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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시·시조 김뱅상 - 「박제 그림자」외 6편
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16상세보기 -
시·시조 백지은 - 「시간의 쪽방촌」외 6편
시간의 쪽방촌 백지은 새똥이 떨어져 고물 묻을 새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 일개미들이 쪽방촌을 짓고 있다 풀씨를 물고 가던 일개미 한 마리가 쪽방으로 사라지자 잘려 나간 새 발자국들만 서로의 몸을 부비며 퍼덕거린다 실체 없는 나락이 놀이터 오후 시간과 소란을 벌이는데 그 새 한발 끼고 들어온 거센 바람마저 한자리에서 나락을 펼치니 양쪽 날개를 밀쳐도 꼼짝하지 않던 방울새가 잘 여문 구기자나무를 버리고 그네로 옮겨 앉는다 나락의 운율에 대해 무효한 공간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앞이 안 보이니까 결국 너도 나처럼 귀먹은 귀로 날아가기 마련 각자 장미꽃을 물고 서 있었다면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은 모두 가뭄이 들었을 테니 그네를 밀어도 날지 못하는 방울새야 너야말로 여기서 죽은 새의 허기를 건져야겠구나 나락에 입혀진 구음처럼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날개를 벗고 받아라 네가 잃어버렸던 날개란다 오전에 뜯어 먹은 구기자가 깃털이 되고 있을 때 무화과 열매 속에서는 말벌 애벌레가 자라고 있었지 제 몸을 흐르는 시그널을 버리듯 공중에 남긴 날개의 노동이다 옆집으로 분가할 일개미들이 새로운 쪽방을 짓고 난간을 향해 떠난 바람이 울음을 묻고 올 때까지 나락들은 이렇게 오후를 거쳐 퍼덕거리겠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절박해서 놀이터 안에는 저물녘이 있고 그네가 있고 나도 있는데 일개미가 내 이름을 모르듯 지나가는 암놈을 홀리면 금세 귀먹는 새 날개 없는 것들이 남의 날개를 빌려 날아 보는 나에게 놀이터는 소진해야 할 시간의 쪽방촌이다 시간을 코팅하다 기진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명덕역 벤치에 앉아 나비를 날리고 있었다 나비를 날리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절이 가진 아득한 향수에 올해 구십이신 아버지는 코팅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신다 봄바람에 몸을 말리며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동상이몽을 꾼다 아버지의 검버섯 위로 하루살이 한 마리 노닐고 있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를 '딱' 때려잡는다. 전혀 죄의식 없이 손을 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하루살이가 코팅된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온전히 풀지 못한 시간을 잡고 싶어 한다 하루살이의 똥이 아버지 얼굴에 튀었을까 상상하는데 순간 아버지 얼굴 위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 하나 스쳐 간다. 어떤 죄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그리움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따라가고 있다.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봄바람이 얼굴에 훅 끼친다. 몸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를 날려 버렸다. 가면 같은 얼굴을 싸 앉는다. 막연한 꿈 하나 품은 채 버티고 견뎠다 낮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조금 전에 마신 커피가 받친다. 핸드백 속에서 겔포스를 꺼내 위를 도포시켰다. 도포된 위가 아득하게 코팅되는 느낌이다 사문진 파랗게 덧칠을 한 봄날의 강물은 평화롭고 빨랐다 물줄기는 곡선을 버리지 못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반짝이는 사금은 죽은 별들의 노래일 것이다 날 세운 물살이 흘러간다 물고기는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1172상세보기 -
시·시조 박재숙 - 「숲속의 버진로드」외 6편
숲속의 버진로드 박재숙 숲길을 걷는다 곁은 바람, 곁은 메아리, 곁은 아프리카, 때때로 곁은 알 수 없는 통증, 숲을 바라보는 계절의 입술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곁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 나란히 언제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덕 끝, 뱀의 혀처럼 구불거리는 아지랑이를 들었다 저 아지랑이는 어떤 술래가 흘리고 간 잔기침일까 곁에 대한 생각이 발걸음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내일로 손을 잡는다 어디까지 걸어야 마을이 나타나지? 처음 느껴보는 내 마음 같은 마을, 곁과 함께 걷다 보면 꽃바람이 금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몰려오는 불안이 눅눅하게 젖어오는 가슴 한쪽을 휩쓸고 지나간다 언뜻 보이는 옷자락 사이로 이정표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곁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 곁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별명인지 애칭인지 모르지만 곁과 함께 구덩이 속의 구더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입에서 달싹거리던 통증의 속말을 한 동이씩 담아 바깥세상에 쏟아버렸다 저 강물의 입자들은 참 곱기도 하지, 꿈이 내 안의 미끄러운 물을 버진로드에 내다 버리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살을 어루만지던 소문이 실루엣처럼 빛나고 있다 곁의 손을 잡았던 내 손이 다시 바람의 손을 잡는다 나는 누구일까 새로운 이정표가 바람 곁에 다가와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 안경학 개론 해와 달을 태초의 어두운 안경이라고 했다 신 안경 속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있었다 작자미상의 新창세기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빛을 따라가는 것을 안경 산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산책길을 따라 궤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웃음을 우주의 파장이라고 했다 쏟아진 웃음들을 주워 모으자 뜻밖에도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작정 굴러가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구르면서 반짝이는 눈빛이 되었다고 한다 목마른 눈빛의 유일한 탈출구가 동그라미였을까 구르다 보면 균열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래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다리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 다리를 와이파이라고 하지만 두 개의 동그라미가 만나면 안경이 된다 안경다리 밑에는 코가 큰 얼굴이 있다 어떤 말을 맡으려는 걸까? 얼굴은 태초의 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빛을 생각하며 세상에 꽃씨를 뿌리고 있다 꽃씨는 자라서 동그라미를 낳을 것이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나비의 날갯짓 같은 다리가 생기고 동그라미 속에 새로운 우주가 들어설 것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그것을 누구는 구슬이라고, 누구는 둥근 씨앗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다 너와 나의 비트박스 웃음 코드가 맞지 않아 투덜대는 너와 나, 우린 왜 서로를 의지하는 거니 봄이니까 이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고 약속했지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피리 부는 고양이가 유리문에 찰싹 붙어 커다란 눈을 뜨고 있는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오른편에 자리한 치킨 가게에서 보자고 했어 치킨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96상세보기 -
시·시조 황성희 - 「사거리 옛날 뻐꾸기」외 6편
사거리 옛날 뻐꾸기 황성희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 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내년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비켜 갈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치며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그때는! 이라고 외쳐 보았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드높였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대곡의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는! 그때는! 뻐꾸기처럼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커덩! 덜커덩!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이 꿈결 같은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 나는 실컷 내가 되는 재미를 누려 두려고 건너편 인도에 벗어 둔 1972년의 옷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때는! 그때는! 하고 옛날에는! 옛날에는! 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날갯짓처럼도 보였다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는 개미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이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고 나머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개미는 제림아파트 시소 안장에서 죽었고 두 번째 개미는 102동 화단 옆 소화전 밑에서 죽었고 세 번째 개미는 노인정 앞 정화조 뚜껑 위에서 죽었고 네 번째 개미는 죽을 예정이나 일단 국기 봉부터 오른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지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지만 비행기를 삼킨 애벌레는 시간 밖으로 날아오르려 했고 몸속 가득 영혼만 모은 애벌레는 선지자를 꿈꾸었으며 한 여왕개미 꽁무니가 뒤틀릴 때마다 조각달은 떨어지고 어떤 개미는 거기에다 대고 앞발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미들이 아침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죽었다던 개미 중 몇몇은 되살아나 사촌과 만나고,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린 어떤 개미는 자신의 허구성을 참다못해 더듬이 속 끝까지 뚫고 내달려 몸 밖으로 뛰어내리고 태양까지 기어갔다던 개미는 눈이 먼 채 돌아와 개미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울부짖었다 그걸 기도로 착각한 개미들이 덩달아 울부짖다 어느 날은 수천 마리씩 날쌔게 뭉쳐 고양이인 척 생쥐를 덮쳤고 어느 날은 뭉게뭉게 생각을 키워 코끼리가 되었다가 너무 긴 코에 우스워져 배가 터지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딱 중간 지점에 있었다 어디와 어디의 중간인지만 몰랐지 나머지는 다 알았다 개미가 가진 것이 개미밖에 없다는 것도 개자식 여러분 개처럼 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495상세보기 -
시·시조 이윤길 - 「잭 타르의 편지」외 6편
잭 타르의 편지 이윤길 시거의 푸른 연기에 싸여 포카를 치는 형제여. 바다는 뱃머리에 깃든 물결로 넘실거리고 바람은 리바이돈의 지느러미다. 뱃전으로 넘쳐 드는 파도로 삭구에 달린 목재블록이 밧줄과 함께 삐걱거린다. 용골이 부서지며 혈맥을 위협했다. 실습항해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침묵에 빠진 뱃사람들은 수장한 에드워드의 괴혈병은 이미 잊었다. 붉게 격노한 번개가 시에라 리온 강 벗어나자 선실로 날아들었다. 뱃전을 지배하는 것은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고 끊임없이 심장이 터지는 소리. 그러나 발가락에 힘을 주고 돛대 끝에 올랐다 사이클론의 공포와 결투했던 무용담을 소리 높여 노래한다. 형제여, 실러캔스 문신을 가진 내 형제여 면역의 문신 모리셔스 금발의 비키니를 이야기하면서도 흥분하 지 않았다. 파도는 높았으나 스웰 주기가 일정했으 므로 샤치 이빨을 벗어났다. 파도가 전혀 일지 않는 코코 킬링 섬 가까이에 가서는 곤한 잠도 잘 수 있 었다. 바람도 동남풍이었고 그 흔한 노무라깃해파리 도 보이지 않았다. 긴긴밤 인도양에서는 선장이 해 신과 흥정을 주고받듯 희망과 절망이 수평선을 스 쳤다가 사라지곤 했다. 찾아오는 바닷새도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의 아집과 만용이 툭툭 터져 온 바다 가 고요했다. 블루 홀 같은 배가 끝없이 출렁거렸다. 남적도에 매복했던 해마도 해류를 타고 멀어졌다. 전리품으로 끌려오는 한랭전선의 뒤를 따르는 적난운이 적군처럼 폭풍을 몰고 나타났다. 심연의 산호모래에선 꼬리 독침 노랑가오리가 얼굴만 내밀었다가 침잠했다. 운명에 위탁 당한 뱃머리는 파도 끝을 향해 치닫다가는 끝없이 바닥을 향해서 떨어졌다. 끌어 앉은 무릎 사이에서 한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바람을 받는 날, 사하린의 코르샤코프항에서 닻을 올리며 갑판의 눈을 쓸고 또 쓸었던 것처럼 무너지고 다시 또 무너지는 파도, 파도, 파도들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 바다는 무도하고 야만스러운 섬광 아래 하늘이 뒤틀리면서 시끄럽고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를 질 렀다. 평화스럽던 항해에 끼어드는 폭풍, 파도는 도망치는 뱃전을 후려쳤고 물보라에 쌓인 뱃머리 는 불행에 굴종하거나 악연에 순종했다. 천둥이 단 두대 칼날의 안쪽처럼 대서양 전역에서 빛났고 파 도는 싸우는 도사견처럼 흰 거품에 싸인 흰 이빨 을 번득였다. 녹슨 늑골의 비명을 집어삼킨 물짐승 일까. 선원들은 다 같이, 광기로 가득한 악마의 공 격을 방어했다. 깃털에 대한 유감 바다 위를 방황했을 뿐이지. 깃털은 허공을 장 악했고 나는 배를 탔지. 그때 나는 날개가 없었어. 강철 심장뿐이었어. 슬프게도 내려 쌓인 달빛이 무 겁다는 건 불행한 급소지. 깃털은 가벼움이야. 깃털 은 고요를 흩트리며 적막도 깨뜨리지, 내 항해에서. 내 머리를 혼돈으로 내려쳤지. 쭈그리고 앉은 머리 를 거듭거듭 내려치는 거야. 깃털이 쇠망치처럼··· 그건 끝없는 하이킥이었지. 한 방에 부어오른 뱃머 리가 얼마나 높이 솟던지. 내 눈물을, 거 봐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23상세보기 -
시·시조 조원 - 「폴리스퀘어」외 6편
폴리스퀘어 조원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오토바이의 기억, 12월 벚나무는 벽돌처럼 단단했다 악몽과 흉몽에 번갈아 머리를 처박히는 순간 도형이 어긋났다 발목 하나가 피의 양념 두르고 버스 정류장까지 튕겨 나갔다 보드를 잃은 조각들 변질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탑승하고 벚꽃 피기 전 입체 공간으로 전력 질주했다 헬멧 조각이 볼링공처럼 우뚝 선 가로수를 원 스트라이크 아웃시킬 때 봄이 찾아왔다. 빨갛게 육계를 벗어나 해체된 뼈를 온전히 끼워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회색 제복의 비둘기 구구구 사이렌을 울리며 회식을 즐겼다 강박 닫은 문이 닫힌 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닫은 문이 열린 문일 수도 있다 씻은 손에서 씻지 않은 손들이 태어난다 위쪽 구멍을 막으니 아래쪽 구멍이 뚫리고 신발, 배수구, 화장실, 혓바닥, 겨드랑이 귀신은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든다 아가미도 없는 것들이 불을 지른다. 신문을 읊는다. 쌍욕을 한다. 담배를 피운다. 노래를 부른다. 가래를 뱉는다. 음흉하게 웃는다. 입 냄새를 풍긴다. 이히히히 이승에서 저승까지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걸어서 십 분 정도? 도망가기 위해 기차표를 산다. 기차는 없고 기적소리만 귀를 짓누른다 불면과 불안이 한이불 덮고 집요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나는 몸을 버려야 하나 마음을 버려야 하나 가스와 전기, 창문과 열쇠, 시계와 손수건, 서류 가방과 냉장고, 밥통과 수도꼭지, 핸드폰과 컴퓨터 사물의 소리가 저벅저벅 공기를 가른다. 눈을 뜬다. 감는다. 다시 뜬다 물질과 의식이 한바탕 접전을 벌인다 고독한 장애 혼자가 좋다 숟가락 고봉으로 떠서 입안 가득 밀어 넣는다. 미련하게 모자, 장갑, 신발 같은 거 파묻은 지 오래 거북이 새끼는 바다로 가기 전 갈매기에게 잡아먹힌다 앵무새는 반복어를 쓰다, 예민한 주인에게 목이 잘리고 당신은 느리거나 되풀이하는 걸 참지 못한다 속으로 많은 노래를 불렀으니까 발음이 맞지 않는 말로 걸음이 맞지 않는 발로 당신의 경직된 얼굴을 피해 간다 혀가 끊기는 밤에는 숟가락에 모래를 퍼 담는다. 목이 막힐 때까지 해파리처럼 너절한 몸으로 뛰어든 바다 당신들 모두 절벽이어도 좋다 혼자 부서지는 법을 아니까 모른 척 좀 하지 말라고 정말 몰라서 그런 거니까 나는 조수간만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조율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당신의 권위가 권총보다 무섭다 한 방 쏠 때마다 출렁출렁 춤추는 포말 내 몸은 절벽에 부딪힌 파탄의 물방울이다 신혼 한 칸의 방이라도 장만하면 우리 결혼하자. 작은 방 두 개쯤 거뜬히 잉태할 수 있겠지 십 개월만 품으면 새끼 방들 줄줄 태어나고 문틀에 그네를 매달아도 우리의 방은 생명력이 강하여 튼튼하게 잘 자랄 거야 벽돌이 벽돌을 낳고 기둥이 기둥을 낳아서 초록색 지붕 환하게 비치면 넝쿨 아래 멍든 몸 숨기고 밤마다 키득키득 웃어보자 깜깜한 데서 당신과 나 상스러운 표정 지우고 개 같은 성질도 잠시 멈추고 씨앗이 문제인 거야? 밭이 문제인 거야?
작성일 2023-11-1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49상세보기 -
시·시조 이윤학 - 「루시제(祭)」외 6편
루시제(祭) 이윤학 세라마* 우리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루시의 묽은 눈곱을 정리한 물티슈 서너 장 엄지 검지로 집은 그가 머리를 쓰다듬네. 벌떡 일어나 어쩔 줄 모르고 꼬리를 흔드는 루시에게 눈을 맞추고 더듬거리는 그의 말을 바람이 전송하네. 저승에 가면 키우던 개가 제일 먼저 마중 나와 꼬리를 흔든다네. 왜 벌써 왔냐고 개는 짖지 못하고 마냥 꼬리만 흔든다네. 좀 더 가면 묵정밭이 드넓디 펼쳐진 언덕 위 평지가 나온다네. 세라마 달걀부침 같은 망초 꽃 만발한 저승의 입구에 도착한다네. 루시의 가죽 목사리 세라마 빈 우리 옆에 벗겨져 금이 가네. 언덕 위 평지 만발한 망초 꽃밭 가온에 자신을 껴안은 자세로 앉아 기다리네. * 세상에서 가장 작은 닭. 거기 앉은 섬 블라인드를 걷고 슬라이딩도어를 접어 열었지. 새벽 어스름의 정원에 엎드린 거위 한 쌍 잔설의 섬이 보였지. 반 아름의 뽕나무 밑 자갈이 드러난 맨땅에 엎드려 서로의 날개에 머리를 맞교환한 엊저녁의 일을 알아차리곤 하였지. 푸른 철망 바깥에 오늘의 머리를 넣고 살진 몸을 내둘러보는 것이었지. 아무리 맞춰봐도 우리는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 분명했지. 주인 여자는 머리를 내두르다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어 슬림 담배를 빼 물었지. 그러고는 돌아앉은 섬을 바라보며 생담배를 태웠지. 거기까지 가는 접이식 카약을 사야겠지. 거기까지 가는 동아줄을 꽈야겠지. 철심을 넣은 동아줄을 거기까지 연결해야겠지. 눈을 내리뜨고 알이 빠진 안경을 쓴 곰 인형에게 다짐을 전했지. 활주로를 이륙하는 제트기 굉음과 돌아앉은 섬 절벽으로 새벽 어스름의 파도 분수가 쏟아졌지. 너는 나를 온전히 나로 지켜내는 의지의 발로였지. 내가 어쩌지 못할 아픈 신경세포였지. 언제나 과분한 현재 사랑이었지. 둘이 가고 싶어 안달한 미래의 여름 수국 핀 언덕의 전망 좋은 전원주택지였지. 접이식 카약을 주문해야겠지. 돌아앉은 섬 앞으로 접이식 카약의 뱃머리를 몰아야겠지. 두 손으로 잔물결을 몰아내는 기도를 드려야겠지. 밤마다 거기 앉은 섬을 보고 와 눈을 붙여야겠지. 땅굴을 파고 들어앉은 당신. 문을 열고 나와 눈 감고 입 다물고 바위에 앉을 때까지, 초혼(招魂)의 피아노 연주 이어갈 수 있겠지. 혼인관계증명서 꽃사과가 익어가는 935번 지방도 딸내미가 짰지 싶은 벨벳 모자를 쓴 할메 전동스쿠터 뒷자리에 영감을 태우고 간다. 중절모를 쓴 영감. 할메 어깨께 인견 블라우스 살짝 쥐고 간다. 약 타러 도립병원에 간다. 커브 길을 돌아 나온 덤프트럭 쌍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지나친다. 잽싸게 할메 허리를 감고 찰싹 등에 붙은 영감 꼼짝하지 않는다. 벨벳 모자 날아가 굴러가다 멈춘다. 전동스쿠터 비상등을 켜고 후진한다. 할메, 지팡이로 모자를 끌어당긴다. 할메, 들어 올린 모자 잡지 못하고 다시 들어 올린다. 달달 떨린다. 시내버스 비상등을 켜고 멈춘다. 선글라스를 끼고 내린 버스 기사. 할메 벨벳 모자를 주워 씌워준다. 공터에 전동스
작성일 2023-11-1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07상세보기 -
시·시조 방윤후 - 「플라멩코」외 6편
플라멩코 방윤후 느리게 한 손이 올라간다 천천히 리듬 타듯 치마가 들어 올려질 때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왜 이 구절이 떠올랐을까 집시 여인이 딸의 손을 잡고 있다 관광객들 무심코 지나칠 뿐 기타의 선율이 챙! 울리자 아들이 일어나 춤을 추고 아버지가 그리고 딸을 옆 사람에게 맡긴 여인이 차례로 손뼉 치며 발을 구르고 노래한다 길고 긴 떠돌이 생활이 있었는지 신발 굽이 닳아 있다 격렬한 음악과 춤이 동굴 속에서 울려 나오듯 거리를 가득 메운다 사람들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고 무대 주위로 둘러선다 허리에 착 붙은 빨간 옷이 아래로 갈수록 넓게 퍼져 있다 턴할 때마다 색이 흩날린다 땀으로 범벅된 춤사위 색색의 알갱이들처럼 부챗살로 바닥에 퍼져나간다 박수가 잇따르자 크리스탈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사파이어의 땀방울들 내딛는 발걸음마다 흩뿌려진다 플라멩코를 출 때만큼은 가난도 슬픔도 기쁨도 스텝 안에 있다 착착착! 女人은 나이 어린 딸을 안고 가을밤처럼 차게 춤추었다 어린 딸은 장미꽃이 좋아 한아름 웃었다 * 여승(女僧): 백석 시인의 시 어쩌다 창밖전(展) 아파트 2층 베란다에서 내다본 오후 세 시 풍경 또 하나의 아카이브*다 저 햇볕의 뉘앙스, 그림자로 드러나 있다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통과할 때 시간은 허물어진다 눈부신 미래가 기억으로 찾아온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나무는 산수유나무 잎을 색으로 번역해 빛의 입자를 해체 조립한다 나는 여기서 계명을 찾는다 1) 예술은 지워져 머릿속에 남는다 2) 판단을 멈추면 가치가 드러난다 3) 두려운 것은 실수와 실패가 나를 떠나는 것 4) 시련을 주목하라 즐겨라 나무 그림자는 서로 섞이고 선택하고 스스로를 극복하고 있다 예술은 어쩌다 작동되는 것이니 나의 설치물들 나만의 전시작들 새롭고 산뜻하다, 창의적이다, 푸르고 싱싱하다 바람이 불자 창밖 풍경이 두 번째 개인전으로 디스플레이하고 있다 * 기록이나 문서를 의미하는 '보존 기록'이라는 의미 울음이 틔운 웃음 호스피스 병동 강당, 웃음 치료 강연이 한창이다 울었던 얼굴이 웃는 얼굴 되는 동안 창밖 배롱나무꽃들이 틔워진다 여름도 감정의 한통속이라고 환자와 가족들, 신나는 노래와 춤에 하하하 히히히 호호호 까르르 제각각 웃음 개화 속도가 다르다 그렇게 웃다가 눈물이 질금거리는 건 병(病)도 몸 밖으로 마실 나와 길을 잃는 것 말기 암 이정표 끝에 어느새 들녘이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르게 지저귀는 새들 꽃들은 향기 좋은 기억을 불러 모은다 농담으로 시작해 농담으로 끝나지만 괴로움이 행복에게 옮는 시간 그리 우습지도 않은데 찔끔찔끔 눈물을 저리는 사람들 물렁하게 짓무른 자리에 웃음이 맺혀 있다 무덤 속, 고인 울음도 나무들 뿌리가 겨드랑이 간질이면 웃음이 핀다 사랑은 서로에 걸쳐 핀다 볕 드는 요양원 화단에 휠체어가 나와 있다 그녀가 싱크홀 같은 눈빛으로
작성일 2023-11-1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8상세보기 -
시·시조 명은애 - 「구메밥」외 6편
구메밥* 명은애 그는 늘 강의실 뒤 끝자리에 앉았다 함께 섞이는 호흡과 분리되고 강의와도 무관한 모습으로 창밖을 보며 바람 뼈 자라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해진 청바지에 낡은 군화 멋지지 않았으나 멋지게 내 동공을 빛나게 했던 그는 점심시간이 되면 벚꽃과 눈 맞추며 밥을 술 마시듯 삼키고도 취하지 않았다 니체를 눈에다 스케치하고 바람에 쓸리는 낙엽에 솜털 세우며 강의실에서 식당까지 걸음 수를 세던 철학 노트가 최루탄에 젖던 날 그는 학장동 벽돌 담장 안에 발자국을 가뒀다 삼월이 시월로 뜯긴 날들은 복원되지 않고 학우들이 넣어주는 구메밥*에도 손에 잡히지 않는 선배 빈 도시락은 내내 취하지 않았다 * 구메밥 :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벽 구멍으로 몰래 들여보내는 밥. 포노시트* 사천 서포 해안 그늘집 사그락담 너머 들려오는 가락은 청도댁 정수리에 달이 걸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창문 높이만큼 쌓인 이력 턴테이블 바늘 등뼈가 달빛에 휘고 농아인 그녀 눈에 남편 것인지 그녀 것인지 모를 닫힌 가사들이 쌓인다 궁핍한 생활에 입술은 허기져도 노래가 밥 인양 배불리 듣던 남편이 어느 날 노래 한 장 옆구리에 낀 채 집을 나갔다 소리 없는 그녀 절규에 문풍지 스미던 바람도 숨을 죽였다 둘레를 잴 수 없는 검은 몽우리를 품고 산 지 오십 년 그녀는 남편이 모아둔 포노시트*를 보며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소리 나이테에 쌓인 먼지만 닦는다 * 포노시트 : 보통의 레코드판보다 얇고 부드러운 비닐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음반 은행알로 남기 서면 문화로 은행나무 아래 발걸음이 향기를 피한다 어깨를 움츠리거나 날 선 까치발로 은행나무와 도피 거리를 만든다 여름내 햇살에 쌓아온 순결이 노랗게 숙성되는 시월 나무는 만삭을 풀기 시작한다 갈마바람 빌딩 숲을 손에 쥐고 해코지에 떨어지는 은행알 숨이 가쁘다 밤새 쌓인 지독한 저주는 해독되지 않은 모스 부호를 띄우고 새벽을 닦는 미화원 싸리비에 발굴된다 손끝에서 살 털리는 시린 알들 눈시울에 황달이다 해미 깊은 날 추자도가 기침 포말에 잠긴다 파도가 치지만 섬은 흔들리지 않는다 집어등 따라가는 갈매기 등 뒤로 기척 없이 저물녘이 온다 그늘진 하늘에서 낮달 부스러기 손등에 떨어지고 밤은 멀었지만 눈을 뜨면 눈썹 자락에 초승달이 자란다 등대 동공을 밝히자 뱃길 지워진 물 위를 냉갈시럽게 걷는 검푸른 갈피가 갯가에 소금 비늘을 떨군다 하늘을 향해 바다는 넓게 눕고 나는 좁게 목을 뺐다 발 묶인 선창에 혀를 비비자 수평선 너머로 돌아오지 못할 비늘이 빠져나간다 추자도는 얼굴 큰 부표다 은행나무 낙서 떨어진다 몸부림치다 떨어진 냄새 하나 은행알이다 울음을 박제하면 두엄 향 짙어지고 그림자는 젖은 바닥에서 마른다 물든 잎 불국사 디새 틈에 낀 잎 하나 은행잎이다 발톱을 버리고 발자국도 지운 채 어둠에 지워지는 햇살 갈피를 놓지 않는다 사랑한다 다시 한번 만날 듯한 사람 있어 은행잎에 이름을 새긴다 갱지 같은 사랑이라도 남아 있다면 물든 잎 옆구리 찔러보고 싶다 노을을 입다
작성일 2023-11-1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10상세보기 -
시·시조 김태희 - 「사막의 유랑(流浪)」외 6편
사막의 유랑(流浪) 김태희 바람의 꼭대기는 지루한 비명이다 끝없이 자라나는 사막의 나이테도 인간의 목소리 아닌 오로라의 누명(縷命)이다 모래에 묻혀있던 밤하늘의 별을 보고 은밀한 허기짐이 달려오는 신기루도 멍울진 환부 속을 나는 휘파람의 눈빛이다 어둠의 근친들로 숨어들던 지문들이 누웠던 흔적 위로 예감처럼 가려웁다 그리운 감염으로 덮인 캐러밴도 유랑이다 아! 병목안 삼거리에서 영하의 소매 끝에 설렘을 꼭 쥐고 선 병목안 삼거리는 그리움을 앞에 둔 채 어디서 첫사랑 한 소절 눈발처럼 나부껴 머리엔 눈을 이고 도톰한 옷 펄럭이는 아~ 아! 저 멋쩍은 웃음까지 기억하며 무동 탄 눈송이처럼 걸어오는 발자국 떨리는 헛기침에 발만 동동 구르는데 창박골 어디선가 분홍빛의 함박눈이 별안간 뜨겁던 가슴 속 동백처럼 벌어져 초원의 문장 새끼가 어미의 몸 그 밖으로 나온 순간 표범에게 목덜미 물어 뜯겨 축 늘어진 평원에 초식동물들 탄생이자 죽음이다 한 줄의 문장처럼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이 간결한 초원 위에 그려지는 생명의 녘 정박한 동물의 세계 삶의 트림 쿵쿵거려 한 발짝 뛸 적마다 그 등을 밟고 가는 세렝게티 누와 얼룩 심장 소리 펌프질에 먹잇감 혼비백산한 눈빛들이 잘려간다 토렴 국밥 오래된 주인장의 국자 질이 어설프다 한 번을 퍼 담고서 인심 좋게 또 퍼담아 몇 번을 담았다 쏟기를 반복하고 또 한다 모르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의아하고 퍼주기 아까워서 그러는 듯 보이지만 익숙한 풍경으로는 그 모습이 정겹다 추운 날 국을 풀 땐 할머니가 그랬듯이 이 동작 익숙한 걸 나중에야 알게 되고 음식을 먹기에 적당한 온도에다 맞춘 비법 세월 속 저만큼을 나앉은 오늘에도 그런 날 기억으로 남아있는 토렴 국밥 뚝배기 밥알과 국물에 식지 않을 뽀얀 기억 능금 꽃 희망 산비알 그 아래서 꽃향기로 그윽하던 외로운 가지 끝은 들새 떼 날아 앉아 하이얀 꽃잎 슬하에 피어나는 새순 소리 해 뜨면 북을 주고 해지면 꿈을 꾸는 해 고름 시작으로 애면글면 길어 올려 까맣게 그을려 피운 햇살 먹인 옹알이들 팔월의 뙤약 이고 동동 달군 단물 소리 하늘이 땅에 묻은 비바람과 엉긴 세월 초록서 익혀낸 날은 또 한 생을 길러 낸다 산골짝 주렁주렁 매달리는 저 포만감 그리움 포개오는 빨간 색의 동요 소리 옹골진 사과나무 꿈 쌓이도록 흥겨워라 매화, 저 바보 같은 꽃 얘기 이전에 열아홉 때 바람난 처녀같이 2월의 추위 속도 모르고 피워낸 꽃 어쩔까 철딱서니 없이 한껏 뽐낸 저 바보 꽃 그래도 새벽녘의 찬 공기 갈라놓고 조그만 꽃봉오리 터뜨린 용기 앞에 반가운 마음도 들고 애틋함도 나부끼고 한참을 혼잣말로 내 얘기 들려준다. 네 아래 울 엄마가 시집와서 봄을 맞고 예순 해 매실처럼 익다 또 하얗게 가셨지
작성일 2023-11-08 작성자 김태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62상세보기 -
시·시조 박기동 - 「합창」외 6편
합창 박기동 일제히 모은 입이 닫히지 않는다 저마다 목을 내민 하나같은 발성법에 바다를 들인 산길은 시끄러운 계절 할 말이 없어지면 없는 말 만들어서 다 하고 없을 때는 했던 말 또 하는 입술이 그린 원형은 황태들의 화법이다 떼를 지어 내미는 그들만의 창법 역시 동그란 입짓대로 발음하고 따라 불러 덕장을 가득 채운 O와 O의 집합들은 가장 잘 들리는 잡담으로 남았다 녹다가 다시 얼다 동해물 다 말려서 열어 둔 채 굳어 가는 서로는 둘레를 구하는 원의 형식 더러는 거품 같은 헛소리도 영원을 발음하니 못 다문 입버릇엔 완창이란 말이 없다 그저 어디서나 어울리는 화음으로 미시령 고음부를 쉴새 없이 넘나드는 삼사조의 운율 따라 도달한 삼한사온 비탈에 울려 퍼지는 눈보라를 따라간다 말라서 굳어 가는 혼잣말도 함께 한다 비행紀 계단을 애용하는 다이어트 의지는 적정량 초과치로 진땀을 소비한다 덕분에 승강기보다 쥐라기에 먼저 갔으나 줄어든 먹이를 찾아 오른 등마루였다 늘어난 행렬 탓에 금지된 난간이 되고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도약대로 남겨진 옥상이 준비했던 바람은 가벼웠나 줄지 않는 살에 절제술을 동원했듯 감량에 적용된 칼은 계체량 통과를 도왔고 활강은 신생대를 연 시발점이 되었다 때문에 계단은 무럭무럭 자라나 추락은 감원설을 주도한 업적이 되었다 늘어난 허기와 줄지 않는 크기 사이 수각류* 공룡들을 조류로 분류시킨 지금은 석탄기(紀)에서 페름기(紀)를 지나온 * 이족 보행을 한 용반류 공룡 종이접기 배가 된 책은 동화에서 만든 상상 건너편을 만든 강에 들면 독자를 미치게 만든 마법도 통할까 책이든 강이든 빠져도 몰라 동심으로 돌아간 어른이 돌아오지 않는 저녁은 어른을 찾으러 다녔다 젖어서야 돌아온 밤은 걸어서 건넌 강을 읽었는지 얼마나 빠져야 강을 건널 수 있는지 찢어 낸 페이지는 배가 되어 떠나지만 자꾸만 가라앉는 현실의 항로를 만나야 했다 먼저 먹은 나이가 짐이 된 아이에겐 항해를 거부한 이상한 물길이라 배가 된 페이지를 강이 읽었다면 멈춰진 성장을 알릴 수도 있을 텐데 먹어 버린 나이엔 회항이 없다 책 밖을 흐르는 강은 어려워 나이 든 종이접기는 미쳤다는 말만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싫은 날들은 난파선이 되었다 배를 만들다가 새가 되었다 강이 읽은 페이지 탓에 펄럭이는 여울은 넘기는 책장에서 날갯짓을 보았을 터 날아가는 배를 만드는 건 동화 밖에서도 가능한 상상이었다 배라고 우기던 페이지가 새라고 불린 나날 침몰은 날개 달린 배의 출현을 알렸고 둑을 높인 범람은 어른을 데려갔다 미치는 데 참고가 된 책들은 남아 있어 들려줄 게 많아진 강과 강의 저녁은 어른을 싣고 돌아올 비행기를 날리고 수렵 구역 감자의 행선지를 알리는 게 나았을까 멧돼지의 수소문에 찢어진 봉지는 담은 적이 없던 감자를 말할 수는 없었다 담는 게 목적이던 봉지의 입장에선 가리킬 방향보다 봉합이 우선인데 봉지는 담은 적이 없던 멧돼지를 쓰레기로 인식하지 못했다 당장 쫓기는 신세가 된 멧돼지에겐 팔려 간
작성일 2023-11-0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23상세보기 -
시·시조 이향란 - 「아름다운 병」외 6편
아름다운 병 이향란 어쩌겠어, 그러지 않으면 나무는 썩어 땅속을 떠돌다 이무기가 되고 강물은 느닷없이 물고기가 되고 당신은 나로, 나는 당신으로 변할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못한 기억들이 돌멩이가 되어 이리저리 차이는 걸 거야 내가 뭘 가지러 부엌에 왔지? 그토록 철학적인 질문에 박수를 보내면서 생각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왜 왔지? 라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금방 한 말을 또 하는 사람 곁에서 금방 들은 귀로 또 들어주는 이런 반복의 오류 속에서 우리는 맑고 깨끗하게 씻기는 건지도 몰라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애타게 묻는 당신의 질문은 수시로 까무룩 당신을 잊는다는 것 그러니 괜찮아 전화기를 들고 전화기를 찾는 것 방금 한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처럼 또 하는 것 어제는 모르고 부재중인 지금만 아는 것 활짝 활짝, 이라는 말 더 이상 필 것 없이 눈이 부신 말 허공과 부재의 정수리가 팽팽하게 맞닿아 주름 없이 편편하게 펼쳐진 말 첫눈이 내리던 기억 속의 그 아침처럼 그저 눈부시고 그저 아름다워 마른입 속으로 침만 조용히 삼키게 되는 말 여러 개가 겹겹으로 어우러지면서 둥글둥글 얇게 빚어지면서 절정의 첨탑으로 치솟다가 팡! 끝내 눈물을 쏟게 하는 말 나비의 가벼운 행보와 뒤척이던 새벽꿈의 향기와 이슬의 차가운 전언이 어우러진 꽃잎들의 얇고 넓은 전용어 빛의 옹이 눈부신 것의 껍질을 벗기면 그 속은 무지막지한 어둠이라는 걸 나는 몰랐지 빛나는 건 빛나는 속성으로 줄곧 반짝이는 줄만 알았지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 빛날수록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거 태양의 흑점 눈부심 속에는 길이란 길 다 날아가 버리고 절뚝거리는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는 거 말할 수조차 없는 무진장의 밝음 뒤에는 상처투성이로 앓아누운 깊고 깊은 어둠이 있지 감히 헤쳐 볼 수 없는 그러므로 그 밤의 불빛은 날카롭지 잘못 건드렸다가는 찔리거나 데이고 말지 광활한 빛이 오래도록 키워온 바로 그게 깊숙이 박혀 있으니까 수면水面의 완성 넘치고 가라앉기를 닳도록 반복했다 밀고 당김으로 탄력까지 키웠다 아무것도 아닌 건 놓아주었다 물빛 체념으로 누웠으나 잠에 젖지 않았다 바람이 역류를 부추기며 일으켜 세우려 하고 슬픔의 소용돌이를 심으려 했지만 마음의 소리만 몇 번 다녀갈 뿐 아무 소요도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날카로운 눈빛의 새가 윤슬을 쪼아대도 엉키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찢어지거나 깨지지도 않았다 물비린내가 요동했지만 씻지 않고도 깨끗해졌다 들러붙고 던져진 것들을 잔잔히 띄웠다 만져지지도 만질 수도 없는 살갗으로 차갑게 오래 버티었다 찰랑거렸으나 꼼짝하지 않았다 배후는 언제나 물의 뿌리였다 시인의 장례 짧고 간결하게 그녀의 부고가 도착했다 시인으로 태어나 시인으로 살던 그녀가 저 세상으로 갔다고 고개 숙이고 있던 그녀의 시들이 웅성대며 하나둘 일어서더니 시집의 문을 열거나 문예지의 표지를 들추고 나와 검은 예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녀의 시들이 한 행으로 나란히 선다
작성일 2023-11-0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12상세보기