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커피의 맛

  • 작성일 2012-09-22
  • 조회수 1,364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_제3회

 

 

커피의 맛

 

표명희

 

 

 

 

   버스가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섰다. 웅은 백팩을 열고 모자를 꺼냈다. 책과 잡동사니에 짓눌려 모자는 쭈글쭈글했다. 비틀어진 챙을 바로잡고 주름을 폈다. 그걸 쓰려다 웅은 멈칫 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웅은 모자를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쿨하게 마무리하는 거다. 마침 자연스럽게 ‘컴백 홈’할 수 있는 핑곗거리도 생겼다. SAT 학원이 다음 달 이전을 하게 된 것이다. 학생에게 입시 관련 일만 한 무기가 어디 있나.

   ‘학원 끝나고 이따 새로 생긴 커피 전문점으로 와. 모처럼 얼굴 맞대고 대화 좀 하자.’ 때마침 이모가 멍석까지 깔아 놓았다. 절호의 기회다. 그렇다고 웅의 마음이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는 데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생활을 접어야 하는 데 대한 아쉬움, 아니 열패감이 없지도 않았다. 새로운 시도가 결국 반년 남짓에 ‘쫑’ 내게 됐으니 보기에 따라서는 해프닝, 또는 ‘작은 반란’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시작도 만만치 않았건만…….


   “우리집 ‘19금’이야. 미성년자는 안 돼.”

   처음, 이모는 깐깐한 사감선생처럼 굴었다. ‘금남禁男’을 걱정했지 ‘19금’은 예상 밖이었다. 스무 살에 독립해 줄곧 혼자 살아왔던 노처녀 이모는 몇 년 전부터 하우스메이트와 공동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웅은 전학 온 학생처럼 그 속에 슬쩍 끼어들 생각이었다.

   ‘고시원이나 오피스텔은 말도 안 되고, 외할머니 댁이나 이모 집, 둘 중 하나면 생각 좀 해볼게.’

   오랜 신경전 끝에 간신히 얻어낸 엄마의 양보였다.

   완전 독립은 불가였다. 꿩 대신 닭이라며 웅은 이모를 택했다. 하지만 닭은 벼슬과 꽁지를 빳빳이 세우고 꿩 행세였다. 웅은 끈질긴 부탁과 설득 끝에 이모로부터 ‘19금 해제’를 간신히 얻어냈다. 대신 이모는 다른 조건을 내세웠다.

   “뭐, 리포트? 그것도 A4용지 다섯 장이나?”

   웅의 반문에 이모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웅이 집을 나와 이모와 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와 각오를 담은 장문의 글을 써내라는 것이었다.

   “대입 논술도 아니고 입사 시험도 아니고, 아니 그보다 더 어렵잖아.”

   “당연히 그런 것보다 어렵지. 남과의 한집살이란…….”

   이모는 ‘남’이라며 또렷이 선까지 그었다. 웅도 이모한테 기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같이 살더라도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살 생각이었다.

   “알았어.”

   웅은 난생 처음 써보는 성격의 글을, 그것도 A4용지 다섯 장 분량을 메우느라 기말고사 시험 기간보다 괴로운 날을 보내야 했다.


   “~#$^%@*#@&%^%@#!^@@^&&^*@#$%$#~!@##~!”

   유창한 영어가 버스의 고요를 흩뜨려 놓았다. 외국인 여자와 한국 남자 커플이 차에 오르면서다. 띄엄띄엄 앉아 있는 네댓 명의 승객들이 한 번씩 그들을 흘끔거린다. 여자는 금발의 곱슬머리가 사자 갈기처럼 부풀어 있고 남자는 중처럼 반들거리는 스킨헤드다. 컬트영화 속 등장인물 같다. 둘이 늘어놓는 영어가 그걸 더 실감나게 한다. 둘의 수다는 각자 휴대폰에 빠져들면서 잠잠해진다. 웅의 눈에 그들이 보고 있는 스마트폰 액정화면이 또렷이 잡힌다. 백인 여자는 개그 프로를, 남자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 외국 여자가 경상도 사투리로 늘어놓는 개그를 보며 깔깔대는 모습이 남자가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릭도 그랬다. 가장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로 ‘개콘’을 꼽았다.

   “웅아, 인사해. 이 친구는 릭.”

   맨 처음 그를 봤을 때 웅은 ‘혹시 이모가 연하남과 동거라도?’ 하는 생각에 잠시 당황했다. 지금껏 이모의 하우스메이트는 대학생 아니면 직장인으로, 직업도 각양각색이었지만 공통점은 언제나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강의 나가는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친구야.”

   이모는,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자살률 제일 높은 비정규직’인 대학 시간 강사였다. 릭이 캐나다 교포 대학생이라는 것, 마침 빈 방이 하나 있어 이모가 임시 숙소로 제공했고, 며칠 지내 본 릭은 임시 숙소가 집처럼 편하다며 이모의 하우스메이트를 청해 왔다는 얘기가 뒤따랐다.

   “필기 통과했으니 이제 실기다.”

   릭과 인사가 끝나자 이모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니, 뭐가 또 남았단 말야?”

   웅이 놀라며 되물었다. 작문 과제를 해서 보낸 지 열흘 만에 이모의 연락을 받은 웅은 합격 통보인 줄 알고 한달음에 쫓아왔던 것이다.

   “일요일 식사를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맡길 만한지 확인해 봐야지.”

   웅은 리포트 마지막 장에 선심성 생활 수칙까지 써넣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심사는 릭이 할 거야. 이 친구,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수준급 요리사거든.”

   이모가 옆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는 릭을 가리켰다.

   릭은 이모의 말이 과분하다는 듯 손사래 쳤다. 선이 고운 얼굴에 낮고 차분한 목소리의 꽃미남이었다. 그는 우리말은 물론,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교포 대학생이었다. 이모 집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건만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았다. 십년 넘게 펜대 굴려왔어도 작문 하나 완성하는 데 일주일 걸렸건만, 라면 끓여 본 경험이 고작인 자신에게 요리 실력 테스트라니. 그것도 국제적 입맛을 가진 사람의 미각을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의…….

   “어떤 요리?”

   웅이 긴장하며 이모에게 물었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아무거나 만들어봐.”

   “엄마가 ‘아무거나’라는 메뉴만큼 어려운 요리는 없다더라고.”

   불평하듯 되쏘며 웅은 주방으로 향했다. 이왕 빼든 칼 그냥 접을 수는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모르는 문제투성이 시험지 들여다보듯 냉장고 속이 동굴 같았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니 야채 칸과 문 쪽의 조미료와 소스 류가 차츰 눈에 잡혔다. 그것들이 슬슬 웅의 승부욕을 부추겼다.

   “더 필요한 거 있어?”

   이모가 냉장고로 다가서며 물었다.

   “응.”

   “뭔데?”

   “노트북.”


   영어가 다시 버스 안을 굴러다닌다.

   “~-#$%@*#~@&%~!@~!”

   사자머리와 스킨헤드 커플이 내릴 준비를 하면서다. 빠르고 수다스런 영어인데도 웅은 절반 이상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신기했다. 그동안 릭과 가까이 지낸 덕 같았다. 차에서 내린 커플이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모습이 차창으로 보인다. 표정이나 몸짓이 크고 활기에 넘친다. 릭과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때도 그랬다. 제스처나 얼굴 표정이 훨씬 잘 살아났다.

   “그 친구 이름이 왜 릭인 줄 알아?”

   이모의 말에 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영우’라는 본명으로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알코올릭, 워크홀릭, 러브홀릭에서 딴 이름이래. 풀 네임은 탐 릭, 우리말 ‘탐닉’에서 힌트를 얻었대나…….”

   “요즘 하는 밤 산책도 ‘워크홀릭’에 해당하는 거네.”

   웅이 말장난하듯 대꾸했다.

   릭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밤 10시면 산책에 나섰다. 집과 정류장 사이에 있는 5~6백 미터의 길이 산책 코스였다. 주변에 조깅 코스도 있고 공원도 있지만 그는 굳이 그 길을 택했다. 이모와 웅을 위한 배려 같기도 했다. 어떤 때는 셋이 길에서 만나 나란히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웅은 삼남매의 막내가 된 기분이었다. 이모와 릭은 취향도 비슷했다. 먹물형답게 둘이 어떤 화제를 떠올리면 이야기가 낚싯줄처럼 끝도 없이 풀려나왔다. 엄마 아빠 간에 최소한의 대화마저 사라져 버린 냉랭하고 위태로운 웅의 집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각기 성(姓)이 다른 사람끼리였어도 관계에 대한 믿음과 온기가 깔려 있었다. 이들이라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뜻밖의 문제와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릭은 오늘도 산책에 나섰을까. 지난주부터 웅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했더니 이번 주에는 문자메시지 한번 없었다. 지난 열흘간, 웅은 귀갓길에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다. 버스에 탄 모습을 감추려 모자까지 눌러썼다. 예민한 릭이 눈치채지 않았을까. 사실 웅이 속내를 터놓는다면 릭의 성격상, 웅을 불편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내세웠던 공동생활 수칙 1번, 그걸 저버리는 걸로 비칠 순 없었다. 짙은 고딕 글씨로 씌어진 그것은 웅의 책상 바로 앞에 감시관처럼 붙어 있었다.

   ‘각자의 취향을 존중한다.

   이모에 따르면 그건 ‘취향’에 속하는 문제였다

   “왜 처음부터 나한테 얘기 안 해 줬어?”

   웅이 맨 처음 그 문제를 꺼냈을 때였다.

   “릭 문제?”

   이모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거봐, 이몬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게 무슨 문제가 돼? 릭이 너한테 뭘 어떻게 했는데?”

   릭과의 일들이 터치 폰 화면처럼 스쳤다. 늦은 밤 산책 겸 웅을 마중 나와 준 것, 웅의 부탁에 따라 영어로 대화해준 것, 볼만한 책 추천해준 것, 공휴일에 가끔 영화 보여 주고 피자 사 준 것 등등 베풀어 준 친절이 다였다. 이모의 미션을 해내야 했던 날, 릭은 첫인상부터 웅의 가슴에 잊지 못할 은인으로 남았다.

   “아니, 릭이 이 매운 걸 어떻게 먹으라고.”

   이모는 웅이 만들어 내놓은 요리를 보며 놀라워했다. 라면 다음으로 웅이 자신 있게 만들 수 있었던 요리, 라볶이였다.

   “괜찮아요.”

   릭은 이모의 우려를 가볍게 날리며 식탁에 앉았다. 기대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그는 포크 대신 젓가락을 택하더니 서툰 젓가락질로 고추장 범벅의 라볶이를 집어 올렸다. 꼬불꼬불 시뻘건 라볶이 면이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내 기침과 함께 입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이모는 재빨리 테이블 위의 물컵을 릭에게 내밀었다. 릭은 물부터 들이켰다. 당황하긴 웅도 마찬가지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테스트에 응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관문을 통과해 이모 집으로 옮겨와 살고 싶었다.

   릭은 입을 호호거리며 손으로 부채질까지 했다. 놀란 혀를 가라앉힌 그는 다시 시식에 들어갔다. 라볶이를 먹는 내내 같은 동작이 되풀이되었다. 라볶이 한 젓가락 물 한 모금, 또 한 젓가락 물 한 모금……. 릭의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맺히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와중에도 릭은 웅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잊지 않았다. 땀과 눈물, 콧물까지 훌쩍이며 그는 웅의 요리를 끝까지 먹었다.

  “판타스틱!”

   말끔히 비운 쟁반을 들어 올리며 릭은 웃었다. 환한 그의 표정이 합격 통보 도장처럼 웅의 가슴에 선명하게 찍혔다. 감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릭은 조목조목 짚어 가며 웅의 요리 실력을 평가했다. 면 요리는 무엇보다 면발의 쫄깃한 식감이 중요하다는 것, 매운 음식은 매운 맛의 깊이가 핵심인데 웅의 라볶이는 자신이 먹어 본 몇 안 되는 매운 요리 중 최고였다는 것 등이었다. 웅이 유명 요리 사이트 레시피를 꼼꼼히 참조하고 학교 앞 단골 분식집에서 먹었던 맛을 떠올려 가며 성의껏 만들었던 음식을 릭은 맛으로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처럼 릭은 세심하고 배려가 남달랐다.

   “보통 남자 같았으면 내가 집에 들였겠니.”

   이모의 말에 포함된 건 릭의 됨됨이와 자질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지만 남들과는 다른, 그의 타고난 성향을 지적한 말에 더 가까웠다.

   “이번 주 일요일 영화 보러 갈래?”

   릭의 제안에 웅은 선뜻 응했다. 그와의 외출은 신나고 유익했다. 눈과 귀가 즐거운 건 물론 혀까지 만족해하는 나들이였다.

   “이런 영화도 생각보다 재미있네.”

   웅이 영화관을 나오며 말했다.

   “다행이다. 난 기대가 커서였는지 사실 별로였는데.”

   릭은 평소와는 달리 냉소적이었다. 동성애자 감독이 만든 동성애 영화였다. 여자 동성애자와 남자 동성애자가 위장 결혼을 하면서 겪는 우여곡절, 그러다 결국 각자 좋아하는 동성 애인끼리 다시 결혼하게 되는 슬프고도 유쾌한 해피엔딩 영화였다.

   “실은, 이것 얻으려고 했던 질문이었어.”

   릭이 뮤지컬 초대권을 꺼내 보이며 흐뭇해했다. 영화 끝나고 특별 이벤트로 감독과의 대화가 마련돼 있었다. 릭은 영화에서 다룬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온 사람처럼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둘 사이에 꽤나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가 싶더니, 마침내 여러 질문자 중에서 릭이 뮤지컬 초대권의 수혜자가 되었다.

   “다음에 이거 같이 보러 가자.”

   릭은 봉투에서 꺼낸 티켓을 지갑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였다. 웅이 친구 생일 파티로 늦게까지 놀다 집에 온 날이었다. 막차인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어두운 골목길 모퉁이를 접어들 때, 불쑥 뒤에서 누가 다가섰다. 놀라 돌아봤더니 릭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대뜸 날아든 큰소리에 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래방에서 마신 맥주로 알딸딸한 상태였던 것이다.

   “전화는 또 왜 안 받아?”

   릭의 화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웅은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배터리가 나간 상태였다.

   “걱정했잖아.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흥분이 가라앉자 릭은 안도하며 웅을 껴안았다. 얼떨결에 웅은 그의 품에 안겼다. 초등학교 1학년 야외 학습 때 숲에서 길을 잃어 반나절 만에 자신을 발견한 담임선생 품에 안겼던 후로 남자한테 안긴 건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휴대폰 배터리를 갈아 끼우면서 웅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1시부터 1시간 남짓 동안 릭에게서 걸려온 전화 기록이었다. 부재중 전화 37통. 그걸 보는 순간 웅은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이모는 이미 알고 있었단 얘기잖아. 릭에 관해.”

   웅이 따지고 들었을 때, 이모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태도였다. 이모한테는 릭이 최고의 하우스메이트였다. 평소 이모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해 왔던 모델인 게이, 즉 남자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감독님은 이성애자를 좋아해 본 적 있으신가요?”

   그날, 영화를 보고 난 뒤 릭이 감독에게 던진 질문 중 하나였다.

   되짚어 볼수록 그건 웅 자신을 염두에 둔 질문 같았다. 릭이 굳이 그런 소재의 영화를 보자고 한 의도도…….

   “형, 다음 주는 아무래도 힘들겠어.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

   웅은 뮤지컬 관람 약속을 취소했다. 릭의 비밀을 안 순간부터 둘이서 뭘 한다는 사실이 꺼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릭의 친절이 순수한 의미에서 나온 게 아닌 것 같았다.

   “릭은 원래 그런 친구야. 누구한테든 다 잘해줘.”

   이모가 말했다. 하지만 릭은 웅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과 달리 각별한 것 같았다. 이모에 비하면 웅 자신에게 갖는 관심과 배려가 더 세심하고 깊었다. 밤 산책도 귀갓길의 웅을 만나기 위한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그동안 릭과 지냈던 일들을 떠올리자 그의 눈빛과 행동, 손짓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살아났다. 영어로 대화할 때 손이 자연스레 웅의 뺨을 스치거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걸을 때도 곧잘 어깨에 팔을 올려놓으며 친근감 있게 대했다. 그 모든 것이 릭의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니 온몸이 스멀거렸다.

   “형, 이젠 산책 때, 나 기다리지 마. 비상 시기라 학원도 언제 끝날지 몰라.”

   웅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릭을 피하기 시작했다.

   “정상과 비정상이 쪽수로 나뉘는 줄 아니?”

   웅이 릭 문제를 놓고 ‘비정상’ 운운했을 때, 이모는 그렇게 쏘아붙였다. 이모와 말싸움한다는 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아는 웅은 더는 그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촌스럽고 꽉 막힌 ‘고딩’으로 보일 게 뻔했다.

   버스가 멈췄다. 늦은 시간임에도 정류소는 근처 고등학교 학생들로 북적였다. 가장 행렬에 나선 사람들처럼 다들 짙은 분장과 특이한 차림이었다. 그들이 우르르 버스에 오르자 조용하던 실내가 떠들썩해졌다. 드라큘라, 피에로, 백설공주, 난쟁이, 마법사 등 영화나 동화 속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버스 안은 무대 뒤 분장실로 둔갑했다. 울긋불긋 요란한 모습의 학생들 사이에 있으니 웅은 평범한 차림의 자신이 오히려 튀어 보였다. 흰 쌀밥에 실수로 섞여 들어간 조각돌처럼 자신의 존재가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쪽수에서 밀리니 그들과는 다른, 외계에서 뚝 떨어진 이상한 생물체로 전락한 느낌이었다.

   이모와의 약속 장소까지는 두 정거장 남았지만 웅은 바로 전 정류소에서 내렸다. 모처럼 집 앞 정류소에 내린 셈이었다. 산책중인 릭과 맞닥뜨려도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일부러 그를 피해 온 혐의를 벗어날 기회다. 보도가 끝날 때까지 릭은 보이지 않았다. 산책에 나서지 않은 걸까, 아니면 산책로를 바꾼 것일까.

   “부모님이 날 이곳으로 보냈어. 그들은 내가 한국에서 생활하면 이곳 정서에 적응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 이 나라가 얼마나 빠르게 변해 가는지 잘 모르신 거지.”

   언젠가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때 릭이 가족 이야기를 떠올린 적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얘기 같았다. 하지만 웅은 그것과 아무 상관없는 말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났다. 영어로 할 때는 하고 싶은 말보다는 할 수 있는 말을 하게 된다. 시시껄렁한 웅의 말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릭은 얼마나 지루했을까. 그럼에도 내색 한 번 없었다. 웅이 원하면 그는 산책길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오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이성애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럴 때도 자기감정에 솔직해지세요. 이미 커밍아웃이 대세인 시대잖아요. 자신을 감추는 걸 남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지 말라고요. 남들도 당신에 대한 배려 정도는 갖고 있으니…….”

   감독은 자신의 일인 양 릭의 질문에 성의껏 답해 주었다. 되짚어 볼수록 릭의 물음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것 같았다. 질문에 나온 이성애자는 웅 자신이 분명해 보였다. 릭의 비밀을 안 순간부터 웅은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릭이 그때 영화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여 감정을 고백해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겁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 같았다.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지난 열흘간 웅은 릭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고민도 사실 어제까지의 일이 돼버렸지만…….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짐 싸서 오너라.”

   집을 나설 때,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공부에 방해가 되면 절대 안 된다.”

   엄마는 웅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 주는 이유가 오로지 입시 문제 때문이라는 걸 강조했다. 어쨌든 모두 웅의 편인만큼,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건 문제도 아닌 것이다.


   “어서 와.”

   이모는 커피전문점 바깥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앉아 있었다. 이미 커피 한 잔을 비운 뒤였다. 이모는 화면에 띄워놓았던 창들을 하나씩 닫기 시작했다.

   “뭐 마실래. 마끼아또?”

   노트북을 접고 일어나며 이모가 물었다.

   “아메리카노.”

   웅은 처음으로 이모가 늘 마시는 커피 메뉴를 골랐다.

   “웬일이야?”

   뜨악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모는 카운터로 향했다.

   “아까 마셔 놓고 또 마셔? 이 늦은 시간에?”

   커피 두 잔이 테이블에 올려지자 웅은 걱정스럽게 이모를 쳐다보았다.

   “나 같은 커피홀릭은 커피가 수면제야.”

   “특이 체질이야. 여러 모로.”

   “시럽 넣을래?”

   “아니. 순수한 커피 맛 한번 봐야지.”

   호기롭게 말하고 웅은 첫 모금을 들이켰다. 읍, 소리가 날만큼 썼지만 꾹 참았다.

   “오늘, 엄마 만났어.”

   이모가 먼저 용건을 꺼냈다.

   “당분간 너한테 비밀로 하랬는데, 너도 일찌감치 아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끝을 흐리는 이모의 말에 웅은 긴장했다.

   “엄마 아빠, 정식으로 갈라섰어. 너도 웬만큼 예상한 일이잖아.”

   이모는 웅을 흘끗 일별하고는 시선을 커피 잔으로 옮겨갔다.

   “그랬지.”

   웅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굳힌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돌아갈 곳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마당에…….

   “아빠는 해외 지사 발령 났고, 엄마는 할머니 모시고 당분간 미국 외삼촌 댁에 가 있을 거야.”

   금이 갈 대로 가 있던 집이 드디어 허물어진 것이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다. 집을 나오기로 작정했을 때는 내심 그런 결과를 바라기도 했다. 자신이 엄마 아빠 사이의 징검다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걸림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살얼음판 위에서 가슴 졸이며 사느니 깨진 얼음조각이라도 붙잡고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빙하를 만나 침몰하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잘됐네.”

   웅이 냉소하듯 던졌다.

   공을 상대에게 넘긴 이모는 묵묵히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바라던 대로 된 것일 뿐이야. 웅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온 가족이 지금껏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아오지 않았나. 그러니 허물어진 집은 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웅 자신은 물론 엄마 아빠 모두에게. 그 자유의 씨앗을 싹틔우는 데 웅은 자신이 조금이나마 기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침울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웅은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썼다. 아니, 처음보다는 덜했다.

   “어때 먹을 만해?”

   이모가 물었다.

   “쓴맛만 나는 건 아니네.”

   맛을 음미하듯 웅은 몇 번 입맛을 다셨다. 고소한 맛도 있고 신맛도 좀 났다.

   “거봐, 직접 마셔 보니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지?”

   이모의 말에 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생각했던 거랑은 다르더라고.”

   웅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도 이제 쓴맛을 알 때가 됐나 보다.”

   이모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릭에 대한 웅의 고민거리가 가족 문제로 넘어가더니 어느새 커피 맛으로 대체해 있었다.

   “이모가 나 받아들일 때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아.”

   웅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종의 안전장치였지? 가령 이런 경우에 대비한…….”

   웅은 이모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웅이 너, 하우스메이트 자질 있다. 경험이 바로 깨우침으로 연결되니.”

   이모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웅은 남은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곰곰 되짚어 보니 자신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금껏 도피할 궁리만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없는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 그걸 해결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피할 곳도 없어진 지금, 이제는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된다. 웅은 현실을 또렷이 깨우쳤다. 커피의 각성효과인가? 웅은 남은 커피를 말끔히 비우며 생각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이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은 이모를 따라 나서며 생각했다. 자신의 문제를 먼저 꺼내지 않은 건 다행이라고……. 그나저나 이제 릭과 마주하면 어떻게 하지? 성(姓)은 물론, 성(性)도 성적 취향도 다른 세 사람이 어떻게 한 지붕 아래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떠올리며 웅은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작가소개


표명희(소설가)


2001년 《창작과 비평》 신인 소설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펴낸 책으로 『3번 출구』, 『하우스메이트』, 『오프로드 다이어리』, 『황금광시대』, 『라일락 피면』(공저) 등이 있다.



추천 콘텐츠

나는 광대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