠지.
 "뭐 먹고싶은거 있어? 사오는 김에 군것질이라도 하자고."
 "먹고싶은건 딱히 없지만...먹히고는 싶어!"
 "됐다, 말을 말아야지..."
 그 먹힌다는게 누구에게 먹힌다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일상대화에서 브라콤티를 내지 말라고!
 뭔가 내가 엄청 잘못한것 같잖아!
 "너도 같이 가자, 왠지 혼자 집에 두기도 뭐하고 너, 때를 써서라도 따라올거잖아."
 "당연하잖아, 오빠,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됐으니까 옷이나 갈아입고와."
 "네에~"
 잠옷바람으로 방보러가는건 그래도 오빠인 내쪽에서 사양이다.
 게다가 니 잠옷은 의외로 타이트해서 라인이 다 보인다고.
 "밖에서 기다릴테니까 빨리 나와."
 "알았어, 숙녀를 보채지 말라고!"
 어디가 숙녀인지 서술해야할 필요성을 잠깐 느꼈지만 넘어가자.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다가 어쩐지 가슴 한쪽에서 뭉어리진 한가지를 알아챘다.
 "소문..."
 소문, 처음들었을때부터 왠지 석연치 않았다.
 지혜 녀석도 그렇고 심향이도 날이 잔뜩선 고양이처럼 소문에 대해서는 경계했으니까.
 둘다 저렇게 나오니 신경쓰지 않고는 배길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생각이 그쪽으로 흘러가고있다.
 "아, 젠장. 미치겠네. 소문이 뭐라고..."
 대놓고 뭐냐고 물어보면 심향이는 퇴짜 놓을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봄방학 중에 그 멀리 있는 지혜 집에 찾아가기도 그렇다.
 어떻게 살살 꼬인다냐...뭐, 그 브라콤은 내가 조금만 뭐라고해도 바로 흥분해서 다 술술 불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반에 무슨 신기들린 애가...
 신기...? 분명히 신기가 들렸다면 귀신이나 부정한것 같은걸 잘못 느끼는 일은 별로 없을것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심령솔루션 프로그램 따위에서 나온 굿이나 의식 같은것까지 하려했다면 분명히 잡것은 아닐것이다.
 그건 짜고 친 고스톱 같은거니까 과장되게 표현한다고 해도, 학생이. 그것도 교실에서 그런 의식을 치르려고했다는건 뭔가 심상치 않다.
 뭔가가 심상치 않다.
 뭔가가 크게 빗나간것 같은, 아니 잊어버린 느낌을 떨칠수 없다.
 "뭐해? 마트 안가?"
 "어? 아아. 가야지."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심향이가 제법 널널한 티셔츠에 청바지라는 노멀한 패션으로 나왔다.
 그리고 8시 40분쯤, 그때를 기점으로 알았어야했다.
 뭔가가 크게 들어지고있다는 것을...
 
5
 의외로 8시 이후에도 식료품 코너에 사람이 꽤나 많아서 놀랐다.
 게다가 좋은 물건들은 이미 낮에 대부분 다 팔려서 남은건 크게 좋지 않은 재료들뿐이다.(가령 물컹한 토마토라던가 즉석 식품 같은것)
 "으음...그냥 다 된걸 사는게 더 좋지 않으려나?"
 "오빠, 물건 다 찾았으니까 계산하고 가자."
 "벌써? 그보다 지금 남은건 다 그저그런것 밖에 없을텐데? 물컹한 토마토라던가 방부제 바나나 같은거..."
 어라? 여동생의 카트에 담긴 물건들은 다들 신선해보이는게 예사가 아니다. 지금 같은 시간대에 팔리는 물건이 아닌데?
 "...참 능력도 좋다. 어떻게 이런걸 다 모았냐?"
 "여자를 남자랑 동급으로 취급하면 곤란하다고~이래뵈도 오빠 없을때 혼자서 장보기도 했는걸?"
 엣헴, 하고 발돋음을 하고 가슴을 펴는것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그래봐야 장보기지만, 이런것 만큼은 마음것 칭찬해주자.
 "그래그래, 잘했어. 무슨 마술을 부린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데? 여자의 직감이라는건가?"
 "글쎄, 난 오히려 남자들이 그런 물건만 고르는게 더 신기한걸?"
 "미안하다~이런 물건밖에 볼줄 몰라서."
 다 계산하고 나오니 벌써 9시다. 이제 3시간 뒤면 봄방학이다.
 달가운지 아니면 거북한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방학은 방학. 보충 같은건 안한지 오래이므로 집에만 박혀있을수 밖에 없다.
 마침 부모님도 외국에 나가계시니 잘된 일이다.
 "저녁 먹기엔 꽤 늦었네. 먼저 집에 가있어, 뭐라도 사갈게"
 "같이가, 또 오빠만 좋아하는거 살려고? 못믿어. 그렇니까 같이 따라갈래!"
 불만스러운듯 볼을 잔뜩 부풀리고는 눈을 부랴리는 모습이 인상 때문인지 화난것 같기보다는 그냥 애교부르는것 같다.
 "알았어, 아이스크림이라도 사갈게. 피스타치오 맞지?"
 "집에서 기다릴테니까 빨리와야해~"
 이럴땐 영락없는 중학생.
 힘내라, 너도 이제 고등어가 될 날이 멀지 않았으니까 실컷 놀아둬.
 "자, 산책이라도 할까?"
 집에는 빨리 돌아간다고했지만 지금은 좀 걷고싶다.
 어차피 음식 만들때 쓰는 주 재료는 다 심향이한테 맞기고왔으니 빨리 집에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대신 무거운 물건이나 물 같은건 내가 맡았지만...)
 왠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조금이라도 걷지 않으면 금방 시커먼 노이즈로 덮혀버릴것 같다.
 소문
 신기
 의식
 퇴마
 ...이게 다 무슨 단어인지 원...마치 귀신이라도 튀어나올것 같은 단어들 뿐이잖아...
 있던 재수도 다 떨어질것 같은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 돈다.
 그런 생각을 떨치려고 얼마쯤 걷다가 이번엔 좀 다른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렇고보니...'
 너무 조용하다.
 사람들 발소리 조차 안들린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 동네는 아닌데...?'
 가끔 차도에서 승용차 몇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타이어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안들린다.
 아무리 여기가 외곽 구역이라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거나 조용할리는 없다. 최소한 TV소리라도 들리긴해야할텐데...
 발을 옮길수록 가게들의 불빛은 적어지고 가로등도 까딱까딱한다.
 주위의 공기도 점점 무거워지는게 영 심상치가 않다.
 '이건 진짜...귀신이 아니라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되는 분위기 잖아...'
 하필 오늘 영 께롬직한 얘기를 들은 터라 더 신경 쓰이게 된다.
 깜빡
 깜빡
 깜빡
 틱....
 그나마 미춰주던 가로등도 꺼질듯 말듯 하다가 결국에는 맥없이 꺼져버렸다.
 무겁기만 하던 공기에 기분나쁜 진동과 역겹고 비릿한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도망쳐'
 타박
 '도망가라고'
 타박타박
 '집으로 가...!'
 타박타박타박
 '말 좀 들으라고!'
 타박타박타박타박
 '집으로 가라니까!'
 타다다다다!
 머리는 도망가라고, 방향을 틀라고 명령하지만 몸이 듣지를않는다.
 분명히 적색 사이렌이 울리지만 발은 아는지 모르는지 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가아고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위험하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자꾸만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불안하고 무섭다. 가로등도 다 꺼져서 이젠 안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심장이 곤두발질치고 머리가 새하얗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된다.
 손바닥과 등에는 식은 땀이 타고 내리지만 닦을 생각도 안든다.
 무언가 있다.
 무언가가 자꾸만 부른다.
 무언가가...알지도 못하지만 그것이 자꾸만 끌어당기고있다!
 저 길의 모퉁이만 돌면!
 '그것'이 있다!
 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내 사고도 생각도, 그리고 그 부르는 무언가의 느낌도 멈췄다.
 그리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자욱한 먼지구름 안에서도 은은하게, 그리고 화려하게 빛나는 금발이...내 눈을 사로잡았다.
 
6
 피비린내가 풍기고, 쉑쉑거리는 뱀이 혀 놀리는 소리...그리고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금발(언젠가 내가 내 동생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언급한것 같은데 큐티클이 반짝이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달빛 같다.)과 비칠것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 너무나 형형하게 빛나서 제대로 쳐다보는것도 어려울것 같은 금안...그리고 이 모든 아름다운 모습을 깡그리 잊게해버릴만큼 섬뜩하고 서늘하게 빛나는 긴 장검은 마치 모든것을 잡아먹을듯 빛났다.
 이 모든것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못하고,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크크크큭...어이어이, 네년. 대체 뭐야? 어딘가의 신이야?"
 저 금발의 여자에게 온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건물의 잔해에서 어기적 어기적 기어나오는 시커멓고, 왜인지 위험한 냄새가 풍기는 남자가 말했다.
 "...입이 더럽구나, 그래. 다음에는 네놈의 입을 찢어주는게 좋겠지."
 금발의 여자는 보통이라면 하지 않을 잔인한 말을 평탄하고 평범하게 인사하는것처럼 가볍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팔한짝 밖에 없는 병신한테 이번엔 입까지 쨀려고? 아이고, 무섭구만 무서워."
 아까는 엎드려있어서 몰랐는지만 검은 누더기 같은 정장에 뱀처럼 찌르는 눈초리를 가진 남자가 오른손에 왼팔을 흔들면서...
 "욱..."
 다시봐도 역시 사람의 팔이다.
 게다가 왼팔이 있어야하는 자리에는 깨끗한 절단면이 있다.
 한마디로 일도양단이었던 것이다.
 "짐에게 이런 여흥거리는 적으니 말이다. 네놈도 짐이런 여흥거리는 좀 느긋하고 재미있게 놀고싶지 않느냐?"
 이 상황이 꽤 즐거운듯 금발의 여자는 쿡쿡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푸욱
 찰나의 순간, 금발이 밤하늘과 별을 배경으로 수려하게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들리는 기분나쁜 끔찍한 소리가 살을 째는 소리라는것을 나는 잠시동안 인식하지 못했다.
 아까의 말 그대로,
 검이 남자의 입을 쭈욱 찢었다.
 원래 입이 있던곳을 시발점으로 뺨을 찢고 귀가에 걸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게...
 "우욱..."
 그 역겨운 그림에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 야릇한 시선을 느꼈다.
 '분명히...숨어있었을텐데...?'
 마치 뱀의 먹잇감이 된것 같은 느낌이, 금방이라도 온몸을 찌부러뜨릴것 같았다.
 몇백개의 척추뼈로 움직일수있는 온몸으로 몸을 으스러트려 먹기 좋게 만듬 다음 한번에 날 삼키는 뱀의 모습이 싫어도 계속 상상이 되어갔다.
 두려움.
 순수하게 무섭고 오금이 저릴만큼 두렵다.
 고개를 들지 못할만큼 무섭다.
 심장이 방망질을 하고
 등에서는 식은 땀이 줄줄 흐른다.
 호홉이 가파져서 자꾸만 어깨가 들썩인다.
 숨쉬는걸 유지하는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안난다.
 아니, 지금 내게 박히는 시선이 생각하는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구역질이 날법도 한데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죽기 위해서, 그리고 쉽게 먹히기 위해서 온몸이 찌부러진다...
 압박감에 죽을것 같다.
 죽는다.
 두렵다.
 먹힌다.
 남에게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러도 입 안에서 맴돌뿐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눈앞이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세상이 빙글빙글 쳇바퀴를 돌고있다.
 그리고 죽는다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그어놓았을때
 사고가 멈추고 뱀이 목덜미를 물었다.
 콰드드득 드드득
 살과 뼈가 부숴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내 귀에 박혔다.
 왼쪽 쇄골과 갈비뼈가 박살난것이 아직까지 현실로 다가오지 못햇다.
 그리고...내 왼쪽 어깨에 아직까지 붙어있는 뱀을 보고서야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아아악...아아아..."
 콰득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파아아아아아아!!!"
 이제서야 고통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미칠듯이 아프다.
 죽는게 더 나은게 아닐까할 정도로 아프다.
 고통스럽다.
 아프다.
 죽을것 같다.
 비릿한 핏색이 머릿속을 난도질한다.
 생각 같은건 필요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고통만으로 충분히, 아니 과도하게 아프다.
 금방이라도 눈깔이 뒤집어질것 같은 내 눈으로 보이는건 입이 찢어진채로 섬뜩하게 웃는 뱀눈초리의 남자다.
 찢어진 입으로 무어라 말하지만 이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있는지도 모르겠다.
 의식이 멀어지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마지막 발버둥이라도 쳐보려하지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젠 비명도 나오지 않는지 목의 떨림도 멈췄다.
 단지 피비린내와 진득한 점액 냄새만 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때-
 -휙
 어깨쪽에 느껴졌던 답답한 무언가가 쑥 빠지고 몸이 공중으로 뜨는게 느껴진다.
 이윽고 다시-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뜨겁고 무거운 아픔이 전신의 세포를 깨운다.
 "커헉!"
 공중에 들렸다가 다시 땅바닥에 내동냉이 쳐진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폐의 공기가 갑자기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어쨌건 살았다고해야할찌 연명이라고 해야할지 모를판에 멀어졌던 의식이 아픔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죽을건 뻔하다.
 요행이라고 할지 다시 의식이 돌아온 덕분에 시야도 선명해졌고 귀도 다시 열린것 같다 내가 숨쉬는 숨소리도 다시 들린다. 머리가 좀 과하게 아프고 속이 메슥거리는것을 보니 떨어질때 머리도 다친 모양이다.
 "킬킬킬킬!! 하하하하!! 고맙다! 머저리 같은 인간! 니 덕분에 대강은 회복했어! 이야!! 운이 좋았는걸?! 너 말이야? 오래 살겠더라고? 지금은 내가 다 뺐었지만! 키히히히히히히!!! 자, 그럼 네년을 토막내 보는게 좋겠지? 아아, 기대되는걸?! 키히히히히히히!!"
 칠판을 손톱으로 긁어내는 듯한 웃음소리 때문에 저절로 욕기지가 나온다. 그보다 무슨 뜻이지? 내가 저 망할 녀석한테 해준일이있나?
 그냥 죽이려던게 아닌가?
 그리고 놈이 말하는 사이,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몸에 난 상처에서 피가 수돗물처럼 줄줄 흘러나와 점점 더 큰 웅덩이를 만들고있었다.
 '아, 염병할...이번엔 과다출혈인가...'
 뜨끈한 피웅덩이와는 달리 자꾸만 식어가는 몸 때문에 손이 덜덜 떨리고 푸르게 변한다.
 "미천한 놈."
 "아앙? 미천? 내가? 하하하하하!! 좋은 농담이지만 상대를 잘모....어?"
 다시 흐릿흐릿해지기 시작한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단지 노려보기만 했는데 남자의 오른팔이 터졌다.
 펑-하고
 피가 불꽃놀이하듯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오른팔 하나만 남아있던 남자의 정아이 이제는 몸통과 다리만 남기고 더더욱 누더기가 되었다.
 "겨우 인간하나 잡았다고 짐에게 이길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하다니...웃기지도 않는군. 그것은 짐에 대한 모독이다. 잘새겨서 다음 생에는  제대로 지켜라, 이 하등하고 미천한 뱀."
 그리고 그녀가 검으로 놈의 목을 내리치려할때
 "킬킬킬..."
 휘익
 분명히 놈의 목을 겨우던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콰앙!
 지면에 검의 날이 선명하고 깊게 파였다.
 "뱀은 말이지...원래 좀 많이 질기거든...킬킬킬..."
 어디서인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스스슥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진것 같다.
 "약삭빠른 놈이군..."
 "아아악..."
 잊고있었던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난 중환자, 아니 죽기 직전이다. 쇄골하고 갈비뼈, 그리고 어깨가 통째로 작살나서 곤죽처럼 찌그러져있고 그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서 과다출혈까지 겹쳤다.
 '이건 뭐...지금 당장 죽으라는 얘기네...'
 아아 그리고 아까 확신했는데 머리를 부딪히면서 뇌진탕까지 겹친것 같았다.
 ...죽는게 활실하구나...
 "....사..."
 "..."
 최소한...
 "사ㄹ...줘..."
 발버둥은 치고싶다.
 "살려줘...."
 외침도 아니고 말하는것도 아니다.
 단지 미약한 성대의 진동일 뿐이다.
 "아직..."
 죽고싶지는 않다.
 툭...하고 뭔가가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와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무어라 하였느냐?"
 나보고 말하는건가? 귀가 먹먹해져서 잘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게냐?"
 "...살...려줘..."
 뭐라고하던지 상관없다.
 "살려...주..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아닌 목소리도 겨우겨우 한 글자 한 글자 쥐어짜낸다.
 "....않아..."
 "..."
 "죽고싶...지...않아..."
 아직은 살고싶다.
 학교에서도 공부도 못따라가는 낙오자에...
 "아직...은..."
 집에서도 완전히 기대를 져버린 불효자지만...
 "죽고싶지...않....ㅇ..."
 게임오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니까...
 "제발..."
 흐릿한 초점의 눈앞에 입술이 움직인다.
 '살려줘'
 "살려줘"
 더 이상 입이 안떨어진다.
 눈을 움직일 힘도 없다.
 "살고싶으냐?"
 잘 들리지 않는 귀로 최대한 경청한다.
 끄덕...
 "인간이기를...포기해서라도?"
 ..끄덕...
 "후회하지는 말거라. 그대가 선택한 길이니."
 그렇게, 3월의 어느 중순. 장뫼향張山響, 나는 죽었다.
 
7
 일어난다.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으로...
 "으윽..."
 일어나자마자 온몸이 우드득거리면서 비명을 지른다.
 처음보는 천장이다.
 "...어디지...?"
 처음보는 새카만 천장과 먼지가 잔뜩쌓인 바닥, 때가 잔뜩 끼고 금이 쩍쩍간 벽
 아무리 봐도 제대로된 건물은 아니다.
 좋게 봐줘도 폐공장이다.
 몇시지?
 분명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어 놓았는것 같은데.
 '...찾았다.'
 달칵
 아직 피처폰인 내 핸드폰이 뒤로 젖어혀진다.
 '3월 20일 4시 27분...'
 ...어?
 "20일?! 3일이나 지났잖아!"
 분명히 기절하거나 잔것 같기는 했지만 벌써 3일이나 잔건가?!
 거짓말 같지만 몇번을 눈씻고 봐도 3일이나 지난 20일이다.
 이미 봄방학이 시작하고 2일째다.
 "아아, 잠깐잠깐. 난 분명히 죽은...그래, 죽었던것 같은데...어떻게 살아난거지? 설마 좀비?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럼 어떻게 된거지? 도 무지 앞뒤가 안맞잖아?"
 죽었다.
 분명히...사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 상황에서는 죽기밖에 더 하겠어?
 왼쪽이 박살나고 피웅덩이가 만들어져서 과다출혈에 뇌진탕까지 겹쳤다...하지만...
 "살았네...숨 쉬고 있잖아?"
 약간 뻐근하기도 하지만 확실히 몸이 가볍다.
 스트레칭만 하면 이 뻐근함도 우두둑하는 뼛소리와 함께 좋아질것이다.
 문제는...
 "도대체 여긴 어디지?"
 천장이고 벽이고 판자로 꽉꽉 틀어막아서 빛이 들어오지도 않는다.
 환기는 겨우겨우 나있는 통풍기 하나(사실 너무 낡고 녹슬어서 곧 떨어질것 같다.) 밖에 없다.
 "아 맞다. 심향이!"
 다시 잘 생각해보니 심향이 혼자 집에 두고왔다.
 연락은 해야하겠는데...
 한번더 피처폰이 열린다.
 -부재중 통화 129통
 -메세지 321통
 ...전화해야겠...지?
 게다가 문자도 처음 10통 정도는 꽤나 걱정하고 제법 길게썼는데 그 후의 약 300통은 짧은 한마디만 적혀있다.
 -뭐해?
 물론 이것도 뒤에는 짧막하게 '?' 만 적혀있다.
 무섭다.
 이건 진짜 단순하게 무섭다.
 연락하는건 짧지만 문자 한통이라도 넣어주자.
 "일단은 나가는게 정답이려나..."
 꽤 오래 누워있었는지 옷이 먼지 투성이가 되어있다.
 왼쪽 어깨에 있던 옷들은 깨끗하게 찢겨있는게 아마 나 말고 누군가 일부러 찢어놓은것 같다.
 대충 문으로 보이는 것을 밀어보니 어슴푸레한 하늘이 보인다.
 아무래도 새벽이었던 모양이다.
 새벽인것을 확인하고 뭉쳐있는 근육을 풀기 위해 왼쪽어깨부터...
 응? 왼쪽?
 "어? 상처가..."
 상처가 없다.
 심지어 흉터도 없이 깨끗하게 나아있었다.
 통증이 없어서 아마 치료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다.
 이건 이미 완치다.
 뇌진탕도 이미 깨끗하게 나았다.
 후유증 같은것도 없이 깨끗한 완치다.
 그보다, 이런걸 보통 3일 안에 완치할수 있나?
 최소한 반년은 치료해야할 정도로 중상이었는데?
 이미 상처가 아니라 파열이라고 할 정도로 심했었다.
 겨우 3일 안에 치료한다는건 불가능하다.
 띠리리리리리리
 "전화?"
 잠잠하던 주머기나 갑자기 요란스럽게 울어댄다.
 -심향
 오싹하다.
 전화를 받아야하나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지금 받지 않으면 언제 다시 전화할지 모르니 통화버튼을 누른다.
 "어디야?"
 따지지 않고 담백하고 깔끔한 다이랙트다.
 그렇다고 '모르는 폐공장에서 3일이나 세상 모르고 자버렸어.' 라고 말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구랑있어?"
 '설마 애인?' 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혼자야, 걱정마. 납치당한건 아니야."
 사실 확신할수는 없다.
 3일 동안 위치도 모르는 폐허에서 자고있었다니...다행히 문이 열려있어서 망정이지 잠겨있었다면 그대로 게임오버였다.
 그런것만 보면 감금은 아닌데 말이지...
 "어떻게 된거야? 3일 동안 아무 연락도 없고!"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하니 안절부절 이걸 어떻게 달래야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미안, 사정이 있었어."(사실 나도 어떻게 된건지 젼혀 모르겠지만.)
 "언제 집에 올건데?"
 "..."
 이런, 적당한 말을 못찾았다.
 "거봐! 언제 올거야?!"
 "봄방학 끝나기 전에는 갈게."
 "바보! 그러니까 밤에 나가면 금발 여자가...아!"
 금발 여자? 그거 설마...
 "야! 심향! 금발이라니?!"
 "아...그게...그러니까..."
 "울지말고! 제대로 말해봐!"
 "그...그, 금발을 한 여자가...히, 히이...주...죽인다...고.."
 그냥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괴담이다.
 하지만 이 브라콘은 이런 소문도 불안했을게 뻔하다. 게다가 금발의 여자라고 하니 더 불안했겠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내 상황에서 이건 단지 무서운 소문으로 끝날 얘기가 아니다.
 삑 삑 삑
 '무슨 소리지?'
 핸드폰에서 이상한 경고음이 났다.
 뭔가 이상해서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봤더니 배터리가 깜빡깜빡하고 있다.
 "심향아, 짤게 말할게. 걱정마. 집에는 꼭 들어갈테니까 경찰에는..."
 뚜...뚜...뚜...
 배터리가 다 됬다. 이젠 다른 곳에 연락할수도 없어졌네...
 달칵
 제 기능을 못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일단은 발을 움직인다.
 탁 탁 탁 탁
 아무도 없는 폐허에 내 발소리만 을씨년스럽게 울린다.
 철, 찢어진 컨테이너 박스, 철근, 조각난 서류, 동강난 책상과 의자 같은것이 바닥이고 천장이고 자기 세상인듯 나뒹굴고 있고, 그 밖에 물건(이라고 해도 원형이 어느정도 보인다는 선에서)은 보이지 않는다.
 대충 근처를 둘러보니 이 건물은 폐공장의 업무처리실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
 널브러진 물건들 중에는 간간히 컴퓨터 같은것도 있었고 개중에는 제법 복잡해보이는 기계도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곳이지? 제법 중요해보이는 곳이었던것 같은데?"
 조각난 서류들 중에서는 계약서 같은 꽤나 멀끔한 종이도 있었다.(손대면 안될것 같아서 그냥 뒀지만)
 일단 지금은 나가서 길을 찾아야된다. 최소한 여기가 어디인지 정도는 알수있을지도 모른다.
 철컥
 누군가 들어왔다. 그보다 여긴 나밖에 없지 않다.
 전기가 들어오지도 않아 컴컴한 방안에서도 뚜렷하게,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과 금안이 천천히 나타났다.
 그 모습에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위압감과 위엄을 느껴서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있었다.
 또각 또각 또각
 터벅 터벅 터벅
 두개의 발소리만 엇박자로 들리는 방안은 형용할 수 없는, 마치 커다란 괴물을 보고있노라는 듯한 공포심과 위압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턱턱 막히는 숨을 힘겹게 삼키며 도망만 치고있을때 스윽, 하고 그나마 약간은 빛이 비치는 곳에 '그것'이 보였다.
 순간 '아'하고 작은 탄식과 함께 안심했다.
 금발과 금안이라고 했을때 부터 기억나는건 '그녀'뿐이었다.
 3일 전, 괴물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했던(아마 그녀에게는 장난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금발의 여자, 소문의 주인공, 그리고 지금 유일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내 앞에 있는 유기물이면서 생명체다.
 그렇게 내가 안심아닌 안심을 할때 그녀는 그 찬란하게 빛나는 금안을 굴리면서 내 모습을 이리저리 훝어보고 있었다.
 마치 그 눈에 꿰뚫리는 느낌을 받아 등골이 서늘해졌을 때
 "어딘가 이상한 곳은 없는가?"
 아름다우면서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에 비해서 한없이 차갑고 권위적인 말투에 어딘지 모르게 명령조 같은 느낌에 내가 흠칫 놀랄때,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귀가 이상한건가? 흐음...귀찮게 되었군."
 정말 '곱다.' 라는 말로는 다 형용할수 없는 목소리다.
 "아니...그, 다 멀쩡한데..."
 순간, 그 시리고 차가운, 하지만 영롱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이루 말할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등줄기를 훝고 지나갔다.
 "멀쩡하다면 됐다. 사지는 멀쩡한것같고, 상처도 깨끗이 나았군. 아직 흠잡을 곳은 없구나."
 "역시나 이거, ....어.."
 뭐라고 불러야하지? 그러고보니 이름을 모른다. 그렇다고 '당신' 이나 '너' 같은 호칭은 실례일것 같고(상당히 귀족스러운 느낌이 강해서 얺짠아 할것 같다.) 이름을 물어봐야하는건지 호칭을 물어야할지 모르겠다.
 "저기 말이지..."
 "뭐지? 뭔가 할말이 있는가?"
 역시나 품위있는 말투가 원래 말투인것 같다. 아니, 기품 자체에서 위엄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어쨌건 물어볼건 물어봐야지
 "이름이 뭐야? 뭐라고 부르면 되지?"
 "....이름 말인가?"
 약간, 아주 잠시동안이었지만 그 아름다운 금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그대에게라면 괜찮겠지. '라헬 베르길리우스'. 별명 비슷하게 '서리의 음유시인'이라는 참 멋없는 호칭이 따라다니긴 하지만 전자가  짐의 존명이다."
 '라헬 베르길리우스', 역시나 유럽 어딘가의 귀족 느낌이 물씬 풍기는, 뭐랄까 상당히 고귀하고 고결한 이름 같다. 아니, '같다'가 아니라 '확실'하다.
 근데 이 경우에는 뭐라고 해야하지? 존명이라고 했으니까 보통 뒤에 '~님' 이라던가 '~아씨' 같은 느낌의 호칭이 달리는것 같은데...
 뭐 어느쪽이든 이름은 '라헬'이니까 괜찮겠지.
 "이 상처, 라헬. 네가 치료해준거야?"
 "하핫."
 어? 가볍게 웃었다. 내가 웃긴 말이라도 한건가?
 "후후후, 짐이 웃는데는 두가지 이유에서다. 뭐, 그대도 알아둬야겠으니 특별히 말해주는것이니라."
 역시 내가 뭔가 실수한 모양이다.
 "첫번째는 그대가 짐을 '라헬'이라 부른 점. 다른 이에게 그렇게 불린지도 참 오랜만이군. 얼마지? 한 100년? 200년? 후후후, 오래도 되었구나."
 "저기, 보통은 이름쪽을 부르지 않아? 외국에서도 성으로 부르는 경우는 없지 않나?"
 아니, 내가 틀린건가?
 ...어어? 잠깐, 아까 백년 단위로 시간을 잡지 않았어?
 "잠깐만 있어봐, 라헬. 대체 몇년을, 아니 몇백년을 살았던거야?"
 그녀는 다시 잠시 미소를 띄웠다가 뜸을 들이고 말했다.
 "그건 짐이 웃었던 두번째 이유에서 가르쳐주마. 그런 의미로 두번째 이유다. 물론 그대의 상처는 치료되었다. 하지만 그걸한건 짐이 아니 지. 말하자면 어시스트였지. 그건 그대가 치료한거다."
 "이걸 내가 치료했다고? 잠깐만, 최소 몇개월은 입원해야할것 같은 중상을, 그것도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였던 그걸 내가 3일만에 치료했다 고? 그것도 완쾌로? 말이 안돼잖아?"
 말을 마치자 라헬은 아주 약간 올라갔던 입꼬리를 다시 내리고 약간 진지해진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보다 웃는걸 멈춘것 만으로 이렇게 공기를 가라앉힐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아까 잠이 살아온 시간을 물었던가? 대답해주지. 약 500년. 한 50년쯤의 오차가 있을수는 있지만 대강으로 기억하길 500년이다."
 ...어떻게...사람이 어떻게...
 "오래 살았느냐고?"
 정곡이다.
 "간단하다. 짐은 '흡혈귀'다. 흔히 말하는 뱀파이어, 드라큘라 같은...그래, '괴물'이다.
 이제야 소문의 이유를 알겠다.
 눈부실만큼 아름다운 금발.
 시리도록 차갑게 빛나는 금안
 이 세상의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않는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
 대적할 적이 없어보이는 상당한, 아니 감히 비교를 할수없는 마치 여신같은 미모
 그리고-
 "흡...혈귀..."
 이것 참...늘어놓고 보니 최고의 조합이다.
 "한가지 더, 알아둬야하는것이 있다."
 "뭘 말이야? 이 이상 알아야할게 있어?"
 질린듯이 말하는 내게 그녀는 잔인하게 흉악하기 그지 없는 진실을 말했다.
 "그대 또한 짐의 종복, 흡혈귀다."
 머리가 식어지는 것에 비해서
 가슴속에서 뭔가가 뜨겁게 응어리 지고
 눈앞이 저 금발 때문에 새하얗게 되버린다.
 어째서인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주저앉은 그대로 생각하기 싫어하는 머리는 그대로 회전을 멈췄지만
 딱 하나 잊혀지지 않는 그 아름다운 금발이, 마치 저주걸린 보석처럼 느껴졌다.
 
8
 흡혈귀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이 원조로 파생에 파생을 더해가 지금은 피를 빨아 마시는 괴물로 게임이나 소설, 영화 같은 곳에서 신나게 쓰여서 이제는 너무 흔해빠져 딱히 '공포'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괴물'
 ...괴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하지?
 하늘이 무너진 느낌?
 아니, 너무 현실감이 없다.
 그래 맞다. 암선고를 받은 기분이려나?
 아이러니하게도 난 앞으로 영생을 살수있을지도 모르지만.
 하하하, 웃기다. 너무 웃겨서 실성할것 같다.
 실성하다 못해서 차라리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으면 좋겠다.
 ...괴물이라...
 "날 왜 흡혈귀로 만든거야?"
 "스스로 목을 들이밀었으니, 안먹을수도 없지 않느냐."
 -인간을 포기해서라도?
 ...변명이다.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질문에, 그리고 충고에 난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컨데 수락이다.
 Yes.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바짓가랑이를 잡았는지 도망못치게 손을 꽉 잡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살려달라고 부탁한것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제발'까지 붙여서.
 그리고 그 시리도록 차가운 그녀의 눈에 내가 띄였고
 그녀는 부탁을 들어준것 뿐이다.
 그것뿐이다.
 살려달라는 내 부탁을 제대로 들어주었다.
 상처도 깨끗하게 나았고 몸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지만...
 "괴물이 된게 그렇게 싫은가?"
 끄덕
 그리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한방울이 툭하고 내 바짓가랑이에 떨어졌다.
 "날 살려준건 고마워. 제대로 감사하고있어. 하지만..."
 괴물이 된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아~괴물이 되버렸네~'하고 넘어갈수도 없는 노릇이다.
 "라헬, 인간으로는 돌아갈수있어?"
 의미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듣고싶다. Yes인가 No인가보다 단지 대답, 그 자체를 듣고싶다.
 "돌아가게 해주마."
 것봐, 못돌아...어?
 "뭐?"
 놀라서 고개를 처든 내게 그녀는 다시한번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인간으로 돌려보내주겠다, 설사 몇년, 몇십년이 걸리더라도. 짐의 이름을 걸고서."
 인간이 아닌 그녀가 인간이었던 나와 약속했다.
 이름을 걸고하는 맹세?
 "흡혈귀가 이름을 건다는것은 자신의 존재를, 즉 짐 자체를 담보로 하는것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반드시 지키니."
 "어떤...어떤 방법으로?"
 아무리 인간으로 돌라갈수있다 해도 같은 인간이었던 내가 인간을 사냥할수는 없다. 게다가 그런 일을 힌두번도 아니고 몇십년 동안 할수도 없다.
 할수없다.
 인간 사냥 따위는...
 "다만."
 "또 뭔가가 있어?"
 "짐의 일을 조금 거들어주어야하겠느라. 말하자면 기브 앤 테이크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거야?"
 "잘 알고있구나, 애초에 그 검은 녀석만 아니었으면 짐이 이곳에 올 이유따위는 없었으니 말이다. 관광 삼아서는 한번은 왔었지만 말이 지."
 검은 녀석이라면 그때 그 뱀눈초리의 남자인가?
 그 남자가 아니면 달리 생각할 사람이 없다.
 "그리고 잘들어두거라. 짐은 이름을 건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대도 죽을 힘...아니, 존재가 사라질 각오로 임하여라."
 존재가 사라질 각오...
 "그렇게나 위험한 놈이야? 그 검은 남자."
 "글쎄, 하지만 이제 막 흡혈귀가 된 햇병아리 정도는 쉽게 삼켜버리겠지."
 '회복력은 짐과 견줄 정도로 상당하지만' 이라는 말을 하나 더 붙이고는 살짝 졸리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하였다.
 "하아암~, 슬슬 해가 뜰 시간이구나. 그렇다면 짐은 이제 자러가겠다. 그대도 졸리다면 따라오너라, 누추하지만 침실은 있다."
 "잠깐만 기다려줘."
 "뭐지? 할말은 다 한것 같은데?"
 아직, 제대로 다답하지 않은게 있다.
 "어떻게 날 인간으로 돌려줄거야?"
 제안을 해서 어물쩡 넘어갔었다. 하지만 제대로 듣고싶다.
 어떤 방법으로 날 인간으로 돌려줄지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대는 몰라도 된다. 일이 끝나면 알게 될터이니 지금 굳이 알 필요는 없다."
 퇴짜. 역시 복잡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 캐물어서 득될 일은 없다.
 괜한 신뢰만 팍팍 깎일게 뻔하다.
 "질문은 끝인가?"
 "....어. 그보다 나도 좀 졸리네. 침실이 어디인지 물어봐도 될까?"
 "따라오너라."
 끼익
 녹슬은 철문이 힘겹게 열린다.
 철컹
 그리고 아무도 없는 폐허에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오래도록 울린다.
 흡혈귀 두명만이 복도를 걸어갈 뿐이다.
 
 9 몸은 젼혀 피곤하지 않다. 문제는 멘탈이다. 아무리 흡혈귀가 되어도 정신만큼은 아직까지 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몸은 수면이 필요없어도 정신은 수면을 강하게 필요로 하고있다. 게다가 여러가지로 정신적인 쇼크를 받아서인지 아주 깊게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아주 깊게 잠드었다가 다시 일어난다. 온몸이 현실을 부정하려고 용을 쓴다. 다시  자고싶다는 의지를 모른척하고 애석은 눈은 스르르 열린다. 늘 하던대로 이불을 다시 잡으려고하지만 잡히는게 없다. 아, 맞아. 여긴 폐허다. 베개도 없이 잘도 숙면했구나. 판자로 틀어막아서 아주 약간만 밖이 보이는 창문 넘어로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밖이 어두운걸 보니 저녁, 늦으면 밤정도인것 같다. 풀썩 스프링이 다 나가서 삐걱거리는 1인용 침대에 뒤로 쓰러져 눕는다. 어디서, 아니 가까이서 뭔가 상당히 좋은 냄새가 난다. 냄새보다는 향기...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좋은 향기다. 손이 뭔가 부드러운 비단 같은, 하지만 비단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얇은 뭔가가 만져진다. 뭔가 싶어서 눈을 떠보니 금발의 머리카락이다. 마치 한올한올 정성스럽게 짜서 좋은 향수를 써서 좋은 향기만 배이게한 얇은 비단 같은 느낌이다. 그 금발의 물결을 눈으로 따라가보니 왠 여자가... 어? 어! 어?! 너무 놀라서 자빠졌는데도 아픈 감각도 못느꼈다. 다시 눈을 씻고보니 라헬이다. 1인용 침대에 둘이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다시보니 1인용은 아니고 약간 더 큰게 아마 휴게실 같은곳에 놓아둔 취침용 침대인것 같다. 게다가 자고있던 위치를 보니 라헬의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이에서 잤던 모양이다. 옷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상당히 귀티나고 귀족의 냄새가 짙에 배인, 그렇지만 매우 매혹적인 보라색인 시스룩 네글리제다. '이 여자...상당히 대담하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대충 앉아도 부숴지지 않을것 같은 의자를 끌어와 털썩 주저앉듯이 앉는다. 일단 상황 정리. '장보고 집에가는 중에 '뭔가'에 이끌려서 라헬을 봤고, 검은 남자한테 살해당한후에 내가 라헬한테 부탁해서 날 흡혈귀로 부활시켜줘서  현재 이 꼴. 핸드폰 배터리는 다써버렸고 갈아입을 옷은 없어서 입고있는 옷은 피범벅에 왼쪽 어깨죽지부터 가슴까지 대담하게 찢겨져나가있는 상태. 한마디로' "오해받기 딱 좋은 꼴이네..."
 '난감하네, 대략난감이야...'
 이 꼴로 밖에 나가면 경찰서에 안가도 알아서 경찰이 올게 뻔하다.
 아마 영화에서처럼 강력계 형사가 탁자를 탁 내리치겠지 그리고 뻔한 대사 왈
 -도대체 무슨 일을 한거야?!
 음, 뻔하다.
 게다가 흡혈귀인지라 구치소에서 자그마한 햇빛에도 온몸에 불이 붙을게 뻔하다.
 그렇게되면 평생 은둔자 신세지.
 그러고보니 은근히 흡혈귀가 약점이 많았다.
 마늘, 은십사, 햇빛, 나무말뚝에 박히는 심장 등등...
 "후우...피곤해...아까 잤는데 다시 피곤해지는 것같아..."
 답답한 마음 같이 답답한 창문으로 난 작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인간때에 보는 파란 하늘 대신 밤이 깊어가는 보라색과 검은색의 하늘이다.
 '슬슬 라헬을 깨우는게 좋겠지.'
 삐걱
 언제 일어났는지 라헬이 알아서 삐걱대는 침대를 짚고 일어났다.
 "흐음...벌써 밤인가? 그대는 일찍도 일어났군. 부지런한건 좋지만 한낮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면 생지옥을 맛보게 될게야."
 대표적인 약점인 햇빛이다.
 새겨듣자.
 "그런데 이게 어떻게 할거야? 그 검은 남자가 '나 여기있습니다~'하고 제발로 나타날게 아니잖아?"
 "아마 그렇게 나타날게다."
 "에?"
 '그렇게 나타난다'라는건 제발로 우리앞에 나타난다는 아까 내가 생각한 그런 출현이야?
 "아마 짐이 걷다보면 알아서 오게 될게야. 귀찮은 능력이 이럴땐 쓸모있군. 물론 '이런때만'이지만 말이야."
 능력? 무슨 능력이지?
 "아 맞다. 라헬, 근데 일단 밖으로 나갈거라면 내 옷 좀 어떻게 해줘."
 "하기사 그 꼴로 나가면 난리가 나겠구나."
 먼지투성이에 피범벅에 엄청 크게 찢겨있다.
 경찰이 아니라 군대가 와도 할말이 없다.
 "근데 저쪽에서 먼저 나올거라면 시내는 좀 위험하지 않아?"
 만약 라헬이랑 그 검은 놈이 붙으면 몇십명이 휘말릴지 모른다.
 안봐도 비디오다.
 "하하핫, 그대의 썩은 동태눈에는 짐이 그렇게 바보같이 보이는군, 하긴 썩은 동태눈에게 뭘 바라겠느냐? 이런이런 짐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진 모양이로구나. 안심하거라. 지금 인간은 놈이 덥썩 물어서 놓지 않고 있는 미끼나 다름 없으니."
 "미끼? 인간이? 특정 인물이 미끼라는거야? 아니면 인간이라는 생물 자체가 미끼라는거야?"
 "호오?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구나. 눈은 동태여도 머리만큼은 정상이라는건가?"
 ...미안하지만 눈도 나쁘진 않다고. 오히려 1.0 비슷해서 눈은 좋은편이다.
 하긴, 공부도 열심히한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컴퓨터를 많이한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좋아야지 정상이다.
 여하튼. 나도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정답?"
 "인간. 그래, 지금 놈이 노리는건 '인간 그 자체'다. 아마 지금쯤이면 침을 흘리고 괜찮은 인간이 없나 눈에 불을 켜고있겠지. 참 망측한 꼴이야. 어쩌면 진짜 뱀처럼 그 더러운 혀를 놀리고있을지도 모르지. 후우, 생각하니 역겹군."
 "괜찮은 인간을 찾는다니? 설마..."
 상당히 불길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간다.
 "숙주를 찾는게지. 원래 몸은 짐에게 박살났으니 더 이상 못쓰고 버리겠지."
 오싹
 오싹하다. 그야말로 호러다. 몸을 버리고 몸을 갈아탄다. 그럼 뺏은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건가? 그보다 버린 몸은? 신문의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두팔이 다 잘린 정장의 남자가 떡하니 나오는건가?
 그보다 만약 그 검은 남자가 뺏은 몸으로 살인이라도 한다면...
 뺏긴 사람은 인생파탄이다...
 "...라헬, 그럼 그때 난 왜 죽인거야? 그때도 제대된 몸은 아니었으니까 바로 뺏었으면 됬지 않았어?"
 "뱀의 탈피는 제법 오래걸린다더군. 아마 놈의 모티브가 뱀이었으니까 그 몸에서 빠져나가는게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겠지."
 '탈피'...
 "그러니 놈의 판단은 괜찮았던거지 옮기는게 제일 좋겠지만 일단 옮기려면 시간도 시간이고 그대의 몸으로 얼마나 더 버틸지도 모르고 힘도 제한 됬겠지. 차라리 먹는게 더 살만했을게야."
 하긴, 그 상태에서 라헬을 이기기는 불가능했다.
 라헬은 반쯤 노는걸로 싸웠고 놈은 진지하게 싸웠다고 한다.
 게다가 한쪽팔로 날아갔다, 결론은 승률은 0였던것.
 하지만 날 먹었다고해도 별로 이길수는 없었을것 같았는데...
 ...발악인가?
 내가 라헬한테 살려달라고 했던것 처럼...
 "뱀이든 벌이든 빨리 잡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끼면 보는 눈이 많아서 먹기도 그렇고 옮기기도 그럴테니 일단 좀 후미진 곳으로 가야겠구나, 아는 곳 없느냐?"
 "미안하지만 시내는 별로 많이 나가본적이 없어서 말이지. 미안해."
 그보다 꽃에는 벌이 꼬인다니 왜 그 말이 지금 딱이라는 생각이드는거지?
 "이번 여흥은 제법 길게가는구나. 보통은 아주 잠깐 놀고 끝나는데 말이지."
 "여흥인가...."
 "여흥이지. 오래살면 재미있는 일이 없으니 말이지."
 잠시, 아주 잠시. 라헬이 혐오스럽게 그리고 잔인하게 비춰졌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섬뜩할 정도로
 "하지만 이번건 여흥이라하기엔 너무 골치아프군. 오히려 혹을 하나 단 느낌이다. 귀찮군. 이런 여흥은 질린다."
 '자 그러면...'이라고 운을 떼며 라헬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슬슬 움직이지. 밤도 딱 좋은 상태로 여물었으니 몸도 개운하군."
 "그전에 내 옷 좀 어떻게 해줄래? 아까도 말했지만 역시 이 상태로는..."
 생각해보니 내가 말을 꺼내고 내가 말을 물렀었다, 왜그랬지?
 "이 근처 방에 옷가지 같은게 걸려있던것 같았는데 한번 가보거라. 말해두지만 어쩌다가 찾았던 곳이라 짐도 제대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럼 옷 좀 가지러 갈게."
 덜컹
 철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복도에 으스스하게 울린다.
 "근처 방이라고했으니까 최소한 이 층에 있는 방이겠지...만. 여기도 만만찮게 넓잖아..."
 역시 무슨 공장이었던게 맞았던듯 제법 넓다. 언제 다 둘러볼지 막막하기만하다.
 일단 바로 앞에 있는 문을 잡아당겼다.
 "어? 이거 왜이래?"
 빡빡한것이 잘 열리지 않는다. 약간 힘 좀 줘야 열릴것 같다.
 끼이이익....열린다.
 쾅!
 '어어? 왜이래?'
 안쪽으로 열리는 철문안에 벽이 후두둑하고 약간 무너졌다. 게다가 문을 다시 앞으로 당기니 허물어진 파편 같은게 다시 후두둑 연신 떨어졌다.
 ...문이 안쪽으로 열리는게 아니었으면 팔이 날아갔을지도 모르겠다.
 '흡혈귀가된 덕인가? 앞으로 문 열때도 조심안하면 또 왼팔이 날아갈지도 모르겠는걸...'
 열린 문안의 방은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뒤쪽에는 락커룸이 있어서 열어봤지만 썩은 나무조각 몇개와 먼지만 안에 있었다.
 한마디로 꽝.
 살짝 떨어진 문을 다시 고치기도 뭐하고 무엇보다 까딱하다가는 저 문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두기로했다. 어차피 폐허라서 아무도 안쓸테니까 고칠 필요도 없다.
 다음 방은(사실 약간 겁이 나서 살짝 툭 밀었다. 근데 제법 많이 열린게 아마 화나서 벽을 친다면 벽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게실 같은 느낌의 가구 배치가 보였다.
 소파에 탁자, 그리고 간이 침대.
 확실히 휴게소다.
 역시 방에 락커룸이 있어서 열어보니 남성용 작업복과 널브러진 사원증 같은게 보였다.
 작업복은 상하의를 따로 입는 식이고 상의는 자켓같은 형식이여서 대강 걸치니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누가 지운건지 자연적으로 풍화된건지는 모르겠지만 회사 이름도 지워져있어서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사원증은 거이 썩은 수준이라서 그냥 락커룸 안에 그대로 둔후 대강 작업복을 걸치고 다시 라헬이 있는 침실로 돌아갔다.
 "음, 이제 온게냐? 기다리는 중에 한숨 잘뻔하지 않았느냐? 앞으로는 행동을 좀 빨리 하도록 하거라."
 "미안해, 꽤 넓어서 찾기 어렵기도 했고 문이 말을 안들었거든."
 작업복에 묻었던 먼지를 털어낸후 대충 옷매무세를 정리한다.
 라헬은 내가 나가있던 동안 옷을 갈아입었는지 시스룩 네글리제에서 다시 처음에 봤던 드레스로 바뀌었다.
 "이제 볼일도 끝난것 같으니 움직이지. 혹은 빨리 떼내는게 좋으니 말이다."
 "이의없어. 오히려 환영이야, 그 얘기는."
 사실 빨리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초조할뿐이지만 이럴수록 더 여유를 갖는게 중요하다.
 인간의 최저랭크까지 떨어져도 한때는 괜찮은 놈이었던 흡혈귀의 변명이지만.
 침실의 두어 방 정도 떨어진 방으로 가보니 방의 네벽중 2개는 시원하게 박살나서 밤바람이 매섭게 불고있었고 바닥도 반쯤 부숴져서 제법 위험하다.
 차가운 밤공기가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고 약간 흥분이 되지만 반대로 머리만큼은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 온몸을 전율하게 만든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묘하게 들뜬 내게 라헬이 말했다.
 "밤은 짐이나 그대에게는 거이 모든 곳이 홈 스테이지 말이지. 밤이라는 이유하나로 그렇게나 흥분하는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너무 흥에 겨워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실제로 라헬도 밤공기를 마신후부터 묘하게 얼굴이 상기되고 들뜬 목소리로 말해서 깜짝 놀랐고 그녀의 충고에는 충분히 연륜이 묻어났다.
 사실 저렇게 어리고 미녀인 모습을 하고서 '연륜이 묻어난다'고하면 왠지 실례되지만 라헬도 한 500살쯤 살았고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니 오히려 이건 칭찬이 아닐까?
 "자, 그럼 가보자꾸나. 뱀사냥하러 말이다."
 탕!
 콘크리트 바닥이 굉음을 내며 우르르 떨었다. 자세히 보니 바닥이 약간 패이고 라헬은 저 멀리 날아오르듯 뛰어서는 공중에서 그 금발을 화려하게 휘날라고 있었다.
 그걸 멍하니 넋을 놓고 보고있는데 갑자기 라헬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뭐하는게냐? 따라오지 않고."
 '설마 나도 너처럼 점프하라고? 이봐이봐, 난 너 같이 공중을 날 각력 같은건 없다고.'
 '지금은 된다. 짐의 권속이지 않느냐? 정 무서우면 명령을 내리마, 뛰어라. 짐의 명령이다.
 어쩔수 없다. 갑을 관계에서 갑은 라헬이다.
 뛰는수 밖에...
 "설마 살면서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아니, 휘말리고 자시고 애초에 내 발로 태풍의 눈까지 들어오지 않았는가?
 제일 고요하고 제일 참혹한 곳까지 내 발로 걸어왔다.
 그렇게 따지면 인과응보인가...
 죽었다 깨어나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탕!
 멀리 뛰기하는 느낌으로 도움닫기를 하고 강하게 땅을 찬다.(지금은 콘크리트 바닥이지만)
 차갑게 부는 밤공기가 기분좋게 뺨을 어루만진다. 높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상당히 눈부셨고 높았다. 시내를 제외하면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 등에만 불이 켜져있어서 시내의 높은 건물들은 마치 보석처럼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인공적인 빛을 뽐내고있었다.
 아파트 20층 정도의 높이에서 활공하며 내려간다는건 의외로 상당히 재미있고 흥분되며 시원한게 폐 안으로 차디찬 공기가 가득찬다는게 이렇게 기분 좋을줄 몰랐다.
 바이킹도 그렇게 흥분했었는데 지금 경험으로 바이킹을 탄다면 지루해서 함성 조차 안나올것 같다.
 게다가 이렇게 높은곳에서 활공하면 왠지모를 여유까지 생긴다.
 쿵!
 어느 아파트의 옥상 같은에서 착지하고 발을 타고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통해서 머리까지 쭈욱 올라간다.
 다시 한번 몇걸음 달린 다음 크게 발을 쿠른다.
 타앙!하고 콘크리트가 흔들리는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그 소리를 뒤로하고 다시금 날아오르는 기분을 만끽한다.
 그렇게 두번 정도 더 활공한 후에 라헬이 있는 시내 중심가의 고층빌딩의 옥상 어딘가에 착지한다.
 라헬은 '이제왔냐?'하는 표정으로 찌르듯 째려봤지만 애써 모른척했다.
 "음...그래도 흡혈귀가 된지 하루만에 이 속도로 이 거리까지 왔다는건 짐의 힘이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고로, 좋은 징조이다. 그대가 인간으로 돌아 가지 않는다면 두번째 최강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내 목표는 '평범平凡'이니까."
 특별한 경험도 괜찮지만 어느 정도껏이다.
 이렇게까 죽도록 특별한 건 사양이다.
 "자, 그럼 그대도 왔으니 뱀사냥이나 시작하자꾸나. 이제 슬슬 냄새를 맡았을게야."
 "저기 라헬. 한가지 부탁할게 있어."
 "뭐지? 권속이 주인에게 부탁할 만큼 중요한건가?"
 말이 부탁이지 사실 그냥 알아줬으면 하는거지만.
 "그 내 호칭말이야. 계속 '그대'라고 부를거야? 이름 정도는 불러주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흐음, 하긴 이름도 묻지않고 계속 내 편한대로 불렀군. 이 참에 들어두도록하지. 이름은 중요하니까 제대로 기억하는게 좋은것이야."
 왠지 이번에는 날 배려해주는 느낌까지 든다.
 "뫼향, 장 뫼향張山響"
 뫼향, 발음이 살짝 꼬이기 쉬운 이름이다. 라헬이 제대로 발음이나 할까?
 "뫼...라. 확실히 '산'이라는 뜻이었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군."
 "어? 어떻게 안거야?"
 아직 뜻도 말 안했는데?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관광삼아서 온적이 있다고."
 -관광 삼아서는 한번 왔지만 말이지.
 확실히 그런 말을 했었다.
 한글도 그때 배운건가?
 "그리고 그대에게는 미안하지만 짐에겐 그렇게 부르는것이 편하다. 이런 자잘한것까지 신경쓰다니, 도량이 좁구나."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도량이 좁다니, 내가 얼마나 속이 바다처럼 넓다고?
 아무렴 여동생이 자꾸만 샤워중에 벌컥벌컥 문을 열거나 자는 도중에 방에 들어와서 숨막힐 정도로 꽉 안아도 아무소리 안하는....
 ...이건 도량이 넓은게 아니라 그냥 인내심이 많은 거구나...착각했다.
 "꽤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도 겁먹고 숨어있는건가? 예의가 없는 뱀이로군, 숙녀를 기다리게 하다니."
 스르릉
 날카로운 금속소리가 들리고 라헬의 왼손바닥에서 검 자루가 불쑥 뽑히더니 밖으로 빼내니 온전한 모습의 환도가 라헬의 오른손에 들려있었다.
 ...이건 또 무슨 마술이지? 지금까지 본것 만으로 이미 이 여자가 괴물보다 더 이상한 존재란게 입증됬건만 이젠 이런 듣도보도 못한 마술까지 부리는건가?
 뭐냐고 칼먹는 남자, 칼 먹는것쯤 라헬이 보여준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잖아.
 내가 놀라건 말건 라헬은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윽고 갑자기 구석을 향해서 환도를 던져버렸고 그 자리에 있던 콘크리트는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더 신기한건 환도는 잘려나간 콘크리트에 제대로 박혀있었다.
 "아마 짐이 잘라버린 쪽이 왼팔이었고 오른팔은 터졌었지? 그때 터지지 않았다면 지금 오른팔이 날아갔겠군.
 스르륵
 뱀이 풀숲에서 기어나오듯 양팔이 잘리고 터진 검은 정장의 사내가 어둠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악사악
 뱀의 혀가 낼름거리며 먹잇감을 찾듯이 움직인다.
 걸레짝이 되어버린 검은 정장에 아주 깨끗하게 잘려나간 왼팔과 끔찍하게 터져버린 오른팔...확실하다.
 날 죽인, 그 검은 뱀이다.
 "아, 이건 뭐 진짜 괴물이네. 크크큭 이거야원. 틈 좀 봐서 한방에 삼켜버릴 생각이었는데...쳇, 대체 네년은 얼마나 괴물인거냐? 크크큭 아~진짜 웃겨, 웃겨 죽을것 같다는 말이지."
 수상하다. 분명히 죽을것 같다. 하지만 너무 여유롭다.
 이제 곳 죽을 녀석 같지가 않다. 오히려 감춰둔게 있는것 같아 찜찜하다.
 마치 반격이라도 할, 그리고 아주 확실한 뭔가가 있는 눈치다.
 "꼼수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짐에게 무슨 수를 쓰려는지는 모르겟다만, 어떤 수도 소용없을텐데 말이다. 하하핫, 뭐 좋다. 그 수고를 봐서라도 뭔지 한번 봐주지. 어디. 내어보거라."
 팍하고 여유롭게 환도를 뽑아들고는 그대로 그 검은 남자의 목에 가져간다.
 "그 전에 네놈이 당할지도 모르겠다만, 그거야 짐이 알바가 아니지."
 "어? 라헬,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분명히 아까는..."
 "저기 저 얼빠진 녀석이 해결할테니, 짐은 여유롭게 네놈을 먹으며 구경하면 되는게다. 하핫, 이럴땐 권속이 유용하게 쓰이는구나."
 내 말을 잘라먹고 되로 뱉어서 돌려주는 저 어법에 진짜로 얼이 빠졌다.
 "라헬! 난 너랑 동급이 아니야! 단지 인간이었던 흡혈귀라고 게다가 하루밖에 안됬잖아?! 물론 지금이 좋다는건 아니지만...! 여하튼 난 너보다 최소 2등급은 낮다고!"
 권속이잖아! 쫄따구잖아! 당연하지!!
 노려보는 것만으로 팔을 터뜨리거나 맨손에서 칼을 뽑아낸다거나 한방에 몇십Km나 날아간다거나 그런 능력은 없다고!
 "능력을 말하는게 아니다. 순수한 스테이더스를 말한게다. 예컨데 스팩이란거지. 물론 짐과 비교하자면 당연히 낮겠지만 그대가 약한것은 아니다. 오히려 A정도지. 하물며 이런 어중이 떠중이가 준비해봐야 얼마나 준비했겠느냐? 눈감고도 해결할 놈이 엄살피우지 말거라. 짐의 권속이라는 칭호가 아깝도다."
 그렇니까...아니라고..딱히 네 권속이란거에 프라이드도 없어.
 뭐, 그래도 저렇게까지 신뢰하니 뭐라도 해야지 안그럼 진짜 맞아죽겠다.
 "에라 모르겠다. 모 아니면 도다."
 설마 또 죽기야하겠어?
 씨익
 위험하디 위험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미소를 잔뜩 머금은채 남자는 이렇게 외쳤다.
 "우로보로스!!"
 빌딩의 콘트리트가 끔찍한 비늘로 변하고 옥상은 머리와 이빨이 되어 우리를 삼켰다.
 썩어들어가는 염산과 정신까지 먹어버릴듯한 독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10
 "으윽..."
 매스꺼운 염산 냄새와 소화액 냄새가 코를 찌르다 못해 썩히는것 같다.
 묘하게 몸이 저린것이 독까지 섞여있어서 꽤...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녹았을테니 꽤가 아니라 상당히 위험하다.
 "이거 진짜 위험하잖아...옷이 거이 다 녹았어..."
 역시나 '꽤'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위험하다. 입고있던 작업복이 정강이까지 녹았고 위에 입었던 자켓 작업복도 왼팔은 소매가 완전히 녹아서 맨살이 들어났고 오른팔도 팔꿈치까지 녹아서 필요 이상으로 통풍이 잘된다.
 게다가 가슴 부근까지 녹아서 이젠 지퍼를 올릴수도 없다.
 내 몸이 괜찮은 이유는 역시나 그 엄청난 치유력이겠지.
 산성까지 무력화 시키다니, 대체 얼마나 괴물 같은 치유력이야...
 "아 맞다. 라헬! 근처에 있어? 라헬!"
 "그리 소리치지 않아도 들린다."
 찰팍거리며 뒤에서 라헬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그나마 근처에 있어서."
 얼래? 그런데...
 "넌 옷이 멀쩡하네? 어떻게 된거야?"
 완전히 걸레가 되버린 내 옷과는 달리 실푸라기 하나 나오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느낌이 확 풍기는 그대로 멀쩡하기만 하다.
 "짐의 의복은 그대의 옷과는 달리 약간 특별해서 말이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피부겠지."
 "그 정도인가, 대단하네. 그 옷."
 빈 말이 아니고 진짜로 대단하다.
 이미 신발까지 너덜너덜 녹아버린 내 쪽과 달리 라헬의 두구는 굽하나 녹지 않았고 변색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액체에 닿으면 젖는게 당연한데 라헬의 옷은 그런것도 없이 보송보송하기만 하다.
 피부보다는 마치 갑옷 같다고 할까...
 "근데 말이야, 여기서 어떻게 나가려고? 방법이 있어?"
 "탈출은 잠시 보류하지. 할 일이 있다."
 엥? 무슨 얘기야? 나가지 않는다고?
 "무슨 말이야? 할 일이 있다니? 설마 그 할 일이란게 그 검은 남자를 잡는거야? 여기서?"
 "그래, 아까 놈이 이 더럽고 불쾌한 뱀을 부르는 이름을 들었나?"
 정확하지는 않지만...아마도
 "우로보로스? 그래, 우로보르스라고 들었어."
 "그래, 정답이다. 짐이 보기에 여긴 그 검은 녀석의 홈 스테이지 같군. 저번에도 짐이 말했지? 놈의 모티브는 뱀이라고. 아마도 앙상블 효과...라는 것이겠지. 그리고 놈이 가지고 있던 히든 카드가 이 녀석인거겠지. 그래서 그런 무례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고. 흠, 귀찮고도 불쾌하고 무례한 놈이군. 어차피 짐이 여기에 있으면 그런 놈은 꼭 만나지만 이번에는 좀 심하군, 악질이야."
 "그 정도인가..."
 마주칠 확률을 높이는게 아니라 꼭 만나야하는 상황을 만드는것...아마 그게 라헬의 능력 중에 하나인것 같다. 그래서 우연히 거기에 그 검은 놈이 있었구나.
 아주 잠깐 생각했던 생각이지만, 라헬이 이 능력의 강약을 조절할수 있다면 운명까지도 좌지우지 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 그 검은 작자는 여기 숨어있을게 뻔하지. 다만 문제라면 문제인것이 아까도 말했듯 여긴 놈의 홈 스테이지다. 한방에 부수지 않는 이상에는 아마 몸을 배배꼬는 것 같은 편법을 써서 우릴 가둘게 뻔하지. 흠, 한방에 부수려면 힘조절을 못하겠는데 그러면 놈도 당할게 아니더냐, 물론 혹은 빨리 떼는게 좋다지만 이래서는 여흥이 아니지 않느냐?"
 "하기사, 여기 더 있다간 내 옷도 더 걸레가 되버릴것 같아."
 좀 더 놀고싶어한다는 듯한 얘기가 있었던듯 했지만 여기서 태클을 걸면 시간만 버린다.
 넘어가자.
 왠지 공기가 싸늘해지는것 같아 라헬을 돌아보니 라헬이 아까보다는 좀 더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생각하는거지...? 그 놈을 찾을 방법을 생각하는건가?'
 하지만 그런거라면 이상하다. 라헬 정도라면 가만히 있어도 그 놈이 찾아올게 뻔할 뻔자다.
 게다가 아까 힘 조절일 안될 뿐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라헬을 보자면 손바닥만 뒤집어도 고층 빌딩 같은건 흔적도 없이 무너뜨릴 여자다.
 "말을 약간 바꾸지. 지금 당장 나가도록하겠다."
 "일단 그 검은 남자부터 잡아야한다는게 네 계획 아니었어?"
 "찾기 귀찮다. 그리고 이쪽으로 오길 기다리는것도 귀찮으니 빨리 끝내야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다시금 라헬의 손바닥에서 칼자루가 뽑히더니 오른손으로 다시 그걸 쑥 뽑아낸다.
 다시 봐도 끔찍하지만 대단한 능력이다.(그리고 칼 먹는 남자가 이걸 본다면 어떨지 잠깐 생각했다. 분발하라고, 칼 먹는 남자.)
 헌데 꺼낸 칼은 언제봐도 서늘하게 시린 빛이 지금은 더 시리고 은은하게 빛난다. 게다가 왜인지 모르게 섬뜩하고 지금이라도 잡아먹을듯한 빛이 한겹 더 해진것이 마치 커다란 맹수의 엄니를 보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흡혈귀가 되기 직전에 실컷 느꼈던 그것...
 '공포'....
 "좀 추울지도 모르니까 참도록 하여라."
 "어? 아니, 그런 말을해도 지금 옷이 이 꼴인데..."
 말을 끝맺기도 전에 라헬을 중심으로 하얀 서리가 끼더니 이윽고 얼음이 되기 시작했다. 시리고 시린 검날이 닿는곳 마다 바로 쩍쩍 갈라지며 얼음이 되고 너무 건조하게 얼어서 얼때마다 파삭파삭 부숴지며 얼음가루가 되어버린다.
 "...그건 또 무슨 마술이냐고..."
 "흐음...오랜만이군, 이걸 쓰는것도. 그렇니까...그래, 기억났군. '얼어라, 설화'."
 라헬이 이름을 말하자 대답하듯이 검은 더욱 기세를 가하여 얼음을 만들었고 조금 후에는 미친듯한 바람이 불어 서리가 바람을 타고 얼음이 만들어지고 다시 부숴지는 속도에 박차가 가했다.
 "'시동'은 잘걸리는군."
 그렇게 말하고서 라헬이 검을 휘두르니 서리가 마치 폭풍처럼 사납게 휘날렸고 닿는곳 마다 수분을 빼았고 그 빼았을 곳을 얼리고 부숴나갔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닌지 아까부터 자꾸만 피부가 당겨지는 듯한 느낌으로 약간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것 따위는 지금 내 가슴속에서 날뛰는 무언가에 비하면 약과였다.
 뭐지? 이 미친듯이 흐르는 식은땀은? 너무 추워서 땀이 아니라 콧물이 나와야 할텐데 정작 흘는건 식은땀 뿐이다.
 "섬뜩하네...그리고...또..."
 또 뭔가가 있다.
 하지만 머리는 그 뭔가를 생각해내기를 거부한다.
 뭐지? 이 숨막히는 느낌은...
 머리털이 비쭉서고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뭔가가 자꾸만 기어올라 심장을 내리치고 있다.
 기분 나쁘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이 느낌...분명히 알고있다...
 이건...이건....
 "죽음..."
 이 바람은 단순한 얼음폭풍이나 검의 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공포다, 그냥 공포도 아닌 죽음이다.
 죽음...그 어떤 공포보다 순수하고 단순하다.
 너무나 알기 쉽기 때문에 무섭다.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무섭다.
 얼음이나 서리는 장식이다...진짜 무기는...바로 이것이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정말 순수한 죽음의 공포.
 "얼어붙은 피는 차가운 살갗에 들러붙고 시리도록 퍼런 날이 짙게 깔린 안개를 걷어내니, 너의 이름은 '설화'. 베어라."
 서걱
 마치 얼음을 잘라내는듯이 건조하고 차갑고, 그리고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에 박히듯 들린다.
 위벽이 허물고 비늘이 쪼개지며 독이 얼어붙는다.
 이윽고 얼음보다 더 시리고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쳐지나간다.
 
11
 "쿨럭, 켁켁. 아 진짜, 좀 살살하면 어디가 덧나냐....어..."
 자욱한 먼지 사이로 보이는 것들은, 내가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에 충분했고 또한 현실이면서 지옥같기도 했다.
 붉은 살덩이와 콘크리트가 괴이한 색감을 내며 들리지 않는 비명이 내 귀 안을 파고들었다.
 무기질의 회색 돌덩어리들 사이로 유기물의 붉은 조각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손
 발
 다리
 내장
 허벅지
 뼈...
 그리고 비명을 지르던 모습 그대로 뜯겨나간 머리...
 "우웁..."
 무기질의 돌덩이 사이로 언젠가 따듯하게 흐르던 피와 부드러웠던 피부와 살들이 잔인하게,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괴하게 찌그러진 그 모습은 이루 말할수 없는 더럽고 기분나쁜, 그리고 끔찍한 그림으로 낙인처럼 새겨졌다.
 그리고 언젠가 봤던 기분이 드는 이 광경에 의식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빨려 들어간다.
 깊숙한 곳에서 움츠리던 '무언가'기 끌어당기고 먹어치운다.
 꾸역꾸역
 피부에 진득하게 들러붙는 이 끔찍한 촉감이 온 전신을 휘감는다.
 기억하기 싫은 '그것'이 나를 먹어간다.
 꾸역꾸역
 우드득우드득
 먹힌다.
 먹혀버린다.
 커다란 '무언가'가 입을 벌리고 살덩이를 조금씩 씹어가고
 진득하게 들러붙는 '그것'이 숨통을 조이고 팔을 부러뜨리고 발을 잡아당긴다.
 -너....
 뭐야...
 -너 때문에...
 그만해...
 -...때문에...!!!
 그만!!
 -너도...죽어!!!
 "아아아아아아아...!!"
 비명
 공포
 기억
 동생
 먹힌다.
 먹는다.
 동생...
 동생...?
 심향이...?
 아니야...아니야...아니야...!!
 -형!!
 "그만해!!"
 웅성웅성
 "어..!!"
 웅성웅성
 "이런..."
 사람들이다.
 잊고있었다, 여긴 시내인데다가 건물이 무너졌다.
 당연히 사람이 몰리는게 정답이다.
 '뭘 꾸물거리는게냐! 빨리 오너라!'
 '미안, 당장 갈게!'
 탕!
 발을 구른 자리에서 후두둑하고 무너지는 소리와 우드득하고 살이 찌푸러지는 기분나쁜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쓸 여유가 없다.
 "놓칠까보냐!!"
 콰드득
 "으아악!"
 오른쪽 발목에 격한 통증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끔찍한 흉몰의 남자의 입에서 뱀이 나와있었고 그 뱀이 내 발목을 물고 있었다.
 "키히히히히히!! 그 금발년은 어디갔어?!"
 얼굴의 반은 얼어서 시퍼렇게 변해있었고 양팔은 완전히 뜯어지고 잘린데다가 동상까지 걸린듯 검붉게 살얼음 같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배는 안에 담고있던 붉은 솜들을 모두 토해버리고 있었다.
 그야 말로 '괴물'이다. 저 상태로 살아있는게, 아니 움직이고 있는게 이상하다.
 아래쪽에서 끄는 힘과 중력의 영향으로 당연히 아래쪽으로 떨어진 후에야 한박자 늦은 비명이 귀를 괴롭혔다.
 한명의 비명이 두명으로, 세명, 네명...그리고 결국엔 모두가 겁을 집어먹고는 다들 그 와중에 한마디씩 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아!!"
 "괴물이다!"
 "살려줘! 살려달라고!"
 "경찰! 경찰은 어디있어?!"
 "씨발! 저게 다 뭐냐고!"
 그나마 유지하고있던 이성을 놓아버리니 우르르하고 비명이 쏟아졌다.
 "쨍알째알 시끄러워!!! 우로보로스까지 죽어서 기분 엿같으니까 조용히 꺼져! 이 망할 새끼들!!"
 다 죽어가는 '괴물'이 입에 뱀까지 넣고 정확한 발음으로 욕지기를 해대니 사람들은 조용하기는 커녕 더욱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역시나 저건 '괴물'이다...
 '라헬, 상황은 알고있지? 좀 도와줘.'
 '글쎄다...저런 놈 하나 죽이는데 짐까지 끼어들 필요가 있는가? 대충 주먹한 휘둘러도 죽을 놈이다. 빨리 끝내거라.'
 매정하다, 진짜 매정하다.
 사람 하나 죽인적 없는 내가 흡혈귀가 되고 대참사를 보고 심지어는 저런 괴물까지 죽이랜다.
 이렇게 매정할수가 없다.
 "아...젠장, 더럽게 아프네. 이젠 뱀이고 괴물이고 지긋지긋하다."
 좀 많이 아프지만 그보다 더 기분 더러운 일이 있으니 아픔을 참고 강제로 입을 비틀어 뺐다.
 투두둑
 어쩐지 열받아서 비튼 입을 그대로 뒤집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뱀의 입이 보기 좋게 찢어졌다.
 하, 이런걸 보니 안그래도 안좋던 기분이 더 엿같아 진다.
 "이봐 햇병아리. 그 금발년 어디갔냐? 당장 오라그래!!"
 툭툭
 어디서 개가 짖는건 무시하고 다시 오른발을 움직여본다.
 "그 년 사지를 찢어서 먹어버릴테다! 그리고 남은 머리통은 인간들한테 던져주지! 남은 몸뚱아리도 던져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너도 궁금하지 않냐!?"
 "시끄러, 이 망할 뱀 새끼야."
 "...하아?"
 뚝
 드디어 놈이하는 헛소리가 정점을 찍었다.
 더 이상 이 거추장스러운 끈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
 "뭐라고 했냐 이 병ㅅ..."
 투두득
 우드득
 살덩이가 터지는 소리와 뼈가 부러지는 기분나쁜 촉감과 소리가 오른손을 타고 전해져온다.
 이 더러운 기분이 몇번째인지 세는건 포기했다.
 "컥...! 이 새끼가..."
 "일단 입."
 빠각하고 더럽게 시원한 소리가 놈의 턱에서 났다.
 이미 내장이 빠져나가고 두 팔이 잘인 그 새끼의 몸은 나에게 지나치게 가벼워서 꽤 멀리 나가떨어졌다.
 "일어나, 안끝났어."
 "갑자기 왜 그래...? 히히히히...설마 이젠 그딴 몸이 마음에 든게 아니겠지? 히히히..."
 바람빠지고 쉰 기괴한 목소리가 났다.
 저 지랄맞은 발음도 이젠 꽤 이상해졌다.
 "아니, 농담이라도 그딴 말은 짓거리지마."
 콰득
 이번에는 내쪽에서 들렸다.
 왼쪽 어깨에 커다란 뱀이 들러붙어 그 기다란 송곳니를 어깨속으로 깊숙히 박아넣고 있다.
 "어때? 그립냐? 너 나한테 이렇게 당했잖아?"
 "...개지랄한다."
 투두둑
 시큰한 아픔과 함께 시원한 느낌이 어깨에서 느껴진다.
 집어뗀 뱀의 덜렁거리는 목을 잠시 흔들다가 이내 징그럽게 느껴져 뒤쪽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화가 나서 말이지."
 분명히 화가 났지만 왜인지 모르게 머리만큼은 화에 반비례해서 차갑게 식어간다.
 "너 같은 변태가, 단지 너 같은 미친 새끼 하나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는게 엿같아서."
 콱
 이 놈의 뱀은 이번에는 두마리가 각각 종아리와 아킬레스건을 물었다.
 하지만 무시한다, 이젠 무감각이라고해도 좋다.
 "게다가 내가 죽었던게 상당히 지랄 맞아서 말이야. 다시 생각하니 끔찍해."
 한방
 놈의 얼어붙은 이빨 두세개가 떨어졌다.
 "그 사람들도 나름 소중했던 사람이었던걸 생각하니"
 두방
 이빨 몇개가 더 부러졌다.
 "더 미칠것 같더라"
 세방
 "한 사람의 아들"
 네방
 "한 사람의 딸"
 다섯
 "소중한 부모님..."
 여섯
 "소중한 형제...!"
 일곱
 "소중한 사람들을...!!"
 여덟
 "다들 평범하고 소중한!!"
 하찮게 보여도 전부 둘도 없는 사람들을!!
 "너 같은 새끼가 한순간에 죽였어!"
 '어째서!'
 "어째서 너 같은 미친 사이코 때문에 왜 다들 그렇게 개죽음 당했어야했던건데?! 말해봐 이 미친 새끼야!"
 '괴물'
 "이 괴물 같은 새끼야! 왜! 왜! 왜 그랬냐고! 대답해! 이 씨발놈아!"
 '괴물'! '괴물'! '괴물'!!
 ...괴...물....
 -괴물이야!
 -으악! 저리가 이 괴물아!
 -살려줘! 괴물이야! 괴물이라고!
 "...."
 "컥컥...키히...키히히히히...이봐..."
 잘도 숨이 붙어있다.
 이번으로 끝내야겠다.
 "괴물은 '너'잖아? 안그래? '괴물'씨?"
 분명히 턱뼈가 박살나서 쉰소리가 밖에 나지 않을텐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는거지?
 웅성웅성
 "!!!"
 "이것봐, 다들 무서워하잖아?"
 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 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 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성
 '괴물'...'괴물'...'괴물'...
 "엄청난 괴물이고 약한 괴물이고 간에 인간들에겐 상관없어"
 "으아아아...."
 "단지 괴물이면 괴물일 뿐이야, 안그래?"
 "아아아아..."
 "괴물은 누구지? 응? 누구냐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괴물'은..'괴물은...-
 "짐이지 않는가? 최강이자 최고의 '괴물' 말이다."
 부드럽고, 여성적이고 또한 매혹적이며 아름답기로는 세상에 맞설자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가 말했다.
 "이젠 슬슬 사실을 인정하여라, 허나 하나만 알아두어라. 그대는 저런 구더기와는 격이 다르니 말이다."
 애석게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말해주는 대사는 모두 하나하나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짐이 그대를 아는 이상은 불행에 불행이 겹칠것이다."
 가장 재수없으며-
 "허나 감싸주겠다. 그대가 인간이든 괴물이든."
 가장 따듯한 말이었다.
 이제 사람들이 웅성거리든 비명을 지르던 상관쓰지 않는다.
 지금은 라헬만이 내가 인지할수있고 내가 알수있다.
 그 어느 여자보다, 그 어느 괴물보다 차갑고 잔인한, 그리고 품위있는 귀족이 내 편이고 나를 감싸준다.
 "이제 이 뱀사냥도 끝이군. 여흥이 이렇게까지 오래될줄은 몰랐다. 지옥에서나 기다려라, '구더기'."
 "히히히...참 엿같네. 씨발, 잘있어라 금발년."
 그렇게 지긋지긋한 사냥은 끝났다.
 저주인지 한탄인지 모를 그 놈의 욕설과 함께
 
12
 "어머~좋아라. 전설이 저기에 있잖아?"
 역시 이 마을은 뭔가가 있었어~안그러면 이렇게 아슬아슬한 냄새가 날리가 없잖아? 후후훗, 어쨌든 이번에는 너무 운이 좋은걸?
 "역시 중국에서 한국으로 와보길 잘했어."
 중국에서도 몇개 모으긴 햇지만 그닥 신통치는 않았지.
 "어라라? 가버리는구나, 하긴. 벌서 저 뱀은 처리했으니까."
 아마 저 아이 정도의 힘이라면 잠시동안만 있어도 흔적이 남을테니까 쫓는건 조금 후에 할까?
 "우선, 준비부터 해야겠지. 기다리렴, 도끼눈 남자애랑 전설의 음유시인~"
 
13
 다시 그 폐공장이다.
 세이브존 같은 느낌이라서 잠깐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라헬, 대체 그 녀석은 정체가 뭐였어?"
 괴물인건 알겠지만 괴물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대체 놈은 어떤 종류였던거지?
 팔이 두동강 나도 비명 한번으로 끝
 몸이 콘크리트 덩어리에 깔려도 일어나면 끝
 심지어 온몸에 서리가 낄 정도로 심한 추위와 동상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였다.
 "지겹도록 듣지 않았더냐, 그 놈의 정체."
 단지 괴물일 뿐이다. 라고 아주 가볍게 일단락 내버린다.
 '괴물'...
 "괴물은 괴물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종류가 뭐던지 괴물이라는건 변함 없다."
 단지 그 뿐이다.
 "...어렵네..."
 나도 모르게 피곤해져서 대충 누울수 있을 것 같은 바닥에 널브러져 버린다. 단순히 지친것 뿐이라며 타이르지만 꼭 지쳐서 이런 바닥에 누워있는게 아니라는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있다.
 "자고 싶다면 여기보다는 위층의 침실이 더 좋지 않느냐? 짐도 슬슬 졸리기 시작하니 짐은 먼저 가겠다."
 왠지 혼자있는게 싫고 나도 굉장히 졸리기 때문에 다시 일어서 침실로 간다.
 풀썩하고 쓰러져 버린다.
 '피곤해...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라 했지. 자고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지쳤지만 지치지 않은 눈꺼풀을 닫고 완전히 뻗어버린다.
 "내일 일은...내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깊게 잠들었다.
 
 "흐음~제법 괜찮은 곳에 숨었네? 의외라고 할지, 역시라고 할지."
 나도 이 폐허는 찾기 어려웠는데 말이야, 게다가 지리도 이 꼴이니,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이쪽' 지리가 더 강하긴 강하네.
 "의외로 진지하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네. 하긴, 전설이라는 칭호가 그냥 붙은건 절대 아닐테니까."
 물론 나 같은게 진지하게 한다고 해도 그 둘한테 이길지는 미지수인데다가, 절대 폭력행사를 하러온게 아니니까.
 "어머 벌써 이렇게 됬네? 이제 들어가도 되겠지. 둘 다 곯아 떨어졌을 테니까."
 기대되는걸? 서리의 음유시인과 그녀의 종복이라니,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하기도 힘드네~
 
 한참을 정신없이 자다가 문이 열리는(철문인데다가 상당히 시끄럽다.) 소리에 살짝 눈을 떴다.
 아직 비몽사몽인 머리로 무슨 일인지 생각하다가 판자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본다.
 '아직 대낮인데...? 이상하네, 지금 누가 들어올 사람도 없을텐데...'
 대낮에 이런 폐허에 찾아올 사람은 관리인이거나 그냥 놀러다니기 좋아하는 꼬마들 정도다.
 관리인이 있을것 같지는 않으니 이건 제외, 결론은 꼬마거나 그냥 일반인 정도다.
 하지만 발견 되면 귀찮으니 예방은 해두자.
 근처에 마구 어질러진 사무용 책상이나 의자 같은 걸로 문을 막는다.
 '좋아, 제대로 닫혔다. 이 정도면 포크레인이라도 써야겠지.'
 "상당히 괴짜네...이런 곳에 다 오고..."
 다시 침대에 누워선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퇴마사는...아니겠지.'
 왜인지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일이 없다는 말이 타이밍 좋게 생각났다.
 
 "제법 넓네? 대규모 공장이었 던가..."
 밖에서 볼때랑 다르게 제법 넓다. 그렇다고 못찾을건 없지만 귀찮은건 매한가지인데 말이지.
 '지리도 그렇고 건물도 그렇고...제법 머리써서 고른 모양이네'
 "하긴, 그 아이가 다른 아이처럼 바보 같을리는 만에 하나도 없겠지."
 살아온 세월이 있을 테니까.
 나 같은건 한입꼴이겠지. 그 정도 실력에 거드름이라도 피워줘야지 이쪽이 안심할수 있을것 같네, 거드름이라도 피우지 않으면 진심으로 할것 같아 무서워니까...
 "1층은 없고...그럼 2층이네"
 뭔가가 가장 짙게 베여나오는 곳이 2층이다.
 아마 2층에 많이 있었겠지.
 "역시...이쯤 되면 나도 긴장하게 되는걸?"
 
 또각 또각 또각
 일정한 스텝으로 경쾌한 발소리다.
 역시 누군가 온 모양인데...여자? 여자가 왜 온거지?
 또각
 구두 소리가 멈췄다.
 또각 또각
 두 발자국을 어딘가로 옮겼다.
 부스럭거리를 소리가...
 쾅! "뭐야?!"
 아직 대낮이여서 비몽사몽하면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하지만 그도 그럴듯이 치마가 굉장히 짧은(걷기만해도 속이 보일것 같다.) 하얀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비녀로 검은 머리를 올려 꿴 젊은 여자가 옆에 왠 희멀건 거구의 뭔가와 함께 나타나면 당연히 놀란다.
 "어머, 2층은 한번에 맞았네? 미안해라~자고있었구나?"
 누군가 같이 온건가 싶었지만 그냥 독백이었다는 것에 잠시 안심한다.
 독백을 한 여자는 내 쪽을 보더니 악의인지 적의인지 호의인지 모를 웃음을 지었다.
 슬슬 이쯤되면 나한테 웃는 사람 모두가 의심스러워 진다.
 "안심해, 잡으러 온게 아니니까. 만약 잡으러 왔다면 더 기교한 수를 썼겠지. 그리고 혼자 오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 여자의 묘한 웃음에 적의를 감출수가 없다.
 보통 여자는 웃는게 더 예쁘다고 하지만 이 여자는 웃는 것이 좀 묘한 기운을 뿜는다.
 "못믿는 눈치네? 이런이런, 등장이 너무 과격했나? 아, 그래. 이거 받아. 넌 옷이 없는 것 같아서 몇벌 사왔어."
 그렇게 말하며 하얀 쇼핑백을 가볍게 들어보인다.
 그리고 나에게 보여준 쇼핑백을 아까 그 희멀건 거구에게 넘겨주고 나에게 가져다 주라는 듯 손짓을 한다.
 아까는 몰랐는데 이제 꽤 세세한 형태도 생겼는데...이런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는데 마치 도깨비 같다.
 족히 3m는 되보이는 그 거구는 천장에 머리가 닿는듯 약간 고개를 숙이고 내게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옷 말고도 편지봉투가 하나 더 있었다.
 "읽어봐."
 아직도 그 묘한 웃음을 짓고있는 여자는 내게 읽는 것을 권했다.
 '중요한 내용인가?'
 조심스럽게 펼친 편지는 깔끔한 글씨체로(의외여서 약간 놀랐다.) 자신이 우리를 잡지 않을 이유라던가 근거 같은걸 풀어서 적은 말하자면 증명서 같은 거였다.
 다 읽고서 다시 고개를 드니 여자는 그제서야 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봤으니까 알겠지? 난 너희들을 죽이거나 잡아갈 힘은 없어. 단지 중국 어딘가의 점쟁이일 뿐이야. 쓸수있는 주술도 그렇게 댜단한것도 없어. 이런 도깨비를 불러내는 정도? 이젠 나를 좀 믿으려나?"
 "이름은 뭐죠?"
 "응?"
 뜬금 없지만 이름 만큼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린燐이야. '도깨비불 린'이지만 해석은 반딧불이라고 해줄래?"
 "그건 이름이 아닌것 같은데요?"
 "미안해, 하지만 여자의 사정은 알면 안되거든."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정말 더 깊게 알면 안될것 같았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태생은 한국이란다."
 검은 생머리를 비녀에 꽂은 고전적인 머리에 옆머리를 벼 모양으로 땋아 현대적인 느낌이 인상적이고 약간 회색빛이 감도는 갈색눈, 갸름한 얼굴형과 긴 다리와 어울리는 짧은 흰색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약간 이국적인 22살의 점쟁이 여자.
 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의뢰인'이었다.
 
 14
 "내가 의뢰하고 싶은건 간단해. '소문' 을 모아줘."
 그녀는 한손에 오래쓴듯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탄 노트를 팔락이며 말했다.
 "그럼 전 린씨가 원하는 대로 '소문'을 모아서 전달해주면 되는거죠?"
 "응, 맞아. 쉽지?"
 쉽기는 쉽다. 하지만 너무 쉬워서 문제다.
 겨우 소문 따위가 무슨 힘이 있다는 거지?
 "왜 하필 소문의 '수집'이죠?"
 "간단해, 내가 초짜라서 그래."
 ...지금 린씨가 너무 쉽게 자신을 '초짜'라고 했다.
 초짜가 아까 그 하얀 도깨비 같은걸 그냥 불러서 부릴수 있는건가?
 "너에게 소문이 필요한 이유라도 있는가? 짐은 그런 얘기는 모르는데 말이지. 한동안 조용해서인가? 모르는새에 새로 생긴 관습인가?"
 한동안 잠잠히 듣고만있던 라헬이 묻고싶던 참에 물어 주었다.
 나이스 태클
 "말하자면 샘플 채취야. 특지 지금은 네가 있어서 더 굉장한 아이들이 모여들어서 말이야. 한마디로 황금기지~"
 다시 웃음 같아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린씨는 라헬을 가르켰다.
 "마음에 안드는군."
 라헬은 정말로 불쾌한듯 매끈하던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어머, 미움을 사버린건가? 미안해, 하지만 같은 여자잖아? 잘지내보자고~"
 호호호 떠드는 가벼운 말투에 라헬은 진저리가 난듯 다시 침대 위로 가버리고는 누워버렸다.
 어쩔수 없다는듯 어깨를 으쓱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제스쳐가 없다.
 그럼 슬슬 이쪽도 본제를 꺼내자.
 "린씨,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 말이죠."
 "뭔데? 내가 대답할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말해줄게."
 싱긋 웃는 린씨의 얼굴이 이제서야 좀 편해보인다.
 라헬을 대하는 것이 약간 힘들었나보다.
 "중요한 얘기인데, 절 어떻게 사람으로 돌려줄거죠?"
 린씨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보다 이 사람, 웃음을 지우니 인상이 제법 묘하다.
 '가면을 벗은 느낌이네, 하긴. 웃는게 조금 이상하긴 했어.'
 조건 반사적으로 지은 웃음 같았다. 당연히 웃음 같지가 않다.
 "후우, 아직 이름을 안물어 봤네? 염치 없지만 물어봐도 될까?"
 "뫼향, '산'이라는 뜻의 '뫼' 입니다."
 "그래, 뫼군. 난 널 인간으로 돌려줄수 없어."
 ...?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건가?
 린씨는 다시 한번 더 곱씹어주듯 말했다.
 "너희들의 사정을 알겠지만 난 의뢰인이고 내가 너희에게 해줄수 있는건 너희에게 부탁한 만큼의 보수 뿐이야. 아무리 너희가 딱하다고 해도 그건 수지도 맞지 않고 이미 내 능력 밖이기도 해. 그리고 흡혈귀를 인간으로 되돌려주는 방법은 난 아직 들어보지도 못했고 안다고해도 나 같은 초보자가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러니 사과할게, 미안해. 난 너를 인간으로 돌려줄수 없어."
 아니야.
 "미안해, 뫼군. 실망시켜서."
 사과하지마...
 그렇게 허리를 깊숙히 숙여...사과하지마...
 오히려 사과해야할건 내가 할 일이다. 무리한 부탁을 하고 받을수 없는 사과까지 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라헬을 믿었으면 할 얘기도 아니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린씨가 사과할 일은..."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라면 보일게."
 린씨는 접었던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난 너희 같은 새드스토리를 그냥 지나칠만큼 매섭지 못해서 말이야."
 린씨는 다시 한번 기분좋게 웃었다.
 "'인간'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겟지만 '강도'는 어떻게든 할 수 있을거야. 물론 지금 내 실력하고 저 베르길리우스의 실력차가 너무 커서 봉인까지는 무리지. 하지만 억제 정도는 턱걸이로 가능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무엇보다 '인간'에 가까워 진다.
 "감사합니다."
 이 후로 목이 매여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지 감사한 마을을 전하지?
 모르겠다, 단지 그냥 감사하다.
 '구원 받았다.' 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최소한 괴물의 강도는 낮아질수 있다.
 그만큼...평범해 질수 있다.
 평범, 평범이다. 튀는것도 없고 딱히 안튀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바라던 것이고 누려왔던 것이다.
 어쨌든 그 후에 말도 못하고 애꿏은 린씨만 곤란하게 만드는 꼴이 됬지만 차마 다시 고개를 들수가 없다.
 "저기...이제 인사는 그만해도 돼, 허리 아프잖아? 일어나도 돼, 응?"
 상냥하다. 흡혈귀 같은게 되버렸는데도 전혀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보다 더 친절히 대해준다.
 결국 참으려던 눈물이 한방울 주르륵 흐른다.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고 봇물 터진듯 계속 흐르고 결국 린씨의 폼에 묻혀 위로까지 받았다.
 "괜찮아...넌 괴물이 아니야."
 이 한마디가 그렇게 따듯할줄 몰랐다.
 
15
 린씨는 내일 와주신다.
 역시 자신에게 '초보자'라는 말을 붙여서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며 인사하고는 돌아갔다.
 "씁쓸하구나."
 "안자고 있었어?"
 "짐의 종복이 알지도 못하는 인간하고 대화하는데 잠이 오겠느냐, 그 여자도 범상치 않던데 말이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살짝 감동 받을것 같다.
 "...왜 믿지 못했느냐?"
 "글쎄, 그냥 인간으로써의 의심이야. 나한테 잃을 건 없지만..."
 잃을 건 없다.
 ...다만 잃어버리지 말아야할걸 잃어 버렸다. 그걸 다시 찾아준다는 사람이 둘.
 한 사람은 자신만 믿으라며 막무가내로 질질 끌고 다니고
 한 사람은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일러 줬다.
 당연히 후자를 믿을 수 밖에는 없다.
 "믿어주거라, 앞으로는 짐이 뭐라고 하건 믿어라."
 "미안해, 의심이 많은 겁쟁이라서..."
 "..."
 라헬은 침묵으로 답했다.
 아직 밖을 밝다. 다시금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 끔찍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는다.
 
 린씨는 약속대로 오늘 와주었다.
 배려를 해준건지 아니면 단지 시간상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내가 슬슬 일어나기 시작한 저녁에 도착했다. 라헬은 아직 세상 모르고 자고있어서 자리를 바꿔서 다른 방으로 옮겼다.
 사무실 같은 이 방에는 제법 큰 탁자와 의자가 있어서 마주보고 대화하기는 편했다.
 "이게 네가 가지고 있어야할 물건이야"
 린씨는 품에서 왠 종잇조각을 꺼내며 말했다. 자세히보니 노란 종이에 붉은 색으로 야릇한 글씨를 쓴 전형적인 부적이었다.
 "동양의 부적이 서양의 요괴한테 효과가 있나요?"
 동서양의 풍습이 달라서 효력이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린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복잡한 주술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기초적인 주술은 동서양 둘다 비슷해서 괜찮아. 간단히 말하자면 중국에서 만든 청소기냐 미국에서 만든 청소기냐 인거지. 게다가 혹시 몰라서 내 피까지 섞었으니까 효과는 보증할게."
 게다가 흡혈귀는 피에 관련된 요괴라서 피가 섞인 물건에 잘맞다며 쐐기를 박았다.
 탁자 위에 올려진 부적을 만지려고 손을 뻗자 린씨가 재빨리 빼갔다.
 "응? 이걸 저한테 줘야지 우선 뭐가 되는것 아닌가요?"
 "어머. 미안, 성급했네. 이 부적을 만지면 바로 발동할테니까 일단 뫼군이 눕기 편한곳에 갈까? 아마 일주일 정도는 무슨 짓을해도 일어나지 못할 테니까."
 "아...네."
 '초보자가 만든 부적이 그렇게까지 효과가 좋은가?'
 이쪽에 관해서는 아는게 별로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말하자면 말도 모르는 외국에 혼자 떨어진 느낌.
 일단 눕기 좋게 침실로 돌아왔는데 라헬이 언제 일어났는데 약간 잠이덜깬 얼굴로 기지개를 펴고있었다.
 "음? 뭐냐, 볼일은 끝난겐가? 잘됐구나, 이제 다시는 짐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마라."
 "어머~부끄럼 타기는,  베르길리우스, 너 혹시 츤데레 아니니?"
 린씨가 말한 대사중 '부끄럼'부터 라헬은 이미 질린듯한 얼굴을 하고 방을 나와버렸다. 그보다 린씨, '츤데레'도 아셨구나...의외다 많이 의외다.
 "음, 역시 제대로 미움을 받은것 같네, 아쉽네~?"
 아마 옷차림도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어제와 같은 차이나 드레스지만 색만 벽자색으로 바꾼 옷이다.
 그런데 분명히 아쉽다고 말했는데 얼굴은 아쉬울것 없다는 듯이 상쾌한 미소를 띄웠다. 언행불일치가 이렇게 잘어울리는 사람이 여기있다.
 린씨와 라헬의 보이지 않는 벽에 지쳐버려서 린시가 뭐라고하기전에 알아서 침대에 눕는다.
 내가 눕자마자 린씨는 근처에 의자를 끌고와서는 간병온 사람처럼 침대 옆에 앉았다.
 "이제 슬슬 잘래?"
 '잘래?'라는 말은 아마 부적을 쥐어주려고 물어보는 거겠지.
 "네, 이젠 슬슬 꿈 좀 깨고 싶네요."
 진심으로 깨고 싶다.
 진심으로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
 진심으로 평범해지고 싶다...
 "잘자, 뫼군."
 "감사합니다, 린씨."
 "누나라고 부르렴, 3살 차이잖아?"
 상냥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머리가 멍해지고 눈꺼풀이 저절로 감긴다.
 몸에 힘이 한곳으로 쭉빠진다.
 입 속에서는 내뱉지 못한 말이 맴돌다가 이내 곳 기억이 끊긴다.
 
 "...베르길리우스? 아직 있지?"
 뫼군은 부적 때문에 일주일 후에나 깨어날거고, 그 후에는 그나마 평범하게 살아갈수 있어. 하지만...신경쓰이는 건 하나가 더 있다.
 "얄팍한 꼼수군, 저 바보가 진짜로 네 힘으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텍도 없는 일을 하는 군."
 "최소한 인간 답게는 살게 해줄수 있어. 일단은 내 '고용인'이니까 그에 맞는 보답은 해줘야지."
 왜 말하지 않았을까? ...대답은 뻔하겠지.
 말하면 뫼군 성격에 다른 방법 없냐고 묻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절망해선 자살해버리고 말았을테니까.
 "왜 말하지 않았어? 아무리 귀여운 종복이었다고 해도 어차피 인간이었잖아? 피포식자와 포식자의 관계였을 뿐인데 말이야."
 "...너는 혼자서 두는 체스가 얼마나 지루한지 아느냐?"
 "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 좀 더 매몰차고 화내면서 말할줄 알았는데...
 "조금은 데리고 있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지난 몇백년 동안 혼자있었으니...몇년 정도는...아니, 몇개월 정도는 괜찮지 싶었다. 하지만 애석게도 그건 허락되지 못한 모양이야, 그래서 죽으려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구나..."
 "짐이 종복에게 먹히면 주종관계는 끝나고 종복은 인간이 되지, 그리고..."
 "죽어버리지. 에컨데 그건 동반자살이야."
 "..."
 "외로움에 미쳐버릴 정도였어?"
 "..."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종복이랑 같이 죽을 정도로?"
 "...네 년은, 짐의 심정을 이해못한다."
 알게뭐야.
 "몇백년 동안 수다한번 제대로 나누기도 힘들었다. 그 망할 사냥꾼과 제약 때문에...!"
 알게뭐야...
 "사람을 먹고 몇일 밤을 새며 울었을 때!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고 아무도 없는 그 심정을! 네가 아느냐고!"
 "알게뭐야!"
 몰라! 몰라!
 모르는게 당연하잖아! "넌 500몇년을 살았고 난 겨우 22년이야! 근데...!"
 "...9개의 꼬리...그랬나...? 그래서 였나...?"
 "...하하...하하하...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어떻게 이런 일 밖에 생기질 않을까...?"
 22살인데...어째서 일까...어째서...
 "13살 생일 때 처음으로 첫번째 꼬리가 났어. 그 후로 매년 생일 때 마다 꼬리가 자랐어. 그리고 한달 전, 9번째가 나버렸지 뭐야...?"
 꼬리는 내 마음대로 감추거나 숨길 수 있었어...하지만 가장 싫었던건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귀신이 보이고, 자꾸만 기분나쁜 소리가 들렸어. 그게 제일 소름끼치고 싫었어...언제부터인지 귀도 뾰쪽해지고 밤에 잘때마다 귀신들이 장난을 치고 눈앞을 이리저리 돌아다녀...무서워서 비명을 지르면서 엄마한테 달려가도 엄마까지 놀래켜버려...싫어...난 분명 인간의 아이인데..."
 오히려 과일이나 채소를 좋아했고 어려서부터 심약해서 보약을 달여먹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고 간 같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건 진저리가 나도 입맛이 뚝 떨어지는데도...
 "난 확실히 넌 이해못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뫼군이라면 이해해. 그 애가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 평범해지고 싶어하는 것도 말이야. 그리고 이 아이는 잘못이 없어. 먼저 건드린건 그 검은 뱀이지."
 난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뫼군이라면 아직 구할 수 있다.
 구하고 싶다. 뫼군은, 뫼군 만큼은...
 "돌려주고 싶어, 초면이지만...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나랑 너무 닮았으니까."
 너무 닮았다. 저 아이의 처지가, 그 때 내 처지랑. 그리고 지금의 내 처지랑...
 "구해줄수 있어. 폼이나 잡으려고 9년 동안이나 점쟁이 집 구석에 앉아있던게 아니야."
 "...한가지 부탁해도 되겠나? 아니, 의뢰다."
 "들어보고."
 "같이 있게 해줄수있나? 몇년 만이라도...부탁한다, 더 이상은...더 이상은 혼자가...혼자가..."
 "싫지? ...그건...이해할수 있어..."
 "...흐윽...흐으...싫...어...!"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앙!
 '똑같구나...우리들은...'
 똑같다. 나나, 뫼군이나, 저 금발 아이도...나이는 500살이나 먹었으면서 아직도 내 또래랑 비슷한 울음이다.
 나이는 먹었지만...아직 처녀구나...
 구해주자, 외로움에서...
 나의 유일한 또래의 친구로써.
 
 의외로 일주일은 길었다.
 하지만, 그 둘에겐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16
 왠지 개운하다.
 온 몸을 누르던 것이 통째로 떨어진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잠길때만해도 천근만근이던 눈꺼풀이 가볍게 열린다.
 "잘잤니?"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상냥한 미성美聲의 목소리가 들린다.
 "린...누나..."
 그래도 목은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반쯤 잠긴 목소리가 나온다.
 스윽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린 누나는 깔끔하게 깎은 사과를 담은 접시를 내준다.
 어리둥절하게 사과 하나를 집어먹고 나서야 뒤늦게 머리가 돌아간다.
 "아, 부적."
 아직도 오른손에 쥐고있는 종잇조각을 들여다본다.
 잠들기 전이랑 변함 없는것 같지만 붉으스름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게 확실히 느껴진다.
 "원래 두번째 아이템도 쓰려고했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 그럴 필요는 없을것 같아~"
 라고하면서 왠지 음흉한 곁눈질로 가르키는 곳에 따라가보니 10후반에 내 또래로 보이는 금발의 여자애가...
 어?
 "어어어어어어어어어?!"
 저 금발이랑 피부는 라헬을 그야말로 쏙빼다가 박았다. 게다가 얼굴의 느낌이 라헬이랑 아주아주 닮은 것이 '동생인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흡혈귀한테 형제가 있을 수 있는건가?
 ??????????????????????
 물음표를 몇개나 띄워야지 내 당황이 표현되는 거지?
 "저, 저, 저 리, 린누나. 이 애는..."
 "베르길리우스 본인이 맞아. 이 아이가 나한테 부탁해서 너랑 똑같은 방법을 썼어. 너보다 약간 더 강한 부적을 서서 한 삼일 정도 후에 일어날거야. 그보다 이 아이도 참 훌룡한 츤데레라니까?  후후, 그보다 참 부러워~500살이나 먹었는데도 나랑 비슷한 또래의 모습이었는데 이젠 나보다 어린 모습이라니, 나같은 인간에게는 참 부럽단 말이야?"
 "츤데레라...영문은 모르겠지만 괜스리 기쁘네, 그나저나 진짜 신기하긴하다...그 여왕 같던 여자가 지금은 이런 모습으로 자고있다니..."
 한마디로 상당히 유니크한 모습이다. 핸드폰만 켜진다면 잔뜩 찍어두고 싶은 모습인걸?
 "참, 혹시 몸에 이상이 있거나 햇볕아래에서 비정상적으로 따가우면 이쪽으로 전화해."
 린 누나가 건넨 쪽지에는 11자로 된 숫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핸드폰 번호야, 핸드폰은 있지?"
 "네, 스마트폰은 아니지만..."
 통화는 뻥뻥 터진다.
 "참고로 한마디 더 하자면 분명히 강도는 낮췄지만 수명은 나도 몰라. 아, 그리고 설마겠지만 흡혈귀로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주의해. 왜냐하면 그 부적은 요기를 빼내기는 하지만 외부적인 요인으로 다시 돌아갈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햇볕도, 은도, 마늘도 O.K야!"
 '자, 그럼 난 이 아이를 돌봐줘야 할 것 같으니까 먼저 가봐~' 하면서 등 떠밀려 나와버렸다.
 오랜만에 햇살 아래에 나가는 거라 바보같이 긴장했지만...
 그 날 본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파랗고 넓었다.
 
 17
 거이 일주일, 체감상으로는 한달만에 들어간 기분으로 문을 연 순간 반겨주는 것은 다름 아닌 여동생의 발이었다.
 "야야! 위험하잖아! 주먹도 아니고 발이라고 발!"
 "일주일 만에 들어와서는! 그 동안 뭐했어?!"
 "하, 합숙! 교회에서 MT가 있었어!"
 "그걸 왜 밤에가?! 그보다 오빤 교회도 잘 안나가잖아?!"
 "...어...이런, 난 방에 간다!"
 도주다.
 잡히면 죽음 내지 기절이겠지
 지금은 아무리 맞아도 죽지는 않겠지만.
 문고리까지 확실하게 잠근 다음 오랜만에 침대다운 침대에 눕는다.
 멍하니 하얀색 천장을 바라본다.
 "일상...맞으려나, 진짜 일상으로 돌아온거..."
 라헬은 아직 이 마을 안에 있다.
 게다가 린 누나의 의뢰도 남아있다.
 "...남은게 많네..."
 눈을 감으려다가 주머니에 부스럭거리는 것이 있어서 일어나 펴본다.
 "아..."
 배터리가 다 한 핸드폰을 꺼내 갈아 끼우고 통화 버튼으로 전원을 킨다.
 ...저장완료.
 "...종이도 가지고 있자."
 린 누나가 친필로 써준 번호다. 의외로 레어 아이템.
 그리고 삼일 후에 라헬이 깨어나서야 알게된 사실인데, 라헬이 있는 곳에서는 그 검은 남자 같은 것이 늘 따라다닌다고 한다.
 말하자면 꿀에 유혹당해 끌려오는 벌이라고 해야하나?
 물론 라헬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런 것들'은 꿀이든 벌이든 다 먹어버리지만. 지금이야 린 누나가 만들어준 목걸이 같은 것 덕분에 라헬의 그런 능력이 많이 억제되고 있지만 그것도 몸에서 많이 떨어지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한다.
 어쨌든 한동안은 '금발의 미인과 흑발의 귀신'에 대한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어떻게보면 당연하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괴물이 나타나서는 사람들한테 욕이나 하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당분간은 귀신이나 요괴 같이 잡스러운게 마을에 꼬인다고 하니 그것에 대한 소문을 린 누나에게 전달하고 가끔 라헬이 산책하는걸 구경하는 정도로 일과가 짜일것 같다.
 "일상이기는 해도...평화롭지는 않겠네..."
 "뭐하는게냐, 그렇게 나자빠져서."
 "어? 라헬? 네가 어떻게 우리집에 온거야?"
 그보다 분명히 여긴 2층집이고 내 방은 2층이다.
 설마 뛰어서 온건가?
 "너프 되기는 했어도 아직은 A+ 랭크다. 이런 꼴이 되기는 했어도 나름 이름 좀 날린다는 흡혈귀 같은건 한입 꼴이란 말이다."
 예컨데 오버 밸런스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버 밸런스다.
 하기사 전에서 시내의 고층건물 사이사이를 날듯이 뛰었던 여자다. 새삼 놀랄것도 없다.
 "당분간은 짐이 그대를 돌보며 이상이 없는지 살펴야한다더군...여우 같은 여자야...후, 하지만 그대는 짐의 종복이고 그 여자에게는 빚을 진게 있으니 어쩔수 없군. 이 짐에게 빚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굴욕적인데 일까지 시키다니...빨리 값아서 그 년의 요망한 성격을 뜯어고쳐야겠군..."
 "...개인적으로 말이지, '돌본다'라는 말이 상처야, 회복불능이라고..."
 완전히 애취급이다. 물론 라헬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난 아직도 4살짜리 꼬마일지는 모르겠지만...그래도 나름 고3이다. 19살인데도 애 취급이라, 기분이 묘하네.
 "뭐, 그리됬으니 잘부탁한다. '종복'."
 "하하...그래, 잘부탁해, '주인'."
 일상 아닌 일상으로 돌아와서 은인의 의뢰를 하는 걸로, 이 애매하고 묘한 이야기는 찝찝한 엔딩으로 끝난다.
 훗날 그녀들의 비밀을 듣고 다시 떠오른 이 쓰라린 추억은 상처아닌 상처로 남았다.
 
 '해프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