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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시·시조 석미화 - 「벌목」외 6편
벌목 석미화 새가 손목을 쪼는 꿈은 따스했다 붉은 포클레인이 숲을 무너뜨리는 대낮을 보고 난 후 몸 상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해몽이 떠올랐다 새가 손목을 더 깊이 쪼아댔다 새들이 내려앉을 곳은 없어지고 저린 손목에는 공중의 노래가 알처럼 모였다 향기로운 목질은 사라지고 생목 냄새가 올라왔지만 부러진 나무 대신 손목을 내놓았으니 새들이 사라진 자리가 욱신거리는 저녁 꿈은 내 몸을 따라 떠돌았다 새는 나무를 향하다가 곧장 부리를 내리꽂았다 2 손목이 부러진 꿈이었다 손목 깊숙한 곳에 나이테가 파였다 귀신새가 제 새끼를 안아 기르던 벌목된 숲에 손목을 품고 간다 나를 깨우는 귀신새가 울던 산속의 메아리 베어지고 가느다란 호각 소리 내며 찬 공기를 밀어 보내면 새끼를 위한 일은 손목을 돌리며 밥을 짓는 것이라고 일러주던 당신 뒤늦게 찾아온 숲 나의 음울, 음색에 어둠새는 고요를 새겨넣고 뾰족한 어금니가 박혀 있는 듯 숲이 자라나는 속도로 멈춰야 했지만 산은 무엇을 뱉어냈는지 구덩이마다 온기가 남아있었다 등 뒤에서 긴 그림자 쓰러지는 소리 휙 돌아들 때 다시금 나이테가 회오리치고 아픈 손목을 돌리며 밥을 짓는 일 그 소리에 다녀온 날 나는 잘린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절정이라는 말 멀쩡한 게 하나도 없다는 언덕으로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 눈도 코도 입도 흐려진 우리는 붉은 립스틱을 챙겨 길을 나섰고 갇힌 여인들이 립스틱이 없어 창백을 감추지 못했다는 아우슈비츠, 그 기억이 왜 떠올랐을까 붉은 기운 돋우려 입술을 깨물었을까 무서운 것이 잊혀진 무서운 세상에서 속이 타들어 가야 단풍놀이를 나설 수 있냐고 물어오면 고통에는 고통이 없다고 이렇게 수북한 잎들 색이 바래지고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입술을 덮고 구멍 난 잎을 덮고 낙엽 위에 두는 발은 흔적 없어 미끄러지는 죽음에 차렷 경례, 폭력과 비문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하나둘 사라져간 여인들의 립스틱 색을 찾을 수 없어 핏빛 단풍놀이는 끝나고 무엇을 몸에 문지를까 생기를 찾아야되는데 벗어나야 하는데 말라가는 잎이 많으니 절정이지요 슬픔에는 슬픔이 없는 것, 난장의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죽음에 차렷 경례! 절정이라는 말의 멀쩡함, 대낮을 나선 우리는 우리라 말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이 되물었다 떨어진 잎들은 색바랜 립스틱으로 오래도록 붉었다 입술이 까매지도록 어둠을 물고 있는 날이 거기 있었다 장편 유월에 먹은 케이크 개수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어요 장마가 시작되는 날부터였지요 살구케이크 망고케이크 이별케이크 뱃속에 쌓이는 생크림은 나를 휘핑크림으로 부풀어 오르게 해요 케이크 좋아하세요, 기린 모형이 서 있는 곳으로 가면 케
작성일 2024-10-11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5상세보기 -
시·시조 이은 - 「먼 곳에서 온 서사」외 6편
먼 곳에서 온 서사 이은 # 세상의 모든 서사는 난파당한 한 척의 배 같다 산과 바다, 강과 들, 모두 길고 긴 서사다 그리하여 서사는 먼 곳에서 온다 가자의 차디찬 눈물이 흘러온다 공중에서 낙하산들이 펼쳐지고 구호품을 향해 사람들이 달려간다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가자지구 해변이다 난민들이 흔드는 손이 해변에 꽂아 놓은 깃발 같다 들어 올린 팔들이 모두 불길을 닮았다 저항도 아니고 항복도 아니다 # 하루치의 양식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다 검은 모래 흰 모래로 그려진 만다라처럼 비행기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구호품이 넓디넓은 바다로 다 쓸려 간다 바다에도 찬장이 있어 그 문을 열면 밥그릇 옆에 고봉으로 담겨 있던 소금들이 하얗게 빛나고 그 속에 빛나는 사방 연속무늬들 사흘째 아이들이 굶었어요 저것을 놓치면 안 돼! 아빠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던 그 순간, 총소리가 들리고 해변은 묘지로 변했다 해변아, 여기 시신들을 쓰다듬어 다오 소금 무덤에 하얀 꽃이 피어나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옆구리를 꽉 붙들고 있는 해변 시신을 삼킨 해변이 비명을 지른다 # 해변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한 손에 아이를 붙잡고 흐느끼는 그가 외친다 우리는 차라리 이 아이들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먹을 것을 줄 수 없습니다 바다로 배를 저어 가는 한 청년은 구호품을 건져 와서 난민들에게 나누어 준다 차디찬 해변 검은 장막의 밤이 닥친다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난민들 뒤로 소금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해변에서 무덤 냄새가 난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고 여기 살고 있다고 전해 다오. 가자여! 해변에 대한 거룩한 제사를 바칩니다 신선한 피 한 사발을 바칩니다 # 지구 반대편에서 오는 서사가 비명을 지르는지 삼키는지 짖어 대는지 분수처럼 솟구치는 해변은 비릿해진다 해변은 오오오오 소리치고 구호품을 떨어뜨리고 돌아가는 비행기는 저 공중을 날아간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 가자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고 가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가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자는 전쟁의 피를 얼굴에 바르고 가자는 전쟁의 피를 바른 얼굴을 밟고 지나가고 얼마나 걸었을까 올리브나무 아래에 서서 소년은 조약돌 하나를 움켜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은 별똥별처럼 떨어진다 내가 내 얼굴이 아니었을 때 바늘로 얼굴을 꿰매면서 집어넣었던 거즈가이곳 가자 지구에서 줄줄 딸려 나올 것 같다 형제들이 모두 떠나갔습니다. 할아버지도 죽고, 할머니도 죽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생 둘도, 스무 명이 넘는 형제들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가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가자 여인
작성일 2024-10-11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45상세보기 -
시·시조 이어진 - 「먼 미래에서 온 눈송이」외 6편
먼 미래에서 온 눈송이 이어진 너의 기억을 꺼내 지도를 펼쳐보면, 너는 어디에서 왔니? 질문하는 바람이 있고,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의문을 던지는 추위가 있고 사랑이라는 실체를 흐르는 강물에 던져 버린 후, 나는 너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다 네가 방울방울 맺혀 있는 창문 위에서 나는 가끔 물방울을 추억할 뿐 물방울과 물방울 속에는 아주 작은 알갱이의 눈송이가 있다 했는데 그날의 온도와 그날의 습도를 놓쳐 버린 후에도 눈송이는 아름답기만 하지 마음속에 스며 있다가 어디로 흩날려 가만가만 쌓이는 눈송이, 쌓이는 마음이라서 다행입니다 나는 한 송이 두 송이 쌓이는 기쁨의 노래를 백지 위에 쌓고 있고,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우리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겁니까 그 무한한 흩날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 못하고 나는 물방울과 물방울 사이의 견고한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다 투명하고 아름다워서 깨지기 쉬운 유리창, 만지면 만질수록 스스로를 알아차릴 수 없는 유리창 영혼이 없어서 그래요 투명한 눈망울만 갸웃거리는 유리창 기쁨이 사라진 이후로 나는 웃음이 없는 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녀요 마음속에는 와장창 깨진 눈송이들이 흩날리는데 너는 어디로 흩날릴지 모르는 가벼운 눈송이였다 손에 쥐면 반짝반짝 녹아 버리는 생각이 없는 눈송이, 눈에 넣으면 즐거움을 즉석에서 발설해 버리는 생각이 무수한 눈송이 어디에서부터 오고 있는 그 많은 희고 탐스러운 눈송이 나는 무한한 눈송이의 계곡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먼 미래에 도착할 수는 있는 겁니까 나는 어리석은 질문들을 장작처럼 모아 놓고 불을 지른다 깊은 계곡에서 활활 불타고 있는 눈송이들 깊은 땅속에서 활활 끓고 있는 눈송이들 너는 생각이 없는 눈송이처럼 까맣고 고요하기만 하고 불타고 남은 눈송이처럼 우리는 미래에서 활활 타오를 수는 없는 걸까요 그러한 눈송이들을 마중 나갈 수는 없는 걸까요 춥고 딱딱한 거리의 나무들이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검은 눈송이들을 기다린다 그 순간의 떨림, 그 떨리는 흐느낌 빗물은 눈송이들의 나라에 도착할 수가 없을 거 같다 하얀 눈송이들의 무덤 속에서 아름다움을 포기한 추위가 한껏 외투를 껴입는다 나는 때로 눈송이의 표정으로 잠들고 싶었지 눈송이와 눈송이가 흩날리는 도시 위에 우산들이 걸어 다닌다 나는 얼굴이 없는 것처럼 웃음을 숨긴 채 눈송이들을 퍼뜨리며 우산 위를 걷고 있다 먼 미래에서 도착할 거 같은 하얗고 검은 눈송이가 있었지 입술 위에 올려놓으면 가만가만 눈송이가 되어 흩날리는, 검은 꽃잎도 흩날리고 우산도 흩날리고 너는 내 가느다란 속눈썹 위에서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먼 미래에 너는 커다란 눈송이가 되어 있을 거야 눈송이와 나무의 노래 너는 생각이 제멋대로 뻗어가는 구름이었다 구름이 구름을 부르며 하늘로 무한정 자라나는 조그만 눈송이였다 눈송이라고 부르면 푸릇푸릇한 손가락을 뻗어 어디든 갈 수 있는 표정으로 무심히 거리를 걷고는 했지 나무라는 비밀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너는 기쁨의 표
작성일 2024-10-11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7상세보기 -
시·시조 하미정 - 「아보카도 순정」외 6편
아보카도 순정 하미정 이제 막 익기를 기다리는 스토리가 있다 입안에서 함부로 뭉개지는 사건들. 밖에서 발끝을 세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색을 만지고 흘러나온 입구를 따라 봉쇄되었던 숲을 만난다. 낯선 풍경이 시작되고 이국의 열매가 자란다. 미리 달려가서 던진 안녕아! 둥글어져라. 울퉁불퉁한 얼굴에 써 내려간 말들이 미끄러진다. 단단하게 미끄러지는 너를 빼내기 위해 칼로 중심을 나눈다. 미숙의 과거보다 과숙의 현재가 무너진다. 초록의 무게에 휘청이다 몽롱하게 휩쓸렸던 한때의 우리는 방목된 자유 목마른 나무를 따라 걷다 만난 열매를 믿을 수 있을까? 초록의 입구를 열고 잠들어 있던 갈색의 눈빛을 만난다 백 개의 마음을 짜내 순도 높은 단 한병의 순정을 너에게 보낸다 나무의 마라톤 속도가 속도를 뒤쫓는다 짓밟혀도 살아나던 바닥 그 질긴 근육질의 바닥이 좀처럼 달리지 않는다 다 써버린 하루의 폐활량이 마비된 속도에서 유예된다 어디쯤 왔느냐는 질문에 가속도가 붙지 않는다 반환점이 보이지 않는데 벌써 끝나버린 경기처럼 나 혼자만 결승점이 지워져 있다 너무 빨리 닳아버린 속도에 우리가 쌓은 포기들 달리는 속도에 순응하기 위해 페이스 조절을 한다 나의 호흡이 너에게 피기 위해 달린다 느린 속력으로 달려오는 꽃은 나무의 배번호 나무는 꽃이라는 배번호를 달고 한철을 달린다 엉킨 발자국에서 기록이 사라진다 난 우리의 완주를 믿지 못한다 오버페이스로 가는 속도가 부러진다 현기증과 함께 풀려버린 길 길의 모퉁이를 돌아 나이테의 중앙으로 달려가면 나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토요일의 꽈배기 나는 늘어나는 중일까 아니면 줄어드는 중일까 우리가 꼬여 있다는 것은 서로를 향해 익을 온도가 되지 않았다는 것 나의 한가운데는 늘 설익어 있다 잠시 끊어지는 대화를 이어 붙이기 위해 말랑해져도 그런 밤은 꼭 비틀려 온다 추억은 점성이 강하다 점성이 사라진 당신은 위태로워 굳어버린 반죽을 떼어 낸다 당신 입속에서 중얼거림이 부풀고 있다 머릿속을 조이고 있는 나선의 기억 가루는 내 속에 들어와 나를 반죽하고 내 꿈은 골목에서 튀겨진다 식용유는 내가 미끄러질 수 있는 단어 오늘의 기분은 왜 기름에서 뜨지 않을까 의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새로울 것 없는 하루가 튀겨진다 까맣게 탄 시간은 나와 가까워 쓰고 아린 것이 익고 있다 잠시 기름에서 꺼낸 문장들이 벗겨지면 우리의 반죽보다 더 두꺼운 어느 토요일이 튀겨지고 있다 복숭아 이분법 당신의 발목에서 나무가 자란다 통증을 먹고 자라나는 여름 시고 떫던 우리는 당신이 상하기 전에 순해진다 가느다란 솜털을 세우고 우리를 지탱하는 당신의 발목은 얇아진다 우리의 숟가락이 익은 당신을 푹푹 퍼 간다 터진 물집에 어쩔 수 없이 끈적거렸던 안녕 당신은 무너지거나 아름답고
작성일 2024-10-11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3상세보기 -
시·시조 오산하 - 「거기에서 만나」외 6편
거기에서 만나 오산하 상설 극장에서 만나. 이 말은 정해진 미래가 된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나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극장을 향해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한다. 어떤 선택은 몸을 만들어 뚜벅뚜벅 걷기도 하지. 극장은 매일 몸을 갖는다. 하지만 걷지는 않는다. 그 골목으로 올 거니? 네가 물었고 응 그래야지, 아무래도 그 길이 가장 빠르니까, 대답한다. 소리와 소리가 벽을 만들고 정말 벽이 있는 것처럼 믿게 되는 곳. 연극 같다,라는 말은 결국 연극이 아닌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듯 시 같지 않다,라는 말은 결국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골목엔 서로의 소리를 벽 삼아 등을 기대 조는 사람들이 있었다. 벽과 벽에 갇혀 한 번쯤 불길에 휩싸여 본 적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 걸어 둔 취향이라는 게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 유행이 지난 줄무늬 티셔츠, 뜻 모를 영어가 쓰여 있는 모자, 영원을 약속했던 시간··· 극장까지 이어진 골목을 걸을 땐 언제나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보다 모자라다는 생각. 휩싸였다. 이것은 불길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한 쪽만 빨리 닳은 신발 밑창이다. 기울여 걷는 습관이다. 길게 늘어진 불행이다. 불행은 친절하고 신속하고 정확해.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오지. 우리가 정해진 미래를 배신하는 동안 잿더미 위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잿더미를 기억하는 건 잿더미를 달여 먹은 사람들.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달여 먹지 않는다. 여전히 극은 상설 중이다. 매일 조명이 꺼지고 조명이 켜지고 대사가 울리고 대사가 울리지 않고 관객이 있고 관객이 없다. 우리의 취향이 찢어진 청바지에서 멈추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고 말할 거니? 우리는 자주 연극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극장 로비에서 걸어 나오곤 했다. 우리는 사실 연극을 본 적 없다. 우리의 삶이 연극 같지 않았으므로. 상설 극장에서 만나. 끝나지 않는 연극 속에. 거리에. 벽과 벽 사이에. 타오르는 골목에. 우리가 건너뛴 골목이 촘촘하게 등을 맞대고 뒤를 돌아보았다. 돌 수집가가 문을 두드렸고 흰 돌과 점박이 돌 중에 무엇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세요? 저는 돌 씹어 먹는 아이예요1) 아이는 내 옆에 앉아 돌을 물고 빨았다 시간이 멈춘다 침이 흐르는 대로 돌이 깎이고 적을 수 없는 낙서로 지키지 못한 다짐으로 종잡을 수 없는 빨아 젖힘으로 시간이 멈춘다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돌을 쪼개 먹는다 시간을 멈추게 되었을 때 쓰기를 그만두고 수집을 했다 장면들 전구를 부수는 빛 잠을 구부리는 밤 오랜 항해를 마친 뱃사람 움직이지 않아서 하는 멀미 땅아 왜 흔들리지 않으냐 괴롭다 가만히 있지 말라 출렁거려 보라 시간이 멈춘다 뱃사람을 잡고 흔든다 시간이 흐른다 길게 토한다 더 이상 수집할 장면이 없다··· 아이가 문을 두드렸다 저는 돌을 수집해요
작성일 2024-10-11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60상세보기 -
시·시조 이유운 - 「가설」외 6편
가설 이유운 안과 밖이 동일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치자. 그것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그 위에 있는 지붕이 모두 투명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치자. 손바닥으로 훑으면 허술하게 무너지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치자. 그 아름다움이 무너진 흔적이라고 치자. 이 식사를 합의하자. 신과 함께하는 전례라고. 내 앞에 놓인 둥근 접시. 얇은 빵조각은 빛나고 있다. 부드럽고 한산하다. 어린아이의 뺨처럼. 입에 넣으면 곧장 반투명해지는 음식. 그것이 목구멍 뒤로 넘어갈 때.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 가설이라면. 오늘 접시를 비우지 못하면 다음의 식사가 있어. 언제나 다음이 있다는 건 멋진 일. 다시 눈을 내리면 접시가 채워져 있다. 아까보다 더 투명하고, 더 얇은 빵조각. 늙어서 떨어진 피부와 같이. 손으로 집는다.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진다. 내 손가락에 묻은 기름. 이 촉감이 감각이 아니라 학습이라면. 손가락 사이가 미끄럽다. 그 사이로 쉴 새 없이 무언가가 맺혔다 떨어진다. 병상 버섯과 물이끼가 보살피고 있다. 그들의 손은 맑은 유리 꽃 같다. 조금만 힘주면 부서진다. 깍지도 끼지 못할 연약한 손으로 나를 창문을 닦는 것처럼 만진다. 그들의 손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눈꺼풀 안쪽에 성에가 맺힌다. 리모델링 이런 말이 위로가 될까? 결국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고. 구겨진 종이 위의 선들이 미끄러워서 건축의 모든 결심이 뿔뿔이 흩어진 걸지도 모른다고. 유물 지나가는 사람 봤어? 걷는 게 위태롭고 표정은 납작하대 분명 낯선 생김새였어 멀리서 보면 투명한 구슬 같았을 거야 너도 봤다면 분명 만져 보고 싶었을걸 매끄러운, 하얀, 끈적끈적한, 차가운, 둥근 낯섦 면사포 쓴 여인만이 그런 환영을 받지* 하비비**, 나 너와 검은 해변을 산책하면서 전 재산을 잃었어 내가 잃은 무성한 것들이 유리와 플라스틱 조각이 되어서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어 우수수 우수수··· 손바닥으로 두 뺨을 감싸면 햇빛에 달궈진 돌처럼 동그랗고 따뜻해 손을 떼면 핏줄기가 쏟아지지 유리와 플라스틱 조각이 사이에 박혀서 축축한 냄새가 퍼진다 찬장에는 멸종을 대비한 통조림이 쌓여 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박혀 있었다 통조림은 내 손아귀보다 둥글고 단단하다 꼭 쥐고 그를 일으켜 세우면 남아 있는 끈적끈적한, 둥근 자국 통조림은 오래되었지만 새롭고 낯섦을 전제한다 이따금씩 나는 물려받곤 했다 통조림이 남긴 형태들을 끈적한 자국 내 손에 남은 과거의 유물 애쓰고 있다 그것들조차 낯설게 느낄 수 있도록 사람들은 새롭고 낯선 것만을 좋아하고 연인들은 끈적하고 비린 것만을 좋아한다 하비비, 네 어깨에 기대 밀려드는 파도를 보고 있지 통조림 따개와 깨진 유리컵 조각들이 섞여 있어서 안쪽에서부터 강
작성일 2024-10-11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3상세보기 -
시·시조 김계정 - 「행복한 나무」외 6편
행복한 나무 김계정 나무의 옆구리에 불쑥 가지 돋았다 거칠고 마른 피부에 나눠 준 새순의 터 근육의 예리한 줄기 식구 하나 늘었다 햇살의 입맞춤에 차가운 달의 시선 바람이 방심한 사이 쑥쑥 키가 자라면 그늘이 행복해지는 제 몸의 잎새 한 장 두려운 새가 높이 날았다 바꿀 수도 고칠 수도 가질 수도 없기에 앞만 보는 새처럼 돌아보지 않겠네 머물러 날갯짓하다 날개마저 꺾일까 봐 앞과 뒤 다른 만큼 닫힌 입과 열리는 귀 형체를 알 수 없어 허공 향해 휘두른 손 어렴풋 보일 때마다 주저앉던 두 다리 두려움 감추려고 높이 오르는 일이 장애물 경기를 하던 어제보다 쉬워서 마음껏 날아올랐네, 망설이지 않았네 지금이야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기도를 하고 싶어 겸허해진 순간에 모아 쥔 두 손으로 고마운 마음 꺼내니 소중해지는 지금 오늘만 살 것처럼, 내일이 없는 것처럼 널 위한 고단한 일도 알고 보면 날 위한 일 꿈꾸다 놓쳐 버렸던 어제도 눈부시더군 봄이라서 좋았네 빛의 씨앗이 모여 새로운 싹 틔우면 다정한 땀의 숨결 햇살 안에 스며들면 열기의 꽃밭에 모인 태양은 분주했지 밀려난 어둠 속에서 아침이 오는 것처럼 스치는 옷깃만으로 오고 가는 인연처럼 계절의 문간에 서서 건네는 마지막 인사 오고 가는 순간의 짧은 인사만으로 여름이 밀어 올린 촉촉한 생명의 날 사라져 빛이 된다면 봄이라면 좋겠네 멈춰선 길 앞에서 칼날 같은 눈빛에 베이고 싶지 않아 시를 쓰지 않으니 세상이 고요하네 비난의 문장 한 줄이 말라서 바삭하네 나비가 찾아와도 외면하는 꽃처럼 가지 치듯 잘라내어 단정해진 글자의 숲 편하게 잠이 든 어휘 사전 안에 침묵하고 길이 되지 못하는 시의 낯선 배열로 난무한 언어의 조합 남기고 싶지 않아 멈춰서 거룩해지는 길 앞에 서고 싶네 위대한 날의 여정 자라서 뭐가 될까, 씨앗은 알고 있지 뿌리를 지키는 일, 흙도 알고 있었지 모르고 일어난 일이 알고 보면 위대했어 홀로는 꿈꿀 수 없어 함께 가는 길에서 햇볕을 잘게 부숴 골고루 나눈 후에 심장에 닿은 온기로 생명의 노래 불렀지 꿀벌 실종 사태 우주에서 지구는 고작 작은 점 하나 어차피 세상에 없는 신의 뜻 아니라며 푸른 물 넘실거리는 반짝반짝 초록별 꿀벌이 사라져도, 숲이 점점 없어져도 지구는 사람이 주인 영원한 진리라며 당당히 무너뜨리는 사람과 자연의 경계 만에 하나 사라질 그 시작 꿀벌일 뿐 사람은 끄떡없다고 고작 이제 하나라고 두 번째 사라질 종족 누군 줄도 모르고
작성일 2024-10-11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5상세보기 -
시·시조 정병삼 - 「억새」외 6편
억새 정병삼 따뜻한 말 찾지 못해 휘청이는 내 얼굴 싸늘한 기억들을 바람에 맡겨 놓고 슬픔을 채워 넣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떠나간 발자국이 차갑게 녹아든다 젖은 잎 출렁여도 손짓은 가벼워져 이파리 끝에 매달린 고개 숙인 소리들 해지고 풀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가벼워진 말들이 부풀어 오르면 목마른 줄기를 세워 가을을 뿌린다 마른 수첩 땅에 떨어진 명함과 상사의 지시사항이 회의장에 뒤섞여 날마다 불을 지핀다 한마디 변명도 없이 급하게 타오른다 회의 끝 접어 둔 것 낱장으로 물러나 입 닫은 문장처럼 천천히 말라 갈 때 뭉친 것 펼쳐내 봐도 달라붙은 침묵뿐 태워 버린 자리에서 불씨를 뒤적인다 발버둥 치던 내 모습이 명퇴로 타들어 가 지극히 몸으로 솟아 마른 재로 날린다 도둑고양이의 미래 길들여진 세상의 맛 입안에 물고 있다 야생의 사냥감을 새로운 문장으로 여겨 하루치 낯선 언어를 익숙하게 핥아댄다 품 안을 벗어나서 날것을 사냥한다 한 발짝 다가가도 경계를 풀지 않아 너라는 늑골 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린다 비탈진 담장 위로 숨는 법을 배웠을 때 고양이의 앞날이 나의 미래처럼 널려 있다 또 다른 문장을 찾아 뛰어내릴 뿐이다 소리에 물들다 텃밭은 햇살을 잡으러 어깨를 펴는데 한 삽을 파낼 때 묵은 계절 토해낸다 봄 소리 끌어당기며 기적처럼 일렁인다 가라앉은 바닥은 봄꽃으로 피어날까 내일을 품은 모종들이 부풀어 오를 때 제 이름 불린 곳마다 산야를 물들인다 고르며 펴진 흙이 바람에 닿는다 한 걸음 내 발자국 살가운 노래 되어 떠나온 도시의 걸음 한사코 밀어낸다 거울에 비친 등 거울에 비쳐진 지난 등이 희미하다 비누 거품 사라져 뒷모습을 얻는 시간 침묵을 씻어내리며 유리 안을 살핀다 그물에 걸려든 혹등고래 등처럼 발버둥 치는 내 안을 밀물이라 불러 보고 먼바다 꿈 좇는 고래 하루가 시작된다 등과 등이 외면하는 치열한 경쟁에서 슬픔을 닦아 주면 환하게 비춰질까 새우잠 비쳐진 등을 매일 밤 흘려보낸다 바다를 그리다 출렁거리는 슬픔 안고 새들은 아침을 당긴다 개펄 위 폐선 한 척 안개를 밀어내고 물결을 닮은 사람들 옛 소리를 밟고 간다 어느 화공 그 흔적 찾아 하루를 그리면 인적이 끊긴 자리 뱃고동으로 채색된다 날개를 접은 파도가 뭍으로 돌아온다 바이욘 사원 두툼한 입술들이 할 말을 삼킨다 끊이지 않는 신화는 구름 아래 상처로 남아 숨겨진 흔적의 소리 내 모습을 잡아끈다 제자리 찾지 못한 석축의 비밀 속은 평원을 달리던 부음 부조로 기억될 때 천년 전 승리의 함성 바닥에서 작아진다 짓눌린 얼굴 모습 내일을 꺼내 들면
작성일 2024-09-29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80상세보기 -
시·시조 오광석 - 「자리왓 돌담」외 6편
자리왓1) 돌담 오광석 돌과 돌 사이 구멍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구멍 속을 들여다본다 무명옷의 아이들이 돌담 사이를 지나친다 구멍은 시간이 새어 나오는 틈 한 걸음 옆 구멍을 들여다본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짐을 지고 떠나는 사람들 마을을 등진 채 걸어간다 저 너머 공간은 돌 사이에 머문 시간의 기억들 시간은 돌담을 따라 흘렀다 돌과 돌 사이를 지나쳐 가다 다시 구멍 속을 들여다본다 폐허가 된 마을이 보인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구멍마다 보이는 무덤들 대나무들만이 곧게 지키고 있다 돌담 끄트머리에 이르러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잡풀 가득한 올레 마을의 흔적이 보인다 떠나간 아이들의 목소리가 돌담 사이로 흐르는 바람에 실려 온다 1)제주도 애월읍 봉성리에 위치했던 사라진 마을. 대살 아들 대신 아버지가 죽었다 아련하게 들리는 총소리 갑선이오름을 타던 아들은 아버지 대신 살았다 난리가 끝나고 돌아와 버들못에서 유해를 찾아 장을 치르고 질기도록 살았다 혁명이니 군사 정권이니 칼날 같은 세상 맨몸으로 시내 막일로 밤 없는 날들로 집도 가족도 새로 일으켜 아들들 반듯하게 키운 아버지로 살았다 민주화 바람에 거리로 나선 아들들 잘라 내지 못한 연좌의 굴레 몰래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나 대신 아버지가 죽었어 난 죽을 수 없어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온몸이 주름투성이 되도록 살았다 아버지가 억울하지 않을 만큼 대통령이 내려와 사과하는 방송을 보며 풍선처럼 빠지는 기력 하루의 반을 누워 살아갈 지경이 되었을 때 몸은 녹아내려도 기억은 점점 또렷해져 갔다 아버지가 대신 총을 맞던 그때 그런 줄도 모르고 무서워 오름으로 곶자왈로 궤 속으로 산짐승처럼 숨어 아버지 대신 살아난 그때 젊어지는 기억들 자꾸 죽었어야 될 날들로 되돌아갔다 걱정스레 지켜보는 아들들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주름진 손으로 꼭 잡고 말했다 나 대신 오래오래 살아 줍써 전망대 높은 자리에서 바라보면 다들 개미 같아요 땅바닥만 바라보며 걷는 개미들 오늘도 개미굴 속으로 들어가는 개미들과 나오는 개미들이 엉켜 있네요 줄지어 들어가고 나오는 개미들은 하루 종일 위를 바라볼 일 없겠지요 바닥에 붙어 버린 이차원의 생물들 고개 들 수 없게 태어난 거예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다들 저리 조그맣게 보이는 걸 바닥에 붙어 다닐 때는 참 납작하게도 살았네요 그래서 높으신 어른들이 윗자리에 올라가려 애쓰나 봐요 꼭대기에 올라앉은 채 내려오기 싫은 건가 봐요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세상이 이리도 조그맣게 보이는 걸 삼차원의 공간에 올라선 사람만이 알고 있는 거예요 저 바닥 이차원의 공간에 갇히면 다시는 높은 자리
작성일 2024-09-29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54상세보기 -
시·시조 박수봉 - 「댕댕이 소쿠리」외 6편
댕댕이 소쿠리 박수봉 어머니는 밤마다 소쿠리를 만들었다 가난밖에 더는 담을 것이 없었는데도 댕댕이 긴 줄기로 여름밤을 엮었다 아버지를 잃고 댕댕이넝쿨처럼 바닥을 기던 청상의 어머니, 숱한 바닥을 다 더듬고 나서야 허리를 세운 것이 댕댕이 푸른 넝쿨이었다 아버지의 머리털같이 뻣뻣한 줄기를 손바닥으로 쓸어 가며 밤새 엮었을 당신의 줄거리를 한 올 한 올 더듬어 본다 가슴속 한(恨)의 타래를 헐어 가닥가닥 엮어 간 여름밤의 자서전은 눈물을 찍어 쓴 비문이어서 읽기도 전에 번지는 당신을 읽을 수가 없다 씨줄과 날줄이 엉켜드는 밤이면 엉킨 삶의 타래를 푸느라 하얗게 지새웠을 당신의 여름밤을 손바닥으로 쓸어 본다 거미줄처럼 술술 뽑혀 나왔을 슬픔의 가닥가닥이 오돌 도돌 만져진다 손끝으로 옮아 오는 저릿저릿한 생의 파동 실눈을 감고 뒤척이다 훌쩍이는 흙벽의 그림자를 본 밤이면 어머니의 아침은 부어 있었다 어린 육 남매의 소쿠리처럼 불룩한 배를 홑치마로 덮어 주면서 밑이 약한 소쿠리가 되지 않게 하려고 손끝에 힘을 실어 바닥을 다졌을 어머니, 지문이 다 닳도록 짜 올린 당신의 테두리에서 올망졸망, 우리는 몇 알의 감자로 담겨 살았다 무늬 어느 날 나는 도시 하천에 버려졌다 거역할 수 없는 손이 뽀글거리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었던 나를 하천에다 탁, 털어 버렸다 내 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날이었다 사지를 버둥거리며 떠오른 물 밖에는 가뭇없이 창포꽃만 피어 있었다 분 냄새가 번지는 도시의 하천은 캄캄하고 깊어서 뿌리가 닿지 않았다 물속에서 자라나는 회색 빌딩 사이를 부유물로 떠돌면서 나는 부패한 물의 도시에서 길을 잃었다 하천의 관절이 꺾이면서 거품을 쏟아 내는 여울에다 남은 울음을 털어 버리고, 도시의 가랑이에서 쏟아지는 비린내를 조각조각 씹으면서 나는 서서히 하천의 방식으로 물들어 갔다 사람들은 내 등 무늬에 생태 교란 낙인을 찍고 가는 길목마다 포획의 그물을 던져 댄다 물속 바위에 뿌리 내린 물풀이 미역처럼 머리 타래를 길게 늘이는 밤 곰곰이 가라앉아, 죽은 물고기의 살을 뜯으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등의 무늬가 어느 나라 지도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람들은 내 질감이 딱딱하여 어떠한 슬픔에도 물들지 않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나도 상처가 덧나는 작은 짐승일 뿐 이른 아침, 뭍에 올라 바라본 하천에는 또 무엇이 버려졌는지 물안개를 자욱하게 밀어 올리고 있다 세한도 늙은 버드나무 풀어 헤친 머리채에 가닥가닥 추위가 매달려 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영하의 나날들 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 혹한의 공원 무채색의 침묵 속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지팡이를 기대 놓고 눌러쓴 털모자에 공원의 오후가 무겁게 얹
작성일 2024-09-29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57상세보기 -
시·시조 김수현 - 「병의 미래」외 6편
병의 미래 김수현 컵에 담긴 물 같다 저 사람 공원에서 버스킹 하는 사람 너는 지금 같은 말을 일곱 번 하고 있어 나도 가끔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어 깁스를 풀고 검지와 중지에 힘을 줘 구부렸다 펴는 연습이야 이모는 내가 태어나기 전엔 이모가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우린 동갑이야 말을 걸면 사라지는 달의 장르 저 구멍으로 뭐가 빠져나가는 거야 아니 툭 끊어져 그리고 떨어져 그뿐이야 밤은 소리야 그러는 동안 눈은 쌓이고 컵에 가득 담긴 물 같다 저 사람 무덤의 주인을 찾는 사람 이별보다 힘든 일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주치의가 멀어지는 봄에 봄은 뭘 했을까 그러는 동안 점점 쏟아지는 저 사람 무한동화 왜 이렇게 빨개요 구름인 척 주저앉아 부푸는 집이다 앞발로 입을 문지르며 배고픈 귀를 쓸어 담는 뼈다귀다 왜 이렇게 빨개요 누군가 떠날 때마다 둘 셋 셈하는 피아노다 하늘은 바닥에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우주를 버티는 낱말 카드에 모두 한 번씩 귀를 맞대고 돌돌 말아쥐는 퍼즐이다 왜 이렇게 빨개요 귓속으로 뛰어 들어간 슬픈 토끼다 왜 이렇게 빨개요 꿈꾸는 뱀처럼 나비가 될까 봐 이렇게 말해요 왜 이렇게 빨개요 숲이 장전된 집에서 안으로 밖으로 밀어 버린 피부다 왜 이렇게 빨개요 내가 없는 곳으로 가는 그림자다 왜 이렇게 빨개요 인파 속에서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길이다 서러운 것 하나 없이 제 깃털을 물고 흐르는 골목이다 왜 이렇게 빨개요 몸통만 남은 비둘기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손끝으로 손목을 두드리는 별이다 손바닥으로 목을 쓰다듬는 바람이다 꿈꾸는 나비처럼 노래가 될까 봐 이렇게 말해요 왜 이렇게 빨개요 온몸으로 마른 잎을 찢으며 걷는 빗방울이다 시스투스* 손은 일부가 사라진 모양입니다 당신은 곧 터질 것 같은 초침 소리 쪽으로 돌아앉는다 사라진 모양은 어디로 갑니까 밥 짓는 소리를 들어 봐 풍금 위에 벽돌을 올려놓고 일렬로 조용히 밥을 떠먹는 사람들과 당신을 연주하는 손 말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1에서 0으로 바뀔 때 시간은 있지 건조대 모양으로 마른 빨래가 바삭한 어깨처럼 있지 텅 비었다는 말에 가득 찬 맨발은 있지 건반 사이 떠내려간 예감은 있지 미미와 바비는 없지만 미미의 침대와 바비의 신발이 있지 식은 날개가 꼬리뼈처럼 있지 눈은 얼굴에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뇌입니다 당신은 버려진 태엽처럼 말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매일의 술래는 너무 많은 오늘은 거의 자라지 않을 거야 부서지지 않을 거야 사라지지 않을 거야 언 땅에 두고 온 심장을 잊고 국경을 넘는 구름처럼 잠에서 깰 때마다 제자리는 아닌 것 같아 밤을 밟지 말라는 표지판이 밤을 밟을 때 강은 녹고 바다는 얼지 않아 다음은 없어 고요한 손 틈새 충혈된 갈증으로 무엇보다 가장 먼저 나서지만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반동으로 붉은 달이 떴습니다 *자살하는 식물. 즐거운 조약돌 두 사람이 문을 잡고 어제의 얼룩말 세 사람이 문을 닫고 내일의 판다 네 사람이 문을 보고 불붙은 얼음 붉
작성일 2024-09-29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60상세보기 -
시·시조 서춘희 - 「매달린 사람」외 6편
매달린 사람 서춘희 울타리 없는 곳에서 시큼한 향을 맡는다. 각자의 목록은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다가 튀어나온 항을 다른 항이 지지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뒤바뀐 질문이 석회 가루처럼 날린다. 석회 가루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의외’는 이곳에 잘 어울리는 외투 같다. 의외의 기분이 나와 분리되어 떠 있다. 우리의 얼굴은 신이 떨어뜨린 단추였구나 알게 된다. 고개를 돌리면 가늘고 긴 무늬가 옆 사람을 덮친다. 그는 평행사변형에 갇힌다. 바라는 게 참 많구나. 처음 들은 목소리에 나는 반쯤 투명해진다. 불안이 아무리 무심해도 당근을 깨물지 않기란 어려운 일. 열감이 많은 사람은 원형에 가까운 돌을 찾아 헤맨다. 차가운 질감, 차가운 귀를 만지며 잠이 들었어. 이빨 자국 난 유년이 저기, 열기구처럼 어쩌면 흙의 달콤함과 뿌리를 짓누르는 돌, 굳게 잠긴 날개 파묻힌 기도가 엉켜 신경질적인 소리를 낸다. 와이파이 안테나가 쭉쭉 늘어난다. 기도의 처신은 영리하고 그리하여 기도는 언제든 다르게 보인다. 파도는 웃는 얼굴로 뒤통수를 친다. 여기 없는 짠맛을 떠올린다. 물 위를 떠가는 오리의 꽁무니에 자막이 흐른다. 기도(氣道)를 통과할 수 없는 것. 꺼내어 보면 짓물러 있는 것. 네 안에 너를 움직이는 힘. 네 안에 갈구하는 빛. 물은 빛으로만 이루어진다. 퓨즈가 끊어지려는 상태는 고통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거대한 뱃고동 소리에 온몸의 구멍이 쪼그라든다. 간절할수록 한 사람씩 밀어낸다. 봄으로부터 머리카락과 입술, 충분히 윤이 나는 눈썹까지 달고. 너도 씨앗을 지워 본 적 있니. 어두운 그늘에 앉아 있던 새가 어느새 하얀 바탕에 존재한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소화기를 들고 이동한다. 붉은 몸과 흰 싸움. 모든 준비를 마친 것 같다. 약동하는 흐름 작고 얇은 매가 될 수 있는 나뭇가지가 팔을 벌린다 기쁨이 휘는 것을 바라보면서 질긴 살점이 되어 간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마신다. 이 장면은 고요하게 헐벗는다. 이 장면은 너의 테두리를 오려 언덕 위에 붙인다. 이 장면은 이제는 돌보지 않는 말로 이루어진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꽃무리 깊은 밤의 혀 저 문을 열면 물이 밀려올 것이다 물에는 낙담이 있다 폐업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무성한 털도 모두 깎여 이제는 거침없이 질주하는 양이 되었네. 한번은 너에게 모욕을 주고 싶었는데 의자를 붙이고 누운 주인어른이 일어나 다 드셨소? 고요. 무의식의 단차. 절륜한 울음 하나와 식어 버린 탕. 비는 눈으로 변한다. 눈은 다시 어린 빗물이 되고. 미래에도 날씨가 있을까. 완벽하게 여기 없는 비명처럼 문이 닫힌다. 강화된 인간이 자기 앞의 돌을 발로 차며 걷는다. 방울토마토 익히기 탈피 중이었나 보다. 평소보다 질긴 상자였다. 명상하며 졸다가도 웃어 보였다. 잘 짜인 삼베옷을 입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누가
작성일 2024-09-26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79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