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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이 피면 바다에 같이 가요

  • 작성일 2023-03-01
  • 조회수 1,206

수국이 피면 바다에 같이 가요

김안녕

겨울에 했으면 하는 일,

겨울 길은 살살 걷기

연한 빛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기

흩어진 털실을 모아 두기

흩어진 빛을 찾아 뜨개질하기

노랑 귤을 소쿠리째 사서 겨우내 입안에서 시큼하게 굴려 보기

일호선을 타고 가다 문득 내려 망월사에 드는 것 기별 없이 마음을 주는 것

가서

아득한 풍경소리만 듣다 오는 것

들어도 듣지 않는 것처럼 그저 있는 것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고

한번은, 잡아 보기도 하는 것

고기를 줄이고 말을 줄이고

휘파람과 풀때기 눈물은

늘리기

세상에 없는 노래를 지어 부르다

낮술에 취하기 몽롱한 목소리로 돌멩이에게

전화하기

수국이 피면 바다에 같이 가자 말한 사람을

유월이면 수미감자 한 상자씩 보내는 사람을

구순 노모의 휠체어를 종일 밀며 가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그리워하지 않는 일

종내 내가 그리움이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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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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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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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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